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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보호가 지속가능한 한류 생태계 조성한다” 한류 콘텐츠 지속 확산에 저작권 중요성 강조돼 저작권 침해란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받는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로,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지 않고 지적 재산권 혹은 저작 인격권을 침해하는 방법으로 저작물을 이용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러한 권리는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저작자가 생존하는 동안과 사망한 후 70년간 존속한다. 출처: 저작권해외진흥협회 저작권 환경과 해외 저작권 보호 세계적인 추세로 디지털 콘텐츠 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드라마, 웹툰, 음원, 영화 콘텐츠와 같은 디지털 콘텐츠의 저작권 보호가 중요하게 되었다. 우리 정부는 9월 ‘콘텐츠 산업 3대 혁신전략’(이하 혁신전략)을 발표했다. 콘텐츠 산업 경쟁 심화, 5G 상용화로 인한 콘텐츠 환경 급변 등을 고려한 정책으로 이를 통해 환경 변화에 대응하여 콘텐츠 산업을 키우고, 연관 산업의 동반성장을 이끄는 우리 경제의 신성장동력으로 삼는다는 계획이다. 더하여 우리 정부는 콘텐츠 산업 3대 혁신전략을 통해 2022년까지 콘텐츠 산업 매출액은 150조 원, 수출액은 134억 달러(약16조원)를 넘어설 것으로 기대한다고 예상했다. 이러한 콘텐츠 산업의 질적, 양적 성장은 전 세계가 우리 콘텐츠를 함께 즐길 수 있게 하여 우리 콘텐츠 산업의 우수성과 한류의 잠재력을 모두에게 실감케 함과 동시에 매출과 수출에서도 높은 성장세를 이어가 국가 경제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우리나라의 소프트 파워 강화와 더불어 혁신 성장의 주력산업이 바로 콘텐츠 산업이 되는 시대가 올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밋빛 미래와는 달리 우리나라 콘텐츠 산업의 현주소는 여러모로 쉽지 않은 상황이다. 세계 최대의 콘텐츠 소비시장으로 급부상한 중국으로의 진출이 쉽지 않고, 한류 확산으로 우리나라 콘텐츠들의 해외 소비가 늘고는 있지만 이에 비례하여 저작권 침해 피해사례도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최근에는 저작권 침해 유형도 다양해지는 등 해외 저작권보호를 위한 적극적인 노력 없이는 콘텐츠의 미래를 논하기도 어려워졌다. 저작권 보호가 창작자 개인의 이익을 넘어서 우리나라의 문화발전을 이루고, 더 나아가 문화 상품의 수출을 통해 국가의 경제적 이익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급변하는 저작권 환경과 보호에 대해 논의하는 COA 국제저작권 세미나 사단법인 저작권해외진흥협회는 12월 12일 ‘2019 COA 국제저작권 세미나’를 그랜드힐튼 호텔 서울 다이아몬드홀에서 개최한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급변하는 저작권 환경에 따른 저작권 보호를 위한 방안을 고민해본다. 이를 위해, 국내외의 저작권 보호를 위한 여러 상황들을 살펴보고, 한류의 영향으로 증가하는 콘텐츠 해외 소비에 비례한 저작권 침해에 대한 공동 대응방안도 모색해보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이번 세미나는 ‘급변하는 저작권 환경과 해외 저작권 보호’라는 대 주제 아래, 국제저작권법학회(ALAI) 프랭크 고첸(Frank Gotzen) 회장과 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이상정 명예교수가 ‘EU에서의 중간매개자 책임’과 ‘해외저작권 보호를 위한 국내 저작권 제도의 보완’이라는 제목으로 각각 기조연설을 할 예정이다. 특히 고첸 회장은 유럽 단일시장 내 저작권 관련 규범을 개혁하기 위해 2019년 3월 26일 유럽연합(EU) 의회에서 통과된 디지털 단일시장(Digital Single Marker, DSM) 저작권 지침에 대해 설명한다. 이어서 국내외 연사들은 IT 기술의 급속한 발전에 따른 각국에서의 저작권 보호 환경 변화와 대응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다. 이 행사를 주최 주관하는 저작권해외진흥협회는 한국의 문화 산업을 주도하고 있는 주요 문화 콘텐츠의 해외 진출과 저작권 보호를 지원하기 위해 KBS, MBC, SBS, JTBC, 레진엔터테인먼트, 한국음악실연자연합회, 카카오페이지 등 한류 콘텐츠 주요 분야를 대표하는 저작권 권리자들이 한데 모여 출범한 권리자 주도의 해외 저작권 기관이다. 국내외 주요 콘텐츠 사업자, 정부 기관, 협/단체와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해 방송, 영화, 만화, 음악 등 문화 영역 전반을 아우르는 공동 대응과 해외에서 우리 한류 콘텐츠 보호 체계를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19 COA 국제저작권 세미나 -일시: 2019년 12월 12일(목) 10:00~17:30 -장소: 그랜드힐튼 서울 호텔, 컨벤현 센터 3층 -주최: (사)저작권해외진흥협회 -참가 규모: 국내외 관계자 100여명 -주제: 급변하는 저작권 환경과 해외 저작권 보호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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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12-11 / 뉴스공유일 : 2019-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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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문학강연

전라남도가 마한역사문화권의 발전과 특별법 제정 등 사회적 공감대 형성을 위해 13일 오후 2시 국회도서관 소회의실에서 서삼석 국회의원, 전남문화관광재단과 공동으로 마한문화권 발전 학술포럼을 국회에서 개최한다.   ‘마한역사문화권의 진흥과 지역발전’을 주제로 열리는 이번 학술포럼은 전라남도가 역점 추진하는 영산강유역 마한문화권 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지난해에 이어 수도권에서 개최한다는 것.   권오영 서울대학교 교수의 특별강연을 시작으로 이영철 대한문화재연구원 원장 등 관련 분야 전문가의 주제발표가 진행된다. 이어 종합토론에서는 우승희 전라남도의원, 윤진호 전라남도 관광문화체육국장, 임영진 전남대학교 교수, 임승경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장 등이 발표자와 함께 마한역사문화권 특별법 제정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인다.   전라남도는 이번 학술포럼에 전국적으로 마한 전문가, 언론인, 국가기관, 지역주민 등이 골고루 참여함에 따라 마한문화권 개발사업이 지역 차원에서 머무르지 않고 전국적 공감대를 얻어 특별법 제정 등 추진 동력을 확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전라남도는 그동안 마한문화권 발전을 위해 대통령 지역공약에 반영, 기본계획 수립, 조례 제정, 특별법 제정 국회 협력 등 다각적인 노력을 펼쳤다.   김영록 전라남도지사는 “이번 학술포럼을 통해 전남의 뿌리인 마한 연구를 위한 전국적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마한역사문화권 특별법 제정의 당위성을 찾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앞으로도 영산강유역 마한 사회에 대한 꾸준한 조사·연구를 추진해 전남의 고대사를 꽃피웠던 마한역사문화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끌겠다”고 말했다.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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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11-09 / 뉴스공유일 : 2019-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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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문학강연

강진군이 오는 12일 국제변호사 메리 리(이연희) 씨를 초청하여 강진아트홀 소공연장에서 제263회 다산강좌를 개최한다. 앞으로 해외 진출을 모색하는 지방자치단체와 기업, 군민들이 알아야 할 국제 법문화와 필요한 정보를 알리고자 ‘지방정부의 해외 진출과 국제법’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진행하며 국제법을 제대로 알지 못해 해외진출에 실패한 사례와 이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공유한다.   강사로 초청된 메리 리 씨는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와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변역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LA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이후 법정 통역사를 거쳐 1995년부터 캘리포니아주에서 국제변호사의 길을 걷고 있으며, 저서로는 『미국 법 총 정리(조셉 김 공저, 다산처럼 출판사)』가 있다.   한편, 제263회를 맞이하는 다산강좌는 일자리창출을 통한 인구 유입, 머물다가는 체류형 관광지 조성, 농수특산물 고부가 가치 창출을 통한 강진군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고자 사회, 문화, 농수축산 분야의 다양한 전문가를 초청해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 1998년 첫 강좌 이후로 사회 저명인사들의 특강을 진행해 군민들의 견문과 생각을 넓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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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11-07 / 뉴스공유일 : 2019-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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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문학강연

전라남도문화관광재단(대표이사 조용익) 전남문화재연구소는 호남 고대사의 근간인 마한이 고대국가의 주도 세력이었음을 밝히기 위해 ‘영산강유역 마한사회와 백제의 유입’을 주제로 5일 담양리조트에서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이번 학술대회는 전라남도가 추진하는 영산강유역 마한문화권 개발 계획의 일환으로 전남의 뿌리를 찾는 역사적 행보의 시작이다. 영산강유역의 마한 사회가 새로운 세력인 백제의 유입으로 변화한 사회・문화적 과정에 대해 마한사회 연구자들의 주제발표와 토론으로 진행된다.   최성락 목포대학교 명예교수의 특별강연을 시작으로 전진국 충북대학교 강사, 정동준 성균관대학교 강사, 김진영 문화발전연구소장, 박수현 호남문화재연구원 선임연구원, 강은주 전남대학교 박물관 학예원, 이영덕 호남문화재연구원장 등 관련 분야 전문가들의 주제발표가 진행된다.   1부에서 문헌사를 통해 마한과 백제와의 관계를 살펴보며 2부와 3부에서는 매장문화재인 고고 자료를 바탕으로 마한 사회의 변동을 추적해 문헌사와 비교 검토하는 자리가 마련된다.   4부 종합토론에서는 문안식 동아시아역사문화연구소장, 윤재득 담양군 학예연구사, 최영주 전남대학교 강사, 이지영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연구사, 배재훈 아시아문화원 연구원 등이 주제발표자와 함께 마한사회와 백제의 관계에 대해 역사학과 고고학을 망라하는 열띤 토론을 펼친다.   조용익 대표이사는 “이번 학술대회는 ‘가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돼온 호남 고대사의 근간인 ‘마한’을 새롭게 평가하고 그 정통성을 확립하는 큰 걸음이 될 것”이라며 “앞으로도 꾸준한 조사・연구를 통해 전남지역을 무대로 발전한 마한의 소중한 역사적 가치를 재창출, 역사·문화적 위상을 높여나가겠다”고 말했다.   이번 학술대회는 전라남도가 주최하고 전남문화관광재단이 주관해 열린다. 학술대회와 관련된 자세한 사항은 전라남도문화관광재단 전남문화재연구소(061-287-6808)로 문의하면 된다.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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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7-02 / 뉴스공유일 : 2019-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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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문학강연

영광내산서원보존회에서는 3일 성지송학중학교 집현전실에서 '옥당고을의 선비이야기'로 자유학기제 수업을 진행했다.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을 초빙해 두 번째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호남사람들로 수은 강항선생의 당시 행적을 재조명해 잔잔한 교육의 파장을 가져왔다. 학생들과 격의없는 대화로 풀어간 강의에서 눈에 띄게 수업률이 좋아진건 지난 주 찾아가는 내고향 문화재 내산서원 탐방 교육에서 호남지역 선비로 수은 강항선생의 춘향제에 직접 참가해 분향을 하고 어른들과 함께 참여해 제례를 엄숙히 올려 귀감이 되어 보상으로 상품권을 전달했고 강의 도중에 돌발퀴즈를 내 또 문화상품권을 골고루 부상으로 줘 가며 동참을 유도했기 때문이라는 후문이다. 한편, 성지송학중학교는 전국 유명 대안학교로 학생들의 자유분망함과 자율적인 수업 진행으로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자유학기제는 2학기 까지 총 8회가 진행될 예정이다.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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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5-03 / 뉴스공유일 : 2019-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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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문학강연

