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곤소장의 경우 그러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유년기 자식의 기억으로는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다.
역시나 다를까 ‘돈 한 푼 벌어보지 못한 남자’로 짤막하게 先親(선친)에 대해 기억되었고 반면에 저자의 어머니는 온갖 가사노동은 물론이거니와 갖은 행상과 품앗이 등으로 인해 겨우 생계를 꾸려갔다고 家系(가계)의 당시 흐름에 대해 述懷(술회)하고 있다.
그러나 왜국에 유교를 전파하여 近代(근대) 일본을 존재하게 한 강항선생의 宣揚(선양)사업을 위한 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회장 박석무)일을 보고 있는 筆者(필자)의 시각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단언컨대 인간이 恩惠(은혜)를 모르면 짐승과 다를 바가 뭐있는가?!
인간의 정의에서 가장 기본이 되고 철학적인 정의가 고대 유명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말했다. 사회적 동물이란 사회생활 중에서 기본질서를 준수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러한 기본에서 가장 중요한 게 은혜를 아는 것이다.
당시 왜국에서는 갈증이 나도록 최고의 학문인 유교의 전파를 苦待(고대)했던 그들이 千辛萬苦(천신만고) 끝에 겨우 얻은 유교 전파에 대한 은혜도 모르고 포로인 수은 강항에게 유교를 배웠다는 게 수치스러워 구차하게 역사를 왜곡해 내려오고 있다.
明治維新(명치유신) 전후로 후지와라 세이카의 수제자이며 왜국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幕府(막부)의 侍講(시강)인 하야시 라잔에 의해 일본 역사가 구차스럽게 왜곡되고 날조되어 퇴계 이황으로부터 퇴계학을 傳承(전승)받았다는 게 그들의 일본의 유교 전파라고 주장한다.
스승이란 적국의 포로이든 제아무리 천박한 직업을 가졌든 한 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일 수밖에 없다. 포로란 상대의 신분이 황제이든 장군이든 퇴계 선생이든 전쟁 중에 잡히게 되면 누구나가 포로라는 신분으로 나락에 떨어진다.
그렇지만 당시 임진왜란의 노예전쟁과 정유재란의 무자비한 보복전쟁 또는 匠人(장인)전쟁에서 포로라는 신분이 뭐가 그토록 그네들이 수용하지 못할 정도로 이상하고 잘못된 것인가?
그들이 당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해 조선인 포로들을 대했던 행위는 마치 미치광이나 아니면 미치지 않고는 저지를 수 없는 天人共怒(천인공노)할 행위였으며 男女老少(남녀노소) 또는 지위고하 身分(신분)을 가리지 않고 만행을 저질렀으며 이루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는 걸 東西古今(동서고금)을 통해서도 자세히 알 수 있다.
강항선생의 自傳的(자전적)인 저서 ‘간양록’에도 포로에 대한 구절이 ‘간양록’ 전체에 녹아나오는데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루한 포로의 모습이 그려지고 왜적들은 흡사 인간이 아닌듯한 모급으로 그들의 狂氣(광기)는 망나니를 연상하고 있다.
수은 강항은 “너희(왜)들이 인간이라면 이러지는 못한다. 이건 개나 소에게도 이렇게는 못할 짓이다. ‘거느적거린다’ 해서 어린아이든 노인이든 가리지 않고 바다에 산채로 생매장하였고 배를 갈라죽이고 몽둥이로 때려죽였다.”라고 절규한다.<본지 2018년07월15일 필자의 칼럼글과 2018년12월02일 무라카미 츠네오(수은강항선생 일본연구회)회장, '홍유 수은 강항선생 현창비' 건립의 글 참조>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적들은 그런 포로들 중 한 명인 수은 강항에 대해서는 극진했던 이유는 왜의 전국시대 전후로 民心(민심)이 이미 사나와져 있었고 일부 識字(식자)층에서도 文(문)의 정치를 하고자하는 세력에 의해 당시 최고의 학문인 유교에 목말라하고 있었다.
왜국에서는 오나노부나카에서 이어진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너무나도 무자비하게 武(무)의 정치로 왜국은 절망감에 빠뜨렸고 도쿠까와 이에야스(덕천가강)시대에 후지와라 세이카가 포로인 강항을 스승의 禮(예)를 갖추고 師弟之間(사제지간)을 맺음으로써 왜국은 근대일본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수은 강항의 수제자인 후지와라세이카의 수제자이자 도쿠까와 이에야스(덕천가강)에게 소개해 막부시대를 연 하야시 라잔이 이러한 살아있는 역사까지 왜곡하면서 왜 퇴계학을 주장했을까?
