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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8년(성종 9년) 4월29일에 종친 이심원은 임사홍의 비리에 대하여 계속 아뢰었다. "전하께서 한 사람의 간신을 보호하고자 하여 스물 한 명의 군자를 내치시니, 이는 소인이 더욱 꺼리는 바가 없게 되는 소이(所以)입니다. 신이 사관(史官) 표연말에게서 듣건대, 이전의 현석규의 일은 모두 임사홍이 몰래 사주(使嗾)한 바로서, 그때 한 대간(臺諫)은 바로 임사홍의 심복이었습니다. 우승지 임사홍은 도승지 현석규를 사사로이 살펴서 대간에게 전했으니, 대간들이 임사홍의 술책에 빠져 그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폭탄발언이었다.   ‘이전의 현석규 일’은 임사홍이 몰래 사주한 것이라니. ‘이전의 현석규 일’이란 현석규가 1477년 (성종 8년) 7월에 도승지로 있을 때 대간들의 탄핵을 받은 일이었다. 사진 1 창덕궁 궁궐도 사진 2 창덕궁 선정전(궁궐의 사무공간)과 희정당 사이 (앞뜰에는 예전에 승정원등 관청이 있었다.) 그 사연은 조금 복잡하다. 1477년 7월8일에 동부승지 홍귀달이 도승지가 어전에 없는 가운데 성종에게 조식의 사건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이심(李諶)의 처 조씨(趙氏)가 과부로 살았는데, 그녀의 오라비 조식(趙軾)과 조식의 매부(妹夫)인 송호(宋瑚)는 의지할 데 그녀를 돌봐주기는 커녕 노비를 빼앗아 차지하는 등 재산을 가로채 왔다. 그런데 전(前) 칠원현감 김주(金澍)가 중매를 통해 조씨와 결혼하기로 날을 잡았다. 조식과 송호는 김주가 조씨를 강간했다고 고발했다. 하지만 의금부에서 조사를 한 결과 조식의 무고(誣告)가 드러났고, 조식 등은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이에 조식과 송호는 죄를 면하고자 송호의 친척인 좌부승지 한한(韓僩)에게 로비를 했다. 송호의 부탁을 받은 한한은 도승지 현석규를 제외한 승지들을 설득했다. 그러면 동부승지 홍귀달이 성종에게 아뢴 내용을 살펴보자. (성종실록 1477년 7월 8일 2번 째 기사) "신 등은 육조(六曹)의 일을 분장(分掌)하였으나, 생각한 것이 있으면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의금부에서 조식·송호를 형문(刑問)하기를 청하였습니다마는, 신이 생각하기에는 조식 등이 김주가 과부가 된 누이 집에 와서 유숙한 것을 듣고 강간으로 고발하였으니 비록 그 누이와 불화하였다 하더라도 이런 일이 소문나는 데 미치었으니, 어찌 경악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무고하였다고 형문하면 이치에 안 맞습니다. 이것은 홀로 신(臣)만의 말이 아니고, 실로 좌승지 이하가 한 가지로 의논하여 아뢰는 것입니다." 동부승지 홍귀달은 도승지 현석규이 어전에 없는 상태에서 이런 보고를 한 것이다. 더구나 좌승지 이하 승지들이 담합을 하였다. 다음날인 7월9일에 성종은 회의에서 "홍귀달이 아뢴 바는 그 뜻을 알지 못하겠다."고 말을 꺼냈다. 그러자 좌승지 이극기 등이 대답했다. "신 등이 김주를 추국한 일을 보건대, 이는 강간이 아니고 화간(和奸)입니다. 그러나 조식은 중매를 통해 예(禮)를 갖추고 방문한 것을 알지 못하고, 갑자기 그 집에 투숙하였다는 것만을 듣고 강간이라 고발 한 것입니다. 이것이 무고죄가 되었으니, 실로 미안(未安)하게 되었습니다." 이러자 도승지 현석규가 소매를 걷어 올리며 눈을 부릅뜨고서 아뢰었다. "승정원의 풍기[風]는 예전에도 이러지 않았습니다. 대저 도승지는 육방(六房)의 일을 총괄하여 다스리고, 다른 승지는 일방(一房)의 일만을 총괄하거늘, 도승지가 있는데도 승지가 서열을 뛰어넘어서 이런 말을 하니, 이것은 심히 옳지 못합니다. 1) 김주는 중매한 예(禮)가 있고, 날을 정한 기약도 있으며, 또 조씨의 비(婢)가 그 사이를 왕래하였으니 어찌 강간이겠습니까? 이것이 강간이 아니라고 하면, 조식 등이 무고로써 연좌됨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송호는 좌부승지 한한의 처 동생입니다. 송호의 아버지 송익손이 신(臣)을 보고 말하기를, ‘김주는 실로 강간한 것이거늘, 어찌 화간(和奸)으로 논(論)하는가?’ 하였으니, 신의 뜻은 이 일은 의심할 만합니다. 이제 승지가 서열을 뛰어 넘어서 말을 함은 진실로 신이 사람의 뜻을 알지 못한 까닭이오니, 청컨대 형방(刑房)을 사임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러자 7월10일에 성종은 도승지 현석규에게 전교하기를, "홍귀달의 논계(論啓)는 그르다. 개의[介懷]하지 말라." 하였다. 이어서 성종은 사헌부에 전지했다.   "송익손이 그 아들 송호의 옥사(獄詞)를 가지고 도승지 현석규에게 청탁하였으니, 그를 추국(推鞫)하고 아뢰라." 이어서 의금부에 전지했다. "김주(金澍)는 전에 칠원현감이 되어, 관중(官中)의 미포(米布)와 잡물(雜物)을 여러 사람에게 증여하여서 그 때에 도망한 적이 있고, 이제 피수(被囚)되었으니, 아울러 추국하여 아뢰라." 7월12일에 성종은 경연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니, 대사간 손비장이 아뢰었다. "근일에 동부승지 홍귀달이, 조식을 형문(刑問)함은 불가한 일이라 하여 관아를 무시하고 계달(啓達)하였고, 송익손은 몸소 현석규의 집에 왕래하며 청탁하였으니, 어찌 홍귀달이 그 청을 불청(不聽)한 것을 알겠습니까? 한한은 송호의 처 동생입니다. 한 집안의 일이니, 어찌 정상을 알지 못하였겠습니까? 청컨대 국문하게 하소서." 이러자 한한이 아뢰었다.   "송호는 신의 처제(妻弟)이오나, 신은 진실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이를 청하였더라도 여러 승지가 또한 신의 말을 듣겠습니까?" 장령 이경동이 아뢰었다.   "홍귀달은 현석규가 나옴을 엿보고 아뢰었으니, 말[言]은 비록 옳더라도 행동은 옳지 못합니다.” 손비장은 말했다. "승정원은 내상(內相) 한림학사(翰林學士)의 미칭(美稱)이라고 호칭하거늘, 이제 동료들이 불화하니, 사람들이 듣기에 민망합니다." 