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뉴스

생활/문화/문학/칼럼

건의 공유뉴스가 있습니다.

생활/문화 > 문학 > 칼럼

조조(曹操)는 줄곧 유비(劉備)를 눈엣가시처럼 미워하였다. 어느 날 두 사람은 술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조조가 거만(倨慢)하게 말을 던졌다. “천하호걸(天下豪傑)을 따져보면 나와 유비가 진짜 호걸이요. 원소(袁紹) 같은 사람은 호걸 축에도 못 끼지. 하하하!” 한창 밥을 먹고 있던 유비는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 젓가락을 땅에 떨어뜨렸다. 유비는 조조가 이미 자기를 살해(殺害)하려고 준비를 갖추고 있음을 눈치 채고, 순간적(瞬間的)으로 유비는 자신의 놀람을 조조가 눈치 챘을 것 같아 얼굴이 확 붉어졌다. '꽈르릉-!!' 때마침 느닷없이 하늘에서 요란한 천둥소리가 울렸다. 유비가 상기(上氣)된 얼굴로 말했다. '성인(聖人)들은 바람이 불고 천둥소리가 울리면 큰 사변(事變)이 일어난다고 말씀했지요. 그 말씀이 맞는 것 같구만요. 천둥소리에 내가 놀라 젓가락마저 떨어뜨렸으니. 하여튼 천둥소리가 대단하군요!' '천둥소리에 다 놀라는 바보 같은 자식!' 조조는 속으로 유비를 비웃었다. 그래서 조조는 결코 유비도 호걸 축에는 끼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조조는 유비를 살해(殺害)하려던 계획(計劃)을 취소하였다. 이날 유비는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며, 스스로 몸을 낮추어 살아남는 방법을 취하였다. 2019. 5. 18 강원구 행정학박사. 한중문화교류회장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http://edaynews.com [ repoter : 강원구 ]

뉴스등록일 : 2019-05-18 / 뉴스공유일 : 2019-05-17

무료유료 FREE

신고하기 공유받기O 신고하기

1

생활/문화 > 문학 > 칼럼

9. 일본인들의 고착화된 성격논리 앞 칼럼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국의 대표적인 사무라이 문화인 무(武)와 불교에서 문(文)과 유교로 변화에 따른 왜국에서 근대일본사회의 대 변혁을 여기서 들여다 보기로 한다. 1) 고착화된 더치페이문화. 일본은 철저한 더치페이문화다. 항상 주변의 눈치와 상대를 잘 살펴야 살아갈 수 있는 그들은 항상 남에게 피해를 주게 되면 곧 바로 칼로 베이게 되는 민족이었다. 대장간에서 만든 칼이 잘 만들어졌는지를 보려고 집근처에서 어두운 밤에 지나가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도 하지 않은 체 그 칼을 사용해 보고 단칼에 베어지면 그 다음날 대장간을 찾아가 포상을 내리고 가문대대로 훌륭한 칼이라 자랑을 하는 민족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조심을 하다 보니 ‘스미마셍すみません’이 남발되고 궁극적으로는 남자 여자의 기본적인 생활 관계에도 더치페이 생활문화는 당연시되며 잔돈까지 얹혀 계산하는 방식으로 더치페이문화가 발전하게 되었다. 2) 혼내ほんね, 타테마에たてまえ(속마음, 겉마음 즉 본심을 숨기는 가면) 철저하게 일본인들은 이중성격 소유자들이다. 일단 그들은 이것을 "예의를 갖춘다"라는 정도로 생각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니 대충 대화를 하다가 일본사람들이 가장 많이 말하는 것이 "다이죠부だいじょうぶ"다. "괜찮아"정도인데. 제 아무리 늦어도-_- 상대가 아무리 약속을 어겨도 일단 기다리는 동안 속으로 별욕을 다했을지언정 상대방이 오면 예의를 갖춰 "다이죠부だいじょうぶ~~"라고 말한다. 혼내ほんね, 타테마에たてまえ 어원을 살펴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평민 출신인데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서 사무라이까지 된 자로 자신과 똑같이 평민->사무라이가 되는 길을 영구히 그것도 악랄하게 철저히 금지시켰다. 그리고 또 하나 기발하게 착안해 놓은 게 "사무라이들은 하위계급과 사무라이 외의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다"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런 규범과 동시에 왜의 무인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평민이 사무라이로 되는 걸 완벽하게 막아버렸다. 그 결과 사무라이들은 자신들 외의 사람들을 노예로 보면서 자신을 조금이라도 거슬리고 비위가 상하게 되고 까닭 없이 쳐다보기만 해도 사무라이의 칼로 머리든 몸통아리든 싹둑 잘라버리게 되는 사회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맘대로 사무라이들이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도 당시 사무라이가 지배하는 무의 사회에서는 그냥 규범적으로 넘어가줬으니 평민들은 위의 계급인 사무라이들에게 눈치를 보고 모든 행동거지에 미리 미리 조심을 하고 목숨이 붙어있는 상황에서는 언제 어느 조건아래에서든지 항상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그 사무라이가 상급자이든 하급자이든 간에 사무라이라면 무조건 굽실거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혹여 조금이라도 자신의 불만을 드러냈다간 바로 사무라이의 손에 목이 날라 갔다. 그러나 사무라이라고 그네들도 마냥 마음 편한 건 아니었다. 이들 사이에서도 상급자와 하급자가 나뉘어졌는데 하급 사무라이들은 상급 사무라이들이 명령하면 그게 무엇이든 간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고 그걸 거부하면 상급 사무라이들이 하급 사무라이의 댕컹 목을 쳐 버려도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사무라이라 한들 사실상 평민과 다를 바 없이 상급자에게 무조건 굽실거려야만 했다. 그런 사회질서가 ‘스미마셍すみません’이 남발을 가져오게 되고 사무라이 칼 끝에 목숨이라도 살아있으면 그 자체가 "다이죠부だいじょうぶ" 인 것이 고착화된 사회의 질서가 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회질서속에서 살아도 산 것이 아니지만 인간은 그 어느 동물보다도 고등동물로  환경 적응이 빠른 동물이기에 그러한 처절한 삶속의 백성들은 당연하게도 재빨리 적응이 되어 혼내ほんね, 타테마에たてまえ(속마음, 겉마음 즉 본심을 숨기는 가면)이 몇 개씩 있게 되고 만다. 언필칭, 혼내ほんね, 타테마에たてまえ(속마음, 겉마음 즉 본심을 숨기는 가면)가 이러한 사무라이들의 무법천지의 무의 사회질서에서 생겨난 것이다. 거듭 강조해 말하자면 혼내ほんね, 타테마에たてまえ(속마음, 겉마음)는 마구 날뛰는 강자들에게서 살아남기 위한 약자들의 처절한 몸부림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소호(SOHO)와 청결 지향적 문화정착 철저하게 개인주의이며 작고 아담한 1인 위주의 생활을 하며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하는 성향은 앞 서 말한 대로 피해를 주게 되면 사무라이에 의해 칼질을 당하기 때문에 이미 습관적으로 고착화되었고 매사에 사회생활은 조바심이 날 정도로 항상 앞과 뒤를 살피며 조심을 한다. 이런 생활 습관으로 인해 일본인들의 집 앞이 대체적으로 깨끗하고 운전할 때도 경적을 울리지 않고 끝까지 참는 것도 상대방이 누군지도 모르기 때문에 잘못 건들게 되면 곧바로 죽음과 연관이 되기 때문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에 대한 성격적인 오해가 금도를 넘어 그네들 일본인들은 인내심이 많고 참을성이 많다고 흔히들 생각하는데 결코 그렇지가 않다. 일본인들은 오로지 고례(古例)로 내려오는 사무라이들의 무인사회를 우선으로 하는 공포분위기와 무사인 사무라이들에게 무수히 당해왔던 기억의 일본인들 가슴에는 태생적으로 각인으로 형성되었다고 감히 생각하며 냉정하게 그네들의 잔인함속에 감춰진 대단히 약한 일본인들임을 쉽게 이해하고 아주 쉽고 단순하게 바라볼 수 있다. 일본인의 기본적인 성격형성 : 개인주의, 피해의식에 의한 지나친 배려심, 외국 문물에 대한 깊은 신뢰와 대(代)를 이어 가고자하는 장인정신, 새로운 것과 외국인들에 대한 과도한 친절 10. 일본 유교의 비조인 수은 강항선생의 문집 편찬 및 간행 수은 강항은 평소에 자신의 저작을 정리해두지 않아 많이 散佚(산질)되었는데, 선생의 行狀(행장)에 의하면 남아 있는 저술로는 家人(가인)이 수집한 雲堤錄(운제록) 몇 권, 巾車錄(건거록) 1책, 「綱鑑會要(강감회요)」, 「左氏精華(좌씨정화)」, 「文選纂註(문선찬주)」약간 권이 있었다고 한다. 이중 雲堤錄(운제록)은 시문집이며, 巾車錄(건거록)은 바로 看羊錄(간양록)으로 門人(문인)인 尹舜擧(윤순거)가 이름을 바꾸어서 정리하였다. 尹舜擧(윤순거)는 1654년〈看羊錄識(간양록지)>를 쓰고 다음 해 行狀(행장)을 지었으며, 이어서 金溝縣令(금구현령)으로 재직하던 중 저자의 시문과 看羊錄(간양록) 등을 편찬 정리하고 1658년 宋時烈(송시열)의 序文(서문)을 받아 목판으로 간행하여 마침내 수은 강항의 문집들이 서서히 빛을 보게 되었다. ▣ 특집을 끝내며 1. 일부 지식인들과 동떨어진 학자들의 시각 우려 사회전반에 이미 뿌리박힌 일본문화를 서서히 바꿔나가야만 한다. 그리고 철저하게 병기(倂記)를 하듯 동시에 그러한 왜색이 짙은 사회와 문화와 예술에 새겨놔야 할 것이다. 작금에 와서 학계에서 일본인 스승을 둔걸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학자를 바라보면 연민의 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일본이 언제부터 그렇게 연구와 깊은 통찰이 있었는지를 알아봐야 한다. 그건 지금으로부터 불과 450 여 년 전에는 그야말로 잔인하고 인간이랄 수 없는 국민성과 민족성을 갖고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한다. 그들의 노에 전쟁과 도자기전쟁에 의한 뼈아픈 역사를 우리는 치욕스러운 문화와 역사에 항상 용서하되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한다. 모든 일본인들이 다 그렇지는 않다. 90%이상의 백성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항상 어느 나라이든 일부 우익인사들의 문제가 가장 심각하다는데 있다. 2. 민간외교차원의 강항로드개발 2018년 10월경 강항이 포로로 끌려간 포로 길을 따라 강항로드(조이여행사 최금환대표)로 명명식을 가졌다. 하야시 라잔의 제자인 안사히에 의해 포로 강항에게 배웠다는 게 너무도 수치스러워 조선의 大儒라고 그들이 내세우는 퇴계 이황의 유교를 받아들였다는 그들의 역사왜곡을 바라보면서 참으로 개탄스럽고 한탄스러웠다. 역사왜곡을 바로잡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는 인식을 갖고 민간외교차원에서 접근하고자 하는 건 한국과 일본의 양 국가 간 마찰을 최소화하면서도 양국이 극대화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수은 강항선생에 대해서 작성했지만 국내에서만 머물러 강항의 수많은 자료가 일재강점기를 거치며 일본경찰서장에 의해 철저하게 분서갱유(焚書坑儒)가 되었고 자손들이 갖고 있는 자료의 한계를 절실하게 느끼며 부단히 찾은 자료의 한계로 아쉬움이 남는다. 가장 중요한 개발과 활용에 관한 부분이다. 역사문화콘텐츠의 활용은 수요층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특화된 프로그램, 참여자의 자발적 의식이 온전하게 결합되어야 이룰 수 있다. 이번 '수은 강항과 일본유교전파에 따른 역사적 고찰과 민간외교'의 특집에서 강조하고자하는 것은 대한민국을 넘어 한 미개국가를 문명국가로 꿈꾸도록 해 준 스승의 나라 사표師表인 수은 강항의 정신사적 선양사업과 문화콘텐츠의 활용에 관해 구체적으로는 국내, 외 수요층을 겨냥한 차별화 프로그램 개발, 창작문화예술 콘텐츠의 적극적인 개발, 홍보와 교육자료 개발, 내산서원 전시관(교육관)의 확대운영 등을 점차적으로 기획해 갈 것이다. 끝으로, 수은 강항과 일본유교전파에 따른 역사적 고찰과 민간외교에 대한 글을 작성하면서 관련 학술지 논문과 인터넷 검색의 방법을 사용하였다. 투고논문 : 강항(姜沆)의 충절정신과 유학(儒學)의 대왜(對倭) 전수(傳授)로 본 그 위상 논문 : 포로실기에 나타난 전란의 기억과 자기 정당화- 『간양록』,『월봉해상록』,『정유피란기』를 중심으로 임진왜란 포로의 일본 체험 실기 고찰 한국사상(韓國思想)(사학(史學)) : 수은(睡隱) 강항(姜沆)의 일본인식 임진왜란과 전쟁포로, 굴절된 기억과 서사적 재구 강항(姜沆) 이 본 일본(日本) 강항,『간양록』 임진왜란기 해외체험 포로실기의 동아시아 인식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http://edaynews.com [ repoter : 강대의 ]