이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 되고 말았다. 이토록 일본인들의 사고방식인 정신세계는 예나 지금이나 거의 똑같은 흐름으로 가고 있다. 수치스럽고 구차잔하면 무작정 버리고 거느적 거리면 냉정하게 버리고 가는 그런 민족적인 기질을 지금도 똑같은 흐름이 있다.
물론 우리네 爲政者(위정자)들도 제대로 된 역사관과 韓日關係(한일관계)에 대한 歷史認識(역사인식)이 매우 부족하다.
일본이 기피하는 인물 수은 강항선생!!
일제강점기시절인 36년사에서 영광지역은 철저하게 강항선생의 책자와 유물을 焚書坑儒(분서갱유)하려고 일본 경찰서장이 앞장서서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우리민족이 어떠한 민족이던가?
先代(선대)의 유물을 온몸으로 지켜내고 더 철저하게 지켜냈던 것이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여기서 불과 수년전의 박근혜정부만 조금 들여다보자!! 박근혜 정부는 교학사 역사교과서를 날치기로 검정해 통과시키더니 韓日(한일) 위안부 합의를 성사시키기 위하여 강제징용 피해자 재판까지 개입했다는 사법농단 정황의 민 낮이 드러나기에 이르렀다.
당시 위안부 합의는 일본의 위안부 강제 동원 사실도 명기하지 않은, 매국적인 합의였기 때문에 故人(고인)이 되신 김복동 할머니를 비롯해 국민들이 거세게 반대하였다.
더불어 박근혜 정부는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면서, 어떻게 해서든 위안부협상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강제징용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소송까지 부당 개입해 양승태 대법원장이 故意(고의)로 재판을 지연을 시켰다는 의혹이 드러나면서 시민단체는 분노하고 박근혜 - 양승태 사법농단 관련자의 처벌을 외치고 있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다시 박 소장의 자서전으로 되돌아가 보자.
이렇듯 박 소장은 초등학교 스승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靑出於藍(청출어람)을 꿈꾸며 3년 전장 장학생으로 중학교에 들어갔으나 몇 푼 안 되는 기성회비로 중학교 졸업장도 못 받고 한순간 절망감을 가진다.
그러나 저자는 奮然(분연)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검정고시를 거쳐 부산으로 내려가 두 형의 도움으로 어렵게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과정을 보면 눈물겨운 忍苦(인고)의 세월들을 간접 경험을 통해 독자라면 누구나 공감을 갖고 큰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생 歷程(역정)의 스토리가 잔잔히 전개 되는걸 함께 해 간다.
한양대학교 초빙교수 연구실을 찾아 갔을 때도 두어 시간을 거침없이 지난 세월을 말하는 박소장의 立談(입담)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당연히 이어져 있는 6시 서울역 4번 출구 근처 식당에서 갖는 백두산문학 신년인사회에 기고 만다.
하지만 백두산문학회에서 신년회 자리에서도 이러한 범상 (凡常)치 않은 인물에 대한 독특한 만남으로 긴 여운이 계속 소용돌이치듯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왜냐면 박소장의 자서전을 살펴보노라면 24년간 25명의 총리에게 주로 국정총괄·기획업무를 통해 실질적으로 국가 행정의 중심축 역할을 수행했으며 탁월한 업무수행으로 “총리실 해결사”등 별명을 가질 정도였으며 각 부처 간 이견 및 갈등조정에 두드러진 능력발휘(고건 前 총리 자서전에서 언급)이며 혁신적 사고로 규제개혁 등 업무혁신주도 능력 등등이 주마등처럼 그려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박소장의 “머슴이나 보내지 공부는 무슨“이라는 제목의 자전적 에세이집을 더 널리 소개하여 읽게 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할 뿐이었다.
더 더욱, 자신의 어려웠던 시절을 잊지 않고 공직 재직 시부터 중증 장애인시설, 보육원, 양로원 등 각종 사회 복지시설 지속 방문해 함께 어울림을 몸소 실천한 실천가이기에 더 그러했다.