박영선 의원(더불어민주당/서울 구로을)은 오는 30일 14시 강진아트홀 대강당에서 열리는 제258회 다산강좌 강사로 나서 강진군민과 소통의 시간을 갖는다.   강사로 나선 박영선 의원은 언론인 출신으로 정계에 진출하여 4선 국회의원을 하면서 대중적 인지도를 기반으로 유력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 더불어민주당 참좋은지방정부위원회 공동위원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제20대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과 한러대화 조정위원을 맡고 있다.   제258회를 맞이한 다산강좌는 군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열린 교육으로 정치, 사회, 문화 분야 등 지방자치시대에 걸맞은 다양한 전문가를 초청하고 있다. 1998년 첫 강좌 이후 258회를 맞았으며,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고 노무현 대통령, 고은 시인, 법륜 스님 등이 초청강사로 군민들과 함께 강진의 미래의 꿈을 실현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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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1-22 / 뉴스공유일 : 2019-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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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문학강연

 방금 소개받은 무라카미 츠네오입니다. 이번에 저와 함께 온 저 분은 다나에 츠토무씨입니다. 일본 에히메현 오즈시에서 왔습니다.  지난해 상사화가 한창이던 내산서원에서 심포지움을 끝내고 오즈시로 돌아온 지 1주일 뒤에 한국에서 26명의 단체가 오즈시를 방문하였습니다. 제가 오즈성에 있는 강항선생 현창비를 안내하였습니다. 그 단체는 영광군의 농업관련 종사자들로 일본의 농업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라고 들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일곱 번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역사를 배우기 위해서지요. 방문 목적은 다양하겠지만 서로를 배우고 교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국제교류 및 친선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강항선생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과정은 매우 힘들고 고달팠지만, 교토에서 만난 후지와라 세이카로 부터 ”배우고 싶습니다.” 라는 말을 듣고  "가르쳐드리죠"라고 답한 것은 유학자 강항선생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또한 오늘 한국 방문이 여덟 번째입니다. 모든 것이 낯익은 풍경입니다만 올해는 각별한 감격이 있습니다. 그 것은 금년이 일본에 유교를 전한 수은 강항선생이 돌아가신 지 4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강항선생을 알게 된 것은 34년 전인 1984년 6월입니다. 오즈 시청에서 교육위원회 문화계를 맡고 있을 때 오사카에 사는 재일교포 신기수씨를 대표로 하는 그룹에서 강항선생 기념비를 오즈성에 세우고 싶으니 부지를 제공해 주었으면 한다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편지에는 강항이라는 사람이 교토에서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유교를 전한 그의 업적이 간단하게 쓰여 있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오즈시에서 발행하는 잡지 ”'오즈시지'를 읽어보니 한자 이름은 '쿄우코'라고 일본식 후리가나가로 되어 있었으며, 오즈성 토도 다카도라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조선을 침략했을 때 포로로 잡혔던 인물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오즈시내에서 제일 비싼 땅인 오즈성터의 일부분을 제공하려면 나름대로 현저한 공적이 있는 인물이어야만 합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기념비 건립에 적합한 인물인지를 설명할 수가 없었어요. 저는 난처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서울 박물관에서 복사를 했다며 서류를 가지고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4세기 전에 강항선생이 쓴 '간양록' 이었습니다.  어려운 한문은 사전을 참고하면서 읽는 도중 내 등골이 오싹함을 느낄 정도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인물이야말로 일본에 유교를 전파하고 일본 교육· 문화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공로자임을 알게 된 것이죠. 저는 '유학자 강항과 오즈'라는 논문을 써서 기념비를 오즈성에 세우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강조를 하였으며 부지제공을 승인해야 한다고 기안했습니다. 다행히 시장, 교육장 그리고 의회도 이것에 찬성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기념비 건립의 분위기가 높아지면서 건립비 모금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1987년 7월 뜻밖에 한국 경주의 동국대 교수인 오영진, 장충식 교수의 방문이 있었습니다. 한일 문화교류에 대해 연구하러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강항선생과 관련된 자료를 건네주고 유적을 안내하자 일본어과 오교수로부터 한국방문을 권유받았습니다. 그때 저는 처음으로 여권을 발급받고 다음달 8월 대학교수의 안내로 서울에서 전주, 광주, 영광, 경주로 5일간의 여행을 떠났습니다.  광주 박물관에서 이을호 관장을 만났고, 영광에서는 강씨 후손 분들을 만나 내산서원을 찾았습니다. 뒷산 있는 강항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고, 일본 교육 문화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에 감개무량하였습니다. 서원에 비치된 방명록의 명단을 넘기자 일본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아직 일본에는 강항선생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한편, 현창비 건립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1990년 3월 11일, 벚꽃이 만개한 오즈성에서 한국인 참석자 32명을 포함 약 160명이 참석해 제막식을 하였습니다. 마스다 요이치 오즈시 시장은 축사를 통해 “강항선생은 시대를 뛰어넘어 지금도 두 나라의 인연을 맺어주는 가교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즈시가 이렇게 한일 양국의 친선을 도모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영광스런 일이라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공무원의 숙명으로 그 때에 발령이 나 다른 부서로 전근이 되어 다른 업무를 하였습니다만, 강항선생 연구자로서 기념식장의 맨 끝자리라도 앉을 수 있었습니다. 일찍이 강항선생이 여기서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통곡했다는 기록이 떠올라 만감이 교차됐습니다.  이 기념비 건립을 계기로 강항선생의 이름이 일본의 매스컴에 소개되는 일이 잦아졌으며, 한국에서도 큰 화제 거리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즈성 기념비를 찾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한국에서도 강씨 가문, 영광군, 광주시 등의 고향사람들과 학자, 연구진 등 많은 사람의 방문이 있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윤홍식씨가 계십니다. 바로 이분이십니다.  강항선생이 쓴 일본에서의 포로생활(日本幽囚)의 기록을 편집해 출판한 제자 윤순거씨의 13대 후손이 되는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윤씨는 조상의 뜻을 이어 강항선생의 공적을 현창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해 오즈시장에게 한국을 방문하도록 권했습니다. 시대를 뛰어넘고 해를 거듭하여도 은사를 현창 하려는 師弟간의 깊은 정의 모습에 감동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 후에 도착한 편지가 이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렇게 큰 글씨로 된 초대장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유감스럽게도 한글은 읽을 수 없습니다만, 이 한자라면 압니다. "明春靈光春享擧行, 責任案內安心來韓 -- 내년의 봄 영광에서 춘향제가 거행됩니다. 책임지고 안내할 테니 안심하고 한국에 오세요. 라고 읽었습니다.  사실 그 전까지는 오즈시장이 한국행을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이전의 침략자, 토도 타카토라의 출신지 사람의 방문을 받아 줄까? 하는 불안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편지를 보고 처음으로 한국행을 결심했습니다. 동행은 시의회 대표의 오모리 부의장, 교육위원회 대표의 쿠보타 교육장, 그리고 먼저 한국을 방문했던 경험이 있던 시민 과장인 저도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해인 1991년 봄 4월 15일, 저희는 김포공항에 내렸습니다. 거기에 '환영 오즈시장님'이라고 쓴 종이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 마중을 나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진주 강씨 종회 회장 강기천씨로 부터 그날 밤 서울에서 환영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차로 광주시에 도착해서 코리아나호텔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에는 호텔 경영자이자 강자희선생의 후손인 강대직씨가 저녁 식사 자리를 마련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따뜻한 환영인사가 있었습니다. 모두 예상치 못한 일에 당황하면서도, 즐거운 밤을 보냈습니다.  그 다음날 공교롭게도 비가 왔지만, 승용차로 영광군을 향해 군청을 방문했습니다. 정말 긴장의 순간이었어요. 하지만 다음 순간 우리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커다란 탁자 한가운데에 한국과 일본의 국기가 굳게 묶여 장식되어있는 것을 보았어요. 정 군수님으로 부터 환영의 인사말씀을 듣고, 간담회를 마친 후 내선서원으로 서원으로 향했습니다.  거기에는 유림복장차림으로 참배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매스컴의 기자들도 기다리고 있어 취재가 시작되었습니다. 식이 시작되자 우리들은 익숙해지지 않는 예법에 당황하면서도 확실한 것은 지난 400년 동안 일본인으로써 처음 참가한 식을 끝냈습니다.  마스다 시장은 답사를 하기 위해 일어나서 “일찍이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오즈성 토도다카토라가 이 땅을 침략한 과오를 사죄하고 강항선생이 일본의 교육 화의 발전에 공헌한 공적을 기리고, 향후 교류를 하자고 호소했습니다. 이 말은 윤홍식씨의 통역으로 참가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인사가 끝났을 때 는 참석자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여행 중에 일본어로 안내하던 한국의 젊은 여성 가이드는 마스다 시장의 인사를 듣고 일본인을 오해했어요. 부끄럽습니다. 하며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납니다. 마스다 시장의 방문은 당일 테레비젼에 방송되고, 그 후엔 각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후 봇물 터지듯 한국 방문이 시작돼 행정단체, 시내학교장 등 교육관계자, 청년회의소와 함께 온 어린이 스포츠클럽, 오즈고등학교 수학여행 단체, 그리고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는 이마지시, 미에현 쯔시의 상공회의소 등등 방문이 이어졌습니다.   저에게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아직까지 일본에 강항선생의 공적을 소개하는 책자가 없으니 신기수씨로 부터 제의를 받아 공동으로 집필을 하고 1991년에 “유생 강항과 일본”이라는 제목으로 아카이시출판사에서 출판했습니다. 중앙 언론에도 소개가 되어 갑자기 바빠지고, 공무원의 일과 양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다음해인 1992년 3월, 3년 남은 정년을 기다리지 않고 시청공무원을 의원 퇴직했습니다.    갑자기 직업도 없어지고 수입도 없어져 마누라한테 몹시 혼났습니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습니다. 역사의 작가로써 감동과 흥분의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1999년, '강항·유교를 전한 포로인의 발자취'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이번을 포함해 한국을 8번 방문했지만, 2년 전에는 예상치 못한 명예를 얻었습니다. 앞서 발행했던 책이 번역되어 한국에서 출간된 데 이어 '서울언론인 클럽 상'에서 외국인 특별상'으로 선정됐습니다. 저가 이 영예로 인하여 강항선생의 공적이 한국 내에서도 널리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기꺼이 시상식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오즈 시에서는 중학교 부독본을 제작해 일본 유학의 영향을 미쳤다는 강항선생을 크게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지방의 작은 시에서의 일입니다만, 언젠가는 일본의 교과서에 그리고 역사책에 빛나게 등장하는 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저는 시청 직원으로써 평범한 삶의 끝자락에서 강항선생을 만나고 작은 연구를 계속하면서 오즈시와 영광, 나아가 일본과 한국의 우호친선에도 기여할 수 있었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더욱 기쁜 일이 있었습니다. 2001년 3월 영광에서 개최된 심포지움 때 내빈으로 참석한 국회의원이 유창한 일본어로 저에게 말을 건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이낙연 의원님이었습니다. 저는 기쁘게도 일본어가 능숙한 분이면 읽어 주실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일본어로 된 책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한 권 더 넣고, 이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드려 달라고 부탁한 결과, 이런 대답이 왔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굉장히 기뻐하셨다고 합니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이 의원은 그 후 전라남도 지사가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오즈의 강항선생 현창비를 두 번이나 방문하셨고 제가 안내를 했습니다.  