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뉴스

생활/문화/문학/칼럼

건의 공유뉴스가 있습니다.

생활/문화 > 문학 > 칼럼

강진 백련사에서 능선 하나를 넘으면 다산(茶山)이라는 작은 산이 있다. 야생차가 자라는 산이라 하여 다산(茶山)이라고 했는데,   정식 명칭은 만덕산(萬德山)이고 높이가 412미터이다. 이 산 밑에는 귤동(橘洞)마을이 있다. 가을이면 유자가 노랗게 익어가는 마을이라서 붙여진 이름인데 귤동은 해남윤씨 집성촌이었다. 여기엔 윤단(1744∽1821)의 초당인  다산초당이 있었다.   1808년 3월16일에 정약용은 다산초당에서 놀았다. 7언 율시 두수가 전해진다. 시의 제목부터 살펴보자.      삼월 십육일 윤문거의 다산서옥(茶山書屋)에서 놀았는데 공윤도 병을 치료하며 거기에 있었다. 어찌 하다 보니 열흘이 넘게 그곳에서 묵고 있었는데 점차 이렇게 일생을 마쳤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이 두 수를 읊어 공윤에게 보였다.  윤문거는  귤림처사 윤단의 큰 아들 윤규노(1769∽1837)이다. 윤단은  다산의 외가인 해남 윤씨로  행당 윤복(1512∽1577)의 후손이다. 윤효정의 아들인 윤복은 안동 대도호부사 시절에 퇴계 이황(1501∽1570)과 교류했다. 정약용은 다산초당을 다산서옥이라고 칭했다. 아마도 초당에 책들이 있었나 보다. 한편 공윤은 자화상으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1668∽1715)가 고조부인 윤종하이다. 다산의 외증조부가 공재이니 정약용과 윤종하는 친척 간이었다.  다산이 쓴 ‘또 공윤에게 주다[又贈公潤]’ 시의 첫 머리에 나온다.  나로서는 증외조부가 그대로선 바로 고조부이시지 그러면 정약용이 1808년 3월16일에 지은 시를 읽어보자. 1수 사는 곳 일정치 않게 안개 노을 따라다니는 몸    더구나  다산이야 골짜기 마다 차나무로다.          하늘 멀리 바닷가 섬엔 수시로 돛이 뜨고         봄이 깊은 담장  안에는 여기저기 꽃이로세.      싱싱한 새우무침 병 앓는 자 입에 맞고            연못과 누각 초라해도 이만하면 살만하지          흡족한 마음에도 근심은 있지만 내 분수엔 넘치니       여기서 노닐며 서울 사람에게는 자랑하지 않으리.     2수 숲이 짙고 산이 깊어 몸놀림이 느긋하고     조용하게 감상하는 맛 떠드는 곳에 댈 것인가  조수는 봄빛처럼 왔다가는 다시 가고         꽃은 나라 권세같이 성했다가 곧 시들지.    송시(宋詩)를 슬슬 보며 골라볼까 생각하고     조용히 주역 들고 이 마음 의탁한다네.   단 한 가지 두고두고 서글프게 만든 것은   연못에 가득 푸르게 연을 심지 않은 것이네.  정약용은 다산초당(茶山草堂)에서 열흘 넘게 윤종하와 함께 묵었다. 그동안 다산은  동문 밖 주막집과 보은 산방 그리고 제자 이청의 집을 전전하던 터라 이곳이 너무 좋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윤규노에게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뜻을 비치었다. 윤규노는 부친 윤단과 상의하여 정약용에게 초당에서 지내라고 하였다. 그 대신 윤단의 손자들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그런지 다산이  다산초당에서 가르친 18제자 중에 윤단의 손자가 6명이나 된다.  1808년 4월 초에 정약용은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며칠 안 되어서 정약용은 5언 절구(絶句) 한 수를 지었다.    적막한 숲 속의 집이요                寂歷林中屋 졸졸졸 베개 아래 샘물 소리네         琮琤枕下泉 이틀 사흘 지나고 났더니              已經三兩日 귀에 익어 잠자는 데 방해가 안 되네.  聽慣不妨眠 샘물 소리도 잠결에 들리는 적막한 숲속의 집. 시중유화(詩中有畵)다. 다산초당으로 옮긴지 20여일 지난 4월20일에 다산의 둘째 아들 학포 정학유(1786∽1855)가 찾아왔다. 큰아들 학연(1783∽1859)은 1802년에 찾아왔지만 학유는 팔 년 만에 처음 온 것이다.    사월 이십일 학포가 왔다. 8년 만 에 만났다. [四月二十日學圃至 相別已八周矣] 얼굴 생김새는 내 자식 같은데          眉目如吾子 수염이 자라서 딴사람 같구나.          鬚髥似別人 집안 편지 가지고 왔건만               家書雖帶至 틀림없는 내 아들인지 잘 모르겠네.     猶未十分眞 둘째 아들 정학유와는 16세 때 헤어져 24세에 만났으니 처음에는 아들인가 알아보기도 어려웠다는 다산의 시는 눈물겹다. 5월11일에 다산은 윤문거와 아들 학유과 함께 용혈로 뱃놀이를 하면서 모처럼 휴식을 즐겼다. 사진 1  다산 초당 (출처 : 강진군청 홈페이지)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http://edaynews.com [ repoter : 김세곤 ]