뉴스등록일 : 2019-05-17 / 뉴스공유일 : 2019-05-17

무료유료 FREE

신고하기 공유받기O 신고하기

0

생활/문화 > 문학 > 칼럼

1477년 8월15일에 성종은 임사홍을 좌승지로, 한한을 우승지로, 손순효를 좌부승지로 임명했다. 좌승지 이극기는 강원도 관찰사로 발령 냈다. 그런데 임사홍은 우승지에서 좌승지로 영전되어 도승지 현석규와 같이 근무하게 되었다. 잘 된 인사가 아니었다. 8월17일에 성종은 경연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사간 박효원과 장령 경준이 현석규와 임사홍의 죄를 논하고 국문하기를 청했다. 성종은 짜증냈다. "두 승지가 스스로 죄가 없다고 밝혔는데 어떻게 죄를 주겠는가?" 영사(領事) 한명회가 아뢰었다. "죄가 국가에 관계되지 않으니, 고신을 거두고 심문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성종은 "그렇다면, 정승과 대간이 모두 모여서 심문하라."고 전교했다. (성종실록 1477년 8월 17일 1번 째 기사) 8월17일에 성종의 어명에 따라 상당부원군 한명회와 무송부원군 윤자운이 대간(臺諫)과 함께 현석규 등을 심문하였다. 현석규가 말하였다. "신이 의금부에서 승정원으로 돌아오니, 좌승지 이극기 등이 ‘조식 등을 형문(刑問)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일을 논계하려고 하기에, 신은, ‘명(命)이 벌써 내려서 계달(啓達)하는 것이 마땅치 못하다.’고 생각하였는데, 홍귀달이 독자적으로 계달하였습니다. 신이 곧 이르기를, ‘내가 도승지이고, 또 형방(刑房)인데, 어째서 나에게 고하지 아니하고 들어가서 임금에게 계달하였는가? 만약 신숙주가 동부승지이고, 강맹경이 도승지가 되었어도 이와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였는데, 대간들은 ‘내가 이름을 들먹이며 욕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비록 용렬하지만, ‘너’라고 어찌 욕을 했겠습니까? 그 뒤에 임사홍이 승전색(承傳色 어명을 전달하는 일을 맡은 환관)에게 나에 대해 말하기를, ‘성상께서도 승지를 대하실 때에 이름을 부르지 않으시는데, 공(公)이 ‘귀달’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영공(令公)은 어째서 오늘 아침에 아뢰지 않은 말을 아뢰었소?’ 하니, 그때 마침 이극기가 밖에서 들어와 위로하여 풀어주어서 그친 것이지, 내가 억지로 참은 것이 아닙니다.” 이어서 임사홍이 말했다. "도승지가 ‘내가 뜻이 있어서 노공필에게 말하였다.’고 하였기에, 내가 승전색(承傳色)에게 그렇지 않은 것을 밝히고 ‘성상께서 승지를 대하실 때에도 이름을 부르지 않으시고, 「예방(禮房)」·「형방(刑房)」이라고 일컬으시는데, 공이 「귀달」이라고 부른 것은 잘못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노공필이 나를 찾아와서, 내가 우연히 말한 것이지,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이윽고 한명회 등이 아뢰었다. "이제 보건대, 승지들이 분(忿)을 품고 다툰 것은 아닐지라도 서로 불평의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손비장과 이경동 등은 아뢰기를, "신 등이 듣건대, 임사홍이 말하기를, ‘영공(令公 현석규를 만함)은 실지로 귀달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니, 사간원의 차자(箚子)가 잘못되었겠습니까? 이는 진실로 서로 힐책한 것이니, 청컨대 사헌부에서 논한 바와 같이 하소서." 성종은 정창손과 김국광을 불러 전교했다. "승지들이 화합하지 못하니, 임사홍과 한한·손순효를 다른 직책으로 바꾸어서, 함께 있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데 어떻겠는가?” 정창손 등은 이것은 작은 잘못에 불과한 데, 갑자기 세 사람을 체직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대답했다.   (성종실록 1477년 8월17일 4번 째 기사) 하지만 대간이 다투기를 그치지 아니하므로, 성종은 임사홍을 대사간으로, 한한을 병조참의로, 손순효를 형조참의로 전보 조치했다.   (성종실록 1477년 8월17일 5번 째 기사) 이 날 도승지 현석규가 소장을 올려 사직하고자 했으니 성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성종실록 1477년 8월17일 6번 째 기사) 8월18일에 성종은 경연에 나아갔다. 강하기를 마치자. 사헌부 집의 이경동이 아뢰었다. "임사홍과 현석규가 다툰 것이 명백한데, 지금 임사홍을 언관의 장(長)으로 삼고, 현석규는 임사홍과 같은 죄인데 홀로 승정원에 머물러 있으니, 신은 옳지 못하게 여깁니다." 임금이 좌우(左右)에게 물었다. 그러자 영사(領事) 정창손이 대답하였다. "이것은 말의 작은 실수이므로 대체로 관계없습니다. 지금 모두 좌천시켰으니, 이것으로도 족합니다." 이어서 성종이 전교했다. "세 사람이 이미 체임되었으니, 현석규는 체임할 수 없다.“ (성종실록 1477년 8월18일 1번 째 기사) 이윽고 대사간 임사홍이 임금에게 와서 말했다. "신은 이미 간원의 논박을 받은 사람인데, 언관(言官)을 제수하시니 어찌 언사(言事)를 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대사간 직을 면직해 주소서." 하지만 성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성종실록 1477년 8월18일 3번째 기사)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http://edaynews.com [ repoter : 김세곤 ]

