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을 살펴보더라도 경제적으로 부가가치가 아주 높은 부분이 발견되는데도 불구하고 개발의 필요성을 못 느끼고 그냥 지나치는 사업이 알고보면 하나 둘이 아니다.
경제적 발전의 흐름으로 비영리단체가 탄력을 받고 있는 것도 어쩌면 고무적인 흐름을 조성한다. 물론 이미 공룡처럼 커 버린 단체들을 보면 매양했던 사업의 반복으로 이미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기부문화가 잘 조성이 되어 대기업에서도 많은 단체들을 찾아 매년 각양각색의 사업을 펼치는 현장을 목격하고 또는 직접 나서서 봉사활동을 강화하지만 정작 도움이 필요한 단체는 자금에 허덕이며 아무런 진전이 없이 그 자리에서 맴도는 경우도 많다.
본 지에서 주력사업으로 펼치는 '수은 강항선생에 대한 선양사업'은 각별하다.
앞으로 수은 강항선생의 흔적이 뭍어 있는 영광내산서원을 비롯해 고창 강목촌, 광주향교, 무안 화설당, 보성 대계서원, 광양 수월정, 담양 금성산성, 구례 장절각 등을 관광 개발을 적극 나선다면.한⁕중⁕일 교류가 아주 활발해 지고 한⁕중⁕일 청소년들에게는 매년 수학 여행코스로 자리잡아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자연스럽게 마련되기 때문이다.
밑도 끝도 없이 주저리주저리 말해 봐야 뭐하겠는가마는 애국애족한 수은 강항선생에 대해 관심과 주목을 해야하는건 갈수록 척박해 지는 사회현상에 적어도 인성교육과 인문학강좌가 살아나야만이 흉폭한 사회를 그나마 선순환의 고리로 풀어갈 수 있다는 강한 신념 때문이다.
끝으로 아래 연보를 보고 느끼는 점이 많기를 바라며 수은 강항선생기념사업회에 관심과 동참을 기대해 본다.
<수은 강항선생 연보>
1567(명종22, 선조 즉위 원년 6월 28일)
선조 즉위 원년 5월17일 전남 영광군 불갑면 금계리 유봉마을에서 태어나다.(몽오재 극검의 5형재 해, 준, 환, 항, 영 중 4남)
1571(선조4~5세) 전라 감사 신백록(辛白鹿) 응시(應時)가 ‘각’(脚)으로 명제함에 곧 “脚到萬里心敎脚”이라하니 백록은 이에 얼굴빛을 엄숙히 하면서 감탄하였다.
* 신응시(辛應時 1532~1585 백인걸의 문인)
1573(선조7세) 『맹자(孟子)』 한 질을 하룻동안에 거의 다 암송하다.
책장수가 천재라 하여 한 질을 그냥 주되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으므로 이를 정자나무에 걸어 놓고 갔다 해 그곳을 ‘맹자정’이라 칭하다.
1574(선조8세) 『통감강목(通鑑綱目)』을 통달하였기로 “무장(茂長) 칠암마을을 강목촌(綱目村)이 있다” 하였다.
* 무장=전북 고창의 옛 지명
1575(선조 9세) 『유성약천성부(幼成若天性賦)』를 지었다.
1581(선조 14세) 선비(先妣) 金씨 喪을 당하여 적자들은 모두 칭복하다
1583(선조 16세) 책문으로 전주에서 향시에 합격하여 이름을 날리다.
*책문(策問):정치에 관한 계책을 물어서 답하게 하던 과거
1588(선조 22세) 봄에 진사로 뽑히다.
겨울에 진주 김씨 참봉 봉(琫)의 딸을 아내로 맞다.
1591(선조 25세) 백형 저어당(齟齬堂)이 신묘(1591)사화에 연좌됨에 상통흠적(像痛欽迹)하다.
1592(선조 26세) 임진왜란을 당하자 의곡과 군기 등을 모아 재봉(齋峰)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의 의병소에 보내다.
