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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심회·윤사흔·윤필상·홍응·허종·어유소·양성지·윤흠·신정·신준 ·홍도상·김영유·유지·안관후·김춘경·경준·박숙달·강거효·유인호는 의논하기를, "율(律)에 의하여 과단(科斷)하소서."하였다. 이윽고 윤계겸·이극균이 아뢰었다. "《율학해이(律學解頤)》의 간당조(姦黨條)에, ‘간(姦)이란 것은 간사한 무리이고, 당(黨)이란 것은 붕당(朋黨)의 사람이다. 만약에 사람이 본래 죄가 없거나 혹은 죄가 있어도 사형에 이르지 아니하였는데, 모두 이들 간사한 붕당의 사람이 망령되게 올린 참소(讒訴)의 말을 입어서 사람을 잘못 죽이게 한 자는 참(斬)한다.’고 하였습니다.   임사홍과 유자광·박효원·김언신은 현석규를 소인이라고 모함하였을 뿐이고 사람을 죽이는 데에는 이르지 아니하였으니 성상께서 재결하시어 시행하시고, 김괴와 김맹성· 표연말 · 손비장의 죄상은 계달한 대로 시행하소서." 이어서 김순명이 말했다. "예로부터 붕당은 그 해가 큽니다. 임사홍은 임금을 업신여기고 대간과 교결하였으니 그 실정을 안 자도 죄가 또한 같습니다. 표연말과 김괴· 김맹성·손비장의 조율(照律)이 심히 가벼우니 마땅히 중한 율에 따라 과단(科斷)하소서. 이를 징계하지 않으면 뒤에 경계하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정승들의 의견을 들은 성종은 "윤계겸과 이극균의 의논이 옳다. 임사홍 등은 사형을 감하라."고 전교했다. 성종은 이미 임사홍등을 죽일 생각이 없던 차에 윤계겸과 이극균이 의견을 내니 이에 따른 것이다.  이러자 대간들이 아뢰었다. "법이란 천하에 공평하게 적용하는 것이고, 임금이 사사로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임사홍 등은 죄악이 깊고 중한데 전하께서 특별히 사형을 감하심은 옳지 못합니다. 청컨대 율에 의해 과단하소서."  이러자 성종은 "경등이 아무리 말할지라도 나는 듣지 않겠다."고 말했다. 성종은 임사홍 · 유자광을  봐주기로 작정했다.    성종은 또 명하여 유자광에게 결장(決杖 곤장을 때림)할 가부를 의논하게 하니, 한명회 등이 의논하기를, "유자광에게 사형을 감하심은 성상의 은혜가 지극히 중하니, 공신을 삭적(削籍 명부에서 이름을 삭제함)하고 결장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한편 성종은 주서(注書) 양희지에게 명하여 오늘 모이지 아니한 재상들에게 찾아가서 의논하게 했다. 먼저 정인지가 의논했다. "유자광이 이미 성상의 은혜를 입어 사형이 감해졌으니, 결장을 없애고 먼 지방에 부처(付處)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이어서 정창손·노사신·이승소가 의논하여 말했다. "유자광은 그 죄가 깊고 중하니 율에 의하여 처결하는 것이 적당하나, 사직에 관계되는 죄가 아니고 또 익대공신이니, 사형을 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한 속장(贖杖 돈을 내고 곤장을 면제함)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윤자운·서거정도 말했다.  "유자광이 붕당을 교결하여 생각이 그 지위를 벗어나서 함부로 외람되게 글을 올려 임금을 속였으므로 죄를 범한 것이 지극히 큰데, 사형을 감하였으니 성은이 깊고 중합니다. 공신을 삭적(削籍)하고 결장(決杖)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김국광도 의논했다. "유자광의 죄악은 율(律)에 정조(正條)가 있는데, 특별히 사형을 감하기를 명하였으니, 성상의 은혜가 분수에 지나칩니다. 유자광이 공신으로서 성상을 속였으니, 이제 마땅히 삭적하고 결장(決杖)하여 먼 지방에 유치시켜서 영구히 서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 강희맹이 말했다. "유자광은 서자의 몸으로 지위가 극품(極品)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성은에 보답하여야 할 것인데, 붕당을 교결하여 시비를 변란(變亂)시켜 겉으로는 충직(忠直)함을 가장하며 안으로는 실로 간사하니 이는 소인(小人)의 가장 큰 사례입니다. 마땅히 공신을 삭적하고 먼 변방에 내쳐서 종신토록 서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유자광은 대부가 되었으니 형장(刑杖)을 받을 수 없습니다. 속장(贖杖)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성종은 명하여 임사홍과 유자광·김언신·박효원은 사형을 감하고, 표연말과 김맹성·김괴·손비장은 율(律)에 의하게 하였다. 대간이 다시 아뢰었다.   "신 등은 임사홍 등에게 사형을 감하신 명령을 듣고 결망(缺望)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임사홍은 소인의 정상이 모두 드러났고, 그 당류도 이미 찾았으니 청컨대 율에 의하여 과단(科斷)하소서. 청컨대 법을 무너뜨리지 마소서." 성종은 전교하였다. "이미 사정(事情)을 헤아려서 결정하였으니 경들의 청을 듣지 않겠다." 대간이 또 아뢰었다. "사정은 진실로 사형이 마땅합니다. 붕당은 국가의 흥망과 사직의 안위가 달렸습니다. 중국 전한(前漢) 때 유향이 말하기를, ‘붕당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도적이다.’고 하였으니, 청컨대 붕당의 신하를 기르지 마소서.” 하지만 성종은 듣지 않았다. (성종실록 1478년 5월6일  7번째 기사)   5월7일에 성종은 경연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사간 경준이 아뢰었다. "임사홍 등의 죄를 특별히 명하여 가벼운 죄에 처하셨으니, 신 등은 옳지 못하게 생각합니다. 지금 임사홍 등은 은밀히 대간과 결탁하여 대신을 모함하였으니, 의금부에서 간당(姦黨)의 율(律)에 해당시킨 것은 매우 합당합니다. 청컨대 율문(律文)에 따르소서.“ 사진 1. 창덕궁  선정전  앞뜰 사진 2 창덕궁 궁궐도 이에 성종이 말했다. "사직에 관계되는 것이 아닌데, 참형에 처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은가?" 다시 경준이 아뢰었다. "간신이 임금의 곁에 있으면 오늘 한 대신을 내쳐 버리고, 내일 또 한 대신을 내쳐 버릴 것입니다. 이것이  그치지 아니하여 극도에 이르면 사직이 자연스레 위태로워집니다. 이로써 본다면 어찌 사직에 관계되지 않는다고 하겠습니까?" 이어서 사헌부 집의 김춘경이 아뢰었다. "임사홍이 범한 바가 지극히 큰데, 지금 베지 않고 다만 먼 지방에 유배시키면, 뒷날에 다시 썼을 때 간계를 다시 낼지 어찌 알겠습니까? 청컨대 율에 의하여 죄를 주소서.” 성종이 경준이나 김춘경의 말 대로 후환을 없앴다면 유자광나 임사홍에 역사에 간신으로 남지 않았을 것인데. 유자광이 주도한 무오사화도 다른 모습이었을 것인데, 참으로 안타깝다. 이어서 성종이 말했다. "비록 사형 안하고 먼 지방에 유배한다 해도 영구히 서용하지 않으면, 다시 벼슬할 리가 만무하다." 이어서 좌우에게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영사 심회가 아뢰었다. "그 죄가 지극히 중하니, 청컨대 율에 의하여 처단하소서." 이러자 성종은 말을 돌린다.  "또 의논할 것이 있다. 유자광은 조종조(祖宗朝) 때의 원훈이고, 임원준은 좌리공신인데, 만약 율문(律文)과 같이 한다면, 어찌 ‘백세까지 죄를 용서한다.’는 뜻이 있겠는가? 경등은 사형을 감한 것을 가볍다고 하나, 나는 결장(決杖)하는 것도 미안하게 생각한다." 김춘경 등이 아뢰었다. "공과 허물은 마땅히 서로 비길 만해야 합니다. 이 무리들은 죄가 중하여 그 공이 허물을 가릴 수가 없습니다." 성종이 말하였다. "참형에 처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여긴다. 내 장차 대신과 더불어 다시 의논해서 죄를 정하겠다." (성종실록 1478년 5월 7일 1번 째 기사)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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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8-05 / 뉴스공유일 : 2019-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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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칼럼

