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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0년 2월28일에 선조는 창덕궁 인정전에서 헌부례(獻俘禮 : 포로를 바치는 의식)를 거행했다. 진도사람 사을화동(沙乙火同)이 왜구의 향도(嚮導)노릇을 해왔는데 조선의 요구로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가 잡아왔다. 대마도주는 선조에게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면서 공작새 한 쌍과 조총(鳥銃)을 바쳤다. 그런데 선조는 조총을 쳐다보지도 않고 군기시에 보관토록 지시했다. 1543년에 일본 규슈 근처의 종자도에 도착한 포르투갈 상인이 종자도 영주에게 조총을 바쳤다. 이 신무기는 일본 각지로 퍼져 기존의 전투 양상을 바꾸었다. 조총의 위력을 실감했던 오다 노부나가는 조총수 양성에 진력했다. 그는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조총으로 최강의 기마군단 다케다 가쓰요리를 이겼다. 노부나가는 3교대 연속 사격 전술을 썼다. 조총의 장전 시간이 꽤 걸리는 점을 보완하기 위해 조총수를 3열로 배치시켜 연속 사격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노부나가는 1582년에 부하 아케치 미쓰히데의 반역으로 교토 혼노시(本能寺)에서 자결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당시에 원정 중이었는데 노부나가가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회군하여 교토의 야마자키 전투에서 미쓰히데를 토벌했다. 1585년에 히데요시는 관백이 되고 1590년에는 100년간의 전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일본을 통일했다. 한편 1592년 2월에 선조는 신립과 이일을 파견하여 각 도의 병기를 점검토록 했다. 신립은 경기도와 황해도, 이일은 전라도와 충청도로 갔는데 점검이라는 것이 활·화살·창과 칼뿐이고 대포나 화약은 없었다. 그나마 장부상 점검이었다. 신립은 1583년 온성부사 때 여진족을 무찌른 장수로 안하무인이었다. 수령들은 신립을 두려워 해 백성들을 동원해 길을 닦고 극진히 접대했다. 대신의 행차도 이만 못했다. 1592년 4월1일에 신립은 선조께 복명한 뒤 류성룡과 대화를 나누었다. 『징비록』에 나온다. 류성룡 : “멀지 않아 변고가 생기면 공이 마땅히 그 일을 맡아야 할 텐데 공의 생각으로는 오늘날 적의 형세로 보아 그 방비가 충분하나요?” 신립 :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류성룡: “그렇지 않소. 예전에는 왜적이 창·칼만 믿고 있었지만, 지금은 조총과 같은 우수한 병기가 있으니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요” 신립: “비록 조총이 있다고는 하나 그 조총이라는 게 쏠 때마다 사람을 맞힐 수 있겠습니까?” 신립, 너무나 안일하다. 더구나 신립은 수군을 폐지해야 한다고 선조에게 건의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이순신이 수군의 중요성을 강력히 주장하여 이 논의는 중단되었다. 4월13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4월28일에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서 전사했다. 신립은 험준한 요새 조령을 지키지 않고, 기마병이 싸울 수 있는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 그러나 기마병이 조총으로 단련된 왜군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날 저녁에 선조는 신립의 패전 소식을 접했다. 4월30일 새벽에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도망쳤다. 이를 보고 성난 백성들은 경복궁과 창덕궁에 불을 지르고 장예원의 노비문서를 불태웠다. 5월3일에 왜군은 한양에 무혈 입성했다. 임진왜란은 예고된 전쟁이었다. 충분히 대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선조의 무능, 집권당의 안일, 그리고 장수들의 오만이 조선을 아비규환으로 만들었다.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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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칼럼

1498년 7월14일에 의금부가 이목의 집을 수색하여 발견한 임희재(任熙載)의 편지를 읽은 연산군은 “그 아비 임사홍(任士洪)이 소인으로서 금고(禁錮)를 입었는데, 이 사람도 역시 그렇단 말이냐. 아울러 그 아비까지 잡아다가 국문하라.”고 전교하였다. 조선 시대 간신의 대명사로 낙인찍힌 임사홍(1445∼1506). 그는 금수저였다. 아버지는 좌리공신 임원준, 아내는 효령대군(1396-1486)의 손녀였다. 1) 또한 네 아들 중 큰 아들 임광재는 예종의 딸인 현숙공주에게 장가들어 풍천위(豊川尉)가 되었고, 넷째 아들 임숭재는 성종의 딸인 휘숙옹주와 혼인하여 풍원위(豊原尉)가 되었다. 이렇게 임사홍의 집안은 왕실과 중첩적인 혼인을 맺은 부마 집안으로써, 권력의 핵심을 맴돌았다. 임사홍은 20세인 1465년에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승승장구 했다. 특히 서예 솜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의 으뜸이었다. 중국어에도 능통하여 승문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성종은 임사홍을 동부승지 · 우부승지 · 좌부승지 ·우승지(1476년), 좌승지(1477년)로 근무하게 하였고, 1477년 8월에는 대사간, 10월에는 예조참의, 1478년 1월에는 이조참의로 임명했다.   그런데 1478년(성종 9년) 4월1일에 흙비[土雨]가 내렸다. 성종은 즉시 승정원 관리들을 꾸짖었다. "흙비가 내렸으니 천견(天譴)이 가볍지 아니하다. 하늘이 꾸짖어 훈계하는 것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인데, 경등은 어찌하여 한 마디 말도 없는가?" 