뉴스등록일 : 2019-11-17 / 뉴스공유일 : 2019-11-17

무료유료 FREE

신고하기 공유받기O 신고하기

1

생활/문화 > 문학 > 칼럼

충청도사 김일손의 상소는 이어진다. (연산군일기 1495년 5월28일자) “신이 듣기로는 ‘재앙은 무단히 생기는 것이 아니요, 허물은 반드시 돌아가는 데가 있다.’ 하옵는데, 신이 충청도 한 도에만 매여 있어서 사방의 재앙을 알지 못하오나, 한 도를 가지고 보더라도 몇 달 동안에 재앙이 매우 심하였습니다. 지난 12월 27일에 서산(瑞山) 등지에 지진이 있었는데, 전하께서 상주(喪主)가 되신 뒤의 일입니다. 올해 정월 18일에는 한산(韓山) 등지에 지진이 있었고, 2월 초하루에 3분의 1이나 먹은 일식이 있었으며, 2월7일에는 대낮에 별이 떨어졌으니, 괴이함이 매우 심합니다. 옛날 위상(魏相)이 한(漢)나라 정승이 되고, 이항(李沆)이 송(宋)나라 정승이 되어, 날마다 사방의 재변을 임금에게 아뢰었으니, 오늘날의 위상과 이항의 직책을 맡은 자가 능히 위상·이항의 마음을 간직하여 위상·이항처럼 사방에서 일어나는 재변을 전하에게 아뢰고 경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나라 정승 위상(魏相 미상~BC 59)은 젊어서 『주역』을 배우고, 군졸사(郡卒史)가 되었다. 소제(昭帝) 때 현량(賢良)으로 천거되어 대책(對策)이 좋은 평가를 받아 무릉령(茂陵令)이 되었는데 잘 다스렸다. 나중에 하남태수(河南太守)로 옮기자 지방의 호족들이 두려워했다. 선제(宣帝)가 즉위하자 대사농(大司農)에 임명되고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옮겼다. 대장군 곽광(霍光)이 죽자 그의 아들 곽우(霍禹)가 대장군이 되고, 형의 아들 곽산(霍山)이 영상서사(領尙書事)이 되어 권력이 집중되면서 횡포를 부렸다. 이에 그가 곽씨의 권한을 약화시킬 것을 건의하니 황제가 좋게 여겼다. 지절(地節) 3년(기원전 67) 위현(韋賢)을 대신해 승상이 되고, 고평후(高平侯)에 봉해졌다. 일찍이 선제가 경솔하게 출병하여 흉노(匈奴)를 공격했다고 충고했다. 또 한나라가 흥성한 이래 국가에 유익한 행사와 명신들이 말한 바를 조리 있게 아뢰어 선조(先朝)를 본받을 것을 건의했다. 대개 이런 건의는 받아들여졌다. 음양(陰陽)을 모든 일의 근본이라 생각했으며, 정치도 음양에 따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송의 재상 이항(李沆 947~ 1004)은 980년에 진사에 급제하고 우찬선(右贊善, 찬선은 왕세자의 교육을 맡던 관직)대부와 저작랑(著作郞, 국사편찬 담당 관직)을 역임했다. 986년에 우보궐(右補闕, 보궐은 황제 휘하의 사간원), 지제고(知制誥, 국왕의 교서 작성 직) 등을 맡았다. 991년 이항은 태종을 섬겨 강연에 참여했는데, 태종은 그를 보고 “품격 있고 단정하며 장중한 사람이다. 명백하게 존귀한 사람이다”라고 했다. 992년에는 참지정사(參知政事, 송나라의 재상 다음 가는 벼슬)에 임명되었고 993년에는 허난(河南)지부(知府, 행정수장)를 지냈다. 태종이 아들 조항(훗날의 진종)을 황태자로 삼으면서 이항을 예부(禮部) 시랑으로 임명했다. 진종이 즉위하자 그는 직접 북벌에 나서면서 이항에게 수도에 남아서 지키도록 했다. 진종이 돌아오자 이항은 교외에서 그를 맞이했고, 진종은 그를 위로하며 문하(門下)시랑과 상서우복야(尙書右仆射, 상서성의 정2품 벼슬) 관직을 주었다. 진종은 자신이 채택한 치국 방법이 적합한지 이항에게 자주 의견을 구했다. 이항은 “겉치레만 있는 경박한 사람들을 임용하지 않는 것이 제일 먼저 할 일입니다”라고 했다. 진종은 그게 누구냐고 물었고, 이항은 매순(梅詢), 증치요(曾致堯) 등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나중에 증치요가 온중서를 보좌하여 산시(陝西)성을 관리하게 되었다. 이항이 지칭한 경박한 무리들은 이 일을 보고 모두 쾌재를 불렀고, 이항은 매우 언짢아하며 증치요를 파면하고  다른 사람을 온중서의 보좌관으로 천거했다. 진종은 간신들이 당파를 결탁하여 통제하기 어렵고 왕실이 쇠락해가니 간사한 자를 구별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항은 “아첨하는 사람들의 말이 충심인 듯하고, 간교한 자들의 말이 믿을 만한 듯이 느껴지지만, 이는 당나라 재상 노기가 덕종을 속이고 기만한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진종은 “간사한 자들을 말로는 판별하기 어렵지만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발각될 것이다”라고 답했다. 1004년에 이항은 병을 얻었다. 진종은 어의를 보내 진찰하도록 하고, 직접 찾아가 안부를 묻기도 했다. 그러나 이항은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일손의 상소는 이어진다. “만약 천도(天道)가 아득하여 재앙과 허물을 추측하기 어렵다 해서 스스로 경계하여 반성하지 않는다면 전하와 여러 신하들의 복이 아닙니다. 신이 영춘현(永春縣)에 떨어진 이물(異物)을 보았는데, 세상에 장화(張華)가 없으니 누가 그 괴이한 것을 분변하겠습니까. 신이 듣자오니, 조정에서 쪼개어 보고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고 의심한다 하는데, 신의 생각에는 돌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나 별이 떨어지면 돌이 되는 것이니, 이것 또한 공중에서 변화된 것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신이 감히 당장에 어떤 사건을 지적해서 그 재변에 해당된다고 증거 댈 수는 없사오나, 전하께서는 마땅히 몸을 되돌아보고 마음에서 찾아서 경계하고 삼가고 두렵게 여겨, 하늘의 꾸지람에 답하여야 할 때입니다. 하늘이 전하에게 임(臨)한 것이 바로 전하께서 여러 신하에 임한 것과 같아서, 전하께서 여러 신하에 경계하는 데는 형벌이 있고, 하늘이 전하를 경계하는 데에는 재변이 있으니, 그 일은 다르나 이치는 같습니다.” 김일손은 재변이 일어나면 하늘의 꾸지람으로 생각하고 임금이 삼가고 두려워해야 한다고 상소했다. 두려워 할 줄 알면 흥하고,  자화자찬, 자만하면 망한다.   사진 1 자계서원 (경북 청도군) 사진 2 보인당 (자계서원의 강당)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http://edaynews.com [ repoter : 김세곤 ]

뉴스등록일 : 2019-11-11 / 뉴스공유일 : 2019-11-11

무료유료 FREE

신고하기 공유받기O 신고하기

1

생활/문화 > 문학 > 칼럼

다산 정약용(1762∼1836)은 1801년 11월 하순에 강진에 유배 와서 1818년 여름에 고향인 남양주시 마재 마을로 돌아갔다. 40세에서 57세에 이르는 시기였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불행이었지만 조선의 학문을 위해서는 축복의 시간이었다. 강진 유배 시 다산학단으로 일컬어지는 제자들을 길렀고, 500여권에 이르는 책을 저술했다. 특히 경세유표와 목민심서는 강진에서의 다산의 가장 큰 업적이다.    한편 다산은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정하기 까지 세 번 거처를 옮겼다. 1801년 11월23일경 유배객 정약용을 모른 척한 상태에서 고맙게도 동문 밖 주막집  노파의 배려로 정약용은 주막집 토담 방에서 기거하였고, 그곳이 사의재였다. 1805년 겨울에는 백련사 주지 혜장선사(1772∼1811)의 도움으로 큰 아들과 정학연과 함께 보은산방에서 머물렀다. 다산은 아들 학연이 서울로 올라가자 다시 사의재로 내려가 지냈다. 1806년 가을부터는 제자 이청의 집에서 살았다. 이 시기에 다산은 혜장선사와 자주 어울렸다.  정약용은 1805년 4월18일에 강진군 도암면 백련사에 나들이 하다가  백련사 주지 혜장선사(1772∼1811)를 처음 만났다. 그는 다산 보다 10살 어린 학승이었다. 혜장은 처음에는 정약용을 알아보지 못하고 한나절 대화를 나누었는데, 늦게야 알아보고 같이 잠을 잤다. 그날 밤 다산과 혜장은 주역을 논했는데 혜장은 다산 앞에서 자기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다가 다산의 ‘곤초육수(坤初六數)’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이기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 뒤로 혜장은 다산을 스승으로 극진히 모시면서 정성을 다했다. 1805년 겨울에 다산이 보은산방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 것도 혜장이 도운 것이다. 다산과 혜장은 자주 어울렸고, 둘 사이의 정은 더욱 깊어만 같다. 다산이 1806년 3월에 지은 시가 이를 말해준다. “삼경에 비가 내려 나뭇잎 때리더니  숲을 뚫고 횃불이 하나 왔다오.  혜장과는 참으로 연분이 있는 지  절간 문을 밤 깊도록 열어 놓았다네.” (산으로 가자꾸나. <山行雜謳> 20수 중 제15수) 1807년 봄에 지은 ‘혜장이 오다’란 시도 읽어보자 혜장이 오다 [惠藏至]  굳건하고 어질고 호탕한 사람    때로는 표연히 산을 나선다네.    눈 녹아 비탈길은 미끄럽고       모래 둘러싸여 들 집이 움푹하네.   얼굴에는 산중의 즐거움 가득하고   세월 따라 변하는 몸 마음 안 쓴다네.  말세 인심 대개가 비루하고 야박한데    지금 이렇게 진실 솔직한 자도 있다네. 인심이 비루하고 야박한데 선승 혜장만은 매우 진실하고 솔직하다. 이런 혜장이 정약용은  너무 좋았다.  1807년 4월에 정약용은 “사월 초하룻날 혜장이 와서 함께 백련사에 가서 놀고 싶어 했는데 제반 준비물 때문에 그만두기로 하고 허전한 마음이 들어 이렇게 읊었다”란 시를 지었다.     부드러운 술과  향기로운 안주로  하룻밤을 놀려고  했더니 녹음 덮인 관도(官道)에 갈 길이 멀고머네. 이틀 뒤인 4월3일에 정약용은 혜장이 주지인 백련사에서 놀았다. “사월 삼일 백련사에서 놀다”란 시를 음미해보자.   앓고 일어나 가볍게 차리고 새벽 노을  헤치면서    말을 타고 모래밭 가 어부 집을 지나가네.        밀물 때라 들판에도  잔물결이 일고 있고          봄은 갔어도 산에는 아직도 때 늦은 꽃이 있네.      시를 보면 제자 이청 집에서 기거하고 있는 다산은 앓다 일어나  말을 타고 백련사로 갔나 보다.   폐물이기에 남이 다 버려도 달게 여긴 지 오래이나  청광(淸狂)만은 세상에다 내놓고 자랑하네.            구름 시내 한 굽이를 간신히 지나치고              지팡이 짚고 누대 오르니 석양 이전이네.            청광은 그 뜻이 ‘마음이 깨끗하여 청아한 맛이 있으면서도 그 하는 짓이 상규에 어긋나다’이다. 청광한 선비는 정약용 자신일까? 사진 1. 백련사 (출처 : 강진군청 홈페이지) 사진 2. 백련사 대웅보전  (출처 : 강진군청 홈페이지)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http://edaynews.com [ repoter : 김세곤 ]

