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문화 > 문학 > 칼럼 / 등록일 : 2019-11-06 21:58:20 / 공유일 : 2019-11-06 22:16:37
<강대의칼럼> 현암 이을호선생의 기념비 상념(想念)
한국학 연구에 독보적 업적 ‘한국학의 아버지’ ...수은강항선생과 세대를 초월한 '인연'의 끈
repoter : 강대의 ( yug42@naver.com )

6일 내산서원의 추향(秋享)제에 따른 자유학기제 수업을 제안하기 위해 공문을 들고 영광공업고등학교를 찾아 가 조병수 교감선생님과 역사담당 선생님 그리고 강대열 수석교사를 만났다.

 

모두 이 지역출신으로 선입관(先入觀)이 없어서 편했고 더 나아가 거리감이 없어 격의 없이 인사를 나누며 편하게 대화를 가졌다.

 

사실 아무리 어려운 일에 봉착하더라도 이런 마음가짐을 갖고 서로를 배려하고 살피면서 사회생활을 한다면 그게 걸쭉한 인성(人性)교육 차원이 될 것이라고 불현 듯 생각해 본다.


다산 정약용선생의 사상을 조금만 들여다 보면 답이 나온다.  수은선생의 일본에서 간난신고를 거치면서 불굴의 투지로 쓴 적중봉소나 간양록을 참고로 해 일본을 해부하고 그를 토대로 실학사상을 부단히 연구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다산선생의 시대는 정치적으로 폐단이 많았고 특히 지방관리들의 부패가 심했는데. 그들의 부패를 지적하고 그들의 임무를 알려주고 일깨워주는 목민심서라는 책과 경세유표라는 책을 지었다.

또한 형법. 즉 범죄인을 다스리는 흠흠신서도 참고해 볼만하다.
이처럼 사회질서는 첫째가 명분이고 둘째도 명분이다. 조그마한 아집이 문제를 키우고 거리감을 갖게하고 질서를 교란한다.

이러한 사회질서는 인성교육에서 출발이 된다. 조금이라도 지나침이 있게 되면 불편하고 부당하겠지만 학생을 먼저 생각하고 학교를 생각하고 지역을 생각한다면 쉽게 답은 나온다.

 

현암(玄庵) 이을호 박사

배웅 나오던 강수석교사가 먼저 안내를 하면서 보여준 곳이 있었다. ‘영광 중등교육 발원지’ 표비석이 세워져 있는 곳이었다.

 

현암 선생의 수은선생에 대한 연구는 심오한 깊이의 인연으로 생각한다. 어쩌면 책 한 권인 간양록(건거록)의 운명같은 인연일 수도 있고 한국전쟁의 모진 시대상(時代相)에서 출발이 기인(基因)될 수도 있다.

 

그러나 후대로 가면서 생각하는 게 앞에서 밝힌바와 같이 “사실 아무리 어려운 일에 봉착하더라도 서로를 배려하고 살피면서 살아간다면 그게 걸쭉한 인성(人性)교육으로 인간다움이 될 것”이라는 변치 않는 생각이다.

 

‘영광 중등교육 발원지’ 기념비를 보고 쉽게 흥분을 멈출 수 없었다. 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에서나 영광내산서원보존회에서 매년 나오는 말이 현암 선생에 대한 의견이 꼭 도출(導出)되었다.

 

특히 영광읍 우산공원에 건립된 표지석에 대해 내산서원 경내를 조성해 추가 건립 또는 옮겨오는 방법을 놓고 의견이 분분했던 것도 사실이다.

 

흥분을 가라앉히면서 천천히 전후측면을 살피고는 전면의 글을 읽어봤다.

“1945년 조국의 광복과 함께 이 고장 정주연학(硏學)회를 발족하고 영광민립고등중학교와 영광민립여자고등중학교를 개교하였다. 이 교정에 자리했던 민립고등중학교는 영광중학교와 영광고등학교로 성장하고 고등학교는 종합고 실업고 공업고등학교로 발전하였다.

한편 민립여자고등중학교는 영광여자중학교와 여자고등학교로 이어졌다.
민립학교를 건립할 때 이을호(현암(玄庵)1910~1998)는 전답 9만 여 평과 벼 1천섬을 출연하여 학교를 열게 하였고 1969년에도 논밭과 임야 6천 여 평을 기증하여 후세교육을 보살핀 학자로서 ‘현암 이을호 전서’ 27책을 남겼는데 현암길은 선생을 추앙 한 것이다.

