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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 11월 하순에 강진에 유배 온 정약용은 강진읍내 동문 밖 주막집 노파가 내준 토담집 방에서 지냈다. 1804년 여름에 정약용은 ‘여름에 술을 대하다[夏日對酒]’ 시를 지었다. 이 시는 1060자에 달하는 장편 고시(古詩)이다. 그러면 시를 읽어보자. 1. 나라 임금이 토지를 소유함은  비유컨대 부잣집 영감 같은 것 영감 밭이 일백 두락이고 아들 열이 제각기 분가하여 산다면 한 집에 열 두락씩 주어 먹고 사는 형편을 같게 해야 마땅한데 약은 자식이 팔구십 두락 삼켜버리니 어리석은 자식(癡男) 곳간은 늘 비어 있네. 정약용은 임금이 토지를 불평등하게 분배한 것을 한탄하고 있다. 이런 한탄은 정약용의 산문 ‘원정(原政)’ 첫 부분에 잘 나타나 있다.    “정(政)의 뜻은 ‘바로잡는다.’는 말이다. 다 같은 우리 백성인데 누구는 토지의 이로움을 남들 것 까지 아울러 가져 부유한 생활을 하고, 누구는 토지의 혜택을 받지 못하여 가난하게 살 것인가.” 시는 계속된다. 약은 자식 비단옷 찬란히 빛나는데  어리석은 자식(癡男)은 병약에 시달리네.  영감이 눈을 들어 그 광경 보면   불쌍하고 속이 쓰리겠지만             그대로 맡기고 직접 정리를 하지 않아  서쪽 동쪽 제멋대로 돼버린 것이네.    똑같이 받은 뼈와 살인데  부모의 사랑이 왜 불공평한가.        근본 강령이 이미 무너졌으니  만사가 꽉 막혀 불통인 것이지.       한밤중에 책상 치고 벌떡 일어나  탄식하며 높은 하늘을 우러러 보네     이렇듯 세상은 불공평하다. 나라가  다 같은 백성에 대하여 차별대우를 하고 있다.   2. 많고 많은 저 백성들  모두 똑같이 백성들인데     마땅히 세금을 거둬야 한다면  부자들에게나 거둘 일이지    어찌하여 유독 힘없는 백성에게만 피나게 긁어가는 정사(割政)를 하는가.  조세 불공평에 대한 탄식이다. 그런데 정약용의 시대만 그런가? 월급쟁이는 원천징수 당하는데, 전문직·기업인들은 세금을 제대로 내고 있나? 군보(軍保)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지   이다지 모질게 법을 만들었나. 일 년 내내 힘들여 일을 해도 제 몸 하나도  가릴  길이 없고         뱃속에서 갓 태어난 어린 것도  백골(白骨)이 진토가 된 사람도           그들 몸에 요역(徭役)이 모두 부과되어  하늘  곳곳마다 울부짖는 소리. 양근까지 잘라버릴 정도니  그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정약용이 1803년에 지은 애절양(哀絶陽) 시가 다시 생각난다. 군정의 폐단, 즉 황구첨정 · 백골징포를 통탄하고 있다.   호포법은 논의 있는 지 오래되어  그 뜻은 균등하고 타당했는데  작년에 평양 감사 이 법 시행해 봤지만  수 십일도 되지 않아 그만두었네. 만인이 산에 올라 통곡하거니  무슨 재주로 임금의 뜻을 펼 수 있으리.  먼 곳 가려면 가까운 데서 시작하고  낯선 사람 다스리려면 가까운 친척부터 하는 법  어찌하여 굴레와 다리 줄을 가지고  야생마부터 먼저 길들이려 드는가. 1) 놀라서  손을 빨리 빼는 것은 물이 끓기 때문이니 어떻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리     서쪽 백성들 오랜 세월 억눌려 지내  십세(十世) 동안  벼슬 길 막혀 버려서  겉으로야 공손한 체하지만  가슴속은  언제나 사무친 원한     서쪽 백성은 서도 (西道), 즉 평안도와  황해도 백성을 말한다.  지난번에 왜놈들 쳐들어 왔을 때  의병들 곳곳에서 일어나 활약했지만   서쪽 백성들은 유독 수수방관한 것은  진실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이지. 그랬다. 임진왜란 때 함경도에서 정문부가 의병을 일으켰다. 하지만 국경인은 임해군과 순화군을 잡아서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겨준 부역자였다. 그리고 다산이 이 시를 쓴 7년 후인 1811년에 서북인에 대한 차별이 폭발하여 홍경래 난이 일어났다.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 속이 끓어올라   술이나 진탕 마시고(痛飮) 진(眞)으로 돌아가리. 정약용은 더운 여름날에 술을 진탕 마셨으니 흠뻑 취했을 것이다. 사진    자화상 (정약용의 외증조부인 공재 윤두서가 그렸다.) 1) ‘굴레와 다리 줄’은 말머리를 묶는 가죽 끈과 말의 앞발을 가지 못하게 묶는 줄로 『장자』 책에는 백락이 야생마를 길들이는 도구중 하나이다.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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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칼럼

김일손이 제천현의 객관 서쪽 집의 서재를  치헌(癡軒)이라고 이름한   네 가지 이유를 대자 권경유가 말했다. “어리석음을 가지고 나를 조롱하는 것은 좋지만, 나의 어리석음으로써 이 공관(公館)을 욕되게 하는 것은 옳지 않네.” 그러자 김일손이 답했다. “아 천지 사이의 만물은 모두 조물주가 주관하는 것인데, 이를 크게 보면 어느 물건이 공물 (公物)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한 물건에 의탁한다면 사사롭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굳이 사사롭게 여긴다면 한 고을의 물건이 6년 임기 내에 모두 사물(私物)에 불과할 것이요, 이를 공물로 여긴다면 이 한 몸, 한 가정도 역시 백년의 공물일 뿐이다.  유종원(柳宗元)도 오히려 유주(柳州)의 시내 이름을 우(愚)라 하였거늘, 지금 어찌 제천의 헌을 치(癡)라 이르지 못하겠는가?”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유종원(773~819)은 798년에 급제하여 집현전 정자로 있다가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 한유(768∽824), 유우석 등과도 친교를 맺었는데, 805년에 헌종(憲宗 778-820, 재위 805-820)이 즉위하자 정치 개혁의 새로운 바람이 일었다. 그는 왕숙문과 가까이 지냈는데, 왕숙문이 정권을 잡자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으로 발탁되었다. 왕숙문 등은 중앙의 권력을 강화하는 조치인 영정(永貞, 헌종의 연호)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대신들의 반발이 격렬하여 개혁은 실패했다. 806년에 유종원은 영주사마(永州司馬)로 좌천되었다. 영주는 지금의 후난성 링링시이다. 이후 그는 다시 중앙에 돌아오지 못하고, 815년에는 유주자사(柳州刺史)로 옮겼고 819년에 47세로 유주에서 죽었다.   유종원은 강설(江雪) 한시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千山鳥飛絶   천산조비절 萬徑人踪滅   만경인종멸 孤舟蓑笠翁   고주사립옹 獨釣寒江雪   독조한강설 온 산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모든 길엔 사람 자취가 끊어졌네. 