뉴스등록일 : 2019-11-10 / 뉴스공유일 : 2019-11-10

무료유료 FREE

신고하기 공유받기O 신고하기

1

생활/문화 > 문학 > 칼럼

6일 내산서원의 추향(秋享)제에 따른 자유학기제 수업을 제안하기 위해 공문을 들고 영광공업고등학교를 찾아 가 조병수 교감선생님과 역사담당 선생님 그리고 강대열 수석교사를 만났다.   모두 이 지역출신으로 선입관(先入觀)이 없어서 편했고 더 나아가 거리감이 없어 격의 없이 인사를 나누며 편하게 대화를 가졌다.   사실 아무리 어려운 일에 봉착하더라도 이런 마음가짐을 갖고 서로를 배려하고 살피면서 사회생활을 한다면 그게 걸쭉한 인성(人性)교육 차원이 될 것이라고 불현 듯 생각해 본다. 다산 정약용선생의 사상을 조금만 들여다 보면 답이 나온다.  수은선생의 일본에서 간난신고를 거치면서 불굴의 투지로 쓴 적중봉소나 간양록을 참고로 해 일본을 해부하고 그를 토대로 실학사상을 부단히 연구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다산선생의 시대는 정치적으로 폐단이 많았고 특히 지방관리들의 부패가 심했는데. 그들의 부패를 지적하고 그들의 임무를 알려주고 일깨워주는 목민심서라는 책과 경세유표라는 책을 지었다. 또한 형법. 즉 범죄인을 다스리는 흠흠신서도 참고해 볼만하다. 이처럼 사회질서는 첫째가 명분이고 둘째도 명분이다. 조그마한 아집이 문제를 키우고 거리감을 갖게하고 질서를 교란한다. 이러한 사회질서는 인성교육에서 출발이 된다. 조금이라도 지나침이 있게 되면 불편하고 부당하겠지만 학생을 먼저 생각하고 학교를 생각하고 지역을 생각한다면 쉽게 답은 나온다.   현암(玄庵) 이을호 박사 배웅 나오던 강수석교사가 먼저 안내를 하면서 보여준 곳이 있었다. ‘영광 중등교육 발원지’ 표비석이 세워져 있는 곳이었다.   현암 선생의 수은선생에 대한 연구는 심오한 깊이의 인연으로 생각한다. 어쩌면 책 한 권인 간양록(건거록)의 운명같은 인연일 수도 있고 한국전쟁의 모진 시대상(時代相)에서 출발이 기인(基因)될 수도 있다.   그러나 후대로 가면서 생각하는 게 앞에서 밝힌바와 같이 “사실 아무리 어려운 일에 봉착하더라도 서로를 배려하고 살피면서 살아간다면 그게 걸쭉한 인성(人性)교육으로 인간다움이 될 것”이라는 변치 않는 생각이다.   ‘영광 중등교육 발원지’ 기념비를 보고 쉽게 흥분을 멈출 수 없었다. 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에서나 영광내산서원보존회에서 매년 나오는 말이 현암 선생에 대한 의견이 꼭 도출(導出)되었다.   특히 영광읍 우산공원에 건립된 표지석에 대해 내산서원 경내를 조성해 추가 건립 또는 옮겨오는 방법을 놓고 의견이 분분했던 것도 사실이다.   흥분을 가라앉히면서 천천히 전후측면을 살피고는 전면의 글을 읽어봤다. “1945년 조국의 광복과 함께 이 고장 정주연학(硏學)회를 발족하고 영광민립고등중학교와 영광민립여자고등중학교를 개교하였다. 이 교정에 자리했던 민립고등중학교는 영광중학교와 영광고등학교로 성장하고 고등학교는 종합고 실업고 공업고등학교로 발전하였다. 한편 민립여자고등중학교는 영광여자중학교와 여자고등학교로 이어졌다. 민립학교를 건립할 때 이을호(현암(玄庵)1910~1998)는 전답 9만 여 평과 벼 1천섬을 출연하여 학교를 열게 하였고 1969년에도 논밭과 임야 6천 여 평을 기증하여 후세교육을 보살핀 학자로서 ‘현암 이을호 전서’ 27책을 남겼는데 현암길은 선생을 추앙 한 것이다. 이 교정은 영광의 현대중등교육이 발원한 유서 깊은 곳이다. 이제 우리는 선현들의 높은 뜻을 기리고 미래 문화의 창달에 힘써야 할 것이다.“   현암 선생과 내산서원 1952년 현암 이을호(李乙浩)의 한글 역 초판 『간양록』이 간행되었다. 1983년 癸亥(계해) 五月(오월) 國立光州博物館長(국립광주박물관장) 哲學博士(철학박사) 李乙浩(이을호) 謹撰(근찬) 향토문화개발협의회장 鄭埰均(정채균) 謹書(근서) 睡隱姜沆先生記念事業會(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 謹竪(근수) 睡隱姜沆先生記念事業會(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창립한 이후 영광내산서원보존회 창립해 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와 내산서원 성역화사업에 전력을 다 하시었다.   더 나아가 전남영광지역에 ‘중등교육’의 씨를 뿌린 현암 선생의 뜻을 기리는 기념비가 영광교육지원청과 영광공업고등학교는 지난 10월 28일 오후 영광공고 교정에서 ‘영광 중등교육발원지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던 것이다.   제막식에는 이개호 국회의원, 김준성 영광군수, 강필구 영광군의회 의장을 비롯한 군의원, 교육관계자들과 현암선생의 장남인 이원태 금호아시아나그룹 부회장을 비롯한 당시 민립학교 교직원 유족들이 참석했다고 강 수석교사는 전했다.   현암 선생은 ‘간양록 및 강감회요’를 비롯해 수은 선생의 저서와 문집 등 ‘일본 유교의 비조’ 연구에 그치지 않고 현암이 독보적으로 남긴 현암 이을호 전서’는 현암의 학문적 업적을 후학들이 집대성한 것으로, ‘다산 경학사상 연구’ 등 다산 정약용선생의 연구서부터 ’목민심서‘‘한글 논어’‘사상의학원론’ 등 고전 번역서까지 저서와 역서를 총망라했다는 평가로 현암은 근현대사의 격변 속에서 민족이 나아갈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결어> 이 지역을 떠나 ‘한국학의 아버지’인 현암 선생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에 대한 업적을 면밀히 살펴보고 수은선생의 제자인 동토 윤순거선생을 기리듯 선양사업의 맥락을 함께 진행해야한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경찰서장이 앞장서서 ‘일본을 개나 돼지보다 못한 족속으로 비하했다’는 이유만으로 수은선생의 문집 등이 모두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맞이할 때 일부 종친들이 온몸으로 지켜내기도 했지만(80여점의 유물을 호남진흥원에 위탁중임)현암선생이 앞장서서 수은선생의 선양사업을 불씨를 다시 지핀데에 대한 학술대회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수은선생의 말씀처럼 유성약천성부(幼成若天性賦)의 정신으로 성선설(性善說)의 원칙에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았으면 그 은혜를 아는 인간이 되고자하는 모습이 보인다는 것은 아름다운 미풍양속(美風良俗)이 되고 남음이리라.   <현암 이을호선생의 약력 소개> 전남 영광 출생, 중앙고보를 거쳐 서울약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중앙고보 때, 東武 李濟馬의 제자로 부터 사상한의학을 공부하고 [동의수세보원]을 번역하여 최초로 사상한의학설을 체계화시켰다. 24세에 영광에서 한약국을 운영하면서 「조선일보」와 [동양의학] 논문집에 의학 및 약학에 관한 많은 논문을 발표하고 민족운동에 투신하여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27세에 영광체육단 사건으로 체포되어 독립운동을 주동한 혐의로 2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서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를 접하고 한국실학사상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 39세에 광주의과대학 부속병원 약국장에 취임하였다. 49세에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후학을 양성하면서 정약용 연구에 전념하여 다산학을 체계화시켰다. 58세에 서울대학교에서 「다산경학사상연구」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한국학 연구에 독보적 업적을 남겼다. 정년퇴임 후, 광주박물관장에 취임하고 호남의 유물, 유적을 발굴하여 호남의 사상과 문화를 새롭게 정립하였다. 학계에서는 선생을 ‘한국학의 아버지’로 부른다. 저서로는 [이을호 전서] 24권 9책이 전한다.  

