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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5월 하순, 부산 초량 왜관에 파견된 일본 외교관은 외무성에  보고서를 보냈다. 조선관리가 일본정부를 모욕하는 문서를 왜관에 게시했다는 것이다. 동래부사가 일본 상인의 밀무역을 단속하기 위해 초량왜관 출입을 금한다고 게시한 문서에는 “요사이 저들이 하는 짓을 보니 가히 무법지국이라 할 만하다”는 표현이 있었다. 일본 사람들에게 이런 표현은 일본에 대한 모욕이자 메이지 천황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됐다.   이 내용이 알려지자 일본 조야는 조선 파병 여론이 비등했다. 오만하고 무례한 조선에 본때를 보여주고 일본의 국위를 선양하기 위해서는 파병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이런 주장을 정한론(征韓論)이라 한다. 메이지 천황이후 한일외교관계를 살펴보면 1868년 말에 메이지 정부는 조선에 국서를 보냈다. 일본의 최고 권력자가 막부 쇼군에서 메이지 천황으로 교체되었음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메이지 정부는 이 국서를 대마도주를 통해서 보냈는데, 대마도 사신은  1868년 12월19일에 일본 국서를 가지고 초량왜관에 도착했다.  그들은  관례대로 초량왜관에서 왜관의 책임자인 훈도 안동준에게 국서를 전달했다. 그런데  국서에는 ‘대일본(大日本)’, ‘황조(皇朝)’ · ‘황상(皇上)’등의 표현이 있었다. 이는 중국 황제나 사용하는 용어로서 기존의 일본 국서에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일본은 천황의 나라 일본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였지만 조선은 이런 국서가 관행에 어긋난다고 아예 접수조차 하지 않았다. 1)  1870년 11월에  메이지 정부는 또 다시 조선에 국서를 보냈다. 이번에는 외무성의 외교관 3명까지 파견하였다. 일본 외교관들은 1년 가까이 머물렀지만 국서를 접수시킬 수 없었다.   1872년 1월에도 일본 외교관이 초량 왜관에 도착하여 국서를 접수시키려 했으나 역시 훈도 안동준에게 막혔다. 5월까지 기다린 그들이 안동준에게 들은 말이라고는 “나라 안에서 널리 의논을 들어본 다음에야 답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조정의 명령인데, 그 기한은 예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일본은 세 차례나 조선에 국서를 보냈지만 모두 거절당한 것이다. 이러자 5월27일에 일본 외무성의 외교관을 포함한 56명이 초량왜관을 박차고 동래부로 난출(闌出)을 감행했다. 불법으로 왜관 밖으로 나간 것이다.  6월1일 동래부에 도착한 이들은 6일에 동래부사에게 국서 전달을 요구했지만 희망이 없음을 알고 초량왜관으로 돌아갔다.  일본인 56명의 난출 사건은  1683년(숙종 9년)에 맺은 계해약조를 적용하면 모두 사형이었다. 2) 그러나 조선은 그럴 힘도 배짱도 없었다.    한편 난출에 가담했던 일본 외무성 관리들은 1872년 6월17일 부산을 떠나 일본으로 귀국했다. 귀국 후 외무성 관리들은 앞장서서 정한론을 주장했다. 말로 안 되니 무력을 써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세 차례 국서를 보냈다가 모두 거절을 당한 메이지 정부 사람들에게 정한론은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그 결과는 일차적으로 초량왜관 접수로 나타났다. 1872년 9월16일에 외무대승 하나부사 요시모토가 군함과 선박 두 척에 70명의 병력을 이끌고 부산에 왔다. 하나부사는 그동안 대마도주의 관리 하에 있던 초량왜관을 메이지 정부 직속으로 접수했다. 명칭도 ‘대일본국 공관’으로 바꾸었다. 물론 일본의 조치는 조선에 통보하지도 않고 양해도 구하지 않은 일방적인 조치였다.  일본이 접수한 초량 왜관은 대마도 출신 뿐 아니라 다른 지역 상인들도 자유롭게 출입이 허용되어 밀무역이 성행했다. 이를 조선으로서는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 1873년 봄에 동래부사는 ‘잠상(潛商) 출입금지령’을 게시하여 조선과 일본 사람 모두 널리 알렸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정반대였다. 일본인들이 문구를 트집 잡아 파병 운운 한 것이다. 3) 사진 : 우에노 공원에 있는 사이고 다카모리 동상(사이고는 대표적인  정한론자이다.)   1) 조선의 국서 접수 거부 배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이후 일본에 대한 불신도 내재되어 있었다. 2) 계해약조에는 ‘일본인이 왜관 밖으로 무단으로 나갈 경우 사형에 처한다.’고 적혀있었다.  3) 신명호 지음,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역사의 아침, 2014,  p 74-105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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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재위 3년(1497년) 1월16일에 천둥과 번개가 쳤다. 이러자 1월 25일에 사헌부 장령 이수공이 경연에서 아뢰었다.                   "16일 밤에 뇌성하는 변이 있었는데, 전하께서 하교하시길 재변이 아니라고 하여 신등은 깜짝 놀랐습니다. ... 윤씨는 폐비(廢妃)인데도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모셨으며, ... 삼공(三公)은 음양을 섭리하고 그 아래인 찬성(贊成)은 교화를 넓혀야 하는데 지금 모두 사람답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삼정승과 좌 · 우찬성이 ‘사람답지 않다’는 이수공의 표현은 지나치게 직설적이며 신랄했다. 그  파장은 엄청 컸다. 당장 좌의정 어세겸·우의정 한치형, 좌찬성 이극돈 · 우찬성 성준이 사직을 청했다. 연산군은 "대간의 말은 나도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간은 국문하기 어렵기 때문에 아직은 감행하지 않은 것이다. 사면하지 말라." 고 하였다. 1월 26일에는 영의정 신승선·좌의정 어세겸·우의정 한치형이 사직하였다. 연산군은 사직을 말리면서 전교했다. "대간이 삼정승을 사람답지 않다고 했으므로, 나는 매우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 삼정승은 나와 함께 정치를 하는 사람인데 삼정승을 사람답지 않다고 하니, 이것은 나를 가리켜 하는 말이다. .. 지금 경들은 원로 대신인대, 내가 어찌 자신을 책망하지 않고 경들을 문책하여 사직시키겠는가.” 이윽고 1월26일에 예조판서 박안성· 병조판서 노공필· 형조판서 박건·공조판서 신준· 호조판서 이세좌도  사직을 청했으나 들어 주지 않았다. 1월27일에도 좌의정 어세겸과 우의정 한치형, 좌찬성 이극돈 · 우찬성 성준· 좌참찬 유지가 또 사직을 청했다.  연산군은 어필로 소장의 끝에 쓰기를, "여러 번 사면하는 소장을 올리니, 이것은 그 인군을 가볍게 보고 대간을 두려워하는 것이니, 대신의 체모가 아니다. 번거롭게 굳이 사양하지 말고 속히 그 직책을 이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런데 2월14일에 사간원 사간(종3품) 최부가 그때까지 대신을 겨냥해 제기한 탄핵 중에서 가장 포괄적이고 구체적이며 직설적이라고 평가할 만한 내용이 담긴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연산군일기 1497년 2월14일 3번째 기사) 1)     사간 최부의 상소를 읽어보자.  "근래에 천재가 자주 일어나고 도적이 횡행하며 풍속이 날마다 박하여져 심지어는 대낮에 큰 도성 안 가운데서 행인을 쳐 죽이는 자까지 있으니, 나라에 기강과 법도가 있다면 그렇겠습니까. 그것은 전하와 같은 인군을 만났어도 좌우에서 도와 인도하는 자가 마땅한 사람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중략)  지금 삼공의 우두머리 영의정 신승선은 여자처럼 나약해 나라의 큰일을 당하여도 가타부타 하는 일이 없으며, 게다가 병이 심하여  자리를 비우고 집에 있은 지 수년이 지났습니다. 이 때문에 나라를 다스리는 막중한 자리가, 죽 쑤어 중이나 먹이고 병을 보양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신승선 다음은 좌의정 어세겸인데 재주와 학문은 칭송할 만해도 선왕 시절부터 근무에 태만하여 오후에야 출근하는 당상관으로 불렸습니다. 