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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꼭두새벽에 일어나 김포국제공항을 거쳐 오후 1시 40분에 도착한 후쿠오카공항에서 히로시마 만찬 약속을 앞두고 여유를 부렸다. 차라리 모르면 여유가 없이 긴장해 곧장 움직이게 되어 있는데 설 알고 출발전 김포공항에서 알게 된 호텔근무 50대 남성으로부터 후쿠오카를 비롯해 시모노새키(하관)와 히로시마에 대해 많은 이여기를 들은 덕택에 자연스레 건방끼(?)를 떨게 되고 아는 척하며 끼어들면서 오늘은 참 재미있는 여행이겠구나 싶었다. 지하철로 이동해 하카타역에서도 내려 보고 텐진역에서도 내려 보면서 숙소도 직접 확인해 보면서 즐길 때까지만 해도 불과 몇 시간 후에 민망함을 거의 예상도 못하고 여유로웠다. 반성하건데 이건 순전히 몹쓸 작가근성이 나도 모르게 슬슬 발동되었기 때문이었다.   후쿠오카 지하철과 고속터미널 대합실 그토록 순을 죽여도 항상 건방끼가 문제다. 일본어도 아닌 영어를 혼합해 버스 매표여성에게 히로시마 도착시간을 말했더니 알았다는 듯 17시 4~50분을 매표종이에다 적어 준다. “오케이!!”를 외치면서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가장 앞자리로 부탁하면서 예약하고서 내일은 어쩔 수 없이 신칸센을 타야하니 오늘만큼은 넉넉하게 일본 지방을 실컷 눈요기를 하면서 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런 꿈같은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있었다. 함께 우연찮게 동승한 30대로 보이는 일본 직장여성과 대화가 소통되는가 싶었는데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다급한 나머지 스마트폰에서 어플로 깐 ‘파파고’ 번역기를 켜고 소통을 위해 총동원 하는데도 제대로 된 대화가 통 어렵다. 일본 고속버스는1~9줄로 abcd식이고 버스안 가장 뒷좌석에 화장실 칸이 눈에 들어 왔다. 이렇게 버스 안 뒤 켠에 화장실이 있는데도 번번이 각 각 도착한 장소에서 일부러 그러는 듯 기사는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또 그렇게 출발하고 있었다. 일본을 잘 모르는 사람이 결코 아니란 걸 히로시마에서 기다리는 인사들에게 보여주려고 계획했던 모든 저 혼자만의 생각들이 수포로 돌아가고 있다는 걸 이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들키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초조해질 무렵 16시가 넘어서자 히로시마발로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나 아직까진 상황을 모르는 터라 여유 있게 ‘걱정하지마시라’며 17시 40분이면 도착할거라고 차분하게 안심을 시키고 버스현황판을 분석하면서 옆자리여성에게 히로시마역까지가 앞으로 몇 분후에 도착하느냐고 물었다. 히로시마에서 만찬을 주선한 K 모 고위 인사는 그나마 카톡으로 ‘천천히 오시라’며 카톡을 남겨놔 더 좌불안석이 되고 만다. 그런데 더 웃기는 건 아까까지만  해도 수은강항과 후지와라세이카로 고무된 일본여성이 피곤하다는 식의 영어표현의 대화를 I am sleeping!!이라au 대화를 닫고 만다. 이렇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본 여성과도 더 이상 대화가 어려워 도착시간을 오로지 스마트폰으로 체크해 들어가는데 17시 40분이 넘어가는데도 아직도 히로시마는 수십여 km가 남아 있고 각 정류소마다 기사는 여전히 여유를 부리고 있어서 이젠 버스에서 내려 택시라도 잡아타고 싶었다.  “Never give up” 이런 처지에서 더 강한 기운을 받기위해선 윈스턴 처칠이야기를 잠깐 해 볼 수 밖에 없겠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의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이 노년에 옥스퍼드 대학교 졸업식에 연사로 초대를 받았다. 처칠이 단상에 오르자 많은 사람들이 어떤 메시지가 나올까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다.  “Never give up” 그리고 청중을 한 바퀴 둘러보고 또 다시 “Never never never give up ”절대 결코 결단코 포기하지 마라" 이 말만 하고는 연단을 내려가 버렸다. 그런데 이 말이 역사에 남는 가장 유명한 한 마디가 되었던 것. 처칠은 중, 고등학교 학창 시절 낙제를 여러 차례 당하고 육군사관학교도 삼 수만에 입학할 정도로 공부하고는 거리가 먼 학생이었다. 학습장애 뿐만이 아닌 말을 더듬는 언어 장애가 있어서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힘들어 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처칠은 포기하지 않고 하원의원을 시작으로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의 위대한 총리가 되고. 거기에 노벨 문학상까지 수상한다. 처칠은 학생들에게 "돌이켜보건데 내 삶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오늘 이 자리에 오기까지 수많은 고난과 난관들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학생 여러분들도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이 세상에서 각 분야에서 하고자 하는 일로 적재적소에 쓰임 받는 인생이 될 것이다!"  일본까지 건너왔는데 네거티브적인 생각이 온 머리를 지배해왔으나 “Never give up” 나도 모르게 처칠을 떠올리고 있었다. 18시 10여분쯤 무렵에 다시 전화를 한 K 모 고위 인사는 ‘한국 손님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모두 음식을 시켜놓고 담소를 나눈다.’는 말에 더 기겁을 하고 안절부절 하고 만다. 갑자기 어제저녁 꿈이 불현듯 생각났다.‘ 꿈조차도 안 좋았는데 이거 정말 큰일이구나.’ 싶고 계획의 실수로 많은 사람들에게 누를 끼친 게 안타까워 발만 동동 구르는데 K 모 인사는 누구라도 바꿔달라고 수신기를 통해 계속 외친다. 용기를 내 피곤해 잠자겠다는 여성을 조심스럽게 다시 말을 건네 보기로 했다. 여성에게 오늘 매우 중요한 만찬 약속에 사적인 판단 잘못으로 히로시마가 온통 난리가 났음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지성이면 감천!! 꼭 그랬다!! 흉몽은 반전을 가져와 대길(大吉)이 될 수 있었다. 의외로 쉽게 납득이 되었는지 히로시마역 한 정거장 앞 히로시마고속터미널에서 내려 택시를 타며 된다고 전해온다. 옆자리 일본 여성도 마침 자신도 히로시마터미널에서 내린다며 터미널에서 적극 나서서 택시를 잡아주고 빠른 안내를 도맡아 나서 주며 앞장섰고 그 덕택에 요코가와 기차역 앞에 도착했다. 황급히 택시에서 내려 카톡 이미지를 다시 일본인에게 보여줬더니 이번엔 일본남성이 앞장서서 라쿠타키아 2층 술집 안까지 안내에 나선다. 이미 20여명의 재일교포와 일본 주요 인사들이 만찬 겸 신년파티는 종반을 향해가고 있었다. 야치요 회 야치요병원 이사장으로 보이는 분을 향해 큰 절로 넙죽 인사드리고 백배사죄를 청한다. DNA 비교 학으로 봐도 틀림없는 건 많이 닮아 있었다. 함께 기념촬영도 하고 지난주에 도쿄 한국대사관 방문과 한국문화원 방문을 말하고 2020년 사업계획을 수립했노라고 거듭 강조해 말한다.   한편, 여기 방문한 목적과 함께 ‘수은강항선생 일대기’를 꼭 강인수이사장님께 전달하고 싶었노라고 차분하게 인사말을 해 가면서 친분을 과시하는데 나도 모르게 저절로 움추러 드는 자세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히로시마의 밤의 역사 밤이 좋았다. 새벽  2시까지 히로시마의 밤 문화를 즐기며 교포사회에 녹아들고 있었다. 이것도 인연의 연속인데 수은선생의 포로생활을 노래한 ‘간양록’을 불렀던 조용필 국민가수와 교제했다는 한 여성의 술집에서 밤은 우리나라 문화를 더 풍요롭게 했다. 술이 취해 노래를 부르고 민요를 듣고 트롯을 들었다. 익숙한 장구소리에 노래가 더 풍요로웠다. 일본에서 온돌방을 체인점으로 운영하는 대표이자 사업가인 배 모이사도 혼자 목소리를 높이고 높이다가 제풀에 꺽이고 밤 문화에 녹아들고 있었다. 