이러자 성종이 전교했다. "사헌부는 이들을 국문(鞫問)하도록 하라." 이어서 성종은 사헌부에 전지(傳旨)하였다. "조식 등을 형문(刑問)하여 사실을 밝히는 것은 당연하거늘, 좌승지 이극기, 우승지 임사홍, 좌부승지 한한, 우부승지 손순효, 동부승지 홍귀달은 조식 등을 엄호(掩護)하려고 도승지가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제멋대로 아뢰었으니, 고신(栲訊)은 행하지 말고 추국(推鞫)하여 아뢰라." 성종은 역시 성군이다. 자기를 보필한 승정원 승지들을 추국하라고 어명을 내리니. 1) 1477년 7월 17일에 대사간 손비장은 도승지 현석규가 동부승지 홍귀달에게 욕했다고 현석규를 탄핵했다. “도승지 현석규가 갑자기 노(怒)하여 소매를 걷어 올리고 홍귀달의 이름을 불러, 너[爾]라고 일컬어 욕하였다고 하니”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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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4-09 / 뉴스공유일 : 2019-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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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칼럼

거북선이 철갑선의 근거가 된 문헌은 임진왜란에 참전한 왜장 도노오카 진자에몬(外岡甚左衛門)이 1592년 7월28일에 부산포에서 쓴 회고록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이다. 그는 일본이 해전에서 연패한 것을 수치스러워했지만, 패배의 역사도 역사라는 관점에서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는 옥포 · 합포 해전, 한산도 해전 등에서의 패전과 일본 장수 구루지마 미치하사의 전사 등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대선 중 3척은 ‘장님 배(目クラ船)로 ‘철로 요해(鐵ニテ要害シ)’(쇠로 되어 있는 요새)”라고 기록했는데 이 장님배가 거북선으로 추측된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철로 요해(鐵ニテ要害シ)’이다. 이를 어떻게 번역하여야 하나. 김시덕의 번역대로 ‘쇠로 되어 있는 요새’라고 하여야 하는 지, 철갑을 둘렀다고 해야 하는 지, 아니면 ‘창검을 꽂았다’고 번역해야 할지 난해하다. 더구나 이 글을 쓴 왜군 장수는 임진왜란 해전 중에 거북선에 직접 올라가서 거북선의 덮개를 확인했을 리 만무하고, 외관으로 보았을 것인데 ‘철로 요해’란 표현 자체를 그대로 믿기도 어렵다. 1) 한편 서양에서는 거북선을 철갑선으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미국인 선교사 겸 동양학자였던 윌리엄 그리피스(1843~1928)가 1882년에 펴낸 책 『은둔의 나라, 한국』에는 임진왜란 때 조선군의 군함을 설명하면서 “금속으로 감싼 배”가 등장한다. 미국인 선교사였던 호머 헐버트(1863~1949)는 미국의 잡지 ‘하퍼스 뉴 먼슬리 매거진(Harper’s New Monthly Magazine)’의 1899년 6월호에 거북선을 거북 배라고 표현하면서 철판(Iron Plate)으로 감싼 구조라고 기록했다. 헐버트는 거북선을 ‘철갑선(Ironclad)’의 일종이라고 간주하면서, “한국은 철갑선과 금속 활판 기술을 세계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발명한 국가”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1895년 유길준이 『서유견문』을 통해 “거북선이 천하에서 가장 먼저 만든 철갑선”이라고 주장했고, 단재 신채호가 1908년에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조선 제1위인 이순신 전』에도 거북선을 세계 철갑선의 원조로 평가했다. 또한 1915년에 박은식이 중국 상해에서 발표한 『이순신 전』에서도 이순신을 세계철함의 발명 시조라고 하면서 거북선의 독창성을 강조했다. 결정적인 것은 1929년에 영국의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이 거북선을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소개한 것이다. 이런 영향을 받아 영국군 총사령관 버나드 로 몽고메리(1887∽1976)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전쟁의 역사』를 발간했는데 여기에 이순신 장군 이야기가 실려 있다. “조선에는 이순신이라는 뛰어난 장군이 있었다. 장군 이순신은 전략가이자 전술가였고 탁월한 자질을 지닌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기계제작에도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중략) 일본 해군은 용감하게 싸웠으나 장군 이순신의 철갑 전투함(거북선)에는 저항할 수 없었다.” “The Japanese navy fought courageously, but they could not defy the iron - clad warship. the Turtle Ship, created by Yi.” 사진 1   서울 세종문화회관 지하에 있는 ‘충무공이야기’ 전시관의 “세계가 존경하는 인품‘ 게시판 사진 2 버나드 로 몽고메리의 찬사 거북선이 철갑선인지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하기야 임진왜란 때 거북선이 2층이냐, 3층이냐를 놓고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마당이다.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거북선이 바다 밑에서 발견되면 이런 문제가 해결되리라. 1) 최관 · 김시덕 공저, 임진왜란 관련 일본 문헌 해제, 도서출판 문, 2010, p 217 인터넷에서 찾은 ‘초등학교 사회 학습백과사전’를 보자.