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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은 원정(原政)이란 글을 썼다. ‘정치란 무엇인가?’를 캐묻는 글이다. 1)    그러면 원정(原政)을 읽어보자.  “정(政)의 뜻은 바로잡는다[正]는 말이다. 첫째, 똑같은 우리 백성인데 누구는 가장 질 좋은 토지를 소유하여 부유한 생활을 하고, 누구는 좋은 토지를 받지 못하여 가난하게 살 것인가. 이 때문에 토지를 개량하고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어 그것을 바로잡았으니 이것이 정(政)이다. 둘째, 똑같은 우리 백성인데 누구는 풍요로운 땅이 많아서 남는 곡식을 버릴 정도이고, 누구는 척박한 땅도 없어서 모자라는 곡식을 걱정만 해야 할 것인가. 이 때문에 배와 수레를 만들고 저울과 되의 규격을 정립하여 그 고장에서 나는 것을 딴 곳으로 옮기고, 있고 없는 것을 서로 통하게 하는 것으로 바로잡았으니 이것이 정(政)이다. 셋째, 똑같은 우리 백성인데 누구는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제멋대로 삼켜서 커지고, 누구는 연약한 위치에서 자꾸 빼앗기다가 멸망해 갈 것인가. 이 때문에 군대를 조직하고 죄 있는 자를 성토하여 멸망의 위기에 있는 자를 구제하고 세대가 끊긴 자는 이어가게 하는 것으로 바로잡았으니 이것이 정(政)이다. 넷째, 똑같은 우리 백성인데 누구는 상대를 업신여기고 불량하고 악독하면서도 육신이 멀쩡하게 지내고, 누구는 온순하고 부지런하고 정직하고 착하면서도 복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가. 이 때문에 형벌로 징계하고 상으로 권장하여 죄와 공을 가리는 것으로 바로잡았으니 이것이 또한 정(政)이다. 다섯째, 똑같은 우리 백성인데 누구는 멍청하면서도 높은 지위를 차지하여 악(惡)을 전파하고 있고, 누구는 어질면서도 아랫자리에 눌려 있어 그 덕(德)이 빛을 못 보게 할 것인가. 때문에 붕당(朋黨)을 없애고 ‘공공의 도덕(公道)’을 넓혀 어진 이를 기용하고 불초한 자를 몰아내는 것으로 바로잡았으니 이것이 정(政)이다. 다산은 위 5가지의 불공정과 불합리를 바로 잡는 것이 정(政)이라고 논한다. 정(政)이라는 한자(漢字)는  正(바를 정)자와 攵(회초리로 치다, 복)자가 합해진 모습이다. 正(정)은 성(城)을 향해 진격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정벌(征伐)하다’,‘부정(不正)을 바로 잡다’란 뜻이다. 2)    글은 이어진다.   “하나, 밭도랑을 준설하고 수리(水利) 시설을 함으로써 장마와 가뭄에 대비하고, 둘,소나무ㆍ잣나무ㆍ의나무ㆍ오동나무ㆍ가래나무ㆍ옻나무ㆍ느릅나무ㆍ버드나무ㆍ배나무ㆍ대추나무ㆍ감나무ㆍ밤나무 등속을 심어서 궁실(宮室)도 짓고, 관곽(棺槨)도 만들고, 또 곡식 대신 먹기도 하고, 셋, 소ㆍ염소ㆍ당나귀ㆍ말ㆍ닭ㆍ돼지ㆍ개 등을 길러 군대와 농민을 먹이기도 하고, 노인들 봉양도 한다. 넷, 우인(虞人 산림소택(山林沼澤)을 맡은 벼슬)은 시기를 정하여 산림(山林)에 들어가서 짐승과 새들을 사냥함으로써 해독을 멀리하기도 하고, 또 고기와 가죽을 제공하기도 하며, 다섯, 공인(工人)도 계절따라 산림에 들어가서 금ㆍ은ㆍ구리ㆍ철과 단사(丹砂)ㆍ보옥(寶玉)을 캐다가 재원을 확보하기도 하고, 또 모든 쓰임에 공급도 하며, 여섯, 의사는 병리(病理)를 연구하고 약성(藥性)을 감별하여 전염병과 요절을 미연에 방지하게 하는 것이 바로 왕정(王政)인 것이다. 3) 그런데 왕정(王政)이 없어지면 백성들이 곤궁하기 마련이고, 백성이 곤궁하면 나라가 가난해지고, 나라가 가난해지면 조세 거두는 것이 번거롭고, 조세 거둠이 번거로우면 인심(人心)이 이산(離散)되고, 인심이 이산되면 천명(天命)도 가버린다. 그러므로 급히 서둘러야 할 것이 정(政)이다.” 백성이 곤궁하면 민심(民心)이 이산되고, 민심이 떠나면 천명(天命)도 가버린다. 따라서 정치를 바로 해야 국민들이 산다. 문득  <맹자>와 <춘추좌전>의 글이 생각난다.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고 군주가 가장 하찮다.”  -<맹자> ‘진심 하’ “백성 보기를 상처 돌보듯이 하는 나라는 흥하고, 백성을 흙이나 쓰레기처럼 하찮게 여기는 나라는 망한다.” - <춘추좌전> 애공 1년(BC 494)’ 사진 1  다산 정약용 선생 상(像)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 생가) 사진 2  정치 사상  표석 (동상 주위에 설치) 1) ‘원정’의 저술연도도 알 수가 없다. 박석무는 ‘다산이 벼슬하는 동안의 저술’로 보고 있으나 확연하지 않다. (다산학의 인문학적 가치와 미래 2019.11.15. 기조연설)  2)맹자도 ‘정벌의 말뜻은 바로 잡는다는 것 (征之爲言正也)’이라고 했다. (<맹자> ‘진심 하’) 3)왕정(王政)은 맹자(BC 372∼289)가 말한 ‘왕도정치’ 즉 가장 이상적인 요순(堯舜)시대의 정치이다. 맹자가 말한 ‘왕이 백성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백성을 보살피는 정치’, ‘백성들과 더불어 즐거움을 함께 하는(與民同樂)의 정치이다. <맹자> ‘양혜왕 하편’에 나온다.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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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은 원목(原牧)이란 글을 지었다.  ‘목(牧)이란 무엇인가?’를 캐묻는 명문장이다. 1) 그러면 원목(原牧)을 읽어보자. “목민자(牧民者)가 백성을 위해서 있는 것인가, 백성이 목민자를 위해서 있는 것인가? 백성이 쌀과 옷감을 생산하여 목민자를 섬기고, 또 수레와 말과 하인을 내어 목민자를 전송·환영도 하며, 또는 고혈(膏血)을 짜내어 목민자를 살찌우고 있으니, 백성이 과연 목민자를 위하여 있는 것일까? 아니다. 그건 아니다. 목민자가 백성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다산은 ‘목민자는 백성을 위하여 있다.’고 결론부터 낸다.  “옛날에야 백성이 있었을 뿐 무슨 목민자가 있었던가. 백성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면서 한 사람이 이웃과 다투다가 해결을 보지 못한 것을, 공정하게 말 잘하는 어른이 있었으므로 그에게 가서야 해결을 보고 사린(四隣)이 모두 감복한 나머지 그를 추대하여 이름을 이정(里正)이라 하였고, 또 여러 마을 백성들이 자기 마을에서 해결못한 다툼거리를 가지고 식견이 많은 어른을 찾아가 그에게서 해결을 보고는 여러 마을이 감복한 나머지 그를 추대하여 이름을 당정(黨正)이라 하였으며, 또 여러 고을 백성들이 자기 고을에서 해결 못한 다툼거리를 가지고 어질고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가 그에게서 해결을 보고는 여러 고을이 모두 감복하여 그를 주장(州長)이라 하였고, 또 여러 주(州)의 장(長)들이 한 사람을 추대하여 어른으로 모시고는 그 이름을 국군(國君)이라 하였으며,  또 여러 나라의 군(君)들이 한 사람을 추대하여 어른으로 모시고는 그 이름을 방백(方伯)이라 하였고, 또 사방(四方)의 백(伯)들이 한 사람을 추대하여 그를 우두머리로 삼고는 이름하여 황왕(皇王)이라 하였다. 