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 도시철도 농성역 입구에는 ‘한국역사 지켜 온 지혜롭고 의로운 땅’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호남은 한국 역사의 중요한 길목에 새로운 이정표 세운 걸출한 인물들을 낳았습니다. 그 인물들은 일찍이 한반도를 동북아의 중심이자 선진문물의 전파지로 자리매김했고 깊은 사상과 혜안으로 미망의 역사를 밝혀왔습니다. (후략)
그렇다. 호남은 동북아에 이름을 널리 알린 인물을 여럿 낳았다. 대표적 인물이 왕인과 장보고이다. 왕인은 일본에 한자를 전했고, 장보고는 완도에 해상왕국을 건설했다.
그러면 조선 시대에는 걸출한 인물이 없나? 물론 있다. 송희경, 최부 그리고 강항이다.
송희경(1376∽1446)은 한일교류의 여명을 연 외교관이다. 그는 1419년 이종무가 대마도를 정벌한 다음 해인 1420년(세종 2)에 회례사(回禮使)로 일본에 다녀온 후, 9개월간의 일본여정의 기록 『노송당 일본행록』을 남겼다. 이 책은 조선인이 쓴 가장 오래된(最古) 일본 기행집으로서, 해적 · 도시 · 성풍속(性風俗) · 농경 등 15세기 일본의 생활상이 그려져 있다.
일본 암파문고는 『노송당 일본행록- 조선 사절이 본 중세일본』을 발간했는데 4판에 이른다. 한편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송희경은 면앙정 송순의 고조부인데 함양부사를 하다가 은퇴하고 담양에서 살았다.
최부(1454∼1504)는 중국에서 널리 알려진 『표해록(漂海錄)』의 저자이다. 『표해록』은 마르코 폴로(1254~1324)의 『동방견문록』, 일본 승려
엔닌(794~864)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함께 중국 3대 여행기로 꼽힌다.
1488년(성종 19년) 윤1월 제주도에서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근무한 최부는 부친의 별세 소식을 접했다. 최부는 윤1월3일 일행 42인과 함께 제주를 떠나 나주로 가다가 뜻밖의 풍랑을 만나 중국 절강성 해안에 표착(漂着)했다. 그는 해적으로 몰리는 등 온갖 고난을 겪은 뒤, 북경에서 황제를 알현하고 6개월 만에 돌아왔다.
성종은 최부에게 그간의 일을 보고하도록 했는데, 최부는 8일 만에 일기를 지어 올렸다. (성종실록 1488년 6월14일)
최부는 청렴하고 강직한 선비였다. 휴가 때 나주 집을 찾아온 청백리 송흠에게 ‘어찌 역마를 타고 왔느냐’고 질책한 일화는 유명하고, 훈구대신의 부패를 신랄하게 공박하였으며 심지어 임금의 잘못도 낱낱이 거론하였다. 한번은 연산군에게 ‘학문을 게을리 하고 오락을 즐기며 국왕이 바로 서 있지 않다’고 상소했다.
최부는 1498년 무오사화 때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 갔고, 갑자사화로 참형(斬刑)을 당했다. 참형 당한 날의 '연산군일기(1504년 10월25일)'에는 졸기(卒記)가 적혀 있다.
'최부는 공정하고 청렴하며 정직하였으며 경서(經書)와 역사에 능통하여 문사(文詞)가 풍부했고, 간관(諫官)이 되어서는 아는 바를 말하지 아니함이 없고 회피하는 바가 없었다.'
다음은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강항(1567∼1618)이다. 강항은 이순신이 명량대첩에서 이긴 1주일이 지난 1597년 9월23일에 영광 논잠포에서 일본 수군에게 잡혀서 일본 오쓰(大洲)에 억류되었다. 얼마 후 주자학자라는 신분이 알려지자 대우가 달라졌고, 1598년 9월에 교토의 후시미성으로 이송되어 승려 후지와라 세이카를 만났다.
세이카는 강항에게 유교 경전 필사를 부탁하였는데 이것이 사서오경에 대한 일본 최초의 주자 주석본인 『사서오경 왜훈(倭訓)』이다.
1600년 5월에 강항은 귀국했고, 일본에서의 환란생활을 기록한 『간양록』을 남겼다.
에도시대 이전까지 일본은 무(武)와 불(佛)의 나라였다. 그런데 에도시대에는 무의 사무라이가 유(儒)를 알았다. 에도시대는 유학을 통해 사무라이의 신분 질서가 확립되어 270년 동안 태평성대가 이어졌다.
유(儒)의 사무라이를 확립시킨 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였고, 사상적 기초자는 후지와라 세이카였다. 그리고 세이카 뒤엔 강항이 있었다. 일본 오쓰 시 시민회관 앞에는 ‘홍유(鴻儒) 강항현창비’가 세워져 있다.