전하께서 그를 정승으로  발탁하셨지만, 한 번이라도 훌륭한 계획을 아뢰거나 한 번이라도 선한 정사를 협찬하였다는 말은 아직도 들을 수 없으며, 날마다 술 마시는 것으로 일을 삼으니, 어찌 왕실을 생각하는 대신이겠습니까. 또 우의정 한치형은 자질은 아름답지만 배우지 못한 자입니다. 정승이 된 후 의정부에서 건의한 것으로는, 내원(內苑)에 담을 쌓는 것을 정지시키고, 새 묘소에 사대석(沙臺石) 설치하는 것을 정지시킨 두 가지 일뿐입니다. 이 두 가지 일도 반드시 한치형을 기다려서야만 되었으니, 전일 삼공이 녹만 축내고 있던 죄를 알 수 있습니다. (후략)”  2) 이러자 우의정 한치형이 즉시 사직을 청하였고, 2월16일에는 이조판서 유순, 이조 참판 안침, 호조 판서 이세좌가 사직을 청했다. 하지만 연산군은 들어 주지 않았다. 2월17일에는 승지 강귀손이 사직을 청하고, 우의정 한치형이 거듭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19일에는 좌의정 어세겸, 이조의 당상(堂上) 유순·안침·김경조가 사직을 아뢰었으나 들어 주지 않았다. 유순·안침이 굳이 사퇴하려 하니, 연산군은 전교했다.  "만일 대간의 말 때문에 육경(六卿)을 다 바꾼다면 이것은 권세가 대간에게 있는 것이다." 이렇듯 연산군은 자신의 고유권한인 인사권을 사사건건 문제 삼은 대간에 대하여 화가 치밀었다. 이는 1498년에 무오사화가 일어나는 한 가지 이유가 되었다.  3) 사진 30-1 무양서원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있는 최부를 모신 서원이다.)  1) 최부(1454∽1506)는 1498년 무오사화 때 유배 가서, 1504년 갑자사화로 참형을 당했다. 연산군일기 1504년 10월25일자에는 최부에 대한 사관의 평가가 실려 있다. “최부는 공렴(公廉) 정직하고 경서와 역사에 능통하여 문사(文詞)가 풍부하였고, 간관(諫官)이 되어서는 아는 일을 말하지 아니함이 없어 회피하는 바가 없었다.” 2) 이외에도 최부는 5가지 사항을 상소했다. 첫째, 심술(心術)을 바로 하는 것입니다. ... 지금 전하께서 즉위한 이래로 경연에 납신 날을 손가락을 꼽아 헤일 정도이니, 성학(聖學)이 근면하신지 신 등은 아직 알지 못합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성학을 좇아 행하고 간하는 말을 받아 들여, 그 마음을 수양하되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지 마소서. 둘째, 사소한 오락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원컨대, 눈앞의 노리개를 다 철거하시어 덕을 끝까지 보존하도록 하소서. 셋째, 사면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가볍게 사면하여 용서하지 마시고, 강상죄 같은 것은 엄히 다스리소서. 넷째, 내치(內治)를 엄격히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내치(內治)를 엄격히 하여 내알(內謁)을 방지하시며, 환관이  아내를 맞아들이는 것을 허락하지 마시고 교만 · 방종 하는 조짐을 막으소서.] 다섯째, 쓰고 버림을 조심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사람을 쓸 때에 그 사람이 어진 가 그렇지 않은가, 사특한 가 바른가를 살피어 쓰거나 버리십시오. 3) 김범 지음,  연산군  - 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  글항아리,  2010,   p 111-143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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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5년(연산군 1년) 9월13일에 송흠은 홍문관 저작(정8품)에서 홍문관 박사(정7품)로 승진하였다. 그러면 송흠이 승진한 때의 조정 상황을 살펴보자. 1495년 9월15일에  대간들이 탄핵한 노사신은 영의정에서 체직되어 부원군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대간들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노사신이 퇴출되도록 탄핵을 계속하여 결국 11월1일에 노사신을 부원군 자리마저 해면시켰다.             한편 10월30일에 천둥과 번개가 치는 변고가 일어나자 11월18일에 사간원 사간 이의무, 헌납 김일손, 정언 한훈과 이주 등은 기강 확립, 외척 배제, 권신의 억압 등 10가지 현안을 자세히 아뢰었다.                  여기에서 주목할 사항은 ‘권신의 억압’이었다. 이의무 · 김일손 등은  권신으로 우찬성 이극돈과 병조판서 성준을 지목했다. 이극돈과 성준은 교대로 이조판서가 되어서 사소한 원한 때문에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자 11월20일과 25일에 우찬성 이극돈 · 병조 판서 성준이 즉각 사직을 청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윤허하지 않았고,  이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그런데 11월25일에 사간 이의무·헌납 김일손·정언 한훈과 이주는 수륙재(水陸齋)를 금할 것을 아뢰었는데 연산군은 들어주지 않았다. 수륙재는 불가(佛家)에서 물과 육지의 여러 귀신에게 음식을 차려 주고 경을 읽는 제례인데, 삼사는 유교적인 의례가 아니라는 이유로 계속 반대했었다. 더구나 억불숭유(抑佛崇儒)의 나라, 조선 아니던가.   이후 수륙재 관련 갈등은 1494년 12월24일에 ‘도학군주’ 성종(1457∼1494)이 37세에 승하하자마자 일어났다. 연산군(1476∼1506)은 즉위하기도 전에 삼사(三司)와 충돌했는데 연산군은 관례라는 이유로 수륙재를 강행했다.  이런 수륙재 논의가 1년 정도 지난 1495년 11월에도 계속된 것이다. 11월26일에는 사간원이 수륙재를  없앨 것을 상소하였다. 하지만 연산군은 들어 주지 않았다. 사간원은 27일에도 수륙재 지내는 일을 논계하였으나, 역시 들어 주지 않았다. 11월28일에 헌납 김일손·정언 이주가 수륙재에  대하여 여러 번 아뢰었지만 윤허하지 않자, 11월29일에 사직하였다. 이러자 11월30일에 홍문관 직제학 표연말·전한 김수동·부응교 최부·교리 이의손과 성희안· 수찬 손주· 부수찬 이관 · 박사 송흠 · 저작  권민수 · 정자 성중엄이 김일손과 이주의 사직에 관하여 아뢰었다.  "대간이 윤허 받지 못하면 사직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마땅히 말을 다하여 숨기지 않도록 너그러이 받아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연산군은 전교하기를, “지금의 신하들은 모두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옳은 일인가." 하였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송흠은 홍문관 부응교 최부와 같이 홍문관에서  근무한 점이다. 2) 11월30일에  대사헌 권경희·집의 권주·장령 이자건과 이달선·지평 박중간과 유헌이 아뢰기를, "사간원에서 수륙재 지내는 일에 대하여 논계하였으나 끝내 윤허를 얻지 못하여 헌납 김일손과 정언 이주가 사직하였으되 복직시키지 않으시고, 사간 이의무가 피혐하였으되 받아들이시니 매우 온당치 않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의무는 피혐하지 말라" 하였다. 12월3일에 홍문관 직제학 표연말·전한 김수동·부응교 최부·교리 성희안과 이의손·수찬 손주·부수찬 권균과 이관 · 박사 송흠·저작 권민수·정자 성중엄이 대간의 말의 출처를 묻지 말도록 서계(書啓)하였다.  "임금의 정사 중에 가장 큰 것은 널리 언로를 여는 일입니다. 국가에서 대간(臺諫)을 설치하여 말하는 책임을 맡긴 것도 할 말을 다해서 임금의 총명을 열게 하자는 것입니다. 근자에 수륙재를 지내는 일에 대하여 사간원에서 할 말을 다하여 극진히 간하였으니, 그 직책을 다 해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저 대간이 간하되 그 말이 행해지지 않으면 그 직을 떠나는 것이므로 헌납·정언 등이 사직하였는데, 지금 이미 여러 달이 되었어도 아직 결정이 없으며, 또 정진·윤채 등의 일은 처음에는 풍문에 의한 것이었으나 나중에 다 자백 받은 사실인데, 삼계정(森溪正)이 공교하게 꾸며댄 상언(上言) 때문에 ‘말의 출처를 추문(推問)하라.’