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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의 칼럼> 2019년 수은 강항선생 일본 교토 국제학술세미나 2
‘간양록’ 참이 보이는데도 왜 이렇게 친일과 어용으로만 단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걸까?!
repoter : 강대의 ( yug42@naver.com ) 등록일 : 2019-06-22 22:33:27 · 공유일 : 2019-06-23 00:20:48

[호남학산책] [선비, 길을 열다]
사람의 길 그리고 하늘 세번째 이야기가 수은강항선생 일본교토국제학술세미나(이하 :  국제학술세미나)출발을 하루 앞두고 17일 아침에 (재)한국학호남진흥원에서 메일로 보내와 느낌이 남달랐다.((재)한국학호남진흥원 홈페이지에서 사업성과 메뉴바 안의 호남학 산책 12번글 참조)

<중략>
오늘 3호는 더더욱 일본국 교토시에서 갖는 수은강항선생국제학술세미나를 앞두고 가슴에 와 닿습니다.

1. 맹꽁이 타령이 문제이나 꼭 그렇지 않는 멸종동물이 되고 말았고

2. 일본인 스승을 자랑하고 황도유학을 부르짖던 개!! 어용유학자들이 항상 지금도 일본의 정권에 빌붙어 문제인 것 같고

3. 인도(人道)의 인, 의, 예 그리고 관용(寬容)과 함께 진심으로 공자도 10진의 꺾어지는 나이에 인도(仁道)를 설파하셨습니다.

특히 가슴을 저미는 건 조선이 쇠약해짐이 유교에 기대는 허약한 믿음이 아니라 유교의 실질적인 생활화로 생활에는 필요도 없는 이데오르기에만 위정자(爲政者)들이 집착하고 유교의 신앙이 도(道)의 높은 경지로 각 사회에 파고 들지 못함이라는데 대해 감동과 감격을 몰아 와 줍니다.
항상 벅찬 감동으로 읽고 있습니다.
<중략>

사실 국제학술세미나를 앞두고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일본을 1차 탐방까지 다녀왔지만 실질적인 성과라는 건 고작 강항휘초의 재발견과 허수미교수 미팅, ‘피스로드인 에이메’ 단체의 사토회장과 강용희선생 만남, 됴지사대학 도서관방문과 일본국내 중앙도서관을 비롯해 몇몇 대학 도서관 방문 외엔 모두 2차 탐방으로 겹치는 그런 탐방이었기에 잔뜩 기대한 일본내 NHK빙송과 마이니치신문 등의 취재로 인한 강항선생의 유물발굴이나 별건(別件)도 아닌 자치단체장들의 환영사, 축사까지도 확보하지 못해 참으로 미미했다.

또, 각종 행사에서 눈부시게 성과로 나타나는 게 참석 인원의 확보인데도 그마저도 여의치 못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반가운 메일을 아주 일찍 받게 된다.

가장 비중 큰 일본학자의 발제문에 대한 기대감
국제학술세미나에서 걱정이 되었던 일본인 학자의 발제문을 지난 달 5월 31일에 ‘2019년 수은 강항선생 일본 교토 국제학술세미나 1’에서 소개한 조선대 한 모 교수로부터 그가 ‘도쿄대학의 스승’이라는 친절한 글과 함께 받게 된다.
       
처음 나리사와 마사르(成澤勝)日本 東北大學 명예교수, 현재 일본경제단체연합회 강사.‘일본에서의 강항 연구의 현황과 그 의의’로 발제하기로 한 사람이 빠지고 온 글이기에 더 꼼꼼히 발제문을 읽어보고 순수좌 행장 중심으로 쓴 발제문이 더 가슴에 와 닿았다.

그리하여 소개한 조선대 한 모 교수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메일로 전했고 한 모 교수를 소개한 김교수에게도 처음 여교수를 좌장(座長)으로 편성해 왔던 걸 몇몇이 모여 3년전에 공맹밖에 모르는 그런 교수로 생각하고 아예 이번 세미나에서는 빼자고 주장을 펼쳤던걸 후회하고 그나마 토론자로 보충해 넣었음을 천만다행(千萬多幸)으로 여기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이번 국제학술세미나에 참여한 김덕진교수(광주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는 높은 신뢰감으로 2016년도 ‘수은강항선생의 광양수월정과 역사왜곡’으로 전남 22개시군향교의 유림들과 광주정씨까지 문중차원에서 대거 참여를 했다.