'영국 기자가 본 대한민국' 이라는 글이 SNS로 방금 도착해 일본의 경제규제가 도를 넘어 감히 '대한민국의 화이트리스트 배제'로 까지 이어지는 이 시국에서 애국애족 사상과 자긍심을 더 고취하고자 독자기고로 소개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희대의 정치 코미디 를 바라 보면서 분노를 뛰어 넘는 서글픔을 느끼는 이 때, 이 글로 인하여 조금이나마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을 회복케 되고 눈물이 나도록 애국심을 끓어 오르게 해 주네요..!! 영국 기자가 본 대한민국 한국에서 15년간 기자생활을 한 영국의 '마이클 브린'이 쓴 "한국인을 말한다"...에서 한국인은 부패, 조급성, 당파성 등 문제가 많으면서도, 또한 훌륭한 점이 정말 많다!라고 말하면서 수많은 장점을 거론해 소개한다. 한국인은 1. 평균 IQ 105를 넘는 유일한 나라. 2. 일 하는 시간 세계 2위, 3. 평균노는 시간 세계 3위인 잠 없는 나라. 4. 문맹률1%미만인 유일한 나라. 5. 미국과 제대로 전쟁 했을 때 3일 이상 버틸 수 있는 8개국 중 하나인 나라. 6.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며 아직도 휴전 중인 나라. 7. 노약자 보호석이 있는 5개국 중 하나인 나라. 8. 세계 2위 경제대국 일본을 발톱사이의 때만큼도 안 여기는나라. 9. 여성부가 존재하는 유일한 나라. 10. 음악 수준이 가장 빠르게 발전한 나라. 11. 지하철 평가 세계1위로 청결함과 편리함 최고인 나라. 12. 세계 봉사국 순위 4위인 나라. 13. 문자 없는 나라들에게 UN이 제공한 문자는 한글이다. (현재 세계 3개 국가가 국어로 삼고 있음.) 14. 가장 단기간에 IMF 극복해 세계를 경악시킨 나라. 15. 유럽 통계 세계 여자 미모순위 1위인 대한민국. 16. 미국 여자 프로골프 상위100명 중 30명이나 들어간 나라. 17. 세계 10대 거대 도시 중 한 도시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서울) 18. 세계 4대 강국을 우습게 아는 배짱 있는 나라. 19. 인터넷,TV, 초고속 통신망이 세계에서 최고인 나라. 20.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발음을 표기할 수 있는 문자를 가진 나라. (한글 24개 문자 11,000 의 소리를 표현가능, 일본은 300개, 중국은400개에 불과) 21. 세계 각국 유수대학의 우등생 자리를 휩쓸고 있는 나라. (2위 이스라엘. 3위 독일) 22. 한국인은 유태인을 게으름뱅이로 보이게 하는 유일한 민족. 까칠하고 비판적이며 전문가 뺨치는 정보력으로 무장한 한국인. 23. 세계에서 가장 기가 센민족. 한국인은 강한 사람에게 꼭 "놈"자를 붙인다. '미국놈, 왜놈, 떼놈, 러시아놈'.... 등 무의식적으로 "놈"자를 붙여 깔보는게 습관이 됐다. 24. 약소국에겐 관대. '아프리카 사람, 인도네시아 사람, 베트남 사람' 등 이런 나라엔"놈"자를 붙이지 않는다. 25. 한국의 산야는 음양이 강하게 충돌하기 때문에 강할 수 밖에없다. 강한 기는 강한 종자를 생산한다. 26. 한.중.일 삼국 중 한국의 진달래가 가장 예쁘고, 인삼의 질도 월등하다. 물 맛도 최고고, 음식도 정말 맛있다. 27. 세계에서 한국의 꿩처럼 아름다운 꿩이 없고 한국의 한우처럼 맛있는 고기는 없다. 28. 한국인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기가 강한 민족이다. 29. 한국의 독립운동사만 봐도 알 수 있다. 중국은 광활한 대륙, 끝없는사막, 넓은 고원을 언급하며 스스로를 대인(大人)이라고 부르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얼핏 대륙에서 태어난 중국인이 마음도 넓고 강할 것 같지만. 결정적으로 보면 한국보다 기(氣)가 약하다. 1932년 일본이 중국에 만주국을 건설하고 1945년 패망하기까지 13년 동안, 난징대학살을 포함 일본에 의해 죽은 사람은 3,200만명에 육박했다. 그러나 중국인이 일본 고위층을 암살한 경우는 거의 전무했다. 그에 비해 한국은 만 35년동안 3만2천명으로 중국 피학살자의 천분의 1에 불과했지만 일본 고위층 암살 시도와 성공 횟수는 세계가 감탄할 정도였다. 1909년 안중근 의사는하얼빈역에서 전 일본총리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했고, 1932년 이봉창의사는 도쿄에서 일왕(日王)에게 폭탄을 던졌으며, 같은 해 윤봉길 의사는 상해에서 폭탄을 던져 상해 팔기군 시라가와(白川)대장등 일제 고위 장성 10여명을 살상했다. 1926년에는 나석주 의사가 민족경제파탄의 주범인식산은행,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고, 조선철도회사에서 일본인을 저격한 뒤 자살했다. 30. 중국과 한국은 타고난 기가 다르다. 광활한 대륙은 기를 넓게 분산시킨다. '기운 빠지는' 지형이다. 반면 한반도는 좁은 협곡사이로 기가 부딪혀 세계에서 가장 기가 센 나라가 됐다. 기가 센 나라에서 태어났으니 기 센 국민이 될 수밖에 없다. 31. 1950년 해방 무렵, 한국은 파키스탄 제철공장으로 견학가고 필리핀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제는 역으로 그들이 한국으로 배우러 온다. 국력으로 치자면 끝에서 2,3번째 하던 나라가 이제 세계 10위권을 넘보고 있다. 32. 현재 한국은 중국에게 리드당할까봐 겁내고 있다. 절대 겁내지 마라. 중국과 한국은 기(氣)부터 다르다. 세계 IT 강국의 타이틀은 아무나 갖는 자리가 아니다. 180년 주기로 한국의 기운은 상승하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다. 어느 정도의 난관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틀림없이 이를 극복하고 도약하리라 믿는다. 한국의 객관적 지표들이 현저히 나빠지고 있다. 보다 큰 불행의 전주곡들도 여기저기서 들려오는듯 하다. 하지만, "궁즉통 극즉반(窮則通 極則反):궁하면 통하고 극에 달하면 반전하게 된다"이라 하였으니 머지않아 반전의 기회가 오리라 믿는다. 한국인은 필리핀이나 아르헨티나, 그리스처럼 추락할 때까지 절대 지켜만보고 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화이팅!!" <편집자 주> 여기까지가 퍼온 글인데 영국의 '마이클 브린'이 쓴 "한국인을 말한다"가 글의 맥락을 보고서는 어디까지인줄은 모르겠다. 그러나 독자들로 부터 충분하게 십분 이해를 구할 수 있을거라는 확신으로 저체 글을 되도록 삭감없이 옮겨 오기로 했다.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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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8-04 / 뉴스공유일 : 2019-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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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칼럼

대한민국에 대해 일본의 경제보복조치가 화이트리스트 배제로 까지 승부수를 띄우려고 하는 1일 재광 00군 향우회장으로부터 역사적인 사실이 기록된 파일이 제보되었다. 일본이 일제 침략 36년사의 야욕이 불타 오르기전부터 아주 오래된 역사적 펙트를 이번 기회에 우리는 한번 쯤 생각해 봐야하겠기에 가감없이 원문 그대로 게재하기로 했다. "대마도'가 한국 영토이며 한국이 반환 받는데 국제법상 문제될 것 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일본인 '구기'가 제작한 '조선팔도총도'에 '울릉도'와 '독도'가 그려져있고 '대마도'가 경상도 에 속한 것으로 그려져있습니다.   또한 1830년 일본에서 만든 '조선국도'에도 울릉도,독도, 대마도가 조선 영토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스페인, 영국 등 서구 근대 세력들의 해양 영토 약탈 시기인 임진년과 식민지 시기에 연이어 한국 의 불행한 소용돌이를 이용해서 '대마도'를 슬그머니 도둑질한 후 1871년에 일방적으로 '이스하라현'으로 그 후 1876년에는 '나가사키현'에 편입후 아예 자기들 영토 로 삼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독도'는 역사적으로 신라 때 '이사부' 장군이 점령 접수 했고,일본 메이지(明治)때 태정관지령(太政官指令) 에서도 '독도'는 일본 영토가 아님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일본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왜 이렇듯 독도 시비를 멈추지 않고 있을 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대마도'가 한국영토로 거론이 불거지는 것을 막기 위한 고도의 작전인 것입니다.  '대마도'가 한국영토라는 사실이 거론되는 것이 두려운 일본은 이것 을 막기 위해서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이죠.    '對馬島本是我國之地' ('대마도'는 본시 우리땅이다.) 라고 '세종대왕'이 선언한 것을 실록에서 기록하고있는 글귀이며 '대마도' 란 지명은 마한(馬韓)과 마주보는 땅 이라 하여 우리 선조는 '대마도' 라 명명하였던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조선 조정(한국)은 어떤 형태로든 일본에 '대마도'를 넘겨준 일이 없습니다.  도둑질한 '대마도'를 두고 식민지시대를 거치면서 '대마도'는 일본 땅이라고 한국인뿐만 아니라 그들 후손 자신에게도 세뇌(洗腦) 당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세뇌 작전과 특히 조작된 일제 식민사관에 젖어 지금까지 '대마도'는 일본 땅이라고 여기고 살았던 것이죠.  미치고 팔딱뛰고 통탄할 일이 아닙니까?    '이승만' 초대대통령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불과 사흘 후 8월 18일,    "역사의 진실은 어쩔 수 없다.  '대마도'는 우리 땅이므로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고 천명 했습니다. 6.25직전까지 3년여 동안 60여 차례나 요구했습니다. 일본은 역사학회, 고고학회등으로 하여금 '대마도'에 관하여 왜곡된 논문들을 발표케 하면서 변명했습니다.   쓰시마의 역사적위치(1949), 대마문제(1951) 논문 등 이 그 예입니다.    1950년 6,25가 발발하고 미,소가 대립하자, 일본은 "이때다"하고 미국에 읍소 로비를 했고,1951년, 미국은 한국을 배제한 채 일본과 같이 전후(戰後)처리 협정인 '샌프란시스코 협정'을 이렇게 체결해 버렸습니다.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도서는 한국에 모든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이 '샌프란시스코 협정'에서 미국은 '독도'와 '대마도'에 대해 영토 속국을 명백히 하지 않고 빼버린 것입니다.    '이승만'대통령은 이에 불복하고 우선 평화선 선포를 통해 우선 '독도' 라도 어족(魚族)보호 명분을 들어 '독도' 를 실효 지배 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지난 2005년에 확인된 미국 국무부 외교문서에 따르면 1951년 4월 27일 한국 '이승만'대통령은 '대마도'에 관해 다음과 같이 요구 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일본이 '대마도'에 대한 모든 권리, 호치, 청구를 분명히 포기하고 그것을 한국에 돌려줄 것을 요청한다." (In view of this fact the Republic of Korea request that Japan specifically renounce all right, title and claim to the Island of Tsushima and return it to the Republic of Korea)  여기에서 "specifically renounce"귀절을 주시해야 합니다. 이는 외교문서로서는 최고로 강력한 의사표시 였습니다. '대마도' 반환 문제는 남북통일과 마찬가지로 우리 7,000만 민족의 숙원입니다.    '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회복하는 문제에 있어 국제관례 의 관점에서 아무런 제약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1862년에 미국의 영토가 된 일본 남부 '오가사와라'(小笠原) 군도를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일본 영토로서 인정받고 반환 받았던 이러한 국제적 사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대마도' 반환에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할 것 입니다.  그때 일본이 내놓은 지도 ‘삼국 접양 지도'하야시 시헤이' (林子平)제작, 프랑스어판이 그 근거입니다.    미국이 '오가사와라' 군도가 일본 영토임이 맞다고 판단 하게 한 그 지도에 '오가사와라'가 일본 영토로 되어 있었 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영토인 일본 남부 '오가사와라' 군도가 이 지도에 일본 영토 라고 표기 되어 있었기에 미국은 아무소리 못 하고 이 미국 영토를 일본에 반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도에 '독도'와 '대마도'가 분명히 한국 영토로 표기 되어 있는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사실이 아닙니까?  최근에 이에 준하는 증거가 또 발굴되었습니다.    지리학자로 영국에서 활동하였던 이태리인 'J.H.Kernot'씨가 1790년에 작성한 "일본과 한국"이라 는 지도에서 '울릉도'와 '독도'뿐만 아니고 '대마도'도 한국 영토로 그려져 있는 사실이 발굴(견) 되었다는 사실 입니다.    이 지도에는 '대마도'가 'STRAIT OF COREA'로 표시 되어 있고 특히 '독도'와 '울릉도','대마도'의 관할 국가를 표시하는 지도 바탕 색깔을 한국 본토와 같은 황색으로 나타내 이들 섬이 한국령이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에서 해적질하며 살고 있는 왜구를 토벌하고 확실하게 한국령 경상도에 예속시켰습니다. 以白山爲頭 大嶺爲脊 嶺南之對馬 湖南之耽羅 爲兩趾 (백두산은 머리고, 대관령은 척추며,영남의 대마와 호남의 탐라를 양발로 삼는다.)  이 글귀는 1750년대 제작된 ‘해동지도’에 있는 글귀 입니다.    이렇게 '대마도'는 우리의 땅이고 우리 민족의 한쪽 다리 인 것입 니다. 그런데 일본이 그 '대마도'를 자기들 멋대로 자기영토로 편입 시켜 버렸습니다.  우리는 일본이 잘라간 그 한쪽발 (嶺南之趾)을 되찾아 야 합니다.    일본은 이러한 일련의 사실이 부각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독도' 시비를 계속하며 분칠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마도'는 명백한 한국영토입니다. '부산'에서 '대마도'까지는 49km, 일본 '후쿠오카'에서는 139km 입니다. 이 '대마도'에는 고대로부터 한국인이 건너가 살았습니다.  일본의 속셈이 가증스럽지 않습니까?    '대마도'는 본시 우리땅이다,라고 '세종대왕' 이 선언한 이 확실한 증거를 두고도 우리는 독도 시비에 말려 들고 '대마도'를 일본 땅 으로 여기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정치권에선 젯밥에 눈이 멀어 나 몰라라 하고 있고, 입만 살아 잡 소리나 하는 잘난 역사 학자들만 믿지 말고 우리들이라도 이 글을 여러 밴드에 퍼 날라 여론을 형성 하고, '독도'를 떠나서 '대마도' 반환 운동의 초석이 되었 으면 합니다.    우리가 못하면 먼 훗날 우리의 후손들이라도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전 국민 모두가 다 이 사실을 잘 알고 널리 알리도록 합시다."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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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칼럼