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말은 우리나라 역사 책 어디에도 안 나오고, 일본 역사책에는 ‘적의 배중에 온통 철갑을 씌운 것이 있어 우리 화포로는 깨뜨릴 수가 없었다. 이 철갑선 때문에 우리가 졌다.’고 나와 있어.   하지만 이는 거북선으로 인해 전쟁에서 패한 일본인들의 핑계에 불과해. 그만큼 우리의 거북선이 강한 배였기 때문에 자기들이 질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내세우려고 과장해서 표현한 것이지.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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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4-08 / 뉴스공유일 : 2019-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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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 초(楚)나라 장왕(庄王)이 설날을 맞이하여 연회를 베풀고 신하들을 초대했다. 송구영신(送舊迎新)을 맞이하는 연회석은 그야말로 떠들썩하였는데 천하일색의 미녀들이 술까지 따라주는 터라 연회석은 더욱더 흥청거렸다. 이윽고 밤도 점차 깊어가고 연회도 끝나 그 동안 환하게 켜놓았던 촛불도 하나 둘 꺼져갔다. 연회석은 삽시간에 어둑어둑해졌다. 이때 어느 한 신하가 술김에 미녀의 옷자락을 슬쩍 당겼다. 미녀는 너무 놀라 그 신하의 모자 끈을 홱 잡아채며 고함을 질렀다. "누가 망측한 짓을 해요? 촛불을 켜야겠어요!" 신하들이 웅성거렸다. "아니 무슨 일이요?" "누가 음탕한 짓을 한 거 아니요?" 초장왕이 위엄있게 말했다. "여자가 자신의 정조를 뽐내기 위하여 신하의 얼굴에 먹칠을 할 필요는 없느니라." 하더니 이내 명령을 내렸다. "오늘 저녁 여기서 술을 마신 신하들은 모두 모자 끈을 끊어버리도록 하오!" 왕의 어명이라 신하들은 무슨 영문인지로 모른 채 일제히 모자 끈을 끊고 숨을 죽이며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초나라 장왕이 다시 촛불을 켜라고 하자 하녀들이 촛불을 켰다. 연회장은 다시금 환해졌다. 그 미녀는 그때까지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러나 신하들의 모자 끈이 모두 끊어져 있었으므로 도대체 누가 자기의 옷자락을 당겼는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장왕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자, 이제 신하들은 시름을 놓고 집으로 돌아들 가게나!" 여러 신하들은 한시름을 놓은 듯 환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후 초(楚)나라에서 정(鄭)나라를 공격했는데 누군가가 맨 앞장서서 용감하게 싸웠다. 그 사람은 무려 다섯 차례의 돌격에서 매번 앞장을 서서 적들을 물리치고 승리를 이끌어냈다. 전투가 끝난 후 조사해 본 결과 그 사람이 바로 설날 맞이 연회석에서 미녀의 옷자락을 당겼던 신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019년 4월 8일 강원구 행정학박사. 한중문화교류회장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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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4-07 / 뉴스공유일 : 2019-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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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칼럼

공자(孔子)가 아들 리(鯉)에게 이렇게 말했다.  “시(詩)를 배우고 읽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다.” 무슨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인가! 시(詩)를 모르면 리더로서의 말을 갖출 수 없다는 뜻이다. 목표를 이루려면 백성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데, 이 때 시(詩)가 가진 감성적(感性的) 언어의 힘을 빌려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당시 300수를 줄줄 외우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항상 말을 주고받을 때, 시를 인용(引用)하여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시로 말하다보면 느긋한 마음이 생기는 것 같다. 중병을 앓게 된 송(宋)나라 인종(仁宗)은 오랫동안 나라 일을 돌보지 못했으나, 어느 날 병(病)이 조금 나아지는 기미(機微)가 보이자, 황제(皇帝)는 급히 재상 여이간(呂夷簡)을 조정으로 불러 들였다. 여이간은 느릿느릿 늑장을 부리며 한참 후에야 비로소 대궐로 나서게 되었는데, 하인들이 되려 마음이 더 급해서 걸음을 재촉했다.   "나리, 이렇게 늦게 가시다간 곤욕을 치르시겠습니다. 빨리 걸으시죠."   "음, 괜찮아." 여이간은 여전히 태평스럽게, 느릿느릿 걸음을 옮겨 놓았다. 그가 조정에 들어서자 과연 황제가 늦게 도착한 일부터 문책을 하였다. "병이 나아져 그대를 만나보고 싶었는데, 경은 왜 이렇게 늦었소?" 여이간이 여유있게 대답했다. "전하(殿下)께서 몸져누우신 바람에 조정의 안팎이 우울(憂鬱)한 기분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때에 신하(臣下)를 부르셨으니, 신하가 황급(遑急)히 조정으로 달려올 경우 민심이 흔들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천천히 걸어왔습니다." 