그 결과 당시 광양시청에서 발제한 내용을 순천대학교 학술지에 발표를 해 광양시청으로부터 수은강항선생의 수월정기문임을 인정하는 공문을 정식으로 요구해 받기도 했다.

그런 인연으로 믿음과 신뢰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고 김덕진교수에 대해서는 매년 기대감을 갖고 그 어떤 재론(再論)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보람된 학술세미나를 진행해 올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난 주초에서야 보내온 발제문 내용을 보고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어 ‘수은 강항의 제자와 그 활동’에서 2018년 11월 7일에 발표한 안동교박사의 발제문과 김교수의 ‘익산 정흥연과의 교우관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부분이 많아 일본에서의 제자동향 중 역사왜곡이 가장 심각한 야마자키 안사이에 대한 부분을 1차 탐방전부터 적극 주문을 넣기 시작했다.



다급함을 몰아가 지난 14일 광주에 있는 J대학교 도서관에 가 5시간정도를 머물면서 ‘막번체제의 안사이학파’라는 소중한 책을 수 여 권을 뒤진 가운데 찾게 되었고 전자 도서관에서 각종 학술세미나에서 야마자키 안사이에 대한 발제문이 역사왜곡부분을 정확히 짚고 있어 메일로 송부했더니 1쪽 가까이 수정한걸 보고 그나마 저윽이 안도(安堵) 하며 가까스로 출판시간에 쫒겨가면서 마감쳤다.

2019년 수은강항선생국제학술세미나 개최

드디어 19일 13시 40분 일본 교토 용곡대학교 학장과 임원진이 티타임을 갖기로 해 허수미교수의 안내를 받아 상호 인사와 선물교환을 하며 덕담을 주고받고 나왔다.
그 사이 21`호관 101호실은 이미 손발이 척척 맞아 모든 준비가 다 갖춰져 있었다.

더 놀라운 건 오사카 뿐 아니라 도쿄에서도 평화통일平和統一聯合민간단체가 목이茂木福美사무차장의 인솔 하에 150석의 자리가 거의 채워져 있었다.

벅찬 감동으로 식전공연으로 ‘간양록’주제곡을 먼저 보고 듣고 양철단장은 실크하우스 이미승운장이 사전에 준비한 한복을 입고서 무대에 올라 격을 높이고 자연의 소리이자 학동시절부터 선비문화의 상징인 풀피리(트롯노래 메들리)연주로 참여자들은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른다.

또, 지난 6월 7일(강항선생 타계 음력 5월 6일 400+1주년)에 오즈시민회관 2층에서 120여명이 모여 거행된 위령제 소식과 당시 합창단의 ‘아리랑과 고향의 봄’ 노래에 다시 풀피리로 연주해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이어진 1부 개회식에 간소화해 국민의례를 갖고 재일동포와 일본인 중심의 외빈소개를 받고 개회선언에 이어 평화통일단체平和統一聯合의  목이茂木福美사무차장으로부터 환영사에 이어 김준성 영광군수와 김영록 전남도지사의 축사를 대독(代讀)으로 가졌다.

행사를 하다보면 항상 문제는 예상치도 않은 엉뚱한 곳에서 터진다. 2부 국제학술세미나로 김용의교수(전남대 일본문화학과교수)가 좌장(座長)으로서 책임을 이어받아 맛깔스럽게 진행을 해 가고 제1주제발제로 사토회장(姜沆 연구자)이 무대에 올라 주목을 받는다.

이어 분명히 한국말을 너무도 유창히 받침을 넣어 잘하는 발제자가 자칭 일본인이라면서 제2주제 발제를 열기 시작했다. 그는 원고의 내용과 정반대로 발제를 하고 있었으며 전혀 관계가 정립(定立)이 안 되어 있는 문제로 발제를 하고 있어서 청중들이 웅성거림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유창하게 한국말로 여유까지 부려가며 아랑곳하지않고 발제를 이어갔다.  岡山善一郎OKAYAMA Zenichiro교수는 그렇게 발제를 마치고 내려왔고 이어 김덕진金德珍(光州敎大 敎授)교수가 제 3주제발제를 진행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김덕진교수느 야마자키 안사이에 대한 1쪽 분량의 발제도 그냥 지나쳐 가고 ‘수은 강항의 제자와 그 활동’중 국내중심 으로만 이어갔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픈다고 2014년부터 본지까지 이끌고 뛰어들어 제법 아는게 있노라고 생각이 되어 훈수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깡그리채 무시당해 버린 것이다.