1478년 5월4일에 의빈(儀賓) 임광재가 그 아비 임사홍이 옥중에서 올린 글을 가지고 계달하려고 하였다. 성종은 "내가 이미 임사홍의 일을 알았는데, 그 글을 본들 무엇 하겠는가? 계달하지 말라."고 전교하였다. 임광재(1465∽1495)는 임사홍(1445∼1506)의 큰 아들이다. 그의 모친은  효령대군(1396∽1486)의 손녀이고 1), 부인은 예종의 딸인 정숙공주(1464∽1502)이다.  5월5일에 성종은 선정전에 나아갔다. 우부승지 이경동이 아뢰었다. "의금부의 국안(鞫案)에 이르기를, ‘유자광이 임사홍의 지시한 뜻을 받고 김언신과 한 통속이 되어 상소한 것을 이미 자복하였는데, 오직 김언신 만 불복한다.’고 하였습니다." 성종은 "고신(栲訊)을 하여 실정을 알아내라."고 지시했다. 이윽고 이경동이 아뢰었다.   "어떤 사람이 신에게 작은 쪽지를 주기에 떼어 보니, 바로 임사홍이 옥중에서 지은 시(詩)였습니다." 성종은 "그 시에 무엇이라고 했는가?"라고 묻자, 이경동이 아뢰었다. "‘지위가 임금[天光]에 가까우니 임금의 은혜는 바닷물처럼 깊었네. 마침내 터럭만큼의 보답도 못하고 부질없이 임금의 마음을 저버렸네. 아들의 죄로 아비가 욕을 당하니 흰 머리에 서리가 침노하도다. 잠자코 생각하고 때로 허물을 자책하니 유림(儒林)을 더럽힌 것이 깊이 부끄럽네. 얕은 지식은 표주박으로 바닷물을 헤아리고 둔한 재주는 절음발이가 수레바퀴를 끄는 듯하네. 깊은 물에 다다라 오직 두려워할 뿐 몸을 어루만지며 쓰라림만 더하네. 성주(聖主)의 도량은 천지(天地)같이 크고 어지신 은혜는 우로(雨露)처럼 고르도다. 마음을 새롭게 할 길 있거든, 나를 위해 궁궐에 아뢰어 주게’ 하였으니, 그 뜻은 대개 구원을 받고자 한 것입니다." 성종이 말하였다. "임사홍이 그 잘못을 아는구나." (성종실록 1478년 5월 5일  1번째 기사)   사진 : 창덕궁 선정전 편액   조금 있다가 이경동이 아뢰었다. "의금부의 국안(鞫案)에, ‘김언신도 이미 승복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유자광이 신에게 부탁해 말하기를, ‘신은 그 죄를 달게 받겠으나, 현석규의 음험(陰險)한 것도 계달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현석규의 사위 이세광이 일찍이 정언이 되었을 적에 숙직하는 날 밤에 사간원 앞의 민가에서 불이 났는데도 구(救)하지를 못하였으니 마땅히 이세광을  허물해야 할 것인데, 현석규는 이세광을 비호하고 그 허물을 다른 관원에게 돌렸으니 이것 또한 현석규의 음험한 한 증거’라고 말하였습니다." 유자광의 비열함을 간파한 성종은 말했다. "이 말은 들을 것이 못된다. 유자광이 현석규를 미워하여 여러 방법으로 허물을 대는 것이다." (성종실록 1478년 5월5일 4번째 기사)   5월6일에 임사홍의 아내 이씨가 남편의 무고에 대해 상소하였다. 이씨는  효령대군의 손녀이다.   "요즈음 예문관에서 저의 남편을 죄에 빠뜨리고자 하여, 과실을 얽어 짜서 글을 올려 죄주기를 청하였고, 또 이심원이 그 외삼촌 채수와 이창신 · 표연말 등의 은밀한 사주를 듣고, 신의 남편이 지난해에 사간 박효원과 사사로이 통하여 현석규를 탄핵하도록 성상(聖上) 앞에 친히 계달하게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채수와 이창신·표연말 등은 은밀히 이심원을 부추겨서, 즉시 예궐(詣闕)하게 하여 말하기를, ‘일이 사직에 관계된다.’고 하고, 친히 계달하여 신의 남편을 모해한 것입니다.” 이 상소를 보고 성종은 승정원에 물었다. "채수와 이창신이 일찍이 인견(引見)하던 날에 남보다 뛰어나게 말이 많았었는데, 과연 간사한 곳이 있으니 국문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승지 박숙진과 김승경·이경동·김계창이 대답하였다. "이는 다른 일을 들어서 고(告)한 것에 가까우니, 국문하여서는 안 될 듯합니다. 그러나 채수와 이창신은 임사홍을 면대하여 지극히 칭찬하고는 곧 글을 올려 나무라고 헐뜯었으니 그 뜻이 이랬다저랬다 함이 있습니다. 이창신 등이 이들의 편당이 아닌지 어찌 알겠습니까?" 박숙진이 또 아뢰었다. "채수는 이심원에게 외삼촌이므로, 교결(交結)의 예(例)로 말할 수 없습니다." 성종은 "채수는 그대로 두고, 이창신은 의금부에 가두어서 표연말과 아울러 국문하라." 고 전교했다. (성종실록 1478년 5월 6일  3번째 기사)     조금 있다가 홍문관 응교 채수가 와서 아뢰었다. "지금 임사홍의 아내가 상언(上言)한 것으로 인하여 이창신을 의금부에 가두었습니다. 신은 이창신과 더불어 일이 같으니 청컨대 옥에 나아가서 변명하게 하소서." 이에 성종은 "채수도 의금부에 가두고 함께 국문하라." 하였다. (성종실록 1478년 5월 6일 정묘 5번째 기사)   5월6일에 성종은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우부승지 이경동이 의금부에서 조율한 것을 가지고 아뢰었다. "유자광과 임사홍·박효원·김언신은 붕당을 교결(交結)하여 조정을 문란케 한 죄이니, 참형하고 그 처자는 종으로 삼으며 가산은 적몰해야 합니다. 표연말과 김괴·김맹성은 거짓으로 속이고 사실대로 아뢰지 아니한 죄이니 장(杖) 1백 대에, 도(徒) 3년에 처하고, 고신(告身)을 모두 추탈해야 합니다. 손비장은 마땅히 주달할 것을 주달하지 아니한 죄이니 장(杖) 80대를 수속(收贖)하고 고신 3등(等)을 추탈해야 합니다." 성종이 말하였다. "이 사람들은 죄를 범한 것이 깊고 중하나, 사형에 이르는 것은 마땅치 않으니, 사형을 감하여 먼 지방에 내쳐서 종신토록 서용(敍用)하지 말라." 이러자 이경동이 아뢰었다. "대저 대간은 백사(百司)의 책망(責望)을 발췌하고, 임금의 이목(耳目)을 맡기는 곳이니, 대간이 털끝만치라도 사사로운 뜻이 있으면 조정 위의 시비와 선악이 뒤섞이어 분변할 수 없어서 나라가 나라답게 되지 못합니다. 임사홍은 붕당을 교결하여 은밀히 대간을 부추겨서 대신을 무함(誣陷)하였으니, 국조(國朝) 이래로 이와 같은 자가 있지 않았습니다. 그 죄악이 지극히 중하여 죽어도 허물이 남으니, 율(律)에 의하여 논단(論斷)하시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이에 성종이 말하였다. "죄가 비록 참형의 율(律)에 해당하나, 어찌 사정(事情)을 헤아리지 않겠는가? 특별히 사형을 감하라.” 다시 이경동이 아뢰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사람을 조정에 벼슬시킴에는 여러 사람과 함께 하고, 사람을 저잣거리에서 형벌함에는 여러 사람과 더불어 버린다.’고 하였으니, 청컨대 공경과 더불어 의논하여 죄를 결정하소서." 그러자 성종이 전교했다. "나의 재단(裁斷)에 달려 있으나, 의정부의 증경정승(曾經政丞)과 육조의 참판 이상과 대간을 불러서 의논해 아뢰게 하라. 또 옛 제왕은 공신을 우대하여 비록 큰 죄가 있어 사사(賜死)함은 있을지라도, 처형하는 일은 없었다. 유자광은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 장(杖)을 때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 아울러 의논해서 아뢰게 하라." 2) (성종실록 1478년 5월 6일 정묘 6번째 기사)   1) 효령대군은 태종의 둘째 아들이자 세종의 형님이다 1) 유자광은 1468년(예종 즉위년) 10월에 남이(南怡)를 음해하여 남이를 죽게 만들었다. 이 공로로 그는 익대공신이 되었다.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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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칼럼

죽천 박광전은 1566년 겨울, 나이 41세에 퇴계 이황(1501∽1570)에게 공부를 배우고자 안동에 갔다. 그는 9세 때 고흥에 귀양 온 홍섬에게 공부를 배웠고 1547년에는 송천 양응정의 문인이 되었다.1) 죽천은 처남 문위세(1534∽1600)와 같이 안동으로 갔다. 문위세는 외숙부 윤복(1512∽1577)이 1566년에 안동도호부사로 근무할 때 윤복의 세 아들 윤강중 · 흠중 · 단중과 함께 퇴계 밑에서 수학했는데 이 때 박광전도 같이 간 것으로 보인다. 2) 1566년 겨울을 안동 도산서당에서 지낸 박광전은 1567년 정월에 퇴계와 이별했다. 퇴계는 “만년에 좋은 벗을 만났는데 갑자기 헤어지게 되었으니 어찌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면서 이별시 5수를 지어 헤어지는 마음을 전했다. 또한 퇴계가 편찬한 『주자서 절요』 한 질을 주었다. 먼저 퇴계의 이별시 5수를 살펴보자. 제1수 병든 몸은 험하고 머리는 백발로 가득한데 신음하는 속세의 나, 무엇을 구하려 하는가? 원컨대 장차 서툰 재주와 늦은 명성으로 넘치는 빛을 완상하다 죽어서야 그치리. 제2수 나를 위한 공부는 모름지기 극기(克己)로부터 시작하고 마음 지키는 길은 오직 마음 찾음에 달려있네. 우리들 그 누가 이 뜻을 모를 것인가 마는 어찌하여 참다운 삶을 위해 힘쓰지 않는가. 유학자는 모름지기 극기복례(克己復禮)하라는 권고 같다. 이어서 제3수이다. 한 세상에 하늘은 영재를 몇 명이나 낳는가. 이익과 명예는 바다와 같아 그릇될 까 두렵네. 만일, 설 자리 알아 내 할 일을 구하려면 운곡(주자)의 문하에서 참 마음을 쌓아야 한다오. 퇴계는 ‘학문의 시작과 근본은 오로지 주자에게 있다’면서 중국 송나라 성리학자 주희(1130∽1200)에 심취했다. 그는 주자의 학문과 사상이 함축된 서간문 『주자서(朱子書)』중 중요한 내용을 발췌하여 『주자서 절요(朱子書節要)』를 편찬했다. 제4수 아득히 제멋대로 달려온 나의 반 평생이여. 대롱으로 하늘을 엿보듯 주자를 배웠으나 늙고 병들어 실수 많음을 몹시 부끄러워했는데 죽천, 그대의 도움으로 다시 광명을 얻었다오. 제5수 일월의 찬 냇물에 뜻이 더욱 굳어지니 고향에 돌아가서도 이 뜻을 바꾸지나 말게나. 달콤한 복숭아를 날려 보낼 수 없지만 귀중한 밝은 구슬은 단지 연못에 잠겨 있다네. 퇴계는 죽천에게 학문에 더욱 정진하기를 당부한다. 사진 1 화산재 (보성군 겸백면 사곡리에 있는 박광전의 재실이다.) 사진 2 퇴계의 이별시 편액 (화산재 마루에 걸려 있다). 고향 보성으로 돌아온 죽천은 1567년 2월에 퇴계가 이별 선물로 준 『주자서 절요』의 서문 뒤에 글을 적었다. 