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문화 > 문학 > 문학행사 / 등록일 : 2019-11-16 19:36:51 / 공유일 : 2019-11-16 20:35:07
"忠孝里" 제 230+1주년 "行事"
김덕령장군 태어난 석저촌 충효의 고을이라하여 충효리로 명해
repoter : 이 은 ( yug42@naver.com )

"國家에서 명해 붙여진 지명 "忠孝里"

충장공 김덕령(忠壯公 金德齡 ;1567~1596년)은 1568년 (선조 원년) 12월 29일(음)(문중에선 1567년생  주장) 광주시 충효동(옛 석저촌)에서 아버지 김붕섭(金鵬燮)(또는 김붕변으로 문중  의견)
과 어머니 남평반씨 사이에서 6남매 중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월 형 덕홍(德弘)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수백의 군사를 이끌고 고경명과 함께 전주까지 진군했다.

그러나 형에 의해 곧 바로 귀가하여 노모를 봉양하였다. 그 후 형 덕홍은 의병장 조헌(趙憲)이 이끈 금산(錦山)싸움에서 전사하였으며 이듬해 8월에는 노모마저 세상을 떠났다. 장군은 아우 덕보(德普)에게 집안을 맡긴 다음 담양부사 이경린과 장성 현감 이귀 등의 천거로 선조로부터 형조좌랑(刑曹佐郞)의 벼슬에 임명되었다.


1596년 8월 장군을 시기하는 이시언(李時言간)과 김응서(金應瑞) 등이 장군을 이몽학의 반란에 가담했다는 모략으로 투옥되어 20여일간에 걸친 6차의 형문(刑問)과 수백회에 달하는 혹독한 고문으로 정강이 뼈가 부러지고 몸의 피부는 완전히 벗겨진 끝에 9월 15일 29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다.

제230+1주년 "行事"
김덕령
장군에게 충장공 시호가 내려지고 장군이 태어난 석저촌을 충효의 고을이라고하여 충효리로 명해 지금까지 전해 내려 오고있다. 조선 22대왕인 정조대왕이 1788년11월16일 충효리라고 명한 것.

한편, 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회장 박석무)에서는 기념사업회차원에서
올해 2019년에 제2회가 개최되는 16일 11시에 거목 세그루가 서 있는 왕버들 앞에서 축사에 앞 서 수은선생의 선비정신과 충장공 김덕령장군의 충효사상이 인성교육으로 이어짐을 강조해 눈길을 끌었으며 영광교육지원청과 천년고찰 불갑사와 업무협약을 강조하면서 양단체간의 교류를 제안하기도 했다.

이날 문인 광주시북구청장, 김경진국회의원, 김경천 전 국회의원을 비롯해 100여명의 마을주민들과 함께 당산제 그리고 90세를 넘은 어르신에게 기로연을 배풀어 축하분위기를 고무시켰다.

무료유료
신고하기 공유받기O 신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