따지자면 황왕의 근본은 이정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목민자는 백성을 위하여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해결사로 추대된 자가 이정(里正), 당정(黨正), 주장(州長) , 국군(國君), 방백(方伯),황왕(皇王)이다. 지금 같으면 반장, 이장, 통장, 읍·면·동장, 시 ·군수·구청장, 도지사. 대통령이다. 글은 이어진다.  ”그때는 이정이 민망(民望 백성들의 요망)에 따라 법을 제정한 다음 당정에게 올렸고, 당정도 민망에 따라 법을 제정한 다음 주장에게 올렸고, 주장은 국군에게, 국군은 황왕에게 올렸었다. 그러므로 그 법들이 다 백성의 편익을 위하여 만들어졌었는데, 후세에 와서는 한 사람이 스스로 황제가 된 다음 자기 아들ㆍ동생 그리고 시종, 가신들까지 모두 제후(諸侯)로 봉하는가 하면, 그 제후들은 또 자기 측근을 심어 주장(州長)으로 세우고, 주장은 또 자기 사람을 추천하여 당정ㆍ이정으로 세우고 있다. 그렇기때문에 황제가 자기 욕심대로 법을 만들어서 제후에게 주면, 제후는 또 자기 욕심대로 법을 만들어서 주장에게 주고, 주장은 당정에게, 당정은 이정에게 각기 그런 식으로 법을 만들어 준다. 그러므로 그 법이라는 것이 임금은 높고 백성은 낮으며, 아랫사람 것을 긁어다가 윗사람에게 붙여주는 격이 되어, 얼핏 보기에 백성이 목민자를 위하여 있는 꼴이 되고 있다. 지금의 수령은 옛날로 치면 제후들인데 그들의 궁실(宮室)과 수레와 말ㆍ의복과 음식 그리고 좌우의 최측근과 시종들이 거의 국군(國君)과 맞먹는 상태인데다, 그들의 권능이 사람을 경사롭게 만들 수도 있고 그들의 형벌의 위세는 사람을 겁주기에 충분하다. 그리하여 거만하게 스스로 높은 체하고 태연히 혼자 좋아서 자신이 목민자임을 잊어버리고 있다. 한 사람이 다투다가 해결을 위하여 가게 되면 곧 불쾌한 표정으로 하는 말이 왜 그리 시끄럽게 구느냐 하고, 한 사람이 굶어 죽기라도 하면 ‘제가 스스로 잘못해서 죽었다.’하며, 곡식이나 옷감을 바쳐서 섬기지 않으면 매질이나 몽둥이질 하여 피를 보고야 말 뿐 아니라, 날마다 돈 꾸러미나 세고 글을 첨삭 수정을 일기 삼아 기록하여 돈과 베를 거두어들여서 논밭과 저택이나 장만하고, 권문귀족ㆍ재상에게 뇌물을 쓰는 것을 일삼아 후일의 이익을 도모하고 있다. 그리하여 ‘백성이 목민자를 위하여 존재하고 있다.’란 말이 나오게 되었지만 그것이 어디 이치에 맞기나 하는가. 목민자가 백성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다산이 살았던 19세기 초반은  목민자가 백성 위에 군림했고, 그것이 극심하여 1910년 경술년에 조선이 망했다. 지금은 어떤가? 목민자는 과연 백성을 위하여 있는가? 사진 1  여유당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 생가) 사진 2  여유당 편액 1) ‘원목’의 저술연도는 알 수가 없다. 박석무는 ‘다산이 벼슬하는 동안의 저술’로 보고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다산학의 인문학적 가치와 미래 2019.11.15. 기조연설)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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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사 김일손이 연산군에게 경연에 납시라는 상소는 계속된다.  “<예기(禮記)> 1)에 이르기를 ‘상중에 있으면 상례(喪禮)를 읽고, 이미 장사한 뒤면 제례(祭禮)를 읽는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이미 장사하였으면 왕사(王事)를 말하고 국사(國事)는 말하지 아니한다.’ 하였으나 시대도 다르고 형세도 다르니 기왕 국사를 말하지 않을 수 없을진대, <예기>를 읽는 여가에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먼저 강(講)하고, 근세사람 구준(丘濬)이 엮은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도 또한 속강(續講)하셔야 합니다. 그 안에는 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치국의 요령이 갖추어 실려 있으니, 마음으로 깨닫고 몸으로 체득하면 천하에 어려운 일이 없을 것입니다.” 김일손은 <예기>를 읽는 여가에 <대학연의>와 <대학연의보>를 강하기를 상소한다. <대학연의(大學衍義)>는 국가 지도자의 리더십 필독서로서, 중국 송나라의 진덕수(眞德秀)가 1234년에 편찬한 <대학(大學)>의 깊은 뜻과 그 이치를 해설한 책이다. 1487년에는 명나라의 구준(邱濬)이 이 책을 보주(補註)한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편찬했다.  <대학연의>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장군시절부터 즐겨 공부하였다. <태조실록 1권, 총서 80번째기사>에는 ‘태조가 무인이면서도 문인과 경사를 토론하고 <대학연의>를 즐겨 보다’란 제목으로 “태조는 본디부터 유술(儒術)을 존중하여, 비록 군중(軍中)에 있더라도 매양 창[戈]을 던지고 휴식할 동안에는 유사(儒士) 유경(劉敬) 등을 인접(引接)하여 경사(經史)를 토론(討論)하였으며, 더욱이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 보기를 좋아하여 혹은 밤중에 이르도록 자지 않았으며, 개연(慨然)히 세상의 도의(道義)를 만회(挽回)할 뜻을 가졌었다.”고 적혀 있다. 또한 ‘태조실록 1392년 9월 21일’자는 “임금이 조회를 받는 예를 마치고 난 후에,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유경에게 명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론(講論)하게 하였다.”고 적혀있다.  1392년 11월 12일자 <태조실록>은 더욱 의미가 있다. “간관(諫官)이 날마다 경연(經筵)을 개최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수염과 살쩍이 이미 허옇게 되었으니, 여러 유생들을 모아서 강론을 들을 필요가 없겠구나." 도승지 안경공이 대답하였다. "간관의 뜻은 다만 전하에게 글을 읽게 하려고 함이 아니옵고, 대개 정직한 사람을 가까이하여 바른말을 듣게 하려고 함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비록 경연에는 나가지 않더라도 매양 편전(便殿)에서 유경으로 하여금 《대학연의》를 강론하게 하고 있다." 