이 교정은 영광의 현대중등교육이 발원한 유서 깊은 곳이다. 이제 우리는 선현들의 높은 뜻을 기리고 미래 문화의 창달에 힘써야 할 것이다.“

 

현암 선생과 내산서원

1952년 현암 이을호(李乙浩)의 한글 역 초판 『간양록』이 간행되었다.

1983년 癸亥(계해) 五月(오월) 國立光州博物館長(국립광주박물관장) 哲學博士(철학박사) 李乙浩(이을호) 謹撰(근찬) 향토문화개발협의회장 鄭埰均(정채균) 謹書(근서) 睡隱姜沆先生記念事業會(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 謹竪(근수) 睡隱姜沆先生記念事業會(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창립한 이후 영광내산서원보존회 창립해 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와 내산서원 성역화사업에 전력을 다 하시었다.

 

더 나아가 전남영광지역에 ‘중등교육’의 씨를 뿌린 현암 선생의 뜻을 기리는 기념비가 영광교육지원청과 영광공업고등학교는 지난 10월 28일 오후 영광공고 교정에서 ‘영광 중등교육발원지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던 것이다.

 

제막식에는 이개호 국회의원, 김준성 영광군수, 강필구 영광군의회 의장을 비롯한 군의원, 교육관계자들과 현암선생의 장남인 이원태 금호아시아나그룹 부회장을 비롯한 당시 민립학교 교직원 유족들이 참석했다고 강 수석교사는 전했다.

 

현암 선생은 ‘간양록 및 강감회요’를 비롯해 수은 선생의 저서와 문집 등 ‘일본 유교의 비조’ 연구에 그치지 않고 현암이 독보적으로 남긴 현암 이을호 전서’는 현암의 학문적 업적을 후학들이 집대성한 것으로, ‘다산 경학사상 연구’ 등 다산 정약용선생의 연구서부터 ’목민심서‘‘한글 논어’‘사상의학원론’ 등 고전 번역서까지 저서와 역서를 총망라했다는 평가로 현암은 근현대사의 격변 속에서 민족이 나아갈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결어>

이 지역을 떠나 ‘한국학의 아버지’인 현암 선생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에 대한 업적을 면밀히 살펴보고 수은선생의 제자인 동토 윤순거선생을 기리듯 선양사업의 맥락을 함께 진행해야한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경찰서장이 앞장서서 ‘일본을 개나 돼지보다 못한 족속으로 비하했다’는 이유만으로 수은선생의 문집 등이 모두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맞이할 때 일부 종친들이 온몸으로 지켜내기도 했지만(80여점의 유물을 호남진흥원에 위탁중임)현암선생이 앞장서서 수은선생의 선양사업을 불씨를 다시 지핀데에 대한 학술대회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수은선생의 말씀처럼 유성약천성부(幼成若天性賦)의 정신으로 성선설(性善說)의 원칙에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았으면 그 은혜를 아는 인간이 되고자하는 모습이 보인다는 것은 아름다운 미풍양속(美風良俗)이 되고 남음이리라.

 

<현암 이을호선생의 약력 소개>

전남 영광 출생, 중앙고보를 거쳐 서울약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중앙고보 때, 東武 李濟馬의 제자로 부터 사상한의학을 공부하고 [동의수세보원]을 번역하여 최초로 사상한의학설을 체계화시켰다.


24세에 영광에서 한약국을 운영하면서 「조선일보」와 [동양의학] 논문집에 의학 및 약학에 관한 많은 논문을 발표하고 민족운동에 투신하여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27세에 영광체육단 사건으로 체포되어 독립운동을 주동한 혐의로 2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서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를 접하고 한국실학사상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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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세에 광주의과대학 부속병원 약국장에 취임하였다. 49세에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후학을 양성하면서 정약용 연구에 전념하여 다산학을 체계화시켰다. 58세에 서울대학교에서 「다산경학사상연구」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한국학 연구에 독보적 업적을 남겼다.

정년퇴임 후, 광주박물관장에 취임하고 호남의 유물, 유적을 발굴하여 호남의 사상과 문화를 새롭게 정립하였다. 학계에서는 선생을 ‘한국학의 아버지’로 부른다.

저서로는 [이을호 전서] 24권 9책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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