뉴스등록일 : 2019-05-16 / 뉴스공유일 : 2019-05-16

무료유료 FREE

신고하기 공유받기O 신고하기

1

생활/문화 > 문학 > 칼럼

◇ 조선의 유교 조선조 유학은 程朱의 道學을 수용하여 치밀한 개념 분석과 엄격한 실천 행위를 강조했는데, 특히 중기에 배출된 知的 巨人들을 중심으로 학문의 활동과 내용에서 일정한 연관성 혹은 공통성을 지닌 집단을 양산하였다. 당시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를 포함하여 사대부들은 유교를 중심으로 숭유엊 성리학을 중시했다. 통치철학으로 덕치주의를 내세워 유교로 왕권을 강화시키려 했으며 또, 앙조를 새로 세우는 것이기 깨문에 무엇보다 민심을 잡는 것이 중요했다. 백성들에게 고려왕조의 불교의 폐단을 당연스럽게 강조했던 것.실제로 고려말, 승려들이 왕권을 잡으려 하는 등 악행이 널부러 있었기 때문에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가 좋지 않다고 배척하고 성리학에 기반한 유교를 내세우게 된 것이다. ◇ 牛溪 학맥의 계승 강항은 문과에 급제한 이듬해인 1594년(28세) 校書館 正字로 있을 때에 경기도 파주로 牛溪 成渾을 찾아가 기호유학의 한 맥인 우계학맥을 계승한다. ◎ 安珦(晦軒) → 權溥(菊齋) → 李穀(稼亭) → 李穡(牧隱) → 鄭夢周(圃隱) → 吉 再(冶隱) → 金叔滋(江湖) → 金宗直(佔畢齋) → 金宏弼(寒暄堂) → 趙光祖(靜庵) → 成守琛(聽松)/白仁傑(休庵) → 成渾(牛溪) → 姜沆(睡隱) → <안동교박사의 세미나 일부 자료참조><이은 강대의 수은 강항선생 일대기 일부자료 참조> 8.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유교 1)이 무렵 일본 사상계의 변화 순수좌(수은 강항을 만나 후지하라 세이카로 개명)는 정가경(定家卿) 12세(世)손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일찍이 한학(漢學)을 익혔고 7~8세경 번주용야(藩州龍野)의 경운사(景雲寺)에 들어가 일산파(一山派)의 동명종호(東明宗昊)에게 글을 배웠다. 그는 문봉선사(文鳳禪師) 13회 기일(忌日)에 시(詩)를 지어 일등을 했는데 그때 나이가 12세였다. 그리고 16세에 이미 시집을 펴냈을 정도로 총명했다. 후지하라세이카가 17세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번주를 공격했는데 번주용야의 성주(城主) 아까마스 히로쓰(미치)(赤松廣通)가 경운사(景雲寺) 부근 좌강촌(佐江村)에 숨어 지내다가 후지하라 세이카와 사귀게 되었다. 그때 아까마스 히로스(미치)의 나이는 16세, 후지하라 세이카보다 1살 아래였다. 그 후 두 사람의 교우(交友)는 깊게 이어져 많은 경전을 펴내고 유학(儒學)을 몸소 익히는데 동참하게 된다. 한편, 후지하라 세이카가 30세가 되었을 때 대덕사(大德寺)에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통신사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 서장관(書狀官) 허성(許筬)이 와서 대덕사에 묵게 되었다. 이때 후지하라 세이카는 이들 통신사와 만나게 되고 서로 대화를 통해 학문적 교류를 갖게 되었다. 특히 서장관 허성(許筬)과는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경서(經書)에 대해서도 논하게 되었다. 지금도 후지하라 세이카의 문집에는 당시 허성이 지어준 국화(菊花)라는 詩題(시제)의 시와 함께 여러 수의 시가 실려 있다고 일본 학계에서는 전한다. 이 때 허성에 의해 후지하라 세이카는 유석불이(儒釋不二; 유교의 진리와 석가의 진리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사상에 접하게 된다. 또한 장자(莊子)의 무위자연설 무심(無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두 사람의 교유(交遊가 두터워 졌으며 허성은 장문의 글을 지어 후지하라에게 주기도 하였다는 것. 이처럼 조선의 포로 선비에 대해 기본적인 지식과 체험을 갖고 있던 후지하라가 몇 년 후에 강항을 만났고 강항을 만난 이후 후지하라는 승복을 벗고 본격적인 유학(儒學)을 넘어 유교의 참된 수업에 들어가게 된다. 앞에서 밝힌대로 거듭 5강조하자면 강항(姜沆)에 의해 그토록 많은 경서(經書)를 접하게 되면서 후지하라세이카는 승려복을 과감히 벗어 버리고 유교인의 유학자 복인 도복(道服)으로 갈아입고 유교의 의식(儀式)을 몸소 익혔다. 경자년(1600) 5월 19일, 부산앞바다로 강항이 귀국하게 되고, 그해 9월 15일 관원(關原)의 대회전(大會戰) 때 아까마스 히로쓰(赤松廣通)가 모함에 말려 39세 젊은 나이로 자결하게 되자 후지하라 세이카는 깊은 실의에 빠지게 되면서 불굘ㄹ 떤 와벽하게 유교에 귀의할 것을 표명하였다. 즉 도구가와 이에야스의 명에 의해 측근 학승(學僧)인 승태(承兌), 영삼(靈三)과의 토론 이후 미래본위의 불교세계관 보다 현실사회의 질서와 인륜도덕이 더 중요하다는 선언을 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아까마쓰에게 자결토록 명령한 도구가와에 대한 원한 도 엿 볼 수 있다. 결국 후지하라세이카가 44세 되던 해 후지하라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임신승(林信勝 ; 羅山(하야시라잔))이 후지하라의 문하에 입문하였다. 당시 라잔의 나이 22세였다. 라잔은 이미 학문의 경지가 높고 여러 방면의 책을 읽고 있었다. 후지하라는 라잔에게 연평답문(延平答問)을 가르쳤다. 연평답문(延平答問)이라는 책은 주자(朱子)의 스승 이연평(李延平)에게 주자가 묻고 스승이 답한 내용을 기록한 책인데 여기에는 우주만물의 도리를 궁구하고 그것을 체험하며 함양해 가는 도리를 설명해 놓은 책이다. 라잔이 이 천명도설을 출판하면서 발문을 붙였는데 “옛적에 원(元)의 조맹부가 신라의 김생(金生)의 글씨를 보고 찬탄하여 어디엔들 천재가 태어나지 않으리오 라고 하였는데 이제 나도 이 「천명도설」에 대해 그렇게 말할 것이다.” 라고 썼다. 2) 일본 유학의 중흥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1657)은 그가 읽은 440여권의 책 목록을 만들었는데 거기에는 송, 원, 명(宋, 元, 明)대의 유학자가 쓴 주요저서 대부분을 조선각본으로 읽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임진왜란 때 건너간 것을 비롯하여 도구가와 시대에 들어 와서 통신사의 내왕으로 문물의 교류가 활발한 데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하야시 라잔은 도구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시대 즉 일본에서 말하는 에도(江戶)시대의 위대한 학자로서 사상의 혁신, 문화의 혁신을 이루는데 중심인물이었다. 그는 이미 21세 때에는 논어집주(論語集注)를 공개적으로 강의할 만큼 학문적 업적을 쌓았고 후지하라 세이카의 문하에 들어가서는 연평답문(延平答問)을 비롯하여 본격적으로 유학(儒學)수업에 전념하게 되었다. 하야시 라잔에 이어 나타난 또 하나의 왜국의 유교의 별이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齎; 1618~1682)이다. 안사이는 라잔 보다 35세 연하였다. 그리고 막부(幕府)를 등지고 일어난 하야시 라잔과는 그 학풍을 달리하면서 대성하였다. 안사이는 경도(京都)의 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15세때 묘심사(妙心寺)에 들어가 선학(禪學)을 공부하다가 주자학에 관심을 두고 25세 때에 승복을 벗고 환속한다.   수은 강항은 이기일원론의 우계학파로 이어짐은 명명백백한 사실이며 그 사상이 후지와라세이카로 계승되고 하야시 라잔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齎)는 당시 임진왜란과 정유재린으로 인해 노략질한 유교의 경전을 급격히 섭렵하고 부터는 주자의 경의설(敬義說)에 심취하고 이기이원론의 퇴계 이황의 자성록에서 나름 큰 깨달음을 얻는다. 그는 스승인 하야시 라잔과는 달리 주자 연구에 깊이 빠지면서 사색적 실천적 수양에 중점을 두고 사회에 대하여 활동적 태도를 갖는 학풍을 세웠다. 특히 그들의 국사를 연구하고 신유(新儒) 합일설을 주장하면서 학문의 쇄신, 사회개혁의 추진 등으로 주체적 학풍을 이끌어 그의 문하에는 많은 학자와 사회지도자, 그리고 혁명가들이 배출되게 되었으며 여기서 근대 일본이 디자인되며 유교의 오류가 나타나고 역사왜곡으로 심각하게 번지게 된다. 왜국의 문화유산이 포로 강항에 의해 유교가 전파되어 근대 일본으로 현재의 선진국 진입으로 발전되어졌음에도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齎)는 진실된 역사의 뒤안길에 숨어 포로인 강항선생에 의해 유교가 전파되었다는게 너무도 수치스럽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사상이 다른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어받았다고 궤변의 논조를 펼쳐 현재의 일본의 학문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http://edaynews.com [ repoter : 강대의 ]

