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예술이다.
25살, 그해 겨울 아플 한 남자가 다가왔다. 나는 그 남자에게 순백의 내 캔버스를 통째로 내주고 말았다. 그 후 그는 피카소마냥 낙서 같은 그림을 거기에 갈겨대기 시작했다.
남자는 천사 같은 두 아들을 내게 오게 했고, 그 시절 나는 봄날 같은 행복만 있었다. 그것도 고작 몇 년, 남자는 아지랑이 피는 봄 같은 행복이 지루했던 모양이었다.
슬슬 캔버스에 바람 불어넣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인가는 먹물 푹 찍어 환칠하기 시작했다. 삶은 순식간에 뒤죽 박죽이 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그 이후로도 남자는 수도 없는 환칠로 있었다.
그 즈음 갈겨댄 글들을 나는 총 일곱 권의 책으로 묶었고 삶은 뜨거웠다.
오면서 피카소 같은 이 남자가 없었더라면 아마 오늘 나는 이 『붉은 강』이란 시집으로 인쇄소 잉크 냄새를 맡지 못했을 것이다.
방금 찍어낸 따끈따끈한 이 한 권 책을 들고 나는 이제 그의 우리에서 출소하려 한다.
눈이 부시다.
순백의 캔버스에 그림 그리러 와 준 당신은 참으로 훌륭한 예술가였습니다.
― 홍순미, 책머리글 <『붉은 강』을 엮으며> 중에서
- 차 례 -
칠흑같이 어두운 뇌에 빛을 주소서
붉은 강
올무
우물에 빠진 코끼리
반딧불이는 시인이다
아나콘다로 사는 여자 멍
밤의 노래
금줄
광대
똥의 철학
질다
취우
외마디 소리
스캔들
눈이 아프다
짓
있는 그대로
틈
빛으로 날다
이슬도 무거운 여자
호적의 잉크가 무거워진 여자
바람이 분다
비루하다
깨진 립스틱
잘 가요 안녕
봄은 움직임이다
겨울비
어찌 그리 더디 오시나요
눈물 밟고 온 사랑
면구하고 면구한 일입니다
나는 찾았다
별 거 아녔다
4월이 오면
생각의 눈을 감는다
풍경
도덕경
가난을 날개다
거푸집 속 모조품
길
강으로 흐르고 있는 모든 것들은 꿈틀거림이다
붉은 강
홍순미 시집 / 월간문학 출판부 刊
인생은 예술이다.
25살, 그해 겨울 아플 한 남자가 다가왔다. 나는 그 남자에게 순백의 내 캔버스를 통째로 내주고 말았다. 그 후 그는 피카소마냥 낙서 같은 그림을 거기에 갈겨대기 시작했다.
남자는 천사 같은 두 아들을 내게 오게 했고, 그 시절 나는 봄날 같은 행복만 있었다. 그것도 고작 몇 년, 남자는 아지랑이 피는 봄 같은 행복이 지루했던 모양이었다.
슬슬 캔버스에 바람 불어넣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인가는 먹물 푹 찍어 환칠하기 시작했다. 삶은 순식간에 뒤죽 박죽이 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그 이후로도 남자는 수도 없는 환칠로 있었다.
그 즈음 갈겨댄 글들을 나는 총 일곱 권의 책으로 묶었고 삶은 뜨거웠다.
오면서 피카소 같은 이 남자가 없었더라면 아마 오늘 나는 이 『붉은 강』이란 시집으로 인쇄소 잉크 냄새를 맡지 못했을 것이다.
방금 찍어낸 따끈따끈한 이 한 권 책을 들고 나는 이제 그의 우리에서 출소하려 한다.
눈이 부시다.
순백의 캔버스에 그림 그리러 와 준 당신은 참으로 훌륭한 예술가였습니다.
― 홍순미, 책머리글 <『붉은 강』을 엮으며> 중에서
- 차 례 -
칠흑같이 어두운 뇌에 빛을 주소서
멍
붉은 강
올무
우물에 빠진 코끼리
반딧불이는 시인이다
아나콘다로 사는 여자
밤의 노래
금줄
광대
똥의 철학
질다
취우
외마디 소리
스캔들
눈이 아프다
짓
있는 그대로
틈
빛으로 날다
이슬도 무거운 여자
호적의 잉크가 무거워진 여자
바람이 분다
비루하다
깨진 립스틱
잘 가요 안녕
봄은 움직임이다
겨울비
어찌 그리 더디 오시나요
눈물 밟고 온 사랑
면구하고 면구한 일입니다
나는 찾았다
별 거 아녔다
4월이 오면
생각의 눈을 감는다
풍경
도덕경
가난을 날개다
거푸집 속 모조품
길
강으로 흐르고 있는 모든 것들은 꿈틀거림이다
[2013.12.22 초판발행. 55쪽. 정가 8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