고향의 대한 자부심으로 존경받고 계시리라 짐작됩니다. 그때 오즈성에서의 사진입니다.  그 지사님이 작년 5월의 정변에 의해 수상에 취임하게 된 것입니다. 국제관계가 힘든 시절이지만 언젠가 일본에 다시방문 했을 때 이 총리로부터 어떤 말이 나올까 기대가 됩니다. 그리고 혹시 3번째 오즈를 방문하는 일이 있을 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되면 강항선생도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그날을 꿈꾸고 있는 중입니다.  다시 한 번 일본의 교육, 문화를 위한 대 은인이신 수은 강항선생님의 업적을 기리고, 그 고장 영광군이 평화롭고 풍요롭게 발전하기를 기원하며 여러분의 복을 기원하며 저의 인사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鴻儒 睡隱 姜沆先生 顯彰碑 建立 背景 村上恒夫會長(睡隱姜沆先生日本硏究會)  御紹介いただきました村上恒夫です。一緒に参りましたのは田苗勉さんです。日本の愛媛県大洲市から参りました。  昨年、彼岸花が真っ盛りの内山書院でのシンポジュームから帰ってわずか1週間後、韓国から26人の団体が大洲を訪問され、私が大洲城の姜沆先生顕彰碑を案内しました。その団体は霊光郡の農業関係の方々で、その目的は日本の農業技術を学ぶためと聞きました。  私はこれまでに7回韓国を訪問しております。歴史を学ぶためです。目的は様々ですが、お互いに学びあって交流する――。まことに喜しい現代の国際親善の姿であります。  かつて姜沆先生が日本に渡ったその過程は、まことに悲しいものでありましたが、京都で藤原惺窩から「教えてください」と求められたとき「教えましょう」と答えた、儒学者としての姜沆先生の心が理解できるところです。  さて、今日8回目の韓国訪問を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見慣れたこの風景でありますが、今年は格別の感激があります。それというのも、本年は日本に儒教を伝えた睡隠姜沆先生が亡くなられてからちょうど四〇〇年の記念の年であるからです。  私が姜沆先生を知ったのは、34年前の1984年6月のことであります。大洲市役所に勤め、教育委員会の文化係りを担当しているとき、大阪に住む在日韓国人の辛基秀さんを代表とするグループから、姜沆先生の記念碑を大洲城に建てたいので土地を提供して欲しいとの手紙が届きました。手紙には姜沆という人物について、京都で藤原惺窩に儒教を伝えたとその業績が簡単に書いてありますが、細かな内容は分かりません。  『大洲市誌』を読むと、名前の文字に「きょうこう」と日本語読みの振り仮名がついて、大洲城主藤堂高虎が豊臣秀吉の命令で朝鮮を侵略したとき捕虜にした人物として、わずか九行の記事が載っていました。   市内の一等地である大洲城跡の一角を提供するには、それなりの顕著な功績のある人物でなければなりません。知る限りの資料では記念碑を建てるにふさわしいかどうか説明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私は困りました。  そこへ、韓国のソウル博物館でコピーをしたとして、この書類を持って来た人がありました。4世紀年前に出版された姜沆先生が書いた『看羊録』であります。むつかしい漢文の文字を辞書を参考にして読むうち、私は背中に冷たい水を浴びせられたような衝撃を受けました。この人物こそ日本に儒教を伝え、教育・文化の発展に大きな影響を与えた功労者であることを知ったのです。  私は『儒者姜沆と大洲』と題する論文を書いて、記念碑を大洲城に建てるのは意義のあることと強調して、土地の提供を承認するよう起案しました。幸いに教育長・市長、そして議会もこれに賛同しました。こうして、記念碑建立の機運は一気に高まり、資金の募集活動が始まったのです。  その後1987年7月、思いがけなく韓国から、慶州の東国大学教授の呉英珍・張忠植両教授の訪問がありました。韓日の文化交流について研究に来られたとのことでした。私が姜沆先生について書いた資料を渡し、遺跡を案内すると、日本語科の呉教授から、韓国訪問を促されました。私は初めてパスポートを取得して、翌8月、大学教授の案内で、ソウルから全州・光州・霊光・慶州と5日間の旅に出ました。光州博物館で李乙浩館長に会い、霊光では姜家の子孫になる方と会い、内山書院を訪ねました。裏山の姜沆先生の墓を参拝して、日本の教育文化の淵源の地はここであったかと感慨深いものを覚えました。しかし、書院に備えられた見学者名簿をめくると、日本人らしき名前を見ることはできませんでした。残念ながら、まだ日本には姜沆先生の名は知られていなかったのです。  一方、顕彰碑建立事業は順調に進み、1990年の3月11日、満開の桜が咲く大洲城に、韓国からの出席者32名を含む、およそ160名が参加して完成を祝いました。桝田与一大洲市長は祝辞を寄せ、  「姜沆先生は時代を越えて、今も両国のきずなを結ぶ役目を果たしておられるものと思います。――大洲市がこうして日・韓両国親善のはしわたしの役をになうことのなり得るならばまことに光栄なことであると思います」 と述べました。  私は公務員の宿命で、そのときには転勤になり別の職場に変わっていましたが、姜沆先生研究者として式典の末席に連なることができ、かつて姜沆先生がこの場所から西の空を眺めて慟哭した記録を思い、万感胸に迫るものを覚えました。  この記念碑建立を機会として、姜沆先生の名が日本のマスコミに取り上げられることも多くなりました。また、韓国でも大きな話題となったと聞かされました。そして、大洲城の記念碑を訪ねる人がありました。韓国からも一族の方、霊光郡、光州市など故郷の人々、学者や研究グループなど多くの来訪がありましたが、その中に尹洪植さんがありました。この方であります。  姜沆先生が書いた日本幽囚の記録を編集して出版した、弟子の尹舜擧さんの13代子孫になる方と聞きました。  尹さんは、先祖の意志を継いで、姜沆先生の功績を顕彰しようと日本を訪れ、大洲市長を尋ねて韓国を訪問するよう勧められました。時代を越え、年代を重ねて恩師を顕彰しようとする師弟愛の姿に感動させられます。  その後に届いた手紙がこれであります。私はこれまで、このような大きな立派な字の招待状を受け取ったことがありません。残念ながらハングル文字は読めませんが、この漢字であれば分かります。  「明春霊光春享挙行、責任案内安心来韓――来年の春、霊光において春の祭りが挙行されます。責任をもって案内しますから安心して韓国へ来て下さい」 と読めます。  実はそれまで、大洲市長は韓国行きをためらっておりました。かつての侵略者、藤堂高虎の出身地からの訪問が受け入れられるか、という不安があったからであります。しかしこの手紙を見て、初めて韓国行きを決心しました。同行は市議会代表の大森副議長、教育委員会代表の久保田教育長、そして先に韓国を訪問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市民課長の私も加わることになりました。  翌年、1991年春4月15日、私達は金浦空港に降りました。そこに「歓迎大洲市長様」と書いた紙を持つ人の出迎えに驚きました。晋州姜氏宗会会長姜起千氏で、その夜はソウルで歓迎を受けました。  そして翌日、車で光州市に到着してコリアナホテルに入りました。そこにはホテルの経営者であり、また姜沆先生の子孫と聞く姜大直氏が夕食の席を設けて待っていてくださいました。そして暖かい歓迎の挨拶がありました。何もかも予想外のことに戸惑いながらも、楽しい夜を過ごしました。  翌日、あいにくの雨となりましたが、車で霊光郡に向かい、郡役所を訪問しました。まさに緊張の一瞬でした。  しかし次の瞬間、私達の心はなごみました。大きなテーブルの中央に、韓国と日本の国旗が固く結んで飾ってあるのを見たのです。  丁郡主から歓迎の言葉を受け、懇談のあと内山書院に向かいました。そこには儒服で参列する人があり、また、マスコミの記者が待ち構えていて取材が始まりました。そして式が始まり、私達は慣れない作法に戸惑いながらも、まさに四〇〇年を経て、初めて日本人が参加する式典を終えました。  桝田市長は挨拶に立ち、かつて豊臣秀吉の命令で大洲城主藤堂高虎がこの地を侵略した過ちを謝罪し、姜沆先生が日本の教育文化の発展に貢献した功績をたたえ、今後の交流を呼びかけました。この言葉は尹洪植さんの通訳で参加者に伝えられました。挨拶が終わったとき、参加者から大きな拍手がありました。  私達の旅行中、日本語で案内をしていた韓国の若い女性ガイドは、桝田市長の挨拶を聞いて 「日本人を誤解していました。恥ずかしいです」 と言って涙を流したことを覚えております。  この桝田市長の訪問は当日のテレビジョン、その後の新聞で大きく報道されたと聞きました。  その後、堰を切ったように韓国訪問が始まり、行政の団体、市内の学校長など教育関係者、青年会議所に引率された子供のスポーツクラブ、大洲高等学校の修学旅行の団体、また、朝鮮の役に関係のある今治市、三重県津市の商工会などが、次々と訪問していることを知りました。  私の身にも変化がありました。まだ日本に姜沆先生の功績を紹介する図書がないとき、辛基秀さんに促されて共同で執筆して、1991年に『儒者姜沆と日本』と題して明石書店から出版しました。中央のマスコミにも紹介されたことからにわかに忙しくなり、とても公務員の仕事と両立することが不可能と知り、翌1992年3月、3年後の停年を待たずに市役所を依願退職しました。   たちまち無職無収入となり、女房には大変怒られました。しかし後悔はしておりません。歴史作家として感動と興奮の毎日を過ごしております。  そして1999年、2冊目として『姜沆・儒教を伝えた虜囚の足跡』と題して出版致しました。  先にも申し上げました通り、私は今回を含めて韓国を8回訪問しましたが、2年前には予想もしていない名誉を受けました。先の著書が翻訳されて韓国で出版され、さらに「ソウル言論人クラブ賞」の「外国人特別賞」に選ばれたのです。私はこの栄誉を受けることにより、姜沆先生の功績が韓国内にも広く認められることになると思い、喜んで授賞式に出席致しました。  大洲市では中学校の副読本を作り、「日本儒学に影響を与えた」として姜沆先生を大きく取り上げました。地方の小さな市の取り組みですが、やがて日本の教科書、そして歴史書に輝かしく登場されることを夢見ているところであります。  私は市役所の職員として平凡な人生に終わるはずのところ、姜沆先生に出会い、ささやかな研究を続けるうち、大洲と霊光、さらには日本と韓国の友好・親善にも寄与することができ、感謝をしているところであります。  さらに喜しい出来事がありました。2001年3月霊光で開催されたシンポジュームのとき、来賓として出席された国会議員から流調な日本語で話しかけられたことがありました。それが李洛議員でした。  私は喜しくなり、日本語の堪能な方なら読んでいただけると、日本語の本を送りました。そしてさらに1冊を加え、これは金大中もと大統領に差し上げて下さいとお願いしたところ、このような返事がありました。「もと大統領が大変喜ばれたそうです」と書いてあります。まことに光栄なことであります。  李議員はその後全羅南道知事になりましたが、その間、大洲の姜沆先生顕彰碑を2回尋ねられ、私が案内をいたしました。郷土の誇りとして、姜沆先生を尊敬されておられるものと拝察しました。  そのときの大洲城での写真であります。  その知事が、昨年五月の政変により首相に就任されたのです。国際関係で大変な時代ですが、いつか日本に来られたとき、李首相からどのようなお言葉があるのか楽しみです。そして、もしかすると、3度目の大洲への訪問があるかもしれません。そうなれば姜沆先生もどんなにか喜ばれることでありましょう。その日を夢見ているところであります。  改めて、日本の教育・文化の大恩人、睡隠姜沆先生医業をたたえ、そのふるさと霊光郡が平和で豊かに発展することを願い、皆様のご多幸をお祈りして私の挨拶を終わります。カムサハムニダ。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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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8-12-02 / 뉴스공유일 : 2018-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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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중기의 학파들  조선조 유학은 程朱의 道學을 수용하여 치밀한 개념 분석과 엄격한 실천 행위를 강조했는데, 특히 중기에 배출된 知的 巨人들을 중심으로 학문의 활동과 내용에서 일정한 연관성 혹은 공통성을 지닌 집단을 양산하였다. 이를 ‘학파’라고 부른다면, 花潭학파·退溪학파·南冥학파·栗谷학파는 이 시기를 대표한다.   趙光祖(靜庵, 1482~1519)가 道學의 뿌리를 확고하게 내린 이후, 경기도 개성에서는 徐敬德(花潭, 1489~1546)이, 파주에서는 成渾(牛溪, 1535~1598)이, 황해도 해주에서는 李珥(栗谷, 1536~1584)가, 영남 동쪽에서는 李彦迪(晦齋, 1491~1553)이, 영남 북쪽에서는 李滉(退溪, 1501~1570)이, 영남 남쪽에서는 曺植(南冥, 1501~1572)이 학파를 형성하여 도학을 전수하였다. 호남에서도 북쪽에서는 李恒(一齋, 1499~1576)이, 남쪽에서는 金麟厚(河西, 1510~1560)와 奇大升(高峰, 1527~1572) 등이 독특한 학풍을 내세워 영향력을 발휘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이항·김인후·기대승 사후에도 17세기 초, 중반에 도학을 강론하여 제자들을 양성한 一群의 유학자들이 호남지역에 흩어져 있었다. 예컨대 담양 대산의 金大器(晩德, 1557~1631), 영광 유봉의 姜沆(睡隱, 1567~1618), 임실 덕촌의 趙平(雲壑, 1569~1647), 보성 우산의 安邦俊(隱峯, 1573~1654)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호남의 유학이 기축옥사와 임진·정유왜란을 거치면서 점차 학문적 기반이 약화되고, 더구나 17세기에 들어서는 대부분의 학인들이 경기와 호서지역으로 유학을 떠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강학의 촛불을 끄지 않았다.   강항은 영광군 남쪽 불갑산 아래 유봉리에서 태어나 유년기에 가까운 雲堤 마을로 이사했는데, 관직생활과 포로생활을 뺀 나머지 생애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강학하였다. 그는 팔대(八代) 문헌가에서 태어나 유년기에 이미 뛰어난 문장 실력과 해박한 역사 지식을 인정받았고, 3년여의 포로생활 중에 보여준 탁월한 氣節은 일본인도 존경할 정도였다. 강항의 수제자 尹舜擧는 스승의 학행을 挽詩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아름답고 밝은 문장은 지금의 屈原이요, 추상같은 높은 절개는 옛날의 蘇武로다.” 그는 포로생활에서 탈출하여 귀국한 이후에도 죄인으로 자처하고 벼슬을 멀리한 채 스스로 불갑산에 갇혔다. 강항은 찾아주는 詩友들과 담론하는 한편 그의 문장과 기절을 흠모하여 찾아온 제자들을 양성하다가 52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강항은 17세기 초반에 호남 유학을 이끈 중심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간 강항에 대한 연구는 주로 시문학과 『看羊錄』, 일본에 유학전수 등 몇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졌으나, 아직까지 교사로서의 강학활동은 깊이 있게 탐색되지 못하였다. 필자는 강항에 대한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연구가 진행되려면, 그에게 영향을 준 스승들, 교유한 친구들,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 관련 유적과 유물들까지, 그 학문적 연관성을 폭넓게 탐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발표는 이러한 관심 하에 강항의 제자들에 관한 기초적인 정보를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2. 牛溪학맥의 계승  강항은 문과에 급제한 이듬해인 1594년(28세) 校書館 正字로 있을 때에 경기도 파주로 牛溪 成渾을 찾아가 기호유학의 한 맥인 우계학맥을 계승한다. ◎ 安珦(晦軒) → 權溥(菊齋) → 李穀(稼亭) → 李穡(牧隱) → 鄭夢周(圃隱) → 吉     再(冶隱) → 金叔滋(江湖) → 金宗直(佔畢齋) → 金宏弼(寒暄堂) → 趙光祖(靜     庵) → 成守琛(聽松)/白仁傑(休庵) → 成渾(牛溪) → 姜沆(睡隱) →  성혼의 학문은 도학적 성격이 매우 짙은데 그것은 일상에 체질화되어있을 만큼 강한 실천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데 강항이 성혼의 문하를 찾았을 때, 그는 동인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정치적인 입지가 약화되어 제자들을 내보낸 채 은둔하고 있었다. 이러한 곤경을 잘 알면서도 자기의 문하를 찾아온 강항에게 성혼은 단아하고 진실한[端諒] 몸가짐을 가졌다고 칭찬했다.    