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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누구나 늙는다. 그 늙음은 자손들을 위해 헌신한 결과다. 다사다난한 세월은 누구도 비껴가지 않는다. 요즘 젊은이들이 ‘부모가 나에게 해 준 것이 없다.’고 말하곤 하는데 이 말에 대해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과연 부모가 젊은이들에게 해준 것이 없다는 말이 나오는가를 반문한다. ‘나’를 있게 해준 것이 부모가 있었기 때문이고, 패기 넘치는 젊음과 지혜가 어디에서 왔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과연 노인이 거추장스럽고 걸리적거리는 장애물일까? ‘오늘’ 그리고 ‘나’라는 존재는 결국 노인들에 의해 창조되고 가꾸어져 왔지 않은가. 노인들의 과거는 피 끓는 젊음을 나라와 사회와 가족들을 위해 분골쇄신해 온 역사일 것이다.   현재의 젊은이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노인들도 그렇게 해왔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의 역사를 이룬 것은 노인들의 선지적인 노력과 지혜와 경험이 이룩한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노인요양원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것은 가치관과 생활의 변화가 부추긴 것이다. 경쟁사회에서 뒤지지 않으려는 고육지책이지만 핵가족화한 생활의 변화는 더 이상 노인이 설자리를 잃게 만들었다.     노인이 되면 각종 지병과 치매 등 가족이 돌보기에는 너무나 벅찬 일이기에 나이가 들어 기력이 없거나 돌봄이 필요한 처지에 놓이게 되면 대부분이 요양원에 돌봄을 위탁하게 됨을 나무랄 수만 없는 것이다. 현실이 그러할 진데 자식들 탓만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늙으신 부모를 요양원에 위탁하고 그래도 자식 된 도리일까 주기적으로 아니면 특별한 날에는 요양원을 방문하여 부모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지만, 코로나19로 온 나라가 집합과 만남이 제약을 받게 되고 특히 요양원은 외부인 방문이 철저히 차단되어 이 마저도 단절된 상태이다.   그래서 ‘요양원은 현대판 고려장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방문이 안 된다면 영상통화 등을 통하여 만남을 대신하게 해줄 수는 없었는가. IT강국의 면모가 서지 않는다. 교정시설에서도 영상면회가 가능한데, 정부와 지자체는 왜 요양원의 영상만남을 생각지도 안는 것일까?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라 자존감을 세우고, 충효를 으뜸으로 국민의 가슴 깊이에 각인을 시켜놓고, 부모를 모시지 못하는 안타까움의 무게를 짊어지고 요양원에 위탁해야하는 젊은이들이 현실은 그나마 요양원 방문면회가 위안이 되었을 것이나, 그런데 이 마저도 막아버리고 젊은이들에게 ‘현대판고려장’을 당연하게 죄스러움 속에서 살게 해서는 안 된다.     정부와 자치단체는 요양원 입구에 영상면회실을 만들고 예약을 하면 언제나 영상면회를 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충효를 일깨우면서 효가 무시됨을 당연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코로나19 방역 지침을 철저히 지키고 예약된 일자에 언제나 자유롭게 부모님을 만나 안부를 묻고 대화를 나누도록 하는 일은 그렇게 큰 경제적 부담이나 코로나19 방역 정책에 무리가 가지는 않을 것이기에 서둘러 영상면회소 설치를 적극 권장해야 할 것이다.   젊은이들에게 효에 대해 너무나 무거운 멍에를 씌워서는 안 된다.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말이 있지만 노인들의 소외감마저 지나친다면 우리 모두는 ‘불효’라는 늪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기에 최소한의 교감이 이루어지도록 요양원의 영상면회시설을 설치운영할 것을 간곡하게 바란다.

http://happykoreanews.com [ repoter : 송인호 ]

뉴스등록일 : 2021-04-29 / 뉴스공유일 : 2021-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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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민족사회의 수용과 ‘단일문화’로 국민성 강화       다민족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정보교류가 활발하지 않던 때에 가야국의 김수로왕이 인도의 허황옥과의 세기의 국제결혼을 하였고, 동서양에서의 유입되는 민족들에 의해서 다민족사회를 구성하게 되었지만, 이들은 우리나라의 문화 속에 적응하며 정착하면서 ‘우리 민족’으로 동화 또는 그렇게 인식되었다.   우리나라가 다민족사회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은 우리나라의 275개 성씨 중 136개 성씨가 귀화 성씨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우리나라로 유입되는 다른 나라의 민족들이 우리나라로 유입되었다는 것이며, 그들은 우리나라에서 우리의 문화에 동화되어 살았기 때문에 그들을 이질적인 배타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은 지정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순혈주의를 고집하기 쉬운 환경에 있다고 보여 진다. 북으로는 험준한 지형으로, 남으로는 바다로 외부와의 교통이 원활하지 않고, 역사적으로 무역 등 외부와의 교류에도 열의를 갖지 않은 탓에 유럽인들처럼 타민족과의 교류나 혼혈이 극히 드물었던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혼혈인이 폭발적으로 늘었던 경우라면 이민족의 침입이나 외국군대의 진주 등, 바람직하지 않은 이유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사회적으로 수용하기가 쉽지 않은 탓도 있다고 보여 진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사상의 지배로 어버이에 대한 효와 조상의 핏줄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유교적 도덕관까지 혼혈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에 힘을 더했다. 우리 민족은 주변민족을 모두 오랑캐 취급했으니 그들과의 혼혈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관념이 지배적이었다. 병자호란 이후 청에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 온 수십만 명의 조선의 아녀자들은 ‘절의’를 상실했다는 이유로 배척을 당하고 이 여인들을 일컫는 ‘환향녀(還鄕女)’라는 단어가 바로 욕설인 화냥년의 어원이라는 사실은 이 사실을 씁쓸하게 뒷받침한다.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한 후, 중국은 주변국과의 교통이 활발해지면서 혼혈은 가속화 되어 단일혈통을 고집할 명분을 잃는다. 이러한 혼혈은 비단 동양계를 비롯하여 서양계 혼혈로 확산하기에 이르렀고, 몽고의 영토 확산은 조선을 비롯한 중국, 유럽까지 도달하여 혼혈의 원인은 가일층 확대된 것이다. 이때 까지는 중국과 몽고의 동양계와의 혼혈이 주종을 이루었던 조선은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비슷한 동양계의 혼혈인을 묵과하고 넘어가며 순혈주의를 고집하려 했으며 외국과의 교통을 원하지 않으려는 민족 심성이 쇄국정치의 단초를 제공했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주로 남방계 혼혈인으로 구분되어지는 혼혈인 중에 일본인과의 혼혈이 많았다. 