1593(선조 27세) 문과에 급제하다. 어염(魚鹽)을 사들이고 백미 100석을 모아 종제 만은공 낙(洛)으로 하여금 의병 장 고경명, 김천일, 최경장의 의병소로 각각 보내다.
1594(선조 28세) 봄에 교서정자(校書正字)로 있을 때 우계 성혼(강항의 스승)선생이 우군소(于郡少)하여 문하(門下)가 요락(寥落/황폐하여 쓸쓸함)하되 선생이 홀로 원왕성지(遠往省之)함에 선생은 그의 단양 (端諒)함을 칭찬하였다. 겨울에 은대가랑(銀臺假郞)으로 입시(入侍)하다.
1595(선조 29세) 박사(博士)에 오르다.
1596(선조 30세) 봄에 성균관 전적, 가을에 공조좌랑, 겨울에 형조좌랑이 되다.
1597(선조 31세) 분(分)호조청으로 군량을 호송하다가 적을 만나 포로가 되다. 부실(副室) 함평 이씨는 적에게 사로잡혀 단식으로 자진하다. (1597.9)
1598(선조 32세) 적중에서 왜국의 풍토와 관직 및 내부 사정이나 형편의 강약 등을 자세하게 기록하여 행주산성 권율 장군의 종인 김석복(金石福) 편에 본국에 보내다.
1599(선조 33세) 김석복(金石福) 편에 보냈던 글을 또 다시 비밀리에 명나라 차관 왕건공(王建功)편에 본국에 보내다.
1600(선조 34세) 여름에 서쪽으로 후지와라세이카 측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대마도를 거쳐 귀국하다.(봄 5월 19일)
서울에서 선조임금을 뵙고, 9월에 고향(전남 영광 불갑면 금계리) 유봉으로 돌아오다.
1601(선조 35세) 상국 이덕형(李德馨) 막하에서 『예부절왜서(禮部絶倭書)』를 초(草)하다.
*상국(相國)=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통틀어 이르는 말. ≒상신3(相臣).
1602(선조 36세) 승의랑(承議郞) 대구교수(大邱敎授)에 임명받았으나 부임하지 않다.
1603(선조 37세) 순천교수(順天敎授)를 명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04(선조 38세) 『이회재언적승 소(李晦齋彦迪昇 疏)』를 짓다.
1606(선조 40세) 여우길(呂佑吉) 등이 왜국을 다녀와서 일본 사람들이 선생의 충의대절(忠義大節)을 칭송하면서 소무(蘇武)와 문천상(文天祥)에게 비한다고 조정에 알려 그 행의의 뛰어남을 알리다.(呂佑吉 所記錄에 기록되어 있다.
1607(선조40/41세)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 선열사(先烈祠) 봉안문(奉安文)을 짓다.
1608(선조 42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선생이 조정에 상주하여 선생의 절의를 칭찬하고자 할 때 “왜국 견양(犬羊)의 무식으로도 오히려 칭송하거늘 우리나라 인심이 편시(偏視)하여 선생의 절의를 칭찬할 줄 모르니 극가통야(極可痛也).“라 하다.
1609(광해1/43세) 팔송(八松) 윤황(尹煌)이 영광 군수로 와서 그의 아들 훈거(勳擧) 무거(舞擧)에게 명하여 강항 선생 밑에서 수학하게 하다.
1610(광해2/44세) 『광주향교(光州鄕校) 상량문(上樑文)』을 짓다.
1612(광해/46세) 석강통병(淅江通兵)이 명나라 조정에 말하여 왜국과 서로 통하여 전라• 경상 지방에 왜적이 잡서(雜書)한다고 모함하여 지휘사(指揮使) 황분(黃芬)이 조선 여러 고을을 정탐하도록 하니 선생이 글을 지어 조선의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
1615(광해7/49세) 선고(先考) 몽오공(夢梧公) 우(憂)를 당하다.
1617(광해9/51세) 『영광운검정기(靈光雲錦亭記)』를 짓다
1618(광해10/52세) 5월 6일에 졸하다.