세종대왕도 즉위년(1418년)부터 <대학연의>를 공부했다. 즉위년 10월12일에 세종은 경연에 나아갔다. “동지경연 이지강이 <대학연의>를 진강(進講)하고, 또 아뢰기를, "임금의 학문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 근본이 되옵나니, 마음이 바른 연후에야 백관이 바르게 되고, 백관이 바른 연후에야 만민이 바르게 되옵는데, 마음을 바르게 하는 요지는 오로지 이 책에 있사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나 경서를 글귀로만 풀이하는 것은 학문에 도움이 없으니, 반드시 마음의 공부가 있어야만 이에 유익할 것이다." 하였다.(세종실록 1418년(즉위년) 10월 12일)     세종 즉위년 12월 20일에는 정사를 보고 경연에서 <대학연의>를 강하다가 민생의 어려움을 이야기했다.   “정사를 보고 경연에 나아갔다. <대학연의>를 강하다가 <채미편(采薇篇)>과 <군아편(君牙篇)>에 백성의 가난하고 고생함을 근심하고 탄식한다는 말에 이르러, 정초(鄭招)가 아뢰었다.   정초 : "임금 노릇 하기의 어려움과, 백성을 보호하기의 어려움과, 민생(民生)의 고통, 국운(國運)의 안위(安危)를 신들이 비록 바른대로 말하고자 하더라도, 어찌 능히 이와 같이 상세하겠습니까.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진덕수의 천고(千古)의 충론(忠論)을 취하여 잘못을 바로잡는 경계로 삼으소서. 우리나라 백성의 생계가 비록 아내를 팔고 자식을 파는 처지에는 이르지 않았지마는, 그러나 전하께서 오늘날의 마음을 잊지 않으시면, 국가가 매우 다행할 것입니다." 세종: "내가 마땅히 마음 깊이 품어 잊지 않겠노라." 이어서 말하였다. "우리나라 백성이 살아가는데 어찌 곤궁한 사람이 없겠느냐." 탁신 : "입을 것도 없고 먹을 것도 없이 곤궁하여 하소연할 데가 없는 사람이 백성이 많이 사는 곳이나 시골 궁벽한 곳에 혹시 있다 하더라도, 이는 다만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이 살피지 못한 것뿐입니다." 세종 : "내가 궁중에서 나고 자랐으므로, 백성의 가난과 고통을 다 알지 못한다." 정초 : "일반 백성을 찾아서 물으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세종 : "그렇다." (세종실록 1418년(즉위년) 12월 20일)  사진 1 세조대왕 능  전경 사진 2 세종대왕 능 1)<예기(禮記)>는 유교 경전 5경(五經)의 하나로서 공자는 삼대(三代 : 夏·殷·周) 이래의 문물제도와 의례(儀禮)·예절 등을 집대성하고 체계화하는 것을 스스로의 책무로 삼았고, 제자들을 가르침에 있어서도 예를 익히고 실천하는 데에 역점을 두었는데, 여기에는 상례(喪禮), 제사(祭祀), 관례, 혼례 등이 포함되어 있다.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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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의 확산세가 잦아들지 않으면서 3월 8일 현재 코로나19 확진자가 7,000여명, 사망자가 50명으로 집계됐다. 거리에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을 찾기 힘들며, 기업들의 재택근무, 학교들의 개학연기, 자영업·소상공인들이 받는 피해 등 코로나19가 가져온 사회적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다.    그중에서도 코로나19 감염병 사태에 대한 국민의 불안감을 악용한 각종 사기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신종 코로나 안내’를 사칭하거나 ‘코로나 19영향으로 택배가 지연되고 있다.’는 내용과 함께 인터넷 주소(URL)를 첨부하여 수신자로 하여금 클릭하게 한다. 클릭한 순간, 핸드폰에 악성 애플리케이션이 설치되어 금융정보를 포함한 개인정보가 순식간에 유출되는 것이다.   검찰이나 수사기관을 사칭한 보이스피싱도 코로나19 사태를 악용하고 있다. ‘공공기관도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내방을 자제시키고 있어, 원격 앱을 설치하여 간단한 약식조사를 진행하려 한다.’며 불법적인 어플 설치를 유도해 거액을 가로채고 있다.   또한, 코로나19가 가져온 마스크 품귀현상을 이용하여 마스크판매 사기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인터넷 직거래 사이트에 마스크를 판매한다는 게시글을 올려, 송금을 먼저 유도한 후 마스크를 보내지 않거나, 판매하기로 한 KF94마스크가 아닌 필터가 없는 일반 마스크를 보내는 것이다. 사례를 보면 서울 용산경찰서는 마스크 4만 3천 장을 팔겠다고 3명을 속여 1억 1천만 원을 가로챈 피의자를 구속했다. 이렇듯 코로나19 사태를 악용하여 마스크 유통질서를 교란시키고 있다.   이러한 사기 피해를 예방하기 위한 예방법은 어렵지 않다.    첫 번째, ‘경찰청 사이버캅’ 어플을 활용하는 것이다. 이 어플은 전화나 문자가 오면 해당 번호가 인터넷 사기 범죄에 이용된 번호인지 화면에 표시되도록 해, 거래 전 상대방에 대한 신뢰를 확인할 수 있으며, 인터넷으로 물품을 거래할 때 판매자의 계좌번호나 전화번호가 인터넷 사기에 이용됐는지 알아볼 수 있는 검색 기능을 제공한다.   두 번째, 정부나 지자체 등 공공기관에서 보내는 정상적인 코로나19 안내 문자에는 금전이나 개인정보, 또는 앱 설치를 유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숙지하여야 한다.   세 번째로, 출처가 불분명한 문자나 카카오톡 메시지 속 인터넷주소(URL)는 누르지 않는 것이다.    네 번째, ‘지연 이체 서비스’를 활용하는 것이다. 해당 서비스는 이체 후 최소 3시간 이상이 지나야 수취인 계좌에 입금되고, 최종 처리 시간 30분 전까지 이체 취소가 가능한 서비스로, 피싱 피해를 예방할 수 있다. 만약 스미싱이나 보이스피싱으로 이미 금액을 송금·이체했다면 즉시 전화로 해당 은행(고객센터) 또는 금융감독원(☎1332)에 전화하여 지급정지를 요청해야 하고, 앱을 설치했다면 비밀번호는 절대 입력을 하지 않아야 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가 급증하는 요즘, 위 예방법들을 잘 숙지하여, 사기로 인한 국민들의 정신적·경제적 피해가 없어야 할 것이다.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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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20-03-10 / 뉴스공유일 : 2020-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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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5년 5월28일에 충청도사 김일손은 26개 조목을 조목조목 간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상소를 마무리한다. “신이 진술한 26가지 일은 모두 적당한 시기에 맞춰 추진할 일입니다.