도승지(都承旨) 신준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은 단지 날씨가 흐린 것만 보았고 흙비가 내리는 것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만일 알았다면 어찌 감히 아뢰지 아니하였겠습니까?" (성종실록 1478년 4월1일 2번째 기사) 이 날 성종은 재이(災異)의 이유와 해결방안에 대해 널리 의견을 구하라고 의정부에 지시했다. (성종실록 1478년 4월1일 3번째 기사) “지난달에는 지진(地震)이 있었고 이 달에는 흙비가 내리니, 재변(災變)이 오는 것이 무슨 까닭인가? ... 허물은 실로 내게 있는 것이므로 직언(直言)을 들어서 천견(天譴)에 답하고자 하니, 대소 신료와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재이(災異)를 일으킨 이유와 재이를 그치게 할 방법을 숨김없이 모두 진술하라." 4월7일에 경연을 마치자, 대사간 김자정과 사헌부 장령 박숙달이 아뢰기를, "금주(禁酒)와 기생을 데리고 잔치하는 것을 금하게 하소서."하였다. 성종은 이런 금지가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 좌우에게 물었다. 영사(領事) 한명회와 노사신이 성종의 의견에 찬동했다. 이러자 대사간 김자정과 장령 박숙달이 금주령(禁酒令)을 마땅히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날인 4월8일에 성종은 도승지를 신준에서 임사홍으로 교체했다. 임사홍은 나이 33세에 요즘 같으면 대통령 비서실장이 된 것이다. 사진 1 성종 왕릉 ( 선릉, 서울시 강남구 소재) 사진 2 성종와 정현왕후 비각 4월8일에 효령대군의 증손자인 이심원이 상소를 올렸다. 성종의 구언에 답했는데 권세가문은 이익 챙기기에 바쁘다고 하면서 세조의 공신들은 모두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4월15일에는 성균관 유생 남효온이 근래의 변고는 소릉 (단종의 모친 현덕왕후)를 파헤쳐서 그렇다면서 소릉복위상소를 올렸다. 세조 이래 금기(禁忌)인 문제를 건드린 것이다. 4월21일에 사헌부가 성종에게 보고했다. "요즘 흙비와 지진이 있었고 성 안에 불이 나서 수백 집이 연소(延燒)되었으니 재변이 이상하고, 또 가뭄의 징조가 있으니 모름지기 상하(上下)에서 몸을 닦고 마음을 반성하여야 할 것이므로, 늙고 병들어 약으로 먹거나 혼인과 제사 외에는 일체 술을 금하여 천견(天譴)에 답하게 하소서." 하였다. 금주령을 건의한 것이다. 성종은 사헌부의 의견에 그대로 따르되, 부모의 헌수(獻壽)와 백성 다섯 사람 이하가 술을 마시는 것은 금지하지 말도록 하였다. (성종실록 1478년 4월 21일 3번째 기사) 그런데 이 날 도승지 임사홍이 이의를 제기했다.   "신이 듣건대, 경연에서 대간들이 금주를 건의했다고 하나, 술이란 본시 사람이 마시는 것으로, 대저 임금이 큰 재변을 만난 뒤에 몸을 닦고 마음을 반성하며 술을 금한 것은 한갓 문구(文具)일 뿐입니다. ... 만약 흙비를 재이(災異)라고 한다면, 예로부터 천지의 재변은 운수(運數)에 있으니, 운성(隕星 암석이나 금속의 조그마한 조각이 지구 대기로 진입할 때 나타나는 빛줄기)도 그 운수입니다. 흙비도 때의 운수가 마침 그렇게 된 것인데, 어찌 재이이겠습니까? 만약 화재를 재변(災變)이라 한다면, 민가(民家)의 집이 붙어 있고 담이 연하였는데 삼가지 못해서 불이 나자 마침 바람이 불어 연달아 탄 것이니, 족히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무릇 이 몇 가지 일은 모두 밝게 드러난 재이가 아닌데 갑자기 술을 금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합니다. 또 오늘 전지(傳旨)를 내려 술을 금하였다가 내일 비가 내리면 또 금하지 아니하겠습니까? ... 비록 금할지라도 조정 관료나 양반은 적발 당함이 없고 오직 애잔한 일반 백성만 죄를 받을 뿐입니다.” 성종은 "대간이 나로 하여금 비록 재변이 없을지라도 항상 경계하고 두려워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어려운 일이 아니므로 금주령을 내려도 좋다"고 전교하였다. 성종은 도승지 임사홍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이 날의 성종실록에는 사관(史官)의 논평이 실려 있다. "예전에 충성으로 간하는 자를 비방한다고 이르고 깊은 계책을 하는 자를 요망한 말이라고 하였는데, 충성된 말과 깊은 계책을 비방과 요망한 말이라고 한다면 이는 아첨하는 말로써 스스로 몸을 파는 것이다. 임사홍이 흙비는 운수로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하고, 화재가 있었음은 민가에서 실화하여 여러 집이 연달아 탄 것이니 족히 괴이할 것이 없다고 하여, 이치에 위반하여 임금을 속였으니, 옛날의 아첨한 말로 스스로 몸을 파는 자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성종실록 1478년 4월21일 4번째 기사) 1) 임사홍은 유자광과 함께 연산군 시절 간신으로 쌍벽을 이루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출신이 다르다. 임사홍은 좌리공신 임원준의 아들이고 부인이 왕족이었고, 유자광은 별 세력이 없는 양반의 서자였다. 2) 효령대군(1396-1486)은 태종의 둘째 아들이자 세종의 형님이다. 임사홍의 장인인 보성군 이갑은 효령대군의 아들이다.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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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칼럼

메이지 정부는 부국강병(富國强兵), 문명개화(文明開化), 식산흥업(殖産興業)을 통해 일본의 근대화를 촉진하였다. 정부주도형 즉 위로부터의 혁명이었다. 그러면 근대화의 내용을 살펴보자. 먼저 부국강병이다. 1873년에 정부는 징병제를 실시하여 20세 이상 남자는 황군(皇軍)으로 3년간 복무토록 했다. 1872년에는 병부를 육군성과 해군성으로 분리했다. 육군은 독일을 해군은 영국을 모델로 삼았다. 1878년에는 참모본부가 1881년에는 헌병제도가 확립되었다. 1882년에는 천황의 이름으로 ‘군인칙유’가 발표되었다. 사무라이 정신에 입각한 충성심과 무용(武勇) 그리고 예의가 강조되었다. 두 번째는 문명개화이다. 1870년대 들어서 일본은 생활방식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서양식 단발머리, 양복, 모자, 구두 차림으로 그간 금기시되어 온 소고기 음식을 먹는 것이 유행이었다. 또한 종래의 태음력을 태양력으로 바꾸었다. 1872년 12월3일을 1873년 1월1일로 정했다. 