황제는 그의 깊은 생각에 탄복(坦腹)해 마지 않았다. 2019년 4월 5일 강원구 행정학박사. 한중문화교류회 중앙회장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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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4-05 / 뉴스공유일 : 2019-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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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사홍 사건은 임사홍이 도승지에서 해임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478년(성종 9년) 4월29일에 주계부정(朱溪副正) 이심원(李深源, 1454 ~ 1504)이 성종을 면담하여 폭탄 발언을 한 것이다. (성종실록 1478년 4월29일 1번째 기사) 이심원은 효령대군의 증손이고 보성군 (寶城君 1416 ~ 1499) 이합의 손자이며 평성군 이위의 장남으로 김종직의 문인이었다. 성종은 창덕궁 선정전에 나아가서 이심원을 인견(引見)했는데 두 사람의 대화를 살펴보자 이심원 : "신은 종척(宗戚)의 후손으로서 군자·소인(小人)을 쓰고 버리는 것과 형벌이 전도(顚倒)되는 것은 사직에 관계된다고 생각하여 감히 알현을 청했습니다." 성종 : "네가 이르는바 군자·소인을 쓰고 버리는 것과 형벌이 전도(顚倒)되었다는 것을 듣고 싶다." 이심원 : "어제 듣건대, 홍문관·예문관의 관원이 임사홍 및 그 아비 임원준의 간사함을 논계(論啓)하자 전하께서 모두 인견하고 힐문(詰問)하셨는데, 임원준의 간사한 형상은 묻지 아니하고 임사홍의 직첩을 거두고 홍문관·예문관 20여 관원을 파직시켰다고 합니다. 만약 양관(兩館)의 말이 옳으면 임사홍 부자를 죄주는 것이 옳고, 그렇지 아니하면 양관의 관원을 죄주는 것이 옳은데, 무슨 까닭으로 동시에 죄를 주십니까? 또 임원준 부자는 소인이 아닙니까?" 성종이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네가 이를 위해 왔느냐?" 이심원 :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자세히 말씀하셔서 신의 의혹을 풀게 하소서. 신은 직질(職秩)이 비록 낮을지라도 감히 진달(陳達)함을 피하지 않겠습니다." 성종 : "만약 임사홍이 진실로 소인이라면, 일찍이 승지와 이조 참의가 되었으니 또한 작은 벼슬이 아닌데, 홍문관·예문관의 관원은 바로 임금의 덕을 보양(輔養)하는 것으로서 그 때 임사홍이 소인이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이제야 말한 것은 늦었다. 임원준은 비록 간사하고 탐탁(貪濁)하다고 말하나 애매하고 형적이 없는 말을 믿고 죄를 줄 수 있겠는가?" 이심원 : “성상의 하교가 지당합니다. 그러나 임사홍은 신의 고모부이기 때문에 그 사람됨을 자세히 아는데, 참으로 소인입니다. 홍문관·예문관 관원이 먼저 소인임을 말하지 아니한 것은 바로 오랫동안 자세히 살펴서 감히 급하게 하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임원준은 참으로 소인입니다. 홍문관·예문관의 20여 관원들과 대간들이 한 입으로 모두 간신이라고 말하였으니, 임원준의 간사함은 본래 드러난 것이라고 이를 만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조금도 간사한 형상을 묻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말한 자를 허물하시니, 임원준의 간사함은 이로부터 더욱 꺼리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사진 1 창덕궁 선정문 입구 사진 2 선정전 안내판 사진 3 선정전 내부 성종: "네가 임원준을 소인이라고 하니 임원준이 소인인 이유를 말하라.“ 임원준(任元濬1423∼1500), 그는 세조 3년(1457년)에 중시에 합격하여 이조참의에 오르고 성종 2년(1471년)에 성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로로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었다. 지금은 판서보다 높은 벼슬인 의정부 좌참찬이었다. 그런 임원준을 이심원이 소인이라 했으니 성종은 어리둥절했다. 성종의 물음에 이심원은 답한다. 이심원 : "소인은 형상을 말하기 어려운 것이니, 만약 무슨 일, 무슨 말이 소인이 된다고 말한다면 이는 잘못을 헤아릴 만한 것인데, 어찌 참 소인이겠습니까? 우선 한 가지 일을 가지고 임원준이 소인임을 밝히겠습니다. 처음에 성녕대군(誠寧大君 1405∽1418 태종의 4남)의 사자(嗣子)는 바로 신의 종조부(從祖父) 원천군(原川君)이었는데, 원천군이 졸(卒)하자 적자(嫡子)는 없고 장첩(長妾)의 아들 열산수(列山守)가 있어, 이로써 성녕대군의 뒤를 잇게 하는 일이 결정되지 아니하여 국론(國論)이 어지러웠습니다. 임원준이 말하기를, ‘지금 원천군이 적자가 없으니 성녕대군의 제사를 반드시 다른 데로 옮겨야 될 것인데, 효령대군의 아들 보성군(寶城君)만이 성녕대군의 뒤를 이을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성녕대군의 노비가 매우 많으므로, 만약 보성군이 이를 얻으면 임원준의 아들인 임사홍의 아내도 고루 나누어 가질 수 있기 때문에 힘을 다해 도모하였으나 결국 실패했습니다. 원천군의 첩자(妾子) 열산수가 뒤를 잇기로 이미 정한 뒤에, 임원준이 신에게 말하기를, ‘전자에 양녕대군의 첩자 오천부정(烏川副正)이 제사를 받들지 못하고 대군의 둘째 적자인 함양군(咸陽君)이 되었다. 듣건대 조카(이심원을 말함)가 오천부정과 사이가 좋다고 하니, 모름지기 가서 달래어 열산수의 예(例)를 끌어 상언(上言)하게 하여 양녕대군의 봉사(奉祀)를 요구하게 하면, 조정에서 반드시 오천부정의 일로써 예(例)를 삼을 것이고, 열산수로 하여금 성녕대군의 뒤를 잇지 못하게 할 것이다. 