결국은 교포가 운영하는 한식당에서 새벽 1시가 넘어서 해장국과 김치찌게를 시켜 먹으면서도 우리는 또 다시 민족성을 강조하고 애국심을 논했다..   그래도 새벽은 밝아온다. 느긋하게 새날을 맞이하고 간밤의 일을 복기하면서 자기성찰 하 듯 반성을 한다. 택시기사가 90세인데도 활기차게 택시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히로시마 역에 도착해 먼저 3개 국어로 쓰여 진 안내 글을 숙독하면서 거듭 읽고 충분하게 대처를 준비한다.덕분에 신칸센열차를 타고 하나카역에 전혀 당황하지 않고 내려 주변에서 일본을 다시 즐기고 있다.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이 좋은 것을...!! 어제는 그렇게나 건방진 끼가 발동됨을 거듭 반성을 해 본다. 전화위복처럼 잘 정리가 되어 그나마 방문의 목적에 축복을 가져다준 건 수은선생의 강인함과 그 기운의 덕택이리라. 포로로 끌려와 31세에 도요토미히데요시(풍신수길)에게 그토록 당당하고 선비로서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으니 그 강인한 정신력에 기인됨을 결론으로 풀어간다. <편집자 주>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죽자 풍국묘를 세운 후 일본승(日本僧) 낭카겐코(南化玄興)라는 자가 “태양의 나라 일본에 일세(一 世)에 호사(豪奢)를 누려, 바다보다도 깊고, 산보다도 높은 태평의 길을 열었다.”라고 명문(銘文)을 써 붙이자  마침 이곳을 찾아왔던 조선의 유학자 강항(姜沆)은 이글을 뭉개버리고 다음과 같은 비판문을 써 붙였다. 반세경토일배(半世經營土一杯)     秀吉의 반세경의 성과는 겨우 흙 한 컵에 지나지 않고 십층금전만최귀(十層金殿謾崔鬼)  묘지에 솟아있는 십층의 황금누각도 허무할 뿐이다. 탄환역락타인수(彈丸亦落他人手)  결국 작은 탄환만한 땅도 남의 손에 넘어갔지 않느냐. 하사청구권초래(何事靑丘捲土來)  이런 보잘 것 없는 네가 어찌 조선을 침략했는가? 강항은 정유재란 때 포로의 몸이었다. 그는 일본에 체류(1597~1600. 5. 19)하는 2년 여의 짧은 기간 일본에 유학(儒學)과 주자학(朱子學)을 순승 순수좌인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전수하며 유교를 전파한  일본유교의 비조가 되었다. 그런데 말이다. 일본에 유교를 심어 명치유신을 가져온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도쿠가와 막부(에도시대)에는 풍신수길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조선을 침탈한 전쟁광이로 묘사되다가 명치유신은 막부를 무너뜨린 정권으로 豊臣秀吉의 묘지와 신사를 크게 중창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본은 예나 지금이나 배신의 연속인 역사와 권력의 다툼에서 그 힘이 없어지면 금새 돌아서버리고 사건이 다시 이처럼 재발할 수 있는 곳이 일본인들의 변치않은 근성임을 우리는 국민적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전쟁 미치광이 도요토미히데요시를 다시 화려하게 재등장 시킨 역사적 비운의 흐름을 보면서 일본인들의 국민성을 기필코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할 것이다. 출처 이k호이 간양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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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20-01-22 / 뉴스공유일 : 2020-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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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칼럼

김일손의 상소 26개 조목 중 12번째 조목은 “효렴(孝廉:효성과 청렴)을 높여서 교화(敎化)를 도탑게 하소서.”이다. “옛날에 어진 인재를 천거할 때는 덕행(德行)을 앞세웠는데 후세의 과거(科擧)는 문예(文藝)를 숭상하였습니다. 그래서 선비들은 시문(詩文)에만 쏠려 바른 학문을 알지 못하고, 간혹 옛 법대로 조행(操行)을 삼가는 이가 있으면 여러 사람이 비웃고 희롱하니, 날로 사리에 어둡고 괴이해집니다. 대개 독행(篤行)하는 선비는 두루 통하지 못하는 이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공자(孔子)의 훌륭한 제자로 고시(高柴 효성이 지극하여 상중(喪中)에 3년간을 슬피 울고 전혀 웃지 않았다 함)같은 효자도 어리석다는 평가를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근세에 효행(孝行)으로써 천거된 자가 벼슬하여 일에 임할 경우 처리하는  재주가 없으므로 세상에서 드디어 효자를 쓰지 못할 것이라 하니 진실로 한탄스럽습니다. 한(漢)나라 이래로 효성과 청렴한 자의 천거가 폐지되지 아니하였고, 명(明)나라 관제(官制)에도 효렴(효성과 청렴)을 과거(科擧)와 함께 두어 기용하였습니다. 대개 백성을 효도로써 가르치는 것인데, 효자를 다 등용할 수 없으나, 가정(家庭)에서 힘써 행하여 향리(鄕里)에 나타나게 일컬어지는 것은 나이가 사오십이 아니면 들리지 못하는 것인데, 예(例)에 의하여 9품 벼슬만을 주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과거 장원(壯元)은 일장(一場)의 책문(策問)으로 당장 6품에 오릅니다. 장원은 두고라도, 문음(門蔭) 같은 것도 처음에 칭찬할 만한 한 가지 착한 것도 없는데도 월등하게 임명하는 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청주(淸州) 생원(生員) 경연(慶延)은 효도로써 선조(先朝)에 천거되어 곧 주부(主簿)를 제수하였고, 그 다음에 이산현감(尼山縣監)으로 임명하였는데, 죽은 뒤에 백성들이 이제까지 그의 은혜를 사모하고 있으니, 신은 원하옵건대, 이제부터 효도로써 천거된 자가 만약 학식이 있거든, 한결같이 경연의 예(例)에 의하여 다 6품직을 주고, 감사(監司)에게 책임을 지워 해마다 한두 사람씩 그 자질에 따라 그 행실을 등급 매겨 장려(奬勵)하여 교화(敎化)를 도탑게 하소서. 세상에서는 효도를 혹 읍죽(泣竹  중국의 효자 고시(高柴)의 일인데 어머니가 죽순(竹筍)을 즐겨 먹는데, 겨울이라 구할 수 없으므로 대밭에서 걱정하고 있으니 죽순이 별안간 솟아 나왔다 함.)과 할기(割肌 부모의 병에 자기의 살을 베어서 약으로 드렸다는 말인데, 이것은 고금에 한두 사람이 아니다.)의 특이한 데서 구합니다. 그렇다면 증삼(曾參)의 뜻에 순종하는 것과 악정(樂正)이 발을 다쳐 근심한 것(노(魯)나라 증자(曾子)의 제자 악정자춘(樂正子春)은 효자로써 행보하다가 발을 다쳤는데, 부모가 물려주신 것을 다쳤다고 자책하고 두어 달을 출입하지 않았다 함)은 효도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부모를 잘 섬기는 것이 효도라 하였으니 누군들  부모가 없겠습니까. 잘 섬기면 사람마다 다 효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조(聖朝)의 교화(敎化)로 효자가 많은 것이 어찌 걱정이겠습니까.” 이어서 상소의 13번째 조목은 ‘염퇴(恬退)하는 이를 우대하고 분경(奔競)을 억제해야 합니다.’이다. “요즈음 벼슬길에 들어선 선비들이 처음부터 실력이 없건만 오직 조급하게 승진할 것만 알고, 벼슬에서 물러날 나이가 되어도 오히려 나이를 속이고 녹(祿)을 받으며, 권세와 이익에만 붙좇는 것만 배우고 염치를 말하기를 꺼려하며, 때를 놓치지 않고 분주하게 밤중에도 벼슬자리를 구걸하려 다니니, 이조와 병조에서는 그러한 분경(奔競)에 견딜 수 없고, 산림에 은퇴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분경(奔競)은 ‘분추경리(奔趨競利)’의 준말로 벼슬을 얻기 위해 인사권자의 집에 분주하게 드나들며 인사 청탁을 하는 것이다. 1470년(성종 1)에 분경의 금지 대상이 확정되어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다. 