이윽고 한 모교수가 약속한 10분이 훨씬 넘어간 장황하면서도 말도 안 되는 발제자에 대한 차별성 질문으로 사토회장의 당황함에 더 민망했고 이러한 경우없는 토론까지 끝나고서야 김용희교수는 좌장으로서 침착성을 잃지않고 청중들로부터 질문(質問)의 시간을 갖기로 하고 풀어갔다.



스승의 나라 강항, 제자의 나라 후지와라 세이카

필자는 문화재학을 전공을 하는 사람이자 ‘강항선생의 국내연구가’로서‘간양록’과 강항휘초, 적중봉소, 강감회요, 운제록, 잡지 등을 배경으로 지난 2014년도부터 본지의 트레이드 마크[trademark]로 ‘스승의 나라 강항, 제자의 나라 후지와라 세이카’의 케치플레이즈로 열정을 갖고 성의를 다하고 있기 때문에 제법 진실된 역사와 왜곡된 역사를 안다고 자부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그동안 국내에 머물었던 국제학술세미나를 매우 열악한 조건을 갖고도 일본에서 개최하게 하였고, 언론에 주목을 받지 못한 강항선생의 업적을 국내에 주목을 받게 해 이젠 포로로 끌려간 그 일본 땅 심장부인 교토시에서 개최한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치도 못한 일부 발제자의 어긋난 발제와 토론에 결코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런 엄정한 사유로 제일 먼저 손을 들어 질문자로 나섰다. 속으로 침착해야한다고 수없이 외치고 흥분하지 말자고 수없이 되뇌이고서 무대 앞에 섰다.

마이크를 잡고 질문을 하려는데 메모했던 내용만은 더 뚜렷하게 보였지만 침묵의 1분은 얄밉게도 마치 벙어리가 된 것처럼 입 밖으로 아무 말도 이어가지 못하게끔 감성이 먼저 일어서고 말았다.

좌장을 맡은 김용의교수가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격려의 박수르 유도해 냈지만 흐르는 눈물만 앞을 가릴 뿐이지 결코 도움이 못되고 있다가 겨우 진정이 되어 오카야마교수와 김덕진교수에게 질문하겠노라고 말하고 먼저 오카야마교수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난 달 31일에 먼저 받은 발제문에 너무 고마웠다고 말하고는 발제문에 도달되지 않은 뜻밖에 발제라서 순간 당황했노라며 역지사지(易地思之)하면 가장 쉽게 이해가 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질문을 하겠노라고 겨우 운을 떼 말했다.

발제를 한 선생의 아들과 딸 2명을 포함해 어린 조카 3명을 거느적 거린다는 이유하나만으로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하고서 400여년이 흘러간 지금 선생앞에 그 자가 서있다면 그를 선생은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또 포로의 신분으로 피노된 입장에서 친화력이 있어서 주변의 덕을 많이 입고 조선으로부터 높은 관직까지 올랐으니 그냥 포로가 아니라 성공한 강항선생으로 2년 8개월만에 꿈에 그리던 영광땅 고향에 까지 돌아가게 되었으니 누구나 부러워 할 만큼 행복한 삶이 아니었겠냐는 막말성 발제에 질문하려고 하였으나 방청객에서 소란이 일어 더 이상 질문을 이어가지 못하고 말았다.

이 무렵 또 다른 질문을 받아야 하는 김덕진교수는 아예 세미나장에서 벗어나 있었기에 추가 질문은 아예 생각하지도 못하고 금같은 시간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폐회 후 한 밤 긴급 대책회의
열띤 세미나 진행 등으로 이미 시간은 5시가 훨씬 넘어가고 있었으며 순식간에 입소문으로 발제자와 토론자에 대한 항의성 질문내용이 퍼지고 이런 발제자와는 다과회를 가지면서 축배(祝杯)도 의미가 없어 강용희선생에게 폐회관련 다과회는 생략해야 겠다고 말했고 기념촬영을 갖자는 집행부의 의견도 무시하고 버스로 이동해 가기로 했다.


고베시청 한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비빔밥 만찬을 하면서도 열띤 토론이 이곳저곳에서 삼삼오오모여 발제자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했고 다카마츠 1급호텔에 투숙하면서 집행부 관계자를 찾아가 향후 대책을 급히 의논했다.

온천으로 유명한 호텔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그렇게도 좋아하고 매일같이 즐기는 사우나는 생각조차 못하고 분기(憤氣)탱천해 새벽녘까지 잠을 못 이루고 말았다.

