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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길 위의 호남 선비 -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강항(5)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8월8일 오즈성 떠나 9월11일에야 오사카성 도착해
repoter : 김세곤 ( yug42@naver.com ) 등록일 : 2017-12-10 19:35:13 · 공유일 : 2017-12-10 19:43:55

1598년 6월이 되자 좌도(도도 다카도라)는 조선에서 철병하여 왜경으로 돌아오더니, 부하를 보내어 강항 일가를 오사카로 데려오라 하였다.
8월8일에 강항은  오즈성을 떠나 9월11일에 오사카성에 도착했다.

사진 1  오사카 성
 

강항은 오사카에서 며칠 묵다가 다시 복견성(후시미 성)으로 옮겨졌다.
후시미는 교토 근처에 있는 왜의 새 서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미 죽었고 왜국의 상황도 전과 달랐다.  
 

후시미에 도착하자 왜적은 강항 가족들을 어느 집 빈 창고 안에 다 쑤셔 넣고 거기에서 지내도록 했다. 문지기로는 시촌(市村)이란 사람을 세워놓았는데 아주 늙은 왜인이었다. 

다행히도 우리나라 선비로 동래 김우정ㆍ하동 강사준ㆍ강천추ㆍ정창세ㆍ함양 박여집ㆍ태안 전시습ㆍ무안 서경춘 등이 사로잡혀 온 사람 속에 끼어 있어 함께 모이게 되었다. 다 같은 포로 신세로 날마다 만나는 것이 일과였다. 


1599년 설날이었다. 강항은 감회에 젖어 시를 지었다.

서리도 고운 서리 티끝에 섞일쏘냐.
달에 끌린 애달픔이여 밤마다 새로워라.
말 뿔은 나지 않아도 새해는 오는고야 
외로운 마음 도리어 새해 맞아 설렌다.


왜승 조고원(照高院)은 황제의 숙부(叔父)이다. 출가(出家)하여 대불사(大佛寺)에 거주하였다. 그는 중을 시켜 부채 열 자루를 보내면서 강항에게 시를 청했다. 강항은 그만큼 왜인 사회에서 알아주는 선비였다.
 

우연히도 강항은 왜인 시촌(市村)으로부터 명나라  차관(差官) 모국과(茅國科)ㆍ왕건공(王建功) 등이 사개(沙蓋)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강항은 우리나라 사람 신계리와 함께 문지기에게 뇌물을 주고 들어갔다. 두 차관은 강항을 따뜻하게 대해 주고 차와 술을 내왔다. 강항은 울면서 청하기를, “듣자하니 왜노가 배를 준비하여 짐을 보낼 것이라 하는 데 원컨대 저를 배 안의 시중꾼으로 데려가 주소서 ”하니, 그들은 동정하여 물었다. “공은 어떤 왜인에게 기탁하고 있는가?”
강항이 좌도라고 하자, 그들은 “우리들이 가강(家康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통지하여 좌도로 하여금 그대를 보내 주도록 하겠다.”하였다.
 

이 때 신계리는 본시 경박한 자라 큰 소리로 이렇게 소리쳤다.
“풍신수길이 죽었으니 왜국은 장차 난장판이 될 것이고 왜적들은  다 죽을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그런데 대마도 통역이 본시 우리나라 말에 통달하여서, 곧바로 책임자인  장우문(長右門)에게 고자질하였다. 장우문은 행장(行長 고니시 유키나가)의 형이다. 강항 일행이 문밖에 나가자 그들은 강항을 포박하여 별실에 가두고, 신계리도 포박하였는데, 저녁에 목을 베어 거리에 달아 맬 판이었다.
 

명나라 차관은 거듭 용서해주기를 청했다. “저 사람이 찾아온 것은 단지 늙은 자기 아버지의 소식을 묻기 위함이요, 별 게 없었습니다.”하니, 장우문은 마지못해 강항을 풀어주었다. 1)


한편 풍신수길이 우리나라를 재침할 적에 여러 장수에게, “사람의 귀는 각각 둘이지만 코는 하나다.”라고 하면서, 졸병마다 우리나라 사람의 목 대신에 코를 베어서 왜경으로 보내게 하였다.
 

보내온 코를 대불사 앞에 묻으니 하나의 구릉(丘陵)을 이루었다. 그 높이가 애탕산(愛宕山)의 산허리와 같았다니 정말 참혹하였다. 2)

우리나라 사람들이 쌀을 모아 제사 지내려고 하면서  강항에게 제문을 지어주라고 청했다. 강항은 다음과 같이 제문을 지었다.

“코와 귀는 서쪽 언덕을 이루었고, 뱀처럼 사나운 놈들이 동쪽에  묻었도다. 마른 고기되어 소금에 절이고 물고기 밥으로 배불렸으니, 차마 향불을 올리지 못하네.”


사진 2. 교토에 있는 코 무덤


사진 3. 교토의 귀 무덤(코 무덤) 안내판(2003년). 한글로도 표시되어 있다.
 

1) 이 당시에 강항은 명나라 차관 왕건공 편에 「적중봉소」를 보냈다.
왕건공은 적중봉소를 조선 조정에 전달했다. (선조실록, 선조32년 (1599년) 4월 15일 갑자 4번 째 기사, 전 형조 좌랑 강항이 상소하다 참조)

2) 코 무덤은 일본 교토의 풍국신사 앞 야마토 대로변 이총공원 주택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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