이에 의하면 이조·병조의 제장(諸將)과 당상관, 이방·병방의 승지, 사헌부·사간원의 관원,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의 집에 동성 8촌 이내, 이성(異姓)·처친(妻親) 6촌 이내, 혼인한 가문, 이웃 사람 등이 아니면서 출입하는 자는 분경자로 간주되어 100대의 곤장을 맞고 3,000리 밖으로 유배당하게 규정되어 있다. 사실 이 규정은 매우 폐쇄적인 법제여서 많은 한계가 노정되었다. 또한  관료들이 표면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몰래 청탁하고 행적을 감추기 때문에 별효과를 기대하기 힘들었다. 상소는 계속된다. “혹 은퇴하는 자가 있어도 사대부(士大夫)들 또한 그리 가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아침에 경상(卿相)이 되었을 적에는 거마(車馬)가 거리를 메웠다가 저녁에 벼슬을 그만두고 도문(都門)을 나서면 송별하는 장막(帳幕)이 없으니, 이는 소광(疏廣)·소수(疏受), 양거원(楊巨源)의 행차와는 다르고, 고향에 돌아가면 사람들이 앞날이 없다 하여 더 이상 공경하지 않으니, 풍속이 이러합니다.” 소광(疏廣)은 한나라의 유학자로 기원전 67년 선제(宣帝)때 황태자의 태부(太傅)로 있었는데, 5년이 지나자 관직과 명성이 높아졌다. 그는 지금  떠나지 않으면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라고 하면서 숙질인 소수(疏受)와 같이 사퇴하고 장안의 동쪽 성문에서 고관들의 전송을 받고 낙향했다.  양거원(楊巨源)은 당나라 시인으로 70세에 벼슬을 내놓고 시골로 돌아갔다. “이제부터 벼슬에 물러날 것을 청하는 자가 있거든 비록 녹(祿)은 주지 못하나 연수와 품계에 구애됨이 없이 전정(田丁)을 복호(復戶)하여 주고 품계를 올려 주어 그 돌아가는 것을 우대하소서.” 사진 1 연산군 묘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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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20-01-20 / 뉴스공유일 : 2020-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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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칼럼

‘오누이(有兒)’는 1809년부터 1810년까지 2년 내리 흉년이 들어 남편은 아내를 버리고, 어머니는 자식을 버린 것을 안타깝게 여겨 지은 시이다. 일곱 살 난 계집아이가 자기 동생을 데리고 길거리를 방황하면서 엄마를 잃어버렸다고 엉엉 울고 있었다. 시를 읽어보자 오누리 둘이서 나란히 걸어가네      有兒雙行 누이는 묶은 머리, 동생은 쌍상투     一角一羈 누이는 이제 겨우 말 배우고          角者學語 묶은 머리 동생은 머리만 더벅더벅    羈者髫垂 어미 잃고 울면서                   失母而號 갈림길에서 헤매이네.               于彼叉岐 애들을 붙들고 까닭을  물었더니    執而問故 목이 메어 더듬는 말이             嗚咽言遲 “ 아버지는 집 떠나고               曰父旣流   어머니는 짝 잃은 새가 되었는데   母如羈雌 쌀독이 바닥나서                甁之旣罄 사흘을 굶었네요.               三日不炊 엄마하고 나하고 흐느껴 울어     母與我泣 눈물 콧물 구 빰에 얼룩졌네요.   涕泗交頤 동생은 젖 달라고 울지만         兒啼索乳 엄마 젖은 이미 말라붙었지요.    乳則枯萎 우리 엄마 내 손을 잡고         母携我手 젖먹이 저 애와 함께            及此乳兒 저기 저 산촌 마을 돌아다니며   適彼山村 구걸해서 우리를 먹었다오.      丐而飼之 어촌 장에 이르러서는          携至水市 엿도 사서 먹였는데            啖我以飴   길 너머로 데려와서                 携至道越 어미 사슴 새끼 품듯 껴안고 재워서  抱兒如麛 아이는 포근히 잠이 들고         兒旣睡熟 나도 죽은 듯 잠들었는데         我亦如尸 잠이 깨어 이리저리 살펴보니   旣覺而視 어머닌 여기에  없었답니다.”   母不在斯 이렇게 말하다가  또 울다가   且言且哭 눈물 콧물이  범벅이네        涕泗漣洏 해 지고 어두워지면         日暮天黑 뭇 새들도 자기 집 찾건만.   栖鳥群蜚 떠도는  두 남매         二兒伶俜 찾아갈 집이 없네.        無門可闚 불쌍하다. 이 백성들      哀此下民 천륜마저 다 잃었구나.    喪其天彝 부부 사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伉儷不愛 어미도 제 자식 돌보지 못하네.     慈母不慈 옛날 내가 암행하던       昔我持斧 그 해가 갑인년이었는데   歲在甲寅 정조 임금은 1794년(갑인년) 10월28일에 정약용을 암행어사로 임명하여.  경기북부 지역 4개 고을을 암행하도록 했다. 그 지역은 적성(파주시), 연천(연천군), 삭녕 · 마전(두 곳은 북한지역)이었다. 정약용은 곧바로 현장에 가서 샅샅이 민정을 살피고 11월15일에 정조에게 복명했다. 그는 적성 현감 이세윤과 마전군수 남이범이 선정을 베풀었다고 복명하면서, 연천 전 현감 김양직과 삭녕 전 군수 강명길의 탐학스런 행위를 고발했다.  김양직은 궁중의 어의(御醫)로 권세가 막강했고, 강명길은 임금 가족 묏자리를 잡는 지관(地官)으로 왕실과의 끈을 이용해 토색질을 했다. 하지만 그간 암행어사의 처벌 요구가 있었지만 대신들이 가로막고 이들을 옹호했다. 다산은 이들을 처벌하라고 강력하게 정조에게 보고했다. (박석무,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한길사, 2003, P 173-180) 임금님 당부가 고아들을 보살펴   王眷遺孤 고생 없이 하라고 부탁했건만      毋俾殿屎 모든 목민관들은                凡在司牧 감히 그 분부 어기지 말아야지 毋敢有違 흉년에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 안타깝게도, 흉년에는 천륜도 인륜도 다 무시된다.    그런데 『전간기사』 6수에는  에피소드가 있다. 아들로부터 시를 얻어 읽어본 이백진이  경상도 김해에서 귀양 사는 사촌 아우 이학규에게 편지와 함께 시를 필사하여 보냈다. 이백진은 편지에서 “정약용은 당대의 사백이다. 그의 시에는 사람을 깨우치는 뜻이 있다. 두보의 수노별(垂老别 병사로 나가는 노인의 할멈과의 이별)· 무가별(無家别 가족도 없는 고향과의 이별) 이후 이런 시는 없었다.”고 썼다. 다산 시를 읽고 감동을 받은 이학규는 1810년에 『己庚紀事(기경기사)』를 완성했다.  이학규는 정약용과 가까이 지내던 후배로 그 역시 정약용과 마찬가지로 1801년 신유옥사에 연루되어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박석무, 다산 정약용 평전, 민음사, 2014, p 470) 사진 1  다산 기념관 (강진군 소재)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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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20-01-19 / 뉴스공유일 : 2020-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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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분(緣分)이라는 건 언제인가 누구로 부터는 꼭 이어진다는데 놀랍다. 자가당착(自家撞着)적으로 해석해서 생기는 신기루 같은 현상일 수도 있겠지만 전율이 느껴질 만큼이나 큰 인연은 꼭 존재하는 것만 같다.  이러한 인연은 누구나가 한 번쯤은 겪게 되는 예지몽(叡智夢) 같기도 하다. 인연(因緣)!!출처인 네이버 어학사전을 검색해 보면 이렇다. 인연3 (因緣)[명사] 1.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 2. 어떤 사물과 관계되는 연줄. 3. 일의 내력 또는 이유. [유의어] 연고, 원인, 관계 친일앞잡이와 반일파 지금의 일본 아베수상이 과거사를 죽을힘을 다해 막아가며 용쓰는 것도 그의 조부(祖父)인 아베 노부유키(일제 마지막 총독)편집자 주 참조, 흐름의 악의적인 인연이다. 