이후 죽천은 퇴계가 준 『주자서절요』를 열독하였다. 그러면서 퇴계에게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묻고 약초를 보내면서 『주자서 절요』의 내용 중 의문나는 부분을 물었다. 퇴계도 죽천에게 답서했는데 이는 『퇴계집』 내집, 권15에 ‘상사 박광전과 수재 윤흠중에 답한 편지’에 수록되어 있다. 죽천은 『주자서절요』를 읽다가 이해가 되지 않는 곳이 있으면 별도로 문목(問目)을 만들어 퇴계에게 질의하였고, 퇴계는 죽천의 질문에 대하여 답서를 보냈다. 이러한 죽천의 질의와 퇴계의 답장을 정리한 책이 바로 『주자서절요 문목』이다. 문목은 85개나 되는데 그 유형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 유형은 의미를 잘 모르겠으니 해석을 구하는 질문이다. 문목의 대부분은 “그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란 질문이다. 글의 의미를 모르겠다는 것은 중국의 문화와 역사를 잘 알기 어렵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사유와 철학적 언어의 의미를 잘 모르겠다는 뜻일 수도 있다. 두 번째 유형은 ‘『주자서』에는 이런데 『주자서 절요』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어느 것이 맞는지요?’라는 질문이다. 죽천의 책 읽기는 정말 정독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주자서』와 『주자서 절요』를 일일이 대조하면서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하고 있다. 사진 3 주자서 절요 1) 양응정(1519∽1581)은 조광조의 시신을 수습한 학포 양팽손의 아들이다.   2) 윤복은 어초은 윤효정의 4남으로,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직계조상인 귤정 윤구(1495∽1549)의 동생이다.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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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7-29 / 뉴스공유일 : 2019-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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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상희이(面相喜怡)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연꽃의 모양은 둥글고 원만하여 보고 있으면 마음이 절로 온화해지고 즐거워진다는 뜻으로, 7월의 무안은 연꽃이 만개하여 아름다운 여름 경치가 돋보이는 시기이다.   초·중·고등학교들도 방학이 시작되어, 그동안 열심히 공부하느라 지친 학생들이 부족한 공부를 더 하거나 가족·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갈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 학생들의 얼굴에 웃음과 기쁨이 찾아오는 시기가 되었다.   이처럼 방학이 되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최근 스마트폰 등을 이용하여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 사이버 학교폭력이 등장하여 얼굴에 그늘이 드리운 학생들이 많아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사이버 학교폭력은 SNS, 카카오톡, 스마트폰 메신저 등을 이용하여 사이버 상에서 특정인을 집단적으로 따돌리거나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행위를 일컫는 말로, 피해자가 공간의 제약 없이 24시간 내내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정신적 고통이 크다.   주요 유형으로는, 카카오톡 등 단체 대화방에서 각종 욕설이나 괴롭힘 등을 자행하는 「떼카」, 대화방으로 초대해 괴롭힌 뒤 피해자를 남기고 한꺼번에 퇴장하는 「방폭」, 친구를 흉보는 글을 지속적으로 페이스북에 올리는 「페카」등이 있다.   이 밖에도, 카톡감옥, 플레이밍, 기프티콘 셔틀, 이모티콘 셔틀, WIfi 셔틀, 안티카페 등 수많은 방식이 생겨나고 있으며, 가장 큰 문제점은 사이버상에서 은밀하게 일어나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지속적이고 집요하게 피해자를 괴롭히기 때문에 방학 중에도 피해 학생들은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는 점이다.   이에 대응하여, 경찰에서는 학교전담경찰관(SPO)를 별도로 두어, 학교 별로 매 학기 사이버 학교폭력 예방교육을 실시하여 학교폭력으로 고통 받는 학생들이 없도록 주력하고 있다. 또, 사이버 학교폭력 피해를 입었다면 적극적인 신고가 제일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부모나 선생님께 알려야 피해를 줄일 수 있다. 학교전담경찰관(SPO)이나 117신고센터 등을 통해 상세한 상담 및 신고가 가능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학생과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하는 친구들의 도움이라 할 수 있다. 사이버 학교폭력이 발생 했을 때, 이를 외면하지 말고 피해 학생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친구들의 용기와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좋은 추억이란, 양쪽 모두에게 아름답고 좋은 기억이 남았을 때 좋은 추억이라 부를 수 있다. 단지 재미로 한 행동이 상대방에게는 지워지지 않는 고통스러운 기억이 될 수 있다. 학교폭력 예방을 위해 우리 모두가 노력을 기울일 때 우리사회의 미래는 더 밝고 행복해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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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군 노동면에 있는 용산서원(龍山書院)을 간다. 용산서원은 도학과 절의의 선비, 의병장 죽천(竹川) 박광전(朴光前 1526∽1597)을 기리기 위해 2016년에 세워졌다. 1) 진선문(進善門)을 지나니 강당인 용산서원과 동재 수인재(修仁齋), 서재 숭의재(崇義齋)가 있다. 동재를 수인재, 서재를 숭의재라 이름 붙인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다. 죽천 선생은 퇴계 이황의 제자로서 먼저 자기 몸을 닦고, 함열현감 등을 하면서 인(仁)을 실천했고,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여 의(義)를 숭앙했다. 사진 1 용산서원 1707년에 숙종 임금은 용산서원에 사제문(賜祭文) 편액을 내렸다. 사제문을 읽어보자. 저 호남 땅을 돌아보니 산과 강이 수려하고 땅의 신령이 모두 모여 명유(名儒)가 끊이지 않았도다. 더구나 우리 조선은 수대에 걸쳐 배양하여 유(유희춘) ·기(기대승) 같은 이가 융성하던 시절에 드날렸네. 누가 그 뒤를 이으랴 문순공(퇴계 이황)의 뛰어난 제자로다. 2) 능침의 참봉에 제수하고 왕자사부에 임명하였네. 백성과 나라 위해 거듭 현감이 되어 아름다운 정치로 혜택을 베풀고 본심을 간직하여 사물을 사랑하니 참으로 구제함이 있었도다. 죽천 선생은 광해군의 사부였고, 1584년에는 함열현감으로 근무했다. 그는 관저와 동헌 벽 위에 “시민여상 (視民如傷 다친 사람을 보살피듯이 백성들을 사랑하고 가엾게 여긴다.)” 네 글자를 크게 써 붙여 놓고 백성을 다스렸다. 임진 · 계사년에 이르러 섬 오랑캐가 침략함에 여러 고을들이 궤멸되니 누가 그 기세를 막겠는가. 이에 의병을 규합하여 끓는 피로 맹세하고 적의 급소를 눌러서 조용히 막아냈도다. 크나큰 공을 알리지도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뜨니 유림들이 몹시 경악하고 열사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네. 죽천 선생은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각 지역에 격문을 돌리고 의병을 모았다. 1592년 7월 보성 관아에서 박광전 · 임계영 · 문위세 등은 전라좌의병을 일으켰다. 700명이 모였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칠순의 박광전은 의병장으로 나섰다. 