이것 역시 나라를 잃은 후의 치욕을 더해 주는 일로 인식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서도 서양계 혼혈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외국의 공관원 등과의 교통에 의해서 혼혈이 나타났는데 실재로 1937년생 혼혈인이 아직까지 생존해 있는 것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런데 동양권의 인적교류는 닮았다는 이유로 쉽게 구분될 수 없었고, 이들은 우리의 문화를 수용하고 동화하면서 우리 민족내의 민족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나, 서양계의 민족교류는 우리와는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들도 우리 문화를 수용하고 동화했지만, 쉽게 구분되어지고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이 패망한 후, 625동란이 일어나고, 중국군과 UN군(특히 미군)이라는 외국군대가 이 땅에 진주해 왔다. 전쟁의 참상의 일환으로 부녀자강간도 많이 일어났는데, 사실 일본의 치하에서 식민지 조선의 일반 민중에게 선전되기로는 영국과 미국을 도깨비처럼 그려 무시무시하고 파렴치한 인간 이하의 ‘말종’으로 국민들에게 각인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이질감과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 한국 국민에게는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은 항상 경계의 대상이며 기피 대상이었다. 이런 국민적 정서 속에서 서양인과의 혼혈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게 된 것이 사실이다. 또한 우리와 다른 서양계의 이민족에 대한 열등의식은 국민자존심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힘이 세고, 키가 크고, 잘생기고, 피부가 하얗고(백인인 경우), 잘 살고 있는 나라의 국민이라는데 주눅이 들었던 것이다.     6.25동란으로 인한 국가안위의 위급상황에서 한국은 우방국 미국에 지원을 요청하고 유엔의 파병결의에 의해 미국을 비롯한 21개국(비전투요원 지원국 5개국 포함) 병사들이 진주하면서 이들의 값진 희생으로 국가안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이들에 의해 저질러 진 야만적인 겁탈과 강간 등으로 수많은 혼혈인이 탄생되었다는 데 대해서 우리가 이들에게 우월성을 가지고 핍박을 가할 좋은 구실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혼혈인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하면서 순혈주의와 민족주의를 고집하는 보수 정치인들에게는 혼혈인은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이들은 책임회피와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해 혼혈인들을 ‘기지촌의 직업여성의 자녀’로 폄하하면서 혼혈인을 낳은 아녀자를 ‘이단자’로 몰아붙여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면서 사회에서 편견과 냉대와 소외의 그늘로 밀어내 버렸다.   국민의 눈에는 이방인에 대한 열등의식을 회복하는 보상심리에서 혼혈인들은 놀림과 차별과 편견의 대상으로 좋은 표적이 되었으며, 이를 국가와 자치단체는 방관하거나 조장하였던 근거들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는 순혈과 민족주의의 강박관념에서 헤어나려는 노력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명운을 건 자긍심이 이방인들과의 차별화로 우수한 민족의 전통을 살린다는 명분하에 주변국의 국민들을 ‘오랑캐’, ‘떼놈’ 등 비하매도하며 동질성을 거부하며 높은 울타리를 치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국가안보와 외국 군인들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달러를 벌어들이기 위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앞장서서 소위 ‘기지촌 여성’의 매매춘을 조장해왔던 것도 사실이며 이로 인해 의료기술이 발달되지 않은 시기에 혼혈인은 아무런 대책 없이 태어났다.   국가에서는 50~70년대까지 혼혈인을 미군과 미군기지 주변의 직업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라는 마침표를 찍어내고 있다. 이 때문에 혼혈인은 곧 직업여성의 아이라는 가혹한 단정이 내려지고, 혼혈아들이 따돌림 당하거나 괴롭힘 당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국제화시대에 국제결혼이 생소하지 않고 이웃나라 민족이 대거 유입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단일민족’, ‘순혈주의‘의 허상을 버리지 못하고 이들을 다문화가족으로 구분 지었다. 우리나라는 다문화정책으로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기 이전에 ‘다민족사회’를 먼저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국민의 결집을 위해서는 ‘다문화정책’이 아닌 ‘우리문화’를 그들이 수용하고 동화하는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는 것이며, 우리나라에서 ‘다문화’를 수용하기 보다는 ‘단일문화권’으로 우리 안에 녹아들게 만들어 다민족사회의 긍정 아래 ‘한국인’으로 정체성을 갖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다민족사회에서 ‘우리국민’으로 단일문화권을 형성하여 동질화시켜 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지만, 아직도 ‘다민족사회‘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것이다. 우리 땅에서 살며, 한국말을 하고 한국문화에 동화된 이들에게 아직까지도 ’우리‘ 안에 수용하지 않고 ’다문화가족‘, ’혼혈인‘, ’재한외국인‘, ’결혼이민자‘라는 꼬리표를 달아놓고 ’국민성‘을 용인하려하지 않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며, 이들도 한국인과 같이 권리와 의무가 주어진다고는 하지만, 완벽한 권리의 보장과 철저한 의무의 이행을 요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우리는 다문화가 아닌 다민족사회의 수용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문화가 아닌 ‘단일문화’ 범주에 이들을 수용할 때 이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칼럼니스트 김종철  

http://happykoreanews.com [ repoter : 장선희 ]

뉴스등록일 : 2021-01-15 / 뉴스공유일 : 2021-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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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한국의 적인가?       전란(戰亂)의 피해는 전상자뿐만 아니라, 비무장 상태의 국민들까지 깊은 상처를 입는다. 일본의 점령 하에 저지른 만행은 침략국의 행위라고만 말할 수 없다. 심지어 우방국이 만행을 저질렀지만, 누구 하나 대놓고 비판하지 않는 불문율이 되고 있다.   그리고 약소국가로서 침략을 당해야만 했던 수치스러움은 숨겨놓았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국가로서의 존재가치가 없는 것이다. 침략국들의 힘에 눌려 침략을 당할 명분을 준 위정자들의 뉘우침은 없고, 불행한 피해국민을 구제할 마음도 없지를 않았는가를 묻고 싶다.   세계의 전쟁사에서 가장 숨기고 싶어 하는 것은 비무장의 나약한 여성들의 피해일 것이다. 들어 내놓고 말 할 수도 없고, 이들 피해국민을 어루어 줄 능력이나 관심이 없는 것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한다.   