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문화 > 문학 > 칼럼 / 등록일 : 2014-04-21 20:03:15 / 공유일 : 2014-04-22 14:28:12
이 땅에 시(詩)가 흐르게 하자
repoter : 안무월 ( dsb@hanmail.net )

권용태

▲ 권용태 시인매년 11월이면 만추(晩秋)의 정취가 드리운 국회의사당에서 깊고 청아한 운율 속에 국회의원들과 시인들이 만나 시심(詩心)을 나누는 '국민 시낭송의 밤'이 열린다.

시와 정치의 만남!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개의 영역이 멋지게 조화를 이뤄 현실정치의 격한 언어들이 격조 높은 청객(淸客)의 시어로 정제되어 이 날만은 국회가 갈등과 반목을 해소하고 잔잔한 화정의 장으로 변한다.

나는 평소에도 욕설과 막말, 고성으로 언어의 순결이 짓밟히고 있는 국회에서 시낭송을 하게 된다면 깊은 겨울에 송백(松柏)을 보듯이 국회의 품격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정치가 시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면 거칠고 높은 목소리가 아니라, 시처럼 낮은 목소리로 보듬어 위안을 줘야 한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2003년 봄으로 기억된다. 내가 한국문화원연합회장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우연한 기회에 당시 국회의장 초청으로 차 한 잔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 즈음 정치권은 소위 차떼기(?) 사건으로 몹시 시끄럽고 어수선할 때였다. 내가 지나가는 소리로 정치권이 맑아지려면 정치인들의 영혼이 맑아져야 하는데, 그렇게 되려면 아름다운 시를 낭송함으로써 정신과 정서를 맑게 이끌어 갈 원동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했다. 공자(孔子)는 󰡐시를 읽으면 품성이 맑게 되고, 언어가 세련되며, 물정에 통달되어 수양과 사교, 정치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말도 인용했다. 또 세계적 정치 지도자로 평가받는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나 프랑스의 퐁피두 대통령이 시간 날 때마다 집무실 창가에서 시를 낭송하면서 시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기억을 곁들이기도 했다.

검은 정치자금 대신 가슴을 울리는 감동으로 시가 읊어지는 사회가 행복한 나라가 아닐까. 맑고 깨끗한 정치인이 많을수록 더 많은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될 것이고, 믿음과 화해, 소통과 공감의 정치가 정착될 것으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심이 없는 정치는 강퍅할 것이며, 시심으로 하는 정치는 밝고 윤택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국회의장을 만나고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까, 국회의장실에서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지나가는 내 얘기를 귀담아들어 준 의장이 한없이 고마웠고, 이를 계기로 '국민 시낭송의 밤'이 연례행사로 자리잡게 되어 올해로 열두 번째를 맞게 된다.

당시 국회의장이 그 바쁜 일정 속에서도 이 날만은 다른 일정을 잡지 않고 밤늦게까지 자리를 지켜 주었고, 끝난 뒤 출연진에게 융숭한 리셉션을 열어 주었던 일이 잊히지 않는다.

국회 측에서도 이 시낭송의 밤을 문화국회로 지향하는 행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격렬한 정쟁 속에서도 화평으로 가는 지렛대로 활용하기도 한다.

지난해 행사 때만 해도 강창희 현 국회의장이 조동화의 시 「나 하나 꽃 피어」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낭송하여 만장의 갈채를 받았고, 정부 측에서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김동호 문화융성위원장, 문용린 서울교육감에 이르기까지 특별출연으로 자리를 빛내 주었다. 고마운 일이다.

시낭송의 밤을 마치고 나온 의사당은 적막하지 않았고, 정치의 여백은 크게 넓어진 듯했다. 나의 이 작은 노력이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와 정부청사에 시가 흐르게 되는 작은 촉매가 된다면 하는 작은 기대를 걸어 보기도 한다.

