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절당의 한 쪽 벽에는 김창흡(1653∽1722)과 윤봉구의 시판(詩板)이 걸려 있다. 김창흡은 청음 김상헌(1570∽1652)의 증손자이고, 영의정 김수항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김창집과 김창협의 동생인데, 김창흡은 벼슬에는 큰 뜻이 없었고 성리학과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그런데 1722년 신임사화로 노론의 영수인 큰 형 김창집이 사약을 받고 죽자, 김창흡도 지병이 악화되어 죽었다. 1)
그러면 김창흡의 시를 살펴보자. 이 시는 증조부 청음 김상헌의 차운 시이다. 먼저 청절당에 붙어 있는 김상헌의 원운 시부터 다시 읽어보자.
담옹(湛翁)의 풍절(風節)은 나의 스승이라
굳센 글씨 맑은 시 뛰어남을 독차지 했네.
당시에 알아주지 않는다고 한스러워 마시오.
후대에는 도리어 별운(別雲)이 있었음을 알리니.
윤봉구(1683∼1767)는 송시열의 제자인 권상하의 문인으로,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1725년(영조1) 청도군수가 되었고, 1741년 부호군이 되었을 때 주자(朱子)를 보은 춘추사(春秋祠)의 송시열 영당에 추봉할 것을 주장하다가 삭직되었다. 1763년에 공조판서가 되었다.
청절당에는 어윤중 등의 시판들도 걸려 있지만 일일이 시를 소개하지 못하여 아쉽다.
(사진 8-2)
한편 청절당 좌우에는 동재와 서재가 있다. 동·서재는 서원에서 공부하는 원생들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동재의 이름은 진덕재(進德齎)이고 서재는 숭의재(崇義齎)이다. 글씨는 동춘당 송준길(1606∽1672)이 썼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김인후 신도비와 묘비명, 필암서원 글씨와 편액들이 대부분 서인과 노론들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2)
1) 숙종(1661∼1720 재위 1674∼1720) 말년은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의 당쟁이 격화되었다. 소론은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 윤(경종)을 지지하고 노론은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영조)을 지지했다. 결국 경종이 즉위했으나 경종이 자식이 없고 허약하자 김창집 등 노론 4대신은 연잉군을 왕세제로 세울 것을 주장하여 1721년(경종 1) 8월에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그런데 노론은 10월에 다시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상소했다.
이에 따라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날카로워져 갔다. 1721년 12월에 김일경 등 소론은 노론이 '역모'를 꾸몄다고 탄핵했다. ‘신임사화’라 불리는 이 사건으로 김창집 등 4대신은 사약을 받았고 수 백 명의 노론이 제거되었다. 그런데 1724년에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이 정권을 잡았고 김창집의 관작은 복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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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절당의 한 쪽 벽에는 김창흡(1653∽1722)과 윤봉구의 시판(詩板)이 걸려 있다. 김창흡은 청음 김상헌(1570∽1652)의 증손자이고, 영의정 김수항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김창집과 김창협의 동생인데, 김창흡은 벼슬에는 큰 뜻이 없었고 성리학과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그런데 1722년 신임사화로 노론의 영수인 큰 형 김창집이 사약을 받고 죽자, 김창흡도 지병이 악화되어 죽었다. 1)
그러면 김창흡의 시를 살펴보자. 이 시는 증조부 청음 김상헌의 차운 시이다. 먼저 청절당에 붙어 있는 김상헌의 원운 시부터 다시 읽어보자.
담옹(湛翁)의 풍절(風節)은 나의 스승이라
굳센 글씨 맑은 시 뛰어남을 독차지 했네.
당시에 알아주지 않는다고 한스러워 마시오.
후대에는 도리어 별운(別雲)이 있었음을 알리니.
湛翁風節是吾師 담옹풍절시오사
健筆淸詩更檀奇 건필청시경단기
莫恨當時俱未識 막한당시구미지
後來還有子雲知 후래환유자운지
김상헌 시는 압운이 1.2.4구의 맨 마지막 한자 사(師), 기(奇),지(知)이다. 김창흡은 이 한자를 차운하여 시를 지었다.
필암서원 근차 증조고운
겸손하여 남의 스승 되려고 하지 않지만
출처의 기이함은 천추토록 가리기 어려우리.
묵죽도 한 폭 임금의 편지 속에 있으니
이 분의 심사를 임금이 아시리.
鞱光未欲作人師 도광미욕작인사

難掩千秋出處奇 난엄천추출처기
一幅霜筠宸翰在 일폭상신침한재
此翁心事此君知 차옹심사차군지
(1717년 정유년 안동인 김창흡)
사진 8-1
한편 김창흡의 시판 바로 옆에 윤봉구의 시판이 있는데, 윤봉구도 청음 김상헌의 시를 차운하여 지었다.
필암서원 차 청음선생 운 선생은 백세토록 스승으로 섬길 분이니
출처는 오직 떳떳하여 기이함은 아니지요.
일시에 강개하여 그리한 것 아니며
모두가 도의를 따라 배워서 알았기 때문이라오.
先生百世可爲師 선생백세가위사
出處惟常不是奇 출처유상불시기
非若一時慷慨做 비약일시강개주
皆從道義學而知 개종도의학이지
윤봉구(1683∼1767)는 송시열의 제자인 권상하의 문인으로,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1725년(영조1) 청도군수가 되었고, 1741년 부호군이 되었을 때 주자(朱子)를 보은 춘추사(春秋祠)의 송시열 영당에 추봉할 것을 주장하다가 삭직되었다. 1763년에 공조판서가 되었다.
청절당에는 어윤중 등의 시판들도 걸려 있지만 일일이 시를 소개하지 못하여 아쉽다.

(사진 8-2)
한편 청절당 좌우에는 동재와 서재가 있다. 동·서재는 서원에서 공부하는 원생들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동재의 이름은 진덕재(進德齎)이고 서재는 숭의재(崇義齎)이다. 글씨는 동춘당 송준길(1606∽1672)이 썼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김인후 신도비와 묘비명, 필암서원 글씨와 편액들이 대부분 서인과 노론들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2)
1) 숙종(1661∼1720 재위 1674∼1720) 말년은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의 당쟁이 격화되었다. 소론은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 윤(경종)을 지지하고 노론은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영조)을 지지했다. 결국 경종이 즉위했으나 경종이 자식이 없고 허약하자 김창집 등 노론 4대신은 연잉군을 왕세제로 세울 것을 주장하여 1721년(경종 1) 8월에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그런데 노론은 10월에 다시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상소했다.
이에 따라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날카로워져 갔다. 1721년 12월에 김일경 등 소론은 노론이 '역모'를 꾸몄다고 탄핵했다. ‘신임사화’라 불리는 이 사건으로 김창집 등 4대신은 사약을 받았고 수 백 명의 노론이 제거되었다. 그런데 1724년에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이 정권을 잡았고 김창집의 관작은 복구되었다.
2) 정철 · 김상헌은 서인이고 송시열 · 김수항 · 윤봉구 등은 노론이다. 서인은 1683년에 노론의 송시열과 소론의 윤증으로 갈라졌다. 흥미로운 점은 하서 김인후 신도비문은 송시열이 1682년에 지었고, 청백리 지지당 송흠 신도비문은 윤증이 1683년에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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