------------ 수은 강항선생의 사후 관련된 일들 ----------------------
내산서원(內山書院)은 1635년(인조 13년) 수운 선생을 모시는 용계사(龍溪祠)라는 사당 형태로 만들어졌다가 나중에 서원으로 확장되었다.
1702년(숙종 28년)에 사원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대원군 때인 1868년 훼철되었다.
1974년 다시 서원을 복원하면서 향사(享祀)가 시작되었고, 1993년 문화재 정비사업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곳 서원에는 수은 강항과 그의 제자인 윤순거의 위패가 모셔져(배향되어) 있다.
※ 윤순거(尹舜擧1596-1668 호:童土)는 소론의 거두인 명재(明齋) 윤증(尹拯1629-1714)의 큰 아버지(仲父) 八松 윤황(尹惶)의 아들,백부 수(燧)에게 입양되었으며 외삼촌인 성문준(成文濬)에게서 학문을, 강항(姜沆)에게서 시를, 사계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예를 배웠다.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외손자, 윤문거(1606-1672)의 형,
1656(효종7/사후38년) 『간양록』서문이 시남(市南) 유계(兪棨 1607~1664)의 손으로 이루어지다.
1658(효종9/사후40년)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로 증직되다. 문집이 이루어짐에 이에 우암 송시열이 서문을 찬(撰)함
1983년 5월 이후 영광내산서원보존회 창립해 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와 내산서원 성역화사업에 전력을 다 하다.
2014년 3월 14일
강인규 (전)나주시의회의장의 출판기념회에 원구종회장, 재원, 대의 등이 참석해 첫 임시 이사회 개최를 개최하고 수은 강항선생기념사업회 재건을 의논하다.
7월 29일 10시 장소 : 영광내산서원 강당 주 제 : 수은 강항선생 학술발표회 / 주최 : 동영문헌학회
12월 30일 수은 강항선생기념사업회 영광군에 재등록 / 고유번호증 서광주세무서에서 발급
2015년 4월 2일 수은 강항선생기념사업회 창립총회 및 학술워크숍 개최해 박석무다산연구소이사장을 만장일치로 기념사업회장으로 추대
2015년 6월 1일 영광군의회, 제211회 임시회 개최 수은 강항선생 기념사업 지원 조례안 통과
2015년 10월 28일 ‘수은강항선생과 광양수월정’학술세미나 한국유교대학총연합회(이사장 강대욱)에서 전남 광양시청 1층 대강당에서 ‘수은강항선생과 광양수월정’학술세미나를 개최
2016년 2월 24일 청미디어 신00대표를 처음 만나 무라까미 쓰네오 번역본 ‘일본에 유교를 전파한 포로 강항’에 대한 책을 처음 전달받고 잘못 기록된 오류부분으로 책출간금지 의논하다.
2016년 3월 24일 영광내산서원 용역비 이야기가 거론되고 대욱전교와 광주유교대학평생교육원 운영문제와 함께 처음으로 총선흐름도 의논하다.
2016년 12월 07일 2016강항기념관 건립 추진 토론회 수은강항기념사업회 주최주관으로 광주 청명회관연회실서 30여명의 명사들 모여 열띤 토론회 갖다.
2016년 12월 20일 2016강항기념관 건립 추진 영광군 토론회 영광내산서원을 위한 문중 대표자 선출하다.
2017년 03월 22일 ~ 12월 31일 ‘자유학기제’ 내산서원 문화체험학교 정착
2017년 07월 31일 수은 강항선생기념사업회 임시총회를 열고 만장일치로 이개호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을 차기 이사장으로 전격 선출하다.
