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문화 > 문학 > 칼럼 / 등록일 : 2020-02-21 19:45:49 / 공유일 : 2020-02-21 20:09:21
김세곤칼럼>청탁 근절의 표상, 청백리 이후백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이백(李白 701-762) 이후로 태어난 사람이라 하여 후백(後白)이라 칭함.
repoter : 김세곤 ( yug42@naver.com )

조선왕조 500년에 가장 공정하게 인사를 한 이조판서는 누구일까?

선조 때 이후백(1520∼1578)이다.

1578년 6월1일자 선조수정실록에는 이후백의 일화가 있다.

이후백이 이조판서 시절에 힘써 공론을 숭상하고 어떤 청탁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무리 친구라도 자주 와서 안부를 살피면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하루는 친척이 찾아와서 대화 중에 벼슬을 부탁하였다. 이후백은 얼굴빛이 변하면서 작은 책자 하나를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앞으로 관직에 제수할 사람들 명단이었다. 친척의 이름도 그 속에 기록되어 있었다. 
 
이후백이 말하기를, “내가 여기에 기록한 것은 장차 천거하기 위함이었소. 그런데 지금 족친께서 벼슬을 구하는 말을 하고 있으니, 청탁한 이가 벼슬을 얻게 된다면 이는 공정한 도리가 아닐 것이요. 참으로 애석하구려. 그대가 말을 하지 않았다면 벼슬을 얻었을 것인데.”하였다.  그 친척은 매우 부끄러워하면서 물러갔다.

이후백은 사람을 뽑아 임용할 때는 반드시 합당한지 여부를 두루 물어 보았고, 만약 잘못 등용한 사람이 있으면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내가 나라 일을 그르쳤다.’하였다.

 1575년부터 조정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하였음에도 이후백의 공정한 인사는 시비를 걸 사람이 없었다. 동인의 김효원은 그가 서인의 심의겸과 친하다고 하여 “이후백은 다만 판서의 재목일 뿐이다. 만약 정승이 되기에 이른다면 내가 꼭 논핵할 것이다.”하였으나, 이후백은 연소한 신진 관료들도 싫어하지 않아 정승 물망에 올랐다. 그런데 그가 호조 판서를 마지막으로 죽었으니 애석한 일이다.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에 나오는 일화이다.
 

이후백이 함경도 관찰사에서 영전하여 이조판서가 된 것은 1577년 10월이다. 그는 1575년부터 함경도 관찰사를 하였는데 ‘청렴 근신하고 밝게 살피어 시정(施政)에 조리가 있었고, 떠난 뒤에 백성들이 그의 선정(善政)을 사모하여 비를 세우고 덕을 기렸다’.(선조수정실록 1577년 10월 1일)


함경도 관찰사 시절에 이후백의 별명은 ‘곤장 감사’였다. 그는 각 진을 순시하면서 변방 장수들에게 활쏘기 시험을 치렀는데 실력이 없는 자는 곤장을 때려 벌을 주었다.

당시에 이순신(1545∼1598)은 1572년에 무과에 응시하여 말에서 떨어져 낙방한 후, 4년 뒤에 재도전하여 무과에 급제했다. 이후 그는 1576년 12월에 첫 보직으로 ‘삼수갑산’으로 유명한 함경도 최북단 삼수 고을의 동구비보 권관(종9품 경비초소 초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여진족의 침범에 소임을 충실히 하였고 활도 잘 쏘아 이후백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제장명은 ‘이순신 파워인맥’ 책에서 ‘강직 · 청렴한 이후백이 이순신의 공직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서술하고 있다.


1581년에 이순신이 전라도 고흥군의 발포만호로 근무할 때 전라좌수사 성박이 거문고를 만들기 위하여 발포 객사 뜰 앞의 오동나무를 베어오라고 하였을 때 ‘오동나무는 나라 것이니 함부로 벨 수 없다.’고 말한 것도 이후백의 청렴과 강직을 본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이후백은 직분을 다하고 스스로 단속하여 청고(淸苦)함을 지키니, 육경(六卿)의 지위에 이르렀어도 빈한하고 검소하기가 유생과 같았다. (선조수정실록 1578년 10월1일)

아울러 그는 한시(漢詩)의 대가였다. 이름도 당나라 시선 이백(李白 701-762) 이후로 태어난 사람이라 하여 후백(後白)이라 했고, 호(號)도 이백의 호 청련(靑蓮)을 그대로 썼다.

유몽인이 지은 『어유야담』에는 이후백과 고봉 기대승(1527∼1572)의 문장 겨루기 일화가 실려 있는데, 광주목사 오겸이 두 사람을 초청하여 이틀간 문장 시합을 시켰다. 첫날은 이후백이 시 짓기에서 이기고, 둘째 날은 기대승이 문장 짓기에 이겨서 청련과 고봉은 비겼다 한다. 

경상도 함양에서 이후백은 9세에 부모를 모두 여의고 큰아버지 밑에서 지내다가 16세에 강진으로 가서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강진군 작천면 박산서원에는 그의 신위가 삼당시인 옥봉 백광훈(1537∼1582) · 고죽 최경창(1539∼1583)과 함께 배향되어 있는데, 기생 홍랑과 애틋한 사랑을 한 최경창은 이후백과 마찬가지로 청백리였다.

인사가 만사(萬事)이다. 그런데 때로는 정실(情實)에 빠져 인사가 망사(亡事)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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