그래도 새로운 아침은 밝아온다
아침 8시에 버스로 오즈시민회관 행사장으로 이동해 가면서도 최금환 조이여행사 대표회장의 입담은 그의 고급 진 사고방식(思考方式)과 뛰어난 발상의 전환이 잘 버무러져 42명의 탐방객들을 들었다 놓았다를 거듭했다.

10시 30여분에 오즈시민회관에 도착되었고 준비된 큼직한 국화 한 다발을‘홍유 강항선생현창비’에 헌화하는 식을 갖고 2층 추모식장으로 오른다.

오즈시청에서는 각 참석자에게 흉화를 모두 패용(佩用)해 주고 식장에는 커다란 우리 측 추모 플랑과 오즈시청에서 준비한 현수막이 식장에 어울리게 게첨되어 분위기를 이끌고 있었다.

추념식을 갖기전 실크하우스 이미승원장은한복연구가인 후배와 함께 재빨리 선비복 5벌과 풀피리 연주복 1벌을 준비해 내빈들의 품격을 높이 세워 격식에 맞게 잘 대처가 되었다.

이윽고 추념식은 사토회장의 진행과 최금환대표의 통역으로 오즈시청측 합창단의 홀로아리랑과 앵콜곡으로 고향의 봄을 들었으며 답가로 역시 양철단장의 풀피리연주에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오즈시청 부시장의 환영사에 이어 최흥렬 내산서원장은 추념사에서 ‘어제 19일의 국제학술세미나에 이어 오늘 20일 수은강항선생의 400+1주년 추념식이 개최되어 오즈시장을 비롯한 오즈시청 관계자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며 ‘앞으로 민간차원의 활발한 한일관계(韓日關係) 개선(改善)의 도화선(導火線)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생뚱맞은 발제자, 오카야마교수

특히 최 원장은 강항선생이 포로로 끌려와 판액이 된 종오소호 [從吾所好]사자성어 뜻을 묻는 MBC방송 취재기자와 인터뷰에서 여기까지 동행한 오카야마교수가 所자를 풀어 ‘고향으로 가고 싶은 간절한 강항선생의 마음이다’라고 하는 설명을 비웃듯 정색(正色)을 하며‘강항선생은 피노되어 한 많은 삶을 살며 때때로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렸지만, 그때마다 죽음을 불사(不辭)하는 선비정신을 갖고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표표하게 살았기에 포로의 신분일망정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독야청청(獨也靑靑)하며 굴복하지 않는 자신만의 옳은 길로 나가고자 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의 마음’이라고 엄숙하게 설명했다.

추모식이 끝나고 출석사(솟세키사)의 주지스님이 탐방객들을 기다린다는 말에 25인 버스 2대로 갈아타고 소로(小路)로 편도길인 오즈시에서 5KM가 넘는 언덕 산길을 힘들게 올랐다. 여기서도 오카야마교수의 엉뚱한 한자해석으로 인해 말한마디가 또 문제가 되었지만 차마 소개한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더 말할 가치가 없어 생략하기로 한다.

420 여년전에 수은강항선생과 교유(交遊)했던 호인스님의 위패가 모셔져 있어 주지스님의 인사말을 들은후 스님의 독경으로 호인스님에게 우리가 모셔온 수은 강항선생과 재회(再會)하도록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최금환대표와 사토회장의 닮은꼴

최금환 대표의 강항선생의 고난의 행적지 욕심이 사토회장과 통해 오즈시에서 한참 떨어진 폭포수 동굴을 찾기로 했다. 당시 강항선생은 이 곳 폭포 동굴에서 식솔들과 탈출을 도모하다가 사로잡힌 곳으로 왜국인 처형장에서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을 때 당시 왜국의 수도인 교토에 까지 높은 학문의 경지가 소개되어 급박한 상황속에서 목숨을 건지신 곳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사토회장을 비롯한 피스로드인 에이메 단체회원들은 똘똘 뭉쳐 시간의 촉박함으로 오찬을 도시락으로 대체한 한국손님들을 위해 만찬만은 일본 정식으로 품위있게 대접해야한다고 이 지역 특산물로 유명한 돔회 정식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2박 3일의 여정이 끝나고 이젠 헤어져야 할 시간인 만큼 서로간에 할 말이 많았다.

강대욱 이사장은 ‘여건이 성숙해 지면 올해 말 피스로드인 에이메 단체를 대한민국 영광에 초대를 하겠지만 여의치 않을 때는 늦어도 2020년 5월중에 초대해 민간차원의 외교를 전개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피스로드인 에이메 사토회장의 인사말과 목이茂木福美사무차장, 도쿄지회장으로부터 강용희선생이 홀로 열정적인 봉사활동에 뭔가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노라고 말하며 감격을 대신했다.