2017년 09월 21일 목요일 10시 30분 ~ 국제학술세미나 개최 일본의 무라까미 쓰네오 ‘일본에 유교를 전파한 조선 포로 강항’ 저자외 국내외 인사 500여명 참석
2017년 09월 23일 토요일 오후 15시 ~ 수은 강항 유물 사진전시회 및 자유학기제 해룡중학생 참여 작품 전시회 개최
2017년 09월 26일 ~ 30일 4박 5일 일정으로 일본 에이메현을 다녀오다. 무라까미 쓰네오 수은 강항선생일본연구회장의 소개로 ‘홍유강항선생현창비’와 출석사 안내를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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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을 살펴보더라도 경제적으로 부가가치가 아주 높은 부분이 발견되는데도 불구하고 개발의 필요성을 못 느끼고 그냥 지나치는 사업이 알고보면 하나 둘이 아니다.

경제적 발전의 흐름으로 비영리단체가 탄력을 받고 있는 것도 어쩌면 고무적인 흐름을 조성한다. 물론 이미 공룡처럼 커 버린 단체들을 보면 매양했던 사업의 반복으로 이미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기부문화가 잘 조성이 되어 대기업에서도 많은 단체들을 찾아 매년 각양각색의 사업을 펼치는 현장을 목격하고 또는 직접 나서서 봉사활동을 강화하지만 정작 도움이 필요한 단체는 자금에 허덕이며 아무런 진전이 없이 그 자리에서 맴도는 경우도 많다.
본 지에서 주력사업으로 펼치는 '수은 강항선생에 대한 선양사업'은 각별하다.
앞으로 수은 강항선생의 흔적이 뭍어 있는 영광내산서원을 비롯해 고창 강목촌, 광주향교, 무안 화설당, 보성 대계서원, 광양 수월정, 담양 금성산성, 구례 장절각 등을 관광 개발을 적극 나선다면.한⁕중⁕일 교류가 아주 활발해 지고 한⁕중⁕일 청소년들에게는 매년 수학 여행코스로 자리잡아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자연스럽게 마련되기 때문이다.
밑도 끝도 없이 주저리주저리 말해 봐야 뭐하겠는가마는 애국애족한 수은 강항선생에 대해 관심과 주목을 해야하는건 갈수록 척박해 지는 사회현상에 적어도 인성교육과 인문학강좌가 살아나야만이 흉폭한 사회를 그나마 선순환의 고리로 풀어갈 수 있다는 강한 신념 때문이다.
끝으로 아래 연보를 보고 느끼는 점이 많기를 바라며 수은 강항선생기념사업회에 관심과 동참을 기대해 본다.
<수은 강항선생 연보>
1567(명종22, 선조 즉위 원년 6월 28일)
선조 즉위 원년 5월17일 전남 영광군 불갑면 금계리 유봉마을에서 태어나다.(몽오재 극검의 5형재 해, 준, 환, 항, 영 중 4남)
1570(선조3~4세) 백형 저어당(齟齬堂) 해(瀣,1555~1591)에게서 수학하다. 저어당 해는 율곡 선생의 문인이다.
* 齟 어긋날 저 齬어긋날어/형제자매(5남 1녀)~
해(저어당) 瀣 濬(회은) 渙(퇴은) 沆(수은) 泳(시시당) 심우민(沈禹民)사위
1571(선조4~5세) 전라 감사 신백록(辛白鹿) 응시(應時)가 ‘각’(脚)으로 명제함에 곧 “脚到萬里心敎脚”이라하니 백록은 이에 얼굴빛을 엄숙히 하면서 감탄하였다.
* 신응시(辛應時 1532~1585 백인걸의 문인)
1573(선조7세) 『맹자(孟子)』 한 질을 하룻동안에 거의 다 암송하다.
책장수가 천재라 하여 한 질을 그냥 주되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으므로 이를 정자나무에 걸어 놓고 갔다 해 그곳을 ‘맹자정’이라 칭하다.
1574(선조8세) 『통감강목(通鑑綱目)』을 통달하였기로 “무장(茂長) 칠암마을을 강목촌(綱目村)이 있다” 하였다.
* 무장=전북 고창의 옛 지명
1575(선조 9세) 『유성약천성부(幼成若天性賦)』를 지었다.