뉴스등록일 : 2019-05-15 / 뉴스공유일 : 2019-05-15

무료유료 FREE

신고하기 공유받기O 신고하기

1

생활/문화 > 문학 > 칼럼

남북조시대에 서위(西魏)의 우문태(宇文泰)장군과 동위(東魏)의 후경(侯景)장군이 한판 싸움을 벌였다. 병졸들의 함성이 울려 퍼지자 칼과 창이 햇빛에 번뜩이고 화살이 쌩쌩 오가는 혼란 속에서 갑자기 우문태의 말이 마구 날뛰었다. 우문태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두리번두리번 살펴보니 어느새 말은 엉덩이 쪽에 화살을 맞고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우문태 장군이 더 이상 말 잔등에서 지탱하질 못하고 아래로 굴러 떨어지자 그의 병졸들은 사방으로 허둥지둥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 때라고 생각한 후경 장군이 병졸들을 거느리고 함성을 지르며 쏜살같이 추격해 왔다. 우문태 장군은 꼼짝도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져 있었는데 어디 크게 부상이라도 입은 모양이었다. 우문태는 영락없이 체포될 것 같았다. 일단 적군에게 우문태라는 신분이 발각되는 날에는 당장 목이 날아 간다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때 우문태의 부하 이목(李穆)이 얼른 채찍을 들고 쓰러져 있는 우문태를 후려치며 호통쳤다. '이 벌레 같은 병졸놈아! 빨리 말해! 너의 장군은 어디로 도망을 쳤느냐? 말하지 않으면 당장 죽여버릴테다!' 후경 장군이 거느린 병졸들이 추격해 왔는데, 이목은 일부러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사정없이 우문태를 때렸다. 추격하던 적군들은 자기네 병졸이 포로로 잡은 줄로만 생각하고 그들을 그 자리에 남겨둔 채 계속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적군이 멀찌감치 달려가자 이목은 즉각 자기 말을 끌고와 우문태를 태워 힘껏 채찍질을 가하여 재빨리 도망가 버렸다. 2019. 5. 14 강원구 행정학박사. 한중문화교류회장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http://edaynews.com [ repoter : 강원구 ]

뉴스등록일 : 2019-05-13 / 뉴스공유일 : 2019-05-13

무료유료 FREE

신고하기 공유받기O 신고하기

1

생활/문화 > 문학 > 칼럼

◇ 강항의 국내 제자들  趙光祖(靜庵, 1482~1519)가 道學의 뿌리를 확고하게 내린 이후, 경기도 개성에서는 徐敬德(花潭, 1489~1546)이, 파주에서는 成渾(牛溪, 1535~1598)이, 황해도 해주에서는 李珥(栗谷, 1536~1584)가, 영남 동쪽에서는 李彦迪(晦齋, 1491~1553)이, 영남 북쪽에서는 李滉(退溪, 1501~1570)이, 영남 남쪽에서는 曺植(南冥, 1501~1572)이 학파를 형성하여 도학을 전수하였다. 호남에서도 북쪽에서는 李恒(一齋, 1499~1576)이, 남쪽에서는 金麟厚(河西, 1510~1560)와 奇大升(高峰, 1527~1572) 등이 독특한 학풍을 내세워 영향력을 발휘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이항·김인후·기대승 사후에도 17세기 초, 중반에 도학을 강론하여 제자들을 양성한 一群의 유학자들이 호남지역에 흩어져 있었다. 예컨대 담양 대산의 金大器(晩德, 1557~1631), 영광 유봉의 姜沆(睡隱, 1567~1618), 임실 덕촌의 趙平(雲壑, 1569~1647), 보성 우산의 安邦俊(隱峯, 1573~1654)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호남의 유학이 기축옥사와 임진·정유왜란을 거치면서 점차 학문적 기반이 약화되고, 더구나 17세기에 들어서는 대부분의 학인들이 경기와 호서지역으로 유학을 떠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강학의 촛불을 끄지 않았다.   강항은 영광군 남쪽 불갑산 아래 유봉리에서 태어나 유년기에 가까운 雲堤 마을로 이사했는데, 관직생활과 포로생활을 뺀 나머지 생애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강학하였다. 그는 팔대(八代) 문헌가에서 태어나 유년기에 이미 뛰어난 문장 실력과 해박한 역사 지식을 인정받았고, 3년여의 포로생활 중에 보여준 탁월한 氣節은 일본인도 존경할 정도였다. 강항의 수제자 尹舜擧는 스승의 학행을 挽詩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아름답고 밝은 문장은 지금의 屈原이요, 추상같은 높은 절개는 옛날의 蘇武로다.” 그는 포로생활에서 탈출하여 귀국한 이후에도 죄인으로 자처하고 벼슬을 멀리한 채 스스로 불갑산에 갇혔다. 강항은 찾아주는 詩友들과 담론하는 한편 그의 문장과 기절을 흠모하여 찾아온 제자들을 양성하다가 52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     강항은 17세기 초반에 호남 유학을 이끈 중심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간 강항에 대한 연구는 주로 시문학과 『看羊錄』, 일본에 유학전수 등 몇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졌으나, 아직까지 교사로서의 강학활동은 깊이 있게 탐색되지 못하였다. 필자는 강항에 대한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연구가 진행되려면, 그에게 영향을 준 스승들, 교유한 친구들,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 관련 유적과 유물들까지, 그 학문적 연관성을 폭넓게 탐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발표는 이러한 관심 하에 강항의 제자들에 관한 기초적인 정보를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중략> 과거 합격의 숫자로 보면, 소과에 응시하여 생원·진사에 오른 제자들이 20여 명이고, 대과에 급제한 제자들도 7, 8명 되며, 관직에 진출하여 고위직에 오른 제자도 적지 않다. 문집을 내지는 못했지만 관료로서 뚜렷한 업적을 남긴 박안제·박안효 형제와 신응망, 임련과 임담 형제는 향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야할 것이다.   문집의 유무로 보면, 현재까지 약 9명의 제자들이 남긴 9종의 유고가 간행되었다. 고부민의  『灘陰稿』, 나해륜의 『松島遺蹟』, 나해봉의 『南磵集』, 신천익의 『素隱遺稿』, 양만용의 『梧齋集』, 오희도의 『明谷遺稿』, 윤순거의 『童土集』, 이율의 『五休堂遺稿』, 정제원의 『醉愚堂集』은 앞으로 강항과 그 제자들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안동교 박사의 睡隱 姜沆의 강학활동과 제자양성 참조> 7. 스승 강항과 후지하라 세이카   후지하라세이카는 본래 이름 있는 승려계급의 중(僧)이었다. 그가 강항의 영향을 받아 당당히 승복을 벗어 던지고 조선의 선비복인 유복(儒服)으로 갈아입은 것은 놀라운 변신이자 일본의 당시 사상계가 큰 변화를 맞는 계기가 된다. 조선의 선비인 최익현은 ‘내목은 자를 수는 있어도 상투는 자를 수 없다’는 말을 생각해 보면 혁명적인 당대의 최고의 사건인 것이다. 후지와라세이카가 강항의 뛰어난 유교철학의 영향을 받아 당당히 승복을 벗어 던지고 조선의 선비복인 유복(儒服)으로 갈아입은 것은 열도에서 놀라운 변신이자 일본의 당시 사상계가 큰 변화로 이러한 사건은 강항(姜沆)의 인격과 학식에 감명을 받고 그의 저서 역대명의전(歷代名醫傳)의 서문(序文)과 문장달덕록강령(文章達德錄綱領)의 서문도 강항(姜沆)에게서 받는 등 여러 가지 사례에서 면밀히 살펴 볼 수가 있다. 특히 오경(五經)의 발문(跋文), 유진본 사서오경(柚珍本四書五經)의 발문도 강항(姜沆)이 썼던 것이다. 일본의 동경대학(東京大學) 교수인 아베요시오(阿部吉推)의 저서「일본주자학과 조선」(日本朱子學과 朝鮮: 1966 발행)에서 ◇ 후지하라세이카의 변신에 대해 첫째, 적송광통과 강항의 지원에 의해 신주(新注)에 의한 사서오경(四書五經)의 훈점본(訓點本)을 간행할 수 있었다는 점과 둘째로는 강항의 지도를 받아 적송광통의 집에서 공자제(孔子祭)의 의식(儀式)을 배웠다는 점, 셋째는 강항의 귀국 후 얼마 안 되어 처음으로 심의도복(深依道服)을 입고 도구가와 이에야스 앞에 나타나 도구가와 측근의 학승(學僧)들과 유불논쟁(儒佛論爭)을 행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이와 같이 후지하라세이카는 당시의 일본지식풍이 불교사상으로 흐르고 있었던 시대에 분연히 일어나 선승(禪僧)의 신분에서 유자(儒者)로 변신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의 신유학 창도자로, 또는 비조(鼻祖)로 자리 잡게 되었다. 후지하라 세이카가 일본유학의 창도자가 된 것은 직접적인 영향으로는 적송광통의 재정적인 후원과 지원에 있었고, 정신적 학문적으로는 강항(姜沆)에 의해 힘입은 바라 할 것이다. 그런데 더 큰 영향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해 도자기기술과 함께 인쇄술의 보급을 들 수 있으며 나아가 그들은 많은 서적을 가지고 갔다는 사실에서도 이 전쟁의 영향으로부터 일본의 모든 분야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라 보게 된 것이다. 흔히들 지적되고 있는바와 같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해 왜적들은 많은 포로를 잡아 갔었다. 그중에 도자기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그 곳에서 도자기를 만들게 하여 그것을 구라파로 수출, 일본경제의 황금기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인쇄술의 보급은 각종 서적을 대량 보급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어 일본 학계와 사상계에 새로운 학문이 중흥하기에 이르렀다. 사가(史家)들은 이를 일러, 도자기 전쟁, 인쇄술 전쟁, 노예전쟁이라고 일컫기까지 하지만 강항에 의한 유교 즉 주자학의 전파로 인해 일본에 문화혁명을 일으키게 한 것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 강항(姜沆) 왜에 남긴 학문의 세계 강항(姜沆)이 직접 간접으로 참여 했거나 대화를 통해 감긴 영향을 낱낱이 열거할 수 없지만, 여러 곳의 문헌을 통해 지금까지 뚜렷하게 전해진 내용을 간추려 보면서 강항이 일본의 사상계에 끼친 영향을 짐작해 보도록 하겠다. ○주역전의(周易傳義)의 훈점(訓點) 당시 일본학계에서는 주역전의를 읽는데 길잡이가 된 훈점(訓点)본이 없었다. 그런데 후지하라세이카는 강항(姜沆)을 만난 이후 이론 최초의 신주훈점본(新註訓点本)을 공개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것이 강항(姜沆)의 직접적인 지도에 의해 이루어 진 것으로 우연하게도 강항(姜沆)의 오경발문(五經跋文)이 쓰여진 때와 그 시기가 같은 시절이기 때문에 이를 강항(姜沆)의 지도로 보는 것이다. ○유진본 사서오경발(柚珍本四書五經跋) 사서오경은 바로 유학(儒學)의 핵심사상이 담긴 경서이다. 이것을 쉽게 읽도록 새롭게 간행한 이 책의 발문을 강항이 써주었다. 물론 이 책의 간행은 후지하라세이카의 학문적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지만 직접 간접으로 강항(姜沆)의 사서오경의 발문으로 인해 영향을 받았을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일본 학계는 유학의 사상이 널리 보급되었고 공자, 맹자에 이어 주자학이 정립되기에 이르렀다. 그 당시 강항이 발문한 사서오경이 지금 중국의 원문인 사서오경과 비교했을 때 한 획도 틀리지 않음을 일본학계에서 대 놓고 증명하기도 했다. ○곡예전경식어(曲禮全經識語) 곡예에 대해 식어(識語)를 써 주었다는 것은 이 책에 대해 해제(解題)와 함께 주(注)를 담아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편찬한 것이다. 이외에도 소학식어(小學識語), 통감식어(通鑑識語), 정몽식어(正蒙識語) 등 각종 서적에 강항은 식어(識語)를 써 주었다. 그밖에 각종 서적의 간행에 서문과 발문(跋文)을 써준 강항(姜沆)은 그 글에서 후지하라세이카의 인물, 학문의 경지, 지조 등에 대해 평하고 중국의 사상내용을 적었는데 지금 읽어보아도 명문이요 역작(力作)이었다는 사실을 일본학자들은 지적하고 있다. ◇ 강항(姜沆)의 필담(筆談) 당시 강항(姜沆)은 포로의 몸이요, 일본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후지하라 세이카와는 필담(筆談)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필담내용이 지금도 일본에 보관되어 전해지고 있는데 그 내용은 중국 유학사상(당시는 송학(宋學)이라 하였다.)에 대해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송유(宋儒)에 대한 이야기와 공자 맹자의 성학(聖學)에 대해 서로 말하였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또한 후지하라세이카는 이 필담에서 倭國(왜국) 무인(武人)들의 비속하고 폭력적인 행패에 조심해야 한다는 注意(주의)도 促求(촉구)하고 있다. 이것은 두 사람 사이의 인간적 交流(교류)가 얼마나 따뜻하고 서로 신뢰하였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오늘날까지 일본에 전해지고 있는 강항(姜沆)의 필사본(筆寫本)은 강항휘초로 16종 21책이 전수되어 오고 있는데 일본의 동경 국립공문서관 내각문고(內閣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이중 애석하게도 예기(禮記) 1책의 목차가 분실되고 없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http://edaynews.com [ repoter : 강대의 ]