보성의 천봉산에서 피신하다가 의병을 모아 화순 동복에서 왜적을 물리쳤다. 각 고을의 수령들이 피신한 상황에서 이긴 값진 승리였다. 그런데 관아를 버리고 도망간 고을 수령들은 관내를 이탈한 죄도 큰 데 박광전의 공을 시기하여 전라감사 황신에게 모함했다. 죽천은 전주의 전라감영까지 가서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그 해 11월에 별세하였다. 용산서원을 둘러보고서 사당으로 올라간다. 숭모문(崇慕門)을 지나니 경덕사(敬德祠)가 있다. 덕을 존경하는 사당이란 의미이다.   사진 2 경덕사 그랬다. 죽천 박광전(1526∽1597)은 하서 김인후(1510∽1560), 고봉 기대승(1527∽1572), 미암 유희춘(1513∽1577), 일재 이항(1501∽1570)과 더불어 호남 5현(五賢)이었다. 아! 우리 호남은 본래 문헌(文獻)의 고장으로 불렀다. 고려 말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학문으로 세상에 이름이 높았던 자는 오직 김하서 · 기고봉 · 이일재 · 유미암 그리고 우리 선생뿐이다. 하서의 학문과 조행, 절의와 문장은 높아서 따를 수 없고, 고봉의 명쾌한 의논이나, 일재의 강하고 굳세어 굽히지 않음이나, 미암의 넓은 지식과 많은 문견도 또한 세상에서 보기 드문 일이나, 실천의 독실함을 논하자면 저 분 현인들이 우리 선생과 더불어 누가 더 나은지 모르겠다. - 우산 안방준(1573∽1654)의 ‘박광전 행장’에서- 죽천 선생은 실천의 선비였다. 위기지학(爲己之學 인격완성을 위한 공부)을 독실하게 실천하였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는 국난극복에 앞장섰다. 1) 죽천 박광전의 문인(門人) 은봉 안방준, 난곡 정길 등이 1607년에 죽천 선생이 평소 강학했던 보성 대룡산 우와곡 동편 기슭(보성군 미력면 덕림리 우곡촌)에 용산서원을 세웠으나 1871년(고종 8)에 철폐되었다.   2) 죽천 선생은 1566년 겨울, 나이 41세에 퇴계 이황(1501∽1570)에게 공부를 배우기 위하여 안동을 갔다. 그는 겨울 한 철을 도산서당에서 지내고 1567년에 보성으로 돌아오면서 퇴계로 부터 ‘주자서 절요’ 한 질을 받았다.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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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8년 4월30일에 성종은 명하여 홍문관·예문관의 관원을 복직시켰다. 이 날 임사홍의 부친 임원준이 탄핵 내용에 대해 변명 상소를 올렸으나 성종은 알았다고만 하였다. 이윽고 성종은 임원준을 해임하고, 허종을 의정부 좌참찬으로, 손순효를 도승지로 삼았다. (성종실록 1478년 4월 30일 5번 째 기사) 5월1일에 성종은 "내가 의금부의 국안(鞫案)을 보니, 유자광과 김언신이 같이 의논한 것이 명백하다. 김언신과 유자광이 같이 의논한 여부를 국문하라."고 전교하였다. 조금 있다가 우부승지 이경동이 의금부의 국안을 가지고 김언신·유자광·임사홍의 일을 아뢰었다 (성종실록 1478년 5월1일 2번째 기사) "유자광의 공사(供辭)에 이르기를, ‘상소할 때에 김언신과 같이 의논하지 않았고, 그 뒤에 김언신을 보고 서로 이르기를, 「나의 상소가 자네가 말한 것과 같으니, 사람들이 반드시 같이 의논했다고 할 것이다.」 하였고, 애초에 임사홍이 은근히 사주함을 들은 것은 아니다.   내가 임사홍·한한과 더불어 홍귀달의 집에 가서 들었을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김언신의 공사에는, ‘내가 정랑이 되었을 때에 임사홍과 서로 만났는데, 임사홍이 현석규의 일을 말하기에, 내가 듣고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였는데, 현석규가 지평에 제수되었다는 것을 듣고, 곧 죽을힘을 다하여 반대하려고 하여 참의 손순효에게 물으니, 손순효는 웃기만 하고 말하지 아니하였다. 그 뒤에 여러 번 임사홍과 서로 만났으나, 진실로 은근히 사주함을 듣지는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성종은 "유자광과 김언신이 그때에 현석규를 소인(小人)이라고 극언하였으니, 김언신이 반드시 임사홍의 술책에 빠져서 말한 것이다."라고 전교했다. 이경동이 다시 아뢰었다. "그때에 현석규가 두 자급을 뛰어올랐으니, 김언신만 탄핵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의 생각으로도 지나치다고 여겼습니다. 지금에 와서 보면, 전하의 밝으심이 아니면 현석규와 임사홍의 간사하고 바른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신은 본래 임사홍의 사람됨을 알지 못하였지만, 신이 중시(重試) 에 합격하고 임사홍이 초시(初試)에 합격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임사홍을 교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임사홍은 재상의 아들로서 소년으로 과거에 올라, 신이 동부승지가 되자 임사홍은 도승지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함께 있은 지 겨우 20여 일이 되었는데, 행동이 거만하고, 동료를 대하는 것도 이와 같았으므로, 신이 그제야 비로소 그 사람됨을 알았습니다. 이 같은 일이 발로(發露)되었으면 마땅히 엄히 징계하여 뒷사람을 경계해야 합니다. 만일에 그렇지 아니하면, 승지가 은근히 대간을 부추기고, 대간이 탄핵하여 안팎으로 서로 호응하면, 나라 일이 장차 날로 그릇될 것이니, 그런 풍습을 커지게 할 수 없습니다." 성종이 말했다. "이 같은 일은 탄로 나기가 어려운데, 지금 드러났으니 내가 장차 엄하게 징계하겠다. 표연말은 인견(引見)하던 날에 말하지 아니하고 파직하던 날에 이심원에게 말하였으니, 매우 간사하다. 그 경유를 국문하라." 이어서 성종은 도승지 손순효에게 전교하기를, "네가 형조참의 때에 김언신의 말을 듣고 웃으며 답하지 아니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손순효가 대답하였다. "김언신이 신에게 묻기를, ‘현석규는 어떠한 사람인가? 내가 장차 탄핵하려고 한다.’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그대의 물음이 부당하니, 내가 답하는 것도 부당하다. 가령 현석규가 잘못하였을지라도 내가 말하는 것이 부당하고, 잘하였을지라도 말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하자, 김언신이 말하기를, ‘나는 영공(令公)이 반드시 말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묻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성종은 "알겠다."고 말하였다. (성종실록 1478년 5월 1일 3번째 기사) 5월3일에 김언신이 옥중에서 옷 한 폭을 찢어 글을 써서 올렸는데, 그는 임사홍의 은밀한 사주를 받아 현석규를 탄핵하지 않았다고 극구 변명했다.   (刑訊)하라.” (성종실록 1478년 5월 4일 1번째 기사) 유자광도 옥중에서 글을 올렸다. 그는 전하께서 현석규의 음험하고 간사함을 살피지 못하실 것을 깊이 두려워하고, 또 현석규가 장차 전하의 정치를 더럽힐까 염려하여, 차마 잠자코 있지 못해서 그 듣고 본 바를 마음대로 다 쓴 것이며, 현석규에게 무슨 혐의가 있겠으며, 현석규가 신에게 무슨 마음이 있었겠냐고 하였다.   이에 성종은 전교하였다. "김언신은 참으로 간사하다. 현석규의 일이 만약 사람들의 입에 올랐으면, 어찌 손순효에게 물을 필요가 있겠는가? 이는 마땅히 형벌로 신문해야 할 것이다. 유자광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성종실록 1478년 5월3일 1번째 기사) 5월4일에 성종은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성종은 좌우에게 강경한 어조로 말하였다. “경들은 유자광이 옥중에서 올린 글을 보았는가? 유자광과 김언신이 모두 임사홍의 사주를 받지 아니하였다고 하나, 이는 속이는 것이다. 만약에 김언신이 평소에 물의를 들었으면 손순효에게 묻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 또한 바르지 못한 것이다. 몰래 사주한 일을 임사홍이 이미 승복하였는데, 오직 유자광과 김언신만 불복하니, 다시 물어서 승복하지 아니하면 형신 사진 의금부 터 (종각 전철역 1번 출구)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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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칼럼