1581(선조 14세) 선비(先妣) 金씨 喪을 당하여 적자들은 모두 칭복하다
1583(선조 16세) 책문으로 전주에서 향시에 합격하여 이름을 날리다.
*책문(策問):정치에 관한 계책을 물어서 답하게 하던 과거
1588(선조 22세) 봄에 진사로 뽑히다.
겨울에 진주 김씨 참봉 봉(琫)의 딸을 아내로 맞다.
1591(선조 25세) 백형 저어당(齟齬堂)이 신묘(1591)사화에 연좌됨에 상통흠적(像痛欽迹)하다.
1592(선조 26세) 임진왜란을 당하자 의곡과 군기 등을 모아 재봉(齋峰)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의 의병소에 보내다.
1593(선조 27세) 문과에 급제하다. 어염(魚鹽)을 사들이고 백미 100석을 모아 종제 만은공 낙(洛)으로 하여금 의병 장 고경명, 김천일, 최경장의 의병소로 각각 보내다.
1594(선조 28세) 봄에 교서정자(校書正字)로 있을 때 우계 성혼(강항의 스승)선생이 우군소(于郡少)하여 문하(門下)가 요락(寥落/황폐하여 쓸쓸함)하되 선생이 홀로 원왕성지(遠往省之)함에 선생은 그의 단양 (端諒)함을 칭찬하였다. 겨울에 은대가랑(銀臺假郞)으로 입시(入侍)하다.
1595(선조 29세) 박사(博士)에 오르다.
1596(선조 30세) 봄에 성균관 전적, 가을에 공조좌랑, 겨울에 형조좌랑이 되다.
1597(선조 31세) 분(分)호조청으로 군량을 호송하다가 적을 만나 포로가 되다. 부실(副室) 함평 이씨는 적에게 사로잡혀 단식으로 자진하다. (1597.9)
1598(선조 32세) 적중에서 왜국의 풍토와 관직 및 내부 사정이나 형편의 강약 등을 자세하게 기록하여 행주산성 권율 장군의 종인 김석복(金石福) 편에 본국에 보내다.
1599(선조 33세) 김석복(金石福) 편에 보냈던 글을 또 다시 비밀리에 명나라 차관 왕건공(王建功)편에 본국에 보내다.
1600(선조 34세) 여름에 서쪽으로 후지와라세이카 측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대마도를 거쳐 귀국하다.(봄 5월 19일)
서울에서 선조임금을 뵙고, 9월에 고향(전남 영광 불갑면 금계리) 유봉으로 돌아오다.
1601(선조 35세) 상국 이덕형(李德馨) 막하에서 『예부절왜서(禮部絶倭書)』를 초(草)하다.
*상국(相國)=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통틀어 이르는 말. ≒상신3(相臣).
1602(선조 36세) 승의랑(承議郞) 대구교수(大邱敎授)에 임명받았으나 부임하지 않다.
1603(선조 37세) 순천교수(順天敎授)를 명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04(선조 38세) 『이회재언적승 소(李晦齋彦迪昇 疏)』를 짓다.
1606(선조 40세) 여우길(呂佑吉) 등이 왜국을 다녀와서 일본 사람들이 선생의 충의대절(忠義大節)을 칭송하면서 소무(蘇武)와 문천상(文天祥)에게 비한다고 조정에 알려 그 행의의 뛰어남을 알리다.(呂佑吉 所記錄에 기록되어 있다.
1607(선조40/41세)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 선열사(先烈祠) 봉안문(奉安文)을 짓다.
1608(선조 42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선생이 조정에 상주하여 선생의 절의를 칭찬하고자 할 때 “왜국 견양(犬羊)의 무식으로도 오히려 칭송하거늘 우리나라 인심이 편시(偏視)하여 선생의 절의를 칭찬할 줄 모르니 극가통야(極可痛也).“라 하다.
1609(광해1/43세) 팔송(八松) 윤황(尹煌)이 영광 군수로 와서 그의 아들 훈거(勳擧) 무거(舞擧)에게 명하여 강항 선생 밑에서 수학하게 하다.