어디 일본군 위안부 문제뿐인가? 전란의 피해여성은 어느 전쟁에서나 있어왔고, 이 피해는 적국에 의해서만 아니라 우방국에 의해서도 발생되었다. 그런데 왜 적국에 의한 피해만 부각시키고 우방국에 의한 피해는 숨기고 있는가 말이다.   모든 국민은 평등하고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고, 국가는 마땅히 이를 지켜 줄 의무가 있는데도, 피해를 구분 짓는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우방국에 의해 피해를 당한 여성들을 숨죽이고 살도록 편견과 냉대의 사회분위기를 조성하고 이질적인 국민으로 치부하는 졸렬함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유독 일본에 대해서는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국민의 증오대상이었던 일본군의 만행을 이리도 질기게 물고 늘어지는지. 친일, 친일파가 매국노로 치부됨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국민의식 또한 문제인 것이다. 우리나라에 연좌제가 폐지된 지 오래다. 친일 인사의 가족이라는 족쇄를 채워 친일파로 매도하고 구분 짓는 일이 당연한 듯 나라가 온통 편향적 의식에 빠졌다.   국민의 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는 반일감정은 오랜 학습과 교육의 산물이다. 이러한 국민의식을 각인시킨 정부와 위정자들은 왜 우리가 침략을 당해야 했고, 책임을 통감하는 대목은 한 줄도 없다. 무조건 스스로의 나약함이나 무능함에 대한 반성이나 각오도 없이 침략을 한 일본을 향해 적대감만 불러일으켜 왔던 것이다.   역사에 대해서는 국민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고 침략국의 만행을 용서할 수도 없고 지워지지 않는 멍에로 자리 잡고 있지만 언제까지 과거의 기억만 떠올리며 매달려 있을 것인가. 세계는 총성 없는 전쟁이 한창이다. 재래식 총칼로 싸우는 전쟁이 아닌 경제의 전쟁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으로 세계의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기에 안도할 수 있는 대목이다.   경제전쟁을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억제하기 위한 경제봉쇄조치에서 그 진가를 알 수 있듯이 근간에 일본의 경제보복이 바로 그것이다. 북한이 경제봉쇄조치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핵무기를 포기해야 할 것이고, 우리에 대한 일본의 경제보복조치를 해결하려면 과거사 문제에서 벗어아야만 할 것이고, 국제간에 맺은 약속은 어떠한 경우에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작금의 한일관계에 대해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는 ‘과거로부터 발이 묶여있는 한일관계가 결국 오늘의 불행한 사태를 일으켰다’는 발언을 하였다. 이 말의 진의는 우리가 하루 속히 과거로부터 벗어아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기에 그 시공간을 되돌려 올바른 역사의 수레바퀴로 되돌릴 수 없겠지만, 오늘 우리가 역사의 과오를 올바르게 비판함을 통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숙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에 대한 비판은 물론이고 우리도 자성해야 할 부분은 분명 인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한국은 경제대국인 것은 확실하다. 나라가 국민을 보호할 저력이 생긴 것이다. 그러면 국민을 보호할 힘이 없을 때 자국민의 피해에 대한 대책이 없었다면 지금이라도 보호대책과 보상방안이 나와야 하고 불행한 피해에 대해서는 국가의 책무가 우선인 것이 당연하고, 국가 간의 보상문제는 외교문제가 아닌가   국가의 우선적 책무는 뒤로하고 상대방 국가에서 보상을 받겠다는 것은 순서가 틀려도 한참 틀린 것 같다. 이렇게 상대국에 대해서 자국민의 피해를 보상하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면, 전란의 피해여성, 그것도 우방국에 의한 피해라고 무시하고 무관심하게 넘기지 말고 당당하게 보상을 요구해야 형평에 맞지 않을까 말이다.   과연 한국동란에 참전했던 우방국에 대해서도 일본과 같이 피해보상을 요구할 정치인이 있겠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분명 피해는 같은 피해다. 국민의 피해는 마땅히 국가가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가슴 속에 내재되어있는 반일감정에 불을 지르는 것은 정치적인 의도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정치세력을 이념적 성향으로 갈라놓고, 온갖 선동용어를 구사하면서 상대편을 매도해댄 끝에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실세그룹을 형성하고 있는 나라다. 그렇게 집권을 했으면 그때부터라도 진지하게 국가발전과 국민행복증진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여전히 ‘국민 편 가르기’의 이점에 취해 있다니 한심할 노릇이다.   일본의 처사도 용인하기 어려운 횡포다. 이런 식으로 정치외교적인 문제를 ‘경제력의 과시’ 방식으로 풀려고 해서는 ‘국제사회의 평화적 공존’ 질서가 유지되기 어렵다. 외교적 해결의 계기를 찾지 못한 탓이었다고 하더라도, 힘자랑과 함께 ‘외교적 해결’이라는 옆문도 열어둬야 옳다. 항복을 요구하는 것은 외교적 방식이 아니다.   상대는 일본 정부다. 안쪽을 향해 ‘친일’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자해행위일 뿐이다. ‘기회는 이때다’해서 이런 작태로 차기 집권을 꿈꾸는 인사는 제발이지 없기를 바란다.       칼럼니스트 김종철

http://happykoreanews.com [ repoter : 장선희 ]

뉴스등록일 : 2021-01-15 / 뉴스공유일 : 2021-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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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이 없는 나라는 미래가 없다.     왜 우리에게는 영웅이 없는가. 아니 왜 지우려 하는가. 영웅을 추앙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미래가 있는가를 생각해 볼 일이다.   6·25 전쟁 때 만일 기습의 명장 맥아더가 이끄는 유엔군이 인천 상륙을 하지 않았더라면, 국립묘지에 잠들어 있는 그 많은 젊은 용사들이 피를 흘리지 않았다면, 아직 살아있는 20만 가까운 노병들이 그 때 국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대한민국이존재할 리 없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 G20에 끼어들 수가 있었겠는가.   역사를 왜곡하여 후대에 가르친다는 것은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인가. 가까운 일본에 대해 역사왜곡을 한다며 난리법석을 떨던 자들도 정장 나라의 역사왜곡을 외면하고 있으니 과연 나라를 위해 충성할 국민이 있겠는가 말이다.   한국이라는 땅이 어디 붙었는지도 모르면서, 유엔이 공인한 한반도의 유일무이한 합법정부가 인민군에 의해 남침을 당했다는 소식만 알고 달려와 5만 이상이 목숨을 잃고 10만 이상이 부상을 당하고 8천 이상이 행방불명이 되는 엄청난 희생을 치른 혈맹 미국에 대해 “반미"를 주창하는 자들은 과연 건강한 사람들인지 묻고 싶다.   어쩌다 한국이 이런 나라가 되었을까? 무공훈장을 가슴에 걸고 자랑스럽게 거리를 활보하는 국가유공자를 본 일이 있는가?     우리는 국가의 영웅들에 대한 관심과 존중이 있어 왔는가를 자성하며, 왜 우리는 국가적 영웅들에 대해 무관심했던 것일까? 