교통 통신도 근대화 되었다. 1869년에 도쿄와 요코하마 간에 전신이, 1877년에는 전화가 개통되었다. 1872년에는 도쿄 신바시와 요코하마를 연결하는 철도가 개설되었다. 기관차는 영국에서 수입되었고 철로는 영국이 식민지 인도에 부설한 협괘였다. 교육개혁도 이루어졌다. 1871년에 문부성을 설립하여 1872년 9월에 학제를 발표했다. 이에 따라 소학교, 중학교, 대학교 및 각종 전문학교가 설립되었고 교육의 내용도 새롭게 바뀌었다. 1873년에 소학교가 12,500개였고 취학률도 30%에 이르렀는데 1878년에는 41%였다. 사립대학도 설립되었다. 1869년에 후쿠자와 유키치가 세운 게이오 의숙, 1875년에는 정지용과 윤동주가 다녔던 교토의 도시샤 대학, 1882년에는 오쿠마 시게노부가 도쿄 전문학교(와세다 대학)가 개교했다. 1890년에는 ‘교육칙어’가 공포되어 천황에 대한 절대 충성이 이루어졌다. 문부성은 칙어를 전국 학교에 배포하여 의식 때는 반드시 칙어를 낭독하게 하고 학생들에게 암기를 강요했다. 1) 한편 문명개화 사상은 계몽주의였다. 막부 말기 ‘난학(네델란드)’을 공부한 지식인들은 영국과 프랑스에도 눈을 돌렸다. 1873년에 설립된 학술단체 ‘명육사(明六社)’가 선도적 역할을 했다. 후쿠자와 유기치 등 계몽사상가가 활개를 폈다. 셋째로 식산흥업이다. 1870년에 공부성이 설치되고 1873년에 내무성이 설치되었다. 공부성은 이토 히로부미, 내무성은 오쿠보 도시미치가 장관이었다. 특히 정한론 정변이후 정권을 장악한 오쿠보 도시미치는 영국의 산업화에 가장 관심을 가졌다. 그는 1874년에 ‘식산흥업 백서’를 발간하여 자본주의 발전을 도모했다. 정부는 에도막부와 각 번이 경영하던 광산 공장 탄광을 인수하여 관영으로 운영하였다. 특히 군수산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대포와 포탄을 만드는 도쿄 포병공창, 오사카 포병공창, 그리고 엔진과 군함을 만드는 요코스카 해군 공창과 나가사키 해군조병창을 중점 육성했다. 한편 관영공장은 1884년부터 순차적으로 민간에 불하되었다. 관영공장의 민간 불하는 정경유착을 가져왔고 민간 기업의 발달을 촉진했다. 1883년에 설립된 오사카 방적이 대표적이었다. 해운업 분야에서는 1870년에 설립된 미쓰비시 상사가 두각을 나타냈다. 1874년 일본의 타이완 침략 때 일본군을 수송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미쓰비시, 미쓰이같은 정상(政商)들은 특혜를 받아 성장했는데 정경유착의 폐해도 심했다. 눈여겨 볼 점은 일본의 근대화는 처음에는 서양화로 많은 좌절과 실패를 겪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실패 역시 고쳐서 일본스타일을 만들었다. 또 한 가지는 메이지 유신이 성공한 것 같지만 저항도 상당했다는 점이다. 정부 정책에 소외된 사족이나 농민층의 불만이 컸다. 이들은 암살 등 무력 행동도 하였다. 군제 개혁을 한 병부차관 오무라 마스지로가 1869년 9월에 살해된 것은 대표적 사례이다. 농민반란도 1873년에 63건이나 일어났고 1877년에는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끄는 서남전쟁이 발생했다. 2)‘근대 일본 군대의 아버지’ 오무라 마스지로 동상 (야스쿠니 신사) 1)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 ’ 한국도 1968년 12월 5일에 국민교육헌장이 선포되었고 학생들은 외어야 했다. 2) 참고문헌 : 대국굴기, 이야기 일본사, 천황제 근대국가의 탄생 등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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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칼럼

남당(南唐)의 서현(徐鉉)은 언변이 아주 뛰어난 총명한 인물이었다. 옛날에는 제후국들이 황제(皇帝)에게 곡물을 바치는 법이 있었다. 남당에서는 곡물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서현을 송나라로 파견하기로 했다. 원칙대로라면 송(宋)나라에는 높은 인물이 서현을 영접해야 했다. 그런데 송나라의 인물들을 두루 훑어보아도 남당의 서현에 비해서는 인물이 아닌지라 송나라 대신들은 적합한 인물을 고르지 못해 안절부절 하였다. 마침내 대신들은 이 일을 송나라 왕에게 아뢰었다. "우리나라에는 서현을 맞이할 적합한 인물이 없는 듯합니다. 송나라 왕이 "왜 인재가 없다고들 하오? 대신들은 잠깐 물러가도록 하시오. 내가 생각해 보겠소." 뜻밖에 송 왕은 궁정의 하인들 가운데에서 글을 깨우치지 못한 열 명의 명단을 작성해 올리라는 엉뚱한 어명을 내렸다. 신하들은 재빨리 하인 열 명의 명단을 써서 왕에게 바쳤다. 하인 명단을 주욱 훑어보던 왕이 붓으로 한 사람의 이름을 동그라미를 치며 말했다. "이 사람이면 될 것 같소. 이 사람이면 훌륭해!" 대신들은 깜짝 놀랐다. 글을 깨우치지 못한 하인들 가운데에서도 제일 까막눈인 사람을 왕이 점찍었던 것이었다. 그렇다고 왕에게 따져물어 볼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대신들은 할 수 없이 그 하인을 궁정으로 불러들였다. 결국 하인이 서현의 영접자 자격으로 나선 셈이었다. 자리를 정하고 앉자마자 짐작했던 바와 같이 서현의 말 솜씨는 청산유수(靑山流水)인지라 송나라 대신들의 마음은 옥죄여지는 듯했다. 일자무식의 송나라 하인은 도저히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는 매우 긴장된 얼굴로 그냥 "예, 예"라고 대답만 하고 따라 다녔다. 서현은 서현대로 어찌된 영문인지를 몰라 이 말 저 말을 번갈아 해가며 상대의 입을 열러보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자기의 지식 자랑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갔다. 그때까지 단 한마디의 대답도 들어보지 못한 서현은 그만 지쳐버려 입을 다물고 말았다. 송 왕은 대국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싸우지 않고 상대를 굴복시키는 현인들의 묘책이다. 공자(孔子)가 마부(馬夫)를 농부(農夫)에게 파견한 것은 우둔함으로 우둔함을 정복한 방법이고 송 왕이 문맹한 하인을 파견한 것은 우둔함으로 지혜를 정복한 방법이다. 지혜로운 자로서 우둔한 사람을 설득시키려 들면 우둔한 자는 이해하질 못하고, 지혜로운 자로서 지혜로운 자를 정복하려 들면 지혜로운 자는 굴복하려 하지 않는 법이다. 2019. 3. 19 姜元求 행정학박사. 