침략질도 용서받지 못 할진데 퇴각하면서 내뱉은 말이 더 회자(膾炙)되고 고약하다.조선인에게 문화침탈교육인 ‘식민교육’을 자행했기에 이들은 우리에게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큰소리치는 것이다. 그런데 정답을 미리 말하자면 이러한 기우(杞憂)도 우리 민족의 우수성은 김대중 정부에서 이미 보여준 적이 있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김대중 정부에서 일본 문화를 개방하면 마치 큰일이 날 것같이 일부에서 호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문화의 우수성으로 한류문화가 오히려 일본 열도를 점령하다시피 했지 않은가? 항상 보수적인 식자(識者)층이 더 문제다. 그러니까 돌이켜보면 2017년 고려대의 경제학과 정안기교수에 이어 2019년 9월 ‘위안부 막말’로 논란이 된 류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가 2020년 1학기에 강의를 배정받은 사실이 알려진 가운데 연세대 재학생과 동문들의 반발이 거세다. 류교수는 거침없이 “‘위안부’는 매춘의 일종”이라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자발적으로 매춘을 한 것이라는 취지로 말해 논란이 됐던 것. 각 지역대학교의 퇴계학연구소 각 지역 대학교내에 설립되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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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년에 다산이 지은 전간기사 6수중 제5수는 ‘승냥이와 이리(시랑(豺狼)’이다. 정약용은 원주에서 이렇게 적었다.   “시랑(豺狼)은 백성들의 이산(離散)을 슬퍼한 시다. 남쪽에 두 마을이 있는데 하나는 용촌(龍村)이고 또 하나는 봉촌(鳳村)인데, 용촌에는 갑이라는 자가, 봉촌에는 을이라는 자가 살고 있었는데 서로 장난삼아 때린 끝에 을이  병들어 죽었다. 두 마을 사람들은 관청의 검시(檢屍)가 두려워서 갑에게 자살 할 것을 권했더니 갑은 그것을 흔연히 자기 목숨을 끊어 마을을 평안하게 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후에 아전들이 이를 알고 두 마을의 죄상을 캐면서 돈 3만 냥을 토색질 해 갔다. 두 마을은 그것을 마련하느라 베 한 치, 곡식 한 톨도  남은 것이 없어 그 지독함이 흉년보다 더했다. 그리하여 아전들이 돌아가는 날 두 마을 사람들은 모두  다 떠나고 오직 어느 부인이 혼자 남아 현령(縣令)에게 그 사정을 호소했더니, 현령이 하는 말이 “네가 나가서 찾아보라.”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시를 읽어보자. 승냥이여, 이리여!           豺兮狼兮 우리 송아지 이미 채갔으니  旣取我犢 우리 양일랑 물지 말라      毋噬我羊 장롱엔 속옷 없고         笥旣無襦 시렁엔 치마도 없다       椸旣無裳 항아리엔 남은 소금도 없고   甕無餘鹽 쌀독엔 남은 식량도 없단다.  甁無餘糧 큰 솥 작은 솥 다 앗아가고   錡釜旣奪 숟가락 젓가락 다 가져간 놈  匕筯旣攘 도둑놈도 아니면서           匪盜匪寇 왜 그리 못된 짓만 하느냐    何爲不臧 사람 죽인 자는 죽었는데     殺人者死 또 누굴 죽이려느냐.         又誰戕兮 도둑도 아닌데 누가 숟가락, 젓가락까지 다 가져갔는가? 도둑도 아닌데 가져 갈 사람은 권력 있는 관아 사람들이다. 이미 사람 죽인 자는 죽었는데  마을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 관아에서 백성들의  모든 것을  가져갔으니 너무 어이가 없다. 수령과  아전의 토색질이 여실히 드러난다. 수령이 이리라면 아전은 승냥이다. 시는 이어진다. 이리야, 승냥이야 !        狼兮豺兮 삽살개 이미 잡아갔으니   旣取我尨 닭일랑 잡아가지 말라     毋縛我鷄 내 자식은  이미 팔았지만  子旣粥矣 내 아내야 누가 사가랴     誰買吾妻 내 살가죽을  네가 벗기고  爾剝我膚 내 뼈까지 부순 네놈       而槌我骸 우리의 논밭을 바라보아라.    視我田疇 그 얼마나 크나큰 슬픔이더냐. 亦孔之哀 가라지 풀도 나지 않는데     稂莠不生 쑥인들 있겠느냐             其有蒿萊 사람 죽인 자는 이미 죽었는데  殺人者死 또 누굴 해치려느냐.            又誰災兮 백성들은 관아의 처사를 원망한다. 검시를 안 한 것을 이유로 두 마을을 초토화시켰으니 이런 아전들이 어디 있을까? 도둑보다 더 했다.    다산은 『목민심서』 <이전(吏典) 6조>에서 ‘아전단속’을 강조했다. “백성은 토지로 논밭을 삼지만, 아전은 백성을 논밭으로 삼는다.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것을 경작(耕作)하는 일로 여기고, 마구 거두어들이는 것을 수확으로 삼는다. 이것이 버릇이 되어서 당연한 것으로 여겼으니, 아전을 단속하지 않고서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자는 없다.” 승냥이여 호랑이여!   豺兮虎兮 말한 들 무엇 하리.    不可以語 금수  같은 놈들이여   禽兮獸兮 나무란들 무엇하리.    不可以詬 부모가 있다지만       亦有父母 역시 믿을 수가 없네.  不可以恃 달려가 호소도 해보았지만  薄言往愬 들은 체도 하지 않네.   褒如充耳 우리 전답을 바라보라  視我田疇 그 얼마나 참혹한가.  亦孔之慘 백성들 이리저리 유랑하다가  流兮轉兮 시궁창 구덩이를 가득 메우네.  塡于坑坎 아버지여,  어머니여!    父兮母兮 고량진미 먹으면서       粱肉是啖 방에 기생까지 두고 있는데  房有妓女 그 얼굴 연꽃 봉오리 같네.  顔如菡萏 아전들은 백성을 트집을 잡아 유랑민으로 만들어 놓고 기생까지  고량진미를 먹고 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은 어떤가? 사진  1 여유당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 정약용 생가)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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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사 김일손의 상소 26개 조목 중 10번째 조목은 ‘감사(監司)를 오래 유임토록 하고 가끔 어사(御史)를 보낼 것입니다.’이다. 이를 읽어보자   “대저 ‘지나는 곳마다 인심을 교화시켜서 신기한 자취를 남긴다.’는 성인으로도 ‘반드시 3년이 지나야 이룬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감사들이 한 해 동안에 어찌 능히 업적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자취를 남기려면 3년이 지나야 한다는 의미는 지금도 유효하다. 공공기관장 임용과 별정직 공무원 임용은 임기가 보통 3년이다. 공무원이었던 필자도 임기 3년의 공직을 맡은 적 있다. 첫 해는 업무 파악. 2년째는 적극적인 일 수행, 3년째는 시행착오를 없애고 능숙하게 일 처리를 할 수 있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도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상소를 계속 읽어보자. “신은 원하옵건대 6도의 감사를 모두 함경도와 평안도의 감사처럼 주(州)의 목사(牧使)를 겸직토록 하여 3년 임무를 마치도록 한다면, 조세 행정이 흡족할 수 있을 것이오, 이는  또한 조종의 법이기도 합니다. 김일손은 감사도 주의 목사를 겸직하여 실제 지방행정을 하도록 하는 건의를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전라도 감사가 전주목사를 겸직하는 것이다.    상소는 어사 파견으로 이어진다. “선왕께서는 일찍이 조정의 신하를 보내서 사방의 폐단을 물어보고 더러는 적발토록 명하였으나, 일정한 제도는 없었습니다. 신은 원하옵건대, 해마다 봄가을에 강직한 조정 신하를 뽑아 벼슬에 따라 권한를 주어 보내서 사방을 순시한 다음 간대(諫臺)에 올려 탄핵하도록 한다면, 지방 관원이 마음대로 민간에게 직권을 남용하지 못할 것입니다. 