성녕대군의 후사(後嗣)가 정적(正嫡)에게로 옮겨진다면 그대의 조부인 보성군이 반드시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임원준의 꾀가 매우 간휼(奸譎)하다고 생각하여 대답하기를, ‘증조부 효령대군의 뜻이 이와 같지 않으셨는데, 조부인 보성군께서 어찌 아버님의 뜻을 거역하고 성녕대군의 뒤를 잇기를 즐겨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임원준이 말하기를, ‘80여 세가 된 대군이 어찌 세상에 오래 살겠는가? 비록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지라도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였으니, 이는 임원준에게 측은지심이 없는 것입니다. 이 말로 미루어 보면 임원준이 정말 소인인데, 전하께서 알지 못하실 뿐입니다." 성종은 안색을 고치며 "계사(繼嗣)의 일은 임원준이 잘못한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승지들에게 임원준이 참으로 소인인지를 물었다. 도승지 손순효 : “임원준이 재리(財利)에 급급하니, 군자가 아닙니다.” 좌승지 박숙진 : "임원준은 선조(先朝)에서 더러운 행실이 매우 많았습니다. 이제 임원준의 행한 바를 살피건대, 이심원의 말과 같습니다." 좌부승지 김승경 : "임원준의 집은 본래 가난하였는데, 근래에 갑자기 부자가 되어 가산(家産)이 매우 넉넉하니, 무릇 사람은 재리(財利)에서 그 지조를 볼 수 있습니다.” 우부승지 이경동 : "신이 듣건대, 임원준은 간사하고 바르지 못하며, 안평대군에게 아부하다가 약을 훔쳐서 도망하였으니, 그간의 더러운 행실은 다 기억하기 어렵습니다. 근래에 신이 임원준과 같이 경연관이 되어서 그 사람됨을 살펴보니, 무릇 소인 같기도 하고 근신(謹愼)하는 군자 모습도 있어서 신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와 반대로 그 아들 임사홍의 태도는 매우 교만합니다." 이어서 이심원이 아뢰었다. "대신의 진퇴(進退)를 비록 가볍게 할 수 없으나, 홍문관·예문관과 대간들이 모두 임원준을 간신이라고 말하였는데, 전하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듣고서도 묻지 아니하십니까? 신은, 전하께서 마음으로는 임원준의 간사함을 아시면서 묻지 아니하는 것인지, 임원준을 옹호하고자 묻지 아니하시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성종은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 "임원준은 의정부의 대신이지만 간사한 형상이 사실이면 용납할 수 없으리라.”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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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이오. 우리는 300년 전에 이런 배를 만들었던 민족이오! 믿고 돈을 빌려주시오!” 1971년에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1915∽2001)은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보여주며 그리스 선주를 설득하여 허허벌판 울산에 조선소를 지었다. 사진 1   500원 지폐 당시에 우리는 500원 지폐에서 보듯이 이순신 장군이 만든 거북선이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알았다. 과연 거북선은 (1) 이순신이 처음으로 만들었고, (2) 세계최초의 철갑선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이는 과장된 것이다. 먼저 이순신이 거북선을 처음 창제했다는 것부터 살펴보자. 거북선은 이순신이 처음 만든 것은 아니다. 조선 3대 임금 태종 때부터 거북선이 있었다. 1413년(태종 13) 2월5일자 조선왕조실록을 읽어보자. “임금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과 왜선이 서로 싸우는 상황을 구경하였다.” 2년 뒤인 1415년 7월16일자 태종실록에 거북선이 다시 등장한다. “병조를 맡은 좌대언(左代言) 탁신(卓愼)이 병비(兵備)에 대한 상소를 했다. 거북선[龜船]의 방식은 많은 적과 충돌하여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가위 결승(決勝)의 좋은 계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戰勝)의 도구를 갖추게 하소서.” 따라서 거북선은 이순신은 창조한 것이 아니라, 나대용을 비롯한 부하 군관들과 함께 종래의 거북선을 개조한 것으로, 왜군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약 120여명이 타는 돌격전투함이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하루 전인 1592년 4월12일에 전라좌수영에서 거북선 진수식을 하였다. 『난중일기』에 나온다. 4월12일 맑다. 식사를 한 뒤에 배를 타고 나아가 거북선에서 지자(地字) ·현자(玄字) 포(砲)를 쏘았다. 거북선은 이순신이 2차 출전한 5월29일 사천해전에서 처음 등장했다. 거북선 돌격장 이언량 · 이기남이 지휘하는 거북선 2척은 왜군 지휘선을 향해 돌격하여 일본 수군을 놀라게 했다. 두 척의 거북선은 전라좌수영 본영과 방답진(여수시 돌산읍 소재) 소속이었다. 이어서 한산도해전 (7월8일), 부산포해전(9월1일)에서도 거북선은 돌격선으로서 위력을 발휘했다. 다음으로 거북선은 철갑선인가 하는 점이다. 우선 선조수정실록 1592년(선조 25년) 5월1일자에 거북선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은 전투 장비를 크게 정비하면서 자의로 거북선을 만들었다. 이 제도는 배 위에 판목을 깔아 거북 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는 우리 군사가 겨우 통행할 수 있을 만큼 십자(十字)로 좁은 길을 내고 나머지는 모두 칼·송곳 같은 것을 줄지어 꽂았다. 그리고 앞은 용의 머리를 만들어 입은 대포 구멍으로 활용하였으며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어 꼬리 밑에 총 구멍을 설치하였다.   