이렇게 송희경, 최부 그리고 강항이 쓴 책은 해외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의 전기(傳記)나 평전은 아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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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도시철도 농성역 입구에는 ‘한국역사 지켜 온 지혜롭고 의로운 땅’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호남은 한국 역사의 중요한 길목에 새로운 이정표 세운 걸출한 인물들을 낳았습니다. 그 인물들은 일찍이 한반도를 동북아의 중심이자 선진문물의 전파지로 자리매김했고 깊은 사상과 혜안으로 미망의 역사를 밝혀왔습니다. (후략)
그렇다. 호남은 동북아에 이름을 널리 알린 인물을 여럿 낳았다. 대표적 인물이 왕인과 장보고이다. 왕인은 일본에 한자를 전했고, 장보고는 완도에 해상왕국을 건설했다.

그러면 조선 시대에는 걸출한 인물이 없나? 물론 있다. 송희경, 최부 그리고 강항이다.
송희경(1376∽1446)은 한일교류의 여명을 연 외교관이다. 그는 1419년 이종무가 대마도를 정벌한 다음 해인 1420년(세종 2)에 회례사(回禮使)로 일본에 다녀온 후, 9개월간의 일본여정의 기록 『노송당 일본행록』을 남겼다. 이 책은 조선인이 쓴 가장 오래된(最古) 일본 기행집으로서, 해적 · 도시 · 성풍속(性風俗) · 농경 등 15세기 일본의 생활상이 그려져 있다.
일본 암파문고는 『노송당 일본행록- 조선 사절이 본 중세일본』을 발간했는데 4판에 이른다. 한편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송희경은 면앙정 송순의 고조부인데 함양부사를 하다가 은퇴하고 담양에서 살았다.
최부(1454∼1504)는 중국에서 널리 알려진 『표해록(漂海錄)』의 저자이다. 『표해록』은 마르코 폴로(1254~1324)의 『동방견문록』, 일본 승려
엔닌(794~864)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함께 중국 3대 여행기로 꼽힌다.
1488년(성종 19년) 윤1월 제주도에서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근무한 최부는 부친의 별세 소식을 접했다. 최부는 윤1월3일 일행 42인과 함께 제주를 떠나 나주로 가다가 뜻밖의 풍랑을 만나 중국 절강성 해안에 표착(漂着)했다. 그는 해적으로 몰리는 등 온갖 고난을 겪은 뒤, 북경에서 황제를 알현하고 6개월 만에 돌아왔다.
성종은 최부에게 그간의 일을 보고하도록 했는데, 최부는 8일 만에 일기를 지어 올렸다. (성종실록 1488년 6월14일)
최부는 청렴하고 강직한 선비였다. 휴가 때 나주 집을 찾아온 청백리 송흠에게 ‘어찌 역마를 타고 왔느냐’고 질책한 일화는 유명하고, 훈구대신의 부패를 신랄하게 공박하였으며 심지어 임금의 잘못도 낱낱이 거론하였다. 한번은 연산군에게 ‘학문을 게을리 하고 오락을 즐기며 국왕이 바로 서 있지 않다’고 상소했다.
최부는 1498년 무오사화 때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 갔고, 갑자사화로 참형(斬刑)을 당했다. 참형 당한 날의 '연산군일기(1504년 10월25일)'에는 졸기(卒記)가 적혀 있다.
'최부는 공정하고 청렴하며 정직하였으며 경서(經書)와 역사에 능통하여 문사(文詞)가 풍부했고, 간관(諫官)이 되어서는 아는 바를 말하지 아니함이 없고 회피하는 바가 없었다.'
다음은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강항(1567∼1618)이다. 강항은 이순신이 명량대첩에서 이긴 1주일이 지난 1597년 9월23일에 영광 논잠포에서 일본 수군에게 잡혀서 일본 오쓰(大洲)에 억류되었다. 얼마 후 주자학자라는 신분이 알려지자 대우가 달라졌고, 1598년 9월에 교토의 후시미성으로 이송되어 승려 후지와라 세이카를 만났다.
세이카는 강항에게 유교 경전 필사를 부탁하였는데 이것이 사서오경에 대한 일본 최초의 주자 주석본인 『사서오경 왜훈(倭訓)』이다.
1600년 5월에 강항은 귀국했고, 일본에서의 환란생활을 기록한 『간양록』을 남겼다.
에도시대 이전까지 일본은 무(武)와 불(佛)의 나라였다. 그런데 에도시대에는 무의 사무라이가 유(儒)를 알았다. 에도시대는 유학을 통해 사무라이의 신분 질서가 확립되어 270년 동안 태평성대가 이어졌다.
유(儒)의 사무라이를 확립시킨 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였고, 사상적 기초자는 후지와라 세이카였다. 그리고 세이카 뒤엔 강항이 있었다. 일본 오쓰 시 시민회관 앞에는 ‘홍유(鴻儒) 강항현창비’가 세워져 있다.
이렇게 송희경, 최부 그리고 강항이 쓴 책은 해외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의 전기(傳記)나 평전은 아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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