외로운 배엔 도롱이에 삿갓 쓴 늙은이 눈보라 치는 추운 강에서 홀로 낚시하네.  눈 내리는 추운 강에서 홀로 고기 잡는 늙은이.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시키는 시이다. 시중유화(詩中有畵)다. 이 시는 유종원이 영주사마로 좌천된 시절에 쓴 시인데, 정치적 실의와 고독감을 극복하려는 유종원의  강한 정신력을 느끼게 한다. 한편 김일손은 『치헌기』에서 ‘유종원도 오히려 유주(柳州)의 시내 이름을 우(愚)라 하였거늘, 지금 어찌 제천의 헌을 치(癡)라 이르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그런데 자료를 검색하여 보니 우계(愚溪)는 유주(柳州)가 아니라 영주(永州)의 시내이름이다. 유종원은  좌천되어 영주로 내려 온지 5년이 되는 810년에 임시 기거하던 용흥사(龍興寺)의 곁방에서 염계(冉溪) 동남쪽으로 이사를 했다. 그는 염계(冉溪) 개울가를 우계(愚溪)로 이름 짓고  8개의 경관을 만들어 그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위안으로 삼았는데, 이것이 「팔우시(八愚詩)」이다. 아쉽게도  「팔우시」는 원본이 사라졌고, 그 서문만 남아 있다. 바로 「우계시서(愚溪詩序)」이다. 이를 읽어보자. 1) 관수(灌水) 북쪽에 시냇가가 있는데, 동쪽으로 흘러 소수(瀟水)로 들어간다. "일찍이 염씨(冉氏)가 이곳에 살았기 때문에 이 시냇가를 염계(冉溪)라고 불렀다"고 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이 물로 염색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효능으로 이름을 지어 염계(染溪)라고 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나는 바보(愚) 같이 죄를 짓고 소수로 귀양 왔는데  이 시냇가를 좋아하여 2, 3리 들어가 보니 더욱 아름다운 곳이 나타남에 여기에 집을 지었다. 옛날에 우공곡(愚公谷)이 있었지만, 나는 이 시냇가에 집을 짓고도 아직 이름을 정하지 못했는데 사람들 사이에 여러 가지 말이 많아 바보 시냇가 즉 우계(愚溪)로 이름 지었다. 우계에 있는 작은 언덕을 사서 바보 언덕(愚丘)라 하고, 우구(愚丘)로부터  동북쪽으로 60보를 가면 샘이 나오는데, 그것을 또 우천(愚泉)이라 불렀다. 우천은 구멍이 모두 6개로, 산 아래 평지로 흘러가는데 아마도 물이 위로 솟아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 물이 합류하여 구불구불 남쪽으로 내려가 우구(愚溝)가 되었고,  흙과 돌을 쌓아 좁은 곳을 막으니 바보 연못(愚池)이 되었다. 바보 연못의 동쪽은 우당(愚堂)이다. 그 남쪽은 우정(愚亭)이고, 연못 가운데는 우도(愚島)이다. 잘 생긴 나무와 기이한 돌이 섞여 있어 모두 기이한 산수인데, 나 때문에 모두 어리석다는 욕을 먹고 있는 것이다. 물은 지혜로운 사람이 즐기는 것인데, 지금 이 시냇물만 유독 어리석다는 이름으로 욕을 보고 있는 것은 어째서인가? 아마 물 흐름이 아주 낮아 관개를 할 수 없고, 또 물살이 급하고 큰 돌들이 많아 큰 배가 들어갈 수 없으며, 그윽하고 깊으면서도 얕고 좁아 용들도 좋아하지 않으며 비구름을 일으키지 못하니, 세상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 꼭 나를 닮았다.  그러니  비록 어리석다는 욕을 먹어도  괜찮을 것이다. 옛날에 영무자(寧武子)는 “나라에 올바른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어리석었다.”하였으니, 이는 지혜롭지만 어리석은 체 했던 것이요, 안자(顔子)는 “하루 종일 어리석은 것처럼 거역하지 않았다.”는데, 이는 총명하면서도 어리석은 척 했던 것이다. 이는 진짜 어리석은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지금 나는 도(道)가 있는 세상을 만났지만, 이치에 어긋나고 사리에 거슬리니, 나처럼 어리석은 이는 없을 것이다. 아울러 이 시냇물을 차지하려고  다툴 사람이 없는 것 같으니 내가 마음대로 이름을 우계라 붙인 것이다. 시냇물이 비록 세상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지만, 만물을 잘 비춰 주고, 물이 맑아 훤히 들여다보며, 금속을 곱게 울려 어리석은 자로  하여금 기뻐 좋아하여 떠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비록 세속에 영합하지 못했지만, 여기서 글 쓰는 일로 스스로 위로하고, 만물을 씻어내기도 하며, 갖가지 자태를 갖추어 피하는 일이 없으니, 이 어리석은 표현으로 우계(愚溪)를 노래하면, 멍청하면서도 도리를 어기는 일이 없고, 잘 모르면서도 만물과 함께 돌아가서, 자연의 기운을 초월하여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들과 엇섞여 적막과 고요함 속에 나 자신마저 잊겠노라. 이에 「팔우시(八愚詩)」를 짓고 우계(愚溪)의 돌 위에 새기는 바이다. 1)  네이버에서 「우계시서」를  검색하여 여러 자료를 종합 정리하였다. 사진 1  김일손 묘소 (경북 청도군)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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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칼럼

1803년에 정약용은  황칠(黃漆) 시를 지었다. 이 시에서 정약용은 공납의 폐해를 지적했다. 공납(貢納)은 백성이 그 지방의 토산물을 조정에 바치는 것인데 황칠도 공납 대상이었다. 시(詩)를 읽어보자.  그대 아니 보았던가. 궁복산(弓福山)에 가득한 황칠을  금빛 액 맑고 고와 반짝반짝 빛이 나지         껍질 벗기고 즙 받기를 옻칠 받듯 하는데    아름드리 나무애서 겨우 한잔 넘칠 정도     궁복산이 어디인가? 강진 근처 어디 일 것이리라. 황칠나무는 해발 700m 이하의 전라도 · 제주도 해안지대에서 야생한단다.    상자에 칠을 하면 붉고 푸른 색을 뺏어       잘 익은 치자물감 어찌 이와 견줄손가.       서예가의 경황지로는  더더욱 좋아서 납지(蠟紙) 양각(羊角) 모두 그 앞에선 쪽도 못쓰네.     경황은 경황지(硬黃紙)를 말하는데 당지로 노란 물감을 들인 종이이다. 서예지로는 최고이다. 납지는 밀이나 백랍을 먹인 종이이고, 양각은 양각등(羊角燈)으로 염소 뿔을 고와 얇고 투명한 껍질을 만들어서 씌운 등이다. 그런데 다산은 황칠은  납지, 양각보다 단연 뛰어남을 강조한다.   황칠(黃漆)은 금빛을 띠면서도 투명해 나무 바탕의 나뭇결을 생생하게 나타내어 목칠공예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고려도경〉에는 황칠이 조공품이라고 적혀 있고, 〈계림유사〉에도 고려의 황칠이 섬에서 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나무 명성이 온 천하에 알려져서         박물지에 왕왕   그 이름을 올라있네            공물로 지정되어 해마다 공장에게 실려 가는데 징구하는 아전들 농간을  막을 길이  없어     지방민들 그 나무를 악목이라 이름하고         밤마다 도끼 들고 몰래 와서 찍었다네.          