생활/문화 > 문학 > 칼럼 / 등록일 : 2019-08-17 10:17:29 / 공유일 : 2019-08-17 11:10:39
<독자기고>조강봉의 울릉도, 독도의 역사와 지명 연구(7)
于山이란 이름...울릉도와 독도 포함한 개념으로 계속 사용되어 왔다!!
repoter : 조강봉 ( yug42@naver.com )

(3) 일본 자료

연도

도서 및 문서와 지도

울릉도

독도

1693

안용복 사건 기록

竹島

松島

1751

기따구니 미찌앙竹島圖說)

竹島

松島

1775

長久保赤水, 日本輿地路程全圖

竹島

磯竹島

松島

1785

하야시시헤이林子平

三國接壤之圖

동해 가운데 섬 2개 사이에 竹嶋를 표기한 후(朝鮮)

三國通覽圖說附圖5장중

1朝鮮八道之圖

鬱陵嶋 千山國

 

1787

-1797 프랑스 영국이

조선가까이

다즐레 죽도

서쪽 먼바다,

아르고노트, 송도

1823

大西敎保가 은주시청합기를

수정 증보한 隱岐古記集

竹島

松島

1835

淸朝一統地圖(4개 그려짐)

(鬱陵)

竹島

(子山)

松島

1854

러시아 동해얀 실측

아르고노트가 실제섬아님 밝힘

1867

大日本防正全圖(隱岐 북쪽 두섬)

두 섬사이에竹島표기

1870

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

竹島

松島

1873

일본 海軍水路寮朝鮮全圖

于山島

蔚島

1876

일본 육군참모곡朝鮮全圖

竹島

松島

1876

일본海軍水路寮朝鮮東海岸圖

 

 

1877

일본 내무성이 태정관에 제출

日本海內竹島外一島地籍編纂方伺

竹島

外一島

<이하 표 생략>

2) 獨島 지명 검토

  위의 자료를 중심으로 문서나 지도에 표기된 獨島의 이칭들이 12개나 된다.

우리는 獨島의 명칭을 선인들이 ‘于山島’라 칭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于山島’는 본대 울릉도를 칭하는 ‘于山國’ 이름이었기에 혼동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于山國은 신라가 정벌하여 없어졌지만 于山이란 이름은 울릉도와 독도를 포함한 개념으로 계속 사용되어 왔다. 울릉도는 亏陵, 亏陵 武陵, 茂陵 등으로 표기되었고 獨島는 于山島로 표기되었기 때문에 독도와 울릉도의 명칭에 혼동이 야기되었다.
 

        (1) 우리나라의 자료

    ①  于山島 (고려사, 세종실록, 八道全圖)
 

  獨島는『고려사』地理志와『世宗實錄』地理志에서 ‘于山’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에 대한 원문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鬱陵島 在縣正東海中 新羅時稱于山國 一云武陵 一云羽陵 …중략…一云于山武陵本二島 相距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 (『고려사』권58, 地理志) “于山武陵二島 在縣正東海中 二島相去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 新羅時 稱于山國 一云鬱陵島” (『世宗實錄』권153, 地理志)  위에서 “于山과 武陵은 본래 二島로서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청명한 날이면 가히 볼 수 있다” 하였다.

이는 당시에 분명히 ‘于山武陵’은 鬱陵島와 獨島를 지칭한 것이다. “날씨가 맑으면 볼 수 있다”는 기술에 부합되는 섬은 獨島와 鬱陵島 밖에 없기 때문이다.

  獨島가 처음으로 그려지고 또 지도에 獨島를 ‘于山島’로 표기한 우리나라의 지도는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부속 지도인「八道總圖」(강원도편)이 있다. 이 지도에는 울릉도와 함께 그려졌는데 獨島는 ‘于山島’라 하여 鬱陵島보다 서쪽에 그려져 있고, 1868년 이후 제작된『八道全圖』는 道里圖表에 수록되어 있는 6장의 道別 道里表와 함께 구성된 지도첩이 있는데 이 지도에서도 獨島를 ‘于山島’로 표기하고 있으며, 1908년 대한제국에서 발간된『증보문헌비고』에서는 “鬱陵于山 皆于山國地 于山則 倭所謂松島也)”이라 하여 獨島를 于山이라 표기하고 있다.
 

    ②  子山島 (肅宗實錄의 안용복 渡日 기록)

  1696년 안용복이 武陵島에 갔다가 왜인의 꼬임에 넘어가 일본을 건너간 후 일본의 正官 귤진중과 함께 돌아온 후 제2차로 渡日하기 작전 울릉도에 들렸는데 왜인이 울릉도에 와서 정박하여 있으므로 안용복은 너희들은 왜 우리 地境을 침범하였으니 포박 하겠다고 말하자, 왜인은 “우리는 본래 송도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를 잡으러 나왔으니 다시 本所(松島)로 가겠다”고 대답하므로 안용복은 “松島는 본대 우리나라의 子山島로서 감히 거기에 사는가” 하고 꾸짖고 그들을 쫓아 子山島에 갔다는 내용을 실록에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獨島를 子山島라 부른 기록이다.