한중문화교류회 중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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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 공자(孔子)는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니며 방랑(放浪) 생활을 하였다. 길을 가던 중 그가 조그마한 실수를 저질렀다. 그가 타고 다니던 말이 어느새 농부의 밭으로 들어가 농작물을 뜯어 먹어 못 쓰게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화가 난 농부가 무작정(無作定) 말을 끌고 가버렸다. 공자가 말했다. “누가 가서 말을 찾아오겠느냐?” “예, 제가 가서 찾아오겠습니다.” 원래 말주변이 좋은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선뜻 나섰다. 마부(馬夫)도 뒤지려 하지 않으려는 듯 이렇게 말했다. “제가 말을 잘 지켜보지 못했으므로 저의 탓이오니 제가 찾아오겠습니다.” 자공과 마부는 서로 말을 찾아오겠노라 했다. 공자가 말했다. “그래도 자공이 먼저 가는 것이 나을 것이다.” 자공은 제법 어깨를 으쓱이며 농부를 찾아갔다. 그런데 자공이 입술이 마르고 닳도록 얘기하고 설득(說得)을 했지만, 농부는 말을 돌려주지 않았다. 풀이 죽어서 되돌아온 자공의 얘기를 들은 공자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상대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써 상대(相對)를 설득시키려 하는 것은 마치 소와 말, 양을 잡아 산짐승에게 제사를 지내려는 것과 같으며, 아름다운 음악(音樂)을 새에게 들려주는 것과 같다. 그러니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을 마친 공자는 이번에는 마부를 보냈다. 마부가 농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나 나나 다 똑같은 농부요. 제가 깜빡 조는 사이에 말이 밭으로 들어간 것 같습니다. 말을 데려가지 않으면 저는 혼이 납니다. 정말 죄송(罪悚)합니다” 라는 마부의 말을 들은 농부는 언제 화를 냈던가 싶게 허허 웃으며 즉시 말을 돌려주는 것이었다. 사람은 언제나 동업자와 잘 어울리는 법이다. 농부 앞에서 ‘시(詩)’와 ‘서(書)’의 도리(道理)를 말하는 것은 무능한 선비들의 어리석은 행동에 불과하다. 마부의 말은 매우 솔직(率直)했다. 설령 자공이 마부처럼 말을 했다 하여도 농부는 여전히 듣기 싫어했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한 사람은 깔끔한 선비차림이고, 한사람은 우직(愚直)한 농부인지라, 애당초 서로 어울리지가 않는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공자는 처음부터 마부를 보내지 않고, 자공이 나서는 것을 막지 않았을까? 공자가 먼저 마부를 보냈다면 자공이 속으로 불만(不滿)을 품을 수가 있다. 자공이 실패(失敗)하여야만 비로소 마부가 능력(能力)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공자와 같은 현명한 사람들은 일을 시킬 때도 이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올바르게 다스릴 줄 알았다. 2019년 3월 12일 姜元求 행정학박사. 한중문화교류회 중앙회장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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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칼럼

1498년 7월14일에 연산군은 사초 사건에 연루된 자들을 찾아 올 적에는 아울러서 그 집의 문서까지 수색하라고 명령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14일 4번째 기사) 이러자 의금부는 이목(1471∼1498)의 집을 수색하여 임희재(1472~1504)가 이목에게 준 편지를 발견했다. 이목은 성종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설치된 실록청에 근무하면서 성중엄에게 김일손의 사초를 실록에서 누락해서는 안 된다고 엄중 경고한 선비로, 1492년(성종 23년) 12월에 영의정 윤필상(1427∼1504)을 간귀(奸鬼)로 규탄하고 1495년 1월에 성균관 유생 신분으로 연산군이 수륙재를 올리는 것을 반대하고 노사신을 국왕을 우롱하는 대신으로 비판하였다가 1495년 1월27일에 공주로 귀양 갔다. 임희재 역시 1495년 1월에 이목과 같이 성균관에서 공부한 동문이었다. 그는 조선 왕조의 3대 간신 중 한 사람으로 알려진 임사홍(1445∼1506)의 둘째 아들로서 그 역시 성균관 유생 신분으로 이목 등과 함께 수륙재를 반대했다가 과거 응시를 정지당했다. 당시에 연산군은 정희량을 해주로, 이목을 공주로, 이자화를 금산으로 나누어 귀양 보내고, 생원 조유형, 임희재 등 21인의 과거응시를 정지시켰다.(연산군일기 1495년1월27일 3번째 기사) 이로부터 4개월이 지난 5월22일에 이목은 유배가 풀리고 정거(停擧 과거시험 정지)로 감형되었고, 임희재는 정거가 풀려 과거 응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연산군일기 1495년 5월22일 2번째 기사) 그러면 임희재가 이목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보자.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4일 5번째 기사) “저는 우생(友生)이 없어 빈집에 홀로 누워 세상의 허다한 일만 보고 있습니다. 들으니, 그대가 장돈(章惇 이극돈을 말함)의 아들 장전(章銓 이세전을 말함)을 잘못 거슬려서 성내게 했다는데 과연 그러한가? 지금 물론(物論 여러 사람의 논의나 세상의 평판)이 심히 극성스러워 착한 사람이 모두 가버리니, 누가 능히 그대를 구원하겠는가? 부디 시(詩)를 짓지 말고 또 사람을 방문하지 마오. 지금 세상에 성명을 보전하기가 어렵습니다. 근일(近日)에 정석견이 동지성균(同知成均)에서 파직되었고, 강혼은 사직장을 올려 하동의 원님이 되었고, 강백진은 사직장을 올려 의령의 원님이 되었고, 권오복도 장차 사직을 올려 수령이나 도사(都事)가 될 모양이며, 김굉필도 이미 사직장을 내고 시골로 떠났으니, 그밖에도 많지만 다 들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철견·윤탄이 의금부지사(義禁府知事)가 되었는데, 논간(論諫)을 해도 임금이 듣지 않으니, 어찌 하겠소. 