방납의 폐해가 얼마나 심했던지  지방 주민들이 황칠나무를 베었을까? 나무가 없어지면 공물로 바칠 이유도 없지 않는가.   지난 봄에 임금님이 공납 면제하였더니    영릉복유 되었다니 이 얼마나 상서인가      영릉복유(零陵復乳)는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유종원(773∽819)의 〈영릉복유혈기(零陵復乳穴記)〉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영릉(零陵)에서 생산되는 석종유(石鍾乳)를 공물로 바치는데, 그것을 채취하기가 너무 힘이 들고 게다가 정당한 보상도 없어 지방민들이 석종유가 다 없어졌다고 보고하였다. 그 후 최민이 자사(刺史)로 와서 선정을 베풀자 백성들은 감복하여 석종유가 다시 생겨났다고 보고하였단다. 바람 불어 비가 오니 죽은 등걸 싹이 돋고    가지가지 죽죽 뻗어 푸르름이  어울리네.     한편  1804년 여름에 정약용은 주막집 토담 방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모기 한 마리가 왱하고 날아다니면서 물어뜯었다. 견디다 못해 정약용은 ‘얄미운 모기[憎蚊]’ 시를 지었다.    맹호가 울밑에서 으르렁대도   나는 코골며 잠잘 수 있고  긴 뱀이 처마 끝에 걸려있어도 누워서 꿈틀대는 꼴 볼 수 있지만 모기 한 마리 왱하고 귓가에 들려오면 기가 질려 속이 타고 간담이 서늘하단다. 부리 박아 피를 빨면 그것으로 족해야지 어이하여 뼈에까지 독기를 불어넣느냐 베 이불을 덮어쓰고 이마만 내놓으면 금방 새 울퉁불퉁 혹이 돋아 부처 머리처럼 돼버리고 제 뺨을 제가 쳐도 헛치기 일쑤이며 넓적다리 급히 만져도 그는 이미 가고 없어 싸워봐야 소용 없고 잠만 공연히 못 자기에 여름밤이 지루하기 일 년과 맞먹는다네. 몸통도 그리 작고 종자도 천한 네가 어찌해서 사람만 보면 침을 그리 흘리느냐 밤으로 다니는 것 도둑 배우는 일이요 제가 무슨 현자라고 혈식을 한단 말인가. 생각하면 그 옛날 대유사에서 교서할 때는 집 앞에 창송과 백학이 줄서 있고 유월에도 파리마저 꼼짝을 못했기에 대자리에서 편히 쉬며 매미소리 들었는데 지금은 흙바닥에 볏짚 깔고 사는 신세 내가 너를 부른 거지 네 탓이 아니로다. ‘지금은 흙바닥에 볏짚 깔고 사는 신세(如今土床薦藁鞂)’라는 마지막 구절은 정약용이 기거한 토담집 방의 상태를 여실히 보여준다. 지금의 강진 사의재는 너무 호사스럽다. 이 시 구절을 고증삼아 좀 더 누추하게 복원되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인데. 그런데 어찌 보면 모기는 ‘백성을 가렴 주구하는 탐관오리’로 비유된다.  일종의 우화시(寓話詩)이다. 사진 1.  사의재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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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9-22 / 뉴스공유일 : 2019-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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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칼럼

1801년 11월 하순에 강진에 유배 온 정약용은 강진읍내 동문 밖 주막집 노파가 내준 토담집 방 한 칸에서 지냈다. 1802년 초봄에 주막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던 아전의 자식들이 정약용에게 배우러 찾아왔다. 황상, 손병조 등 네 사람이었다. 다산은 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그러면서 그도 심리적 안정을 찾았다. 1803년에 정약용은 주막의 토담집 방을 ‘사의재(四宜齋)’라고 이름 지었다. 사의재기를 읽어보자. “사의재(四宜齋)란 내가 강진에서 귀양 살 때 거처하던 방이다. 생각은 마땅히 담백해야 하니 담백하지 못하면 곧바로 맑게 해야 한다. 외모는 마땅히 엄숙해야 하니 엄숙하지 못하면 곧바로 단정히 해야 한다. 말은 마땅히 적어야 하니 말이 많다면 빨리 그쳐야 한다. 움직임은 마땅히 무거워야 하니 무겁지 않으면 곧바로 더디게 해야 한다. 이에 그 방의 이름을 ‘사의재’라고 하였다. 마땅하다[宜]라는 것은 의롭다[義]라는 것이니, 의로 규제함이다. 나이 들어가는 것이 염려되고, 뜻과 학업이 쇠퇴하여 가는 것이 슬퍼지므로 자신이 성찰하기를 바랄 뿐이다.” 신독(愼獨)과  수신(修身)의 자세를 갖추어 다시 시작하겠다는 다짐 같다. 사진 1  동문 주막집  사진 2  사의재 편액 정약용은 1803년(순조3) 가을에  ‘애절양 (哀絶陽)’ 시를 지었다. 황구첨정, 백골징포 등 군포세 수탈을 고발한 것이다. 이어서 정약용은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치우다 [蟲食松]’ 시를 지었다. 이 시는 소나무를 선량한 백성으로, 송충이를 탐관오리로 상정하고 읊은 우화시(寓話詩)이다.  그러면 시를 읽어보자.   그대 보지 않았던가아니 보았던가, 천관산 가득 메운 소나무를  君不見天冠山中滿山松 천 그루 만 그루가 뭇 봉우리마다 다 뒤덮었네   千樹萬樹被衆峯 울창하고 굳굳한 노송뿐만 아니라  豈惟老大鬱蒼勁 어여쁜  어린 솔도 총총히 돋았는데  每憐穉小羅丰茸 천관산은 전남 장흥군에 있는 산이다. 장흥과 강진은 인접해 있다.    하룻밤 새 해충이 온 천지를 가득 메워      一夜沴蟲塞天地 뭇 주둥이가 솔잎을 떡 먹듯 하였다네.      衆喙食松如餈饔 갓난 때도 살 빛 검어 볼썽사납더니         初生醜惡肌肉黑 노란 털에 붉은 반점 자랄수록 흉측하네.     漸出金毛赤斑滋頑兇 처음에는 잎을 갉아먹어 진액을 말리더니     始𠯗葉針竭津液 살갗까지 파고들어 옹이가 되게 하지         轉齧膚革成瘡癰                                           가지하나 까닥 못하고 소나무 점점 말라붙어   松日枯槁不敢一枝動 곧추서서 죽는 모습 어찌 그리 공손한가.      直立而死何其恭 연주창에 문둥병 걸린 가지 줄기 처량하니     瘰柯癩幹凄相向 상쾌한 바람 울창한 숲을 어디 가서 찾으리오.  爽籟茂樾嗟何從 하늘이 솔을 낼 때 깊은 생각 있었기에         天之生松深心在 사시사철 보살피고 한겨울에도 푸르지.         四時護育無大冬 뭇 나무들 다 제치고 가장 높은 사랑받았는데   寵光隆渥出衆木 복사꽃 · 오얏꽃과 화려함을 다툴손가.          況與桃李爭華穠 태실과 명당이 만약에 무너지면              太室明堂若傾圮 들보되고 기둥되어  조정에 들어왔고         與作脩梁矗棟來朝宗 왜놈이나 유구가 만약에 덤벼올 때엔           漆齒流求若隳突 큰 배를 만들어 적의 예봉 꺾었지            與作艨艟巨艦摧前鋒 소나무는 대들보로 쓰였고, 판옥선을 만드는 자재였다. 판옥선은 삼나무로 만든 왜선보다 튼튼했다. 한편 유구는 오키나와이다. 1879년에 일본은 유구를 일본 영토로  편입시켰다.  네 욕심만 채우느라 지금 이리 죽여 놨으니   汝今私慾恣殄瘁 말하려니 내 기가 받쳐 오르네.               