이뿐이던가?!
한국전기공사 사장으로서 공사를 미래지향적, 성과 지향적으로 완전 개조시켰으며 미래전략실을 설치하고 내일 경영제를 도입, 주식시장 형 인사와 성과보상제도 도입·실행했으며 모든 공직을 떠난 후에도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고위 공직자의 표상이었다.
최근에야 다소 여유(?)있게 한양대학교 갈등문제연구소를 창설, 사회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폐해 감소에 노력하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자기성찰을 꿈꾸며 정진하고 있는 모습을 행운처럼 筆者(필자)에게 스케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다.
끝으로 박철곤소장은 어려운 환경덕분에 호남(전북 진안)태생으로 부산에서 고교를 졸업, 서울소재 대학을 졸업했으며 처가는 충남 부여이고 경기도 오산 거주 중 고시에 합격해, 경기도청 화성군청에서 첫 근무를 시작했기에 지역 색으로 도배를 하고 있는 현 정치판에 귀감이 되는 인물은 아닐까하는 생각으로 注目(주목) 해 본다.
耳順(이순)의 나이가 넘어가는 筆者(필자)에게도 이렇게 멋진 교훈을 주고 있는데 현재 奉職(봉직)하고 있는 많은 公職者(공직자)들이나 爲政者(위정자)들도 이 의미 있는 책을 일게된다면 자신만의 확고한 길을 다지는데 많은 교훈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그 누군가가 자신의 꿈을 꾸고 있다면, 아니 목표를 갖고 있다면 “머슴이나 보내지 공부는 무슨“ 저자와 같이 자신감으로 강력한 도전을 통한다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을 가져보리라!! 박 소장은 검정고시 두 번과 행정고시 한 번, 두메산골 오지마을에서 나고 자란 한 고학 소년이 유년시절의 모진 가난과 시련을 딛고 공직의 길에 올라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차관급), 공기업 사장의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박 소장의 지난 60여년 自傳的(자전적)인 삶의 역정을 흥미롭게(?) 살펴보면서 “결코 평범하지 않은 한사람에 대한 인생의 무게를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는 自敍傳(자서전)이구나!!”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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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곤소장의 경우 그러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유년기 자식의 기억으로는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다.
역시나 다를까 ‘돈 한 푼 벌어보지 못한 남자’로 짤막하게 先親(선친)에 대해 기억되었고 반면에 저자의 어머니는 온갖 가사노동은 물론이거니와 갖은 행상과 품앗이 등으로 인해 겨우 생계를 꾸려갔다고 家系(가계)의 당시 흐름에 대해 述懷(술회)하고 있다.
그러나 왜국에 유교를 전파하여 近代(근대) 일본을 존재하게 한 강항선생의 宣揚(선양)사업을 위한 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회장 박석무)일을 보고 있는 筆者(필자)의 시각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단언컨대 인간이 恩惠(은혜)를 모르면 짐승과 다를 바가 뭐있는가?!
인간의 정의에서 가장 기본이 되고 철학적인 정의가 고대 유명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말했다. 사회적 동물이란 사회생활 중에서 기본질서를 준수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러한 기본에서 가장 중요한 게 은혜를 아는 것이다.
당시 왜국에서는 갈증이 나도록 최고의 학문인 유교의 전파를 苦待(고대)했던 그들이 千辛萬苦(천신만고) 끝에 겨우 얻은 유교 전파에 대한 은혜도 모르고 포로인 수은 강항에게 유교를 배웠다는 게 수치스러워 구차하게 역사를 왜곡해 내려오고 있다.
明治維新(명치유신) 전후로 후지와라 세이카의 수제자이며 왜국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幕府(막부)의 侍講(시강)인 하야시 라잔에 의해 일본 역사가 구차스럽게 왜곡되고 날조되어 퇴계 이황으로부터 퇴계학을 傳承(전승)받았다는 게 그들의 일본의 유교 전파라고 주장한다.
스승이란 적국의 포로이든 제아무리 천박한 직업을 가졌든 한 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일 수밖에 없다. 포로란 상대의 신분이 황제이든 장군이든 퇴계 선생이든 전쟁 중에 잡히게 되면 누구나가 포로라는 신분으로 나락에 떨어진다.