요사이 종루(鐘樓)에 이극돈의 탐취(貪聚)한 사실을 방(榜)을 써서 붙였으니, 저도 또한 수경(數頃)의 전토를 충주·여주의 지경이나 혹 금양(衿陽)의 강상(江上)에 얻어 수십 년 남은 생애를 보내고 다시 인간 세상에 뜻을 두지 않을까 하니, 그대도 다시 올라올 생각을 하지 말고 공주(公州)의 한 백성이 되어 국가를 정세(丁稅)로써 돕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가장 먼저 살펴야 할 것은 임희재가 이 편지를 쓴 시기이다. 임희재는 이목이 공주에 있을 때 편지를 보냈다. 편지의 마지막에 ‘다시 올라 올 생각을 하지 말고 공주의 한 백성이 되라고 적혀 있다. 그러면 성균관 유생 이목이 공주에 있던 때는 언제인가? 그는 1495년 1월27일에 공주로 유배 가서 5월22일에 유배가 풀렸으니 4개월 정도 공주에 있었다. 따라서 임희재가 편지를 쓴 시기는 바로 이 시기(1495년 1월27일부터 5월22일사이)의 어느 날이다. 1) 또한 “이철견·윤탄이 의금부지사(義禁府知事)가 되었는데, 논간(論諫)을 해도 임금이 듣지 않으니, 어찌 하겠소”란 편지 구절은 1495년 2월11일에 연산군이 이철견을 겸지의금부사(兼知義禁府事)로, 윤탄을 동지의금부사로 임명하여 발생한 사안이었다. 대간들은 이철견이 정호의 첩 종을 빼앗아 간음하여 파직 당했고, 윤탄은 충청감사였을 때 무능했고 기생과 간통했으며 환속한 의초라는 승려와 부정한 금전관계를 맺어 임명을 철회하도록 탄핵했다.(연산군일기 1495년 2월12일 1번째 기사) 그러나 연산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간들은 몇 달 간 이 문제를 집요하게 제기했으나 연산군의 뜻을 굽히지 못했는데 논란이 마무리 된 시기는 1495년 5월28일이었다. (연산군일기 1495년 2월13일, 3월1일, 4월28일, 5월1일, 2일, 13일, 5월28일) 2) 요컨대 임희재는 1495년 1월27일부터 5월22일 사이에 공주에 유배중인 이목에게 편지를 썼다.   사진 1 청도 자계서원 (김일손을 모신 서원) 사진 2 담 너머에서 본 자계서원 1) 한편 임희재 편지에 적힌 ‘장차 사직을 올려 수령이나 도사(都事)가 될 모양인 권오복’이 고을 수령에 제수된 때가 1495년 6월29일이었다. 2) 연산군이 뜻을 굽히지 않은 데는 이들이 외척이었기 때문이다. 이철견은 세조 비 정희왕후의 조카(이철견의 어머니가 정희왕후의 여동생)였고, 윤탄은 성종비 정현왕후의 숙부(정현왕후의 아버지 윤호의 동생)였다.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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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칼럼

일본인들은 새해 연휴에 신사나 절에 가서 참배하는 ‘하츠모우데(初詣)’라는 풍습이 있다지만, 300만 명이 메이지 신궁을 찾는 것은 열광에 가깝다. 메이지 시대는 일본이 스스로 ‘세계열강 대열에 오른 휘황찬란한 시대’로 평가한다. 특히 도쿄 사람들은 메이지 천황(1852~1912)을 사랑한다. 1) 메이지는 도쿄를 일본 수도로 정하고, 에도성을 황거(皇居)로 하여 1912년 7월30일 서거 때 까지 도쿄에서 살았다. 1868년 7월에 메이지는 에도를 서쪽의 교토(京都)에 대응하는 도쿄(東京 : 동쪽의 서울)로 개칭하고 9월20일에 교토에서 도쿄로 출발했다. 2,300명의 수행원이 천황을 따랐다. 한 달 간의 행차에는 천황을 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제 천황은 황궁에만 있는 상징적 존재가 아니라 백성을 만난 통치자였다. 1869년 3월에 천황은 다시 교토에서 도쿄로 행차를 했다. 그리고는 다시는 교토에 돌아오지 않았다. 사실상 천도였다. 이러자 정부기관도 도쿄로 이전했다. 한편 일본인들이 메이지 시대(1868-1912)를 동경한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일본화폐이다. 일본은 1천 엔 지폐에 세균학자 노구치 히데요(1876∽1928), 5천 엔은 여류 소설가 히구치 이치요(1872∽1896), 1만 엔은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의 초상이 있다. 모두 메이지 시대의 인물이다. 2) 1천 엔 화폐 인물은 장애를 극복한 세균학자 노구치 히데요이다. 그는 노벨화학상 후보로 여러 번 올랐는데 아프리카에서 황열병을 연구하다가 죽었다. 폐결핵으로 24세에 요절한 5천 엔의 인물은 여류 소설가 히구치 이치요의 필명 이치요(一葉 한 장의 잎사귀)는 달마대사가 양자강을 잎사귀 한 장을 타고 건넜다는 고사에서 따 왔다. 그녀는 자신을 세상 풍파에 떠다니는 잎사귀 한 장으로 비유했는데 대표작은 ‘키재기’이다. 1만엔은 개화론자이자 게이오 대학 설립자 후쿠자와 유키치이다. 그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 정책에 대항하여 일본의 독립을 유지하려면, 하루빨리 서구화를 이룩하여 열강의 반열에 들어서는 길밖에 없다고 역설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이 서구화를 달성한 다음에는 서구 열강과 똑같은 방법으로 청과 조선을 취급하면 된다는 「탈아론 (脫亞論)」을 주장했다. 유키치의 「친구론」은 한 술 더 뜬다. 그는 좋은 친구를 사귈 것과 나쁜 친구를 배격할 것을 주장했는데, 영국과 미국을 친구로 하고, 청나라와 조선을 배격하라고 했다. 그랬다. 일본사회는 서구문명 우월관이 지배했고, 동양문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생겼다. 그러면 여기에서 일본 화폐의 역사를 살펴보자. 일본은 1945년 패전 후에는 모든 화폐에 백제로부터 불교를 유입한 쇼토쿠 태자(574-622)의 초상이 있었다. 그러다가 1963년부터는 일본 초대 총리이자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1841-1909)가 1천 엔의 화폐인물이 되었다. 1984년에 일본은 1천엔은 영국 유학을 하고 ‘나는 고양이로소이다’(1906) 소설로 스타가 된 나쓰메 소세키(1867∽1916), 5천엔은 유엔 사무차장을 역임한 니토베 이나조(1862∽1933), 1만엔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초상이 들어갔다. 2004년에는 1천엔은 세균학자 노구치 히데요로, 5천엔은 여류 소설가 히구치 이치요로 인물이 교체되었고, 1만엔권 후쿠자와 유키치는 계속 유지되었다. 