하시니, 만약 말의 출처를 캐낸다면 누가 감히 할 말을 다하리까?"  이러자 전교하기를, "말의 출처를 묻지 않을 수 없다. 헌납 등은 복직시키라." 하였다. 연산군은 홍문관의 말을  수용하여 헌납 김일손과 정언 이주를 복직시켰다. 이 날 복직한 헌납 김일손·정언 이주가 다시 사퇴하기를 청했으나 연산군은 들어 주지 않았다. 12월4일에 사간 이의무·헌납 김일손·정언 이주가 아뢰기를, "대간이란 조정의 이목이라 그들이 규탄하는 일이 흔히 풍문에서 나오는데, 지금 만약 그 출처를 추문하는 꼬투리를 터놓는다면 폐단이 장차 적지 않을 것이니, 단연코 따져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또 옛말에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법(法)을 시행하지 않는 실수를 하는 것이 낫다.’하였으니, 말의 출처는 따지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것인가. 대간들은 풍문으로도 탄핵 할 수 있었다. 이는 고려시절부터 용인되었고, 성종도 풍문탄핵을 널리 허용하였다. 그런데 연산군이 이를 규제하려 하니 삼사와 임금 간에 갈등이 생긴 것이다.  1) 성종 시절에 홍문관 정자(정9품)로 시작한 송흠은 홍문관 저작, 박사(정7품)로  승진하여  청요직을 여러 해 근무하여 출세를 보장 받았다.  2)  최부는 1495년 8월25일에 홍문관 부응교에 임명되었다. (연산군일기 1495년 8월25일 2번째 기사) 송흠과 최부의 일화는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아버지이며 동인의 영수인 초당 허엽(1517∽1580)이 지은 ‘전언왕행록’에 기록되어 있다.  『지지당 유고』에 나온다.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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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를린에 본부를 둔 국제투명성기구는 창립 25주년을 맞이하여 ‘부패와 민주주의’를 분석했다.  결론은 ‘부패는 민주주의의 건강성을 교란시킨다.’이다. 부패가 심한 국가일수록 민주주의 제도와 정치적 권리가 취약하다는 점이다.  “부패와 민주주의는 악순환이다. 부패는 민주주의 제도를 약화시키고, 허약한 민주주의는 부패를 통제하기에 역부족이다.”    - 패트리샤 모레라,  국제투명성기구 관리이사            국제투명성기구는 ‘2018년 부패인식지수’ 결과를 바탕으로 180개국의 국가 형태를 분류했는데, 50점미만의 나라 중에는 민주주의 국가가 없었고, 50점 이상을 받은 나라에는 싱가포르와 홍콩을 제외하고는  권위주의 국가가 없었다.  또한 75점대의 국가는 ‘완전 민주주의 국가’, 49점 대 국가는 ‘결함 있는 민주주의 국가, 34점대는 혼합 국가(민주주의와 권위주의 혼합), 30점 이하는 권위주의 국가였다. (30점 이하의 국가는 멕시코 · 러시아 (공동 138위), 베네수엘라(168위), 북한(176위)등 51개 국가이다.) 이 단체는 지난 7년간 청렴도가 상승한 국가는 에스토니아, 세네갈 등 20개 국가이고, 하락한 국가는  헝가리 · 터키 등 16개 국가이며, 관찰이 필요한 국가는 미국 · 체코 · 브라질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면 헝가리와 터키를 살펴보자. 헝가리의 부패인식지수는 2012년 55점에서 2018년 46점으로 9점 떨어졌는데, 이는 1989년 공산주의 붕괴이후 민주주의가 크게 후퇴하였기 때문이다.   터키는 2013년 50점에서 2018년에는 41점으로 9점 하락했다. 이는 ‘프리덤 하우스’의 자유 점수가 61점에서 32점으로 반 토막이 났고, 2018년에는 ‘부분적으로 자유로운(partly free)’나라에서 ‘자유롭지 못한(not free)’ 나라로 강등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심각한 부패는 시민 사회와 언론 활동의 급격한 위축과 함께 법의 지배와 민주주의 제도의 훼손에 기인한다.    이어서 관찰이 필요한 미국과 체코를 살펴보자. 미국은 2017년보다 4점 하락한 71점을 기록하여 2017년 16위에서 22위로 하락했다. 2011년 이후 처음으로 20위권 밖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포퓰리즘 정책과 ‘견제와 균형’ 시스템의 균열 때문이다.    체코는 59점으로 2017년 보다 2점 향상되었지만, 취약성이 노출된다. 국무총리가 미디어 주식을 소유하고 있어 이해충돌이 생겼고, 수백만 유로의 EU 보조금을 받은 회사와 관련하여 기소된 것이다. 눈여겨 볼 것은 청렴 1위인 덴마크도 부패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다.  2015년에 내부고발자와 언론에 의해 알려진 단스케 은행 에스토니아 지점의 257조원에 달하는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 권력자에 대한 돈세탁 이 그것이다. 말레이시아의 1MDB 부패스캔들도 파장이 크다. 5조 원 횡령 의혹을 받고 있는 나집 전 총리는 기소되었고, 세계 최대 투자은행 골드만 삭스와 국제 회계·컨설팅 기업 딜로이트도 곤욕을 치르고 있다. 이 스캔들은 2015년 영국 인터넷 보도 매체에 의해 처음 알려졌는데 나집 총리 재임 때는 무혐의로 사건이 종결되었으나 2018년 5월에 마하티르 총리가 집권하면서 재수사가 이루어졌다. (중앙일보 2019.2.13) 한편 국제투명성기구 루비오 회장의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건강한 민주주의와 성공적인 부패척결은 잘  연계되어 있다. 부패는 민주적 기반이 약한 곳에서 성행하고, 비민주적이고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이 강세인 나라는  부패가 기승을 부린다.”    지금 세계는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을 지향하는 정치지도자들이 점차 정권을 잡고 있어 민주주의가 병들고 있다. 포퓰리즘으로 민주주의 위기와 경제 파탄이 올 수 있어 한층 경계가 필요하다. (포퓰리즘 국가는 베네수엘라(168위) · 멕시코(공동 138위) · 아르헨티나 (85위) · 그리스(78위) · 헝가리(64위) · 이탈리아 (52위) 등이다.) 또한 ‘글로벌 체인지를 위한 토니블레어 연구소’는 포퓰리스트의 40%가 부패 혐의로 기소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국제투명성기구는 민주주의가 건강하도록 다음 4가지를 제안했다. 첫째 독립적 감사기관 운영과 국가권력의 견제와 균형 유지, 둘째 반부패 제도와 시행의 갭 줄이기, 셋째 부패척결에 대한 시민의 발언권 강화, 넷째 부패를 보도하는 기자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도록 언론의 자유를 철저히 보장 1) 1) 이 글은 국제투명성기구의 “How corruption weakens democracy” 를 참고했다.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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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2-18 / 뉴스공유일 : 2019-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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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곤소장의 경우 그러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유년기 자식의 기억으로는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다. 역시나 다를까 ‘돈 한 푼 벌어보지 못한 남자’로 짤막하게 先親(선친)에 대해 기억되었고 반면에 저자의 어머니는 온갖 가사노동은 물론이거니와 갖은 행상과 품앗이 등으로 인해 겨우 생계를 꾸려갔다고 家系(가계)의 당시 흐름에 대해 述懷(술회)하고 있다. 그러나 왜국에 유교를 전파하여 近代(근대) 일본을 존재하게 한 강항선생의 宣揚(선양)사업을 위한 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회장 박석무)일을 보고 있는 筆者(필자)의 시각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단언컨대 인간이 恩惠(은혜)를 모르면 짐승과 다를 바가 뭐있는가?! 인간의 정의에서 가장 기본이 되고 철학적인 정의가 고대 유명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말했다. 