아니 무관심이 아니라 핍박과 편견을 더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집단 이기주의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세계적 영웅이며 우리에게 자유대한민국을 안겨 준 맥아더장군의 동상을 철거하자는 이들도 있다니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 세상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어느 일간지 1면에, 6·25 때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83세의 한 노병이 상도 없어 방바닥에 밥 한 공기와 깍두기 한 그릇을 놓고 식사를 하고 있는 광경이 찍힌 사진 한 장을 보고 대한민국의 앞날에 희망이 없다고 느꼈다. 밥도 세 끼 제대로 먹지 못하게 노병들을 푸대접하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있어서 우리나라 말고 또 어디에 있는지 수치스러움을 감출 수 없다.   대한민국이 참 한심한 나라라는 수치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삼성이 전 세계의 전자업계를 석권하고 현대자동차가 땅 끝까지 달리면 무엇을 하겠으며, 김연아가 금메달을 따고 박지성의 왼발 슛이 월드컵 경기장을 감동시키면 무엇을 하겠단 말인가? 정명훈이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격찬을 받고, 조수미의 목소리는'하느님의 선물'이라고 카라얀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말이다.   한국전의 영웅이 실생활의 현실은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와 수치심을 감출 수 없다. 그러단 벌 받는다.“반미·친북 하다가 가까운 장래에 적화통일하자"는 놈들이 버젓이 잘 사는 대한민국이라면 오래 가진 못할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의 반성이 있어야 한다. 이웃에 대한 관심과 타인에 대한 배려, 모두를 위한 존중이 살아나야 한다. 우리 사회의 영웅이 더 많이 출현해야 한다. 국가와 사회와 우리는 영웅이 영웅으로서 대접받는 나라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칼럼니스트 김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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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21-01-15 / 뉴스공유일 : 2021-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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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간원 헌납이 되자 김일손은 더욱 소신을 피력하였다. 1495년 10월9일에 김일손은 신녕현감(新寧縣監) 길수(吉壽)의 실정과 왜인들의 행패에 대해 조치하도록 아뢰었다.   “신이 듣자오니, 신녕현감 길수가 아전들 다루기를 엄하고 사납게 하니, 향리(鄕吏) 등이 꺼려서 자주 읍 사람들을 시켜서 사실 없는 것을 고소하고 호장(戶長) 10여 명이 현감을 낭패하게 하려고 반란을 일으켜 산으로 올라갔는데 현감이 사람을 시켜 따라가서 잡으려 하였으나 아전들이 잡기를 거부하니, 장교 한 사람을 보내어 고을에 있는 아전증 따르지 않는 자들을 불러내어 잡아가고 들판에 주둔하여 일이 더 커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급히 추포(追捕)하여야 하겠으며, 먼저 그 처자들을 먼 국경 지방에 옮기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신녕현감과 아전들의 갈등이 드러난다. 신녕현(新寧縣)은 지금의 경북 영천군 신녕면이다.  간언은 이어진다. “신은 또 들으니, 왜인(倭人)이 충주(忠州) 단월역(丹月驛)에 도착하여 역리(驛吏)를 책망하여 닭을 잡아 대접하라고 하였는데, 역리가 국상(國喪)중이므로 좇지 않으니, 왜인이 이르기를 ‘너희 나라에는 상사(喪事 성종의 국상)가 있지만 우리 도주(島主 대마도주)는 건강하다.’고 하면서 강제로 취하여 먹었으며, 충주읍에 당도하여서는 잔치상을 차려 대접하라고 독촉하는 것을 충주의 관원이 끝내 베풀어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충주에서의 왜인의 횡포는 김일손이 충청도사 때 올린 1495년 5월28일 상소에서도 언급되어 있다.  “ 사람은 다 북쪽을 근심하나 우리 혼자 남쪽을 근심합니다. 신은 왜노(倭奴)의 실정을 보니,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더욱 교만하여 이미 어살[魚箭]을 쟁탈하고 또 웅천(熊川)을 위협하며, 요사이 충주까지 지나와서 연향(宴享)을 마련하라고 재촉하며, 너희 나라는 국상이 났지만 우리 임금은 병이 없다 하니, 신이 들으매 통분함을 견디지 못합니다.” 5월 하순의 상소 이후 5개월이 지난 10월에 헌납으로 자리를 바꾼 김일손이 또 다시 왜인의 횡포를 간언하는 것을 보면, 그동안 조정에선  별도의 조치가 없었던 듯 하다.   왜인들에 대한 김일손의 간언은 이어진다.  ”그뿐 아니라 통사(通事)들이 왜인을 빙자하고 수없이 내라고 하매, 고을 관원들이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여 응대하니 더욱 교만한 마음을 내어 관가를 업신여긴다 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특송왜(特送倭  왜인 사신 중 특수 사명을 띠고 오는 사신을 말한다. 처음 세종 25년(1443)의 계해약조때 물품 교역을 위하여 오는 이른바 세견선(歲遣船) 50척 외에 특별보고 사항이 있으면 특송선(特送船)을 보내게 하였는데, 거기에는 정관(正官)이 문서를 가지고 왔으며, 조선은 접위관(接慰官)을 보내어 서울까지 안내하였다.)는 조정에서 후대하는 것이니 자연 호송관이 있을 것이지만, 만일 여느 왜의 고장 사람으로서 통사가 압령(押領)하여 온 자라면 한결같이 《대전속록(大典續錄)》의 규정한 바에 의거하여 관청에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하며, 통사로서 함께 통하여 작폐(作弊)하는 자는 법을 밝혀 죄를 다스리고, 통사 및 선군(船軍) 등이 보통 때에 병기·각궁(角弓) 등 물건을 왜인과 더불어 사사로이 서로 매매하여 이익을 취하는 것은 금지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또 들으니, 통사 3명이 몰래 왜인을 데리고서 변복하고 절도사영(節度使營)에 들어가서 장사를 하며, 제포(薺浦) 수군은 번을 교대할 때에 가졌던 병기를 왜인의 집에 맡겨두니, 최진강(崔進江)이 웅천현감(熊川縣監)이었을 때에 제포의 왜인들이 성 밑에서 소나무를 찍는 것을 진강이 사람을 보내어 잡아오게 하였는데, 왜인들이 검을 빼어 들고 떠들며 보냈던 사람과 군관을 구타하니, 진강이 겨우 몸을 피하였다고 합니다. 전에는 왜인들이 법령을 범하면 첨사(僉使)·현감 등이 항상 자의로 형장(刑杖)을 사용했기 때문에 감히 법령을 범하지 못하였는데, 근래에는 교만 방종이 이러하니 이것은 변방 장수에 사람이 없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후로는 왜인이 있는 곳의 변방 장수는 모름지기 위엄과 덕망이 있고 청렴 근실한 자를 선택해서 보내야 하겠습니다." 웅천현(熊川縣)은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지역이다. 이 지역에 상주하는 왜인이 증가하여 그 피해를 입기쉽고 해안의 요충지임을 감안하여 1452년(문종 2)에 웅천현으로 승격하였다. 웅천현에는 종6품의 현감이 파견되었는데 수군 진(鎭)이 있었던 관계로 무관이 배치되었다. 이에 연산군은 전교하였다.  "신녕현 향리의 일은 감사에게 하서(下書)하라. 웅천의 왜인 사건은 최진강을 불러 묻게 하되, 원상(院相) 및 의정부·육조(六曹) 판서가 의논하게 하라. 또 김일손이 아뢴 일 중, 행할 만한 것은 다시 밝혀 아뢰게 하라." 이러자 10월10일에 원상(院相) 및 의정부·육조(六曹) 판서가 의논하였다. 사진 1 창덕궁  희정당 정문 사진 2 빈청 (희정당 건너편 – 지금은 카페이다)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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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칼럼