강항은 왜 비교적 늦은 나이에, 그것도 정치적으로 곤경에 빠져있던 성혼의 문하를 찾아갔을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현재까지 전해져오는 성혼과 강항의 문집 속에서 이 물음을 해명할만한 자료를 거의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그 흔한 시 한 수, 편지 한 통, 제문 한 장, 어록 한 구절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메마른 자료 속에서 눈에 번쩍이는 글을 한 통 만나게 된다. 강항이 쓴 「坡山四賢書院察倫堂上梁文」이라는 글이다. 이 글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된 坡山書院의 察倫堂을 재건할 때 지은 상량문이다. 여기에서 강항은 파주지역은 魯나라처럼 현인이 많이 배출되어 학문 활동이 융성했던 곳임을 강조하고, 정주철학에서 발원한 조광조의 도학이념과 실천정신을 成守琛·成渾·白仁傑·李珥 등 네 현인이 이어받아 학행을 성취한 업적을 열거하고 있다. 이들 중 성수침과 백인걸은 조광조의 문인이고, 김굉필의 도통을 조광조가 잇고 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강항의 스승 성혼은 부친 성수침과 백인걸에게 학문적 영향을 깊게 받았고, 성혼의 道友 李珥는 성수침과 백인걸의 학행에 무한한 존경심을 표하였다. 이 서원은 네 현인이 김굉필­조광조 계통의 도학이념을 강론했던 신성한 공간이었는데, 강항이 성혼을 찾아가 수학했던 牛溪書室과는 지척의 거리에 있었다. 강항은 이 글의 말미에 자신의 소망을 다음처럼 피력하고 있다.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손한 것[入孝出悌]으로 모든 행실의 근원을 삼고, 비근한 사물을 배운 뒤에 깊은 學理에 나아가는 것[下學上達]으로 평생의 일을 삼으며, 사방의 학생들이 모두 귀의할 곳으로 여기게 하고, 높은 벼슬아치와 백성들이 모두 본보기로 삼게 하며, 소인의 변덕을 배우지 말게 하고, 유학의 哲理를 이루게 하소서.  강항은 ‘입효출제’와 ‘하학상달’이라는 유교의 윤리와 학문방법이 파산서원을 통해 끊임없이 강론되어 발현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서원의 中軸인 스승 성혼을 조선조 도학의 전통을 걸머진 학자로 여겨 한평생 귀의처로 삼으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강항 자신의 도학에 대한 인식과 실현의 욕구가 강렬했기 때문에 그의 발걸음을 성혼의 문하로 옮기게 했고, 그 문하에서 수학함으로써 “道脈의 올바름을 얻어 마침내 大儒로 성장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3. 衛道정신과 道義실천  강항이 태어날 무렵, 조선의 사상계는 성리학의 핵심 문제 곧 四端七情과 人心道心 등을 둘러싸고 李滉­奇大升, 成渾­李珥가 치열한 논변을 진행하여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미 거두고 있었으나, 강항은 이러한 성과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흔한 성리학의 용어들마저 추출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는 성리학의 이론을 철저히 분석하려는 학구적 태도에서 비껴서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강항이 성리학 세계에 대해 전혀 무관심했거나 무지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조선조의 유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주자학의 經學的 철학체계로 훈련을 받았고, 강항의 학문 활동도 조선조 주류 학문인 주자학의 범주 속에서 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문집이나 일본에서 남긴 기록들을 살펴보더라도, 성리학의 주요 텍스트나 흐름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성리학의 이론체계가 거의 결핍된 것에 비해, 강항의 道學에 대한 사유는 그 편린이나마 문집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 다음은 강항의 道와 道學에 대한 사유를 엿볼 수 있는 구절이다. 道란 천하에 편재하여 소멸된 적이 없다. 중국이라 해서 남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외국이라 해서 부족한 것도 아니다. 오직 지혜가 뛰어난 사람이 드러내 밝히고 열어서 발현하기에 달려있을 뿐이다. 우리 동방에 나라가 선 지 유구하여 그 사이에 도량이 넓은 선비가 많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그 중 道學으로 명분을 삼아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여 앎의 극치에 이르고, 뜻을 참되게 하여 마음을 바로잡는 것[格致誠正]을 공부로 여기고, 군주를 존중하여 백성을 보호하는 것[尊主庇民]을 임무로 삼은 사람을 찾는다면, 겨우 몇몇이나 있을 정도이다.  이 글은 강항이 호남 유생을 대표하여 李彦迪(1491-1553)을 공자 사당에 배향하기를 청하는 상소문의 첫 부분이다. 여기에서 강항은 지역과 민족을 초월하여 영원히 존재하는 道의 보편성을 시사하고, 탁월한 지혜를 갖춘 자들이 이를 천명하여 역사와 사회 속에서 진리를 실현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道를 자신의 학문으로 삼은 사람이라면, '대학'에서 제시한 조목을 따라 지식을 탐구하고 심성을 도야하는 공부를 수행하며, 이를 토대로 '資治通鑑'에서 말한 것처럼 관직에 나아가 자신의 포부를 펴서 세상을 구제하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 이는 道學을 내면의 도덕철학과 외면의 정치철학을 결부시켜 논의하려고 하는 사유의 한 단면을 잘 드러낸 대목이다.    강항에게 道의 표상은 경전과 역사서이다. 강항은 문인 辛思孝에게 보낸 편지에서 “道를 행하고 세상을 구제하며 군주를 보필하고 사람을 살리는 방도는 본래 典·謨·訓·誥를 놓아두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말하여, 중국 고대에 역대 제왕들의 정치철학이 들어있는 󰡔서경󰡕의 중요성을 일깨웠고, 맹자의 ‘호연지기’나 曾點의 ‘詠歸’하는 뜻도 六經을 통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지 억지로 짜내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으며, 또한 詞章을 통한 과거시험 응시를 반대하지는 않지만, 六經을 방치하고 앞사람의 문장에서 尋章摘句하거나 표절이나 일삼는 것은 유학자가 할 일이 아님을 명확히 했다. 강항에게 六經에 기반을 둔 經學은 유학자라면 반드시 걸어야할 최선의 길이요 최고의 강령이었던 셈이다. 다시 말하면 육경은 비록 고대에 형성된 경전이긴 하지만 보편적인 진리는 그것 속에 더욱 명료하게 나타나있기 때문에, 고전의 학습을 통해서 인간의 내면과 사회현실을 조화하고 통일시킬 수 있는 표준이요 원천이 되는 것이다.   강항은 경전 공부에 못지않게 역사서의 학습을 중시했다. 강항의 뛰어난 문인 尹舜擧(1596-1668)는 󰡔綱鑑會要󰡕(강항의 역사 저술, 17권 19책)의 서문에서 스승의 학문을 “경학에 근본을 두고 사학에서 참조했으며, 먼저 이치를 인식한 뒤에 문장으로 나아갔다”고 요약하고, 이 저술의 가치를 평론하여 “󰡔資治通鑑󰡕에 비교하면 겨우 5분의 1정도의 분량이지만 참으로 미묘한 뜻을 밝혀낸 定案이요 크게 완성한 良史이니 온 나라가 공유해야만할 것이다”고 극찬했다. 8세 무렵에 이미 '通鑑綱目'에 통달하여 茂長지역에 ‘綱目村’이 있을 정도였는데, 그렇다면 강항이 이처럼 역사서를 즐겨 읽은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는 문인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史學은 반드시 판단에 밝고 治亂에 통달해야 한다. 말하고 듣는 자료로만 활용하여 몸과 마음에 무익한 것은 우리 道가 아니다. 대개 글자가 만들어진 이후 곧 역사가 있었으니, 역사가 아니면 성인의 발자취를 고증하고 옛일을 징험할 수 없다.” 강항이 역사를 연구한 주목적은 과거의 사실 중에서 기억해둘 가치가 있는 사례와 피해야할 사례를 찾아내어 현실정치의 선악을 판별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통찰을 얻는 데 있었다. 그가 역사에서 얻고자 했던 道의 모습은 유희적인 관념이 아니라, 현실을 이끌어주는 실제적인 사례와 본보기였던 것이다.   유학이 제시한 도덕준칙을 따라 正道를 걷는 삶을 살고자한 강항의 신념과 의지는 이른 시기에 확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항은 9세에 지은 「幼成若天性賦」에서, 어려서부터 성인의 교훈에 입각하여 심성의 근원을 밝혀 천성의 덕을 바르게 배양해야 군자가 된다는 관점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讖緯策」에서는 緯說이 경전을 어지럽히고 妖言이 대중을 현혹시키는 폐단을 경계한 뒤, 그 원인을 道가 미약하고 교화가 밝지 못한 데서 찾아, 오래 전부터 이러한 사악한 언행을 배격하여 ‘옛 성인의 道를 지키기로[閑先聖之道]’ 다짐했음을 밝히고 있다. 강항은 道를 지키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다음처럼 말했다.   군주가 위에서 중심을 잡아 기준을 세우고 안으로 정밀히 살피고 오롯한 마음을 지녀, 六經을 드러내 밝히고 百家를 배격하되, 六藝의 설명이나 孔子의 학술과 관계없는 것들을 단호히 차단할 수 있다면, 교화가 곧 밝아지고 풍속이 저절로 바르게 되며, 집집마다 孔孟을 이야기하고 방마다 鄒魯를 전하게 되며, 선비가 先王의 法言이 아니면 감히 말하지 않고 聖人의 正經이 아니면 감히 읽지 않게 될 것이니, 九流·七略의 책이나 雜家·衆技의 학문은 대낮의 무지개요 한여름의 우박일 뿐이다.  강항도 한때는 博學을 추구하여 경전과 史書 뿐만 아니라, 제자백가서·천문·지리·篆刻 등을 두루 연구하여 獨得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인용문에서 보듯이 강항은 자기 성찰을 거쳐 六經과 六藝로 회귀하여 孔孟의 근본정신을 국가와 사회에 실현하려는 강인한 신념을 키웠던 것으로 생각된다. 강항은 포로생활 중에 만난 친구 宋檣에게 준 편지에서 “점술가의 책들이 서로 모순이 많아 열에 예닐곱은 틀린 것을 보고 그 책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운명의 길흉이야 이미 태어날 때에 정해져있는 것이니, 正道에 몸을 두어 正命을 받을 뿐이다”고 말하여, 자신의 체험을 통해 점술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正道에 의탁하는 삶을 선택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강항이 자기 성찰의 체험을 통해 緯說의 기만과 결별하고 六經의 正道로 복귀하게 되는 하나의 실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강항의 道에 대한 인식과 관련시켜 살펴보아야 할 중요한 개념은 義이다. '주역'에서는 “군자는 경건함으로써 속을 곧게 하고 의로움으로써 밖을 바르게 한다[義以方外]”고 하여 義가 내면의 곧음을 근거로 외면을 바르게 하는데 까지 관철시키는 원리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맹자가 梁惠王 앞에서 이익을 거부하고 의리를 내세웠을 때의 義는 세속적 가치를 부정하는 칼날의 예리함을 지니는 것이었다. 강항은 억류생활 중에 포로로 잡혀온 조선인들이 일본에 귀화하는 현실을 개탄하고, 그들의 부당성을 알리는 격문 속에서 “(공자가) 管仲이 아니었다면 左袵할 뻔했다고 말한 것은 모두 왕도를 존중하고 이적을 물리친다[尊王攘夷]는 뜻을 알게 함이니, 멀리 남의 나라에 귀화하려 하지 말고 세 번 사는 것보다는 ‘義가 소중함’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여,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 義라는 고귀한 윤리적 가치임을 밝히고 있다. 흔히 道義라고 불리는 것처럼, 강항의 관념 속에서도 義는 유학의 진리[道]와 이상[善]을 다양하게 변화하는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할 때에 나와 타인을 관철하는 보편적인 원리가 되는 동시에 正과 邪를 가르는 분별의 원칙이 되고 있는 것이다.   4. 강학활동과 제자들  강항은 우계 성혼의 학맥을 계승하여 강인한 道義 정신으로 무장한 관료학자였다. 그는 왜란 중인 1593년(27세)에 광해군이 전주에 주둔하면서 시행한 정시문과에 급제한 뒤 28세에 교서관 정자, 춘추관 기주관을 거쳐 29세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고, 30세에 성균관 전적으로 옮겼다가 공조좌랑을 거쳐 형조좌랑이 되었다. 1597년(31세) 여름에 이광정의 종사관이 되어 군량을 모집했으나 남원성이 함락되어 영광 앞바다에서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1600년(34세) 5월에 포로에서 풀려 부산에 도착한 뒤 선조 임금을 뵙고 고향으로 돌아와 칩거에 들어갔다. 강항은 포로의 신분이었으나 조선 선비의 기개를 잃지 않고 관료로서 일본의 정치 동향과 지리 환경 등을 조정에 보고했으나, 동인들의 비방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한 때 포로였다는 자괴감을 떨치지 못했다.    1600년 9월에 고향으로 돌아온 강항은 대구교수와 순천교수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함으로서, 관직생활을 통해 자신의 도학을 구현하려던 꿈을 스스로 접어버렸다. 대신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운제 마을의 서당에서 집안과 향촌의 자제들, 친구들의 자질들을 받아들여 강학활동을 시작하였다. 강항은 이곳에서 다수의 제자들을 양성하였고 그의 뛰어난 문장과 고고한 기절은 제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강항은 일본에서 포로생활을 할 때 藤原惺窩(1561~1619, 후지하라 세이카)와 赤松廣通(1562~1600, 아카마쓰 히로미치)에게도 교육자로서의 역할을 맡은 적이 있으나 여기에서는 논외로 한다.]    그러나 현재 강항의 문집에는 정돈된 제자들의 명부인 ‘門人錄’이 실려 있지 않아 학맥의 전승과 교육의 파급 정도를 가늠하는 데 방해가 된다. 근 20여 년간 강학활동을 하면서 다수의 제자들을 배출했을 터인데, 아직까지 이렇다 할 ‘문인록’이 문집에 실리지 않은 점은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다행히 근래에 강항의 문하에서 배출된 제자들의 정보를 알려주는 일종의 ‘문인록’들이 성첩 문서 형태로 발견되고 있다.    첫째, 1824년에 후손 姜台煥이 작성한 『誾侍錄』(종손 강진성 소장)이다. 강태환은 발문에서, 일찍이 『晉山世考』를 기록하다가 제자들의 후손가에 탐문하기도 하고 『수은집』 속에서 뽑아 적어서 삼가 명단을 만든다고 하였다. 이 문서에는 제자로 추정한 69명의 성명, 字號, 과거시험, 관직, 본관 등 짧은 정보를 기록해 두었다.   둘째, 작자 미상의 『수은문인록』(필자가 임의로 붙임, 후손 강재원 소장)이다. 이 기록 역시 성첩 문서인데 아쉽게도 앞쪽 몇 장이 떨어져 나갔다. 누락부분을 빼고 62명의 성명, 자호, 과거시험, 관직, 거주지 등이 적혀 있고, 그 뒷부분에 제자들이 스승을 위해 지은 挽詩와 스승이 제자들에게 준 시와 만시를 『수은집』 원집과 부록, 별집에서 뽑아 사제 관계임을 객관적으로 입증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제 관계라고 확증할 수 없는 글들도 많이 추출이 되어 있다.     셋째, 1941년에 윤영선이 편찬한 『朝鮮儒賢淵源圖』(동문당 간행)이다. 윤영선은 강항을 성혼의 학맥에 배열하고 그 문하에서 배출된 것으로 추정한 41명의 성명, 호, 본관, 관직과 품계, 생년 등을 나열하였다. 