사회적 동물이란 사회생활 중에서 기본질서를 준수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러한 기본에서 가장 중요한 게 은혜를 아는 것이다. 당시 왜국에서는 갈증이 나도록 최고의 학문인 유교의 전파를 苦待(고대)했던 그들이 千辛萬苦(천신만고) 끝에 겨우 얻은 유교 전파에 대한 은혜도 모르고 포로인 수은 강항에게 유교를 배웠다는 게 수치스러워 구차하게 역사를 왜곡해 내려오고 있다. 明治維新(명치유신) 전후로 후지와라 세이카의 수제자이며 왜국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幕府(막부)의 侍講(시강)인 하야시 라잔에 의해 일본 역사가 구차스럽게 왜곡되고 날조되어 퇴계 이황으로부터 퇴계학을 傳承(전승)받았다는 게 그들의 일본의 유교 전파라고 주장한다. 스승이란 적국의 포로이든 제아무리 천박한 직업을 가졌든 한 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일 수밖에 없다. 포로란 상대의 신분이 황제이든 장군이든 퇴계 선생이든 전쟁 중에 잡히게 되면 누구나가 포로라는 신분으로 나락에 떨어진다. 그렇지만 당시 임진왜란의 노예전쟁과 정유재란의 무자비한 보복전쟁 또는 匠人(장인)전쟁에서 포로라는 신분이 뭐가 그토록 그네들이 수용하지 못할 정도로 이상하고 잘못된 것인가? 그들이 당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해 조선인 포로들을 대했던 행위는 마치 미치광이나 아니면 미치지 않고는 저지를 수 없는 天人共怒(천인공노)할 행위였으며 男女老少(남녀노소) 또는 지위고하 身分(신분)을 가리지 않고 만행을 저질렀으며 이루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는 걸 東西古今(동서고금)을 통해서도 자세히 알 수 있다. 강항선생의 自傳的(자전적)인 저서 ‘간양록’에도 포로에 대한 구절이 ‘간양록’ 전체에 녹아나오는데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루한 포로의 모습이 그려지고 왜적들은 흡사 인간이 아닌듯한 모급으로 그들의 狂氣(광기)는 망나니를 연상하고 있다. 수은 강항은 “너희(왜)들이 인간이라면 이러지는 못한다. 이건 개나 소에게도 이렇게는 못할 짓이다. ‘거느적거린다’ 해서 어린아이든 노인이든 가리지 않고 바다에 산채로 생매장하였고 배를 갈라죽이고 몽둥이로 때려죽였다.”라고 절규한다.<본지 2018년07월15일 필자의 칼럼글과 2018년12월02일 무라카미 츠네오(수은강항선생 일본연구회)회장, '홍유 수은 강항선생 현창비' 건립의 글 참조>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적들은 그런 포로들 중 한 명인 수은 강항에 대해서는 극진했던 이유는 왜의 전국시대 전후로 民心(민심)이 이미 사나와져 있었고 일부 識字(식자)층에서도 文(문)의 정치를 하고자하는 세력에 의해 당시 최고의 학문인 유교에 목말라하고 있었다. 왜국에서는 오나노부나카에서 이어진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너무나도 무자비하게 武(무)의 정치로 왜국은 절망감에 빠뜨렸고 도쿠까와 이에야스(덕천가강)시대에 후지와라 세이카가 포로인 강항을 스승의 禮(예)를 갖추고 師弟之間(사제지간)을 맺음으로써 왜국은 근대일본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수은 강항의 수제자인 후지와라세이카의 수제자이자 도쿠까와 이에야스(덕천가강)에게 소개해 막부시대를 연 하야시 라잔이 이러한 살아있는 역사까지 왜곡하면서 왜 퇴계학을 주장했을까? 이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 되고 말았다. 이토록 일본인들의 사고방식인 정신세계는 예나 지금이나 거의 똑같은 흐름으로 가고 있다. 수치스럽고 구차잔하면 무작정 버리고 거느적 거리면 냉정하게 버리고 가는 그런 민족적인 기질을 지금도 똑같은 흐름이 있다. 물론 우리네 爲政者(위정자)들도 제대로 된 역사관과 韓日關係(한일관계)에 대한 歷史認識(역사인식)이 매우 부족하다. 일본이 기피하는 인물 수은 강항선생!! 일제강점기시절인 36년사에서 영광지역은 철저하게 강항선생의 책자와 유물을 焚書坑儒(분서갱유)하려고 일본 경찰서장이 앞장서서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우리민족이 어떠한 민족이던가? 先代(선대)의 유물을 온몸으로 지켜내고 더 철저하게 지켜냈던 것이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여기서 불과 수년전의 박근혜정부만 조금 들여다보자!! 박근혜 정부는 교학사 역사교과서를 날치기로 검정해 통과시키더니 韓日(한일) 위안부 합의를 성사시키기 위하여 강제징용 피해자 재판까지 개입했다는 사법농단 정황의 민 낮이 드러나기에 이르렀다. 당시 위안부 합의는 일본의 위안부 강제 동원 사실도 명기하지 않은, 매국적인 합의였기 때문에 故人(고인)이 되신 김복동 할머니를 비롯해 국민들이 거세게 반대하였다. 더불어 박근혜 정부는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면서, 어떻게 해서든 위안부협상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강제징용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소송까지 부당 개입해 양승태 대법원장이 故意(고의)로 재판을 지연을 시켰다는 의혹이 드러나면서 시민단체는 분노하고 박근혜 - 양승태 사법농단 관련자의 처벌을 외치고 있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다시 박 소장의 자서전으로 되돌아가 보자. 이렇듯 박 소장은 초등학교 스승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靑出於藍(청출어람)을 꿈꾸며 3년 전장 장학생으로 중학교에 들어갔으나 몇 푼 안 되는 기성회비로 중학교 졸업장도 못 받고 한순간 절망감을 가진다. 그러나 저자는 奮然(분연)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검정고시를 거쳐 부산으로 내려가 두 형의 도움으로 어렵게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과정을 보면 눈물겨운 忍苦(인고)의 세월들을 간접 경험을 통해 독자라면 누구나 공감을 갖고 큰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생 歷程(역정)의 스토리가 잔잔히 전개 되는걸 함께 해 간다. 한양대학교 초빙교수 연구실을 찾아 갔을 때도 두어 시간을 거침없이 지난 세월을 말하는 박소장의 立談(입담)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당연히 이어져 있는 6시 서울역 4번 출구 근처 식당에서 갖는 백두산문학 신년인사회에 기고 만다. 하지만 백두산문학회에서 신년회 자리에서도 이러한 범상 (凡常)치 않은 인물에 대한 독특한 만남으로 긴 여운이 계속 소용돌이치듯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왜냐면 박소장의 자서전을 살펴보노라면 24년간 25명의 총리에게 주로 국정총괄·기획업무를 통해 실질적으로 국가 행정의 중심축 역할을 수행했으며 탁월한 업무수행으로 “총리실 해결사”등 별명을 가질 정도였으며 각 부처 간 이견 및 갈등조정에 두드러진 능력발휘(고건 前 총리 자서전에서 언급)이며 혁신적 사고로 규제개혁 등 업무혁신주도 능력 등등이 주마등처럼 그려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박소장의 “머슴이나 보내지 공부는 무슨“이라는 제목의 자전적 에세이집을 더 널리 소개하여 읽게 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할 뿐이었다. 더 더욱, 자신의 어려웠던 시절을 잊지 않고 공직 재직 시부터 중증 장애인시설, 보육원, 양로원 등 각종 사회 복지시설 지속 방문해 함께 어울림을 몸소 실천한 실천가이기에 더 그러했다. 이뿐이던가?! 한국전기공사 사장으로서 공사를 미래지향적, 성과 지향적으로 완전 개조시켰으며 미래전략실을 설치하고 내일 경영제를 도입, 주식시장 형 인사와 성과보상제도 도입·실행했으며 모든 공직을 떠난 후에도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고위 공직자의 표상이었다.   최근에야 다소 여유(?)있게 한양대학교 갈등문제연구소를 창설, 사회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폐해 감소에 노력하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자기성찰을 꿈꾸며 정진하고 있는 모습을 행운처럼 筆者(필자)에게 스케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다. 