뉴스등록일 : 2019-05-13 / 뉴스공유일 : 2019-05-13

무료유료 FREE

신고하기 공유받기O 신고하기

1

생활/문화 > 문학 > 칼럼

일본인들 성씨(姓氏)는 산이나 뽕밭, 들, 강가, 바다, 숲속 등 장소도 참 다양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민족도 지구상에 그리 흔치 않다. 일본인들을 경제동물이라고 폄하하는 데에는 이렇듯 다 합당한 이유가 있다. 凌辱(능욕)적이고 치욕적인 衣服(의복)을 기모노라는 이름으로 개량하여 세계에 홍보하듯 널리 알리고 있으니 정말 대단한 그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중략> 이런 배경으로 인해서 일본이 인구가 1억 명이 넘고 이 人的(인적) 자원이 이러한 일본 여성들의 헌신적인 희생의 대가로 경제 성장의 주춧돌이 된 것은 그 누구도 否認(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다, 5. 서양문물에 의한 군국주의 탄생 메이지 유신시대 일본의 지배층은 국가체제를 어떻게 가져가는 것이 좋을지를 고민했다. 서양화는 기본인데 서양의 많은 나라들 중 일본이 따라 가야 할 모델을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일본은 독일제국을 모델로 삼았다. 카이저가 있고 비스마르크라는 재상이 권력을 장악하고 이끌어 가던 독일제국이 적합해 보였다. 군대는 해군은 영국해군, 육군은 프랑스군이 모델이었다. 이후 일본의 산업은 철저하게 정치계와 경제계가 결합한 즉, 정경유착형태로 발전했고 일본의 식민지는 부국강병의 근본 조건이었기에 식민지 확보전쟁에 육군과 해군을 육성해 갔다. 일본제국 육군과 해군은 청나라와 러시아와 전쟁을 한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대만을 식민지로 획득하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조선을 식민지화한다. 특히 러일전쟁에서 승리는 메이지 유신 이후 추구했던 서양화의 결과물이자 이제 서양화가 되었다는 신호탄으로 생각되었다. 유럽 최강대국인 러시아제국을 전쟁으로 격파를 했다는 것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청일전쟁에서의 승리가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는 계기였다면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는 세계화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보유한 포탄의 전부를 사용했으며 막대한 돈을 전쟁에 투입해 경제가 파산할 지경에 처했지만 전쟁은 승리했고 조선이라는 식민지까지 얻었으니 손실 대비 성과가 좋았던 전쟁이었다. 유교를 바탕으로 한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권력이 사무라이에서 디른 사무라이에게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근대화는 곧 군사대국화와 같은 의미로 이해가 가능하다. 막부는 붕괴하고 다이묘체제는 붕괴했다. 지방분권의 시대에서 중앙집권체제가 등장한 것이다. 전통적인 사무라이 계급제도도 붕괴했다. 세습제의 사무라이 계급제도는 징병제로 대체가 되었다. 이제 중앙정부의 판단에 따라서 과거 보다 더 많은 병력을 단기간에 징병해 전쟁에 나설 수가 있게 되었다. 사무라이들은 이제 일본도를 들고 사무라이들끼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총과 대포를 들고 다른 나라와 싸우는 것이다. 근대 일본을 디자인한 유교를 바탕으로 한 메이지 유신은 곧 일본의 침략전쟁 야욕의 서막이었던 셈이다. 한편 후지와라 세이카는 강항이 1600년에 귀국한 후에도 유교에 심취했고, 4천왕이라 불리는 수제자들, 즉 하야시 라잔과 마츠나가 세키고 · 호리 교안 · 나와 가츠쇼를 키웠다. 그의 제자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이는 하야시 라잔(1583∼1657)이다. 라잔은 1605년에 세이카의 추천으로 이에야스에게 발탁되어 슨푸성의 서고관리 담당자로 임명되었고, 히데타다(1605년), 이에미쓰(1624년), 이에츠나(1655년)의 에도 막부에서 4대째 대학두(大學頭)로 일하여 ‘사상계의 쇼군’이라 불렸다.(대학두는 에도 막부의 관학 학문소의 최고 책임자, 우리나라로 치면 대제학과 대사성을 겸임한 벼슬에 해당한다.) 에도 시대 이전까지 일본은 무(武)와 불(佛)의 나라였다. 그런데 에도시대는 무(武)의 사무라이가 유문(儒文)을 읽었다. 즉 문(文)을 통하여 사무라이의 신분 질서가 확립되어 에도 시대 270년 동안 태평성대가 이어졌다. 문(文)의 사무라이를 확립시킨 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였고, 사상적으로 뒷받침 한 이는 일본 근세 유학의 비조(鼻祖) 후지와라 세이카였다.  후지와라 세이카 뒤에는 조선 선비 강항이 있었다. 1600년 4월 2일에 강항 일가와 선비들 38명은 후시미성을 떠나 귀국길에 올라 대마도를 거쳐 5월 19일에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 도착하자 선조는 강항을 불렀다. 적중 사정을 알아보고자 한 것이다. 6월 9일에 강항은 선조를 뵙고 왜국 사정을 알렸다.(1600년 6월 9일자 선조실록 참조) 이후 강항은 서울에 머물면서 승정원과 예조, 비변사 등의 자문에 응했고, 8월 1일에는 선조로부터 술과 말 한필을 하사받았다. 9월 초에 강항은 고향인 영광군 유봉마을에 돌아왔다.  그렇게 수십일(음력 4월 2일 일본 후시미서 출발, 5월 19일 부산도착, 9월 초 고향 영광도착)이 지난 후에야 72세의 부친 강극검에게 큰 절을 올릴 수 있었다. 6. 왜국에 유교 전파한 강항의 국내외 제자들과 조선중기의 학파 1) 강항의 제자들 ◇ 왜의 승려 후지하라 세이카와 만남 강항(姜沆)이 왜국의 수도 동경(東京)으로 온 이후 왜국의 지식인들과 접촉이 많아졌다. 의사(醫師)인 의안(意安), 이안(理安) 같은 사람은 강항이 있는 곳까지 찾아와 주었고 그들에 의해 묘수원승순수좌(妙壽院僧舜首座; 후지하라세이카(藤原惺窩)를 알게 되었다. 그는 본래 궁성 시종관의 이름난 집안의 자손으로 단마수 적송광통(但馬守赤松廣通)의 스승이었다. 후지하라는 두뇌가 총명하여 고문(古文)을 익히 다룰 줄 아는 사람으로 어느 책이나 모르는 것이 없고 성품은 아주 꿋꿋해서 저희들 측에서는 그리 달갑게 여김을 못 받는 사람이다. 언젠가 도구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그의 인물이 뛰어난 것을 알고 서울에 집을 지어 연봉 2,000석으로 맞아들이려 하였으나 그는 집도 싫고 곡식도 싫다하고 약주소장승준(若州小將勝俊)과 적송광통(赤松廣通) 같은 장군들과 놀기를 좋아하였다.   ◇ 적송광통과의 만남 여기에서 강항(姜沆)의 포로생활 중에 여러 가지로 큰 영향을 끼진 왜장 적송광통에 대해 몇 가지 알아 두고 넘어 가야 하겠다. 적송광통은 당시 왜국의 장수이자 武人(무인)이었다. 그는 일본의 환무천황(桓武天皇)의 9세손이었다. 육경(六經)을 좋아하는 그는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말 위에서 까지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재주는 좀 미욱한 편이어서 해석이 없이는 한 줄도 내려 읽지 못했다 한다. 적송광통의 스승이었던 후지하라 세이카는 적송광통을 평하기를 일본 놈의 장수, 장관들이란 모두가 도둑놈들이요, 적송광통만은 사람 마음을 지녔다고 말하고 일본에는 상례(喪禮)라는 것이 없으나 적송광통만은 3년 상을 치뤘고 언제나 중국제도와 조선의 예법(禮法)을 착실히 좋아 하였다고 말했다. 의복과 음식 같은 하찮은 일까지라도 반드시 중국이나 조선을 본뜨려하니, 그는 일본에 산다 하더라도 일본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강항은 가끔 적송광통과 만나 이야기할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적송광통은 언제나 선생을 만나면,“안녕하신가요?”하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청정(淸正)이나 좌도수(佐渡守) 같은 자들과 틈이 난 사이가 되어서 행여 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도록 하여달라는 부탁을 잊지 않았다. 또 그는 우리나라 선비로 포로 신세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과 우리 형제들에게 육경(六經)의 큰 글씨를 베껴 주도록 부탁하고, 그 값으로 온전을 돌려주었다. 강항(姜沆)은 그 뒤 귀국길에 이 은전으로 배편을 구하는데 용이하게 쓰는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적송광통은 우리나라의 오례의서(五禮儀書), 군학석채의목(郡學釋寀儀目)을 얻어 보고 단마(但馬)의 사읍(私邑)에다 공자묘(孔子廟)를 세웠고 또 우리나라의 제복(祭虙)을 본떠 입고 틈틈이 그의 부하들을 데리고 제의(祭儀) 익히기를 일삼았다. 그 후 적송광통은 강항(姜沆)이 귀국하던 해에 관원(關原)의 전쟁에 서군(西軍)으로 참여한 후 죽전성(竹田城)에서 근신하고 있었는데 도구가와는 구정자거(龜井玆耟)에게 인번(因幡)의 궁성을 치도록 명령하였다. 그때 구정자서는 적송광통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드디어 성을 함락시켰는데 그 성을 함락시킬 때 불을 질러 무찔렸다는 이유로 도구가와는 그 승리를 기뻐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안 구정자거는 그 짓은 적송광통이 한 것이라고 거짓보고를 하자 도구가와는 적송광통에게 자결할 것을 명했다. 적송광통이 자결했을 때의 나이는 39세였고 경자년(1600)에 해당된다.   이떄 적송광통의 스승인 후지아라세이카는 그를 슬퍼하면서 30수의 조가(弔歌)를 지어 그의 영혼을 위로하였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http://edaynews.com [ repoter : 강대의 ]