그렇지만 당시 임진왜란의 노예전쟁과 정유재란의 무자비한 보복전쟁 또는 匠人(장인)전쟁에서 포로라는 신분이 뭐가 그토록 그네들이 수용하지 못할 정도로 이상하고 잘못된 것인가?
그들이 당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해 조선인 포로들을 대했던 행위는 마치 미치광이나 아니면 미치지 않고는 저지를 수 없는 天人共怒(천인공노)할 행위였으며 男女老少(남녀노소) 또는 지위고하 身分(신분)을 가리지 않고 만행을 저질렀으며 이루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는 걸 東西古今(동서고금)을 통해서도 자세히 알 수 있다.
강항선생의 自傳的(자전적)인 저서 ‘간양록’에도 포로에 대한 구절이 ‘간양록’ 전체에 녹아나오는데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루한 포로의 모습이 그려지고 왜적들은 흡사 인간이 아닌듯한 모급으로 그들의 狂氣(광기)는 망나니를 연상하고 있다.
수은 강항은 “너희(왜)들이 인간이라면 이러지는 못한다. 이건 개나 소에게도 이렇게는 못할 짓이다. ‘거느적거린다’ 해서 어린아이든 노인이든 가리지 않고 바다에 산채로 생매장하였고 배를 갈라죽이고 몽둥이로 때려죽였다.”라고 절규한다.<본지 2018년07월15일 필자의 칼럼글과 2018년12월02일 무라카미 츠네오(수은강항선생 일본연구회)회장, '홍유 수은 강항선생 현창비' 건립의 글 참조>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적들은 그런 포로들 중 한 명인 수은 강항에 대해서는 극진했던 이유는 왜의 전국시대 전후로 民心(민심)이 이미 사나와져 있었고 일부 識字(식자)층에서도 文(문)의 정치를 하고자하는 세력에 의해 당시 최고의 학문인 유교에 목말라하고 있었다.
왜국에서는 오나노부나카에서 이어진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너무나도 무자비하게 武(무)의 정치로 왜국은 절망감에 빠뜨렸고 도쿠까와 이에야스(덕천가강)시대에 후지와라 세이카가 포로인 강항을 스승의 禮(예)를 갖추고 師弟之間(사제지간)을 맺음으로써 왜국은 근대일본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수은 강항의 수제자인 후지와라세이카의 수제자이자 도쿠까와 이에야스(덕천가강)에게 소개해 막부시대를 연 하야시 라잔이 이러한 살아있는 역사까지 왜곡하면서 왜 퇴계학을 주장했을까?
이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 되고 말았다. 이토록 일본인들의 사고방식인 정신세계는 예나 지금이나 거의 똑같은 흐름으로 가고 있다. 수치스럽고 구차잔하면 무작정 버리고 거느적 거리면 냉정하게 버리고 가는 그런 민족적인 기질을 지금도 똑같은 흐름이 있다.
물론 우리네 爲政者(위정자)들도 제대로 된 역사관과 韓日關係(한일관계)에 대한 歷史認識(역사인식)이 매우 부족하다.
일본이 기피하는 인물 수은 강항선생!!
일제강점기시절인 36년사에서 영광지역은 철저하게 강항선생의 책자와 유물을 焚書坑儒(분서갱유)하려고 일본 경찰서장이 앞장서서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우리민족이 어떠한 민족이던가?
先代(선대)의 유물을 온몸으로 지켜내고 더 철저하게 지켜냈던 것이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여기서 불과 수년전의 박근혜정부만 조금 들여다보자!! 박근혜 정부는 교학사 역사교과서를 날치기로 검정해 통과시키더니 韓日(한일) 위안부 합의를 성사시키기 위하여 강제징용 피해자 재판까지 개입했다는 사법농단 정황의 민 낮이 드러나기에 이르렀다.
당시 위안부 합의는 일본의 위안부 강제 동원 사실도 명기하지 않은, 매국적인 합의였기 때문에 故人(고인)이 되신 김복동 할머니를 비롯해 국민들이 거세게 반대하였다.
더불어 박근혜 정부는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면서, 어떻게 해서든 위안부협상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강제징용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소송까지 부당 개입해 양승태 대법원장이 故意(고의)로 재판을 지연을 시켰다는 의혹이 드러나면서 시민단체는 분노하고 박근혜 - 양승태 사법농단 관련자의 처벌을 외치고 있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다시 박 소장의 자서전으로 되돌아가 보자.