중국에서는 신하가 군주를 갈아치우는 것이 정당한지에 대해 논란이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전국시대에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맹자(BC 372∼289)에게 한 질문이다. 『맹자』「양혜왕 하」편에 나온다.  “제나라 선왕 : 은나라 탕(湯)왕이 하나라 걸(桀)왕을 내쫓고, 주나라 무(武)왕이 은나라 주(紂)왕을 정벌한 일이 있습니까? 맹자 : 책에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선왕 : 신하로서 군주를 시해하였는데, 선생은 그 일이 옳다고 여기십니까? 맹자 : 인(仁)을 해치는 자를 적(賊)이라고 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 합니다. 또한 적(賊)과 잔(殘)을 일삼아 저지르는 자를 필부(匹夫)라고 합니다. 나는 일개 필부를 죽였다는 말은 들어보았지만, 군주를 죽였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제나라 선왕의 질문(탕왕이 걸왕을 내쫓고, 무왕이 주왕을 정벌한 일)에 맹자는 책에 적혀 있다고 답한다. 맹자가 말한 책은『서경(書經)』이다.   탕(湯)왕이 걸(桀)왕을 내쫓은 이야기는 이미 지난 회(28회)에 이야기 했으니, 이번엔 주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 주(紂)왕을 내친 이야기를 해보자. BC 1046년에 주나라 제후 무왕은 목야(牧野)에서 폭군 주왕(紂王)과의 결전을 앞두고 군사들에게 이렇게 훈시했다. 『서경』‘주서(周書) 목서(牧誓)’에  나온다.    “옛사람의 말에, ‘암탉은 새벽에 울지 않으니,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안이 망한다.’ 하였다. 지금 주왕은 오직 한 여인(달기)의 말만을 듣고 있소.”   당시에 은나라는 주왕의 애첩 달기(妲己)가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은나라 주왕은 원래 자질이 뛰어 났다. 말솜씨가 뛰어나고 행동도 민첩했다. 체력도 좋아 맨손으로 맹수를 때려잡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너무 총명하여 주변의 충고를 듣지 않았고, 지나치게 자신만만했다.   그런데 주왕이 유소(有蘇)를 정벌했을 때 유소는 주왕에게 달기를 바쳤다. 주왕은 경국지색(傾國之色)인 달기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다.   이후 주왕은 정사(政事)를 아예 돌보지 않고 달기와 쾌락에 빠졌다. 달기는 주왕을 사로잡기 위해 복숭아꽃 꽃잎을 짜서 만든 '연지(燕脂)'를 뺨에 발랐고, 그녀 방에는 음란한 병풍이 펼쳐져 있었다.   주왕은 녹대(鹿臺)라는 누각을 만들어 재물을 가득 쌓았다. 별궁 정원 앞 연못에는 술을 가득 채우고 고기를 숲처럼 즐비하게 늘어세운 뒤,  그 사이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발가벗은 젊은 남녀를 뛰놀게 하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향락하였다.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졌다. 달기는 정부 인사에도 관여하였다. 주왕은 달기의 마음에 드는 신하만 중용하였다. 그의 주변에는 간신들로 가득 찼다. 미자(微子) · 기자(箕子) · 비간(比干) 같은 충신들의 직언을 싫어하여 그들을 내쳤다. 그리하여 미자는 나라를 떠났고, 기자는 노비가 되었으며, 비간은 죽임을 당했다. 주왕의 숙부인 비간은 사흘 동안이나 주왕에게 간언하였는데 주왕은 “옛 성현의 심장에는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는데 네 심장에는 과연 일곱 개의 구멍이 있는지 조사해 보자.”며 비간을 해부하여 그 심장을 꺼내보았다. 특히 참혹한 것은 주왕은 임신한 비간의 아내의 배를 갈라 태를 보는 악행도 서슴지 않은 점이다.   아울러 주왕은 포락지형(炮烙之刑)을 실시했다. 이 형벌은 이글이글 숯불이 타오르는 구덩이 위에 기름을 바른 구리 기둥을 즐비하게 얹은 다음, 그 위를 맨발로 걷게 하여 건너가게 한 처형 방법이었다.  무왕의 훈시는 이어진다. “ 임금 주는 백성들에게 포학한 짓을 하며 간사하고 악독한 짓을 일삼고 있소. 나 발(發)은 오직 하늘의 벌 주심을 삼가 행하려는 것이요.” 마침내 주나라 무왕은 은나라 폭군 주왕을 징벌했다. 두 나라는 목야에서 전투를 벌였다. 주나라 군사는 4만5천명, 은나라는 70만 명이었다. 은나라는 수(數)적으론 우세했지만 군사들은 싸울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주로 노예와 가난한 자유민이어서 적개심이 있을 리 없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은나라 군사들은 무기를 거꾸로 들고 앞다투어 투항했다. 폭군 주왕은 귀중한 보물을 감춰둔 녹대의 ‘선실(宣室)’에 불을 놓아 스스로 불타 죽었고, 요녀(妖女) 달기는 목을 매어 자결했다. 사진 1  다산 문화관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생가) 사진 2  유배 길 정약용 업적 (다산문화관 전시물)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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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칼럼

충청도사 김일손이 1495년 5월28일에 올린 상소는 계속된다. “높고 넓어서 순임금은 무어라 이름할 수 없거니와, 후세의 한무제(漢武帝)는 거칠고 횡포한 임금이었으나, 급암(汲黯)이 면전에서 손가락하며 말하기를 ‘속으로는 욕심이 많으면서 겉으로만 인의(仁義)를 베푸는 척한다.’고 말하였지만, 한무제는 노하지 아니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급암을 공경하여 ‘사직을 지탱하는 중신(社稷之臣)’이라고 하였으니 제왕의 넓은 도량이란 진실로 이러해야 합니다.”   한무제(BC 156~87, 재위: BC 141-87)는 BC 108년에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낙랑·임둔·진번·현토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한 황제이다. 그는 즉위하자 권신들을 면직시키고 어질고 겸손한 선비를 등용하였다.  급암(?~BC112?)은 한무제 때 주작도위(主爵都尉)가 되었고 9경(九卿)의 한 사람이 되었다. 황로지도(黃老之道) ·무위(無爲)의 정치를  한무제에게 간(諫)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회양태수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상소는 이어진다. “전하께서 경연에 임하실 즈음에 이 두 가지 일을 이해하시어 정성으로써 체득하신다면 여러 신하들의 곧은 말을 용납하지 못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신은 안으로 슬픈 정성이 간절하고, 밖으로 시사(時事)에 느껴서 말이 광망(狂妄)하고 참람(僭濫)하여 불측한 죄를 범했습니다.  소장(疏章) 앞에 엎드려 흐느끼며 송구함을 이기지 못하면서 삼가 백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옵니다." (연산군일기 1495년 5월 28일) 이렇게 김일손은 시국에 관한 병폐 26개 조목을 자세히 상소하였다. 하지만 연산군은 어떤 비답(批答)도 내리지 않았다. 한마디로 김일손이 달갑지 않았다. 이로부터 5개월이 지난 1495년 10월에 김일손은 조정으로 들어간다.  간쟁(諫諍)·논박(論駁)을 관장하는 사간원(司諫院) 헌납(정5품)에 임명된 것이다. 사간원에서 대사간, 사간 다음의 ‘넘버 3’ 자리였다. 이 시기에 김일손은 <질풍지경초부 (疾風知勁草賦)>를 지었다. 어느 가을날 김일손이 집에 있는데 질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모든 풀이 다 엎드렸는데 신기하게도 작은 풀 한 포기가 굳세게 버티고 있었다. 