我欲言之氣上衝 어찌해야  번개 같은  벼락도끼를 얻어다가   安得雷公霹靂斧 네 족속들 모조리 잡아 이글대는 용광로에다 처넣어버릴까                                            盡將汝族秉畀炎火洪鑪鎔   벼락 도끼로 모두 찍어서 이글대는 용광로에 처넣고 싶은 것이 어찌 송충이 뿐일까? 선량한 백성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탐관오리는 모두  송충이다. 지금은 어떤가? 우리 사회를 좀 먹는 송충이들은 없나?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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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9-16 / 뉴스공유일 : 2019-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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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5년 3월에 김일손은  사직하고 경상도 청도로 귀향하면서  ‘한강을 건너며’ 시를 지었다. 말 한 마리 느릿느릿 한강을 건너니  낙화가 물에 떠내려가니 버드나무가 비웃음을 머금은 듯 미천한 신하 이제 가면 언제 다시 돌아오겠는가. 그래도 고개 돌려 남산 바라보니 이미 봄은 저물었더라. 渡漢江           도한강 一馬遲遲渡漢津   일마지지도한진 落花隨水柳含嚬   낙화수수류한빈 微臣此去歸何日   미신차거귀하일  回首終南己暮春   회수종남기모춘 사직을 하고 서울을 떠나는 김일손은 낙화와 같은 신세이다. 이제 가면 다시 오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고개를 돌려 남산을 바라보는 것은 미련이 남아 있었던 것일까?   김일손은 경상도 청도로 낙향하면서 충청도 제천에 들렀다. 거기에는  김종직의 제자인 권경유(權景裕 ?∽1498)가 제천현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권경유는 자는 자범(子汎), 호는 치헌(痴軒)으로 1483년(성종 14)에 진사가 되고, 148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김일손이 1486년에 문과급제 하였으니 과거급제는 김일손보다 1년 빠르다. 권경유는 예문관검열에 등용된 뒤 홍문관정자를 거쳐, 1490년에는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홍문관 교리, 검토관, 이조좌랑(1491년)에 이르렀다. 김일손을 만난 권경유는 너무 좋았다. 그는 김일손에게 자기의 서재를 보여주면서 서재의 기문(記文)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김일손의 문장은 조정에 널리 알려졌다. 김일손 사후인 1507년 10월에 중종 임금은 그의 유문(遺文)을 구하기 위해 “내가 듣기로는 중국 사람들이 김일손의 문장은 당나라 문장가 한유(769∽824)에 비한다는 데, 나는 아직 보지 못했으니 그의 문장은 과연 어떤 것인가?” 하는 전지를 내리고, 곧 교서관에게 명하여 청도 본가에 가서 유고를 구해오라고 할 정도였다. 1) 김일손은 서재의 이름을 치헌(癡軒)이라 짓고 기문을 지었다.   그러면 ‘치헌기(癡軒記)’를 읽어보자. “나의 벗 권자범(권경유의 자)이 이 고을의 원님이 된지 3년 만에 그 객관의 서쪽에다 집을 새로 짓고 헌함(軒檻 누각 또는 대청 기둥 밖으로 돌아가며 놓은 난간이 있는 좁은 마루나 방)을 만든 다음에 나에게 기문을 지어달라고 청하였다.   내가 자범에게 말하기를 “이름부터 먼저 짓고 기문을 쓰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치헌(癡軒)이란 이름이 어떠한가?” 하였더니, 자범이 치(癡)자의 뜻을 물어왔다. 내가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자, 자범은 끝내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얼마 후에 감히 말하기를 “왕숙과 왕연의 어리석음은 덕을 감추는 어리석음이요, 간교한  어리석음과 질투하는 어리석음은 교활한 자의 어리석음이요, 문예를 하면서도 서치(書癡)가 되고, 무예를 하면서도 호치(虎癡)가 된 것은 재주가 뛰어난 어리석음이다. 여기에서 왕숙은 중국 진나라(280-?) 사람으로 처음에는 그의 숨은  덕을 알지 못하고 어리석다고 했는데, 그의 조카 왕제(王濟)가 우연히 이야기 하다가 탄식하기를 “집에 명사(名士)가 있는데 30년 동안 알지 못하였구나.”하였다. 글은 이어진다.   술을 끊은 자도 어리석다 하고, 벼슬자리를 그만두는 것도 어리석다하여, 옛날에 이 치(癡)로써 이름을 삼은 이가 한둘이 아니었듯이 그대의 어리석음 역시 하나로는 만족할 수 없다. 그대의 어리석음은, 첫째 세상 사람들은 말을 영리하게 하는 데, 그대는 홀로 어리석어서 말만 하면 남의  시기를 사게 되고, 세상 사람들은 아첨을 잘하는 데, 그대는 홀로 행동이 어리석어서 남에게 밉살스럽게 보이고   둘째 세상 사람들은 진취에 교묘하여 벼슬을 얻어서는 잃을 까 봐 두려워하는데 그대는 교리와 같은 청반(淸班)으로서 스스로 낮추어 후미진 고을의 현감이 되었으니 이는 벼슬살이의 어리석음이요. 셋째 세상 사람들은 정무(政務)를 처리하는 데 재빨라서 백성에게 임하면 이름을 앞세우고, 윗사람을 받들 때면 명예를 앞세우는데 그대는 홀로 느긋이 제작에 앉아 읊조리며, 토호(土豪)와 간사하고 교활한 자는 물리치고 홀아비와 과부는 보살펴 주는 데에 마음을 두고, 세금을 독촉하는 데는 소극적이었으니 이는 정사(政事)에 어리석은 것이다.      넷째  세상에 관리 노릇하는 자로서 용렬한 자는 백성의 노고를 빙자해서 객관의 짐이 피폐한 것을 보고도 허물어진 채로 방치해 두고는 일을 간략하게 처리한다고 스스로 말을 지어내며, 일을 잘 한다는 자는 집을 높이 세우고 담장을 쌓는 등 못 하는 일이 없는데, 토목이 원성(怨聲)의 요괴임을 알지 못하고 부지런하고 재간이 있다는 명성을 크게 떨치고 있다.   그런데 그대는 제천에 와서 퇴락한 집을 수리하여, 기왕의 졸렬한 자의 노릇도  하지 않거니와 또 일을 잘 하는 자의 노릇도 못하고, 노는 일손을 부려 백성을 괴롭히지 않으려고 도리어 그대의 마음만 수고롭게 하였으니, 이는 일을 함에 있어서의 어리석음이다. 이제 그대의 어리석음을 통틀어서 이 헌(軒)의 편액으로 매다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2) 이렇게 김일손은 권경유의 바보스런 모습을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서재의 이름을 치헌(癡軒)으로 지었다.  