1610(광해2/44세) 『광주향교(光州鄕校) 상량문(上樑文)』을 짓다.
1612(광해/46세) 석강통병(淅江通兵)이 명나라 조정에 말하여 왜국과 서로 통하여 전라• 경상 지방에 왜적이 잡서(雜書)한다고 모함하여 지휘사(指揮使) 황분(黃芬)이 조선 여러 고을을 정탐하도록 하니 선생이 글을 지어 조선의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
1615(광해7/49세) 선고(先考) 몽오공(夢梧公) 우(憂)를 당하다.
1617(광해9/51세) 『영광운검정기(靈光雲錦亭記)』를 짓다
1618(광해10/52세) 5월 6일에 졸하다.
------------ 수은 강항선생의 사후 관련된 일들 ----------------------
1628(인조 6/사후10년) 윤순거(尹舜擧1596~1668/윤순거 33세 때)
행장이 마련되다.
1635(인조14/사후17년) 유봉에 사우(祠宇)를 세우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문정(文正)공이 축문 짓다.
1636(인조15/사후18년) 유봉사우가 실화(失火)로 회진(灰塵)되므로, 판서 임담(林潭) 사성(司成)김지수(金地粹) 참봉 김우급(金友伋) 등이 발의하여 용산에 부건(復建)하고 우암이 용계사액(龍溪祠額)을 쓰다.
내산서원(內山書院)은 1635년(인조 13년) 수운 선생을 모시는 용계사(龍溪祠)라는 사당 형태로 만들어졌다가 나중에 서원으로 확장되었다.
1702년(숙종 28년)에 사원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대원군 때인 1868년 훼철되었다.
1974년 다시 서원을 복원하면서 향사(享祀)가 시작되었고, 1993년 문화재 정비사업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곳 서원에는 수은 강항과 그의 제자인 윤순거의 위패가 모셔져(배향되어) 있다.
※ 윤순거(尹舜擧1596-1668 호:童土)는 소론의 거두인 명재(明齋) 윤증(尹拯1629-1714)의 큰 아버지(仲父) 八松 윤황(尹惶)의 아들,백부 수(燧)에게 입양되었으며 외삼촌인 성문준(成文濬)에게서 학문을, 강항(姜沆)에게서 시를, 사계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예를 배웠다.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외손자, 윤문거(1606-1672)의 형,
1656(효종7/사후38년) 『간양록』서문이 시남(市南) 유계(兪棨 1607~1664)의 손으로 이루어지다.
1658(효종9/사후40년)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로 증직되다. 문집이 이루어짐에 이에 우암 송시열이 서문을 찬(撰)함
1667(헌종8/사후49년) 『강감회요(綱鑑會要)』 출간
1682(숙종8/사후64년) 윤순거 선생을 용계사에 배향
1702(숙종28/사후84년) 용계사 중수
1709(숙종35/사후91년) 용계사 청액(請額)으로 권보덕(權輔德)이 제소하다.
1772(영조48/사후154년) 영조가 『수은집(睡殷集)』을 예람하고 선생의 절의를 한소무(漢蘇武),송문산(宋文山)과 같다고 칭찬하고 7대손 재윤(載潤)을 도사(都事)로 등용
1798(정조22/사후180년) 묘갈명(墓碣銘)[性潭 宋煥箕 撰] 조연(朝延) 때 『간양록』 중 산성이설지사 (山城移設之事)로 위제설시(爲題設試)
1882(고종19/사후264년) 자헌대부 이조판서 兩館대제학을 증직하다. 대제학 김상현(金尙鉉 *1811-1890)이 시장(諡狀) 찬(撰) 선생의 『강감회요』의 장판이 조작. 동토(童土) 윤순거 선생의 다손 정시수(鄭時遂)와 정시대(鄭時大) 형제가 영광 및 영암 군수로 각각 부임하자 영광군수가 이를 간판(刊版) 『간양록』과 문집의 장판(藏板)은 수면래(水面來) 선생의 강당에 보관 중이었는데 왜정 말기에 왜인 영광 경찰서장의 손에 의해 소각되고 『간양록』도 몰수하여 불에 태워져버렸다.