http://edaynews.com [ repoter : 강대의 ]

뉴스등록일 : 2019-11-06 / 뉴스공유일 : 2019-11-06

무료유료 FREE

신고하기 공유받기O 신고하기

1

생활/문화 > 문학 > 칼럼

제천현감 권경유를 만나고 경상도 청도군으로 귀향한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은 고향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1495년 5월경에 김일손은 충청도 도사로 발령받았다. 이 때 그는 ‘시국에 관한 이익과 병폐 26개조’를 상소하였다. 1495년 5월28일자 ‘연산군일기’에 나온다. 그러면 여기에서 1464년부터 1495년까지 김일손의 행적부터 살펴보자. 김일손은 경상도 청도군에서 부친 김맹, 모친 용인이씨의 3남으로 태어났다. 1478년에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17세인 1480년 9월에 밀양에 가서 김종직 문하에 들어가 공부했다.  그는 1486년 10월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11월에 승문원 권지부정자에 제수되었고 12월에 정자 겸 춘추관 기사관이 되었다. 1487년 10월에는 노모 봉양을 위해 진주 목학의 교수로 부임했다가, 1489년 11월에 요동 질정관으로 중국 북경에 다녀왔다. 1490년 3월에 김일손은 승정원 주서 겸 예문관 검열에 제수되었고, 8월에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11월에는 진하사 서장관으로 연경에 가서 1491년 3월 중국에서 귀국하였다. 1491년 8월에 김일손은 병조좌랑·이조좌랑이 되었는데 10월에는 충청도사에 보임되었고, 1492년에는 홍문관 부교리에 직을 두고 호당에서 사가독서 했고, 1493년 1월에는 홍문관 교리로 승진했으며, 7월에는 예문과 응교로 직을 두고 사가독서 했다. 1494년 9월에는 이조정랑 겸 춘추관 시독관에 제수되었는데 12월24일에 성종이 승하하였다. 김일손은 1495년 2월에 사직하고 낙향했다가 5월에 충청도 도사로 근무하였다.   이제 김일손의 ‘시국에 관한 이익과 병폐 26조목’ 상소문을 읽어보자 (연산군일기 1495년(연산 1년) 5월 28일 5번 째 기사)     충청도 도사(忠淸道 都事) 김일손(金馹孫)이 상소하기를, "신이 금년 2월 5일에 의정부 사인사(議政府 舍人司)에서 전지를 받들어 신에게 이문(移文)한 것을 삼가 받자오니, ‘내가 덕이 없이 큰 자리를 이어받아서 애통한 상중(喪中)에 어찌할 바를 모르니, 가언(嘉言 아름답고 좋은 말)과  선정(善政)을 어찌 듣겠으며, 민간의 이익과 폐단되는 것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대소 신민(大小臣民)들로 하여금 내가 처음 즉위한 뒤에 여러 신하에게 묻는 뜻에 맞추어 각기 시국에 마땅한 것을 진술하여 실봉(實封)으로 올리라.’ 하셨으니, 신이 받들어 읽으매 눈물이 흘러서 말할 바를 알지 못하옵고, 곧 관내(管內) 54개 고을에 반포하였는데, 여태까지 한 사람도 봉장(封章)을 올리는 자가 없으니, 신은 실로 마음이 아픕니다. 온 나라 사람들이 조종(祖宗) 백 년 동안의 두터운 덕택 가운데서 살아왔고, 거듭 대행대왕(大行大王 성종) 26년 동안 교양하고 성취시킨 은혜를 입었는데, 하루아침에 전하의 애통하신 전지를 받고도 새 정치에 도움 될 한 마디 말도 하는 이가 없으니, 신이 실로 마음이 아픕니다.” 연산군이 전지를 보내 시국에 관하여 구언하라 해도 아무도 말하는 이가 없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신이 생각건대, 말하지 않는 자의 마음에는 반드시 ‘임금이 성스럽고 신하가 어질고 예(禮)와 법이 갖추어졌으므로 천한 사람의 말은 아뢸 필요가 없다.’ 하고, 또 반드시 ‘새 정치의 처음에 태학생(성균관 유생)을 물리쳤으니(필자 주 : 연산군이 수륙재를 반대한 성균관 유생들을 죄준 일), 충성스러운 말은 한갓 제 몸에 화가 돌아올 뿐이다.’ 하고, 또 반드시 즉위한 처음에 구언(求言)하는 것은 예사(例事)일 뿐이니, 말을 아뢰어도 반드시 쓰이지 않을 것이다.’ 할 것이니, 낮은 자는 죄를 받을까 겁내고, 높은 자는 이름을 얻으려 한다는 혐의를 피하는 것이 침묵하는 까닭입니다. 이와 같은 자는 제 몸을 위하여서는 옳으나,  품은 뜻이 있으면 반드시 모두 아뢰어 임금을 아끼고 나라에 충성하는 도리는  아닙니다. 김일손은 신하들이 침묵하는 이유를 상세히 밝히고 있다. 침묵은 금인가? 상소는 이어진다. “신이 선조(先祖 성종임금)에 벼슬하여 녹을 먹은 지가 10년이요, 벼슬이 5품 자리에 있어, 나라의 은혜는 이미 두터운데 하는 것 없이 지내 와서, 선왕께 한 말씀으로도 보답한 것이 없었는데, 이제 또 저의 몸만 삼가여 전하의 높은 뜻을 외롭게 한다면 신의 죄가 더욱 심할 것이거니와 평생에 배운 바를 어디에 쓰오리까. 신은 어리석은 자라도 천 가지 생각 중에 쓸 만한 것이 하나는 있다는 생각에서 상소문을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애통 박절한 심정으로 애통 박절한 전지를 받들매 마음이 격동되어서 모르는 사이에 말이 절로 법식에 벗어나오니, 전하께서 잘 살펴주시옵소서” 김일손은 상소를 올리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신이 듣기로는, 가언(嘉言 아름답고 좋은 말)은 마음을 바르게 하고(正心) 몸을 닦아서 (修身)하늘의 경계를 두려워하는 것만 한 것이 없고, 선정(善政)은 집안을 바로 잡아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만 한 것이 없다 하오니, 경연(經筵)에 일찍이 나가시는  것이 근본입니다. 민간의 이익과 병폐는 본디 아뢸 것이 많이 있으나, 조정의 이익과 병폐 또한 아뢸 것이 있사오니, 신이 낱낱이 진술하기를 아끼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가언·선정을 듣고자 하시어, 듣고 나서 뜻에 두지 않으신다면 듣는 보람이 없을 것이요, 민간의 이익과 병폐를 알고자 하시어, 알고 나서도 시행하지 않으신다면 아시는 보람이 없을 것이오니, 듣고서는 실천하고 알고서는 실행한다면 요(堯)·순(舜) 임금이 되기도 어렵지 않습니다. 요·순을 성인이라 하는 까닭은 자기를 버리고 남을 쫓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기 사사로운 뜻을 고집하여 아랫사람들에게 임(臨)하신다면, 가언·선정이 날마다 아뢰어지고 민간의 이익과 병폐가 날마다 들리더라도, 이것이 모두 나는 벌레 소리와 지나가는 까마귀 소리가 되어 부질없이 전하의 총명을 어지럽게 할 뿐입니다. 중국 요순임금이  자신을 버리고 남을 쫓았다는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나만 옳고, 당신은 틀렸다’는  아집은 성현의 길이 아니다.  사진 1  탁영(김일손의 호)  종택 안내판 사진 2  탁영 종택 정문 사진 3  탁영 종택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http://edaynews.com [ repoter : 김세곤 ]