뉴스등록일 : 2019-05-10 / 뉴스공유일 : 2019-05-25

무료유료 FREE

신고하기 공유받기O 신고하기

1

생활/문화 > 문학 > 칼럼

1477년(성종 8년) 7월23일에 대사간 손비장 등이 현석규·임사홍이 서로 말다툼 한 것에 대해 차자(箚子 간단한 보고서)를 올렸다. "신 등이 듣자오니, 지난 17일 저녁에, 사간 박효원을 불러 노공필의 말을 물으시고 전교한 뒤에, 도승지 현석규와 우승지 임사홍 등은 승전환관(承傳宦官 어명을 전달하는 환관)을 대질하며 서로 말다툼을 하였다 합니다. 조정에는 예양(禮讓 예의와 겸양)이 중하온데, 현석규·임사홍은 가장 가까운 처지에 있으면서 하는 짓이 이와 같으니, 예양이 있기나 하는 것인지요? 엎드려 바라건대, 추국(推鞫)하여 죄를 물으시면 합니다." 이러자 성종은 "내 알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전교하였다. (성종실록 1477년 7월 23일 3번째 기사 ) 다음날인 7월24일에 성종은 경연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니, 사간원 사간 박효원, 사헌부 지평 김제신이 아뢰었다. "현석규·임사홍은 서로 승정원의 연곡(輦轂 : 임금이 타는 수레) 아래에서 서로 싸웠습니다. 이는 옳지 못하니 국문하소서." 성종은 "서로 말 다툼한 것은 무슨 일 때문이었는가?"라고 물었다. 우부승지 손순효가 대답하기를, "신은 몸소 보지 못하였습니다마는, 임사홍이 일찍이 신에게 ‘도승지는 임사홍이 노공필에게 말함으로써 음해(陰害)되어 유감스럽다고 말했다’고 전했습니다." 성종이 말하기를, "내 뜻으로 생각하기에는 도승지 현석규와 우승지 임사홍은 서로 발명(發明 죄나 잘못이 없다고 밝힘)한 것뿐이다." 이윽고 사간 박효원이 말했다.   "승정원은 다만 왕명을 출납할 따름입니다. 홍귀달이 차서를 뛰어 넘은 것에 대해 현석규가 노한 것은 마땅합니다. 그러나 현석규는 예(禮)로써 책망하지 아니하고, 소매를 걷어 올리고 이름을 불러, 그 위의(威儀)를 잃었으니 조정의 예양(禮讓)하는 기풍을 쓸어버린 듯하였습니다. 본시 듣건대, 현석규는 아래 사람을 접대함에 거만하다 하더니, 과연 사람들의 말과 같습니다. 신 등이 계청(啓請)하는 것은 대죄(大罪)를 더 청함이 아니라 현석규로 하여금 그의 잘못을 알아서 스스로 새롭게 함이온데, 현석규는 도리어 대간들이 자기의 말을 조작하여 일이 생기게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현석규가 스스로 반성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의심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요?" 박효원은 현석규 탄핵에 앞장 선 대간이다. 그는 노공필에게서 당일의 사건을 듣고 현석규를 탄핵했다. 그런데 노공필은 임사홍에게서 현석규의 일을 들었는데 노공필의 아우는 과부 조씨 사건으로 처벌을 받은 송호의 아비 송익손의 사위였다. 성종은 말하였다. "그 소매를 걷어 올렸다는 일은 현석규가 한 것이 아니니, 그대들이 무실(無實 있지도 않은 일)한 말을 가지고 말함이 옳겠는가?" 박효원이 대답했다. "현석규는, ‘당시에 더워서 소매를 걷어 올렸고 또 입에서 침이 튀긴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으나, 옛적에 진시황이, ‘입으로 침이 나오나, 노기를 담지 않고서야 어찌 침이 튀기겠는가?’ 하였으니, 이것은 현석규가 책임을 회피하려고 억지로 꾸며서 하는 말이며, 그 정상을 즉석에서 볼 수 있는 것인데도 또 연곡(輦轂) 아래에서 직책에 임하지 아니하고 또 스스로 서로 힐난하였으니, 그 죄가 더욱 큽니다." 임금이 좌우(左右)에게 물었다. 영사(領事) 심회(沈澮)가 대답했다. 1) "비록 소관(小官)이라도 반드시 화합한 뒤에야 모든 일을 이룰 수가 있거늘 승정원은 후설(喉舌)의 지위인데도 이와 같으니 섭섭함이 있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인심(人心)은 고금(古今)으로 다름이 없다. 그러나 지금의 승지는 예전과 같지 못하여 아래에 있는 자가 위를 공경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우부승지 손순효가 머리를 조아리며 울면서 말했다. "신은 상은(上恩)을 입어, 승지(承旨)를 하고 있습니다마는 근래에 신 등이 위로 성덕(聖德)에 누(累)를 끼치고 아래로 조정(朝廷)에 누를 끼쳐, 신은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승정원을 교체하시면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심회도 말했다. "신의 뜻도 승지를 모두 교체함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러자 성종이 말했다. "그렇지 않다. 죄가 있는 자는 마땅히 체차(遞差)하여야 하나, 어찌 모조리 교체하여야 하겠는가?" 이어서 성종이 사헌부에서 추핵(推劾)하기를 명하니, 사헌부 지평 김제신이 말했다. "신 등은 이목(耳目)의 소임을 맡았으므로 무릇 문견(聞見)한 바는 은휘하지 아니하고 말하였으나, 근자에 전하께서는 그 말의 근원을 물으시니, 지금 이후로부터는 신 등의 문견은 외로울 것 같습니다." 이어서 박효원이 말했다. "금후로는 말의 근원[言根]은 묻지 않는다고 이미 윤음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전에 말의 근원을 물으시니 신 등은 도리어 송사하는 자와 같았습니다. 전하께서 언관을 대접하기를 송사하는 자와 같이 하시니, 이것은 신 등이 어질지 못함이옵니다." 임금이 기뻐하지 않으며 말하였다. "내 마음은 그렇지가 않거늘, 그대가 이와 같이 이르는 것은 어찌해서인가? 내가 그대들을 대접함이 참으로 이와 같았던가?" 심회·이극배가 말하였다. 2) "박효원의 말이 지나쳤습니다.” 3) 성종은 묵연(黙然)히 있다가 경연을 마쳤다. 성종은 박효원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성종실록 1477년 7월 24일 2번째 기사) 사진 1 세계문화유산 선정릉 사진 2 선릉 전경 사진 3 선릉 묘소 1) 심회(1418∼1493)는 1467년에 영의정이 되고, 1471년(성종 2)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에 참여했다. 1473년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고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뒤 성종의 신임을 받아 국가의 대소 일에 참여했다.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http://edaynews.com [ repoter : 김세곤 ]