심히 고론(高論)이 아니어서 얼핏 보면 쓸데없는 것 같으나 자세히 보면 이치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대부분 선대 임금 때에 시도했던 것이기 때문에 조금만 빼고 보태면 시행하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전하께서 양단(兩端)을 잡아 중간(中)을 쓰시기에 달렸을 뿐입니다. 그 요체는 하루빨리 경연(經筵)에 납시는 데 있습니다. 학문이 날로 나아가면 덕이 날로 밝아지고, 스스로 덕을 밝히면 만사가 차차 이치에 맞게 되기 때문입니다.” 김일손은 연산군에게 하루빨리 경연에 납시라고 간언한다. 김일손이 간언하기 한 달 전인 4월19일에도  홍문관과 노사신이 경연에 납시기를 청하였다. (연산군일기 1495년 4월19일)   “홍문관에서 경연(經筵)에 납시기를 청하고, 노사신도 ‘졸곡(卒哭)이 이미 지났으니, 빨리 《통감강목(通鑑綱目)》을 강하셔야 하고, 또 전하께서 전일에 강의를 다 끝내지 못한 《대학연의(大學衍義)》는 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도가 갖추어 실리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 두 서적을 강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옳은 말이다. 다만 중국 사신이 오기 전에 침구(針灸)를 하고 싶다." 하였다. ” 이를 보면 연산군은 딴전을 피우고 있다. 중국 사신이 오기 전에 침구 해야 하므로 경연에 참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폭군 연산군(1476∼1506). 그는 세자 때부터 서연(書筵)을 싫어했다. 1) 1493년(성종 24) 11월 12일의 <성종실록>에 나온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장령(掌令) 양희지(楊熙止)가 아뢰기를, "요사이 세자께서 강학(講學)을 하다 말다 하시고,  또 서연(書筵)은 단지 조강(朝講)·주강(晝講)·석강(夕講)만 대(對)하시고, 강(講)이 끝나면 곧 동궁으로 돌아가시어 환관이나 궁첩(宮妾)들과 더불어 친하게 지내시니, 어찌 선비들과 더불어 강마(講劘)하는 것만 하겠습니까?” 이러자 성종이 말하기를, "세자는 지금도 여전히 문리(文理)를 통하지 못하고 있으니, 강관(講官)과 더불어 오랫동안 대하여 강론(講論)하는 것이 매우 마땅하다." 하였다.  헌납(獻納) 홍한(洪瀚)은 아뢰기를, "신이 전에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는데, 세자께서 의심스런 곳이 있으면 내관(內官)으로 하여금 글로 써서 물어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관은 문리(文理)를 알지 못하니 어찌 다 전할 수가 있었겠습니까?"하고, 특진관 정문형은 아뢰기를, "세자께서는 진실로 마땅히 좌우와 더불어 전후로 학문을 강론하셔야 할 것이고, 주강을 오래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성종이 말하기를, "이 말이 옳다." 하였다.” 이렇게 연산군의 학습 태도는 상당히 불량함을 알 수 있다. 이로부터 한 달 뒤인 12월20일에도 연산군의 학문 수준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특진관 성현(成俔)이 아뢰기를, "세자의 서연(書筵)에서 《대학집주(大學集註)》를 진강(進講)하게 하는데, 신이 생각하건대, 집주(集註)는 포괄적이어서 의론과 의미가 다르므로 진실로 문리(文理)에 크게 통달(通達)한 자가 아니면 그 귀추를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집주를 강(講)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가(可)하다." 하였다. (성종실록 1493년 12월 20일)  2) 사진 1 연산군 묘소 입구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소재) 사진 2 연산군 묘 (묘비에는 ‘연산군지묘 燕山君之墓’라 적혀 있음)   1)서연(書筵)은 조선시대 왕세자를 위한 교육 제도이다. 차기 국왕으로서의 왕세자에게 경사(經史)를 강론해 유교적인 소양을 쌓게 하는 교육의 장이었고, 강학과 보도(輔導)의 기능이 있었다.  담당관서는 세자 시강원(世子 侍講院)이다. 2) 연산군은 1483년 2월 6일 7세의 나이에 세자로 책봉되어 1494년 12월24일에 성종이 붕어하자, 닷새 뒤인 12월29일에 18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연산군이 세자로 있던 11년 동안의 학문적 자질은 학습 태도가 느슨하고 이해력도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김범 지음, 연산군, 글항아리, 2010, p82-93)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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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중엽에  페스트(흑사병)가 유럽을 휩쓸었다. 1347년 무렵 쥐벼룩이 옮겼다는 페스트가 이탈리아 제노바에 창궐한 이후, 지중해 항구를 퍼져나가 1348년에는 스페인·영국·프랑스, 1349년에 오스트리아· 헝가리·독일, 1350년에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까지 퍼졌다. 그리하여 불과 6년 만에 유럽 인구의 1/3인 6천만 명이 죽었다. 작년 6월에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의 ‘성 니콜라스 교회 미술관’에서 <죽음의 무도> 그림을 보았다. 배경은 묘지이고 단상 위에 설교자가 있다. 그 옆에 하얀 수의를 걸친 해골이 백파이프를 불고, 역시 수의를 걸친 해골이 관을 들고 있다. 이어서 교황은 십자가 지팡이를 들고 있고, 그 옆의 해골은 교황의 붉은 망토를 잡고 있다. 바로 옆의 황제는 칼을 들고 있다. 그 옆의 해골은 한 손은 황제의 어깨에, 또 한 손은  왕비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다. 이어서 해골 옆에는 빨간 모자를 쓰고 있는 추기경이다. 그리고 해골, 그 옆은 왕관을 쓴 왕, 또 해골이 있다. 해설판을 읽어보니 이 그림은 15세기 후반 독일 뤼베크의 화가 베른트 노르케가 그렸는데, 전시물은 7.5미터 길이의 전반부 그림이다. 