  그러나 子山島의 ‘子’는 于山島의 于자를 ‘子’자로 잘못 인식하여 ‘于山島’를 ‘子山島’라 부른 데에서 생긴 오류가 아닐까 생각한다.
 

    ③ 石島 (1900년 고종황제 칙령 제41호)

  대한제국 광무4년(1900) 10월 24일 의정부회의는 내무대신 이건하가 제출한 ‘鬱陵島’를 ‘鬱島’로 개칭하고, 島監을 郡守로 개정하는 請議書를 의결하였다. 고종황재는 의정부회의에 따라 결재하고 대한민국 칙령 제41호를 10월 27일자 관보(제1716호)에 게재하여 공포했다. 칙령 41호는 모두 6조로 되어 있다 

  그 중 제1조와 제2조를 들면 “제1조 을릉도를 울도로 개칭하여 강원도에 부속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여 관제 중에 편입하고 군등은 5등으로 한다”이고, “제2조 군청 위치는 태하동으로 정하고 구역은 鬱陵島와 竹島 石島를 관할한다”이다.

 이렇게 울릉군의 관할구역을 鬱陵全島와 竹島, 石島로 선포했는데 이때의 石島는 獨島가 흙이 거의 없는 바위로 이루어졌으므로 불린 이름이다.
 

    ④  獨島 (황현의 매천야록)

  1905년 1월 28일 일본 閣議에서 中井養三郞의 청원을 받아들이는 형식을 빌려 “독도는 주인없는 무인도(無主地)로서, 다케시마(竹島)라 칭하고 일본 島根縣 隱岐島司의 관할하에 둔다”고 일방적으로 결정한 후 2월 22일 일본 소위 「시마네현(島根縣)고시 40호」를 날조하여 국제법상 無主地先占에 있어 ‘영토취득의 국가 의사’라는 요건을 모두 충족시켰다는 합법성을 가장하였다. 그러나 이 고시는 실제 고시되었다는 증거가 없는데도 5월 17일 일본 독도를 官有地로서 시마네현 토지대장에 등재했다.

  이어 11월 9일 독도와 일본 시마네현(島根縣) 마쯔에(松江) 사이에 해저전선 부설되고. 11월 17일 일본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완전 박탈했다.

  1906년 2월 1일 統監府와 통감 휘하의 理事廳이 업무를 개시하여, 대한제국은 일본 통감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3월 28일 島根縣 제3부장 神西由太郞과 隱岐島司 東文輔 등이 울도(鬱島)를 방문하여 울도군수 심흥택에게 독도가 일본영토가 되었으므로 시찰차 왔다고 하므로 심흥택은 다음 날 강원도 관찰사 서리인 춘천군수 이명래에게 “本郡所屬 獨島…”로 시작되는 긴급보고서를 올렸으며, 이명래는 4월 29일 이 내용을 내부와 의정부에 보고하니 내부대신 이지용은 “독도를 일본속지라고 칭하는 것은 전혀 이치가 없는 것이니, 지금 이 보고한 바가 심히 아연할 일”이라 하였으며, 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은 “獨島가 일본영토라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며, 독도의 형편과 일본인의 동향을 다시 조사해 보라”는 지령을 보냈으며 9월 24일 鬱島郡을 강원도로부터 경상남도로 이속시켰다.

 이 때 정부뿐 아니라 언론과, 지식인들은 격분해 이 사실을 널리 알렸는데「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는 심흥택 군수의 보고서 전문을 기사로 실어 중앙정부(내부)가 “전혀 이치에 맞지 않으니 심히 아연한 일”이라 지령했다는 사실을 보도했고, 구한말의 대표적 지식인 황현은 그의 저서『梅泉野錄』에서 “울릉도 100리 밖에 속도가 하나 있어 獨島라고 부르는데, 일본인들이 지금 일본영지가 되었고 심사하여 갔다”며 격분했는데 이 때 獨島라는 이름이 쓰였다. 

  ‘獨島’는 본래 이 섬이 돌로만 이루어졌으므로 1900년 고종황재의 칙령에서 그 명칭을 ‘石島’라 부르도록 정했는데 ‘石’의 훈이 ‘독’이므로 우리말 ‘독’을 한자로 표기하며 ‘獨’자를 빌었기에 생긴 지명이다. 그러므로 獨島의 어원은 ‘독’(표준어: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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