김일손은 관료들의 직원 남용을 막고자 하는 감찰제도를 건의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제기되고 있는 사항이 공무원의 직권남용이다. 직권을 이용하여 공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한 것은 형사상 처벌 대상이다. 김일손은 이를 간파한 것이다.  상소는 이어진다. “의견을 말하는 자는 더러 간사한 아전의 횡포를 미워해서 중국 조정에서 시행하던 분사어사(分司御史)를 두어서 단속하던 제도를 모방하려고 하나 나라는 적은데 관원이 많은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한편 김일손이 상소한 11번째 조목은 ‘검찰(檢察)을 가려 뽑고 무역을 정지하고 관문을 설치하여 관서 백성들의 영역을 보전해야 합니다.’이다.  신이 이문등록(吏文謄錄)을 상고하여 보니, 태종 때에 검찰관으로 사인(舍人)도 쓰고, 더러는 정언(正言)도 써서 일정한 정원이 없었습니다.   요즘 속된 말로 감찰을 업신여겨 말하기를 ‘꼴 베는 자도 가고 꿩·토끼 잡는 사냥꾼도 간다.’라고 하니, 이것은 사람을 골라 보내지 않아 천시 하는 것입니다. 검찰의 맡은 임무는 매우 중요해서 중국 조정의 사람들은 검찰을 가리켜 어사(御使)라고 합니다. 적임자가 아니면 한갓 웃음과 멸시를 살 뿐이니, 이제부터는 이름 있는 사람을 뽑아서 직위에 따라 사헌부의 직책을 겸임시켜 파견하소서. 신이 일찍이 명나라의 조훈(祖訓)을 얻어 보았더니, 우리나라를 안남(安南 : 베트남) · 유구(琉球 : 오끼나와)보다 아래의  오랑캐로 대우하고, ‘매양 사신이 다닐 때에 장사붙이를 끼고 거짓 술책을 많이 쓴다.’고 하였으니, 매우 부끄러운 일입니다. 신이 생각하여 보니 이는 전혀 허황된 말이 아닙니다. 사사로이 저지르는 탈법  행위는 책임이 검찰이 처리하겠지만,  국가에서는 공적인 무역은 장복(章服)이나 약재 이외에는 반드시 절제하고 감축하며, 먼 외국의 물건을 보물로 여기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역내 백성을 국경 안에 봉쇄할 수는 없으나 관문에 의한 제한은 역대로  엄하게 단속하여 왔습니다. 우리나라는 국경이 매우 소홀하니, 마땅히 압록강 연안을 따라 장성(長城)을 쌓고 관문을 설치하여 관서 백성을 보호하고, 매번 사신이 북경에 갈 때마다 대관(臺官)을 보내서 관문을 지키면서 함부로 출입하는 것을 살피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중국에서 변란이 없으면 그만이지만, 변란이 있다면 관서 지방이  반드시 먼저 공격을 받을 것이니, 위만(衛滿)·금국(金國)·납합돌(納哈突)·동단(東丹)·사태왕(沙太王)·유태왕(柳太王) 등의 반란을 거울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천하가 태평한 지도 이미 백 년이 지났으니, 마땅히 깊이 생각해 볼 일입니다. 김일손은 국경문제까지도 살피고 있다. 두루 해박하다. 혜안이 놀랍다.  사진 1 창덕궁 희정당 (1498년 7월12일에  연산군이 김일손을 친국한 곳이다)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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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손의 상소 26개 조목 중 7번째 조목은 ‘시신(侍臣)이 조칙을 봉환(封還 도로 돌려드림)하고 논박할 수 있어야 합니다.’이다.   당나라에 때부터 한림(翰林)이 내명(內命)을 맡고 급사(給舍)가 외제[外制]을 맡아서 무릇 임명과 파면이 있을 때에 모두 제사(制詞: 임·면하는 사연을 적은 글월)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한림이나 급사가 다 같이 조칙을 봉박(封駁)할 수 있으니, 한림은 내전(內殿)에 두어서 임금을 따라 옮겼고, 급사는 중서문하(中書門下)에 두었던 것인데, 전조(前朝)에서는 문하부(門下府)에 두었었고,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의정부에 두었다가 그 다음에 분리해서 별도로 둔 것입니다. 대개 당시에 서무는 의정부에서 처리하였으나 간원을 붙이게 된 것은 곧 옛적에 급사를 중서문하에 두었던 의미입니다. 지금에 와서 옛것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선조(先朝)에 있을 때에 연경(燕京)에 가서 대명백관도(大明百官圖)를 살펴보았더니, 육과급사중(六科給事中)은 낮은 7품 벼슬로도 맡은 임무는 우리 조정의 여섯 승지와 같아서 어가[鸞駕]를 인도하고 어명을 출납하고, 혹시 임금에게 잘못이 있으면 논박하여 아뢰고, 혹 뜰에 내려서서 간하기도 하였으니, 이것은 가까이 모셨기 때문에 일을 보고 겪는 것이 빨라서 금하지 못할 것도 금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승정원은 서정을 관할하고 있으니, 권리는 상서성(尙書省)과 같습니다. 그래서 상서랑(尙書郞)도 또한 논박할 수 있는데,  오늘날 사간원이나 사헌부는 이름은 시종신(侍從臣)이라고 하지만 외관(外官)과 같은 청사에 있으면서 겨우 서리(胥吏)들의 문견 기록을 얻어 보고, 이미 완성된 명령이 내려진 뒤에 비로소 논박하니 이미 때가 늦습니다. 홍문관은 곧 옛날 한원(翰苑)인데, 비록 혹 일을 논하더라도 논박할 만한 사두(詞頭 조정에서 사신(詞臣)에게 조칙을 기초하도록  명할 때 주는 요지)가 없고, 다만 감사(監司)에게 내리는 교서나 지을 뿐이요, 명령을 이행하지 않고 도로 바치는 전례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조정의 시신은 임금의 실수를 바로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은 원컨대, 승정원이 모두 대사간을 겸직하고 상서랑의 권리를 가지고 급사중(給事中)의 책임을 맡도록 해서 교령을 짓고 봉박하는 책임을 수행하도록 한다면 임금의 직임에 있어서 매우 다행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만약 ‘지당합니다.’하고 다만 문서처리나 할 뿐이라면 서리 한 사람으로도 족할 것입니다. 순임금이 대언(代言 승지)에게 명할 때에는 반드시 일러 주기를 ‘짐의 명령 출납(出納)은 오로지 신실(信實)하여야 한다.’고 하였으니, 이른바 신실하여야 한다는 것은 그저 출납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여덟째, 종실의 어진 사람도 뽑아 등용해야 합니다. 대저 하늘이 인재를 내는 데 수(數)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사람을 쓰는 데 오직 그 재주와 현명함만 보았고, 가깝고 멀고 귀하고 천한 것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땅이 비좁아서 인재가 나는 것이 한정이 있는데, 뽑는 데는 갈래가 많고 쓰는 데는 빼놓는 것이 많습니다. 서얼(庶孽)이면 쓰지 않고 재가(再嫁)하여 낳은 자식도 쓰지 않으니, 설사 뛰어난 인재가 있어서 중국의 주의(周顗)·범중엄(范仲淹)·조여우(趙汝愚) 같은 무리가 그 가운데 태어났어도 역시 뜻을 펴 볼 길이 없을 것이니, 다른 것은 논할 것도 없습니다.  ‘종자(宗子)는 오직 성(城)이다.’라고 한  시인이 말 한 바 있습니다.  우리 세조께서 또한 종실에서 많이 채용하셔서 백관들 사이에 두었으니, 지금이라도 먼 친척 중에 어진 사람을 뽑아서 조정 반열에 참가시켜 쓴다면 또한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전한(前漢)은 동성(同姓)을 많이 봉해서 오래 유지하였고, 조위(曹魏)는 골육(骨肉)을 소박하여서 빨리 망하였으니, 모두가 경계할 만한 일입니다. 아홉 번째 사관(史官)을 더 두어 선악(善惡)을 기록할 것입니다. 국가의 사관으로 조정에는 홍문관·승정원·예문관과 육조에 각기 한 사람씩 두었으니 많지 않은 것은 아니나, 모두가 중앙에만 있기 때문에 지방의 풍속이 나쁘고 좋음과 인물이 잘나고 못난 점을 기록할 수 없으니, 악한 것은 기록하지 못하여도 탈될 것은 없으나, 선한 것이 행여나 빠진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 동방 선비가 사장(詞章)이나 읽기를 즐기고 뜻을 세우는 데는 스스로 힘쓰지 않아서 비록 관가의 일로써 독촉해도 오히려 힘쓰지 않으니, 초야(草野)에 묻혀 살면서 손성(孫盛 중국 진(晉)나라 사학자)처럼 역사를 집필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조(前朝)의 역사는 난잡하여 볼 만한 것이 못되고, 선왕의 실록도 필경 훌륭한 사실이 일이 많이 빠졌을 것입니다. 