뉴스등록일 : 2019-05-08 / 뉴스공유일 : 2019-05-08

무료유료 FREE

신고하기 공유받기O 신고하기

1

생활/문화 > 문학 > 칼럼

1889년 2월11일 기원절(紀元節)에 메이지 천황은 ‘대일본제국헌법(흔히 메이지 헌법)’을 발포했다. 1) 천황은 발포식장에서 내각 총리대신 구로다 기요타카에게 헌법을 하사했는데 헌법은 천황이 국민에게 내리는 선물이었다. 메이지 헌법은 7장 76조로 구성되었다. 헌법의 기본원칙은 천황주권이었으며, 신성불가침한 천황에게 절대적인 권한이 집중되었다. 천황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 수 있는 헌법 조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조 :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萬歲一系)의 천황이 통치한다. 만세일계(萬歲一系). 이는 태양신의 후손 진무천황이 BC 660년부터 일본을 다스린 이후 천황의 혈통이 한 번도 단절된 적 없이 2천년년 이상 이어져 일본을 통치해 왔다는 뜻이다. 따라서 122대 메이지 천황(1867∽1912)을 절대적인 존재로 부각시키고 왕권신수설을 강조한다. 한편 금년 5월1일에 즉위한 나루히토(德仁) 천황은 126대로서 메이지 천황의 4대손이다. 제2조: 황위는 황실전범(皇室典範)이 정하는 바에 따라 황실의 남자 자손이 계승한다. 메이지 정부는 헌법 공포와 동시에 황실과 황족에 대해서는 황실의 제도와 구성 등을 명시한 ‘황실전범(皇室典範)’을 제정했다. 그런데 헌법 2조는 천황은 남자만이 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이런 남성 우위 사상은 나루히토 천황 즉위식에서도 나타났다. 부인 마사코는 즉위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뉴욕타임스(NYT)는 4월29일 “즉위식 여성 참석 불허는 일본 황실뿐 아니라 일본 사회에서 여성들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제3조 천황은 신성하여 침범할 수 없다. 이는 천황이 ‘살아있는 신’, 신도(神道)의 제사장임을 천명하고 있다.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는 일본 열도를 평정하고 손자인 니니기에게 청동거울과 검, 곡옥(曲玉) 즉 ‘3종 신기(神器)'를 주었다. 니니기의 직계후손인 초대 천황 진무천황은 3종 신기를 받았고, 지금도 천황의 상징이 되었다. 5월1일에 즉위한 나루히토 천황도 '3종 신기'를 물려받음으로써 왕권 계승을 공식화했다. 하지만 수천 년 간 존재했다는 '3종 신기'는 단 한 번도 실물이 공개된 적이 없다. 한편 일본인에게 천황은 지금도 신성불가침한 존재이다. 일본인의 혐한(嫌韓) 감정이 촉발된 것도 한국에서 천황의 사과 요구가 나왔을 때부터라는 것이 정설이다. 질서정연하면서도 속으로는 복잡하고 이상한 나라일본과 한국이 잘 지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제4조 천황은 국가의 원수이며 통치권을 총괄하며, 이 헌법의 조항에 따라 이를 행한다. 재5조 천황은 제국의회의 협찬을 거쳐 입법권을 행사한다. 제7조 천황은 제국의회를 소집하고, 그 개회와 폐회, 정회 및 중의원의 해산을 명할 수 있다. 제11조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 제13조 천황은 전쟁을 선포하고 강화를 하며, 여러 조약을 체결한다. 제14조 천황은 계엄을 선포한다. 제57조 사법권은 천황의 이름으로 법률에 따라 재판소가 이를 정한다. 프러시아 헌법을 모델로 한 메이지 헌법은 천황에게 국가원수, 외교권, 계엄권, 의회의 개폐와 해산권, 사법권 그리고 육해군 통수권이라는 주요 권능을 부여했다. 서양식 군복에 칼을 차고 수염을 기른 메이지 천황의 초상화가 전국에 유포되었고, 교육칙어(1890년)와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로 국민은 천황에게 절대 충성을 맹세했다. 이처럼 천황의 나라 일본은 입헌군주제 국가로 태어났다. 하지만 청일전쟁 ·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메이지 헌법은 제국주의 헌법이 되고 말았다. 사진 : 서양식 군복을 입은 메이지천황 1) 일본은 1873년 2월11일을 기원절로 선포했다. BC 660년에 즉위한 초대 신무천황(神武天皇)은 전설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메이지 정부는 8세기에 편찬된 『일본서기』의 신무천황 즉위 날짜를 양력으로 환산하여 기원절로 삼은 것이다.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http://edaynews.com [ repoter : 김세곤 ]