뉴스등록일 : 2019-11-03 / 뉴스공유일 : 2019-11-03

무료유료 FREE

신고하기 공유받기O 신고하기

1

생활/문화 > 문학 > 칼럼

1808년에 정약용은 ‘호랑이 사냥[獵虎行]’시를 지었다. 정약용은 1808년 봄에 거처를 다산초당으로 옮겼는데, 이 시는 다산초당에서 지은 것 같다. 시에 ‘오월’이란 구절이 나온다.   오월이라 깊은 산 풀숲이 우거지면         五月山深暗草莽 호랑이가 새끼치고 젖을 먹여 기르는데     於菟穀子須湩乳   여우 토끼 다 잡아먹자 사람까지 해치려고   已空狐兎行搏人 산속 동굴 벗어나서 마을에 와서 설친 통에  離棄窟穴橫村塢   나뭇길도 다 끊기고 김매기도 하지 못해      樵蘇路絶藨哀停 산골 백성 대낮에도 방문 굳게 닫아 놓네.    山氓白日深閉戶   홀어미는 슬피 울며 칼로 찌를  생각하고   嫠婦悲啼思剚刃 장정들은 분에 차서 활 당길 모의하네.     勇夫發憤謀張弩   그 소식을 들은 사또 측은한 마음 들어     縣官聞之心惻然 졸개들을 동원하여 범사냥 독촉하였네      勅發小校催獵虎   몰이꾼 나타나자 온 마을이 깜짝 놀라      前驅鑱出一村驚 장정들은 도망가 숨고 늙은이만 붙들리네.  丁男走藏翁被虜   문에 당도한 졸개들 그 기세 무지개 같고    小校臨門氣如虹 호령하며 몽둥이질 빗발치듯 어지러워      嘍囉亂棓紛似雨 닭 삶고 돼지 잡고 온 마을이 야단법석      烹雞殺猪喧四隣 방아 찧고 자리 깔고 이리저리 분주한데.     舂糧設席走百堵   다투어 술 찾아 코 삐뚤어지게 퍼마시고는    討醉爭傾象鼻彎 군졸 모아 어지러이 계루고 악기 둥둥 치니   聚軍雜撾鷄婁鼓   이정은 머리 싸매고 전정은 넘어지고      里正縛頭田正踣 주먹질 발길질에 붉은 피 토하네.         拳飛踢落朱血吐   수령이 호랑이를 잡으라고 했는데 군졸들은 마을에 와서 거나하게 술판을 벌린다. 민원(民願) 해결 해준다고 하면서  민원(民怨)을 일으켰으니 전형적인 민폐(民弊)이다. 호랑이 가죽 들어오면 사또는 입 벌리고    斑皮入縣官啓齒 돈 한 푼 안 들이고 좋은 장사 잘했네.     不費一錢眞善賈   당초에 어떤 자가 호랑이 피해 신고했느냐     原初虎害誰入告 입빠른 것이 잘못이라 뭇사람의 노여움 사네.  巧舌喋喋受衆怒   맹호에게 다쳐보았자 한두 사람이 고작일 텐데  猛虎傷人止一二 어이하여 천백 명이 그 고통 받는단 말인가.   豈必千百罹此苦   차라리 호랑이 잡아달라고 신고 안 했으면 온 마을이 거덜 나지는 않았을 것인데. 피해 신고한 자가 도리어 마을 사람들의 노여움을 사고 있다.   홍농에서 강 건너 일 듣지 못했던가.      弘農渡河那得聞 홍농에서 강 건넌 일은 중국 진(晉)나라의 유곤이 홍농태수(弘農太守)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어, 호랑이가 새끼를 업고 태수를 피해 황하 강을  건너갔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태산에서 곡한 여자 그대는 보지 못했나.    泰山哭子君未覩 공자(孔子)가 태산(泰山) 옆을 지나가는데 어떤 여인이 무덤에서 슬피 울고 있었다. 공자는 수레 앞턱의 가로나무를 잡고 듣고 있다가 제자인 자로(子路)를 시켜 그 연유를 묻게 했다.   “부인이 우는 것이 심히 깊은 근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부인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 시아버지가 호랑이에게 죽었고, 남편이 또 호랑이에게 죽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들이 또 호랑이에게 죽었습니다.” 그러자 공자가 물었다. “그러면 왜 떠나지 않았습니까?” 부인이 대답했다. “태산에는 가혹한 정치(苛政)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공자가 제자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잘 기억해 두어라,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도 더 무섭다는 것을 (가정맹어호 苛政猛於虎)”    이 이야기는 《예기(禮記) 〈단궁(檀弓)〉》과  《공자가어(孔子家語) 〈정론해(正論解)〉》에 나온다. 예나 지금이나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도 더 무섭다.   선왕(先王)들은 사냥을 해도 때를 가려 했고        先王蒐獮各有時 여름철에는 모 잘 자라도록 군사훈련 아니했네.   夏月安苗非習武   시(時)도 때도 없이 백성을 괴롭히는 챙기는 관료들. 다산은 탄식만 나온다.     가증스런 관리들은 밤중에도 문 두드리니    生憎悍吏夜打門 호랑이 남겼다가 그들을  막았으면          願留餘虎以禦侮   왜 호랑이는 가증스런 관리들을 안 잡아가고 애꿎은 민초만 잡아가나?   세상이 정말 불공평하다. 사진 1  다산초당 편액  사진 2  바위에 새겨진 ‘정석’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http://edaynews.com [ repoter : 김세곤 ]