국제학술세미나에서 단체사진 촬영을 못했던 흥분을 가라앉히고 여기에서 대신 양 단체의 사진촬영을 하고 모든 행사의 대미를 장식할 수 있음에 상호 만족해 했다.

한 기념사업회 관게자는 어제 국제학술세미나가 100점 만점에 70점이라 한다면 오늘 추모제와 만찬까지 이어지는 프로그램은 100점 만점에 110점이라면서 감격해 했다.

역시 최금환대표는 여기에 밀리지 않았다. 만찬을 제공하겠다는 사토회장 몰래 그네들의 만찬비용까지 모두 결재했노라고 버스에 올라 토로해 더 큰 박수를 받고 만다.

온천 휴양지 뱃부온천행

온천지로 유명한 뱃부로 가는 배를 타고 야하타마항에서 3시간여를 가야한다고 해 일행들은 모두 배에 오른다.




섬나라에 와 처음으로 배로 이동하는데 오사카 칸사이 공항에 도착한 이래 교토로 이동해 세미나를 하고 고베로 다카마츠로 해서 오즈시 그리고 뱃부로 건너가는 코스를 설명하면서 최금환대표는 이건 적어도 5~6일 가져야 하는 여행 일정을 3박 4일에 소화하는 것으로 여행사 대표 차원에서 미안함을 처음 말하였다.

이번 탐방객으로 참여한 선배들의 노익장(老益壯)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고 우리나라 성인들의 건강 연령이 상당한 수준에 다다름을 직감할 수 있어 매우 고무적이었다.

자정이 다 되어 뱃부 온천호텔에 도착하였고 여독을 풀기위해 호텔 옥상의 노상 온천탕을 이용해 여독(餘毒)을 푸느라고 다들 여념(餘念)이 없다. 그런 덕분에 다음날 아침을 모두 활기차게 맞이하였고 처음으로 여행다운 여행을 생각하며 뱃부의 가마도 지옥과 JTC면세점을 찾아 나섰다.

오찬 전에 시간이 허락되어 막부시대에 하야시 라잔이 기획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의 권력을 튼실하게 지킬 수 있도록 구상한 무사들의 군락 저택지를 가 보기로 했다.

무사들의 저택에 가기전에 심어진 금송은 무사들의 상징이며 천황에 충성심을 갖도록 하는 상록수로 금송에 얽힌 이야기와 벚꽃에 대한 설명에 기겁을 하듯 놀라고 만다.

3박 4일간 최금환 대표와 함께 기획한 한일간 민간외교차원의 국제학술세미나 일정이 무탈하게 모두 끝나고 이제는 강항로드를 위한 준비만이 남아 있는 숙제이다.

오이타공항에서 1시간 20여분밖에 걸리지 않는 비행기로 언제 국제학술세미나를 했느냐 싶게 뱃부여행을 끝으로 무안공항에 도착해 모두가 3박 4일간의 짧은 일정에 대한 섭섭함만 토로하는데 어제가 음력으로 5월 19일 수은강항이 38명의 포로와 함께 부산항에 귀국한 날로 추모식과 겹쳐 마음이 더 뭉클한 일정들이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한 일간 학문의 전쟁을 이미 치밀하게 19세기부터 우리나라 전국 유명 대학교에 점령(占領)해 설치된 퇴계학연구소에 수많은 어용학자(御用學者)와 친일(親日)교수가 넘쳐 두리뭉실하게 넘어가고 있는 현실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자존심을 언제쯤 찾을 수 있을까?!

수은 강항의 ‘간양록’ 한 권이면 참과 거짓의 학문적 규명(糾明)이 다 보이는데도 우리는 왜 이렇게 친일과 어용으로만 단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방황만 하고 있는 걸까?!

답답한 마음에서 불현 듯 차창밖으로 광주시내가 들어오는데 초여름의 맑은 하늘과 저 멀리 보이는 빛고을의 광주가 유달리 밝게 보여 천년의 빛 영광과 함께 이 시대의 영웅을 만나고 와 시나브로 ‘스승의 나라 강항’을 우리 국민들에게 드리기로 한다.

다음 주에는 함께 이국땅 왜국에 다녀오신 강항선생을 다시 영광에 모셔드려야 겠다!!!

https://www.youtube.com/watch?v=InGIaF6hE80&t=3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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