사진 1 1만 엔 지폐 사진 2 5천 엔 지폐 사진 3 1천 엔 지폐 한마디로 메이지 시대는 부국강병과 개화문명 그리고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대만과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시대였다. 1) 메이지 천황의 이름은 무쓰히토이고 연호가 메이지이다. 그는 1868년 10월에 연호를 메이지(明治)로 정했다. 중국의 『역경』에 나오는 ‘성인남면청천하 향명이치(聖人南面聽天下 向明而治 남쪽을 향해 천하의 의견을 들어서, 밝은 것을 향하여 다스린다.)’ 중 ‘향명이치’의 구절 중 ‘명치(明治)’를 인용한 것이다. 2) 우리나라 지폐의 인물은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세종대왕, 신사임당 등 모두 조선시대 전기(前期)의 인물이다.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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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칼럼

1592년 4월13일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예고된 전쟁이었다. 조짐을 알았지만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 1591년 3월, 일본을 다녀 온 조선통신사는 선조를 접견했다. 정사(正使) 황윤길과 부사(副使) 김성일은 1590년 7월22일에 교토에 도착하여 11월7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고 1591년 1월에 귀국했다. 황윤길과 김성일은 선조에게 엇갈린 보고를 했다. 황윤길은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다’라고 아뢰었고, 김성일은 ‘그러한 징후는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된다.’고 말했다. 선조가 ‘풍신수길이 어떻게 생겼던가?’라고 묻자, 황윤길은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것 같다고 말했고, 김성일은 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 할 위인이 못된다고 일축했다. 류성룡이 선조에게 보고를 마치고 나오는 김성일에게 물었다. “그대가 황윤길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만일 병화가 있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김성일은 답변했다. “나도 어찌 왜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 그런 것입니다” 조선통신사의 엇갈린 보고로 조정은 논란에 휩싸였다. 당시는 동인이 집권하였기에 대세는 김성일에게 기울었고, 동인은 ‘서인들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인심을 동요시킨다.’고 공격했다. 마침내 선조는 ‘전쟁이 없다’고 결론내리고 이를 국론(國論)으로 정했다. 불행하게도 1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김성일은 ‘전쟁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없다’고 단언하여 ‘부정의 오류(False Negative)’를 범했다. 이런 오류는 김성일의 잘못된 일본 인식에서 비롯된다. 그는 명나라를 상국(上國)으로 모시고 일본을 오랑캐의 나라로 깔보았다. 1543년에 포르투갈로부터 조총을 받아들여 전투의 혁신을 이룬 사무라이의 나라 일본을 하찮게 보았다. 한편 1591년 11월에 홍문관 부제학 김성일 등이 상소하였다. 상소 요지는 축성을 중지시키고, 이순신의 발탁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선조수정실록 1591년 11월1일) 1591년 7월에 선조는 성읍 수축을 지시하였다. 호남·영남의 큰 읍성을 증축하고 수리하게 했다. 축성은 경상감사 김수가 제일 열심히 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노역을 꺼리고 원성이 높았다. 김성일은 영남에서 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폐단을 논하였다. 이는 김성일 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상당수 위정자들이 김성일과 같은 의견이었다. 이러자 김수는 ‘성을 쌓는 일이 사대부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바람에 저지되고 있다’고 장계를 올렸지만 갈등만 낳았고, 왜침 대비는 속도와 힘을 잃은 채 흐지부지 되었다. 또한 김성일은 이순신의 발탁은 잘못된 인사라고 상소했다. 1591년 2월 13일에 선조는 이순신을 정읍현감에서 전라좌수사로 임명하였다. 7계단 뛰어넘은 파격 승진에 대간들은 문제를 제기했지만 선조는 단호했다. 그런데 9개월이 지나 김성일이 다시 이순신의 승진을 문제 삼은 것이다. 선조는 불쾌했다. 만약 선조가 이순신을 교체했으면 어떠했을까? 아마 조선은 망했을 것이다. 하노이 담판 결렬로 외교와 안보가 어려워지고 있다. 대통령과 여당은 국제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여야 한다. 아니, 미세먼지 재앙부터 막아야 한다. 국민에게 시급(時急)한 것은 한반도 평화보다 미세먼지 없는 나라이다.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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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7년(연산군 3년) 2월 이후 대간들의 대신에 대한 비판은 몇 달간 지속되었다. 그런데 7월4일에 사헌부 집의 강경서 등이 대신이 책임만 회피하려고 하니  ‘절에서 죽이나 먹고 있는 승려’라고 비판한 것이다. 이러자 7월6일에 좌의정 어세겸, 우의정 한치형, 좌찬성 이극돈, 우찬성 성준, 좌참찬 유지, 우참찬 윤효손, 영중추부사 정문형이 사직을 청했다. 연산군은 어서(御書)를 내려 “지금의 천변은 모두가 나의 부덕한 소치이니, 간관의 논박을 혐의로 여기지 말라”고 하였다. 7월10일에는 장령 조형, 정언 조순이 박형무·황진손·채윤공 등의  관직 제수가 잘못되었음을 논하였다. 특히 고양군수 채윤공은 불학무식한데, 판관(判官)에서 만기가 되기 전에 4품으로 뛰어 올리는 것은 매우 외람된 일이라고 하였다.  7월14일에 고양군수 채윤공은 승정원에 불려가서 《맹자(孟子)》의 ‘백이(伯夷)는 눈으로 악한 빛을 보지 않았다.’