끝으로 박철곤소장은 어려운 환경덕분에 호남(전북 진안)태생으로 부산에서 고교를 졸업, 서울소재 대학을 졸업했으며 처가는 충남 부여이고 경기도 오산 거주 중 고시에 합격해, 경기도청 화성군청에서 첫 근무를 시작했기에 지역 색으로 도배를 하고 있는 현 정치판에 귀감이 되는 인물은 아닐까하는 생각으로 注目(주목) 해 본다. 耳順(이순)의 나이가 넘어가는 筆者(필자)에게도 이렇게 멋진 교훈을 주고 있는데 현재 奉職(봉직)하고 있는 많은 公職者(공직자)들이나 爲政者(위정자)들도 이 의미 있는 책을 일게된다면 자신만의 확고한 길을 다지는데 많은 교훈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그 누군가가 자신의 꿈을 꾸고 있다면, 아니 목표를 갖고 있다면 “머슴이나 보내지 공부는 무슨“ 저자와 같이 자신감으로 강력한 도전을 통한다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을 가져보리라!! 박 소장은 검정고시 두 번과 행정고시 한 번, 두메산골 오지마을에서 나고 자란 한 고학 소년이 유년시절의 모진 가난과 시련을 딛고 공직의 길에 올라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차관급), 공기업 사장의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박 소장의 지난 60여년 自傳的(자전적)인 삶의 역정을 흥미롭게(?) 살펴보면서 “결코 평범하지 않은 한사람에 대한 인생의 무게를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는 自敍傳(자서전)이구나!!”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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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5년(연산군 1년) 9월15일에 대간들은 노사신을 영의정에서 체직시키고 부원군으로 내려 앉히는 1차적 목표를 달성했지만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대간들은 노사신이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도록 탄핵을 계속했다.  9월16일에 사간원 정언 한훈은 노사신을 경연에 참가하지 말도록 아뢰었다. 9월26일에 사간원은 대간의 간언을 들을 것과 노사신 등의 죄를 처단하라고 상소했다. 9월28일과 10월1일에도 한훈은 거듭 노사신이 경연에 참여하지 말도록 거듭 아뢰었다. 결국 노사신은 11월1일에 원상에서 해면을 요청했고 연산군은 그대로 좇았다. (연산군일기 1495년 11월 1일 3번째 기사) 한편 10월30일에 천둥과 번개가 치는 변고가 일어나자 연산군은   11월1일에 국정 쇄신 방안을 제시하라고 신하들에게 하교했다. 11월18일에 사간 이의무 등이 기강을 펴는 일, 여알을 금할 것, 토색질을 금할 것 등을 상소하였다.  (연산군일기 1495년 11월 18일 1번 째 기사)    사간 이의무 등(당시 사간원 사간은 이의무, 헌납은 김일손, 정언은 한훈과 이주였다.1)은 10월은 순음(純陰)의 달인데 양기가 의당 잠복하여야 할 것인데, 천둥과 번개가 서로 부딪치니 큰 변이라고 전제하면서, 연산군에게 경연(經筵)에 나갈 것을  건의하고, 10가지 현안을 자세히 아뢰었다.               그것은 1. 상하의 화목 2 기강의 진작  3, 외척의 배제 4. 여알(女謁 : 궁중에서 왕의 총애를 받으며 정치를 어지럽히는 여인)의 배척 5. 권신의 억압  6. 토색의 금지  7. 상벌의 공평 8. 유일(遺逸:초야에 숨어 있는 인재)의 등용 2) 9. 옥사의 신중한 처리 10. 징세의 관용이었다.       여기에서 주목할 사항은 ‘권신의 억압’이었다. 이의무 · 김일손 등은  권신으로 우찬성 이극돈과 병조판서 성준을 지목했다. 이극돈·성준은 교대로 이조판서가 되어서 사소한 원한 때문에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그 조짐을 막지 않으면 장차는 ‘우이의 화[牛李之禍]’3)를 이루게 될 것이니, 전하께서는 사(邪)와 정을 통찰하시어, 권신이 서로 공격하는 폐단을 막으라고 아뢰었다. 이러자 11월20일에 우찬성 이극돈 · 병조 판서 성준이 즉각 사직을 청했다. 이 날 영의정 신승선도 도의적 책임에서 사직서를 올렸다. 하지만 연산군은 들어주지 않았다. 11월25일에도 이극돈이 사직을 청했으나 연산군은 윤허하지 않았다. 이 때의 사태는 일단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사진 29-1 연산군 묘 입구 사진 29-2  연산군 묘 상설도 사진 29-3  연산군 묘    그런데 연산군 2년(1496년)에 정승의 임명과 관련된 문제가 불거졌다.  1496년 2월4일에 연산군은 정문형을 우의정에 임명했는데 2월 5일에 대간들은  그가 재상에 적합하지 않다고 반대하였다.    연산군은 대신들의 의견을 물었는데 윤필상 · 신승선등 주요 대신들은 정문형의 우의정 임명에 찬성했다. 연산군은 대신들에게 의견을 들었는데 모두 현저한 허물이 없다고 말했다면서 대간을 압박했다.    그러나 대간의 간쟁은 두 달 넘게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정문형은 두 차례 사직 상소를 올렸다. (1495년 2월22일) 결국 연산군은 1496년 윤3월4일에 정문형의 우의정 임명을 철회하고 한직인 영중추부사로 발령 냈다. 대간의 반대로 연산군이 정승 임명을 철회한 것은 상당히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연산군 재위 3년(1497년) 1월16일에 천둥과 번개가 또 쳤다. 삼사는 그 원인으로 국왕의 오랜 경연 불참과 삼정승이 직무를 소홀히 한 것을 들었다. 그러자 영의정 신승선 · 좌의정 어세겸 · 우의정 한치형과 도승지 강구손이 사직했다. 하지만 연산군은 윤허하지 않았다. (연산군일기 1497년 1월22일) 이 때 연산군의 전교는 의미심장하다.  "대간은 옛 글만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지금 이 뇌성의 변은 다른 사람들은 재변이라고 하지만 나는 재변은 아니라고 본다. 만일 재변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내가 부덕(不德)하기 때문이지 어찌 경 등 때문이겠는가. 최근 감기 때문에, 또 큰일이 있기 때문에 경연에 나가지 못했다. 그러나 어찌 경연을 폐지한 관계로 재변이 일어났겠는가. 삼공이 만일 용렬하고 탐학하다면 재변을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러나 경등은 모두 덕망이 있으니 그만두지  말라."      1) 1495년 11월25일에 사간 이의무·헌납 김일손·정언 한훈과 이주는 수륙재를 금할 것을 아뢰었다 (연산군일기 1495년 11월 25일 3번째 기사)    2) 이의무 · 김일손 등의 ‘유일(遺逸)천거’에는 김굉필 · 정철견이 언급되어 있다. “유일(遺逸)을 천거하여 어질고 슬기로운 이들을 등용하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 선왕이 일찍이 유일을 구하니, 경상도 관찰사 이극균이 생원(生員) 김굉필·정철견을 천거하였는데, 김굉필은 겨우 참봉에 등용되고 정철견은 아직도 초야에 있으니, 이는 유일을 구한 본의가 아닙니다.”   3) 우·이의 화[牛李之禍] : 우·이는 중국 당(唐)나라 때의 우승유와 이종민 및 이덕유 등을 말하는 것인데, 이들은 요직에 있으면서 각기 자기의 당파를 수립하고, 사사로운 원한으로 서로 공격 배제를 일삼아 국정을 어지럽게 하였다.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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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2-14 / 뉴스공유일 : 2019-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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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패는 망국의 지름길이다."                            - 영국 수상 글래드스톤(Gladstone  1809∽1898)     1월29일에 독일 베를린에 본부를 둔 국제투명성기구(NGO단체)는  ‘2018년 부패인식지수’를 발표했다. 