뉴스등록일 : 2019-11-03 / 뉴스공유일 : 2019-11-03

무료유료 FREE

신고하기 공유받기O 신고하기

1

생활/문화 > 문학 > 칼럼

전라도 강진에 귀양 온지 3년이 되는 1804년에 정약용은 ‘수심에 싸여(憂來)’ 시 12수를 지었다. 아직도 동문 밖 주막집 토담 방에서 지내던 시절이었다. 이 시는 당시 정약용의 삶과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시이다.    시를 읽어보자 1 어려서는 목표가 성인이었다가     弱齡思學聖 중년에 와 현자라도 바랐는데      中歲漸希賢 늘그막엔 우하(평범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달게 여기나  老去甘愚下 수심에 싸여 잠 못 이루네.        憂來不得眠 귀양살이 중 정약용의 속내가 잘 드러난다.   2 복희 시대에 살지 못하여     不生宓羲時 복희에게 물을 길이 없고     無由問宓羲 중니 시절에 태어나지 못해   不生仲尼世 중니에게도 물을 길이 없네   無由問仲尼 복희씨는 고대 중국의 전설상의 제왕이고, 중니는 중국 춘추시대에 살았던 공자이다.    그런데 원주에는 ‘이때 《주역(周易)》 전(箋)을 쓰고 있었다.’고 적혀 있다. 정약용은 1803년 겨울부터 주역을 읽기 시작하여 1804년 여름에 초고를 완성했다. 정약용이 주역을 공부하였다는 것은  같은 해에 쓴 시 ‘근심을 달래며’ 12수중 2수에도 나타나 있다. “천하의 책들을 모두 삼키고 마지막에 주역을 토해 내려 했는데 하늘이 그 인색함을 풀고자 하여 나에게 삼년 귀양 내리셨도다.”   3 한 알의 야광주가                      一顆夜光珠 우연히 외국 상인 배에 실렸다가        偶載賈胡舶 중간에 풍파를  만나 침몰되니          中洋遇風沈 만고에 그 빛을 다시는 볼 수 없네.      萬古光不白   훌륭한 인재가 널리 쓰이지  못하고 버려지는 것을 한탄하는 시이다. 그런데 야광주는 누구를 말할까?  4 입술 타고 입은 이미 말랐고      唇焦口旣乾 혀도 갈라지고 목도 다 쉬었네.   舌敝喉亦嗄 내 마음 아무도 아는 자 없고     無人解余意 너울너울 밤만 오려고 하네.       駸駸天欲夜 5 취하여 북산에 올라 통곡하니         醉登北山哭 통곡소리 하늘에 사무치건만          哭聲干蒼穹 옆 사람 그 속을 모르고서            傍人不解意 나더러 신세가 궁하여 운다고 하네.    謂我悲身窮 6 천 명이 술에 취해 떠드는 속에    酗誶千夫裏 선비 하나 의젓하게 있고 보면     端然一士莊 그 천 명 모두가 손가락질하며     千夫萬手指 그 한 선비 미쳤다고 한다네.      謂此一夫狂 이게 바로 정약용의 심사였다.  이 시는 강진군 사의재 팻말에 적혀 있다.  사진 1.  사의재에 있는 한시 팻말     7 어쩔 수 없이 늙고                    無可奈何老 어쩔 수 없이 죽지                    無可奈何死 한번 죽으면 다시 태어나지 못하는     一死不復生 인간 세상을 천상으로 여기다니        人間天上視 8 실날같이 어지러운 눈앞의 일들          紛綸眼前事 바르게 되는 일 하나도 없지만           無一不失當 바르게 정리할 길이 없기에              無緣得整頓 생각하면 혼자 가슴만 쓰릴 뿐이네       撫念徒自傷 9 마음이 육신의 노예 되었노라고         以心爲形役 도연명도 스스로 말한 바 있지만        淵明亦自言 백 번 싸워야 백 번 다 지니            百戰每百敗 이 몸은  왜 이리 멍청할까             自視何庸昏   도연명(365-427)은 ‘귀거래사’로 유명한 은거한 시인이다. 10 태양이 소리같이 빨리 질주하여     太陽疾飛靃 총알도 따르기 불가능하네.         銃丸不能追 그를 잡아맬 길이 없어             無緣得攀駐 그것을 생각하면 슬프기만 하네.    念此腸內悲 11 호랑이가 어린 양을 잡아먹고는          虎狼食羊羖 붉은 피가 입술에 낭자하건만            朱血膏吻唇 호랑이 위세가 이미 세워진지라            虎狼威旣立 여우와 토끼는  호랑이를 어질다 찬양하네.  狐兎贊其仁 호랑이는 봉건지배층, 어린 양은 힘없는 백성들, 여우와 토끼는 지배층에 빌붙어서 이익을 챙기는 아첨꾼들이다. 정약용은 우화로 세태를 비판하고 있다.        12 예쁘장하고 작은 복사나무        榮榮小桃樹 봄철이면 가지가지 꽃이지만      方春花滿枝 해 저물어 이리저리 꺾이고 나면  歲暮有摧折 쓸쓸하기 옛 몰골이 아니지       蕭蕭非故姿 혹시나 복사나무 몰골이 정약용 몰골이었을까?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http://edaynews.com [ repoter : 김세곤 ]

뉴스등록일 : 2019-10-27 / 뉴스공유일 : 2019-10-27

무료유료 FREE

신고하기 공유받기O 신고하기

1

생활/문화 > 문학 > 칼럼

제천현감 권경유의 상소를 계속 읽어보자 “신은 궁벽한 고을에 묻혀 있으나 떠도는 소문을 들으니, 성균관 유생이 소(疏)를 올려 재(齋)지내는 것에 대한 그름을 극구 논쟁하였다 하니, 신은 성균관에 사람이 있음을 기뻐하였으며, 성종 임금의 인재 교육이 거룩했다는 것을 다시금 인식하고, 하늘을 우러러 외치며 부르짖으매, 간담이 찢어지는 듯하였습니다. 이윽고 들으니, 유생들이 언어가 자못 불순하여 국가의 기휘에 범하였다 하여 생원 조유형등 20여 명이 과거 응시를 정지당하고 혹은 먼 지방으로 귀양 갔다 하기에, 신은 처음 들을 적에는 그럴 리가 있으랴 하고 의심하지 아니하다가, 두세 번을 듣게 되니 그 말을 믿으면서도 의심이 생깁니다. 유생의 말이 혹시 정도에 지나치다 하더라도 불도(佛道)를 배척하는 것은 유자(儒者)의 직분 안에 있는 일 이옵고, 언어가 정도에 지나친 것은 유생의 우직한 탓이오니, 말이 채택할 만한 것이면 채택하는 것이 옳고, 만약 불가한 것이라면 그대로 두면 그만인데, 어찌 조정에 간언을 하는 것으로 문책을 당하는 일이 있으리까. 유생들이 반드시 과격한 논의를 하였지만 어찌 딴 생각이 있었겠습니까. 어찌 성명(聖明)의 조정에서 언사(言事)로 문책을 입는 일이 있을 것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신이 성종의 조정에서 오래 경연을 모시면서 익히 보았습니다만, 대간·시종이 알고서는 말하지 않는 일이 없어 정도에 지나치는 논쟁을 마구 벌이며 위로 국가의 기휘에 저촉되는 일이라도 피하지 아니하고 기탄없이 말하되, 위에서는 죄를 가하지 아니하고 아래서도 숨지지 아니하였습니다. 대간·시종뿐만 아니라, 유생이 소를 올려 항쟁한 일도 역시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그 당시에 어찌 정도에 지나친 논이 위로 선조(先朝)에 저촉되고 아래로 천위(天威)에 범하는 일이 없었겠습니까마는, 대행 대왕께서는 말을 들으시면 곧 기뻐하시고 간언을 지체 없이 따르시며, 화평한 안색으로 대하시고 관대한 모습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녹(祿)에 연연하고 자기 몸만 보전하려는 사람들은 역린(逆鱗)하기가 어려워서 진언하지 못하는 일이 간혹 있었으므로 신은 일찍이 그 경우를 보고서 그 사람을 비루하게 여겼습니다. 역린(逆鱗)은 『한비자(韓非子)』에 나오는 글이다. "무릇 용(龍)이란 것은 목구멍 아래 한 자 길이의 역린(逆鱗)이 있는데 만약 사람이 건드리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살인한다. 임금도 역시 역린(逆鱗)이 있으니, 유세(遊說)하는 자가 임금의 역린을 건드리지 아니하면 거의 화가 없다." 하였다. 권경유의 상소는 이어진다. “전하께서 만약 언사가 기휘에 저촉되었다 하여 이 유생들을 죄주신다면, 다만 녹에 연연하고 자기 몸만 보전하려는 사람들만이 대궐 뜰 아래 나와 과감히 말을 못할 뿐 아니라, 직사(直士)의 기풍도 역시 반드시 꺾이어 할 말을 다 못할 것이니, 전하께서는 어느 곳에서 그 과실을 들으시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사방의 문을 열어 놓으시고 사방의 눈을 밝게 하시어 사방의 시청(視聽)을 통달할 수 있게 하셔야 할 것인데, 맨 먼저 일을 논하는 사람을 죄주어 말하는 자의 입을 막아버리시니, 신은 마음이 쓰라려서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신은 언로(言路)를 위하여 애석히 여기는 것입니다. 신은 선릉의 길러주신 은혜를 너무도 후하게 받았으니, 어찌 감히 이 이름을 회피하기 위하여 드릴 말씀을 아니 드리겠습니까.  임금은 뇌정(雷霆) 같은 위엄과 만근 같은 무게가 있어서, 부러뜨리면 꺾이지 않는 것이 없고 누르면 부서지지 않는 것이 없으니, 비록 상을 주면서 말을 하게 하여도 오히려 그 말을 다하게 할 수 없는데, 하물며 위엄으로 으름장 놓고 무거운 힘으로 눌러댐에리까. 전하께서 어찌 이것을 생각 아니하시고 저 일을 두고 따지는 사람들을 죄주십니까. 옛날에 정(鄭)나라 자산(子産)이 향교(鄕校)를 헐지 아니하여 정나라가 다스려졌으니,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빨리 재(齋)를 파하시고, 또 유생의 죄를 사면하시어 말하는 사람들의 길을 열어 주시면 국가로 보아 다행이겠습니다. "   소를 읽은 연산군은 이 소를 승정원으로 내려 보내면서 전교하였다.  "말을 아뢰려면 요(堯)·순(舜)과 삼왕(三王)의 도와 백성의 폐단을 아뢰어야 할 터인데, 소에 ‘삼전(三殿)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하니, 이것이 바로 위에 저촉되는 말이다. 그 말이 어떠한지 원상(院相)들에게 물어 보라." 연산군은 권경유의 상소가 불쾌했다. 이러자 윤필상·신승선 등이 의논드렸다.  "권경유가 한 결 같이 재를 지내는 것을 그르다 하여 되풀이 말하다가 드디어 불공(不恭)에 범하였으니, 진실로 죄는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언사의 잘못이요 딴 마음은 없는 듯합니다." 노사신이 의논드렸다. "권경유의 상서(上書)한 사연이 위에 저촉된다 할지라도 곧 함부로 생각하고 말한 것이니, 어찌 딴 생각이 있었겠습니까." 이윽고 윤호가 의논드렸다.  "상소에 비록 이치에 맞지 않은 말이 있을지라도 일단 말을 구한다는 교서가 있은 뒤에 견책을 가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원상들은 권경유를 감쌌다.  사진 1  자계서원 안내판 (경북 청도군 이서면) 사진 2  자계서원 전경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http://edaynews.com [ repoter : 김세곤 ]