신은 원하옵건대, 각 지방의 막료(幕僚)에게 춘추관을 예겸(例兼 으레 겸임하도록 되어 있는 벼슬)하도록 하고, 수령(守令)에게도 학문이 넉넉한 자는 춘추관을 겸임토록 하여서 기재할 책무를 맡기고, 한 번 춘추관을 겸하였으면 비록 파면된 뒤라도 들은 것을 계속 기재하도록 함으로써 자신의 직무를 삼도록 한다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사진 1  자계서원 전경 (경북 청도군)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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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년과 1810년 2년 동안 전라도는 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계속되었다. 다산은 ‘뽑히는 모(拔苗)’ 시를 지었다. 다산은 원주에서 이렇게 적었다. “모가 말라 모내기를 할 수 없게 되자 농부들은 그것을 뽑아 버리는데, 모를 뽑으면서 통곡하는 소리가 온 들판에 가득했다. 어떤 아낙네는 너무 억울해서, 자식 하나를 죽여서라도 비 한 번 쏟아지게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벼 싹이 나올 때면 연한 녹색에 짙은 황색     한 폭의 비단같이  푸른빛 은은하네.          어린 자식 보살피듯 아침저녁 돌보아서         주옥처럼 보물로 여겨 보기만 해도 흐뭇했네.     쑥대머리 한 여인이 논바닥에 주저앉아  방성통곡을 하면서 저 하늘 향해 호소하네.   차마 어이 정을 딱 끊고 이 벼 싹 다 뽑다니     오뉴월 한여름에 슬픈 바람이 쓸쓸하네.   우거진 나의  모를 내 손으로 다 뽑다니    무성한 나의  모를 내 손으로 죽이다니 우거진 나의  모를 잡초처럼 뽑아내고   총총한 나의  모를 화톳불 놓듯 태우다니   뽑아서 묶어서 저 웅덩이에 두었다가 행여 비가 내리면 고인 물에나  꽂아볼까 내 자식 셋이 있어 젖도 먹고 밥도 먹는데 그 중 하나를 죽여서라도 이 어린 모 살렸으면 오죽하면 자식 하나를  죽여서라도 어린  모를 살리고 싶을까? 이어서 다산이 지은 전간기사 제3수는 메밀이다. 메밀은 현령(縣令)을 풍자한 시다. 조정에서는 메밀종자를 나누어 주도록 영을 내렸는데도 현령은 그 영은 봉행하지 않고서 백성들에게 메밀만 심으라고  독촉만 한다.  넓고 넓은 논에 먼지만 풀풀 날리는데 어린 볏모 뽑아버리고 메밀 대신 심으라네. 집안에 없는 메밀 시장에 가도 살 수 없어 주옥은 구할지라도 메밀 종자 살 수가 없네. 현령이 통첩을 내려 ‘메밀종자 걱정 말라 내 장차 너희 위해 감영 통해서 구해주마’ 우리는 그 말만 믿고 논 갈아엎었는데 메밀은 주지 않고 우리들만 독촉하면서 “메밀 심지 않으면  나는 벌을 내리리니 흰 몽둥이 붉은 곤장에 너의 살점 떨어지리.” 오호라  하늘이시여 왜 이다지 못 살피시나요. 메밀이나마 심지 않으면 우리는 살 길이 없는데   우리 탓만 하며 호령이 벽력같네. 고기 쌀죽 안 먹으면 안 먹는다고 벌 줄 것인가 메밀종자 주라는 나라 분부 내렸건만 그 분부는 안 따르고 우리 임금을 속이다니 조정에선 메밀 종자 나누어주라고 영을 내렸건만 현령은 안 나누어주고 메밀 심으라고 들볶고 있다. 형벌까지 내리겠다는 이런 현령을 믿고 지내는 백성들이 불쌍하다. 지금은 어떤가?   이어서 전간기사 제4수는 보리죽(오거 熬麮)이다. 다산은 원주에서 이렇게 적었다.   “오거(熬麮 : 거(麮)는 보리죽을 말한다) 역시 흉년 걱정이다. 가을 추수 가망이 없어 부잣집들도 모두 보리죽을 먹는 형편이고,  신세가 고단한 자들은 보리죽도 먹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내가 다산에 있을 때 앞마을 사람들이 모두 보리죽을 먹고 있었는데, 나도 가져다 먹어보았더니 겨와 모래가 절반이나 되어 먹고 나면 속이 쓰려 견딜 수가 없었다.”    동쪽 집이 들들들 서쪽 집도 들들들   보리 볶아 죽 쑤려고  맷돌소리 요란하네.   체로도 치지 않고 기울도 까불지 않고   그대로 죽을 쑤어 주린 창자 채운지만   썩은 트림 신트림에 눈앞이 어질어질     해도 달도 빛을 잃고 천지가 빙빙 돈다네.  얼마나 굶주렸으면 눈앞이 어질어질하고 천지가 빙빙 돌까. 아침에도 보리죽 한 모금 저녁에도 보리죽 한 모금    이것마저 잇기 어려운데 배부르기 바랄쏜가.    있는 물건 모두 팔아 보리를 사려 해도         내 물건은 팔리지 않아 기와조각 자갈이요     파는 곡식은 날개 돋쳐 옥 같고 구슬 같네.   보릿자루 하나 나면 모여든 자 수 백 명 이네. 내 보기엔 보리죽도 마을에서  부자나 먹네. 으리으리한 집에다가 정원 수목 우거져서    소나무 대나무에 감나무에 돌밤나무 옷걸이엔 명주옷 찬장에는 놋그릇   외양간에는  소 누웠고 홰에서는 닭이 자고   말 잘하고 권력도 있고 수염도 멋지더라.      극심한 가뭄에도 부자들은 보리죽이라도 먹는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보리죽도 못 먹는 신세이다. 이런데도 관아의  수령과 아전들은 본체 만체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가. 사진 1 다산초당의  동암 안내판 사진 2  동암 전경 사진 3  다산동암 편액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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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20-01-05 / 뉴스공유일 : 2020-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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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칼럼

인간이 태어나 고사성어를 하나라도 남길 수 있다면 그 존재의 가치가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여기 소개하는 수은선생은 수많은 시어를 통해 전쟁의 참화와 역사를 통한의 시와 함께 불후의 작품과 저서를 왜국과 조선시대에 남겨 이미 지성의 반열에 오른 그런 위인이시다. 경자년 새해를 맞이해 '수은선생일대기'에 녹아있는 그 어록을 정리해 50선을 소개하는 바이다. 1. 수은 강항(睡隱 姜沆) 우리나라에 유교가 전파된 순서로 유교전파 도학자순으로 정리하자면 : 安珦(晦軒) → 權溥(菊齋) → 李穀(稼亭) → 李穡(牧隱) → 鄭夢周(圃隱) → 吉再(冶隱) → 金叔滋(姜湖) → 金宗直(佔畢齋)→ 金宏弼(寒暄堂 )→ 趙光祖(靜庵) →成守琛(聽松)/白仁傑(休庵) → 成渾(牛溪) → 睡隱(姜沆)이 되며 ‘일본 유교의 비조’라고 인터넷을 검색해도 알겠지만 현재의 일본인들이 선생을 일컬어 지칭한다. ‘수은’이란 뜻은 잠잘 ‘睡’자 이며 아주 작아 티끌만한 숨길 ‘隱’자를 쓰는건 고려조 말 삼은(三隱)의 정신계승을 의미한다. 이 무렵 강문에서는(1590년~1600년)23명의 선비가 ‘隱’자 돌림 아호를 사용하게 된다. 2. 해동강부자(海東姜夫子) 수은 강항(睡隱 姜沆)을 일컬어 해동(海東) 곧 조선의 부자(夫子)공자(孔子)를 높이어 이르는 말로 표현했다. 3. 각도만리 심교각(脚到萬里 心敎脚) 강항이 5세때 전라부사 신응시가 각(脚)자로 운을 떼니 즉석에서 ‘각도만리 심교각(脚到萬里 心敎脚- 다리가 만 리를 가지만 마음이 다리를 시킨 것이다.)’라고 지어 신응시를 탄복케 하였다. 4. 유성약천성부(幼成若天性賦) 9세에는 '어려서 갈고 닥아 익히게 되면 성인이 되어 변함없이 모든 사물을 이뤄 보게 된다(幼成若天性賦)'고 좌우명으로 삼았다. 5. 강목촌(綱目村) 8세에 전북 고창군 공음리(당시 무장현)칠암리에서 하룻밤사이에 중국통감강목을 모두 외워 칠암리를 맹목촌이라 명명했다. 6. 맹자정(孟子亭) 7세에 책장수에게 맹자 한 질을 암송해 맹자정이 세워졌습니다. 현재 전남영광군 불갑면사무소옆에 맹자정기적비가 건립되어 있다. 7. 중국고서 통감강목(中国古書 通鑑綱目)  5번에서 말한 중국 역사서로 조선시대 선비들의 텍스트북이다. 8. 일람진기(一覽盡記) 한 번 쭉 보고 다 알아서 기록한다는 고사성어이다. 9. 호향호국(護鄕護國) 내 고장과 나라를 지킨다는 고사성어이다. 10. 