사진 1 자계서원 안내판 (경북 청도군 이서면 소재) 사진 2  자계서원 사당인 존덕사 1)  박주, 김일손,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열전 1, 돌배개, 2003,  p 455,   2) 김일손 지음,  김학곤 · 조동영 옮김, 탁영선생 문집,  탁영선생 숭모사업회, 2012, p 189-194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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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교부와 민간기구(재계, 학계 공동 구성)가 ‘예산과 민간기금 출연’ 통해  ‘한국학 진흥’에 앞장서 줘야 ■ 한국정부와 KF 한국국제교류재단이 적어도 선발주자 중국을 따라잡기 위해,  한국학 진흥 예산을 지금보다 30배 정도 증액하고, 장기적인 투자를 인프라 구축과 장학제도 운영해야 [이데이뉴스 전국취재본부장 강진원 기자 데스크 칼럼] 지난 2012년부터 시작된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 신화와 전 세계적인 아이돌 ‘방탄소년단(한국 한자: 防彈少年團, 영어: BTS)’의 눈부신 활약으로 전 세계적 한류열풍 으로 한국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자연스레 한국학에 대한 외국인들의 수요는 늘어나고 있지만 공급은 턱없이 부족한 상태, 한류 열풍이 온전히 한국학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지않고, 또 외국에서 지한파를 만들어내지도 못하고 있는 극히 미미한 해외 한국학 인프라의 취약성! 국내외 한국학 연구 실태, ‘2018년 가을학기 등록 학생수(IUC)’ 중국 100명, 한국 3명, 일본 56명이다. 이중 국내는 국내 유일의 2018년도 하반기 성균관대 IUC 등록학생수는 단 3명이다. 처음으로 한국학자를 위한 성균관대 IUC 개설에 대한 기대는 큰데 그 실태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한국학은 그 인프라와 학생 유치를 위한 장학 제도가 거의 없어, 해외에서 한국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인프라와 지원제도가 초라한 실정이다.   앞으로 한국을 대변해줄 해외 각국의 지도자나 관료의 아예 없어 결과적으로 국제외교무대에서 중국과 일본의 대변해줄 세력은 있어도 한국을 대변 해 줄 세력이 없어 국제 외교무대에서 고립 무원의 실태는 역사왜곡, 영토분쟁, 위안부 등 인권 문제에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2012년 7월 글로벌 히트곡 ‘강남스타일’ 공개 이후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를 새롭게 썼던 ‘싸이’! 필자는 2015년 서유럽 6국 12일 여행  9일차, 2015년 6월 13일 (토) 오후 프랑스 파리 1889년 프랑스혁명 100주년 기념탑인 에펠탑 광장을 가 봤는데, 광장에서 전 세계인들이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열창하는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 신화는 7년째 현재진행형이다.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는 2019년 1월 9일 기준 유튜브 조회수 32억 6천만뷰를 돌파하였다니 탄생시킨 대 기록을 세웠다니 현재 진행형이다. ​ ‘방탄소년단(한국 한자: 防彈少年團, 영어: BTS)’은 2013년 6월 13일에 데뷔한 대한민국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소속의 7인조 보이 그룹, 전 세계적인 아이돌 ‘방탄소년단(한국 한자: 防彈少年團, 영어: BTS)’! ‘방탄소년단’은 2017년에는 ‘러브 유어셀프(LOVE YOURSELF)’는 2년 8개월 동안 이어진 빌보트 차트 1위의 전 세계를 강타한 노래, 이어서 2019년 4월 “방탄소년단의 새 앨범 '맵 오브 더 소울: 페르소나'는 방탄소년단이 여는 새로운 장의 시작이 될 것이다. '맵 오브 더 소울: 페르소나'가 빌보드 정상에 오른다면 1년 안에 '빌보드 200'에서 1위를 차지하는 세 번째 앨범이 될 것”이라고 알려졌다. 방탄소년단의 신기록 현재 진행형. 이러한 중차대한 시기에 한류열풍을 타고 한국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진 시기가 한국학을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속적으로 알리고해외에 지한파를 양산해내는 ‘한국학, 한국의 골든타임’이다. 한반도의 북핵위기는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2018년 4.27./5.26./ 9.19일)과 세 차례의 북미정상회담(2018년 6월 12일, 2019년  2월 27∼28일, 2019년 6월 30일)으로 대화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으나, 그 해결의 실마리는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질서상 북핵위기를 보면서 상대방 국가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위기해결이 안 된다는 점에서 해외에서 ‘한국학’의 진흥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 수가 있다. ‘한국학, 한국의 골든타임’  한국학 진흥은 왜 그리 중요할까? 이는 단순히 국가적 이미지 제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 청년들이  중국, 일본에 대해서는 잘 알게 되고, 한국에 대해서는 피상적으로 만 알게 될 경우, 그 국가 청년들이 나중에 성인이 되어 국가의 지도자, 관료 등 국가 정치,외교분야 고위직에 올라 섰을 때를 가정해 보자. 학국학을 정확히 알지 못해 한반도의 정세파악 등을 제대로 못하게 된다면  한국의 독도영유권, 일본의 식민지 지배, 강제징용, 강제징병, 위안부 역사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국제사회에 목소리를 낸 다 한들 과연 누구의 입장의 목소리를 들어줄까? 심히 우려되는 상황에 처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중국은 국가 차원에서 해외 중국학 진흥을 위해 국력을 집중하고 있다. 매년 한국학 연간  에산의 약 30배 자금을 쏟아 붇고 있는 중국학 예산을 바라보고 있다. 강도 높은 중국 수업을 진행하는 중국 IUP(Indiana University Program)는 중국 IUP(고급학술 중국어 전문 교육기관)이다. 세계각국에는 135개국 500개 공자학교, 100개  공자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일본은 23개국 24개 해외 사무소에서 일본학을 지원하고 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약 50여 년간 국가차원에서 해외에 일본학 진흥을 위해 국력을 기울여 오고 있었는데 일본경제 장기 침체로 정부 지원은 거의 중단 상태이나, 공공외교를 위해 민간재단 사사카와 재단을 만들어 일본학을 지원하고 있다. 사카와 재단은 워싱턴에 미국지부로 미국재단을 만들었는데 그 대표가 DNI(미국 국가정보국) 책임자 중 한 사람인 데니스 블레어이다. 사사카와 재단 유력인사가 사사카와료이치(1899년∼1995년 7월),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1924년 10월∼)이 있다. 