뉴스등록일 : 2019-10-27 / 뉴스공유일 : 2019-10-27

무료유료 FREE

신고하기 공유받기O 신고하기

1

생활/문화 > 문학 > 칼럼

1495년 2월28일에 제천현감 권경유는 수륙재를 파하고 유생을   사면하여 주기를 바라는 상소를 하였다 (연산군일기 1495년(연산1년) 2월28일 2번째 기사). 김일손을 만나기 전이었다.   당시는 성균관 유생들이 수륙재 올리는 것을 반대하였다. 연산군이 이들을 죄주려 하자, 대간과 홍문관이 유생을 죄주는 것이 타당치 못함을 논계하였으나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연산군은 1495년 1월27일에 정희량을 해주로, 이목을 공주로, 이자화를 금산으로 귀양 보내고, 생원 조유형 · 임희재 등 21인의 과거 응시를 정지시켰다. 그러면 제천현감 권경유의 상소를 읽어보자. "신이 변변하지 못한 자격으로 선릉(宣陵 성종을 말함)에게 지우(知遇)를 얻어 오랫동안 경연(經筵)에서 모시게 되매, 외람되이 난육(卵育 나서 기른다는 뜻)의 은혜를 입었고, 지극히 미미한 보답도 바치지 못하였으니, 거의 심력을 다하여 견마(犬馬)의 나이를 마쳐야 할 처지인데, 국상(國喪)의 화가 갑자기 이때에 미칠 줄을 어찌 알았으리까.  멀리 궁벽한 고을에 있으면서 듣자오니, 전하께서 출천(出天)의 효성으로 한 결 같이 예법을 준수하시어 어질다는 소문이 사방에 넘치고, 온 나라 신민들이 모두 환희에 차서 한길 가에 나와 서로 경축하니, 종사(宗社)와 신민의 복이라 어찌 말로 다 형용하리까. 대행대왕(성종)께서 덕이 천지와 합하시고, 밝으심이 일월과 어울리시어 털끝만한 과오도 없으시니, 온 나라 신민이 우러르기를 일월 같이 하고 추대하기를 천지와 같이 하였는데, 신민이 복이 없어서 문득 모든 신하를 버리고 가시니, 모두 하늘을 부르짖어 통곡하며 부모를 잃은 것처럼 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조종(祖宗)의 업을 받으시고, 지성(至聖)의 뒤를 이으셨으므로, 만약 한 가지 정사라도 마음에 흡족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신민의 설움은 더욱 더할 것입니다. 신이 한 모퉁이 벽지에 치우쳐 있으므로 자상히 들을 수는 없습니다만, 그 사이에 한두 가지 부당한 것이 있습니다. 칠칠일의 재는 선왕(先王)의 예가 아니옵고, 바로 불씨(佛氏)의 교(敎)입니다. 불씨의 그름은 선유(先儒)가 자상히 논하였으니, 전하께서 환히 아실 것이므로 신이 감히 다시 덧붙이지 아니하겠습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진지한 군자(君子)는 복을 구함이 사특하지 않다.[豈弟君子 求福不回]’ 하였고, 한유(韓愈)는 말하기를 ‘불(佛)이란 과연 어떤 사람인가? 그 소행이 군자인가? 소인인가? 군자라면 반드시 도(道)를 지키는 사람에게 함부로 화를 가하지 아니할 것이요, 소인이라도 그 몸이 이미 죽었으니, 그 귀신도 영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대행 대왕께서 예법에 의하여 행동하시고 지나치신 일이라고는 조금도 없으셨으며, 또 복전(福田)의 이익을 구하지 아니하신 것은 온 나라 사람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복전(福田)은 불가(佛家)의 용어이다. 사람이 응당 공양할 자에게 공양 하면 장래에 모든 복의 응보를 받는 것이 마치 밭에 파종하면 추수할 가망이 있는 것과 같으므로 복전(福田)이라 하였다. 《무량수경(無量壽經)》 정영소(淨影疏)에 "세상의 복과 선(善)을 생산하는 것이 밭에서 만물이 생장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복전이라 한다." 하였다. 상소는 이어진다. “신은 일찍이 듣자오니, 무릇 수륙(水陸)의 법석(法席)에서는 세 번 신판(神板)을 목욕시키며 말하기를 ‘옛 악을 씻어버린다.’ 하고, 늙은 중이 외치면서 신판을 향해 뜰에서 절을 하는 말이 ‘부처에게 사과한다.’ 하는데, 한갓 입으로 차마 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귀로 차마 들을 수 없다 합니다. 대행 대왕께서 무슨 악을 씻을 것이 있으며, 무슨 사과할 일이 있습니까. 과실이 없으신 성(聖)으로서 부처 앞에 굽히신다는 것을 생각할 때, 신은 마음에 쓰라려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신은 전하께서 부처에 혹하지 아니하면서도 삼전(三殿) 때문에 마지못하신 것임을 모르는 것은 아니오나, 전하께서 만약 기를 낮추고 얼굴  빛을 화하게 하여 격언(格言)을 자주 드리시면 머지 아니하여 돌아오실 것이니, 하늘에 계신 성령(聖靈)으로 하여금 부처에 굽히시는 욕을 면해 드리고, 전하의 정사로 하여금 한 결 같이 정(正)에서 나오게 하신다면, 하늘에 계신 성왕께서 반드시 전하의 명성(明聖)하시고 신자(臣子)의 도(道) 잘 지키는 것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삼전은 내전의 세 분 왕후들이다. 덕종 비 소혜왕후(성종 모친, 인수대비 : 1437-1504), 예종 비 안순왕후(? -1498), 성종 비 정현왕후(1462-1530)가 삼전이다. 한편  인수대비는 연산군의 친할머니였고, 성종 비 정현왕후는 연산군의 배다른 동생인 중종의 친모였다. 권경유의 상소는 이어진다.   “전하께서 만약 조종(祖宗) 때부터 해 내려온 일이니 폐할 수 없다 하신다면 신의 의혹은 더욱 심합니다. 공자의 말씀에 ‘만약 도(道)가 아닐진대 어찌 3년을 기다리랴.’ 하였으니, 불공하는 재를 도라 여기십니까? 도가 아니라 여기십니까? 대행대왕께서 대개 옛 법을 따르시어 선왕의 법전을 변경하지 않으셨지만, 축수(祝壽)의 재는 유래가 오래인데도 개혁하여 의심하지 않으셨고, 도승(度僧)의 법도 구전(舊典)에 실려 있지만 역시 제거하게 하셨으니, 선왕의 고전(古典)을 고치기가 어렵다는 것을 모르신바 아니나, 그것이 도가 아니라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고치기를 꺼리지 않으신 것입니다. 또 우리 태종대왕께서 성학(聖學)이 고명하시어 강상(綱常)을 바로 세워, 자천(資薦)하는 법석(法席)을 일제히 혁폐하고 산릉(山陵)에 재찰(齋刹)을 세우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다 열성(列聖)의 물려주신 법전인데, 어찌 이 물려주신 법전에 따르지 아니하시고 인습된 폐단을 고수하십니까.” 조선은 억불숭유(抑佛崇儒)의 나라였다. 그런데 불교의 법도인 수륙재를 지내려 하다니. 권경유의 상소는 차분하면서도  논리적이다. 사진 1  유네스코 세계 유산 조선왕릉 (선 · 정릉) 사진 2  선릉 (성종 임금)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http://edaynews.com [ repoter : 김세곤 ]