문득 ‘세찬 바람이 불어야 비로소 강한 풀을 알 수 있다.’ 는 생각이 나서 <질풍지경초부(疾風知勁草賦)>를 지었다. 그러면 부(賦)를 읽어보자. 한 해가 저물어가는 궁벽한 집이라 창문과 사립문에서 절로 소리가 난다. (...) 홀로 문을 닫고 있는데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분다. (...) 풀 위를 바람이 쓸고 가니 온갖 풀들이 모두 휩쓸려 간다. (...) 여기 한 포기 풀이 앞 언덕에 유난히 빼어나 꼿꼿해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뿌리는 땅에 내리고 가지는 하늘을 찌를 듯 내 이를 보고 느낀 바 있노라. 질풍에 온갖 풀들이 휩쓸려 가는데, 한 포기 풀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잘 견디고 있다. 김일손은 이 풀을 보고 생각에 잠긴다.    장하도다. 이 작은 풀이여! 이 바람을 깔보는구나. 사람은 사물과 그 이치 다르지 않다 했거늘 이 어지러운 세상을 사는 데 있어 천길 빼어난 홀로 외로이 바치는 충절(孤忠)과 그 무엇이 다르랴. (...) 한 포기 풀을 보고 김일손은 다짐한다. 이 몸 혼자라도 충절을 바치리.  오직 세속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만이 꽃다운 이름을 고금에 떨치리라. (...)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 죽음을 무릅쓰고 정도를 지키며 물욕에 따라 변치 말아야 하는 것 수레바퀴를 묻고 강개하였으니 화란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네. ‘수레바퀴를 묻고’란 후한의 장강이 전국을 돌며 관리를 규찰하라는 명령을 받고, 자신의 수레바퀴를 땅에 묻은 다음 먼저 권신 장삭을 처벌하라고 탄핵한 고사(故事)로, 사간원 헌납 김일손이 권신들의 부패를 척결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비록 숲에서 빼어나게 솟은 나무라도 바람에 반드시 꺾일 것인데 그렇다고 꺾인들 무엇을 아파하겠는가. 지탱하지 못하는 나의 힘이 한(恨) 될 뿐이네. 이 마음 만고에 변함없음이여.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선다. 두견새 먼저 울까 걱정함이여 서풍에 마주 서니 마음이 울적하다. (김일손 지음, 김학곤 · 조동영 옮김, 탁영선생문집, 탁영선생숭모사업회, 2012, p 97-102) ’두견새 먼저 울까 걱정함이여’는 『초사(楚辭)』의  ’이소(離騷)’에 나오는 ‘두견새 먼저 울어 백초(百草)를 향기롭게 하지 못할까 두렵다.’는 글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근심을 만나다"는 뜻을 담고 있는 ‘이소’는 중국 전국 시대 초나라의 재상이자 시인인 굴원이 지은 시인데, 굴원은 간신들의 모함으로 초나라에서 쫓겨나 유랑생활을 하던 중 결백을 주장하며 멱라강에 투신했다.    부를 지은 김일손은 다짐했다. 종묘사직을 위해 이 한 목숨 기꺼이  바치겠노라고. 사진 1 자계서원  (경북 청도군) 사진 2 자계 서원 사당 (존덕사)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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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칼럼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 영국의 액튼 경” 정약용의 탕론(湯論)을 읽었다. <다산시문집 제11권>에 수록되어 있다.    글은 아래 질문으로 시작한다. “탕왕(湯王)이 걸왕(桀王)을 추방한 것이 옳은 일인가? 신하가 임금을 친 것이 옳은 일인가? (湯放桀可乎? 臣伐君而可乎?)”   제후 탕왕이 천자 걸왕을 방벌(放伐)한 것이 옳은 일인가? 소위 쿠데타가 정당한가?  사마천(기원전 145-87)은 《사기(史記)》에서 “걸왕 때 하(夏)나라의 국력이 이미 쇠약하여 많은 제후(諸侯)가 떨어져 나갔다. 걸왕은 부도덕하였고, 현신(賢臣) 관용봉(關龍逢)과 이윤(伊尹)의 간언을 듣지 않았으며, 백성을 억압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덕군자로 알려졌던 상(商)나라 탕왕(湯王)을 하대(夏臺)에서 체포하는 등 폭정을 자행하였다. 이런 실덕(失德)으로 결국 탕왕(湯王)의 공격을 받아 남방으로 달아났다가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임금이 세운 하(夏)나라의 마지막 왕인 걸왕(재위: BC 1818∼1766)은 폭군(暴君)으로 황음무도(荒淫無道)하여 제후들과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걸왕은 총애하는 말희(末喜)에게 빠져서 정사를 전혀 안 돌보았다. 하루는 걸이 각지에서 잡아 온 여자와 춤판을 벌인 후 술을 한 잔씩 하사했다. 그런데 여자들이 매우 많아 술을 따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에 말희는 일일이 술을 따르지 말고, 술로 연못을 만들고 연못 둘레에 고기 숲을 만들어 즐기자고 제안했다.  공사가 끝난 후 걸은 말희와 함께 술로 만든 연못에 배를 띄운 후, 나무에 고기가 매달려있는 모습을 보며 무희들의 춤을 구경하였다. 1) 이러자 충신 관용봉이 간언했으나 오히려 죽임을 당했다. 노비 출신으로 벼슬한 이윤(伊尹) 역시 걸에게 간언하다가 겨우 죽임을 면했다. 제후의 우두머리 격인 방백(方伯)이었던 탕(湯)도 걸왕에게 여러 차례  진언했지만, 오히려 죽임당할 뻔했다가 진상품을 바쳐 겨우 목숨을 건졌다. 이후 여러 제후들이 걸을 쫓아낼 것을 탕에게 말하자, 탕은 책사 이윤과 함께 군사를 모아 명조(鳴條 산서성 안읍현) 땅에서 걸왕을 쳤다.탕은 싸움을 하기 전에 박(亳) 땅에서 군사를 모아 놓고 훈시를 하였다. 『서경(書經)』의  ‘탕서(湯誓)’가 그것이다. “여러분에게 고하노니 잘 들으시오. 나 같은 하찮은 인물(小子)이 감히 난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요. 하나라 임금 걸이 죄가 많아 천명(天命)에 따라 그를 치는 것이요. 이곳에 있는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왕은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우리들의 농사일을 다 팽개치고 하나라를 치려 간다.’고 말할 것이요. 나는 여러분의 말을 잘 듣고 있소. 하지만 하나라 임금은 죄가 있소. 나는 하늘의 상제를 두려워하니 감히 그를 응징하지 않을 수 없소. (중략) 여러분은 나를 도와 천벌을 하나라에 쏟아 주기 바라오. 내 너희에게 크게 상을 줄 것이오. 나는 식언하지 않소. 만약 여러분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나는 곧 여러분을 처자식과 함께 죽일 것이며 용서하지 않겠소 ” (김학주 역저, 서경, 명문당, 2002, p 159-162) 그리하여 탕왕은 걸왕을 몰아내고 상(商)나라를 세웠고, BC  1766년부터 13년간 재위했다.    그런데 탕왕이 훈시하면서 ‘우리 왕은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우리들의 농사일을 다 팽개치고 하나라를 치려 간다.’는 말을 스스로 하는 것을 보면, 백성들은 탕이 걸을 치는 것에 대해 전폭적 지지를 한 것 같지는 않다. 사실 중국에선 신하가 임금을 갈아 치우는 것이 정당한지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    사진 1 강진군 다산 기념관 사진 2 다산과 목민심서 (다산기념관 내 전시) 1) 이래서 주지육림(酒池肉林)이란 고사성어가 생겼다.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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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20-03-29 / 뉴스공유일 : 2020-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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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하면 3.1절로 시작하기에 가슴이 먹먹하다 못해 한편으로는 마음 저변에서 부터 가만히 있지 못하고 있다. 