좌우에도 총 구멍이 각각 여섯 개가 있었으며, 군사는 모두 그 밑에 숨어 있도록 하였다. 사면으로 포를 쏠 수 있게 하였고 전후좌우로 이동하는 것이 나는 것처럼 빨랐다. 싸울 때에는 거적이나 풀로 덮어 송곳과 칼날이 드러나지 않게 하였는데, 적이 뛰어오르면 송곳과 칼에 찔리게 되고 덮쳐 포위하면 화총(火銃)을 일제히 쏘았다. 그리하여 적선 속을 횡행(橫行)하는데도 아군은 손상을 입지 않은 채 가는 곳마다 바람에 쓸리듯 적선을 격파하였으므로 언제나 승리하였다.” 이를 보면 거북선은 배 위에 판목을 깔아 거북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는 우리 군사가 겨우 통행할 수 있을 만큼 십자(十字)로 좁은 길을 내고 나머지는 모두 칼·송곳 같은 것을 줄지어 꽂았다. 따라서 거북선은 판옥선 위에 덮개를 씌운 배이지 철갑선은 아니었다. 서울시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지하에 있는 ‘충무공이야기’ 전시관에도 “거북선은 판옥선 위에 덮개를 덮고 창칼을 꽂아 적이 뛰어 오르지 못하도록 만든 돌격용 전투함”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사진 2 판옥선과 거북선 (‘충무공 이야기’ 전시관) (계속됩니다)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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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저마다 무거운 짐을 지고 가다가 저 세상으로 간다. 아무리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것만은 사실이다. 기쁨과 즐거움의 햇살이 비치는가 하면, 곧 바로 없어지고 무거운 짐이 항상 우리 곁을 억누르고 있다. 인생은 그 자체가 짐을 짊어지고 산다. 가난하게 살아도 무거운 짐이요, 돈이 많은 부자라고 해도, 그 돈으로 인한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것이다. 질병도 짐이고, 책임을 갖는 것도 짐이요, 권한을 잡는 것도 짐이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헤어지는 것도 짐이요, 미워하는 것도 짐이다. 살면서 부닥치는 일 중에서 짐 아닌 게 하나도 없다. 이럴 바엔 짐을 기꺼이 지고 가는 것이 옳다. 다리가 휘청거리고 숨이 가뿔 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짐이라면 지는 게 현명한 방법이다. 언젠가 짐을 풀 때가 되면 짐의 무게만큼 보람과 행복을 얻게 되는 것이다. 아프리카 어는 원주민들은 강을 건널 때 큰 돌덩어리를 지고 건넌다고 한다. 급류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1488년 표해록을 지은 금남 최부(崔溥)선생이 제주에서 베를 타고 육지로 오다 풍랑을 당하여 14일간 떠내려가다 중국 태주부 임해현에 도착하였다. 최부선생은 일행은 배를 타면서 돌을 많이 싣고 출발하자고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만일 그 때 배에 무거운 돌을 싣지 않고 떠났다면, 그 때 그는 육지에 오르지 못하고 익사(溺死)하였을 것이다. 그는 귀국하여 중국 3대 기행문인 표해록(漂海錄)을 남겼다. 무거운 짐이 자신을 살린다는 깨우친 것들이다. 헛바퀴가 도는 차에는 일부러 짐을 싣기도 한다. 등산할 때 짐이 조금 있으면 허전하지 않다. 그러고 보면 짐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짐은 자신에게 선물이고, 스승이고, 조련사(調練師)가 된다. 그러면 우리는 짐을 피할 필요는 없다. 손쉽게 들거나 주머니에 넣을 수 있다면 그것은 짐이 아니다. 그래서 짐을 지고 가는 것인가 보다.   2019년 3월 28일 강원구 행정학박사. 한중문화교류회 중앙회장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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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흠은 1496년(연산군 2년) 4월에 송흠은 홍문관 부수찬, 1497년 1월4일에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이어서 1497년 6월14일에는 사간원 정언(정6품)이 되었다. 줄곧 홍문관에서 근무하다가 사간원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그런데 6월27일 밤 이경(二更 밤 9시에서 11시 사이)에 창덕궁 선정전 기둥에 벼락이 쳤다. 다음날 연산군은 벼락 친 일로 희정당에 납시어 재상 및 의정부·육조·한성부·대간·홍문관을 인견하여 의견을 들었다. 윤필상, 노사신, 좌의정 어세겸, 우의정 한치형, 좌찬성 이극돈, 대사헌, 대사간 등 참석자들은 각자 의견을 말하였다. 이 자리에서 사간원 정언 송흠도 말했다.   "동중서(董仲舒)가 말하기를, ‘국가에 장차 도를 잃어 패망하게 되는 일이 있으려면 하늘에서 먼저 천재와 시변을 내리어 꾸짖고 경고하는 것인데, 그래도 변통할 줄을 모르면 손상과 패망이 따라오게 된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후로 경연에 납시지 않고 간하는 말을 듣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박이 철 아닌데 내리고 별빛이 도수를 잃었으니 하늘의 꾸짖어 경고함이 현저한 것이 아닙니까. 지금도 신 등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면 손상과 패망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1497년 7월2일에 송흠은 어버이가 늙어 돌아가 봉양하기를 청했다. 연산군은 허락하였다. 8월22일에 송흠은 모친의 병환이 심하여 사직소를 올리고 민생안정과 파직 당한 정언 조순의 복직에 대하여도 아뢰었다. 