뉴스등록일 : 2019-10-21 / 뉴스공유일 : 2019-10-21

무료유료 FREE

신고하기 공유받기O 신고하기

1

생활/문화 > 문학 > 칼럼

정약용이 1804년에 지은 ‘여름날에 술을 마시다’의 마지막은 신분제도의 모순에 대한 탄식이다.      산악이 영재를 만들어낼 때에      씨족을 가려서 만들 리 없고       한 가닥 좋은 기운이 반드시        명문가 최씨와 노씨의 뱃속에만 있으리란 법 없지  솥은 솥발이 뒤집혀야 좋고       난초도 깊은 골짝에서 나는 법   송나라 위공은 비천한 집 출신이었고     송나라 범중엄도  의붓아비 밑에서 자랐네.   명나라 대신 구준도 먼 변방에서 났지만  재주와 지모가 모두 빼어났거늘  어찌하여 등용 길이 그리도 좁아       사람이 움츠려 기를 펴지 못 펴나.   오직 제일골(第一骨 신라시대 귀족)만 발탁해 쓰니         나머지 골품은 노예와 같은 신세   서북 사람들 언제나 얼굴 찡그리고    서얼들은 원통해 통곡소리 드높네.     위세 당당한 수십 가문이           대대로 국록을 먹어치우니            그들끼리 패가 서로 갈리어           엎치락뒤치락 죽이고 물고 뜯어       약자의 살을 강자가 먹고는           대 여섯 집 호문(豪門)만 살아남아서     이들 만이 경상(卿相 정승)이 되고       이들 만이 악목(岳牧 판서와 감사)이 되고  후설(喉舌 승정원 관원) 맡은 자도 그들이고    이목(耳目 감찰 관원) 노릇도 그들이 다 하며   이들만이 모든 관직 다 해먹고            이들만이 옥사를 감독하네.          지역차별, 신분차별에 권력독점까지 하고 있다. 먼 시골 백성이  아들 하나 낳았는데         빼어난 기품이 난곡 (鸞鵠)  새와 같고                 팔 구세 되어서는                   의지와 기상이 가을철 대나무 같아               아비 앞에 꿇어앉아 여쭙는 말이 “제가  지금 구경(九經)을 다 읽고            경술이 누구보다 으뜸이오니             홍문관에 들어갈 수 있겠지요”     구경(九經)은 시경·서경·역경·효경·춘추·예기·논어·맹자·주례이다.   그 아비 하는 말 “너는 지체가 낮아             임금을 곁에서 모실 수 없을 것이다.” 자식이 하는 말 “제가 이제 큰 활을 당길 만하고             무예가 춘추시대 진나라 장수 극곡과 같으니               오군영의 장수나 되어 말 앞에다 대장기를 꽂으렵니다. 그 아비 하는 말 “ 너는 지체가 낮아        장군 수레 타는 것도 허락 안 할 것이다”    자식이 다시 하는 말 “제가 이제 관리 일 공부했으니  애민하는 순리(循吏) 한나라 공수와 황패의 뒤를 이어받아 그냥 군부(郡符)를 허리에 차고 죽도록 고량진미 실컷 먹으렵니다.   그 아비 하는 말 “너는 지체가 낮아 애민의 순리도 가혹한 혹리(酷吏)도 너에겐 상관 없은 일” 아비는 자식의 능력이 출중해도 출세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이 말 듣고 자식 놈 발끈 노하여 책이고 활이랑 던져버리고 쌍륙놀이와 골패놀이 마작놀이 공차기놀이로 허랑방탕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늙어서는 시골구석에 파묻혀버리네. 실력이 좋아도 무엇 하나? 가문과  혈통이 좌지우지하니.   권세 있는 집안도 자식 하나 낳았는데 사납고 교만하기 천리마 같고 그 아이 팔구세가 되어   예쁘장한 옷을 입고 다니면 객들이 하는  말이 “너는 걱정 없다 너희 집은 하늘이 복 내린 집이고 네 벼슬도 하늘이 정해놓아서 청관 요직 마음대로 될 것이니 부질없이 헛고생 해가면서 매일 같이 글공부 할 필요 없으리. 때가 되면 좋은 벼슬은 저절로 오리니 편지 장이나 쓸 줄 알면 족하리.”   그 아이 이 말 듣고 깡총깡총 좋아하고 다시는 서책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마작이며 골패라든지 장기바둑 쌍륙에 빠져 허랑방탕하여 인재 되지 못하건만 높은 벼슬 차례로 밟아 오르네. 먹줄 한 번 못 맞아본 나무가 어떻게 큰 집 재목 될 것인가 두 집 자식 다 자포자기하고 말아 세상천지에 어진 자라곤 없어졌다네. 곰곰 생각하면 속만 타기에 부어라 다시 또 술이나 마신다네. 정약용은 평민의 아들과 권세가의 아들이 타락하는 과정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다산은 속이 탄다. “평민 자식은 실력이 있어도 왜 출세할 수 없는가? 권세가 자제는 놀면서도 어이하여 출세하는가?”  지금은 어떤가? 신분특혜는 없나?  사진 1.  2012년 유네스코 기념인물로 선정된 정약용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http://edaynews.com [ repoter : 김세곤 ]

뉴스등록일 : 2019-10-20 / 뉴스공유일 : 2019-10-21

무료유료 FREE

신고하기 공유받기O 신고하기

1

선택한 뉴스공유받기
12345678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