는 대목을 강 받았는데, 완(頑)을 돈(頓)이라 읽고 오(汙)를 한(汗)이라, 매(浼)를 면(免)이라,박(薄)을 부(簿)라 읽었으며, 또 구두[句讀]도 잘 떼지 못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고과에서 능력이 거증될 것이니 별 문제없다 하였다.  한편 채윤공 뒤에는 노사신의 비호가 있었다. 노사신은 1495년 11월1일에 모든 관직에서 사퇴했지만, 1496년 11월 이후 사복시 제조를 하고 있었다. 7월17일에 장령 조형과 정언 조순은 노사신이 언로를 차단하려고 한다면서 국문을 요청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들어주지 않았다. 7월18일과 7월20일에도 정언 조순은 노사신을 추국하라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러자 7월21일에 정언 조순(1467∽1529)이 노사신을 가장 극단적으로 증오한 사건이 일어났다. ‘노사신의 고기를 먹고 싶다’고 논박한 것이다.  그러면 조순의 발언을 읽어보자  "지금 신 등에게 ‘대신을 경멸한다.’ 하는데, 신 등이 어찌 대신을 경멸하리까. 사신이 위의 앞에서 대간의 논박을 당했으면 대죄(待罪)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이온데, 도리어 대간더러 ‘고자질을 해서 곧다는 이름을 취득하는 짓이다.’고 하니, 이는 전하께서 대간의 말을 듣지 않으시고 자기 말만을 믿게 하기 위해 감히 가슴속의 음모를 드러낸 것입니다. 춘추(春秋)의 법을 말하면 노사신의 죄는 극형(極刑)에 처해도 도리어 부족하옵니다. 신 등은 그의 살덩이를 씹고 싶습니다. 이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인신(人臣)으로서 누가 군상(君上) 앞에 직언을 할 자가 있겠습니까?"  30세의 정언(정 6품)이 70세의 전직 영의정에게 한 ‘노사신의 살덩이를 씹고 싶다.’는 표현은 엄청난 파장이었다.  연산군은 즉각 분노했다.   "네가 노사신의 살을 씹어 먹고 싶다 말한 것은, 필시 ‘내가 대간(臺諫)이 되었으니 비록 이같이 말할지라도 나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생각에서일 것이다. ... 노사신의 말은 ‘비록 글월을 알지 못하더라도 자질만 좋을 것 같으면 수령을 시킬 수 있다.’는 것인데, 네가 그의  살을 씹어 먹고 싶다고까지 말했으니, 조정은 화목한 것을 귀하게 여기는데, 지금은 조금만 불협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이 같은 말을 하면 되겠느냐.” (연산군일기 25권, 1497년 7월21일  3번째 기사) 7월22일에 연산군은 노사신에게 극언을 한 조순을 국문하라고 명했다. 이러자 승정원에서 조순을 불러들여 발언이 지나쳤다고 꾸짖는 것은 가하지만, 추국하는 것은 어떨는지 모르겠다고 아뢰었다. 연산군은 승정원에서 대간을 퍽 두려워한다고 전교했다. 승정원에서 다시 아뢰었다. "이는 성덕(盛德)에 누(累)가 되는 일이므로 감히 아뢴 것입니다. 어찌 대간을 두려워하리까." 연산군이 다시 전교했다. “승정원이나 홍문관이 비록 대간을 비호하려 하지만, 죄 없는 대신을 비방하는 자를 국문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다시 말하지 말라." 이 날 홍문관 전한 이수공 등이 조순을 국문하라고 한 어명을 거둘 것을 간하였고, 7월23일에는 사간 홍식· 홍문관 직제학 홍한 등이 조순에 대한 처벌을 거둘 것을 간하였다.   연산군은 전교하기를, "아무리 대간이라 해도 어찌 ‘대신의 살을 씹어 먹고 싶다.’는 말을 하느냐. 추국한 후에 마땅히 처리하겠다." 하였다. 다시  대간과 홍문관이 조순의 일을 아뢰었으나, 듣지 않고 조순을 파직시켰다. 다행히도 국문은 면한 것이다. 7월24일에 대간들이 조순과 함께 자신들도 파직시켜 달라고 청했다.    “대간이 여러 날을 두고 논박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므로, 조순이 논박하는 즈음에 충분이 격동하여 아지 못하는 사이에 말이 중(中)을 잃은 것이니, 전하께서 마땅히 관용하셔야 할 것이온데 파직에까지 이르게 하십니까. 신 등이 당초에 조순과 같이 상의하여 말을 한 것이므로 피혐할 것을 청했는데 윤허하지 않으시니, 신 등은 청컨대 순과 함께 파직시켜 주소서. 만약 신 등의 피혐하는 것을 듣지 않으려면, 청컨대 조순을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빨리 노사신의 죄를 캐물으소서. 또 채윤공은 백성 다스리기에 적합하지 못하니 체직하소서." 연산군은 "만약 대간이 아니라면 죄가 곤장을 때려 귀양 보내야 하지만, 대간이므로 파직만을 한 것이다. 또 죄를 주고 안 주는 것은 위에 있고 아래에 있지 않은데, 어찌 하여 말이 이같이 번거로우냐." 하고, 듣지 않았다. 7월25일에도 조순을 파직시킨 일에 대하여 대간이 아뢰었다.  "신 등이 노사신· 채윤공 등의 일을 여러 날 논계하였으나, 한 차례도 전하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구차하게 직위에 있으니, 이미 공의(公議)가 부끄럽게 여기는 바 되었습니다. 또 똑같은 언사(言事)를 가지고 조순만이 파직을 당하였으니, 신 등도 직위에 눌러 있는 것이 불가하여 누차 사면을 하였사오나 윤허를 받지 못했습니다."   이에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또한 홍문관 직제학 홍한 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조순의 복직하여 언로를 열 것을 청하였지만 역시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7월26일에도 집의 강경서가 조순의 복직을 논했지만, 연산군은 거부했다.    "재상의 지위는 하루아침에 갑자기 올라간 것이 아니고 조종조(祖宗朝)를 내리 섬기어 높은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것인데, 어찌 말 한 마디 잘못했다 해서, ‘그 살을 씹어 먹고 싶다.’고까지 할 수 있느냐.  만약 대간이라고 관용만 한다면, 끝내는 대간만이 말을 하게 장차 나랏일은 그릇될 것이다." 7월27일에 대사헌 이집, 사간 홍식이 아뢰기를, "조순은 말이 비록 광망(狂妄)했을망정 바른 말을 하여 그 책임을 다하자는 데에 불과한 것이오니, 청컨대 관용하소서."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 날 연산군은 고양군수 채윤공을 체직시키고 수령 중에 채윤공 같은 자가 있으면 적발하여 체임하게 하라고 각도 감사에게 유시하였다. 