나는 국민 시낭송 행사를 계기로 지난 10년 동안 시낭송의 전도사(?)를 자처하면서, 전국에 걸쳐 시 낭송을 국민운동으로 펼쳐 보자는 자칭 홍보대사의 간절한 소명으로 살아가고 있다. 문화적 갈증에 갈급하고 있는 국민들에게 시를 들려주고 낭송하게 하여 가슴 속에 잠재해 있는 시적인 교양능력과 창조적 상상력을 일깨워 줄 수는 없을까. 각박한 삶 속에서 고단해진 가슴을 쉬게 하고 영혼에게 맑은 바람을 쐬게 해 주는 일은 시를 낭송하게 하는 일이라고 확신하면서····.

이제 시낭송은 시를 읽고 감상하던 때를 지나 특별한 기능으로 자리 잡게 되어 시의 대중화에 큰 몫을 하게 되었다. 시라는 작은 등불을 켜고 어두운 길을 밝혀 보자는 마음으로 전국을 돌기로 했다.

우선 문화의 불모지인 벽촌이나 오지, 문화의 소외계층이 많은 농어촌의 마을회관에서 시낭송회를 열어 가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작은 마을에 문화마당을 개설하고 정례적으로 시낭송회를 연다. 청중이라야 시골교회의 목사님 사모와 할머니 권사님, 이장 부부, 요양을 위해 내려와 있는 부부가 전부인 작은 모임이다.

때로는 지방자치단체와 공동으로 수백 명이 모이는 강당에서도, 지방문화원의 문학강좌 시간에도, 대단지 아파트의 이벤트 홀에서도, 각급 학교의 교실에서도 시 낭송회를 열어 간다.

문화융성의 시대, 시를 쓰는 이 작은 재능이나마 이웃이나 사회를 위해 기부할 수 있는 보람을 느껴 보자. 피어나지 않으면 꽃이 아니고, 노래 부르지 않으면 새가 아니듯, 시인은 시를 쓰고 불러야 한다.

문학적 재능을 소박한 실천을 통해 이웃을 위해 베풀어 보자. 정부도 시인들의 재능을 십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초·중·고교에서 가르치는 인성 교과 속에 시 낭송의 시간을 배정해야 한다. 프랑스 고등학교에서 명시 100편을 낭송해야 졸업이 된다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둘레길을 걸으면서도 시낭송을 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보자. KTX 열차 안에서도 시낭송회를 열어 보자. 우리가 유치한 국제행사 개막식에도, 지역 문화축제에도 시낭송으로 문을 열어 보자. 정부의 각종 행사의 서두에 애국가와 아리랑을 부르며 시낭송을 하고 시작해 보자.

국회의원이 의원선서를 하는 날 윤동주의 「서시」를 읽게 할 수는 없을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의정 활동을 할 수 있기를 다짐할 수는 없을까. 전국의 수많은 경로당에서도 어린 시절 사랑방 문화를 시제에 맞게 복원해 한시와 시조창이 흘러나오게 할 수는 없을까.

'시낭송의 날' 선포식도 가져 보자.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 벽두에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의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될지니'라는 「동방의 등불」을 낭송하게 된다면 얼마나 멋지겠는가.

시 사랑의 저변확대로 국민의 정서함양과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잠재된 문화적 역량을 계발해 나가야 한다. 시낭송의 생활화를 통해서 우리의 가슴마다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질 때 헝클어진 마음의 매듭을 풀 수 있는 힘과 여유를 갖게 될 것이다.

시가 죽어 가는 시대라고 한다. 우리의 시인 작가들이 오늘처럼 소외당하고 과소평가되고 있는 현실이 너무 걱정스럽다고들 한다. 풍류와 해학과 기행이 사라진 삭막한 문단을 바라보며 한숨만 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시를 배우고 나누고 연마해 순금의 얼개를 얻고자 하는 시 정신의 연금술사들이 모여 4백여 회의 낭독회를 갖고 있는 '공간 시 낭독회'를 칭찬해 보자.

시경에 이런 명구가 있다.
'動天地 感鬼神 英近於詩(천지를 움직이고 귀신을 감동시키는 데는 시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시에게서 지혜를 얻고 길을 물어 보아야 할 때가 지금이 아닌가.

■ 권용태
시인. 한국문인협회 고문. kccf3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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