원래 그림은  거의 30미터이고 50명이 그려져 있었단다. 전시 그림의 권력자 5명 뒤에는 사회적 지위 순서대로 기사, 부자, 상인, 농사꾼이, 맨 마지막에는 아이와 거지가 나온단다. 한편 노르케는 1463년에 같은 주제로 뤼베크 성 마리아 성당에 그림을 그렸다. <죽음의 무도> 주제는 ‘죽음’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게 마련이며, 죽음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  사진 1 죽음의 무도 안내판  사진 2  죽음의 무도 그림   한편 <죽음의 무도>는 김연아가 2009년 캐나다 벤쿠버 세계피겨선수권대회 우승을 거머쥔 배경음악이었다. 생상스가 1874년에 작곡했는데, 그는 시인 카잘리스의 오래된 프랑스 괴담을 바탕으로 한 시에서 영감을 얻었다.  생상스의 음악을 들으면서 시를 읽는다.     “지그, 지그, 지그, 죽음의 무도가 시작된다. 발꿈치로 무덤을 박차고 나온 죽음은 춤을 춘다. 한밤중에 울리는 죽음의 춤의 노래 지그, 지그, 지그, 바이올린 선율을 따라 겨울바람 휘몰아치고 밤은 어둡고 보리수나무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 하얀 해골이 수의를 펄럭이며 달리고 뛰며, 어둡고 음침한 분위기를 만든다. 지그, 지그, 지그, 해골들이 뛰어놀며 춤추는 뼈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욕정에 들끓은 연인은 이끼 위에 앉아 기나긴 타락의 희열을 만끽한다. 지그, 지그, 지그, 죽음은 계속해서 끝없이 악기를 할퀴며 연주한다. 베일이 떨어졌다.! 한 무용수 나체가 된다. 그녀의 파트너가 요염하게 움켜잡는다. 그 숙녀가 남작 부인이라 했던가. 그녀의 용감한 어리석은 달구지 끄는 목수. 경악스럽네! 그녀는 저 촌뜨기가 남작인 마냥 그에게 허락한다. 지그, 지그, 지그. 사라반드 춤! 죽음이 모두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춤춘다. 지그, 지그, 지그, 군중 속에서 왕이 농부와 춤을 춘다. 하지만 쉿! 갑자기 춤이 그치고 서로 떠밀치다 날쌔게 도망친다. 새벽닭이 울었다. 아, 불행한 세계의 아름다운 밤이여! 죽음과 평등이여 영원하라!” 작년 12월 말 중국 후베이성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19가 중국은 물론 한국, 일본, 유럽, 중동, 미국 등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산하 시스템 사이언스·엔지니어링 센터의 코로나19 지도를 보면 6일 현재 세계의 확진자는 10만330명을 기록 중이다. 중국이 8만556명, 한국 6,593명, 이란 4,747명, 이탈리아 3,858명, 기타(일본정박크루즈선) 696명, 독일 577명, 프랑스 423명, 일본 381명 등으로 집계됐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진행 중이다.      코로나 확산이 심각하다. 3.8 현재 확진자는 7,313명, 사망자가 50명이다. 이대로면 1만 명도 가능해질까 걱정이다. 언론은 연일 ‘코로나 비상 특집’이다. 마스크 대란과 마스크 5부제(1인 2장 한도), 집단 감염 확산, 오스트리아 등 103개 국가의 한국 ‘빗장’, 코로나 우울증, 종교행사 자제, 개학 연기, 재택근무, 자영업자 몰락, 소비 실종 등을 보도하고 있다. 정부는 ‘사회적 거리 두기’ 실천을 계속 권고하고 있다. 필자도 집에서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를 읽고 있다.  “여러분을 괴롭히는 그 재앙이 도리어 여러분을 향상하고, 여러분에게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 파늘루 신부의 설교 (민음사, p 133)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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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사 김일손의 상소 26개 조목 중 마지막 조목은 ‘소릉(昭陵)을 회복하소서.’ 이다. 소릉(昭陵)은 문종의 비이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 1418∽1441) 권씨의 능이다. 현덕왕후는 1441년 7월23일에 단종을 낳은 후 하루 만에 산후통으로 별세했다. 그녀의 나이 23세였다. 왕실은 9월21일에 그녀를 안산읍 와리산에 장사지냈는데, 문종은 1450년 7월1일에 현덕왕후로 추숭하고 능호를 소릉(昭陵)이라 하였다. (문종실록 1450년 7월1일) 그런데 1457년 6월21일에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당했다. 5일 후인 6월26일에 세조는 현덕왕후 권씨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삼고 소릉(昭陵)을 폐하였다. 그러면 상소를 읽어보자. “우리 국가는 마치 금주발(金甌 나라의 영토와 주권이 완전하고 견고함을 금주발에 비유함)같이 반듯한데, 지난날의 연고로 조그마한 하나의 결점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온 조정 신하 된 사람들이 하늘을 이고 땅을 밟으면서 강상(綱常)이 이지러진 중에도 태연히 지나며, 스스로 지각이 없으니 이 어찌된 일입니까? 예로부터 제왕의 사당에는 혼자 있는 신주(神主)가 없는데, 문종(文宗)의 사당만 홀로 있습니다. 광릉(光陵 세조)께서는 세상을 구제할 계략을 품고, 여러 사람의 인정에 휩쓸리어 부득이 선위(禪位)를 받지 않으실 수 없었음은 종묘사직를 위한 계책이었고, 소릉을 폐한 것은 광릉(세조)의 본의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문종이 동궁(세자)으로 계실 때에 소릉에 이미 승하하셨으니 노산군(단종을 말함)을 복위시키려는 음모에 관계 하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만일 어머니 때문이라고 한다면 당시 주모한 사람들의  아들은 죽였으나 딸은 외부의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하여 용서한 예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광릉(세조)의 어지신 마음을 살필 수 있습니다. 더구나 송현수(宋玹壽)는 노산군의 장인이건만 그 아들 송거(宋琚)와 조카 송영(宋瑛)이 이미 선왕의 용서를 입어 조정에 벼슬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소릉을 다시 용서할 수 없겠습니까? 