7월29일에도 대사헌 이집과 사간 홍식 등이 노사신을 하옥시키고 조순을 복직시키라고 아뢰었으나,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8월4일에 경연에서 집의 강경서와 특진관 안침이 조순의 복직을 청하였으나, 연산군은 “복직시키는 일은 내가 알아서 하는 일이니 너희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단호히 거절했다. 1)  이로써  연산군 초반 정치세력의 관계가 명확해 졌다. 연산군은 삼사에  경고를 자주 했지만 제어가 안 되었고, 대신은 삼사의 극단적이고 끈질긴 탄핵에 위축되었다. 따라서 무오사화가 진행 중인 1498년 7월14일에 대간이 “홍문관·예문관 관원을 가두고 국문하는 것은 부당하옵니다.”한 것과 연산군이 듣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사진  창덕궁 희정당 (연산군이 김일손을 친국한 곳이다.) 1) 1499년 7월에도 조순은 파직 상태였다. 정승들이 조순을 서용하도록 아뢰었지만, 연산군은 "조순은 일찍이 ‘노사신의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한 자이니 경솔히 서용할 수 없다.”하였다. (연산군일기 1499년7월11일)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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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5월 하순, 부산 초량 왜관에 주재한 일본 외교관이  외무성에 조선관리가 일본을 모욕했다고 보고 했다. 이에 각의가 열려 초량왜관의 거류민 보호를 위한 군대 파병 등이 논의되었다. 이 자리에서 사이고 다카모리(1828∽1877)는 즉시 전권대사를 파견해서 그 사절이 폭거를 당한다면 군사행동을 하는 방안을 주장하고 자신을 전권대사로 보내줄 것을 희망했다. 하지만, 각의는 결정을 보지 못했다. 이러자 사이고는 대신들을 설득하여 대세는 정한론으로 기울었고, 8월17일에 각의는 사이고를 조선 사절로 파견할 것을 결정했다. 태정대신 산조는 하코네에 머물고 있던 메이지 천황을 만나 재가를 요청했다. 그런데 천황은 이와쿠라 사절단의 귀국을 기다려 협의하고 다시 주청하라고 명했다.   이 시기에 정한론이 대두된 배경에는 급격한 내정 개혁으로 사족(士族)들의 반정부 감정이 격화되었다. 1871년 8월 폐번치현(廢藩置縣) 이후 각 번의 사족이 해산되자 사족의 불만은 높아졌다. 더구나 1872년 11월에 국민개병제 원칙이 발표되고 1873년에 20세 남자의 3년 병역의무를 규정한 징병령이 공포되자 전투 집단인 사족들은 실직하게 되었고, 불평사족(不平士族)의 수가 60만 명이 넘었으며 가족까지 합하면 300만 명이 되었다. 이런 사족의 불만 고조는 자칫하면 내란이 일어날 지경이었는데, 사족에 우호적인 사이고는 사족의 불만을 조선 침략으로  잠재우고자 하였다.  9월13일에 이와쿠라 사절단이 귀국하였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구미 순방에서 내치우선을 절실히 느꼈다. 따라서 전쟁으로 이어질 사이고의 조선 사절 파견에 반대했다. 10월14일에 각의가 열렸다. 이 각의에서 사이고와 이와쿠라는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이와쿠라 측은 사절 자체는 인정하되 그 실행은 러시아와의 현안인 사할린 문제가 해결된 뒤로 미루자는 파견 연기론을 내놓았고, 사이고는 사절 파견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논쟁이 격화되자 산조는 참의들의 의견을 물었는데 대부분의 참의는 사이고의 의견에 찬성했고. 오쿠보만 파견 연기를 주장했다. 하지만 산조는 전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음 날 결론을 내리기로 하였다. 15일 오전 10시에 각의가 개최되었다. 태정대신 산조는 고민했다. 다수결로 하면 즉각 파견 결정을 내려야 하고, 이와쿠라의 뜻을 고려하면 결정을 연기해야 했다. 하지만 결정을 연기 한다면 육군대장을 겸한 사이고와 군 지휘관의 반발이 심할 것이 분명했다. 결국 산조는 사이고의 주장대로 즉각 사절 파견을 결정했다.    이러자 이와쿠라 측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오쿠보와 기도는 사표를 제출했고, 이와쿠라도 사의를 표하고 출근을 거부했다.    그러자 산조는 이와쿠라 집을 두 차례나 찾았고, 10월18일 아침에 갑자기 ‘정신착란’에 빠졌다. 20일에 메이지 천황은 위문 차 산조집을 방문했다. 이어서 이와쿠라 집으로 가서 그를 태정대신 대리로 임명했다. 모종의 모의가 있었다.     10월23일에 이와쿠라는 각의의 결정을 번복하여 내치 우선과 사절 파견의 연기를 천황에게 상주하였다. 24일에 천황은 즉시 재가 했다.  이러자 사이고 · 이타가키 · 에도 등 소위 정한파는 분노했다. 그리고 모두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갔고, 오쿠보 도시미치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일본 역사는 이를 ‘정한론 정변’이라 부른다.    한편 에토와 사이고는 메이지 정권에 반기를 들었다. 먼저 저항한 이는 에도 신페이였다. 그는  1874년 2월에 사가의 변을 일으켰지만 패하여 효수되었다. 가고시마에서 반정부 세력을 구축한 사이고는 1877년에 세이난 전쟁에서 패배하여 자결했다. 1)   세이난 전쟁은 최후의 사무라이 반란이었다. 톰 크루즈가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가 생각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오쿠보도 1878년에 세이난 전쟁에 참여한 사족 6명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나이 49세였다.  여기에서 기억할 일은 일본은 정한론을 연기한 것이지, 포기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1875년 9월에 일본은 군함 운양호를 강화해협에 침입시켜 포격사건을 일으킨 다음 무력시위를 계속하여 1876년 2월에 ‘불평등 강화도 조약’을 체결시켰다. 사진 1 메이지 천황 어영정 1) 메이지 정부는 사민평등의 원칙에 따라 무사에게 지급하던 녹봉을 폐지하고 1876년에 폐도령을 공포하여 무사의 상징인 칼의 휴대를 금지시켰다.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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