애국충절(愛國忠節) 나라를 사랑하고 절개를 지킨다는 고사성어이다. 12. 적중봉소(賊中封疏) 왜국의 정세와 지리, 외교, 정치, 제도, 문물, 기후, 문화, 동향 등을 상세히 기록해 선조에게 상소한 내용이다. 13. 천신만고(千辛萬苦) 아시는 바와 같이 마음과 몸을 온 가지로 수고롭게 하면서 애씀을 일컫는 한자성어이다. 14. 간양록(看羊錄) 죄인이라는 뜻에서 이를 ‘건거록(巾車錄)’이라 하였는데, 1656년(효종 7) 가을 이 책이 간행될 때, 제자들이 책명을 간양(看羊)으로 고쳤다. ‘看羊’이란 흉노땅에 포로로 잡혀갔던 한나라 소무(蘇武)의 충절을 뜻하는 것으로, 그것에 선생의 애국충절을 견주어 말한 것이다. 『수은집(睡隱集)』의 별책으로 간행되기도 했는데, 유계(兪棨)의 서문과 제자 윤순거(尹舜擧)가 발문했다 15. 운제록(雲堤錄) 1600년 귀국해서 고향인 영광군 불갑면 금계리 운제마을에서 저술한 선생의 책이다 16. 강감회요(鋼鑑會要) 중국의 고서인 통감강목과 자치통감을 요약해 재해석한 내용으로 조선선비들의 텍스트북이었으며  그 내용이 원저자인 주자(朱子)의 정신세계를 분석한 책으로 곧 성서를 재해석한 경지(境地)다. 제가 보기로는 선생의 가장 으뜸인 저술서다. 17. 문선집(文選集) 좋은 책을 골라 놓은 선생의 저서를 총칭하기도 하다. 18. 강항휘초(姜沆彙抄) 일본의 도쿄 국립공문서관 내각문고에 수장되어 있으며 총16종 21책으로 수은선생이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발문했다. 19. 애국애족((愛國愛族) 잘 아시다시피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사자성어다. 20. 사서오경(四書五經) 유교의 기본 경전인 《대학(大學)》ㆍ《논어(論語)》ㆍ《맹자(孟子)》ㆍ《중용(中庸)》을 총칭하며, 오경은 일반적으로 《시경(詩經)》ㆍ《서경(書經)》ㆍ《주역(周易)》ㆍ《예기(禮記)》ㆍ《춘추(春秋)》 등을 말한다. 21. 불요불굴정신(不撓不屈精神) 한 번 마음먹은 일에 흔들림없이 가는 정신세계를 말한다. 22. 와신상담(臥薪嘗膽) 섶에 누워 쓸개를 씹는 마음가짐으로 원수를 갚듯 벼르고 별러서 꼭 성취한다는 사자성어다. 23. 아혜막망부(兒兮莫望父)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왜놈에 의해 갓 돌이 지난 아이를 바다에 투살 당하는 현장을 목격하며 지은 시제목이다. 그 제목으로 아비를 잊지 말라 아혜막망부(兒兮莫望父) 무고한 너를 죽게 만든 것이 오직 나의 죄라!! 치여무고유아죄(致汝無辜惟我罪) 평생토록 부끄럽고 원통해서 통한의 눈물만 마구 흐른다고 쓴 통한의 시다. 24. 상사한(相思恨) 애생이 엄마로 통칭되는 이씨부인(죽곡선생 따님)에 대한 표현은 순천 앞바다에서 왜놈들에 의해 모진 고생을 다하고 매 맞아 죽는 것을 다른 배에서 지켜보면서 ‘相思恨’이라는 시 한 수를 읊으며 단장(斷腸)을 에이는 울분을 토로 한 시 제목이다. 25. 우계성혼서실 문호방문(牛溪成渾書室門戶訪問) 가장 진실된 친구를 말할 때 ‘그가 곤경에 처할 때 돌보는 사람’이라고 말하듯 우계선생의 제자로 우계가 귀양살이할 적에 직접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는 걸로 선생의 담대(膽大)하고 참된 선비정신을 말한다. 26. 연원도(淵源圖), 은시록(誾侍錄), 문인록(門人錄) 조선유현연원도(朝鮮儒賢淵源圖) 선생의 제자를 88명 또는 69명으로 기록되어 있는 근거자료로 수은종가에서 가지고 있는 책자로는 은시록(誾侍錄), 문인록(門人錄)이 한국학 호남진흥원에 위탁되어 있다. 27. 격치성정(格致誠正) 대학에 나오는 말로 ‘사물을 연구해서 깨달음에 이르고 진실되게 판단해서 정확하게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고사성어다. 28. 위도정신(衛道精神) 안동교박사의 논문 ‘姜沆의 衛道정신과 일본에서 유학전수’ 의 제목에도 인용했던 말로 도학 즉 도를 실천하려는 정신세계를 총칭한다. 29. 도의실천(道義実践) 사람이 이 지구상에서 마땅히 실천해야할 도리를 말한다. 30. 입효출제(入孝出悌) '집에 들어와서는 효도, 밖에 나가서는 공손!' 子曰: "弟子, 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而親仁. 行有餘力...에서 나온 말이다. 31. 하학상달(下學上達) 낮고 쉬운 것을 배워 깊고 어려운 것을 깨닭게된다는 사자성어다. 32. 삼경추풍야유상(三徑秋風夜有霜) 삼경(은자가 사는 곳을 말하며 한(漢)나라의 은자 장후(蔣詡)가 정원에 세 개의 좁은 길을 내고 소나무, 대나무, 국화를 심었다는 데서 유래함.)에 부는 가을바람 밤에 서리 내리네...!! 왜국에서 피눈물로 쓴 시제목이다. 33. 거목산하이석시(擧目山河異昔時) ‘불현 듯 눈을 떠 산하를 바라보니 시간의 흐름으로 그 사이 모든 것이 변했다’는 당시 상황을 표현한 글이다. 강항(姜沆)은 술 한 잔에 그동안의 갖은 고초와 한거번의 모든 슬픔이 복 받쳐 올라와 이때의 심정을 시 한 수로 남겼다, 거목산하이석시(擧目山河異昔時)  신정유작초수비(新亭猶作楚囚悲) 여금고회문하지(如今高會問何地)  산시애탕하정치(山是愛湯河亭治) 34. 안능각역혼우양(安能胳域混牛羊) 어찌타 짐승 놈들과 섞일 수가 있느냐!<이 부분의 시구(詩句)로 인해 국민가수 조용필은 1980년대 간양록을 불러 국민들에게 애국애족정신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35. 세수광영초심황(世守光塋草心荒) 간양록 노래가사에 나오는 구절로 ‘선영 뒤 산에 잡초는 누가 뜯고’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다. 36. 춘방동도한방장(春方東到恨方長)  이엽(李曄)장군이 포로생활 속에서 남긴 절귀(絶句)시로 ‘봄은 동녘에서 오는가 한 많은 봄이로다. ’ 내용이다. 37. 풍자서귀의자망(風自西歸意自忙) 이엽(李曄)장군이 포로생활 속에서 남긴 절귀(絶句)시로 바람 너는 서녘으로 가느냐 맘만 들떠 바쁘이.로 표현이다. 38. 정유재란 이엽장군(丁酉再亂 將軍李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엽장군을 정중하게 대하며 거처나 식사도 히데요시와 똑같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엽(李曄)장군은 그런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임진년의 포로들과 짜고 돈이며 비단 같은 것을 풀어 배 한척을 사들여 서쪽으로 도망쳐 아카마세키(赤間關 ․ 시모노세키)로 탈주했으며, 그 뒤를 추격자들이 쫓아왔다. 장군이 적간관(赤間關)까지 빠져 나가기는 했으나, 추격자들이 계속 쫓아왔으며,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안 이엽은 잡히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옳다 하고 칼로 자기 몸을 찌르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 추격자들은 그 사체를 끌어 올려 다른 자들과 함께 사지를 찢은 뒤 큰 길에 걸어놓았다. 39. 등사수간해상양(等死須看海上羊) 강항(姜沆)은 나가하마 뱃길에서 간양록(看羊錄)과 깊은 관계를 갖는 시 한 수를 지었는데 끝구절에 나오는 내용으로 ‘바닷가 양떼를 치나니 죽지 못해 사는 게야.’로 풀이한다. 40. 남아사방지(男兒四方志) 洪武丁巳奉使日本作(홍무정사봉사일본작)정몽주의 시귀로도 유명한 사내 대장부의 품은 큰 뜻을 말한다. 41. 회친첩망운(懷親輒望雲) ‘어버이가 그리우면 구름을 바라보나니.’의 내용으로 무안현(務安縣) 아전 서국(徐國)이 오즈를 떠나게 되어 여러 차례 와서 시를 청해 써 준거다. 42. 금장명랑락해동(錦張名郞落海東) 해동 곧 ‘조선이 여기든가 천리 밖 아득 한 곳’이라며 조국을 그리워 지은 시내용이다. 43. 당유비황반우공(倘有飛艎返寓公)  왜 숏세키사 가이케이노승과 시를 주고 받으면서  고국에 가고자하는 마음을 담은 시로 ‘만일, 하늘을 나는 배가 있다면 나를 보내다오’로 해석한다. 44. 순수좌 후지와라 세이카(舜首座 藤原惺窩) 왜승으로 본명은 순수좌로 수은선생 글에 탄복을 하고 제자로 읍소를 청해 제자로 맞이하게 되며 순수좌는 45번의 惺과 46번의 窩자로 아호를 지어줘 후지와라세이카가 되며 ‘일본유교의 계승자’로 불리운다. 45. 성재기(惺齋記) 수은선생이 순수좌에게 지어준 일본유교에 대한 글 서문이다. 46. 시상와기(是尚窩記’) 수은선생이 순수좌에게 지어준 일본유교에 대한 글 종문이다. 47. 아카마쯔 히로미치(赤松廣通) 후지와라 세이카의 수제자로 수은선생을 ‘항상 안녕하십니까’로 인사하면서 유교의 생활화를 재현해 실천했다. 48. 