1478년 4월29일에 성종 임금은 홍문관·예문관 관원을 불러서 임원준과 임사홍의 소인됨과 간사한 형상을 묻게 하라고 전교했다. 먼저 홍문관 부제학 유진이 말했다. "임사홍은 평상시에 행동이 거만하여 남을 공손하게 대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불순하다고 생각하였으나, 별로 밝게 드러난 허물이 없기 때문에 즉시 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요즘 임사홍이 계달한 바, ‘천재(天災)는 마침 그렇게 된 운수인데 경계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대간에서 일을 너무 쉽게 말하니, 마땅히 견책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소서.’라는 등의 말은 정상(情狀)이 이미 드러났기 때문에 소인이라고 지목하는 것입니다. 평상시에 그 아들을 가르치지 못하였고, 또 1444년(세종26년) 과장(科場)에서 글을 대신 제술(製述)하였고 뒤에 의서(醫書)를 습독할 때에는 안평대군 이용의 집에서 약을 훔쳐 도망하였으니, 이 때문에 간사하고 탐탁(貪濁)하다고 이르는 것입니다." 이어서 전한 이형원, 홍문관 직제학 유순, 응교 채수, 부응교 이우보도 홍문관 부제학 유진과 비슷한 말을 했다. 이에 성종은 임사홍 · 박효원 · 김맹성 · 김괴 · 표연말을 의금부에 회부하라고 명하였다. (성종실록 1478년 4월29일 3번째 기사) 4월30일에 성종은 어제 모임에 참여한 여러 신하를 서빈청(西賓廳)에 불러서, 임사홍이 박효원을 가만히 부추겨서 현석규를 공격하기를 꾀하였던 등의 일을 물었다. 먼저 임사홍이 신상 발언을 통해 현석규를 탄핵하려 했다고 실토했다. "전에 승지가 되었을 때에 도승지 현석규가 홍귀달을 욕한 일을 대사간 손비장의 집에 가서 말하였더니, 손비장이 듣고서 놀라고 탄식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승정원은 백관들이 모여서 보는 곳인데 이러한 일이 일어났으니, 홍귀달이 비록 월권하였을지라도 현석규가 잘못이다.’라고 하자, 손비장이 답하기를, ‘현석규가 과연 잘못이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사간원에서 차자(箚子)를 올리던 날에 박효원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대략의 뜻은, ‘그날 정언 김맹성을 승정원에 불러서 질문할 때에 현석규가 손에 차자를 가지고 계달하기를, 「팔을 걷어 올린 것은 더운 때문이고, 너라고 일컬은 것은, 신이 홍귀달에게 말하기를, ‘승정원의 구례(舊例)를 폐하려는가? 비록 강맹경이 도승지가 되고 신숙주가 동부승지가 되었을지라도 어찌 이와 같을 수가 있겠는가?’고 한 것입니다. 동부승지가 월권하여 말한 일은 신이 진실로 노여워하였습니다. 그가 노할 때를 당하여 침과 거품이 나왔으니, 신이 어찌 노하지 아니하겠습니까? 그같이 무례한 행동은 신은 실로 없었습니다. 이제 사간원에서 신을 꺼리어 무고하여 죄를 얽는 것이 이미 심하니, 신은 진실로 마음이 아픕니다. 전일에 이세좌가 갇히었을 때에 울면서 간(諫)한 것은 단지 공론(公論)을 위한 것뿐인데, 신이 무슨 마음이 있었겠습니까?」하였는데, 이때 김맹성은 듣고서 잠잠하게 있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현석규가 간관에게 말이 공손하지 못하니, 정언 김맹성이 반드시 계달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사간원에서 다시 논계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신이 또 박효원에게 편지로 통하기를, ‘도승지가 동료를 능멸할 뿐만 아니라 정언도 욕을 보고 갔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또 박효원을 사약방(司鑰房)에서 만나 서로 말을 나누었으나, 그 말은 오래되어 잊었습니다. 그 뒤에 박효원이 또 신의 집에 이르러 말한 것도 지금은 잊었으니, 청컨대 박효원에게 물으소서. 그 뒤에 어떤 날 또 손비장과 박효원에게 편지하였는데, 그 말도 잊기는 하였으나, 서로 통한 대개의 뜻은 현석규를 탄핵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윽고 성종은 어제 홍문관 관원 가운데 미처 묻지 못한 자에게 물었다. 홍문관 교리 권건이 말하였다. "신은 임사홍과 함께 있지 아니하였고, 같이 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사홍의 행적을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평상시 거동이 황당하고 말이 음휼(陰譎)하기 때문에 올바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는데, 요즘 계달한 바가 모두 소인이나 하는 짓이기 때문에 소인이라고 배척하는 것입니다. " 이어서 대사헌 유지가 아뢰었다. "이제 임사홍이 박효원을 몰래 시켜서 현석규를 공격한 일을 보건대, 그때 김언신이 지평이 되어 현석규를 중국의 노기·왕안석에게 비하기까지 하였는데, 김언신은 임사홍과 가까운 이웃으로 본래 교분이 있어서 조석으로 상종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임사홍이 시킨 것입니다. 또 그때에 유자광의 상소가 김언신의 아뢴 바와 뜻이 같고 김언신과 유자광이 또 서로 사귀어 친하였으니, 이는 함께 탄핵한 것입니다. 함께 추국함이 어떠하겠습니까?" 성종은 "좋다. 의금부에 내려서 국문하게 하라."고 전교했다. 조금 있다가 임금이 선정전에 나아가자, 전에 정승을 지낸 자와 의정부, 육조의 참판 이상, 대간이 입시(入侍)하였다. 성종이 말하였다. "사람을 알기가 심히 어렵다. 내가 홍문관·예문관 양관의 상소를 보니, 임사홍을 소인이라고 한 말이 있어 친히 물으니, 양관 사람이 대답하기를, ‘언어와 거동이 모두 소인이고, 또 요즘 말한 바가 바로 소인의 일이라.’고 할 뿐, 아무 일과 아무 일이 소인의 일이라는 것을 두루 말하지 아니하나, 내 생각으로도 임사홍이 요즘 말한 바는 과연 잘못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소인에 이르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말한 자를 파면하였는데, 이심원의 말을 들음에 미쳐, 말에 관련된 사람들에게서 들으니, ‘임사홍의 한 바는 참으로 소인이다. 양관 사람이 모두 임사홍이 소인인 것을 알았다.’고 말하였다. 임사홍이 승지와 참의를 지내도 소인이라고 말하지 아니하다가 지금에 이르러서야 말하니, 진실로 잘못이다. 그러나 임사홍이 이미 절반을 자백하였으므로 그 소인의 형상을 끝내 덮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므로 양관 사람들의 말이 무고가 아님이 드러났으니 내가 그들을 복직시키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한명회가 대답하였다. "상교가 마땅합니다. 신 등이 명을 듣고 임사홍을 국문하였던 바, 그 공사(供辭)의 대략은 이미 자복하였으나, 편지의 사연은 명백하게 말하지 아니하니, 말로써 그 정상을 알아낼 수 없습니다. 또 양관 20여 명의 관원이 모두 소견을 가지고 계달하였을 것인데 이것이 어찌 무고이겠습니까?" 이에 성종은 승지를 불러서 "홍문관과 예문관 사람들의 벼슬을 회복시키고, 또 그 당시 대간으로 임사홍의 술책에 빠져서 남의 과실을 탄핵한 자는 임사홍과 다름이 없으니, 손비장 ·김언신·김괴·김맹성·표연말을 아울러 국문하라." 고 전교하였다. 사진 1 창덕궁에 있는 옥당 (홍문관의 별칭) 이윽고 홍문관 부제학 유지가 말하였다. "신 등이 홍문관·예문관 관원의 공사(供辭)를 보건대, 임원준의 더러운 행적은 입으로 차마 말할 수 없는데, 그 죄가 어찌 벼슬을 파면하는 데 그칠 뿐이겠습니까? 또 박효원은 한미(寒微)한 가계에서 태어나서 벼슬이 없을 때부터 임원준의 집에 기식(寄食)하여 가신(家臣)과 같았으니, 임사홍의 지시를 받은 것이 명백합니다." 그러자 성종이 말하였다. "내가 마땅히 그 공사를 보겠으나, 어찌 다 믿을 수가 있는가?" 사헌부 장령 박숙달이 아뢰었다. "지난해에 김언신·유자광이 현석규를 소인이라고 극언하였는데, 두 사람의 말이 우연히 일치하였고, 또 이들의 교분이 두터워서 반드시 서로 약속하고 한 것일 터이니, 유자광을 아울러 추고(推考)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유자광은 말할 책임이 없는데도 감히 말하였으니, 이것 또한 의심스럽습니다.” 성종은 "좋다."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나가자, 성종은 전교하였다. "표연말이 나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이심원에게 말하였으니 매우 간사하다. 만약 이심원이 아니었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내가 매우 기뻐한다. 그를 위로하고 타일러서 보내라." (성종실록 1478년 4월 30일 1번째 기사)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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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7-15 / 뉴스공유일 : 2019-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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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칼럼