연산군은 사직을 윤허하였다. (연산군일기 1497년 8월22일 4번째 기사) 이로부터 2년 6개월이 지난 1500년 1월12일에 대사헌 안침이 송흠은 어버이가 늙은 관계로 하여 관직을 사직하였는데 오랫동안 서임하지 않았다며 임명을 건의했으나 연산군은 살피지 않았다. 연산군은 8월21일에야 송흠을 사간원 헌납(정5품)으로 임명하였다. 1500년 9월21일에 연산군이 경연에 납시자, 장령 신숙근과 헌납 송흠이 윤탕로·이종호·임사홍의 일과 장성(長城) 쌓는 일을 논계하였으나, 연산군은 들어주지 않았다. 1) 한편 1504년에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친어머니 폐비 윤씨가 사약을 마신데 대한 연산군의 복수극이었다. 3월20일에 연산군은 성종의 후궁인 엄씨와 정씨를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3월30일에는 이세좌에게 사약을 내렸으며, 윤4월13일에는 윤필상에게 사약을 내렸다. 윤4월21일에는 정창손 · 심회 · 한명회를 부관 참시했다. 5월11일에는 한명회의 해골을 효수하고 5월13일에는 이세좌의 아들들을 효수했다. 피바람이 불었다. 이어서 5월30일에 연산군은 궁중의 일을 함부로 짐작하여 간한 자를 아뢰라고 전교했다.   "말은 짐작 없이 함부로 할 수 없어, 말하여 될 일도 있고 말해서 안 될 일도 있는 것이니, 가깝고 친밀한 곳에 있으면서 궁중의 일을 보고 그 그른 줄을 알더라도 말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어찌 숨길 것이냐. 그때 후원에서 활쏘기를 구경하는데, 마치 집돼지가 달려가기 때문에 우연히 쏜 것이다. 이것을 보았더라도 마음으로나 알고 말이지, 어찌 입 밖에 내야 하는가. 그때의 홍문관 상소를 급히 상고하여 아뢰라. 홍식(洪湜)은 아직 형벌하지 말고, 홍문관원 상고하기를 기다려 죄주도록 하라." 유순(柳洵) 등이 홍문관에서 상소했던 사람의 명단을 연산군에게 아뢰었다. 이들은 홍문관 부제학 이승건, 전한 홍한, 응교 이수공, 부응교 장순손, 교리 김전과 남궁찬, 이과, 부수찬 권민수와 송흠, 저작 이자, 정자 성중엄과 홍언충이었다. 이러자 연산군은 "외방에 있는 자는 잡아오고, 서울에 있는 자는 빈청(賓廳)으로 잡아다 국문하되, 만일 실지대로 진술하지 않으면 형장 심문하라."고 전교하였다. 2) 6월1일에 연산군은 "홍식과 홍세필 부자는 참형(斬刑)에 처하고, 이승건·홍한 등은 부관능지(剖棺凌遲)하라. 그 나머지는 장(杖) 1백으로 결단하여 원방(遠方)으로 부처(付處 귀양살이)하라.”고 전교했다. 이어서 죄인의 행형(行刑 형벌 집행) · 결장(決杖 장형 杖刑을 때림) 때에는 승지가 가서 임석(臨席)하라고 명했다. 연산군의 이런 어명은 이승건 등이 홍문관에 있었을 적에 화살에 맞은 돼지가 후원(後苑)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보고 이를 간하였으며, 홍세필이 또한 이를 퍼뜨렸기 때문이었다. (연산군일기 1504년 6월1일 7번째기사) 이리하여 6월10일에 연산군은 승지 박열·권균에게 결장(決杖)을 감시하도록 명하여 송흠·홍언충·이과에게 장 1백 대, 심순문· 조세보에게 장 80대를 때렸다. (연산군일기 1504년 6월10일 4번째 기사) 이로부터 2년이 지난 1506년 8월26일에 연산군은 “이과·김전·권민수·송흠·홍언충·정광필·이자화·김양진·박광영·박소영·유보·김내문·이사균·강홍·최숙생·이행 등은 그 도의 관찰사로 하여금 사람을 보내어 압송해 다가 형신(刑訊)하고, 또 그 자손도 익명서(匿名書)를 투입했는지 의심스러우니 아울러 형신하게 하라”고 전교하였다. 그런데 1506년 9월2일에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9월20일에 송흠은 사헌부 지평(정5품)에 제수되었다. 1) 1500년 9월21일 이후 송흠의 관직은 <연산군일기>에 없다. 그런데 『지지당 유고』의 ‘송흠 연보’에는 1501년 병조정랑, 전라도사, 1502년 부친상을 당하여 1504년에 상복을 벗고 남원교수에 제수, 1506년 중종반정 후 홍문관 저작에 임명이라고 적혀 있다. (『지지당 유고』 p 9-10) 따라서 『지지당 유고』는 <연산군 일기>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 2) 이 일은 1496년 4월에서 1497년 1월4일 사이에 일어났다. (송흠은 1496년 4월에 홍문관 부수찬, 1497년 1월4일에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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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은 23전 23승을 했나? 결론부터 말하면 창작 이지 역사적 사실(fact)은 아니다. 23전 23승은 KBS TV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2004년-2005년 2년간 방영된 후에 널리 퍼졌다. 2005년 11월에 KTV는 특별기획 2부작 ‘이순신, 23전 23승 불패의 조건 (KBS 제작)’을 방영하기도 했다. 이후 『불패의 리더 이순신, 23전 23승 전승 신화(神話)의 기록(2014년)』 이라는 책도 발간되었고, 한국사 인기 강사 설민석은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2016년, p 297)에서 “이순신은 왜란이라는 7년 동안의 어려움 속에서 빛난 명장입니다. 1592년 5월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한산도 대첩,명량해전, 노량해전 등 눈부신 23전23승의 승리를 이끈 장군이지요.”라고 적었다. 하지만 이순신의 23전 23승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창작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23전의 어느 어느 해전인지 그 근거가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설명이 없다. 아무리 명장 이순신이지만 단 한 번의 무승부도 없이 23전 23승 전승(全勝)을 했다는 것도 쉽게 믿기지 않는다. 