그 결과는 조사대상 180개국 중 덴마크가 88점을 받아 가장 투명한 국가로 뽑혔고, 뉴질랜드가 87점으로 2위에 올랐다. 1) 공동 3위는 핀란드, 싱가포르, 스웨덴, 스위스(85점)였고, 노르웨이(84점)가 7위, 공동 9위는 캐나다와 룩셈부르크(81점)였다.  공동 11위는 독일과 영국(80점), 13위는 호주, 공동 14위는 오스트리아, 홍콩과 아이슬랜드, 17위는 벨기에(75점), 공동 18위는 에스토니아 · 아일랜드 · 일본(73점)이었다. 21위는 프랑스(72점), 22위는 미국 (71점), 이었다. 공동 23위는 아랍에미레이트 · 우루과이(70점)였다. 이어서 바베이도스 · 부탄이 공동 25위  2), 대만과 브루나이는 공동 31위, 보스와나와 이스라엘이 공동 34위를 차지했고, 한국은 57점으로 카보베르데, 도미니카와 함께 공동 45위였으며 3), 중국은 87위, 러시아는 138위였다. 180개국 중 꼴찌는 10점을 받은 소말리아였다. 남수단과 시리아가 13점으로 공동 178위, 북한과 예멘이 14점으로 공동 176위를 기록했다. 4) 이번 조사에서 180개 국가 중 3분의 2는 50점 이하의 점수를 받았으며, 전체 국가의 평균 점수는 43점이었다. 한국은 2017년 51위에서 공동 45위로 6단계 상승했다. 상승 이유는 2016년 11월 30일부터 청탁금지법(김영란 법) 시행으로 반부패 시스템이 유효하게 작동하였고, 시민들의 반부패 · 정의실현 요구가 높아진 점이다. 국정농단 사태 등으로 부패수준이 2016년에 52위로 추락 한 것이 2012년 수준인 45위(56점)로 회복된 것이다. 5)   세부지표별로 보면 공직자의 사적 이익을 목적으로 한 지위 남용 가능성이 2017년 53점에서 2018년 62점으로, 공직사회의 부패 정도가 60점에서 70점으로 많이 개선되었다. 또 기업 활동과 관련한 일선 부패 관행도 개선으로 나타났다. 반면 정치와 기업 사이의 의심스러운 관계 평가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고, ‘전반적인 부패수준’은 45점에서 42점으로 점수가 내려갔다. 한편 OECD 가입국의 청렴 순위를 보면 한국은 36개국 30위를 차지하여 2017년 29위보다 1단계 하락했다. 2008년 22위에서 2010년 26위, 2015년 28위, 2017년 29위, 2018년 30위로 뒷걸음질 쳤다. 더구나 세계경제규모(GDP) 12위의 국가가 45위를 한 것은 충격이다. 6) 사진  OECD국가(36개국)의 부패인식지수    문재인 정부는 2022년에 `부패인식지수 20위권 도약`을 목표로 하고 있다. 프랑스(21위)와 미국(22위)의 수준인 71-72점을 맞으려면 현재의 57점 보다 14-15점이 올라야 하는 데 그리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려면  권력형 비리 척결, 정권에 휘둘리지 않은 독립된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설치, 이해충돌방지법 제정, 공익신고자 보호 철저 등에 혼신을 다해야 한다.  1) 덴마크는 2017년에 2위(1위 뉴질랜드), 2014년과 2015년 1위, 2016년 뉴질랜드와 공동 1위를 하였다. 2) 부탄 왕국은 2008년 부패순위 45위에서 2018년에는 25위로 청렴해진 반면에 한국은 2008년 40위에서 2018년 45위로 뒷걸음질 쳤다. (한국경제신문 19.1.30 조국  민정수석의  ‘자화자찬’) 3) 한국과 공동 45위를 한 카보베르데는 아프리카 서북부 대서양의 섬나라로 인구가 56만 명이고, 도미니카는  GDP가 한국의 20분의 1 수준이다. 4) 북한의 부패문제는 남북경협의 필수고려사항이다. (조선일보 19.1.31, 어느 '부패 176위' 국가 ) 5) 한국의 부패인식지수는 2008년 40위, 2009년 39위, 2010년 39위, 2011년 43위, 2012년 45위, 2013년 46위, 2014년 44위, 2015년 43위, 2016년 52위, 2017년 51위, 2018년 45위이다. 6) 한국보다 더 부패한 OECD 국가는 이탈리아 (52위), 슬로바키아 (57위), 헝가리 (64위), 터키(67위), 그리스 (78위), 멕시코(138위)이다.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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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5년 (연산군 1년) 6월 29일에 홍문관 직제학 표연말 · 전한 김수동 · 부응교 홍한 · 부교리 권오복과 성희안 · 저작 송흠 · 정자 권민수와 성중엄 등은 연산군에게 네 번째로 아뢰었다. "비록 한 명의  언관(言官)에게 죄를 내릴지라도 오히려 듣기에 놀라운데, 대간 전원이 옥에 갇혀 있으니, 어느 누가 놀래지 않겠습니까. 이는 전하께서 직언(直言)을 듣기 싫어 한다는 이름만 얻게 될 뿐입니다. 이  혹심한 더위에 비록 죄가 있어 옥에 갇힌 자라도 오히려 조심성 있게 다루고 불쌍히 여겨야 할 것인데, 하물며 죄 없는 대간을 옥에 갇혀 있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연산군은  "죄가 없다고 할 수 없다." 고 전교했다. 홍문관 관원들은 5번째로 아뢰었다.  "대저 신하가 옳습니다만 하고 고분 고분하는 것은 충성이 아닌데, 대간에 있어서는 더욱 충성이 아닙니다. 대간이 속으로 옳지 않은 것을 알면서 겉으로만 전지(傳旨)에 복종하면 되겠습니까. 전지를 받들지 않은 것은 곧 그 직책을 다하자는 것이니, 무슨 죄가 있습니까. " 이러자 연산군은 전교하였다.  “그대들의 말이 옳으나, 굳이 거역하고 받지 않는 것도 어찌 죄가 없다 하겠느냐.” 표연말, 송흠 등은  다시 아뢰었으나 연산군은 역시 듣지 않았다. 홍문관 관원들은 7번째로  아뢰었다.   "윤탕로를 탄핵하고 있기 때문에 전지를 받들지 않은 것이 무엇이 다르리까. 근래에는 경연관(經筵官)이 아뢴 것도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으시니, 실망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연산군은 "추국한 뒤에 죄는 짐작해서 처리하겠다."고 전교하였다. 이러자 표연말 · 송흠 등은 8번째 아뢰기를, "제왕(帝王)의 학문은 경(經)과 사(史)를 널리 열람하여 선한 것은 본받고 악한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 성종의 일을 들어서 아뢴 것은 전하께서 듣고 보신 바이므로 선왕을 잘 계승하시게 하려는 것인데, 전하께서 는 우리 성종도 본받지 않으시니, 선왕을 잘 계승한다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신들은 소망에 결여됨을 이길 길 없습니다." 연산군은 "사헌부에서 전지를 받지 않았으니, 당연히 국문해야 하고, 간원(諫員)은 석방하라." 하였다. 이러자 홍문관은 다시 아뢰었다.  이 날 들어 9번째이다.  "전하께서 이미 사간원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아시고 석방하시니, 이는 미덕입니다. 사헌부 역시 다른 사정이 있었겠습니까. 다만 한 번 전지(傳旨)를 받게 되면 뒤에는 아뢰기 어렵기 때문에 받지 않은 것뿐입니다. 청컨대 사헌부도 아울러 석방하시면 더욱 성덕(盛德)일 것입니다." 하지만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10번째로 다시 아뢰기를, "예로부터 제왕(帝王)치고 허물없는 분은 적습니다만, 그 허물을 능히 고치면 이것이 아름다움이 되는 것입니다. 조종조(祖宗朝) 이래로 대간을 아울러 파직시킨 때는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대간을 국문하라는 명령은 아무래도 지나친 조치이니, ‘국문하지 말라.’고 명령하시면, 성덕에 더욱 빛이 날 것입니다. " 그러자 연산군은 전교하였다.  "성종의 일은 무엇인들 본받을 만한 것이 아니랴. 다만 근래에 대간이 말을 하면 기어코 이기고야 말겠다는 심산이니 반드시 국문해야 한다." 홍문관은 또 아뢰었다. 11번째이다.  "임금의 위세는 뇌전만균(雷電萬鈞)과 같사온데, 신하가 뇌전만균 같은 위엄을 무릅쓰며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과감히 간언하는 것은 어찌 권세를 자기에게 돌아오게 하려고 그러겠습니까. 이는 공론과 법을 실현시키려는 것이요, 임금에게 반드시 이기자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의 공론이 있는 것은 마치 사람의 몸에 원기가 있는 것과 같으니, 원기가 두루 통한 뒤라야 몸에 질병이 없고, 공론이 행한 뒤라야 국가가 평안합니다. 원컨대 다시 깊이 생각하소서.” 연산군은 "그대들의 말이 옳다. 국문한 뒤에 짐작하겠다."고 전교하였다. (연산군일기 1495년  6월29일 3번째 기사) 이어서 6월30일에는 표연말 등 홍문관 관원들은 사헌부가 죄 없으니 추국명령을 거두라고 아뢰었다. (연산군일기 1495년 6월30일 1번째 기사) 대신 신승선도 대간을 가둔 것은 잘못이라고 아뢰었고, 대사헌 최응현· 대사간 이감 등이 같은 사연으로 아뢰었으나, 연산군은 명령을 거역한 것이라며 듣지 않았다. 대사헌과 대사간이 "대간이 윤탕로를 논하는 것은 공론입니다. 청컨대 국문을 마소서." 라고 다시 아뢰자 그 때야 연산군은 석방하라고 전교했다.(연산군일기 1495년 6월30일 2번째 기사) 7월1일 이후에도 사헌부와 사간원은 합사하여 윤탕로를 국문하라고 아뢰었다. 하지만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연산군일기1495년7월1일, 7월6일) 삼사는 윤탕로의 직첩을 박탈해야 한다고 계속 요구했고, 이에 밀린 연산군은 윤탕로의 직첩을 거두고 경기도로 귀양 보냈다.(연산군일기 1495년 7월21일) 이렇듯 대간들의 간언은 끈질겼고 임금의 비호를 받은 외척 중 비리 관리는 가만 두지 않았다.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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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칼럼