1478년 4월29일에 표연말, 박효원 등으로부터 임사홍의 일과 관련된 진술을 차례로 받은 성종은 이심원에게 임원준의 일을 물었다.   이심원이 말하였다. "전일에 듣건대, 성녕대군(誠寧大君 1405∽1418)의 계후(繼後)를 의의(擬義)할 때에 임원준이 신의 조부 보성군(寶城君)으로 하여금 뒤를 잇게하기를 꾀하였는데, 국가에서 열산수(列山守)로 하여금 뒤를 잇게 하자, 하루는 고모(임사홍의 아내)가 하인을 보내어 신을 불러서 임원준을 만나보게 하였습니다. 임원준이 신에게 이르기를, ‘너의 조부 보성군이 성녕대군의 뒤를 이을 만한데 얻지 못하였다. 이 앞서 오천부정(烏川副正)은 첩의 아들인 까닭으로 양녕대군의 뒤를 잇지 못하였는데, 이제 열산수도 첩의 아들이므로 성녕대군의 제사를 받들 수 없으니, 네가 오천부정을 가만히 부추겨서 열산수의 예(例)를 끌어 상언(上言)하도록 하라. 그러면 함양군(咸陽君)은 이미 양녕대군의 제사를 받들므로 갑자기 바꿀 수 없으며, 열산수는 저절로 이 예에 의하여 성녕대군의 후사가 되지 못하고 보성군이 마땅히 뒤를 잇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임원준의 말이 간악하고 음흉하다고 여겨서 대답하기를, ‘증조부 효령대군(태종의 둘째 아들)의 뜻이 이와 같지 아니하셨는데, 조부 보성군이 어찌 대군의 뜻을 어기고 제사를 받들고자 하겠는가? 하자,’ 임원준이 말하기를, ‘대군이 나이 80이 넘었는데, 어찌 세상에 오래 살겠는가? 비록 아버지의 뜻을 어길지라도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였으니, 이것이 참으로 소인의 말이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 계달한 것입니다." 성녕대군(1405∽1418)은 태종 임금의 넷째 아들로 1418년 2월에 홍역으로 13살에 죽었다. 그의 후사는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1418∽1453)이었다. 그러나 안평대군이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에 연루되어 죽자 대가 끊기었고, 1459년(세조 4)에 종부시(宗簿寺)에서 효령대군의 6남 원천군(原川君 1433∽1476) 의(宜)를 양자로 들여 봉사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원천군이 1476년에 죽자 다시 성녕대군의 봉사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한편 임원준이 이심원의 말을 듣고서 "신은 본래 이심원을 알지 못하고 단지 보성군의 집에서 서로 보았을 뿐이며, 신의 집에 불러서 성녕대군 봉사(奉祀)의 일을 말한 적은 진실로 없습니다." 라고 말하며, 공사(供辭)를 써서 입계(入啓)했다. 이에 정승들이 "임원준과 이심원의 공술(供述)한 바가 매우 다르니, 청컨대 면질(面質)하게 하소서."라고 아뢰었다. 그러자 성종은 "가하다."고 전교하고서, 곧 두 사람을 불러서 면질시켰다. 사진 창덕궁 선정전 이심원이 임원준의 성녕대군 계후(繼後)를 모의한 일을 매우 분명하게 말하니, 임원준이 말하였다. "자네가 말하는 것은 도무지 허망하다. 자네를 그대의 조부 보성군 집에서 한두 번 보았을 뿐이다. 임사홍이 일찍이 말하기를, ‘이심원이 글을 지어 두 번이나 내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승지가 어찌하여 이 같은 일을 계달하지 아니하느냐?」고 하니, 이는 반드시 일을 일으킬 사람이라.’고 하며 항상 그 아내에게 경계하기를, ‘내가 없을 때에 주계가 만약 오거든, 삼가하여 서로 접촉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내가 어찌 자네를 청할 이치가 있겠는가? 하물며 보성군 계후의 일은 전연 내게 상관되는 것이 아닌데, 자네와 더불어 모의할 이치가 만무하다. 설사 보성군이 비록 성녕대군의 뒤를 이을지라도 그 전민(田民)은 반드시 아들에게 돌아갈 것이고 딸에게는 관여됨이 없으니, 내가 자네와 더불어 모의하지 아니한 것은 명백하다." 이러자 이심원이 말하였다. "내가 승지에게 민간의 일을 전달하라고 이른 것이 옳지 못한가? 또 그대가 나를 집에 청하여 나를 문에서 맞이하고 익랑(翼廊)에서 마주 대해 앉아 조부 보성군 후계의 일을 가지고 나를 달랬는데, 내가 그 마음이 간악하고 음흉함을 보고 대꾸하기를, ‘이는 대군(大君)의 뜻이 아닌데, 조부께서 어찌 감히 그 뜻을 어기겠는가?’ 하니, 그대가 곧 답하기를, ‘나이가 80이 넘었는데, 어찌 오래 살 수 있겠는가? 비록 그 뜻을 어길지라도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라고 그대가 말하지 아니하였는가? 그대가 말하지 아니하였는가?” 이러자 임원준이 "나는 참으로 말하지 아니하였다." 고 말하였다. 다시 이심원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숨기는가? 불초(不肖)하도다, 이 사람이여! 이것이 내가 소인이라고 이르는 바요. 내가 전일에 글을 올려서 세조조(世祖朝)의 신하를 쓰지 말기를 청하였는데, 비록 쓰지 말라고 말하였으나, 어찌 좌우에 있는 재상을 이르는 것이겠는가? 이는 그대를 가리켜 말한 것이오?" 라고 하였다. 이에 임원준이 말하였다. "자네도 태종(太宗)의 손자인데 어찌하여 말을 그렇게 하는가? 어찌하여 나를 불초하다고 이르는가? 자네가 임사홍의 조카인데, 자네가 이를 헐뜯고자 하니, 인정과 천리(天理)에 어떠한가?" 이에 이심원이 말하였다. "나는 나라를 위해 말하는 것이고 다른 것은 있지 아니하오. 이전에 아버지가 병이 있을 적에 그대가 약을 준 은혜로 그 생명을 건졌으니, 그 은혜가 지극히 중한데, 내가 어찌 옛 은혜를 잊고 말하는 것이겠는가? 어찌 사사로움이 있어서 그러하겠는가? 단지 사직(社稷)이 있는 것만 알 뿐이고 다른 것은 돌아보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임원준이 말하였다. "내가 약을 주어 그대 아버지의 병을 고친 것을 가지고 불초하다고 하는가? 이제 보성군을 만나보니, 말하기를, ‘주계(朱溪)가 이르기를, 「글을 올려 세조조의 신하를 쓰지 말라고 한 것은 마음으로 지목하는 바가 있어서 말한 것인데, 임사홍이, 세조조의 신하는 모두 쓰지 말라고 계달한 것으로 여긴 까닭에, 보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오늘 아침에 성상께서 승지들에게 임원준의 간사한 형상을 묻자 그중의 끝에 있는 새로 제수된 승지가 그 허물을 자세히 말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하였으니, 자네가 말한 바는 모두 거짓이고 망령된 것이다." 이러자 이심원이 "이 말은 내 입에서 나오지 아니하였는데, 어찌하여 망령되게 말하는가?" 하였다. 임원준이 여러 정승에게 고하기를,"보성군이 이제 궐내(闕內)에 있으니, 불러서 면대하기를 청합니다." 1) 이심원이 "어찌 할아버지와 손자가 서로 대질(對質)하는 도리가 있는가?" 말하니, 정승들이 모두 말하기를, "진실로 우리들이 마음대로 부를 수 없다."하였다. 이 뜻을 입계(入啓)하자, 성종이 전교하기를, "보성군을 불러서 물어 보라." 하였다. 정승과 대간들이 보성군은 불러서 물으니, 그 말이 임원준의 말한 바와 같았다. 이심원이 그 조부에게 부르짖으며 고하기를, "천 년 후에 손자로 하여금 누명(累名)을 얻지 말게 하소서." 하므로, 좌우에서 말리자 이심원이 잠잠하였다. 한명회 등이 "임원준과 이심원은 양쪽이 공증(公證)이 없으니, 그 말을 듣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에 성종이 전교하였다. "임원준과 이심원의 일은 모두 기각하고 양관(兩館:홍문관·예문관)의 사람을 불러서 임원준과 임사홍의 소인됨과 간사한 형상을 묻게 하라." (성종실록 1478년 4월29일 3번째 기사) 1) 보성군 이합(寶城君 李㝓, 1416~1499)은 효령대군의 셋째 아들로 임사홍의 장인이다. 임사홍의 부친 임원준과는 사돈 간이다.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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