그런데 2007년 봄에 해군사관학교 제장명 교수는 충무공 이순신 탄신 462돌 기념 학술세미나에서 “임진왜란 시기의 해전 횟수는 47차례이고, 이 가운데 이순신이 참가한 해전은 43차례”라며 “임진왜란 해전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필자의 주장이 정확한 것은 아니나, 항간에 통용되고 있는 ‘23전23승’이라는 표현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난중일기〉 〈선조실록〉 등 다양한 자료를 조사한 결과 이순신장군의 전적은 43전38승5무로 정리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어서 2012년에 제장명 교수는 이순신 장군의 해전을 ‘45전 40승 5무’로 수정했다. 제 교수는 ‘어떤 해전을 1회의 해전으로 계산 하는지’ 하는 해전의 개념부터 정립이 필요하다고 보고 이를 ‘대표해전’과 ‘세부해전’으로 분류했다. ‘대표해전’은 조선수군이 모 기지를 한번 출동해서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간 중 전투한 모든 해전을 1회로 산정하고 모든 해전 중 가장 대표적인 해전으로 분류하는 방식이고 ‘세부해전’은 한번 출동해서 일시와 장소가 달리하는 해전을 1회로 산정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면 이순신의 첫 출전인 옥포해전은 1592년 5월7일에 옥포, 같은 날 합포, 5월8일에 적진포 해전을 치르고 5월9일에 전라좌수영인 여수로 돌아왔다. 따라서 대표해전은 옥포해전이고 세부해전은 3회였다. 이렇게 해서 제장명 교수는 임진왜란 당시 대표해전은 총 21회로 이순신은 17회의 대표해전에 참가했고, 세부해전 49회중 이순신은 45회 참전했다고 밝혔다. 한편 대표적인 무승부 해전이 1594년 9월29일부터 10월4일까지 치러진 육해군 합동작전인 거제도 장문포 전투이다. 도체찰사 겸 좌의정 윤두수는 9월19일에 조선군 단독으로 거제도를 공략하겠다고 선조에게 보고하여 승인을 받았다.   9월27일에 도원수 권율과 의병장 곽재우, 김덕령 등의 육군이 연합함대에 합류했고, 9월29일에는 장문포의 왜군 진지를 공격하였다. 그런데 왜군은 진지만 지켰다. 10월1일 새벽에 조선 수군은 거제도 장문포 앞바다에 머물다 영등포로 들어가 왜군에게 싸움을 걸었으나 왜군은 응전하지 않았다. 이후 10월3일까지 왜군이 항전하지 않는 바람에 소강상태가 지속되었다. 10월4일에는 이순신은 곽재우ㆍ김덕령 등과 함께 육지와 바다 양면에서 공격하였다. 곽재우ㆍ김덕령이 수백 명의 병력을 이끌고 산성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을 공격하고, 수군은 선봉대를 장문포로 보내 들락날락하며 싸움을 걸었지만 왜군은 방어전만 펼쳤다. 저녁에도 수군 본대가 직접 나서서 왜군을 위협했으나, 왜군이 전혀 움직이지 않아 칠천량으로 물러났다. 결국 총 6일 동안 3회에 걸쳐 치른 수륙 합동전투는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하고 이순신은 2척의 적선을 격침시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한마디로 작전실패였다. 총괄 지휘를 한 윤두수는 책임을 지고 좌의정에서 물러났다. 이렇듯 이순신의 23전 23승은 사실(fact)이 아니라 창작이다. 엄연히 무승부가 있는데도 드라마는 재미에 치중하여 이를 간과 내지 무시했다. 하지만 의미를 추구하는 역사는 사실이다. 무릇 역사가라면 사실에 충실하여야 하고, 치열하게 검증하여야 한다. 그게 역사가의 책무이다.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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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하고 투명한 유리(琉璃)잔 두 개가 있다. 한 잔에는 맑은 물이 가득 채워져 있고, 다른 한 잔은 비워져 있다. 맑은 물이 가득 채워져 있는 잔은 순수(純粹)라는 것이요, 비워 있는 잔은 순진(純眞)이라는 것이다. 순진은 비어 있으므로 그 안에 순수한 물처럼 깨끗한 물을 담을 수도 있고, 더러운 물이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 순수(純粹)와 순진(純眞)의 차이는 무엇인가? 순수란 ‘잡것의 섞임이 없는 것’으로 ‘사사로운 욕심이 없다’는 것이며, 순진(純眞)이란 ‘마음이 꾸밈이 없고, 순박하고 참되다’ 즉 ‘세상 물정에 잘 모른고 어둡다’는 뜻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의 의미를 되새겨 보면, ‘순진하다’라는 말은 ‘어리석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반면 ‘순수하다’ 라는 말은 자신의 소신이 있고, 주관이 뚜렷하다는 것이며, 세속에 물들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 것과 같은 것이다. 순진이란 어릴 때만 간직할 수 있는 것이며, 어른이 되어도 순진하다면 세상을 모르는 사람으로 여긴다. 반면 순수는 누구나 가질 수 있으며, 나이가 들어도 순수한 사람이 많이 있는 것이다. 순수한 사람은 거짓이 없고 깨끗하며, 자기 말에 책임을 지고, 주관이 뚜렷한 사람을 말한다. 그러한 사람은 어떤 상황이든 흔들리지 않으며, 남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는다. 남의 잘못을 용서(容恕)하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嚴格)한 것이다. 순수하게 살아간다는 게 쉽지는 않지만, 좋은 습관(習慣)을 자지려고 노력하면 순수해질 수 있다.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욕심을 버리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해야만 지도자가 될 수 있다. 2019년 3월 25일 강원구 행정학박사. 한중문화교류회 중앙회장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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