비록 전하께서 원통함을 밝게 살펴서 복위하고자 하더라도, 의견을 말하는 자들은 반드시 조종(祖宗)의 과실을 드러내는 것이라 하여 반대할 것이나, 이것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단연코 복위시키시면 장차 세종의 덕과 비교되고, 문종(文宗)에 대한 누(累)를 없애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태조조(太祖朝)에서 왕씨(王氏)를 다 베어 죽이시고, 태종(太宗)께서는 먼저 정몽주(鄭夢周)를 죽였는데, 개인적으로 본다면 정몽주가 조종(祖宗)을 모해한 만큼 자손들에게는 큰 원수입니다. 그렇지만 세종(世宗)께서는 그 후손들을 녹용(錄用)하여 그의 절개를 표창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금의 충신(忠臣) 후손의 대열에 세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문종께서는 특별히 왕씨의 후손을 찾아서 숭의전(崇義殿)을 세워서 끊어진 제사를 잇게 하였습니다. 세종·문종 두 임금의 인덕은 천지와 같이 큽니다. 후세 사람들은 세종·문종께서 태조와 태종의 허물을 드러냈다고 말하지 아니하고, 신성(神聖)한  자손들이 능히 조종의 허물을 메웠다고 하였으니, 어찌 옳지 않겠습니까.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 소릉(昭陵)을 예전처럼 회복시키고, 나무하고 소치는 것을 금지시키며, 거상기간이 끝나면 신주를 옮겨 문종의 사당에 함께 모시면 온 나라의 강상(綱常)을 위해 더 없는 다행이 될 것입니다. ” 태종(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정몽주를 개성 선죽교에서 죽였으나, 정몽주를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로 증직하였고(태종실록 1401년 11월 7일), 문종은 고려 왕씨의 후손을 예우하고 숭의전을 지어 제사를 받들게 했다.(국조보감 제8권, 문종조 1년(1451년) 또한 성종도 1470년 3월19일에 정몽주의 자손을 녹용(錄用)하라고 하였다.   하물며 소릉 복위는 못 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소릉은 복위되지 못했고, 김일손의 소릉 복위 상소는 1498년 7월12일 연산군 친국의 초점이 되었다. (연재 10회 연산군, 소릉에 대하여 김일손을 친국하다.  참조)   사진 1.  선릉 전경(성종 임금 능) 사진 2.  선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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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 신유박해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 간 정약용은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나자, 10월20일에 장기에서 압송되어 27일에 한양 감옥에 갇혔다. 다행히도 11월5일에 혐의없음이 드러나자, 이번에는 유배지가 바뀌어 전라도 강진으로 내려갔다. 전라도 신지도에서 유배를 살았던 둘째 형 정약전(1758∼1816)도 신안 흑산도로 유배지가 바뀌었다. 서울에서 형 정약전과 함께 유배지로 내려간 정약용은 11월21일에 나주 반남정에서 하룻밤을 같이 자고 11월22일에 두 사람은 헤어졌다. 이후 정약용은 1805년부터 1816년까지 11년간 정약전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1) 정약용은 1810년경에 흑산도에 유배 중인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서 “천하는 썩어버린 지 이미 오래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편지에는 요순시대의 정치가 가장 모범인 것은 고적제 즉 인사고과제도에 있음을 토로했다. 그러면 형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보자. “최근 몇 년 사이에 저는 요순시대의 나라 다스리던 법을 깨달았습니다. 후세와 비교해 보면 훨씬 엄혹(嚴酷)하고 빈틈없이 짜여져 물을 부어도 새지 않을 정도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요순의 정치는 순박하고 태평하여 천하가 저절로 조화된 경지에 이르렀다고 인식하고 있는데 이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이치로서 매우 어리석은 견해라 하겠습니다. (중략) 공자(孔子)께서 항상 말씀하시길, ‘요순시대는 희희호호(熙熙皥皥)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이것을 순박하고 태평스럽다 뜻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희희(熙熙)는 ‘밝다’는 뜻이고 호호(皥皥)는 ‘희다’는 뜻이니, ‘희희 호호’라고 하는 것은 모든 일이 다 사리(事理)에 의해 잘 다스려져 밝고 환하여 티끌 하나 터럭 하나라도 악(惡)을 숨기고 더러움을 감출 길이 없다는 뜻입니다. 요즘 세속에서 말하는 ‘밤이 낮 같은 세상'이란 것이 바로 요순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요순시대가 그렇게 되어진 까닭을 살펴보건대, 그것은 오직 고적(考績 인사고과)제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의 고적제도는  요즘 세상의 여덟 글자로 된 제목(題目)만 있는 고적 제도처럼 소루(疏漏)하거나 조략(粗略:엉성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반드시 본인으로 하여금 직접 임금 앞에 와서 얼굴을 맞대고 자기 입으로 말을 하게 하였으니 잘못한 것을 거짓으로 꾸밀래야 꾸밀 수 없게 하였던 것입니다. ” 이어서 편지는 순임금에게 신하들인 우(禹), 고요(皐陶), 익(益) 직(稷)이 자기의 치적을 거짓 없이 아뢰는 모습을 편지에 적는다. 3) “무릇 전(典)이란 나라를 통치하는 법이요, 모(謨)란 나라를 다스리는 정책입니다. 그 법과 정책은 고적제도 보다 더 나은 게 없으니, 이것이 바로 요순(堯舜)의 정치를 이룩할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순임금께서는 그냥 옷소매를 드리우고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진흙으로 빚은 사람처럼 점잖이 앉아 있었는데도 천하가 자연히 태평해졌다.’고 하는데, 이것은 헛된 꿈을 꾸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천하는 썩어 버린 지 이미 오래입니다. 요즈음 관리를 포폄(褒貶 포상과 징계)하는 제목(題目)에 적혀 있길 ‘이욕의 생각이 없고 편안하고 단아하게 정치를 하여 다스림으로 온 경내가 평온하다.’라고 했는데 이러한 사람을 순 임금의 어전에 올라가 스스로 자신의 공적을 아뢰도록 한다면 이 사람이 무슨 일을 했다고 아뢸 수 있겠습니까?” (중략) 이렇게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요순시대 통치와 정책의 근간은 고적을 떠나서는 말 할 수 없습니다. 