윤영선은 호남의 읍지를 위주로 강항의 제자들을 추출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세 가지 자료는 모두 강항 사후 2, 3백년 뒤에 작성된 것들이다. 아직 정돈되지 않은 기초적인 문서이지만 문집에 문인록이 실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나마 소중한 자료들이다. 세 자료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가나다순으로 정리하면 많은 숫자가 겹치는데 대략 85명 정도 된다. 그러나 앞으로 좀 더 세밀하게 방증자료를 대조해 보면 이 중에 강항의 제자로 볼 수 없어 삭제해야 할 인물이 약 2, 30명 정도 될 것으로 판단한다. 아래에서 인명에 밑줄을 친 인물들은 선, 후배이거나 동문, 친구, 벗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1) 강락(姜洛) :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호는 만은(晩隱)이다. 임진왜란에 의병장 고경명과 최경장에     게 의병과 군수품을 모아 보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2) 강시견(姜時見) : 1589~?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선세(善世)이다. 진사?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3) 강시량(姜時亮) :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비명(丕明)이며 호는 취송정(翠松亭)이다. 진사?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4) 강시만(姜時萬) :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호는 동강(東岡)이다. 강항의 아들이며 참봉에 제수되었다. 병자호란에 창의하였다. (연원도에 보임) 5) 강시억(姜時億) : 1600~?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천뢰(天賚)이다. 강준(姜濬)의 아들이고 강항의 조카이다. 1633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교관과 찰방을 지냈다. 병자호란에 창의하였다. 영광, 순천에 거주하였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6) 강시언(姜時彦) :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백영(伯英), 호는 하월당(荷月堂)이다. 강계오(姜繼吳)의 아들이며 무송(茂松)에서 거주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7) 강시열(姜時說) : 1625~?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은경(殷卿)이며, 호는 죽은(竹隱)이다. 강영(姜泳)의 아들이며 1651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연원도에 보임) 8) 강시회(姜時晦) :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강항의 종질이다. 진사?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9) 강영(姜泳) : 1574~?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양원(養元)이며 호는 시시당(是是堂)이다. 강항의 아우이다. 1613년 생원시에 합격했으며 영광에 거주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10) 고부립(高傅立) : 본관은 장택(長澤)이고 자는 군회(君晦)이다. 고종후(高從厚)의 아들이며 경기 전참봉에 제수되었다. 정묘·병자호란에 창의하였고 광주에 거주했다. (은시록에 보임) 11) 고부민(高傅敏) : 1577~1642. 본관은 장택(長澤)이고 자는 무숙(務叔)이며 호는 탄음(灘陰)이다. 고성후(高成厚)의 아들이며 문집으로 『탄음고(灘陰稿)』가 있다. 광주에 거주했다. (연원     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12) 구용(具容) : 1569~1601. 본관은 능성(綾城)이고 자는 대수(大受)이며 호는 죽창 (竹窓)이다. 부친은 구사맹(具思孟)이며 1590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김화현감(金化縣監)을 지냈다. 『죽창유     고』가 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13) 김경철(金景哲) : 1573~?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윤보(允甫)이며 호는 은송당(隱松堂)이다. 부친은 김상(金常)이며 남원교수(南原敎授)에 제수되었다. (연원도에 보임) 14) 김기(金夔) : 본관은 서흥(瑞興)이고 호는 죽헌(竹軒)이며 강항의 사위이다. (연원록,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15) 김남수(金楠壽) : 본관은 상산(商山)이고 자는 등로(滕老)이다. 임진왜란에 종사관으로 출정했으며 영광 불갑 원당에 거주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16) 김담(金䃫) : 1599~? 본관은 영광(靈光)이고 자는 백석(伯石)이며 호는 백산(栢山)이다. 병자호란에 창의하였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17) 김덕수(金德秀) : 1548~?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자는 득심(得心)이다. 부친은 김적(金適)이며1576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무안에 거주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18) 김상경(金尙敬) : 본관은 상산(商山)이고 자는 질부(質夫)이며 호는 죽재(竹齋)이다. 병자호란에 창의하였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19) 김상돈(金尙敦) :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김상경(金尙敬)을 잘못 쓴 듯하다. (문인록에 보임) 20) 김약여(金躍麗) : 본관은 상산(商山)이고 호는 원당(圓堂)이다. 부친은 김남수(金楠壽)이며 영광 원당(元塘)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21) 김여경(金餘慶) : 1577~? 본관은 영광(靈光)이고 호는 창주(滄洲)이며 참봉에 제수되었다. (연원도에 보임) 22) 김우급(金友伋) : 1574~1643.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자는 사익(士益)이며 호는 추담(秋潭)이다. 부친은 김대성(金大成)이며 161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목릉참봉에 제수되었다. 변이중(邊以     中)의 문인이고 문집으로 『추담집(秋潭集)』이 있다. 장성 황룡에 거주하였다. (은시록, 문인록     에 보임) 23) 김이강(金以剛) : 본관은 영광(靈光)이다. (연원도에 보임) 24) 김정발(金廷潑) :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호는 계암(桂菴)이다. 임진왜란에 창의하였다. (연원도에 보임) 25) 김지수(金地粹) : 1585~1639. 본관은 의성(義城)이고 자는 거비(去非)이며 호는 태천(苔川) 이다. 조부는 김제민(金齊閔)이며 1616년 문과에 급제하고 종성부사를 지냈다. 시호는 정민(貞敏)이고 『태천집(苔泉集)』이 있다. 고부에서 거주하였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26) 김진(金瑱) : 1599~?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자는 미중(美仲)이며 호는 간촌(簡村)이다. 부친은 김인택(金仁澤)이며 1635년 생원시에 급제하고 사복시 정에 제수되     었다. 영광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27) 나봉서(羅逢緖) : 1570~? 본관은 금성(錦城)이고 자는 언장(彦章)이며 호는 매월당(梅月堂)이다. 부친은 나덕전(羅德全)이고 증조는 나세찬이다. 1609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영광 삼서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28) 나준서(羅遵緖) : 본관은 금성(錦城)이고 부친은 나덕전(羅德全)이며 나통서의 아우이다. 진사?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29) 나통서(羅通緖) : 1572~1637. 본관은 금성(錦城)이고 자는 사장(士章)이며 호는 계봉(桂峰)이다. 부친은 나덕전(羅德全)이고 나봉서의 아우이다. 1603년 무과에 급제하고 경성판관에 제수되     었다. (연원도에 보임) 30) 나해구(羅海龜) : 1581~1660.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자는 응주(應疇)이며 호는 석호(石壕)이다. 부친은 나덕양(羅德讓)이고 나해봉의 형이다. 나주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31) 나해륜(羅海崙) : 1583~1659.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자는 응숙(應淑)이며 호는 송도(松島)이다. 부친은 나덕겸(羅德謙)이며 1624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효릉참봉에 제수되었다. 이괄의 난     과 병자호란에 창의했으며 문집으로 『송도유적(松島遺蹟)』이 있다. 나주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32) 나해봉(羅海鳳) : 1584~1638.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자는 응서(應瑞)이며 호는 남간(南磵)이다. 부친은 나덕양(羅德讓)이며 1606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경기전참봉, 별제(別提)에 제수되었     다. 『남간집(南磵集)』이 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33) 민희(閔喜) :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자는 자우(子愚)이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34) 박륜(朴淪) : 문과에 급제한 것으로 적혀 있으나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없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35) 박숙(朴俶) : 1609~1674. 본관은 무안(務安)이고 자는 여발(汝發)이며 호는 용와(龍窩)이다. 부친은 박제(朴悌)이다. (연원도에 보임) 36) 박안제(朴安悌) : 1590~1663.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자는 계심(季心)·계순(季順)이며 박안효의 아우이다. 1621년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영광군수, 병조참의를 지냈다. 묘는 예산현(禮山縣) 돈절리(敦節里)에 있고, 후손은 충청도 영동 거주했다. (은시록에 보임) 37) 박안효(朴安孝) : 1587~?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자는 백심(伯心)·인백(仁伯)이며 부친은 1603~1608년에 영광군수를 지낸 박정현(朴鼎賢)이다. 1616년 문과에 급제하고 남원부사, 전라도도사를 지냈다. (은시록에 보임) 38) 박호(朴濠) : 1586~?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자는 백유(伯遊)이다. 부친은 박동열(朴東說)이며 김장생의 제자이기도 하다. 1609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39) 반여경(潘汝慶) : 1600~? 본관은 남평(南平)이고 자는 백유(伯有)이며 호는 연강(硯江)이다. 부친은 반정(潘淨)이며 1624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장성에 거주했다. (연원도에 보임) 40) 변충원(卞忠元) : 1568~? 본관은 초계(草溪)이고 자는 신초(藎初)이며 호는 강음(江陰)이다. 부친은 변희겸(卞希謙)이며 1603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경기도 부평에 거주했다. (은시록, 문인록     에 보임) 41) 변효윤(邊孝胤) : 본관은 황주(黃州)이고 자는 자원(子元)이다. 부친은 변이중(邊以中)이며 장성에 거주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42) 송식(宋軾) : 본관은 신평(新平)이고 자는 여첨(汝瞻)이며 호는 발산(鉢山)이다. 송흠(宋欽)의 5대손이며 병자호란에 창의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43) 신사효(辛思孝) : 본관은 영월(寧越)이고 자는 공칙(公則)이며 호는 회우(晦迂)이다. 부친은 신응순(辛應純)이며 영광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44) 신엽(辛曄) : 1598~? 본관은 영성(靈城)이고 호는 도은(桃隱)이다. 부친은 신유일(辛惟一)이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45) 신응망(辛應望) : 1595~1654. 본관은 영산(靈山)이고 자는 희상(希尙)이며 호는 한사(寒沙)이다. 부친은 신장길(辛長吉)이며 1624년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장령, 파주목사를 지냈다. (연원도에 보임) 46) 신천익(愼天翊) : 1592~1661. 본관은 거창(居昌)이고 자는 백거(伯擧)이며 호는 소은(素隱)이다. 증조는 신희남(愼喜男)이고 부친은 신인(愼諲)이다. 1612년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부제학, 이조참판을 지냈다. 『소은유고』가 있다. 조찬한(趙纘韓)의 문인이며 영암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47) 신해익(愼海翊) : 1592~1616. 본관은 거창(居昌)이고 자는 중거(仲擧)이며 호는 병은(病隱)이다. 신천익과 쌍둥이 형제이다. 1613년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예조좌랑을 지냈다. 흥덕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48) 신희상(辛希尙) : 희상은 앞쪽에 나오는 신응망(辛應望)의 자(字)이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49) 심광세(沈光世) : 1577~1624. 본관은 청송(靑松)이고 자는 덕현(德顯)이며 호는 휴옹(休翁)이다. 조부는 심의겸(沈義謙)이고 부친은 심엄(沈俺)이다. 1601년 문과에 급제하고 부안군수,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휴옹집』이 있다. (은시록에 보임) 50) 안희적(安希勣) : 1587~1626. 본관은 죽산(竹山)이고 자는 무중(懋仲)이며 호는 권유자(倦遊子)이다. 함평 나산에 거주했다. 진사?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51) 양만용(梁曼容) : 1598~1651. 본관은 제주(濟州)이고 자는 장경(長卿)이며 호는 오재(梧齋) 또는 거오(據梧)이다. 