사사카와 재단이 지원하는 일본학 진흥을 위해 앞장서고 있는 외무성 산하 일본국제교류기금(JF, Japan Foundation)이 일본학 진흥을 위해 장기적으로 사람에 투자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국가 차원의 해외 한국학 진흥도 미미한데다가, 민간기구 차원의 한국학 진흥은 너무나 초라하기 짝이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을 공공외교 원년으로 정하여 선포하고, 2016년 2월 ‘공공외교법’을 제정하여 대외 외교에 통합적이고 효율적이 공공외교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외교부는 ‘2017∼2022년 까지 제1차 대한민국 공공외교 기본계획’을 세워 ‘비전, 목표, 추진전략’을 세부화 하였다. KF 한국국제교류재단은 외교부 산하 공공 외교 전문기관으로서 한국한 진흥에 지원을 해 오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공공외교의 기반은 다졌으나, 사람에 투자하는 한국학 진흥은 예산투자와 한국학 인프라에 대한 투자가 없으면 그 효과는 전혀 없는데, 중국과 일본의 공공외교적 노력인 중국학과 일본학 투자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미국 대학에서 동아시아학과 신증설 교수 임용을 보면 동아시아 학문 연구자들이 중국학, 일본학 교수 채용이 대세로 한국학은 존재감이 없으며 한국정부와 한국학재단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고 있는 한국학 현주소는 미국내 한국학은 제대로 숨 조차 쉬지 못하고 있다. 스탠퍼드대학교 한국어 캠프 ‘숲속의 호수’라는 ‘한국어 캠프 촌장’ ‘한국명 주다희’ 씨와  미국인으로 ‘다프나 주르 교수’는 “한국어에 대해 그런 포괄적인 패키지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숲속의 호수’프로그램 밖에 없다”라고 안타까움을 말했다고 전했다. 요즈음 인기있는 노래 K-POP을 부르고, 자뭇 신나 춤추고, 한국문화를 배우는 것만이 한국학의 전부라고 한다면 결코 이건 바람직한 한류열풍이라고 볼 수 없다. 그나마스탠퍼드대 문화예술분야에 한류열풍의 명맥을 유지하는 것도 태권도에 대한 관심으로 한국을 찾은 뒤 한국인 남편과 결혼한 ‘다프나 주르 교수’덕분으로.‘숲속의 호수’프로그램은 독립된 건물이 없이 러시아관에 더부살이로 끼어있는 ‘한국어관’ 현실이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에서 한국어 캠프를 처음으로 만든 ‘로스킹 교수’는 18세 이하 한국어 캠프를 만들었는데 이렇게 나이가 많아서 배우면 늦으며, 아주 어릴 때 언어를 배워야 아주 한국어를 학습자가 될수 있다고 한다. 시몬느 박은관 회장은 한국어 교육을 위해 미국기관에 500만 달러(약 56억원)를 기부해 미국에 한국어빌리지‘콩고르디아 한국어마을’을 세우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생각도 한글날 특집 행사에 ‘로스킹 교수’가  인터뷰에 응해 알게되어 추진 한 것이란다. 한국 정부와 민간재단의 한국학 진흥 노력은 예산의 대폭적이고 장기적인 투자가 없이 그 저 숨 조차 제대로 못 쉬는 형국이다. 미국내 한국학 연구자는 ‘존던컨 미국UCLA 한국학 연구소장’ ‘아그네스 안, 한인2세, 요코이야기 교과서 퇴출 운동 활동가’, ‘로스 킹,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아시아학과장, 교수’, ‘이익환’, 2011년 워싱턴대 한국학 살리기 운동을 독립운동하는 식으로 지원했다는 ‘이익환, 한인 이민사 편찬위원회 회장’, ‘이남희, 미국UCLA 역사학과 교수’, ‘린다 김, USC 한국학 연구소, 차세대학자 양성 프로그램 담당자’, ‘캐서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 차세대 한국학자 양성프로그램 고문, 한미경제연구소(KEI) 소장’, ‘신기욱 미국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 연구소장, 교수’, ‘데이비드 맥스웰, 미국 민주주의 수호재단 선임연구위원’, ‘지그프리드 해커, 미국 스탠퍼드대 명예 교수, 스탠퍼드대 국제안보협력센터’, ‘다푸나 주르, 미국 스탠퍼드대 동아시아 학과 교수’, 미국에서 한국학을 지원하는 ‘김윤정 수석연구원, 재단법인 플라톤 아카데미’, ‘최선재 연구실장, 재단법인 플라톤 아카데미’ 등 너무나 극소수이다. 월드스타 ‘방탄소년단’한류 열풍이 2년 이상 최장기 한류 열풍이 부는 이때를 ‘한국학, 한국학의 골든타임’으로 외교부와 민간기구(재계, 학계 공동 구성)가 ‘예산과 민간기금 출연’을 통해  ‘한국학 진흥’에 앞장서 주었으면 한다.!!! 한국학 진흥을 위해서는 한국정부와 KF 한국국제교류재단이 적어도 선발주자 중국을 따라잡기 위한 노력일환으로 한국학 진흥 예산을 지금보다 30배 정도 늘여야만 한다. 필자는 전 세계 각국에 한국학 학교와 학과를 창설하고, 한국학 마을, 한국학 진흥 프로그램 운영에 국가적 명운을 거는 장기적인 투자를 인프라 구축과 장학제도를 운영해주기를 촉구하는 바이다.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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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5 목요일 맑음  <중략> 세상에 태어나 만난지 50주년 기념으로 친구와 함께 베트남 휴양지 나트랑을 다녀오기로 하고 예약을 했으나 친구의 피치 못할 프라이버시로 인해 혼자 여행길에 오를 수 밖에 없었다. <중략> 여행박사와 저녁 약속시간 보다 30분 빠르게 도착해 차분히 여권으로 나트랑 티켓팅을 앞좌석 창문쪽으로 결정하고서 여행박사 직원의 전화를 받고 반갑게 출국서비스를 받는다. 티웨이항공사에 수화물을 맡기고 티켓을 바꾼 후에 승차홈 안내를 받고 수속장으로 들어간다. 시간의 여유로움으로 한참을 여러 지인들에게 통화하고 00농협지점 팀장하고도 기부금 건으로 통화해 정리 후 티웨이항공사 비행기에 탑승한다. 벌써 11시 반이 지나고 있었으며 비행기는 인천공항을 이륙하였다. :2019-09-06 금요일 맑음  우리나라는 ‘링링’으로 태풍 걱정인데 개의치 않고 출국한다는데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부담감이 들었다. 2시간이 빠른 이곳 나트랑은 입국수속과 수화물 찾는 방식의 낙후함으로 빠르게 4시에 접어들고 있었고 현지 가이더와 함께 함께 여행할 일행으로 보이는 젊은 부부와 코모도호텔 로비에서 박 모 과장 즉 우리나라 가이더를 만났다. 첫인상에서도 달변이라는 생각인데 가이더 경력 8년을 강조하면서 대화가 너무 강압적이고 자기가 하자는 대로 하면 가장 좋다며 여행 일정표에 나와 있는 기본 옵션과 겹치는 일정, 여행지 등을 빠른 말로 설명해 가고 있었다. 젊은 부부는 이미 나트랑에 와 본 적이 있어 가이더가 강요를 해도 꿋꿋하게 이겨가고 있었다. 다만 기본 여행일정을 별 거 없다면서 죽죽 그어버리고 자기 주관적인 판단아래 먼저 여러 옵션으로 250달러를 강취(?)당하듯 하였다. 