1952년 현암 이을호(李乙浩)의 한글 역 초판 『간양록』이 간행되다.
1958년 강항의 기념관 ‘수은정(睡隱亭)’ 창건하다.
1983년 癸亥(계해) 五月(오월)
國立光州博物館長(국립광주박물관장) 哲學博士(철학박사) 李乙浩(이을호) 謹撰(근찬) 향토문화개발협의회장 鄭埰均(정채균) 謹書(근서)
睡隱姜沆先生記念事業會(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 謹竪(근수)
睡隱姜沆先生記念事業會(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창립
1983년 5월 이후 영광내산서원보존회 창립해 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와 내산서원 성역화사업에 전력을 다 하다.
2014년 3월 14일
강인규 (전)나주시의회의장의 출판기념회에 원구종회장, 재원, 대의 등이 참석해 첫 임시 이사회 개최를 개최하고 수은 강항선생기념사업회 재건을 의논하다.
7월 29일 10시 장소 : 영광내산서원 강당 주 제 : 수은 강항선생 학술발표회 / 주최 : 동영문헌학회
12월 30일 수은 강항선생기념사업회 영광군에 재등록 / 고유번호증 서광주세무서에서 발급
2015년 4월 2일 수은 강항선생기념사업회 창립총회 및 학술워크숍 개최해 박석무다산연구소이사장을 만장일치로 기념사업회장으로 추대
2015년 6월 1일 영광군의회, 제211회 임시회 개최 수은 강항선생 기념사업 지원 조례안 통과
2015년 10월 28일 ‘수은강항선생과 광양수월정’학술세미나 한국유교대학총연합회(이사장 강대욱)에서 전남 광양시청 1층 대강당에서 ‘수은강항선생과 광양수월정’학술세미나를 개최
2016년 2월 24일 청미디어 신00대표를 처음 만나 무라까미 쓰네오 번역본 ‘일본에 유교를 전파한 포로 강항’에 대한 책을 처음 전달받고 잘못 기록된 오류부분으로 책출간금지 의논하다.
2016년 3월 24일 영광내산서원 용역비 이야기가 거론되고 대욱전교와 광주유교대학평생교육원 운영문제와 함께 처음으로 총선흐름도 의논하다.
2016년 12월 07일 2016강항기념관 건립 추진 토론회 수은강항기념사업회 주최주관으로 광주 청명회관연회실서 30여명의 명사들 모여 열띤 토론회 갖다.
2016년 12월 20일 2016강항기념관 건립 추진 영광군 토론회 영광내산서원을 위한 문중 대표자 선출하다.
2017년 03월 22일 ~ 12월 31일 ‘자유학기제’ 내산서원 문화체험학교 정착
2017년 07월 31일 수은 강항선생기념사업회 임시총회를 열고 만장일치로 이개호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을 차기 이사장으로 전격 선출하다.
2017년 09월 18~19일 토~일 17시 ~ ‘영광내산서원 한마당잔치’주 최 : 수은 강항선생기념사업회 / 주 관 : 영광내산서원보존회후 원 : (사)한국향토사랑청소년봉사단 광주, 전남연맹
2017년 09월 21일 목요일 10시 30분 ~ 국제학술세미나 개최 일본의 무라까미 쓰네오 ‘일본에 유교를 전파한 조선 포로 강항’ 저자외 국내외 인사 500여명 참석
2017년 09월 23일 토요일 오후 15시 ~ 수은 강항 유물 사진전시회 및 자유학기제 해룡중학생 참여 작품 전시회 개최
2017년 09월 26일 ~ 30일 4박 5일 일정으로 일본 에이메현을 다녀오다. 무라까미 쓰네오 수은 강항선생일본연구회장의 소개로 ‘홍유강항선생현창비’와 출석사 안내를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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