부친은 양산축(梁山軸)이며 1633년 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을 지냈으며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에 봉해졌다. 『오재집』이 있으며 박동열의 문인이기도 하다. (연원     도, 은시록에 보임) 52) 양인우(梁仁宇) : 본관은 제주(濟州), 호는 낭호당(朗湖堂)이다. (연원도에 보임) 53) 오정남(吳挺男) : 1563~1626.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자는 자영(子英)이다. 부친은 오천수(吳 天壽)이며 1610년 생원시에 합격했다. 『연강집(蓮江集)』이 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54) 오희도(吳希道) : 1583~1623.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자는 득원(得原)이며 호는 명곡(明谷)이다. 부친은 오언표(吳彦彪)이며 1623년 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을 지냈다. 『명곡유고』가     있고 창평에 거주하였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55) 오희일(吳希一) : 1578~1604.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자는 백원(百原)이다. 고인후의 사위이고 오희도의 형이다. 나주 도림(道林)에 거주했다. (연원도에 보임) 56) 오희일(吳喜馹) : 본관은 낙안(樂安)이며 귀호정(龜湖亭)을 세웠다. 나주 남평에 거주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57) 유지원(柳之元) : 진사라고 하는데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없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58) 유흥세(柳興世) : 1589~? 본관은 고흥(高興)이고 자는 기지(起之)이다. 회동(會洞)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59) 윤순거(尹舜擧) : 1596~1668.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자는 노직(魯直)이며 호는 동토(童土)이다. 부친은 윤황(尹煌)이며 1633년 사마양시에 합격하고 금구현령, 영월군수를 지냈다. 김장생의 문인이기도 하며 『동토집』이 있다. (은시록에 보임). 60) 윤민헌(尹民獻) : 1562~1628.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자는 익세(翼世)이며 호는 태비(苔扉)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609년 문과에 급제하고 전라도 도사, 공조참의를 지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61) 윤훈거(尹勛擧) : 1591~1639.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자는 백용(伯庸)이다. 윤순거의 형이며 고산현감, 사축서별좌를 지냈다. (은시록에 보임) 62) 이덕현(李德顯) : 본관은 양성(陽城), 함평 장동에 거주했다. (문인록에 보임) 63) 이덕형(李德亨) : 본관은 양성(陽城)이고 함평 장동에 거주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64) 이덕후(李德厚) : 본관은 양성(陽城)이고 함평 장동에 거주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65) 이란(李灤) : 1582~1628.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자하(子河)이다. 부친은 이규빈(李奎賓)이며 1613년 무과에 급제하고 전라우수사,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영광 남산에 거주했     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66) 이상원(李尙元) : 1597~?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순경(舜卿)이며 호는 제월정(霽月亭)이다. 부친은 이설(李渫)이며 1624년 진사시에 급제하고 의금부도사를 지냈다. (연원도에 보임) 67) 이소(李昭) : 본관은 함평(咸平)이고 부친은 이홍간(李弘諫)이며 강항의 사위이다.     생원?(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68) 이안눌(李安訥) : 1571~1637.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자민(子敏)이며 호는 동악(東岳)이다. 1599년 문과에 급제하고 담양부사, 예조판서를 지냈다. 『동악집(東岳集)』이 있다. (은시      록, 문인록에 보임) 69) 이율(李瑮) :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자는 문진(文縝)이며 호는 오휴(五休)이다. 이은(李誾)의  증손이며 영광 보촌서원에 배향되었다. 『오휴당유고』가 있고 보촌(甫村)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70) 이장(李壵) : 1594~?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호는 농아(聾啞)이다. 조부는 이응종(李應鍾)이며 병자호란에 창의했다. (연원도에 보임) 71) 이전(李㙉) : 1583~?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호는 초당(草堂)이다. 벼슬은 충위(忠衛)이고 능주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72) 이진명(李晉明) : 본관은 양성(陽城), 함평에 거주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73) 이춘영(李春英) : 1563~1606.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실지(實之)이며 호는 체소재(體素齋)이다. 부친은 이윤조(李胤祖)이며 1590년 문과에 급제하고 예천군수를 지냈다. 성혼(成渾)의 문인이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체소집(體素集)』이 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74) 이홍간(李弘諫) : 1574~? 본관은 함평(咸平)이고 자는 사직(士直)이다. 부친은 이옥(李玉)이며 조부는 이만영(李萬榮)이다. 1613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찰방에 제수되었다. 남산에 거주했다.(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75) 이홍심(李弘諶) : 본관은 함평(咸平)이고 자는 백신(伯信)이다. 부친은 이곤(李琨)이며 조부는 이장영(李長榮)이다. 남산에 거주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76) 이홍열(李弘說) : 1603~? 본관은 함평(咸平)이고 자는 사필(士弼)이며 호는 우수(迂叟)이다. 부친은 이광(李珖)이며 조부는 이만영(李萬榮)이다. 찰방에 제수되고 남산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77) 이훤(李晅) : 본관은 함평(咸平)이고 부친은 이홍간(李弘諫)이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78) 이휘(李暉) : 1597~? 본관은 함평(咸平)이고 자는 국서(國舒)이다. 부친은 이홍간(李弘諫)이며 1642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영광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79) 임련(林堜) : 1589~1648.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자는 동야(東野)이며 호는 한호옹(閑好翁)이다. 부친은 임서(林㥠)이고 임담의 형이다. 사헌부장령, 우승지를 지냈다. (은시록에 보임) 80) 임담(林墰) : 1596~1652.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자는 재숙(載叔)이며 호는 청구 (淸臞)이다.  부친은 임서(林㥠)이며 1635년 문과에 급제하고 이조판서를 지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며 박동열의 문인이기도 하다. (연원도, 은시록에 보임) 81) 정덕원(鄭德遠) : 누구인지 모르겠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82) 정수(丁燧) : 본관은 영광(靈光)이고 호는 영모정(永慕亭)이며 의병을 모집하였다.(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83) 정제원(丁濟元) : 1590~1647. 본관은 영성(靈城)이고 자는 백인(伯仁)이며 호는 취우당(醉愚堂)이다. 부친은 정건(丁鍵)이며 김장생의 문인이기도 하다. 『취우당집』이 있다. 정묘호란에 창의하였고 영광 용두(龍頭)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84) 정협(丁鋏) : 1565~1618. 본관은 영광(靈光)이고 자는 자장(子長)이며 호는 성경재(誠敬齋)이다. 정건(丁鍵)이라고도 한다. 부친은 정희맹(丁希孟)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성경재집』이 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85) 최계조(崔繼祖) : 본관은 삭녕(朔寧)이고 자는 비승(丕承)이다. 부친은 최준문(崔濬文)이다. 성혼의 문인이다. 남원에 거주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앞으로 많은 고증과 증보 과정을 거쳐 강항의 제자를 정돈해 간다면 좀 더 충실한 문인록이 작성될 것으로 기대한다. 우선 강항의 제자로 볼 수 있는 60여명만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드러난다.    먼저 지역적으로 보면, 강항의 제자들은 호남과 충청도 일부 지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그가 20여 동안 강학했던 거점을 영광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함평과 나주 출신의 제자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특기할만한 사항은 강항의 제자 중에는 강항 사후에 발발한 정묘·병자호란에 창의하여 구국의 깃발 아래로 달려간 실천적 유학자가 매우 많았다는 점이다. 제자들이 스승의 道義 정신과 氣節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반증이 아닐까 생각된다.   과거 합격의 숫자로 보면, 소과에 응시하여 생원·진사에 오른 제자들이 20여 명이고, 대과에 급제한 제자들도 7, 8명 되며, 관직에 진출하여 고위직에 오른 제자도 적지 않다. 문집을 내지는 못했지만 관료로서 뚜렷한 업적을 남긴 박안제·박안효 형제와 신응망, 임련과 임담 형제는 향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야할 것이다.   문집의 유무로 보면, 현재까지 약 9명의 제자들이 남긴 9종의 유고가 간행되었다. 고부민의  『灘陰稿』, 나해륜의 『松島遺蹟』, 나해봉의 『南磵集』, 신천익의 『素隱遺稿』, 양만용의 『梧齋集』, 오희도의 『明谷遺稿』, 윤순거의 『童土集』, 이율의 『五休堂遺稿』, 정제원의 『醉愚堂集』은 앞으로 강항과 그 제자들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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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8-12-02 / 뉴스공유일 : 2018-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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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강항(姜沆)은 본관은 진주, 자가 태초(太初), 호가 수은(睡隱)으로 영광에서 1567년(명종 22)에  태어났다. 1593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 공조좌랑, 형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지인들이 수은에게 준 시 속에 ‘원외(員外)’가 나오는데 이는 ‘랑(郞)’을 역임하여서 그런 것이다(원외는 원외랑의 준말).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군에 피랍되어 일본에서 억류 생활하다 1600년에 돌아왔다. 이후부터 1618년(광해군 10) 생을 마칠 때까지 영광에서 19년간 살며 독서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이에 반해 정홍연(鄭弘衍)은 본관은 동래, 자는 덕일(德逸), 호가 죽창(竹窓)으로 서울에서 수은보다 2년 앞서 1565년(명종 20)에 태어났다. 그는 1593년에 “余避亂于海隅 僑居一巷”이라 하여 왜란을 피해 영광으로 내려왔다. 둘째 아들이 1580년 생인 점으로 보아 가족과 함께 왔다가 영광군 백수읍 지산리에 정착하였다. 광해군 때에 선공감 감역, 제용감 판관, 거창현감, 양천현령, 동복현감, 익산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1624년부터는 관직을 그만두고 영광에서 살다 1639년(인조 17)에 생을 마쳤다. 함평 출신의 유학(幼學) 정색(鄭穡)이 죽창 만사에서 “금서(琴書)를 스스로 즐김은 타고난 소질이고, 시주(詩酒)를 무단히 바쁘게 하였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죽창은 영광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수은(睡隱)과 죽창(竹窓)은 수은이 일본에서 돌아온 1600년부터 수은이 생을 마감한 1618년까지 영광에서 교유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들의 교유에 관한 연구는 당시 영광 지역사회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잘 알려지지 않은 수은의 영광에서의 활동과 아직 학계에 소개되지 않은 죽창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점을 알게 해줄 것이다. 특히 수은은 일본에 주자학을 전파한 인물로 알려져서 그에 대한 연구는 꽤 많은 편이지만, 지역활동에 대해서는 연구가 일천한 수준이다. 그리하여 그의 많은 제자들에 대한 분석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때에 의병을 일으켰던 점 등 많은 사실들이 밝혀져 있지 않다. 그리고 죽창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거의 없고, 󰡔영광읍지󰡕 본조음사 조항에 “호가 죽창으로 동래인이며 대제학 사(賜)의 후손이다. 군수를 지냈으며 지산(芝山)에 사당이 세워졌다.”고(사당이란 芝山祠를 말한다), 그리고 아주 짧은 󰡔죽창집󰡕 해제만이 참고 될 따름이다.   수은과 죽창은 깊게 교유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정치적으로 두 사람 다 서인(西人)으로 당색이 같았다. 수은의 제자로 서인의 대표 인물 윤순거(尹舜擧, 1596~1668)가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죽창은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기뻐서 지은 시가 있다. 