이율배반적인 사고로 뭔가 벅차오르는 찬란한 봄과 함께 항일운동 또는 친일파에 대해 많은 생각들을 하는 춘삼월을 우리는 매년 그렇게 맞이하고 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3월안에서 벌써 끝을 달려가고 있는 시점에 기자가 수소문해 찾은 곳은 공교롭게도 광주시 동구 계림동 소재 호남 4.19혁명단체 총 연합회 상임대표(4.19통일의병대장 겸직)가 상주하고 있는 사무실이었다. 광주 3.15와 마산 3.15의 관계 ‘광주3.15 의거와 4.19가 무슨 연관이 있지?’라고 보통의 국민들의 머릿속 개념이다. 그런데 말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유구한 역사 속에서도 굳이 한민족의 토착화된 민주주의를 거론할 적에 광주3.15의거와 4.19혁명을 공식적으로 끌어들인다. 이 곳에 오기 전 이른바 이 시대를 앞서가는 몇몇 말재주꾼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592~1597년 임진, 정유재란에서부터 유교의 첨단을 걷는 최고의 지성인 선비들이 선비정신(노블레스 오블리주 [noblesse oblige])을 모토로 해 의병운동이 이 땅에 최초로 시작되었고 그 흐름에서 민초들 까지 영향을 받아 전봉준 장군(서당훈장)을 위시한 의병활동이 당시에 동학혁명으로 옮겨 붙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라며 오늘날 한반도의 민주주의 토착화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표상이 된 4.19혁명을 잉태시킨 건 저 위대한 광주3.15 의거의 ‘곡 민주주의 장송’ 시민봉기가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미 기자가 빼곡히 정리해 놓을 정도로 찾아 논 역사적 진실과 맥을 같이해 계속 그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보기로 했다.  ‘곡 민주주의 장송’ 시민봉기가 광주에서 1960년 3월 15일 12시 45분에 정확히 군중에 의해 장엄하게 집행된 이후 마치 영호남이 짜여 진 각본 속에서 행동하듯 2시간 후인 1960년 3월 15일 14시 무렵에 마산에서 군중봉기가 있었던 게 역사적 진실이라는 것. 여기까지 듣고 도착한 곳이  4.19 혁명단체 총 연합회 사무실이었다. 김영용 상임대표가 반갑게 맞이했다. 앉자마자 김 상임대표는 차를 권하자마자 곧바로 광주3.15 의거에 대해 급히 말을 이어간다. “올해 정부주관으로 2020년 3월 15일 기념일에, 11번째로 마산에서 국가기념일 답게 내실 있게 거행했으나 그보다 더 빠른 시간에 광주시민들이 민주주의라는 횃불을 들고 ‘곡 민주주의 장송’ 시민봉기를 했건만 광주는 별도로 광주광역시 주관으로 제4회째 광주3‧15 의거 기념식을 상대적으로 조촐하게 갖고 부정선거 첫 규탄 광주3‧15 의거의 실제와 의의를 전국에 광주시 차원의 선양해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중앙정부와 광주 지방자치 정부는 광주 ‧ 마산 두 지역의 3‧15 의거를 하루 속히 똑같은 국가기념일로 지정해 양 지역에 동일하게 적용 해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을 올바로 확립할 것을 촉구하는 바이다.” 광주의 정신은 호남의 정신이요, 호남의 정신은 임진왜란 당시에도 흔들림없는 조선의 구국의 정신이었음을 상임대표께서는 너무 자명하게 인식하고 있기에 국가정체성 확립에 대한 생각은 추호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렇다면 좀 더 자세히 광주 3.15와 4.19의 관계에 대해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광주 3.15와 4.19의 관계  광주 3·15의거는, 1960년 3·15부정선거에 맞서 이 땅의 민주주의 꽃을 피우게 한 4·19혁명의 도화선을 그은 이른바 광주 금남로 ‘곡 (哭) 민주주의 장송’ 시위를 말한다.  부정선거일 이날 광주 77개 투표소에는 민주당원 출입은 일체 허용되지 않은 채,  투표용지를 요구하다가 폭행을 당해 부녀자가 병원으로 실려 가는 등 모두가 극도의 공포분위기들로 휩싸였다.   주권을 포기하고 이른 아침부터 광주 금남로 4가 민주당 선거사무실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수많은 인파는 예상치 못했다.    급기야 12시45분, 1천 2백여 시민·학생·민주당원이 합세한 부정선거 규탄 시위대에 무장경찰은 무차별적 공격을 퍼부었고 소방차의 세찬 물세례에도 아랑곳없는 시위대들은 해산은 커녕 ‘우리들의 자유와 권리를 막는자 누구냐? ‘정권의 앞잡이 경찰은 물러가라’ ‘민주주의 죽었네, 아이고! 아이고! 피를 뿌려 외치’며 땅바닥에 쓰려져 구르며 나아갔다.   금남로 일대는 순식간에 수많은 부상자들이 흘린 피로 낭자돼 아수라장이 되고 시위를 주도했던 선봉대들은 무더기로 붙들리고 수배되었다.  이 사실이 민주당 중앙본부에 즉시 보고됐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광주 3·15 민주주의 장송 시민봉기는 오후 3시 40분경 마산으로 피어올라 이날 밤 김주열의 주검으로 촉발된 마산 제1‧2차 대 (大) 시민봉기와 함께 양 지역에서 3·15의거를 이루어 4·19혁명의 원인이 되었다.    이와 같이 광주3·15의 도화선(導火線)작용으로 마산 3·15는 마침내 분화구 (噴火口) 를 이루었고, 당시 3·15사태 책임 규명에 나섰다가 반공청년단의 기습으로 번진 4·18 고려대 집단 대 (大) 유혈 사태의 민주의거가 기폭제 (起爆濟) 가 되어 이튼 날  4·19 전국 불길이 치솟았다.   이처럼 광주는 마산 · 서울과 함께 4·19혁명 3대 (大) 권역을 이루어 3·15선거일로부터 4·26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할 때 까지 42일 동안의 전 국민 항쟁의 첫 횃불로 메김 되었다. 4.19이후 역사왜곡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이렇게 바르게 서지 않고 있다.   4·19혁명 제 50주년을 기해 정부는 3·15 의거일을 국가 기념일로 공포하고 2010년부터 마산시민 봉기로 국한된 행사로 금년 11회째 마산에서 치루고 있다. 여기서 광주가 또 빠진 것이다. 이와 때를 같이해 호남4·19혁명단체 총연합회가 발족되고 단체 차원의 광주 3·15의거 기념식과 관련 행사를 통해 광주 3·15실체를 알리고 선양해 왔다. 아울러 광주 3·15의거로 시작된 4·19혁명의 전개 과정을 바로 정립하자는 3000만 서명의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이 시작 됐다.    국내외를 포괄 현재 (2019.12.31) 83만 2천여 명이 동참했다. 이 서명 운동은 광주 3·15의거가 바로 설 때까지 계속된다.   4·19혁명 1년만의 5·16 군사 정권에 의해, 3·15의거가 4·19혁명과 별개의 사건처럼 갈라 진데서 4‧19혁명의 정체성이 바로서지 못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역사피해를 가장 크게 입고 있는 것이 광주 3·15의거다. 4·19혁명사의 왜곡지점이 바로 광주3·15 민주주의 장송 시민봉기를 빠트린 곳이다.    그래서 현재 4·19는 시작이 없는 사건처럼 되어있다.    4‧19는 지금까지 관련법이 없다. 헌법 전문의 4·19혁명 명기는 한낮 정치적 선언적 의미에 불과 한다. 법치국가에서 법으로 보장받지 못한 채 정작 엄연했던 4‧19혁명의 시원 (始原)마저 지역주의로 함몰시켜 지역갈등만을 조장케하고 있는 것이 역대정부로 일관된 4‧19혁명의 입장이며 무책임이다.   4년전부터 4‧19기본법을 만들자는 국민서명운동도 호남4‧19혁명단체 총연합회가 앞장서 전개해오고 있다.   3‧15의거는 4‧19혁명의 원인이고, 4‧19혁명은 3‧15의 완결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정부는 하루속히 3‧15와 4‧19를 한 뿌리로 복원된 4‧19 독립법으로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광주, 호남의 심장이며 역사적 중심지 이 역사적 진실의 중심에 광주가 있다.   