얼굴을 마주 대하고 직접 진달하는 것이 가장 좋은 고적법이요, 차선책으로는 스스로 자신의 공적 사항을 기록하여 아뢰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더러운 세상에서는 만약 스스로 자신의 공적을 아뢰도록 하는 법을 시행케 한다면, 고을의 수령(守令) 된 자들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자기의 책임을 다한 것처럼 꾸미려고, 하지도 않는 일들을 만들어 자기의 공적 사항을 뚜렷하게 꾸미려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백성들이 도탄(塗炭)에 빠지는 것이 어찌 이 정도로까지 심하기야 하겠습니까. 오호, 슬프기만 합니다. 그 누가 있어 백성을 위해 이 막된 세상의 참모습을 아뢴단 말입니까?” 가장 이상적인 정치를 했다는 요순시대도 그냥 요순이 가만히 앉아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철저한 인사고과제도 때문이었다.   사진 1  실학 박물관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 생가) 1) 다산이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는 <다산시문집(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에 17통이 실려있고, 박석무의 저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에도 13통이 번역되어 있다.      2)정약전은 1790년 증광문과에 응시,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전적·병조좌랑을 역임하였다.  3) 이 내용은 <서경> ’익직‘편에 나온다.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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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사 김일손의 상소 26개 조목 중 24번째 조목은 “기인(其人)을 없애고 역졸들의 생업을 안정시켜야 합니다.”이다. 기인(其人)은 향리(鄕吏)의 자제를 뽑아 서울로 데려와서 볼모로 삼는 한편, 그 출신 지방에 관한 고문으로 삼았던 것인데, 조선에서도 이 제도를 실시하였다.  “옛 습속이 답습되어 쌓인 폐단 또한 많습니다. 향리(鄕吏)의 기인(其人)제도는 고려 때부터 있었는데, 아전들의 집안이 기울어 파산하는 것은 모두 이 기인제도 때문입니다. 아전 또한 백성인 만큼 숯과 땔나무를 공물(貢物)로 바치는 것도 마땅히 따로 방도를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역졸을 해마다 북쪽 변경으로 이주시키는 통에 가족을 이끌고 솥을 지고 수고스럽게 오가니 그 원망이 길에 가득합니다. 이주는 서로 돌아가면서 하기때문에 그냥 있는 사람도 해마다 말 한 필씩 바꾸어 들여 세우느라고 전답의 금년 소출을 모두 팔고 이듬해에도 또 팔게 되니, 그 직무는 가장 고되고 그 생활은 불쌍합니다. 신은 원하건대, 삼도(三道)의  각 역(驛) 인원의 많고 적음을 살펴서, 경기(京畿)에 적당 수를 들여 정착시키고 세워둔 말은 돌려주지 말 것이며, 말들 들여 세우는 것도 혼란스럽게 해마다 어지러이 변경하지 말게 하여 역졸들의 생업을 안정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상소의 25번째 조목은 ”양민(良民)에게 출가하는 법을 회복하여 양민을 늘리고, 노비(奴婢)에 대한 소송 기한을 정하여 사사로운 송사를 간소화하소서.” 이다.  “자식이 아버지 쪽을 따르는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늘과 땅의 법칙이요 이치이니 옛날이나 지금이나 바꾸지 못합니다. 고려 충렬왕(忠烈王)이 처음으로 천인(賤人)을 어미 쪽 신분을 따르도록 하였으나, 우리 조종조(祖宗朝)에서 오히려 양민(良民)한테 출가하는 법이 있어 다 어미 쪽을 따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천인 여자가 양인 남자에게 출가하여 낳은 자식은 어머니 쪽을 따르고, 양인 여자가 천인 남자에게 출가하여 낳은 자식은 어머니 쪽을 따르지 않는데 이 법은 매우 잘못된 것으로서 그 결과는 노비를 많이 만들어 내는데 지나지 않습니다.  의견을 말하는 자들이  ‘아버지 쪽을 따르면 분간하기 어렵고, 어머니 쪽을 따르면 쉽게 가려낸다.’ 하는데, 이것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보니 영국에서 유학할 때 은행 구좌를 만들었는데 은행 직원이 질문하는 것중 한 가지가 아버지 성이 아닌 어머니 성(姓)이었다.  영국도 옛날에 사생아가 많아서 누구 자식인지는 어머니만 알았나 보다. ”어찌하여  양녀가 천인 남자에게 출가한 경우에만 유독 남편을 가려낼 수 있고, 천녀(賤女)가 양인(良人) 남자에게 출가한 경우에는 어찌 남편을 가려낼 수 없단 말입니까. 그것은 남편이 정해져 있는가 없는가에 달린 것이지, 양인인가 천인(賤人)인가에 달린 것은 아닙니다. 신이 일찍이 들으니, 중국에서는 귀천을 따지지 않고 모두 아버지 쪽을 따르며 오직 행원(行院 :창기 娼妓)만 어머니 쪽을 따랐습니다. 창기는 임자 없는 객주 집처럼 정한 남편이 없기 때문에 행원(行院)이라고 하였답니다. 지금 양녀(良女)가 천인 남자에게 시집가서 낳은 자식이나, 천녀가 양인 남자에게 시집가서 낳은 자식이나 다 노비로 만드니, 양민(良民)이 날로 줄어들고 군병(軍兵)의 수효가 늘어나지 않습니다. 삼국으로 갈라져 있을 때 각기 10여 만의 군사를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나라가 삼국을 통일한 현재의 군사가 겨우 10만밖에 안 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노비가 많기 때문이며 달리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신이 원하옵건대, 양인 남자에게 출가시키는 조종(祖宗)의 법을 회복하여 양민을 넓히게 하소서. 국가에서 토지에 대하여는 5년으로 기한을 정하고  노비에 대해서는  정유년(1417년 태종 17)에 한 번 제한한 바 있었으나, 그 법이  통용되지 못했고, 소장을 낸 뒤 5년 동안으로 정한 법 또한 완전하기 못했습니다. 선왕께서도 소송이 제기되는 것을 싫어하시어 일찍이 단송도감(斷訟都監)을 설치하여 송사를 단절토록 하였으나, 끝내 단절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법 자체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육상선(陸象先)이, ‘천하에는 본디 아무 일이 없는데 용렬한 사람이 어지럽혀 번거롭게 만든다.’ 하였습니다. 