수은과 죽창이 교유하였던 변충원, 임서, 임전, 김우급 등도 반광해군 인물이어서 한 때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지기로서 교유하였다. 이 점에 대해 수은의 큰 아들 강시만(姜時萬, 1603~1673)이 죽창의 죽음을 애도한 만사에서 “昔我先君友 追隨金石堅 習池同醉月 金谷共華筵”이라고 하였다. 즉, 죽창은 나의 아버지 친구로서 서로 상종하시기를 금석과 같이 하셨고 달빛 아래에서 흥겨운 주연을 함께 즐기셨다는 말이다. 이 구절은 두 분이 매우 가까웠음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두 사람의 깊은 교유는 우선 서로의 제자⋅지인을 상호 격려하고 지도하였다. 그리고 집안 간의 결혼으로도 이어졌는데 죽창의 손녀 사위, 즉 죽창 둘째 아들 광신(廣紳)의 사위로 강시경(姜時儆)이 들어왔다. 두 분이 교유한 흔적은 두 인물의 문집 속 창화 시 속에 담겨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분석해 보겠다. 그러나 그 정도만 가지고는 교유의 폭과 내역을 밝혀내는 데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필자는 두 분의 문인록(門人錄)이나 만사록(挽詞錄)을 교차 검토하는 작업도 진행해 보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은⋅죽창 지인들의 정치적 성향이나 대외활동에 대해서도 알아보겠다. 아직까지 기초적인 인적 사항마저 정리되어 있지 않아, 이 글은 후일의 수정⋅보완이 필요함을 미리 밝혀둔다. 2. 문인록 속의 교유    1) 수은 󰡔은시록(誾侍錄)󰡕과 죽창   수은은 일본에서 돌아온 후 관직 제수에도 불구하고 나가지 않고 영광에서 많은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 점과 관련하여 6대손 강태환(姜台煥)이 ‘崇禎紀元後三甲申’ 입춘일에 작성한 󰡔은시록(誾侍錄)󰡕을 살펴보자. 󰡔은시록󰡕은 수은 문인록으로 현재 수은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다. 강태환은 󰡔은시록󰡕 발문에서 일찍이 󰡔진산세고(晋山世攷)󰡕를 쓰면서 유집(遺集, 󰡔수은집󰡕) 중에서 초록하여 적고 문예가(門裔家)에 물어서 기록하여 삼가 안(案)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은시록󰡕은 수은이 직접 작성한 것이 아니라, 나중에 강태환이 󰡔진산세고󰡕를 쓰면서 수은 문인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을 뽑아서 해당 집안에 확인한 후 만든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더러 착오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참고로 이 󰡔진산세고󰡕가 무엇이고 현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하지 못 하였다. 1476년(성종 7) 강희맹(姜希盟)이 편집⋅간행한 강회백(姜淮伯), 강석덕(姜碩德), 강희안(姜希顔) 등의 3대에 걸친 문집 진산세고(晉山世稿)와는 다른 것으로 추정된다.   󰡔은시록󰡕에는 모두 69인의 수은 문인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죽창집󰡕 속의 시에 상당히 많은 사람이 등장한다. 예를 들면, 강시언(姜時彦), 박안제(朴安悌), 변충원(卞忠元), 신응망(辛應望), 유흥세(柳興世), 정제원(丁濟遠) 등이 확인된다. 그리고 수은의 󰡔은시록󰡕 속 69인 가운데는 죽창 만사록에 강시억, 강시언, 김우급, 김진, 박안제, 박안효, 신응망, 유흥세, 이율, 임련 등 10인이 보인다. 이 중에서 신응망과 정건⋅제원 부자에 대해서만 수은⋅죽창과 어떤 관계였는지를 자세히 살펴보겠다.   먼저, 신응망에 대해 알아보겠다. 신응망(辛應望, 1595~1654)은 본관은 영산, 자는 희상(希尙), 호는 한사(寒沙)로 영광에서 태어났다. 그는 “임진왜란 뒤로 가산이 탕진되었으므로 어머니가 식량을 꾸어주어 수은 강항의 문하에 가서 수업하였는데, 학문이 날로 진취되었다.”고 할 정도로 수은의 독실한 제자였다. 수은 문하에서의 수학을 토대로 1617년 사마시, 1624년 증광시 급제 후 승문원 주서를 거쳐 흥양현감(興陽縣監, 1628~1629), 공조정랑(工曹正郞), 예조정랑(禮曹正郞), 경상도사(慶尙都事, 1631), 함평현감(咸平縣監, 1634~1635), 황해도사(黃海都事, 1642), 공홍도사(公淸都事, 1645),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1646~1647), 파주목사(坡州牧使), 1649),  장흥현감(長興縣監, 1652~1654) 등을 역임하였다. 신응망의 형이 신응순(辛應純, 1572~1636)이다. 신응순은 자는 희순(希淳), 호는 성재(省齋)이고, 1603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성재집󰡕과 󰡔성재만록󰡕을 남겼다. 그의 아들 신사효(辛思孝)가 󰡔은시록󰡕에 수록되어 있으니 수은 문인이었음에 분명하다.   죽창은 신응망에게 많은 시를 지어주고 서로 창화하였다. 「送寒沙佐幕嶺南」, 「次希尙在洛韻述懷」, 「別贈辛正郎赴闕」, 「送辛希尙佐幕嶺南時赴闕之行仍述自懷」, 「送辛都事之京」, 「寄辛都事獨賞雙溪竹」, 「與寒沙及諸公唱和」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送寒沙佐幕嶺南」, 「送辛希尙佐幕嶺南時赴闕之行仍述自懷」는 신응망이 1631년(인조 9)에 영남도사로 나가는 것을 축하해준 시이다. 이는 비록 수은 사후에 일어난 일이지만, 죽창이 수은의 제자들과 널리 교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죽창과 신응순 사이에 오고간 시도 적지 않게 있다. 동생 신응망이 죽창 집에 가서 여러 날 어울리며 지은 시의 첩(帖) 형에게 보여주자, 형인 신응순이 차운한 시가 󰡔성재집󰡕에 여러 편 실려 있다.   이어, 정건⋅제원 부자에 대해 알아보겠다. 정희맹(丁希孟, 1536~1596)은 본관은 영성(영광), 자는 호연(浩然), 호는 고산(孤山)⋅선양정(善養亭)이다. 성수침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영광 수호를 위해 의병을 일으켰고, 문집으로 󰡔선양정집󰡕을 남겼다. 그의 둘째 아들이 정건(丁鍵, 1565~1618)이다. 정건은 본명은 정협(丁鋏)으로, 자는 자장(子長)‚ 호는 성경재(誠敬齋)이고, 문집으로 󰡔성경재집󰡕이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을 하였고, 광해군 계축년에는 분산(粉山) 아래에 축실(築室)하고서 두문불출하였다고 한다. 정건은 수은보다 2년 선배인데 󰡔은시록󰡕에 수은 제자로 기록되어 있다. 정건이 초청하는 편지를 보내자, 수은이 가을까지 기다리지 않고 찾아가겠다는 답장을 보낸 적이 있어서(「자장 정협에게 답하다」), 󰡔은시록󰡕에 수록된 것 같다. 윤운구(尹雲衢)가 영광 연흥사에서 수은과 정건이 함께 어울린 적도 있다(「연흥사에서 장보의 시를 차운하다가 정자장이 먼저 돌아감으로 끝귀절에 희롱하다」). 정건의 아들이 정제원(丁濟遠)인데 자가 백인(伯仁)으로, 역시 󰡔은시록󰡕에 수은 문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수은집󰡕에는 그와 관련된 글은 발견되지 않는다. 󰡔은시록󰡕 첫 페이지 󰡔은시록󰡕 발문    죽창은 정건에 대해 ‘經世之才’라고 평하였다(「묘갈명」). 그리고 정제원이 대곡(大谷)에 새 집을 짓자 가서 하룻밤을 자면서 축하해 주었다(「丁伯仁大谷新軒夜吟」). 그리고 정제원의 어머니 강씨(姜克讓의 딸)가 죽자 만사를 지어 애도하였는데, 평생 펼친 부도(婦道)가 자손들에게 이어지고 있다고 말하였다(「挽丁伯仁母夫人」). 또한 정제원이 늦게 아들을 낳자 축하해주었는데, 그대 집에 경사가 겹쳐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였다(「賀丁伯仁晩得奇男子」).   󰡔죽창집󰡕을 보면, 선양정(善養亭)을 읊은 시가 꽤 많다. 선양정이란 정희맹이 용산(龍山) 북쪽에 있는 용수(龍水) 위 산록에 수칸으로 지은 누정 별서이다. 그래서 그런지 정씨들과 관련된 시 또한 다수 눈에 띈다. 󰡔성경재집󰡕에 죽창에게 보낸 편지가 4편 수록되어 있다. 죽창은 정희맹의 아들 정건의 만사를 지었다.     2) 죽창 만사와 수은   󰡔죽창집󰡕 부록에는 70 평생을 살다간 죽창에 대한 36인의 만사(挽詞)가 수록되어 있다. 만사란 가까운 사람이 읊은 것이란 점을 감안하면, 만사록 수록자는 죽창의 절친이나 제자였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 가운데 󰡔은시록󰡕에 이름이 수록되어 있는 인물이 여럿 있다. 강시억(姜時億), 강시언(姜時彦), 김우급(金友伋), 김전(金瑱), 박안제(朴安悌), 박안효(朴安孝), 신응망(辛應望), 유흥세(柳興世), 이율(李慄), 임련(林堜) 등이 그들이다.    이 가운데 박안효⋅안제 형제는 본래 서울 사람이다. 박씨 형제가 수은의 제자가 된 계기는 그의 아버지 박정현(朴鼎賢)이 영광군수를 역임한 것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박정현은 1603년부터 1608년까지 6년간 영광군수를 역임하였다. 박안효가 1639년 죽창 만사에서 오성(筽城, 영광 별호) 고을에서 상종한 지 40여 년 된다고 한 것으로 보아, 수은이 일본에서 돌아온 1600년 이후에 수은 문하에 들어간 것이 분명하다. 동생 박안제는 동헌(東軒)에서 다시 만나 남루(南樓)에서 헤어진 지 10여년이 지났다고 하였다. 박씨 형제가 수은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박정현의 이임으로 영광을 떠나자, 수은은 「박백심⋅계심 형제를 보내며(안효⋅안제)」라는 시에서 “총각 시절 서로 만났던 곳에서, 이제 보니 두 장부가 되었구나”라고 말하였다.    한편, 죽창이 박씨 형제와 만난 때는 수은이 세상을 떠나고, 박안제가 영광군수로 온 1628(인조 6)~1630년(인조 8)이다. 이 시기에 죽창이 박씨 형제에게 주거나 창화한 시가 상당히 많다. 「次朴使君季順韻仍呈雲錦亭中」, 「與朴使君連衾奉別」, 「朴使君季順九峀少時會」, 「次朴使君季順會風香亭韻」 등이 있다. 죽창이 박안제 군수와 운금정(수은 기문), 구수사(군 서 20리 구수산), 풍향정 등지에서 함께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與朴使君連衾奉別」을 보면, 3년 우로(雨露) 아래에서 인정(仁政)을 베풀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함께 자며 이임식까지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나머지는 대부분은 영광이나 그 인근 출신이다. 그 가운데 이율은 만사에서 죽창으로부터 평생 과분한 권장을 받았다고 하였으니, 죽창 문하에서 수학을 하거나 교화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김우급(金友伋, 1574∼1643)은 만사에서 죽창에 대해 죽창이 동복현감(1621~1622)으로 부임하던 날 본인은 궁려(窮廬, 폐모론 반대로 유적 삭거)에 있었지만, 10년 만에 편지(만사) 한 장 보낸다고 한 것으로 보아, 친하지만 중간에 다소 소원하였던 것 같다.   여기서 한 가지 특징적인 점은 죽창에 만사를 보낸 사람 가운데는 수은 제자 외에, 강시억(姜時億, 수은 형 姜濬의 큰 아들), 강시만(姜時萬, 수은의 큰 아들), 정명달(丁名達, 수은 동생 姜泳의 사위) 등 수은 집안사람들이 상당수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강시억은 만사에서 ‘自我連家歲二周, 忘形幾度樂同遊’라 하여 이웃으로 산지가 2년이나 되었고 그 기간 동안 함께 노닌지가 여러 번이라고 하였다.   󰡔죽창집󰡕 서문 죽창 만사   이 외에 수은 친인척 가운데 죽창과 가까이 보낸 이가 있다. 󰡔수은집󰡕을 보면, 수은의 종숙인 사추(士推) 강극서(姜克恕)가 나온다. 종숙과 만나서 서울 이야기 하였다고 하니, 그는 서울 출신인 것 같다. 데릴사위가 되어 살면서 쇠미함을 퍽이나 개탄하기에, 수은이 시로써 위로해 준 적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는 재력을 모았는지, 한강 양화도 경치 좋은 곳에 집도 지었다.   이런 강극서에 대해 죽창 또한 많은 시를 주고받았다. 그 가운데 죽창이 양천현감일 때 꿈속에서나 보았던 강극서가 기약도 없이 배를 타고 방문하였다가 돌아갔다. 서울에서 남쪽 객들이 만나니 밝은 달빛이 양천 하늘 정자 위에서 비친다고 하였다. 동헌에서 같이 잠을 자며 객지 생활 이야기를 많이 하였던 것 같다. 이처럼 죽창에 만사를 보낸 사람 가운데 수은 문인들은 물론이고 친족들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의 교유도 활발하였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수은과 죽창 두 분 사이의 교유가 두터웠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3. 문집 속의 교유   1) 󰡔수은집󰡕과 죽창   󰡔수은집󰡕 속에는 죽창과 교유한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죽창이 직접 거명된 시 두 편을 살펴보자. A - 鄭益山欲以醉仙弟妹試我戲寄 B - 舟中次鄭益山弘衍韻 小橋家在九峯西。聞說春魂未解迷。 居士不知雲作夢。禪心已似絮黏泥。 自慙山鳥驚檀板。忍許靑鸞伴木鷄。 茹藘縞衣聊樂我。半生曾擧案眉齊。 風輕海闊暮帆斜。已落殘陽又月華。 躑躅成山君莫算。滿船淸唱盡名花。   A는 「정익산(鄭益山)이 취선(醉仙)이란 제매(弟妹)로 나를 시험하고자 하여 희작(戲作)하여 보내다」이다. 정익산이란 익산군수를 역임한 정홍연이란 말이다. 정홍연이 익산군수를 역임한 때는 1622~1623년이다. 이때는 수은이 죽고 없는 시기이다. 따라서 본래는 정홍연의 자나 호가 적혀 있었을 텐데 후손이 문집을 편집할 때에 ‘익산’이란 말을 추가하였을 것 같다. 내용을 보면, 수은이 구봉(九峯, 구수산?) 쪽으로 놀러왔다. 구수산은 정홍연이 살고 있는 곳이다. 이때 죽창이 ‘여동생’(기생?)으로 하여금 수은의 수청을 들어주라고 했는데 그것을 수은이 반평생 동안 밥상 차려준 아내 생각에 거절한 내용이다.    B는 「배 안에서 정익산의 운을 차하다」이다. 수은은 영광군수의 부름을 받고 서포(西浦, 법성포)에 갔다. 때는 봄철 단오쯤 되었던 것 같다.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선유(船遊) 놀이도 예약되어 있었다. 그때 수은은 죽창과 한 배에 탔다. 죽창이 선창을 하자, 수은이 그에 차운한 것이다. A와 B는 동일 시기에 일어난 일은 아닌 것 같지만, 수은이 구수산이나 법성포 등 영광 서쪽 지역을 자주 방문하였음을 알 수 있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죽창과의 교유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와는 달리 죽창은 거명되어 있지 않지만, 죽창과 함께 하였을 것으로 판단되는 시도 󰡔수은집󰡕 속에 다수 수록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長沙의 읍재 子愼 林복(㥠로 개명)이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감을 보내다」라는 시를 검토해 보자. 장사(長沙)란 무장의 별호이고, 자신(子愼)은 임서(林㥠, 1570~1624)의 자호이다. 임서는 무장현감으로 1604년(선조 37) 부임해 와서 1609년(광해군 1)까지 6년간 근무하였다. 그 사이 수은은 임서와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었다. 자주 만났던 것 같다(「사군 임자신이 이름난 미녀를 별원에다 두고 소오로 이름하였다」). 따라서 위 시는 임서가 무장을 떠나는 1609년에 수은이 지은 것이다. 이를 계기로 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수은은 임서의 두 아들 임련(林堜, 1589~1648, 자 東野, 호 閒好⋅夢坡), 임담(林墰, 1596~1652, 자 載叔, 호 淸臞)을 문인으로 두었다. 