수은강항선생일본연구회 무라까미쓰네오회장(睡隱姜沆先生日本硏究會 村上恒夫會長) 일본 에이메현 오즈시에 거주하면서 오즈시청의 서기관시절 55세의 나이에 퇴직하고 나서 수은선생에 대한 연구로 심취합니다. 일본인으로서 유일하게 일본 유교에 대한 진실을 파헤치고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420년전의 역사를 현실로 확인한 사람이다. 49. 종오소호(從吾所好) 무라까미쓰네오회장이 50세 무렵 수은선생을 알게한 현판으로 지금도 소장하고 있습니다. 대학편에 나온 말로 2500년 전 공자는 끊임없이 실패를 맛보며 곤경에 처했다. 이렇게 거듭 시대와 불화에 휩싸이면 문학작품에 나오듯 악마와 손을 잡고 역전을 꿈꾸거나 현실의 요구에 굴복할 수 있다. 공자는 떠밀린 삶을 살며 때때로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렸지만, 그때마다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다. 공자는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자신이 좋아하고 의미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이렇듯 꿋꿋하게 자기 자신을 지키면서 정신만은 항상 바른길로 가고자했던 정신이다. 50.격물치지(格物致知) 중국 사서의 하나인 《대학》에 나오는 말인데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8조목으로 된 내용들로 ‘사물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여(격물) 지식을 넓히는 것’을 말한다.  이상 '수은선생관련 고사성어 50선' 으로 경자년 새해에 일본에서 전시회를 갖고자 한다. 그렇다면 '은혜'를 모르고 회괴한 논리로 '약속'을 강조하면서 '약속'을 안지킨다고 '약속'만 강조하는 아베정권에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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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20-01-01 / 뉴스공유일 : 2020-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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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21일 서울대학교는 성정장학금 폐지 관련 설명회를 통해 ‘성적장학금을 폐지하고 소득 하위 20%인 가정의 학생들에게 등록금을 전액 지원하는’ 개편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서울대 학생사회가 이에 반발하자 서울대 학생자치기구는 장학제도 개편 대응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개편안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서울대 학생자치기구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490명 중 약 440명(90%)가 성적장학금 폐지안에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서울대는 학생자치기구 임원들과 새로운 장학제도 개편안에 대해 논의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가정형편과 성적을 절충한 개편안을 논의 중인 것으로 일부 언론은 보도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학벌주의는 고소득층을 비롯한 상위계층이 교육을 통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세습하고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해왔다. 그 과정에서 불평등 해소와 학문의 사회적 책임, 개인의 자아실현과 같은 교육 본래의 목표는 사라져버렸다. 특히 소득에 따른 교육불평등은 최근 들어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로 자주 지목되고 있다.    2018년 10월 29일 김해영 국회의원실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8년 1학기 국가장학금을 신청한 학생 중 소득상위계층(9,10구간)은 전국평균 25%, 서울대 48%로 큰 격차를 보였다. 2017년 5월 28일 김병욱 국회의원실에서 발표한 자료에서는 2016년 1학기 서울대는 국가장학금 신청자가 가장 적은 4년제 대학으로 조사되었다.   ○ 이에 반해 재정지원은 서울대에 집중되고 있다. 대학알리미에 공시된 ‘재정지원사업 수혜실적’에 따르면 2018년 한 해 동안 중앙정부와 지자체로부터 총 5403억 685만 16원을 지원받은 서울대가 가장 많은 지원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두 번째인 연세대(3316억3492만9464원)에 비해서도 압도적인 수치이다. 결국 가장 많은 고소득층 대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에 가장 많은 재정지원금이 투입되고 있는 것이다.   완전한 무상 등록금과 대학서열 철폐 등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교육불평등은 지속적으로 심화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존 장학제도의 개편만으로도 의미 있는 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미 일부 대학에서는 성적장학금을 폐지하고 저소득층 대학생에 대한 지원을 중심으로 장학제도를 개편하기도 했다. 서울대 또한 이러한 교육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차원에서 성적장학금 폐지를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장학금과 같은 교육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 왜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성적을 기준으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은 개별 대학생의 학업에 대해 왜 국가와 사회가 공공재정을 투입해 지원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이 부족한 의견이다. 더 나아가 일부 대학에서 국가의 재정지원을 독점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일인가에 대해서도 반성이 필요하다.   서울대의 학생운동은 민주화 운동과 사회불평등 해소에 앞장서왔다. 이러한 도덕적 정당성으로 인해 사회운동 또한 학벌주의에 기반하여 발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9년 서울대 학생사회는 자신들이 발딛고 서있는 기득권을 망각한 채 불평등 해소를 위한 조치를 가로막았다.   학벌없는사회를 위한 시민모임은 이번 서울대학교의 성적장학금 폐지가 절충안으로 후퇴한 것에 대해 서울대 학생사회를 비판한다. 서울대의 학생자치는 학벌주의를 대변하는 이권집단으로 전락했으며 이제 한국사회는 이러한 집단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공성과 불평등 해소를 기준으로 교육을 개혁해야 한다. 학벌없는사회를위한 시민모임은 이를 위해 학벌주의에서 배제된 시민들의 운동을 조직하고 투쟁해나갈 것이다. 출처 : 학벌없는사회를 위한 시민모임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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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12-25 / 뉴스공유일 : 2019-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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