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유경제=민수진 기자] 민주화 운동의 `큰 산[巨山(거산)]` 김영삼 전 대통령이 우리 곁을 떠났다.
지난 22일 새벽 0시 22분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향년 88세.
서울대학병원에 따르면 그동안 뇌졸중과 협심증, 폐렴 등으로 수차례 입ㆍ퇴원을 반복해 온 김 전 대통령은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으로 사망했다.
오병희 서울대병원장은 "사망에 이른 직접적인 원인은 허약한 전신 상태에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이 겹쳐 일어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발표했다.
1927년 경남 거제시에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평생을 민주화에 헌신하며 우리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 받는다. 군사정권에 맞서 싸우다가 초산 테러를 당하기도 했고, 헌정 사상 첫 제명 의원으로 기록에 남았다.
숱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민주화를 향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1990년에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어록을 남기며 자신이 이끌던 통일민주당과 여당인 민주정의당, `3김(김영삼ㆍ김대중ㆍ김종필) 시대`의 한 축인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신민주공화당과의 합당(`3당 합당`)을 이끌어 냈다.
이로 인해 김 전 대통령은 본인이 평생을 싸워 온 군사정권 세력과 손잡은 `배신자`란 비난을 샀지만 이후 2년여 만에 대통령에 당선되며 `문민정부`를 탄생시키는 쾌거를 이룩했다.
그는 대통령 취임과 거의 동시에 군부 핵심 세력인 하나회 척결에 앞장섰으며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 이들이 법의 심판을 받는 모습을 전 국민들에게 보여줘 박수갈채를 받았다. 또한 공직자 재산 공개, 금융ㆍ부동산실명제 시행 등 개혁 조치로 지지율이 90%에 달하기도 했다.
특히 1993년 8월 김 전 대통령이 임시 국무회의를 소집한 가운데 긴급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면서 "모든 금융 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뤄진다"며 선포한 `금융실명제`는 대표적인 업적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는 한국 사회의 고질병인 부정부패를 해소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로 현재까지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임기 말 한보철강과 기아자동차 등 대기업 연쇄 부도 사태로 우리 경제 곳곳에서 빨간불이 켜졌으나 안이한 대처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를 초래했고, 차남 김현철이 연루된 측근 비리 등으로 임기 초반의 지지율을 대부분 상실했다.
또 상도동계로 대변되는 `가신정치`와 영남 대 호남 등의 대결 구도를 만든 `지역주의` 등은 우리 정치사의 `그늘`로 아직까지 남아 있어 그가 죽기 직전까지 당부한 것으로 알려진 `화합`과 함께 후세가 풀어야 할 과제로 남게 됐다.
한편 김 전 대통령의 장례는 첫 `국가장`으로 치러진다. 이달 26일까지 5일간 진행되며, 장지는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정해졌다. 빈소와 더불어 전국 각지에 설치된 분향소에는 조문객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어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슬픔에 잠겼다.
[아유경제=민수진 기자] 민주화 운동의 `큰 산[巨山(거산)]` 김영삼 전 대통령이 우리 곁을 떠났다.
지난 22일 새벽 0시 22분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향년 88세.
서울대학병원에 따르면 그동안 뇌졸중과 협심증, 폐렴 등으로 수차례 입ㆍ퇴원을 반복해 온 김 전 대통령은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으로 사망했다.
오병희 서울대병원장은 "사망에 이른 직접적인 원인은 허약한 전신 상태에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이 겹쳐 일어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발표했다.
1927년 경남 거제시에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평생을 민주화에 헌신하며 우리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 받는다. 군사정권에 맞서 싸우다가 초산 테러를 당하기도 했고, 헌정 사상 첫 제명 의원으로 기록에 남았다.
숱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민주화를 향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1990년에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어록을 남기며 자신이 이끌던 통일민주당과 여당인 민주정의당, `3김(김영삼ㆍ김대중ㆍ김종필) 시대`의 한 축인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신민주공화당과의 합당(`3당 합당`)을 이끌어 냈다.
이로 인해 김 전 대통령은 본인이 평생을 싸워 온 군사정권 세력과 손잡은 `배신자`란 비난을 샀지만 이후 2년여 만에 대통령에 당선되며 `문민정부`를 탄생시키는 쾌거를 이룩했다.
그는 대통령 취임과 거의 동시에 군부 핵심 세력인 하나회 척결에 앞장섰으며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 이들이 법의 심판을 받는 모습을 전 국민들에게 보여줘 박수갈채를 받았다. 또한 공직자 재산 공개, 금융ㆍ부동산실명제 시행 등 개혁 조치로 지지율이 90%에 달하기도 했다.
특히 1993년 8월 김 전 대통령이 임시 국무회의를 소집한 가운데 긴급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면서 "모든 금융 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뤄진다"며 선포한 `금융실명제`는 대표적인 업적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는 한국 사회의 고질병인 부정부패를 해소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로 현재까지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임기 말 한보철강과 기아자동차 등 대기업 연쇄 부도 사태로 우리 경제 곳곳에서 빨간불이 켜졌으나 안이한 대처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를 초래했고, 차남 김현철이 연루된 측근 비리 등으로 임기 초반의 지지율을 대부분 상실했다.
또 상도동계로 대변되는 `가신정치`와 영남 대 호남 등의 대결 구도를 만든 `지역주의` 등은 우리 정치사의 `그늘`로 아직까지 남아 있어 그가 죽기 직전까지 당부한 것으로 알려진 `화합`과 함께 후세가 풀어야 할 과제로 남게 됐다.
한편 김 전 대통령의 장례는 첫 `국가장`으로 치러진다. 이달 26일까지 5일간 진행되며, 장지는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정해졌다. 빈소와 더불어 전국 각지에 설치된 분향소에는 조문객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어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슬픔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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