임련은 1604년에 아버지의 명에 의해 강항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수은 사후일텐데, 임련은 강수백(姜壽伯, 누구의 자일 것 같음)을 대하고서 스승이 살았던 운제(雲堤)를 떠올렸다. 임담의 경우 9세이던 1604년에 아버지를 따라 무장현에 가서 그곳 거사(居士) 한흡(韓洽)에게서 수학하였다. 그리고 14세이던 1609년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교관(敎官) 김경선(金慶先)에게 취학(就學)하였다.    임서가 무장현감으로 있으면서 수은을 만날 때 죽창도 함께 하였다. 죽창은 이 인연을 계기로 임서에게 「임자신이 진현(陳玄)을 보냄을 사례하다」라는 시를 지었고, 그의 아들 임련이 죽창 만사를 보냈다. 이때 수은이 「松沙 別館에서 鳴皐의 운을 차하여 거문고 퉁긴 자에게 주다」라고 하였듯이, 임전(任錪, 1560~1611. 본관 풍천, 문집 󰡔명고집󰡕)과도 교유하였다. 마찬가지로 이때 죽창 또한 임전과 교유하였다.     2) 󰡔죽창집󰡕과 수은   󰡔죽창집󰡕 속에는 수은에게 주거나 수은과 함께 한 시가 수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한 일화를 살펴보자. 승려 현상인(賢上人, 󰡔수은집󰡕에는 義玄으로 나온다)이 봄에 수은을 찾아와서 시축(詩軸) 서문을 요청하였다. 가을에 사미승을 보내서 재촉하며 두류산⋅금강산으로 떠난다고 하였다. 하는 수 없이 수은은 서문을 지어주었다. 이와 관련된 시문이 󰡔수은집󰡕 속의 「贈玄上人用玄洲韻」, 「題義林詩軸」, 「僧義玄求詩」, 「送義玄入頭流序」이다.    죽창도 수은의 ‘軸詩序’ 끝에 수은 시를 차운하여 시를 지었다. 「太初 姜友의 운을 차하여 賢上人 軸詩序 끝에 쓰다」라는 시에서 종소리에 암자에서 새벽잠을 깨고 보니, 스님은 향불 피워 예불을 올린다고 하였다. 그리고 죽창도 ‘軸詩序’를 썼다. 사연은 이렇다. 죽창이 영남에 있었다. 영남에 있었다는 말은 거창현감(居昌縣監)을 말한 것 같다.   󰡔거창읍지󰡕에 ‘丙辰來 丁巳去’라고 적혀 있으니, 죽창은 1616~1617년 재임하였다. 그때 현상인이 방장산을 유람하면서 찾아왔다. 죽창이 보니 총명하고 단아한데다 유학경전과 역사서까지 조금 알고 있어 가히 대화할만 하였다. 그러고 죽창은 영광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현상인이 옛 정을 잊지 않고 죽창이 살고 있는 적막한 바닷가를 찾아왔다. 죽창은 그와 한담을 나누었다. 그 끝에 소매에서 수은의 편지를 내 보이니, 죽창은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현상인이 스스로 율시 한편을 읊어 주면서, 죽창으로 하여금 그에 대해 창화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죽창은 인정과 의리상 안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니 사양하겠다고 말하였다. 더군다나 대선비 수은 필적 옆에 자신의 글을 댄다는 것은 더더욱 그럴 수 없다고 하였다. 당시 수은은 문장과 인물이 높아 그의 글을 받아가려는 사람이 많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아 사양하였지만 수은의 편지까지 내보이며 간곡히 요청함을 저버릴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글을 적는다고 하였다. 󰡔죽창집󰡕에는 이 현상인에게 지어준 시가 여러 편 수록되어 있다. 4. 수은과 죽창의 지인들   수은과 죽창의 지인을 보면, 몇 가지 공통분모가 발견된다. 하나는 수은⋅죽창의 지인 가운데 영광군수가 들어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한 제자를 두 사람이 지도하였다는 점이고, 그리고 두 사람의 지인들이 호란 의병을 일으켰다는 점 등이다. 하나씩 살펴보겠다.   첫째, 영광군수는 물론이고 인근의 무장현감, 무안현감, 광주목사 등과 어울린 글이 두 문집에 많이 수록되어 있다.   󰡔수은집󰡕을 보면, 무안군수 정념(鄭恬)⋅鄭운, 무장현감 성계선(成啓善, 1602~1603 재임)⋅임서(林㥠, 1604~1609 재임) 등이 보인다. 그리고 영광군수로는 경섬(慶暹, 1600~1601 재임), 이춘기(李春褀, 1602~1603 재임), 박정현(朴鼎賢, 1603~1608 재임), 윤황(尹煌, 1609~1613 재임), 유석증(俞昔曾, 1613~1615 재임) 등이 확인되고 있다. 이 가운데 수은은 1609년부터 1613년까지 5년간 영광군수로 재임한 윤황과 가깝게 지냈던 것 같다. 시기적으로는 일본에서 돌아온 후 마음이 안정된 때여서 그랬을 것 같고, 수은과 윤황 같이 우계 성혼의 제자이고, 윤황은 우계의 사위이기도 하다.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윤황에 대해 「尹侯를 보내면서」라는 시에서 수은은 윤황을 ‘斯文의 正脈’이라고 하였다. 윤황은 윤훈거(尹勳擧, 尹勛擧), 윤순거(尹舜擧), 윤상거(尹商擧), 윤문거(尹文擧), 윤성거(尹成擧), 윤선거(尹宣擧) 등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첫째와 둘째 아들 윤훈거⋅순거가 수은의 제자이다. 수은은 영광을 떠나는 윤훈거⋅순거 형제에게 내외가 명가의 후예로서 똑같이 귀한 기풍 남아 있다고 하면서, 전날에 글을 읽던 곳에서는 물소리만 졸졸 들린다고 말하였다(「윤여시⋅여관 형제와 작별하다」).   󰡔죽창집󰡕을 보면, 무장현감 임서가 보인다. 그리고 영광군수로는 정양필(鄭良弼, 1624~1628 재임), 박안제(朴安悌, 1628~1630 재임), 임광(任絖, 1630~1631 재임), 박황(朴潢, 1631~1632 재임), 윤효영(尹孝永, 1634~1635 재임), 송몽석(宋夢錫, 1635~1637) 등이 확인되고 있다. 정양필 등 영광군수는 모두 수은 사후에 재임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들 영광군수를 매개로 해서는 수은 사후여서 수은과 죽창이 교유할 수는 없었지만, 무장현감 임서를 통해서는 상호 교유가 있었다. 박정현⋅안제 부자의 경우도 박안제를 통해서는 시기적으로 수은과 죽창이 교유할 수는 없었지만, 박정현을 통해서는 상호 교유가 가능하였다. 특히 󰡔수은집󰡕이나 󰡔죽창집󰡕을 보면, 영광⋅무장 두 수령과 함께 어울린 적이 있었다.     둘째, 한 사람에 대한 격려와 지도 내용이 두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한 인물로 변충원(卞忠元, 1568~?)을 들 수 있다. 변충원은 수은보다 1년 뒤 1568년(명종 22)에 태어나서 1603년(선조 36)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는데, 그 좌목에 거주지가 경기도 부평으로 기록되어 있다. 1615년(광해군 7) 7월에 반광해군 역모 혐의로 문초를 받고 10월에 영광으로 유배되었다(󰡔응천일록󰡕). 이때 수은 문하에 와서 수학을 하였을 것 같다. 유배 생활은 1624년(인조 2) 갑자년까지 이어졌다. 갑자년에 의병이 일어나자 자원하여 쌀을 바쳤다. 해배 시기는 알 수 없지만, 1624년 정도 추정할 수 있다. 해배 이후 김포현령을 역임하였다. 도임년은 알 수 없지만, 이임년은 1627년 또는 이 이전이다. 그런데 또 영광에 왔다가, 정묘년(1627) 10월에 영광 우사(寓舍)에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따라서 변충원은 영광에서 유배 생활하고 있던 1615~1624년 또는 재차 내려온 1627년 무렵에 수은과 죽창을 따랐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은시록󰡕에 수은의 문인으로 나와 있는 인물인데, 󰡔죽창집󰡕을 보면 죽창의 문인으로도 보여진다.   󰡔수은집󰡕을 보면, 변충원과 관련하여 다섯 편의 시가 있다. 수은은 「卞江陰의 운을 차하다」에서 나도 3년 동안 이역만리에 있었다고 하면서 현재를 너무 탓하지 말라고 당부한 것으로 보아, 변충원은 영광에서 유배 생활 중이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벽지에 오는 이 없는 터에 일부터 찾아오니 고맙다고 말하였다. 「藎初가 찾아와 그 운을 차하다」에서도 앞 시와 비슷한 내용을 읊었다. 「변신초의 시를 차운하다」에서는 밤에 연회가 있었고, 「변신초의 운을 차하다」에서는 북객(北客)이 가려 한다고 보아, 수은 생전에 해배 시도도 있었던 것 같다.   󰡔죽창집󰡕에도 변충원과 관련된 시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변시초에게 차운하여 주다」를 보면, ‘昔年交契在皇州, 此日重逢碧海頭’라고 하였다. 전에 서울에서 만난 적 있었는데, 오늘 바닷가 영광 땅에서 다시 본다고 하였다. ‘聖代卽今多雨露, 願君休道逐臣愁’라고 하였다. 성대, 즉 광해군이 물러나고 인조가 즉위하여 지금 은혜(사면복권)가 많으니, 곧 해배될 것이니 축신, 즉 유배객이라고 신세를 한탄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리고 「변군 운에 차하여 重陽을 읊으다」를 보면, 바닷가 산봉우리에 올라간 것 같다. 총상인(聰上人)도 있었으니, 장소는 어느 절(구수사?)이었을 것 같다. 바다입구 흰 모래에 석양이 비추니 더욱 밝게 보이는 좋은 경치였다. 잔을 주고받아 취기가 오르자 시를 지었던 것 같다.    셋째, 수은과 죽창을 따랐던 사람들은 나중에 의병을 일으킨다. ①이괄의 난 때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사람들을 수록한 문건이 󰡔호남모의록󰡕이다. 여기에는 영광 출신으로 신유일, 신응순, 이극람, 정박, 이인영, 정전, 이홍겸, 이홍기, 이민겸, 정의달, 정제원, 이극찬, 이경운, 신응망, 강시윤, 정서, 정수, 신사효, 신종효, 이훤(李晅), 이휘(李暉), 신순거, 신엽, 신준, 정신달, 이돈, 이치순, 김섬, 김적, 박후립, 진효신 등이 수록되어 있다. ②󰡔정묘거의록󰡕을 보면,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 의병을 일으켰던 영광인으로 강환(姜渙), 김여경(金餘慶), 김진(金瑱), 신유일(辛惟一), 신응순(辛應純), 이홍기(李弘記), 정전(丁錢), 정제원(丁濟元) 등이 있다.   ③󰡔호남병자창의록󰡕을 보면,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영광인으로 이희웅, 김여옥, 이척, 이민겸, 이구, 송식, 김담, 강시억, 정명국, 강시만, 강시건, 이휘, 김경백, 김상경, 나통서, 박담련 등이 보인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총 48인이 창의에 나섰다. 이 가운데 강시건, 강시만, 강시억, 김담, 김상경, 김진, 송식, 신사효, 신엽, 신응망, 이극람, 이홍겸, 이훤, 이휘, 정명국, 정수 등 16인이 수은의 문인이거나 죽창에게 만사를 보낸 사람이다. 이 외에 무장의 강시언, 고창이 유철견, 고부의 김지수, 함평의 정색⋅정적 등도 수은⋅죽창의 지인들이다. 이렇게 보면, 정치적으로는 서인계인 수은⋅죽창의 지인들이 중심되어 인조 정권 아래에서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때에 영광에서 의병을 일으켰음을 알 수 있다.   5. 맺음말 : 수은과 죽창   죽창에게 수은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죽창 선생 사우 축문」을 지은 강진 출신의 동강 이의경(李毅敬, 1704~1778)은 죽창이 누구인지 알 수 없으면 그 친구를 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한사(寒沙, 신응망), 이송(二松, 김인흡), 성재(省齋, 신응순), 수은(睡隱, 강항) 등 4인을 들었다. 죽창이 이들 4인과 도의로 사귀었다고 하였다. 김영한(金甯漢, 1878~1950)이 지은 「지산강당중건기(芝山講堂重建記)」를 보면, 광해군의 정치가 혼란에 빠지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서 강수은, 임명고 등의 선비들과 왕래하며 시를 주고받았다고 하였다. 비슷한 내용은 이종택(李鍾宅)이 지은 「지산강당중수기」에도 들어 있다.    이상을 보면, 객지에 새 터전을 잡은 죽창에게 수은은 매우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것 같다. 사실 만력33년(1605, 선조 38)에 작성된 영광 향안(鄕案)에 죽창은 들어가지 못하였고, 5년 뒤 향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영광 내 지인들은 모두 향안에 입록되어 있는 상황에서 죽창은 수은에게 크게 의지했을 것 같다. 이는 죽창이 보인당(補仁堂) 주인 김주천(金柱天)에게 준 연작시 속에 들어 있는 다음의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다.       나이 칠십 되가는데 친구는 없고(年來七十故人空)     수은은 어디 갔나 물만 동쪽으로(睡隱何歸水浙東)     오직 그대만 있어서 어울렸더니(唯有吾君同調友)     생각하니 응당 꿈에서나 만나겠지(相思應想夢魂通).     이 시는 죽창이 수은 사후 본인 말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다정한 친구 수은이 없음을 허전해하며 지었을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죽창 사우 상량문에 죽창이 가지산(歌芝山)에서 노래하면 강수은이 화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은과 죽창이 가까웠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로 생각된다. 또한 수은이 새 터전으로 일군 불갑면 운제(雲堤) 마을 이름을 죽창이 지어주었다는 문중 전언도 두 분 사이의 돈독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참고문헌> 󰡔거창읍지󰡕 󰡔김포시사󰡕 󰡔노사집󰡕(기정진) 󰡔동래정씨문집󰡕 󰡔석촌유고󰡕(임서) 󰡔선양재집󰡕(정희맹) 󰡔성경재집󰡕(정건) 󰡔성재집󰡕(신응순) 󰡔소은유고󰡕(신천익) 󰡔수은집󰡕(강항) 󰡔영광속수향안󰡕 󰡔영광읍지󰡕 󰡔은시록󰡕 󰡔익산군지󰡕 󰡔정묘거의록󰡕 󰡔죽창집󰡕(정홍연) 󰡔한정유고󰡕(임담) 󰡔호남모의록󰡕 󰡔호남병자창의록󰡕   김경숙, 「이괄의 난과 󰡔호남모의록󰡕」, 󰡔숭실사학󰡕 28, 숭실사학회, 2012. 김경옥, 「수은 강항의 생애와 저술활동」, 󰡔도서문화󰡕 35,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2010. 김덕진, 「전라도 광양 수월정의 기문 지은이 분석」, 󰡔남도문화연구󰡕 30, 순천대 남도문화연구소, 2016. 김덕진, 「정묘호란과 호남의병」, 󰡔전쟁과 전라도 지역사󰡕, 선인, 2018.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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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는 광주 북구·담양군과 공동으로 1일 전남대학교 인문대 3호관에서 ‘풍류남도 나들이’ 사업의 하나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소쇄원, 양산보의 이상’을 주제로 ▲‘철학사상의 실현, 미술사적 관점에서 본 소쇄원’(독일 베를린 대학 이정희 교수) ▲‘양산보의 생애와 교유인물’(광주교대 김덕진 교수) ▲‘양산보의 학문과 사상’(광주대 고영진 교수) ▲‘‘소쇄원사실’ 불완전하게 열린 책‘(전남대 이향준 교수) 등의 발제로 문을 열었다.   이어서 서울대 장진성 교수, 전남대 김신중 교수, 광주여대 임준성 교수,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김경호 교수가 토론자로 나서 각 발제자의 연구과제에 대한 의미 있는 문답과 보충 질의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날 세미나의 발제자 진행은 전남대문화전문대학원 정경운교수가 좌장으로는 전남대 사회과 김병인교수가 좌중을 차분한 분위기로 이끌면서 노련미를 과시했다.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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