1495년 8월1일, 2일, 3일에도 대간은 노사신의 죄를 극렬하게 논하였으나, 연산군은 들어 주지 않았다. 대간은 사직으로 항의 표시를 했다. 연산군은 복직을 명하였지만 대간은 또 사직했다.  8월4일에  훈구대신 윤필상이 나섰다. “전하께서 속히 결단하셔야 하겠습니다." 연산군은 불쾌했다.  "대간이 내 말을 듣지 않으니, 내가 대간을 교체하려 한다."  윤필상이 또 아뢰었다. "대간은 복직하지 않을 것이며, 대간을 교체하더라도 다음에 들어올 대간이 어찌 간언하지 않고 물러가겠습니까. 조정이 오래도록 안정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8월5일에 대간이 노사신의 간사함에 대해 강단(剛斷)하기를 거듭 아뢰었다. 연산군은 역시 들어 주지 않았다. 8월6일에 대간이 합사하여 노사신의 일을 논했다. 그런데 연산군은 다음과 같이 전교했다.    "경들이 나를 걸(桀)·주(紂)·유왕(幽王)·여왕(厲王)·원제(元帝)와 같은 폭군에 비교하기도 하나, 들어 줄 수 없다."  걸 ·주 · 유왕 ·여왕 · 원제는 나라를 망친 중국의 폭군들이다. 걸(桀)은 하(夏)나라의 마지막 왕이고 주(紂)는 은(殷)나라의 마지막 왕인데 폭군(暴君)의 대명사였다. 유왕(?~ BC 771?) 주(周)나라 왕으로 향락과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아 견융의 침공으로 살해되었다. 여왕(재위 355~357)은 5호16국 시대 왕으로 늘 술에 취해 정무를 제대로 보지 않았고, 대신들과 궁인들을 함부로 죽이는 등 폭정을 일삼다가 폐위되었다. 원제(재위 BC 48~33년)는 한나라 황제로서 환관들의 득세를 막지 못했다. 위의 전교는 무엇을 의미하나? 연산군은 폭군을 하다가 폐위 될 것을 예감한 것일까?  한편 노사신에 대한 대간의 공격이 계속되자 8월13일에 노사신이 사직서를 올렸다. 하지만 연산군은 윤허하지 않았다. 8월15일에 사간원 사간 이의무가 아뢰었다.  "홍문관·대간이 노사신을 나라를 그르치는 대간(大奸)이라고 하여 극론하였는데 전하께서 살피지 않고 도리어 대간을 그르다 하시니, 이렇게 하면 언로가 크게 막히고 국사가 날로 글러질 것입니다." 하지만 연산군은 귀를 막았다.  8월19일에 집의 권주가 노사신을 조정에 둘 수 없음을 아뢰었다. 연산군은 전교하였다.  "노사신의 말은 옳으니, 그르다고 할 수 없다. 다만 대간이 아무 재상이 그르다고 말하면 그 재상을 체직시킨다면, 이것은 권세가 대간에게 있고 임금에게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나라가 망할 징조이다.” 8월22일에 겸 대사헌 한치형·겸 대사간 이즙·집의 권주·사간 이의무·장령 이달선·지평 박중간·유헌· 정언 한훈이 번갈아 상소하여 노사신을 죄주라고 했으나, 들어 주지 않았다. 8월24일에도 대간이 합사로 노사신을 논하였으나, 역시 들어 주지 않았다. 8월27일에 장령 이달선·정언 한훈이 아뢰었다.  "노사신의 일을 전교하시기를 ‘짐작하여 결단한다.’ 하셨는데, 상교(上敎)를 들려주소서." 연산군은 전교하였다.  "노사신은 잘못한 일이 없다. 들을 만한 일이라면 그것을 이제까지 안 들었겠느냐."  이러자 집의 권주와 사간 이의무 등이 합사하여 “하교하시기를 ‘노사신이 무죄하다.’하시니, 신등은 정말 실망입니다. 빨리 죄주소서." 하였으나, 연산군은 들어 주지 않았다. 이러자 대간이 두 차례나 더 죄주라고 하였으나 연산군은 완고했다. 8월28일에 집의 권주와 사간 이의무 등이 아뢰었다. "노사신이 어제 널리 대신들에게 의논하기를 청하였으니 모름지기 결단하소서." 연산군은 전교하였다. "그대들이 대신들에게 묻기를 청하는데, 신하 중에 혹 노사신을 옳다고 하려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모두 대간을 두려워하니, 그 누가 바로 말할 수 있겠느냐.“ 9월8일에 연산군은 참판 이상 조정대신들에게 명하여 노사신의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먼저 윤필상은 말했다.  "대간이 논청(論請)하기를  3개월이 계속되니 조정이 언제나 편안해지겠습니까. 노사신이 근무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사오니, 부원군(府院君)에 봉하여 조정을 편안하게 함이 어떠하겠습니까?" 이어서 윤호가 말했다.   "노사신의 실수가 가볍기는 하지만 대간이 여러 번 청하여 마지않으니,  부원군에 봉함이 어떻겠습니까?" 정문형이 말했다.   "노사신이 아뢴 데 대한 시비를 신들이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오랫동안 삼사가 논박하여 마지않음을 받았으니, 형세가 서로 용납할 수 없습니다." 성준도 의견을 제시했다. "신이 전일 경연에서, 노사신이 이미 비난을 받았으니 함께 있기는 어렵다고 아뢰었사온데, 이제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박건이 아뢰었다.  "대간이 일을 논하는 것은 혹 지나친 일이 있더라도 본디 너그럽게 받아들여 언로를 열어야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제 처음 즉위하셨으니, 더욱 곧은 말을 받아들이고 정직한 의논 듣기를 좋아하여 혹시라도 말하는 이들이 그 의사를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야 하는 것인데, 노사신은  대신의 체모를 잃은 것입니다." 윤효손은 의논드리기를, "신은 듣자오니 ‘나무가 먹줄을 좇으면 발라지고, 임금이 간함을 좇으면 성인이 된다.’고 합니다. 노사신은 터무니없는 말을 내어서 여러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했으니, 자못 대신의 체모를 잃었습니다." 성현·김경조·안우건·한사문·김극뉴·윤민은 의논드리기를, "대간은 조정의 이목(耳目)이므로 말이 정도에 지나치더라도 진실로 너그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데, 노사신의 말은 이미 대신의 체모를 잃었습니다." 김자정이 말하기를, "노사신의 소행은 원래 잘못된 일이 없었는데, 다만 근일 말한 것이 이미 체모를 잃었습니다. 대간의 의논은 혹 실정에 지나친 말이 있더라도 오로지 노사신 만을 옳다하고 대간의 청을 듣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신종호·허침은 의논드리기를, "전하께서 새로 대위를 계승하였으니, 마땅히 정직한 말을 받아들여야 하고, 말이 혹 적합하지 않더라도 역시 너그럽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데, 노사신이 대신이 되어 위엄으로 결단한다는 말을 드려서 상청(上聽)을 움직였습니다. 위엄으로 결단하는 것이 임금의 한 덕이기는 하지만, 이것을 대간에게 시행하여서야 되겠습니까. 이 말이 실시하게 된다면, 앞으로는 곧은 선비를 모욕하고 언로(言路)를 두절하게 될 것이니, 그 해(害)를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간의 논란이 바로 노사신의 실수를 맞힌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의논이 들어가매, 연산군은 "내가 장차 열람하고서 결정을 짓겠다." 하였다.  9월12일에 대간이 거듭 노사신의 죄를 논하고 죄주기를 청하였으나,  들어 주지 않았다.  9월13일에 대간들은 연산군이 노사신을 죄주자는 공의를 좇지 않는다고 사직했다.   대간의 상차를 읽어보자.  "임금은 공의(公議)의 주인이요, 조정의 공의는 하루도 폐할 수 없으니, 공의가 폐지되면 나라는 하루도 유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널리 조정대신들을 불러 군의(群議)를 모아 보았으되 한 사람도 노사신을 옳다 하는 사람은 없고 모두들 그의 그른 것을 배척하였으니, 이것은 조정의 공의이므로 전하께서 결코 좇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이제 하교하시기를 ‘공의는 원래 좇아야 하겠지만 노사신의 일은 좇을 수 없다.’ 하시니, 신들은, 어떤 공의는 좇을 수 있고 어떤 공의는 좇을 수 없는 것인지 그 내용을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공의를 배척하고 죄인을 용서하시니, 조정에 어떠하며 종사(宗社)가 어떠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일개 노사신 때문에 국론(國論)의 공정함을 폐지하고 위망(危亡)의 징조를 터놓으시니, 하늘에 계신 조종조의 영령이 ‘나에게 후사(後嗣)가 있다. 나의 종사를 떨어뜨리지 않으리라.’고 하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빨리 공의를 좇아 만민의 소망에 부응(副應)하게 하소서.” 그러나 연산군이 들어 주지 않으매, 대간이 사직하였다. (연산군일기 1495년 9월13일  2번째 기사) 9월15일에 대간이 합사하여 노사신의 죄를 논계하였다  "노사신을 죄주지 않으시려면 신들의 직을 파면하여 주소서." 하지만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대간이 다시 결단을 촉구하자, 연산군은 영의정 노사신을 체직시키고  한직인 선성부원군으로 옮기도록 발령을 냈다. 그런데 체직 이유가 묘하다.  "노사신은 성종 대왕께서 부탁하신 원훈(元勳)이니, 이제 처음 정사를 하는 중에 말 한 마디를 실수하였다 하여 체직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민원(民怨)이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백성을 위하여 좇는 것이요, 경들의 말 때문은 아니다." (연산군일기 1495년 9월15일) 민원(民怨)이란 핑계를 댔지만 연산군은 대간의 끈질긴 탄핵에 손 든 것이다. 28-1  창덕궁 인정문 28-2  인정전 해설판 28-3  인정전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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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5년 (연산군 1년) 6월 29일에 홍문관 직제학(弘文館  直提學) 표연말 ·전한(典翰) 김수동 · 부응교 홍한 · 부교리 권오복과 성희안 ·  부수찬 손주와 이과· 박사 이관· 저작(著作) 송흠(宋欽) · 정자 권민수와 성중엄 등이 연산군에게 아뢰었다. "방금 대간을 해직시켜 의금부에 가두고 국문하라는 명령을 듣고 놀라움을 억제하지 못하겠습니다. 대간의 뜻은, 한 번 어명을 받게 되면 다시 다툴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받지 않은 것입니다. 옛날 순(舜)임금의 말에 ‘네가 나를 대할 적에는 옳다[面從]하고, 물러가서 뒷말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니, 윤탕로의 일이 옳지 못하다고 여기면서 어명을 받는다면 이는 면종(面從)하는 것이요, 받고서 다시 말이 있으면 이는 물러가서 뒷말이 있는 것입니다. 대간이 굳이 거역하고 받지 않은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제 전하께서 대간이 간언한 일을 가지고 죄를 주신다면, 사람마다 자기 몸을 아낄 줄 아는데, 누가 전하를 위하여 다 말씀드리려 하겠습니까. 신들은 결코 죄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연산군일기 1495년 6월29일 3번 째 기사)    그러나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이때  송흠은 홍문관 저작(정8품)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홍문관은 조선시대 궁중의 경서(經書)·사적(史籍)의 관리와 문한(文翰 각종 문서의 작성)의 처리 및 왕의 각종 자문에 응하는 일을 관장하던 관서로서 사헌부·사간원과 더불어 삼사(三司)라 하였으며,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홍문관직은 청요직(淸要職)의 상징이었으므로 홍문관원이 되면 출세가 보장되었다. 조선시대의 정승·판서로서, 홍문관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런 자리에 송흠은 성종시절부터 줄곧 근무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1494년 12월24일에 ‘도학군주’ 성종(1457∼1494, 재위 1469∼1494)이 붕어했다. 이로써 연산군(1476∼1506, 재위 1494∽1506) 시대가 열렸다. 그런데 연산군은 즉위하기도 전에 삼사(三司)와 충돌이 일어났다. 수륙재(水陸齋) 실시를 둘러싼 갈등이었다.  이후 삼사는 외척 등용과 비리에 대하여도 문제를 제기했다. 1495년 2월 11일에 연산군이 이철견을 겸지의금부사(兼知義禁府事)로, 윤탄을 동지의금부사로 임명하자 삼사는 반대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대간들은 합세하여 몇 달 간 이 문제를 집요하게 제기했지만 연산군은 막무가내였다. (연산군일기 1495년 4월28일, 5월28일) 연산군이 뜻을 굽히지 않은 데는 이들이 외척이었기 때문이다. 이철견은 세조비 정희왕후의 조카(이철견의 어머니가 정희왕후의 여동생)였고, 윤탄은 성종비 정현왕후의 숙부(정현왕후의 아버지 윤호의 동생)였다.   아울러 외척의 잘못된 행실을 처벌해야 한다는 삼사의 주청도 잇달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성종 비 정현왕후의 동생 윤탕로였다.  삼사는 1495년 4월10일에  훈련원 부정(종3품) 윤탕로를  성종의 졸곡을 마치기도 전에 기생집에 출입하여 관계를 했다는 이유로 탄핵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윤탕로를 감쌌고, 윤탕로의 탄핵은 석 달 넘게 계속되었다. 이러자 연산군은 6월29일에 윤탕로를 사면한다는 단자(單子)를 네 번이나 내려 보냈는데도 이를 따르지 않은 대간을 의금부에 회부하여 국문하라고 전교했다. (연산군일기 1495년 6월 29일 1번째 기사) 즉시 홍문관 관원들이 대간을 처벌하지 말라고 아뢰었으나 연산군은 듣지 않은 것이다. 표연말, 송흠 등 홍문관 관원들은 또 아뢰었다.  "성종시절에는 간언하다가 견책을 입은 자가 없었으므로 26년 사이에 모두 할 말을 다하고 숨기지 아니하였는데 전하께서는 한 가지 일도 대간의 말을 쾌히 들어줌이 없고, 감옥에 가두어 강직한 선비들의  기운을 꺾기까지 하시니, 신들이 깊이 걱정됩니다. 이야말로 종묘사직의 안위(安危)와 관계되는 것이니, 다시 깊이 생각하소서."   이에 연산군은 전교하였다. "이는 간언한 일 때문에 국문하라는 것이 아니라, 명령을 거역한 까닭이다. 무엇이 사직의 안위에 관계됨이 있겠느냐."   표연말, 송흠 등 홍문관 관원들은 세 번째로 아뢰었다.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예는 어찌 순종만 하라는 것이겠습니까. 전하께서 대간을 예우하지 않고 한 번만 다투는 일이 있어도 명령을 거역한다 하여 견책을 내리신다면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아첨만을 일삼아서 앞으로 국사가  구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니, 이것이 신들이 이른바 ‘종묘사직의 안위와 관계있다’고 아뢰는 것입니다. 전하는 신들의 말을 귀에 거슬린다 여기지 마시고, 깊이 생각해 보소서." 연산군은 다시  전교하였다.  "옛날 임금은 어질기 때문에 이와 같았지만, 나는 어질지 못하니 당연히 추국해서 죄주어야겠다."  (계속됩니다.)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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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2-01 / 뉴스공유일 : 2019-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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