비용은 마사지 2회에 배타고 낚시포함 1회 가이더 팁 50불 베트남 최고의 랍스터관광식 등으로 지출된다는 것이다. 오늘 새벽 도착으로 모두 피곤하니 1시 반쯤 호텔 로비에서 다시 만나 여행을 하자고 가이더가 제의를 해 일단 숙소 2406호로 입실한다. 투룸으로 방이 널찍해 먼저 반신욕을 충분히 즐기고 낮잠으로 2어 시간 수면을 취한다. 이윽고 가이더를 만나 1시 50분에 베트남의 쌈요리 뷔페로 청경채 비슷한 야채에 그냥 새우튀김과 함께 맛있게 먹는다. 커피가 유명하다는 수제커피숍을 찾아 3층으로 올라가지만 열악한 베트남 식에 그냥 그렇다.   에스프레소 커피식 내림커피에 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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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9-09 / 뉴스공유일 : 2019-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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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5년에 정약용(1762∽1836)은 흑산도에서 유배중인 둘째 형 정약전(1758∽1816)에게 편지를 보낸다. 편지에서 정약용은 이렇게 한탄한다.  “세상은 썩어 버린 지 이미  오래입니다... 우리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있는 게 지금보다 더 심할 수 있겠습니까?  오호, 슬프기만 합니다.”    1800년 6월28일에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11살에 즉위하자 영조의 계비 정순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1801년 1월10일에 정순대비는 사학(邪學, 천주교)의 엄금하여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났다. 실은 집권세력 노론 벽파의 남인과 소론 시파에 대한 숙청이었다.  2월 8일 새벽에 정약용은 옥에 갇혔다. 그는 문초를 받고 19일 만에 풀려나서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현, 정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귀양을 갔다. 정약용의 셋째 형 정약종과 매형 이승훈은 이미 순교하였다. 그런데 9월 15일에 ‘황사영 백서 사건’이 또 터졌다. 황사영은 맏형 정약현의 사위였다. 정약용과 정약전은 다시 끌려 왔다. 그리하여 국문을 받았다. 혐의가 없어 목숨은 건졌지만, 다시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를 갔다. 1801년 11월22일에 두 사람은 나주에서 헤어졌다. 1801년 11월 하순에 정약용은 강진읍 주막집 노파가 내 준 방에서 기거했다. 1802년 초봄에 정약용은 아전의 자식 황상, 손병조 등  4명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1803년 겨울에 정약용은 주막집 방을 ‘사의재(四宜齋)’라고 이름 지었다. ‘생각과 용모와 말과 몸가짐’ 네 가지를 흐트러짐 없이 한다는 뜻이다. 이후 정약용은 1805년 겨울에 백련사 주지 혜장선사의 도움을 받아 보은산방으로 거처를 옮겼고, 1806년 가을에는 이청(李晴)의 집에서 지냈으며, 1808년 봄에 윤단(尹慱)의 초당인 다산초당으로 옮겼다. 이 때  부터  정약용은 호를 다산이라 했다. 사진 1  다산초당 한편 1809년과 1810년 연이어서 전라도 지역은 흉년이 들었다. 백성들이 굶주리고 큰 소요가 일어났다. 아낙들은 쑥과 죽으로 끼니를 때웠고, 유랑민들이 길을 메웠고, 버려진 아이들이 길거리에 즐비했다.   이런데도 탐관오리들은 사태를 수습할 생각은 전혀 안하고, 탐학만 일삼았다. 정약용으로서는 어찌 할 수가 없었다. 그는 평소에 아는 승지 김이재에게 편지를 보내 실정을 알렸다. 편지의 대강은 이렇다.  “지금 호남 일로(一路)에 근심스러운 일이 두 가지 있으니, 그 하나는 백성들의 소요이고, 또 하나는 관리의 탐학입니다. 무주ㆍ장수 사이에는 풀밭에서 노숙하는 자가 산골짜기에 가득하고 순창ㆍ동복 사이에는 유민(流民)이 길을 메웠으며, 연해(沿海)의 여러 마을에는 촌락이 텅 비어 있으니, 한마디로 흉흉합니다. 이러한데도 수령들은 전혀 들으려 하지 않고 감사(監司)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백성들이 두려워 근심하고 있는데도 안위(安慰)하지 않고 일로(一路)가 소요한데도 진무(鎭撫)는 생각하지 않고, 오직 탐학과 악행을 할 뿐입니다.”       이 즈음에 정약용은 흉년에 삶이 파탄 난 백성들의 아픔을 탄식하는 시 6편을  썼다. 채호(釆蒿), 발묘(拔苗), 교맥(蕎麥), 오거(熬麮),   시랑(豺狼), 유아(有兒)가 그것이다. 이중 유아(有兒)라는 시는, 지아비는 아내를 버리고  어미는 자식을 버렸다. 여아가 자기 동생을 데리고 길거리를 방황하면서 엄마를 잃어버렸다고 엉엉 울고 있었다. 짝지어 다니는 두 아이 한 애는 쌍상투, 한 애는 묶은 머리 쌍상투 아이는 겨우 말 배우고 묶은 머리 아이는 머리만 더벅더벅 어미 잃고 울면서 저 갈림길에 있네. 붙들고 까닭 물었더니 목이 메어 더듬는 말이 아버지는 집 떠나고 어머니는 짝 잃은 새가 되었는데 쌀독이 바닥나서 사흘을 굶고서는 엄마는 우리와 함께 울었어요. (중략) 시장에 데려가서는 엿도 사서 먹이고는 길 너머로 데려와서 아이 껴안고 재웠다오. 애는 깊이 잠이 들고 나도 죽은 듯 잠들었다가 잠을 깨고 살펴보니 엄마가 사라지고 없었어요. 해가 지고 어두워지면 뭇 새들도 집 찾아드는데 떠도는 이 두 아이들 찾아들 집이 없네. 불쌍한 이 백성들이 천륜마저 다 잃었는지 부부 사이도 사랑을 못하고 어미도 제 자식 사랑 않고 1) 정약용은 4남 1녀 중 넷째이다. 이복형 정약현이 맏형이고, 모친 윤씨에게서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그리고 누이가 태어났다. 누이의 남편이 이승훈이고, 정약현의 사위가 황사영이다.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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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8년 7월14일에 윤필상등은 권오복을 국문할 것을 청했다. 윤필상등은 권오복이 김일손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만 듣건대 그대들이 개현(改絃)하기에 급하여 만사를 일신하려고 하다가 뭇 비방을 샀다니, 통곡하고 유체(流涕)함이 마치 낙양(洛陽)의 소년과도 같은데 도리어 강후(絳侯)와 관영(灌嬰)들에게 단척(短斥)한 바 되었다.’는 등의 말이 있었다하여 권오복을 잡아다 국문할 것을 청한 것이다.(연산군일기 1498년 7월14일 7번째 기사)       권오복의 편지는 김일손을 잡으러 경상도로 간 의금부 경력 홍사호 등이 김일손의 집을 수색하여 찾아낸 편지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12일 3번째 기사) 1) 권오복의 편지를 읽어보자.   “두 번이나 편지를 받아 헌납(獻納)하기에 빈 날이 없는 가 살폈으니, 벗의 기쁨을 가히 알겠도다. 다만 듣건대 그대들이 개현(改絃)을 하기에 급하여 만 가지 일을 모두 일신하게 하다가 뭇 비방을 샀으니, 통곡하고 유체(流涕)함이 저 낙양 소년과도 같은데, 도리어 강후(絳侯)와 관영(灌嬰) 등에게 단척 되는 것이 아닌가.   몸이 먼 지역에 있으나 일찍이 그대들을 위하여 위태롭게 여기지 않은 적이 없노라. 또 듣자니 ‘상재(祥齋)를 간(諫)하다가 허락을 얻지 못하고 호부(戶部)로 체임(遞任)되었다.’하는데, 과연 그런가? 이 해도 거의 다 갔으니, 이별의 그리움이 더욱 괴롭구려!”   이 편지는 1496년 초에 권오복이 함창현감(지금의 경북 상주시 함창읍) 시절에 쓴 것이다. 2)   편지에는 ‘김일손이 헌납 벼슬을 하다가 호조좌랑으로 체임되었다’는 글이 있는데, 김일손은 1495년 10월에 사간원 헌납에 임명되어 1월까지 일했고, 2월에 모친의 병환으로 사직서를 내고 경상도 청도로 내려갔다. (탁영선생 문집, 탁영선생 연보, p 694)    권오복은 김일손이 개현(改絃 악기의 줄을 바로 잡는다는 뜻, 즉 개혁) 하려다 배척되었음을 아쉬워하고 있다. 즉 김일손을 중국 한나라 때 낙양 소년 가의(賈誼 BC 200 ~168)의 처지와 같다고 본 것이다.   가의는 18세에 수재라는 평판이 높았고, 22세 때에 박사관(博士官)에 임명되었으며 태중대부(太中大夫)에 발탁되었다. 그는 한나라의 제도와 역법을 개정할 것을 천자에게 진언하였지만 강후(絳侯: 주발(周勃)을 말함)와 관영(灌嬰)등의 수구파 대신들의 반대를 받아 개혁이 좌절되었다. 사마천의 『사기』에 나온다. 3)   그러면 여기에서 성종(1457∽1494, 재위 1470∽1494)이 돌아가신 이후 김일손의  행적부터 살펴보자.   1494년 12월24일에 성종임금이 승하하자 김일손은 울부짖었다. “하늘이여 우리 동국이  요순의 치세를 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까? 복이 없는 창생을 버리시면 누구에게 복을 내리시려는 것입니까? 너무 하오이다.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나이까.” 4)   1495년(연산군 1년) 3월에 김일손은 사직과 동시에 하사받은 집을 반환하고 청도로 귀향했다. 성종은 영의정을 한 최항(1409∼1474)이 살던 낙산 아래의 집을 사들여서, 1490년 3월에 요동질정관으로 중국에 갔다고 돌아온 김일손에게 주었다. 5) 김일손이 모친 봉양을 위해 사직을 청하자 모친과 함께 기거토록 한 성종의 배려였다.   한편 김일손은 바위 샘 위에 1칸 자리 정자를 짓고 ‘이화정(梨花亭)’이라 이름 지었다. 봄이면 주위가 하얀 배꽃으로 물들 정도로 배나무가 많았기에 그렇게 지은 것이다. 김일손은 ‘집 모퉁이에 핀 배꽃(屋角梨花)’ 시를 지었다.   이 시는 성종이 지은 ‘비해당(匪懈堂) 48영 차운 시’에 답한 시이다. 성종은 ‘비해당 48영 차운 시’를 홍귀달, 채수, 유호인, 김일손에게 차운 시를 올리도록 했다. 원래 ‘비해당 48영시’는 세종대왕의 3남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이 자신의 별장인 비해당의 풍물 48가지를 읊은 시이다. 안평대군은 1450년 가을에 ‘48영 시회’를 열었는데 이 모임에는 당대 문사인 최항 · 신숙주 · 성삼문 · 이개 · 김수온 · 서거정 · 강희맹 등이 참여했다. 안타깝게도 안평대군은 1453년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  (나중에 세조 임금)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러면 김일손이 지은 시를 감상해보자. 6) 집 모퉁이에 핀 배꽃 (屋角梨花) 눈 맞은 나무 봄기운 이니 더욱 화창하고 노란 빛 쪼그린 여린 새잎에 꽃 피네 흰 소매는 서리를 깔보니 수심 젖은 흰나비 곱게 치장한 미혹한 달 젊은 미인 질투하네. 가벼이 바람 불어 꽃향기 가득 이르고 쓸쓸히 비 내려 눈물 자욱 비껴 있네. 비록 맑고 깨끗함이 색칠하지 못했어도 화려함 뽐내는 붉은 복사꽃 보다 낫네. 이왕이면 성종의 시도 함께 감상하자.   다정이 봄날이 알맞게 맑고 화창하니 집 모퉁이의 배나무가 백설 같은 꽃을 피웠네. 안 뜰에 맑고 밝은 달을 감춰둔 듯 정자 난간에서 곱디고운 달빛에 취하네.   짙은 향기는 순로(전설속의 향초)의 향기가 뼈 속에 스미는 듯 맑은 그림자가 바람에 쏠리니 월말(越襪)이 비낀 듯하네. 옥 같은 천연의 꽃모습은 조물주의 교묘한 솜씨인데 두견새의 맑은 소리 봄의 좋은 시절 기억하리라.   이화정 정자는 지금은 없다. 그 자리에는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1875∽1965) 박사가 1947년 10월부터 살던 이화장(梨花莊)이 있다. 사진 1.  이화장 안내판 이승만 박사 동상 아래에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이 새겨져 있다. 사진 2  이승만 박사 동상  사진 3  동상 아래에 적힌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그런데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전매특허가 아니다.  독립운동가 이동녕(1869-1940)도 비슷한 말을 했다.  “오로지 뭉치면 살고 길이 열릴 것이요. 흩어지면 멸망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사진 4  천안역 앞의 조병옥· 유관순 · 이동영 사진   1) 의금부 경력 홍사호등이 가택 수색한 김일손의 집이 고향인 경상도 청도인지, 아니면 김일손이 잡혀간 함양인지는 불분명하다.   2) 1495년 6월29일 연산군일기에는 ‘홍문관 부교리 권오복이 병든 어머니가 있으므로 돌아가 봉양하기를 청하니, 가까운 고을의 수령(守令)에 제수하였다’고 적혀 있다.    3) 관영은 중국 한나라 고조 6년(기원전 201) 영음후(潁陰侯)에 봉해졌고 주발과 함께 대신과 승상(丞相)을 하였다.   4) 이종범, 사림열전 2, 아침이슬, 2008, p 334 5) 김일손은 1489년 11월에 요동질정관으로 임명되어 중국에 갔다가 1490년 2월에 북경에서 돌아왔다. (탁영선생문집 p 690-691)   6) 이 시는 김일손이 1493년 8월에 호당에서 사가독서 할 때 지었다.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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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길 위의 역사 2부 - 무오사화(56회) 동영상뉴스

7월14일에 연산군은 임희재는 물론 그 아비 임사홍도 국문하라고 전교 했다. 이어서 임희재가 공초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14일 6번째 기사)   “신이 이목(李穆)에게 보낸 서한에 ‘이 세상의 허다한 일들을 구경하고 있다.’ 한 것은, 신의 편지 가운데 기재된 일을 지적한 것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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