이렇듯 박 소장은 초등학교 스승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靑出於藍(청출어람)을 꿈꾸며 3년 전장 장학생으로 중학교에 들어갔으나 몇 푼 안 되는 기성회비로 중학교 졸업장도 못 받고 한순간 절망감을 가진다.
그러나 저자는 奮然(분연)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검정고시를 거쳐 부산으로 내려가 두 형의 도움으로 어렵게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과정을 보면 눈물겨운 忍苦(인고)의 세월들을 간접 경험을 통해 독자라면 누구나 공감을 갖고 큰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생 歷程(역정)의 스토리가 잔잔히 전개 되는걸 함께 해 간다.
한양대학교 초빙교수 연구실을 찾아 갔을 때도 두어 시간을 거침없이 지난 세월을 말하는 박소장의 立談(입담)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당연히 이어져 있는 6시 서울역 4번 출구 근처 식당에서 갖는 백두산문학 신년인사회에 기고 만다.
하지만 백두산문학회에서 신년회 자리에서도 이러한 범상 (凡常)치 않은 인물에 대한 독특한 만남으로 긴 여운이 계속 소용돌이치듯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왜냐면 박소장의 자서전을 살펴보노라면 24년간 25명의 총리에게 주로 국정총괄·기획업무를 통해 실질적으로 국가 행정의 중심축 역할을 수행했으며 탁월한 업무수행으로 “총리실 해결사”등 별명을 가질 정도였으며 각 부처 간 이견 및 갈등조정에 두드러진 능력발휘(고건 前 총리 자서전에서 언급)이며 혁신적 사고로 규제개혁 등 업무혁신주도 능력 등등이 주마등처럼 그려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박소장의 “머슴이나 보내지 공부는 무슨“이라는 제목의 자전적 에세이집을 더 널리 소개하여 읽게 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할 뿐이었다.
더 더욱, 자신의 어려웠던 시절을 잊지 않고 공직 재직 시부터 중증 장애인시설, 보육원, 양로원 등 각종 사회 복지시설 지속 방문해 함께 어울림을 몸소 실천한 실천가이기에 더 그러했다.
이뿐이던가?!
한국전기공사 사장으로서 공사를 미래지향적, 성과 지향적으로 완전 개조시켰으며 미래전략실을 설치하고 내일 경영제를 도입, 주식시장 형 인사와 성과보상제도 도입·실행했으며 모든 공직을 떠난 후에도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고위 공직자의 표상이었다.
최근에야 다소 여유(?)있게 한양대학교 갈등문제연구소를 창설, 사회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폐해 감소에 노력하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자기성찰을 꿈꾸며 정진하고 있는 모습을 행운처럼 筆者(필자)에게 스케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다.
끝으로 박철곤소장은 어려운 환경덕분에 호남(전북 진안)태생으로 부산에서 고교를 졸업, 서울소재 대학을 졸업했으며 처가는 충남 부여이고 경기도 오산 거주 중 고시에 합격해, 경기도청 화성군청에서 첫 근무를 시작했기에 지역 색으로 도배를 하고 있는 현 정치판에 귀감이 되는 인물은 아닐까하는 생각으로 注目(주목) 해 본다.
耳順(이순)의 나이가 넘어가는 筆者(필자)에게도 이렇게 멋진 교훈을 주고 있는데 현재 奉職(봉직)하고 있는 많은 公職者(공직자)들이나 爲政者(위정자)들도 이 의미 있는 책을 일게된다면 자신만의 확고한 길을 다지는데 많은 교훈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그 누군가가 자신의 꿈을 꾸고 있다면, 아니 목표를 갖고 있다면 “머슴이나 보내지 공부는 무슨“ 저자와 같이 자신감으로 강력한 도전을 통한다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을 가져보리라!!

박 소장은 검정고시 두 번과 행정고시 한 번, 두메산골 오지마을에서 나고 자란 한 고학 소년이 유년시절의 모진 가난과 시련을 딛고 공직의 길에 올라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차관급), 공기업 사장의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박 소장의 지난 60여년 自傳的(자전적)인 삶의 역정을 흥미롭게(?) 살펴보면서 “결코 평범하지 않은 한사람에 대한 인생의 무게를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는 自敍傳(자서전)이구나!!”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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