뉴스등록일 : 2019-05-07 / 뉴스공유일 : 2019-05-07

무료유료 FREE

신고하기 공유받기O 신고하기

1

생활/문화 > 문학 > 칼럼

1957년 9워 23일 아침에 강항 일행은 부친을 찾아 영광군 염산면 논잠포로 향했다. 그런데 왜군 수군이 나타나 강항 일가는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후 왜국의 후지와라 세이카는 강항을 비롯한 10명의 조선인 유학자에게 사서오경을 베끼게 하고, 자신이 직접 왜훈을 붙였다. 이 책이 바로 사서오경에 대한 주자의 집주에 일본식 훈을 단『사서오경 왜훈(四書五經倭訓)』이다.   2. 당시 왜국의 춘추전국시대 상황 도쿠카와이에야스(덕천가강)막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사망한 후 권력은 혼돈상태에 놓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로 기회를 엿보다가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면서 권력을 장악한다. 이 무렵 정유재란이 도요토미히데요시에 의해 발발하고 강항(姜沆)은 두 형을 비롯한 가족을 포로로 잡은 왜 수군은 부산 근처의 안골포(安骨浦)를 거쳐 대마도로, 그곳에서 일본 침략군의 출발 기지인 큐슈(九州) 서북단의 나고야(名古屋) 시모노세키(下關)를 거쳐 큐슈 동북쪽에 가로누운 시코쿠의 나가하마(長浜) 항에 닿았는데 그때가 음력 10월 15일이었다. 나가하마에서 오쓰大津에 닿기까지의 15km는 그야말로 죽음의 행로였다. 선상(船上)에서 아흐레를 굶어도 죽지 아니하고 그 쇠잔한 몸으로 나가하마에서 오쓰에 이르기까지 열 발자국에 아홉 번을 쓰러졌다니 생지옥을 거쳐 도깨비굴에 닿은 것이다. 오쓰는 강항(姜沆)일가족을 붙들어온 왜의 장수 도도 다카토라의 영지(領地)다. 오쓰 거리는 강항 가족과 전후하여 붙들려온 일천여 명의 조선족이 즐비했고 그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에 닿았다니 씻을 수 없는 왜놈들의 죄업(罪業)이 눈앞에서 보듯이「간양록」에 적혀있다. 강항(姜沆)은 오쓰 억류 생활 9개월에 두 번의 도주를 감행하나 번번이 실패한다. 강항(姜沆)은 달아나면서 성벽에다가 왜놈의 죄과(罪過)를 단죄하는 격렬한 방문(榜文)을 써붙였는데 그 조리 정연한 칼 같은 글에 왜인들의 가슴이 뜨끔했다. '너희들 깨닫지 못하면 큰 화가 미칠 것이다.' 라고 했는데 이미 그 얼마 전에 지진이 일어나고 홍수가 휩쓸었으며 강항(姜沆)이 방문을 써붙인지 두 달 뒤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그 죽음을 알리지 않으려고 그의 배를 갈라 소금을 채웠다고 『간양록』은 증언하고 있다. 오쓰의 영주인 도도 다카토라는 강항(姜沆)일가족을 오쓰에서 오사카(大阪)로 옮겨가고, 그곳에서 또 후시미(伏見)로 데려갔다. 후시미는 당시 일본의 서울이다. 이곳에서 2년 남짓, 큰 선비 강항(姜沆)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그곳에서 일본 성리학의 기틀을 닦은 것으로 평가되는 학승(學僧) 후지하라 세이카(藤原惺窩)를 만났기 때문이다. 후지하라 세이카를 일본 성리학의 개조(開祖)로 평가하지만 알고 보면 세이카의 스승이 강항(姜沆)이다. 우리나라 인명대사전(韓國人名大辭典)에는 강항을 일본 성리학의 시조(始祖)로 적어놓고 있다. 개조나 시조는 같은 말이다. 그렇다면 강항(姜沆)과 세이카와의 관계는 이인삼각(二人三脚)으로 일본의 성리학을 근대학문으로 구축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오쓰에'홍유강항현창비'가 세워진 까닭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후지하라 세이카에게 주자학(朱子學)의 깊은 학리(學理)를 가르쳐준 스승이 강항(姜沆)이며 또 그의 의뢰로 강항(姜沆)과 두 형(준, 환) 그리고 학자 10여 명이 참여해서 사서오경(四書五經) 대자본(大字本을 정서(淨書)하고 수진본(袖珍本: 옷소매에 넣을 수 있는 소책자)으로 대학, 중용, 논어, 맹자의 사서(四書)와 역경, 서경, 시경, 예기, 춘추, 곡례전경(曲禮全經)의 오경(五經)과 소학과 근사록(近思錄), 근사속록, 통서, 정몽(正蒙) 등을 필사(筆寫)했다. 수진본 16종(강항 휘초)은 현재 일본 왕궁의 국립공문서 관내 내각문고(內閣文庫)에 보전되어 있으며 강항(姜沆)의 서명이 뚜렷이 남아있다. 일본에서 근래(1991년, 2007년)에 '일본에 유교를 전한 조선인'이라는 주제로 2권의 저서가 간행된 까닭은, 강항(姜沆)이전에 이미 유교가 전해졌다 하더라도 원문(한문)을 해독하는 극히 한정된 몇 사람의 안중(眼中)에 머물러 있던 유교와 성리학을 강항의 도움으로 후지하라 세이카가 사서오경왜훈본(四書五經倭訓本 : 사서오경을 일본음으로 읽을 수 있게 만든 책)과 주자신주(朱子新注)의 훈점본(訓點本 : 새겨서 읽을 수 있도록 한 책)을 완성함으로써 유교와 성리학 접근을 쉽게 하고 그 문호를 넓혔으니 일본 근대화에 미친 강항(姜沆)의 영향을 짐작하게 한다. 후지하라 세이카는 중국과 조선을 숭모(崇慕)하여 도항(渡航: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넘)을 꾀했으나 실패하고 독학(獨學)으로 어렵게 배움의 길을 걷던 참에 조선 사람 유학자 강항(姜沆)을 만남으로써 우리 글로 새겨 읽을 수 있는 왜훈본(倭訓本) 간행이라는 대사업을 완성했으니 두 사람을 개조와 시조라는 동의어(同義語)로 엮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뒤로 시대가 근대(近代)로 내려오면서 일본의 마을과 고을마다 배움의 집인 데라고야(寺子屋: 우리나라의 서당에 해당)가 서고 근대교육에 대한 열망이 불길처럼 일어남으로써 일본의 근대화가 촉진되었으니 일본 땅에 사상과 학문의 씨앗을 뿌린 강항(姜沆)의 이름이 󰡐홍유현창비󰡑로 섰음은 당연하다. 단지 강항(姜沆)이 써 남긴 「간양록」이 사무치는 원한으로 격렬하게 일본(왜)을 매도했으므로 일본인이 읽고 질겁을 할 정도라 일본이 조선 강점 이후로「간양록」을 보이는 대로 거두어서 불에 태워 없앴으니 강항(姜沆)의 이름은 오랫동안 잊힌 이름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원본은 거의 씨가 말랐으므로 지식인 중에서도 강항(姜沆)을 깊이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랬던 것이 강항(姜沆)의 이름을 일본 전국에 알게 한 결정적인 사단(事端)은 1989년 2월 23일 일본의 NHK 텔레비전에서 방송된 45분짜리 「유자(儒者) 강항과 일본」이라는 프로다. 한국 취재까지 한 이 프로는 일본 전국에 큰 충격을 던진 바 있다. 그 전인 1980년 9월 1일자 일본의 아사히(朝日)신문 문화면에 「한․일을 이은 유자(儒者) 강항(姜沆)의 유적을 찾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강항(姜沆)재조명의 마중물이 되었다고 전해 온다.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와 함꼐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어 그의 부하였던 인물 중에는 도쿠카와이에야스(덕천가강)가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이 권력을 장악할 때 도쿠카와이에야스(덕천가강)는 절대 복종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사망하자 권력에 전면에 나선다. 도쿠카와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해 히데요시를 지지하던 세력을 몰락시킨다. 마침내 도쿠카와 이에야스는 쇼군이 되어 도쿠카와 막부를 열게 된다. 히데요시 가문 편에 서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참전해 패배했던 다이묘들은 영토를 크게 상실하고 세력도 완전히 꺾인다. 이후 원한을 갚을 날을 기다리는데 그 시간은 약 200년이나 필요했다. 일본의 개항과 메이지유신은 막부를 반대하던 지역에서 살던 사무라이 계급에 의한 것이었다. 근본적으로 미국의 무력에 때문에 사무라이들의 무력을 이용해 권력을 장악했으며 이런 특징 때문에 일본의 근대화는 군사력 강화를 바탕으로 했다. 이 무렵 도쿠카와 이에야스(덕천가강)는 후지하라 세이카의 수제자인 하야시 라잔을 막부정권의 시강(侍講)으로 교육을 맡기며 강독(講讀)으로 무에서 문으로 회귀(回歸)하면서 데라꼬야를 전국에 설치해 민심을 추스르고 불교중심에서 유교 쪽으로 질서를 잡고 있었다. 이무렵 막부에 도전한 사무라이들이 등장해 천황(일왕)에게 권력을 넘기라는 슬로건을 들고 막부에 도전을 하는데 당시 도쿠카와 이에야스 막부의 군사력과 도쿠카와 이에야스 막부를 따르는 다이묘들이 많았기 때문에 쇼군이 철저하게 무력적인 전쟁만을 추구했다면 메이지유신은 일어날 수 없었다. 이처럼 당시 유학이란 학문은 당시 쇼군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이들은 아마도 권력을 다시 찾아 올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천황(일왕)에게 권력을 전격적으로 넘겨주게 된다. 하지만 천황(일왕)은 형식적인 지배자였을 뿐 실권은 도쿠카와 이에야스 막부에 도전했던 사무라이에게 돌아간다. 이런 사무라이 중이 한 명이 근대 대한제국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다. 3. 명치유신에 의한 일본의 서양화 메이지 유신 이후 세력을 장악한 사무라이 내각은 유교를 바탕으로 자신감을 갖고 근대화에 착수를 하는데 목표는 서양화였다. 즉, 과거 일본을 버리고 현재를 서양화를 해서 미래에는 서양과 같이 되는 것이 목표였다. 일본인들은 당시 세계최강의 군사력을 가졌고 경제력을 가졌던 영국인들의 말,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미국인들도 영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영어는 일본이 서양화가 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외국어가 되었다. 일본인들은 일본식 변발을 스스로 잘라 버렸다. 서양인들처럼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잘랐으며 옷도 서양식으로 입기 시작했다. 4. 왜국의 성씨 유래 서양식은 무조건 좋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일본은 성이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서양인들은 이름과 성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도 성과 이름을 갖는 것이 맞다고 보았다. 모든 국민들은 이름 이외에 성을 그 아이가 태어나게 된 지명과 어느 곳에서 어떻게 잉태되었는지를 토대로 갖게 된다. 본 지 <강대의칼럼> 일본인 姓氏(성씨)로 본 근대 일본 참조!! http://www.edaynews.com/detail.php?number=28419&thread=02r07   なかむら 중촌[中村](나카무라) やまもと [山もと·山下], 木下(기노시타) 나무 아래서, 水上(미나가와) -> 물위에서, 川邊 (가와베) -> 냇가 옆에서.  村井 (무라이) -> 동네 우물가에서,  大竹 (오오다케) -> 큰대나무에서, 麥田 (무기타) -> 보리밭에서, 小島 (고지마) -> 작은섬에서,  市場(이찌바) -> 시장에서 內海(우츠미) -> 안쪽바다에서,  高柳 (다카야끼) -> 높은 버드나무에서, 山野(야마노) ->야마우치, 中曽根康弘나카소네 야스히로...(미시비시 삼릉1)(三菱) 창업자)성씨 산내 등등 거시기한 장소로 일본사람들이 姓氏(성씨)를 만든 건 이루 말할 수 없이 무수히 많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http://edaynews.com [ repoter : 강대의 ]

뉴스등록일 : 2019-05-06 / 뉴스공유일 : 2019-05-06

무료유료 FREE

신고하기 공유받기O 신고하기

1

선택한 뉴스공유받기
1112131415161718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