무릇 왕자(王者)의 법은 만세에 통하는 것인데, 어찌 금년에는 백문(白文 관인이 없는 문서)을 쓰고, 내년에는 관문(官文)을 쓸 것입니까. 법은 세밀하게 하면 할수록 협잡(그릇된 짓으로 남을 속임)할 것을 더 열어놓기 마련입니다. 서로 도망한 종의 자식이라 말하고, 또 도망한 여종의 소생이라고 말하면서, 양민(良民)을 점찍어 개인 노비로 빼앗으니, 소송이 분분하기 그지없습니다. 심지어 형제, 숙질이 한 가정에서 반목하며, 가까운 친척 간에 원수가 되기도 하여 풍속을 손상시키고 무너지게 하는 것은 모두 여기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신은 원컨대, 노비 소송의 기한을 정하되, 단지 나누어 가질 노비를 독차지할 것 외에 10년간 시집자(時執者)와 10년간 양역자(良役者)는 다시 처결해주지 말게 하소서. 사진 1 창덕궁 희정당 (연산군이 김일손을 친국한 곳) 사진 2 희정당 (측면 촬영)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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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20-02-23 / 뉴스공유일 : 2020-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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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00년에 가장 공정하게 인사를 한 이조판서는 누구일까? 선조 때 이후백(1520∼1578)이다. 1578년 6월1일자 선조수정실록에는 이후백의 일화가 있다. 이후백이 이조판서 시절에 힘써 공론을 숭상하고 어떤 청탁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무리 친구라도 자주 와서 안부를 살피면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하루는 친척이 찾아와서 대화 중에 벼슬을 부탁하였다. 이후백은 얼굴빛이 변하면서 작은 책자 하나를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앞으로 관직에 제수할 사람들 명단이었다. 친척의 이름도 그 속에 기록되어 있었다.    이후백이 말하기를, “내가 여기에 기록한 것은 장차 천거하기 위함이었소. 그런데 지금 족친께서 벼슬을 구하는 말을 하고 있으니, 청탁한 이가 벼슬을 얻게 된다면 이는 공정한 도리가 아닐 것이요. 참으로 애석하구려. 그대가 말을 하지 않았다면 벼슬을 얻었을 것인데.”하였다.  그 친척은 매우 부끄러워하면서 물러갔다. 이후백은 사람을 뽑아 임용할 때는 반드시 합당한지 여부를 두루 물어 보았고, 만약 잘못 등용한 사람이 있으면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내가 나라 일을 그르쳤다.’하였다.  1575년부터 조정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하였음에도 이후백의 공정한 인사는 시비를 걸 사람이 없었다. 동인의 김효원은 그가 서인의 심의겸과 친하다고 하여 “이후백은 다만 판서의 재목일 뿐이다. 만약 정승이 되기에 이른다면 내가 꼭 논핵할 것이다.”하였으나, 이후백은 연소한 신진 관료들도 싫어하지 않아 정승 물망에 올랐다. 그런데 그가 호조 판서를 마지막으로 죽었으니 애석한 일이다.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에 나오는 일화이다.   이후백이 함경도 관찰사에서 영전하여 이조판서가 된 것은 1577년 10월이다. 그는 1575년부터 함경도 관찰사를 하였는데 ‘청렴 근신하고 밝게 살피어 시정(施政)에 조리가 있었고, 떠난 뒤에 백성들이 그의 선정(善政)을 사모하여 비를 세우고 덕을 기렸다’.(선조수정실록 1577년 10월 1일) 함경도 관찰사 시절에 이후백의 별명은 ‘곤장 감사’였다. 그는 각 진을 순시하면서 변방 장수들에게 활쏘기 시험을 치렀는데 실력이 없는 자는 곤장을 때려 벌을 주었다. 당시에 이순신(1545∼1598)은 1572년에 무과에 응시하여 말에서 떨어져 낙방한 후, 4년 뒤에 재도전하여 무과에 급제했다. 이후 그는 1576년 12월에 첫 보직으로 ‘삼수갑산’으로 유명한 함경도 최북단 삼수 고을의 동구비보 권관(종9품 경비초소 초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여진족의 침범에 소임을 충실히 하였고 활도 잘 쏘아 이후백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제장명은 ‘이순신 파워인맥’ 책에서 ‘강직 · 청렴한 이후백이 이순신의 공직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서술하고 있다. 1581년에 이순신이 전라도 고흥군의 발포만호로 근무할 때 전라좌수사 성박이 거문고를 만들기 위하여 발포 객사 뜰 앞의 오동나무를 베어오라고 하였을 때 ‘오동나무는 나라 것이니 함부로 벨 수 없다.’고 말한 것도 이후백의 청렴과 강직을 본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이후백은 직분을 다하고 스스로 단속하여 청고(淸苦)함을 지키니, 육경(六卿)의 지위에 이르렀어도 빈한하고 검소하기가 유생과 같았다. (선조수정실록 1578년 10월1일) 아울러 그는 한시(漢詩)의 대가였다. 이름도 당나라 시선 이백(李白 701-762) 이후로 태어난 사람이라 하여 후백(後白)이라 했고, 호(號)도 이백의 호 청련(靑蓮)을 그대로 썼다. 유몽인이 지은 『어유야담』에는 이후백과 고봉 기대승(1527∼1572)의 문장 겨루기 일화가 실려 있는데, 광주목사 오겸이 두 사람을 초청하여 이틀간 문장 시합을 시켰다. 첫날은 이후백이 시 짓기에서 이기고, 둘째 날은 기대승이 문장 짓기에 이겨서 청련과 고봉은 비겼다 한다.  경상도 함양에서 이후백은 9세에 부모를 모두 여의고 큰아버지 밑에서 지내다가 16세에 강진으로 가서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강진군 작천면 박산서원에는 그의 신위가 삼당시인 옥봉 백광훈(1537∼1582) · 고죽 최경창(1539∼1583)과 함께 배향되어 있는데, 기생 홍랑과 애틋한 사랑을 한 최경창은 이후백과 마찬가지로 청백리였다. 인사가 만사(萬事)이다. 그런데 때로는 정실(情實)에 빠져 인사가 망사(亡事)가 되기도 한다.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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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20-02-21 / 뉴스공유일 : 2020-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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