역사란 바로 잡지 않으면 또다시 반복돼 그 피해가 후손들에게 돌아가기 마련이고 국가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이 지역에서조차 외면되어 오고 있는 광주3‧15의거를 바로 세우는데 모두가 합심해 나서야 한다. 역사복원은 시간이 흐를수록 어렵다.   광주시가 제4회째로 갖는 광주3‧15의거 기념식을 계기로 올해는 반드시 국가기념일로 진입되도록 매듭을 지어야 할 것이다. ‘광주답게 광주를 건설하겠다! ’일념으로 시정을 이끌고 계신 이용섭 시장께 경의를 표하며, 광주3‧15의거의 실체와 의의를 전국에 알리는데 노력해 주신 광주시 산하 9천4백2명의 전공무원들에게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바이다.  많은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끊임없이 진실된 역사를 주장하는 상임대표께 ‘곡 민주주의 장송’ 시민봉기 광주 3.15의거는 그의 분신이었다. 상임대표님!! 끝으로 지난 3월 13일 이용섭 광주광역시장께서 광주 3.15의거 유공회원들에게 표창패를 수여하면서  광주 3.15의거 표지석 건립에 대해서도 강조하셨습니다.(시청 3층 비즈니스룸, 광주 3.15의거 유공자 표창식 참석)그렇다면 앞으로 광주 3.15의거도 국가지정 기념일이 발빠르게 진행되지않겠습니까? 김영용상임대표 :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광주시의회에서도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걸로 안다. 이 사안에 대해서는 차후에라도 이용섭시장님과 담판을 짓는 날이 왔으면 한다. 내가 느낀 광주 3.15 의거는 우리 광주시민의 자긍심이고 우리 대한민국의 자랑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조속히 국가지정기념일로 제정되어 더 이상 부끄러운 역사로 남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 줘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4.19 기념관 건물에서 나오는데 완연한 봄을 감지한다. 봄은 분명코 봄이련만 봄바람이 훈풍으로 느껴지지 않은 이유는 뭘까?! 북향이라 그렇까?? 2016년 10월에 출판한 '광주 3.15의거' 책자의 칼러가 흑백사진을 사이에 두고 위와 아래로 독특하다. 더 더욱 흑백사진의 눈매가 매서웁다!!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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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20-03-24 / 뉴스공유일 : 2020-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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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사 김일손의 상소는 계속된다. (연산군일기 1495년 5월28일) “그 요체는 하루빨리 경연(經筵)에 납시는 데 있습니다. 학문이 날로 나아가면 덕이 날로 밝아지고, 스스로 덕을 밝히면 만사가 차차 이치에 맞게 되기 때문입니다. (중략) 다만 지금 경연의 제도상 의논되어야 할 점도 있습니다. 무릇 경연은 어진 사대부(士大夫)를 접견하여 조용히 강론함으로써 덕성(德性)을 훈도(薰陶: 감화)하자는 것이지, 구두(句讀)나 찍고 문의(文義)나 해석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정이천(程伊川)은 서서 강의하는 것이 노고가 된다 하여 앉아서 강하게 하려고 하였는데,  그것은 경연의 체제가 옛날 스승을 빈객(賓客)으로 대우하는 법도가 있어서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눌러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의 경연을 보면 엎드려서 하니 능히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기운이 귀에 막히고, 말이 입에 맴돌아 자못 조용하지 못하고, 늙은 대신은 더욱이 감당해내지 못하오니, 전하께서는 명하여 조용히 앉아서 강하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선왕께서는 학문이 고명하신 경지에 도달하셨지만 하루에 세 번씩 강하셨으며, 강할 적마다 책을 달리하셨는데, 오직 날을 부족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진학(進學)하는 요령은 아닙니다.” 정이천(1033~1107)은 중국 북송의 유학자 정이(程頤)이다. 형 정호(程顥)와 함께 정주학(程朱學)의 창시자로 알려졌다. 철종 초에 사마광(司馬光) 등의 추천으로 국자감 교수가 되었고, 이어서 비서성 교서랑(校書郞)·숭정전설서(崇政殿說書)로 발탁되었다. 학자로서 그는 《역경(易經)》에 대한 연구가 특히 깊었고,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철학을 수립하여 큰 업적을 남겼다. 그의 철학은 주자(朱子)에게 계승되었다.   상소는 이어진다.   “전하의 명철(明哲)과 예지(叡智)로 비추어 보면, 장차 통하지 못할 것이 없지만, 정신은 분수가 있고 총명은 한도가 있으며, 한 가지 서적이라도 본말(本末)이 있으니, 반드시 깊이 이해하셔야 통달하게 됩니다. 만약 예전 규례만 답습하여 대충대충 진강(進講)하시면 안력(眼力)은 흩어지고 마음은 갈라져서, 하루에 만 권의 서적을 독파해도 결국 많이 안다고 뽐내기 위한 학문이란 평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성인의 학문은 대충 섭렵(涉獵)하려 해서는 안되고 마음을 열고 안목을 밝혀서 함양(涵養)하고 통달하여 응용에 이롭게 하려는 것입니다. 지금 한 가지 책을 통달하여 졸업하셨다면 다시 다른 서적으로 나아가공부에 전념하셔야 합니다. 다만 야대(夜對)에는 《강목(綱目)》을 강하여 세자로서의 학업을  마치도록 하소서. 대개 치란(治亂)과 흥망(興亡)과 진퇴(進退)와 사정(邪正)의 옛 자취를 속히 거울삼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전하께서는 더욱 성의를 쏟으소서” 치란과 흥망, 진퇴와 사정(邪正)은 제왕학의 근본이다. 대표적 저서가 당 태종 치세의 <정관정요>이다.    “뜻이 성실하지 못하면 보는 바가 다 부실할 것입니다. 대개 배움이란  묻는 것을 필요로 하는데, 묻지 않으면 명확하지 아니합니다. 경연에 임하여 심문(審問)하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것이 또한 중요합니다. 신은 매양 저 단주(丹朱)의 불초(不肖)와 순(舜)임금의 지성(至聖)을 생각할 때마다 비록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감히 비교하여 논하지 못할 것인데, 우(禹)임금은 순(舜)에게 ‘단주와 같이 오만함이 없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그 말이 이미 박절하였지만, 순임금은 마음으로 기뻐하고 그렇겠다고 수긍하였습니다.” 단주는 요임금의 아들로서, 요임금은 단주가 불초하여 천하를 물려주기에 부족함을 알고, 순(舜)에게 정권을 물려 주었다. 요즘 같으면 아들이 아니라 전문경영인이 기업 총수가 되는 격이다. 그런데 순임금도 자식에게 왕위를 안 물려주고 우(禹)에게 천하를 물려주었다. 우는 황허강[黃河]의 홍수를 다스리는 데 헌신적으로 노력하여 그 공으로 왕위에 올라 하(夏)나라를 세웠다. 한편 우(禹)는 왕위를 아들 계(啓)에게 물려주어 이때부터 선양제(禪讓制)가 없어지고 상속제(相續制)가 이루어졌다. 흔히 요순시대는 가장 이상적인 정치가 행해진 대동(大同)사회라 하고, 왕위 계승 시대는 대동사회의 차선책으로서 소강(小康)사회라 칭했다.  사진 1  창덕궁 선정전 사진 2  선정전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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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20-03-22 / 뉴스공유일 : 2020-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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