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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 정(鄭)나라 자산이 태숙에게   "오직 대덕(大德)을 쌓은 사람만이 너그러운 방법으로 국민들을 굴복시킬 수 있다. 강력한 방법은 사용할 수도 있지만, 만약 불이 강력하게 타오르면 국민들은 불을 무서워하게 된다. 그래서 불에 죽는 사람은 적은 법이다. 물의 성격은 연약하므로 사람들은 물에 접근하기를 좋아하여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많다. 그러므로 너그러운 방법으로 나라를 다스리기란 자못 어려운 일이다." 그 후 태숙이 집권하고 나서 강력한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너그러운 방법으로 나라를 다스렸는데 결국은 정나라에 도둑이 득실거렸다. 그제서야 태숙은 못내 후회를 했다. 공자(孔子)가 "법이 너무 너그러우면 국민들이 태만해지고, 그 태만을 고치는 방법은 강력함을 이용하는 것이다. 법이 너무 강력하면 국민들이 쉽게 상처를 입게 되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은 너그러움을 이용하는 것이다. 너그러움으로 강력함을 보충하고 강력함으로 너그러움을 보완해야 비로소 정치가 평행을 이룰 수 있다." 상앙(商鞅)은 형벌을 가할 때 송장마저 내버려두질 않았는데, 이는 지나치게 강력한 것이다. 양무제(梁武帝)는 사형수(死刑囚)를 보고 늘 눈물을 흘리며 놓아주곤 했는데, 이는 또 너무 너그러운 행동이다. 논어(論語)에는 작은 잘못을 면제해줄 것을 주장하였으며,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에서는 큰 잘못을 내버려두는 것을 비웃었다. 이 두 가지를 결부시킬 경우 다스리는 요령을 파악했다고 본다.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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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4-22 / 뉴스공유일 : 2019-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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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칼럼

수도(首都)란 넓은 의미로 입법부와 사법부, 행정부(통일, 여성, 복지, 교육, 문화 등)를 포함하는 한 나라의 통치기구가 있는 도시를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판소리사에 있어 첫 수도는 어디라고 할 수 있을까? 고창에는 판소리의 이론가이자 논평가, 후원가로서 대한민국 판소리 성립과 전개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동리 신재효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도 그는 판소리 흥망성쇠의 책임을 오롯이 혼자 짊어지고 있다 할 정도로 시대를 뛰어넘는 독보적 인물이다. 고창이 판소리의 첫 수도라는 몇 가지 이유를 들면 아래와 같다. 첫째, 판소리 규범을 정립하였다. 신재효는 단가 〈광대가(廣大歌)〉를 통해 판소리의 이론적인 측면을 밝히는 한편, 판소리 창자가 갖춰야 할 요건으로 '인물치레', '사설치레', '득음', '너름새'의 4대 법례를 (입법)제시했다. 또한 흩어져 구전으로 내려오는 가사를 채집해 조선역사 최초로 판소리 여섯마당을 개작 정리하여 당시와 후대 창자들이 교범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둘째, 판소리 창자를 평했다. 조선후기 전국 소리꾼들은 판소리 규범에 어긋남은 없는지와 그릇됨이 있는지 등을 알아보기 위해 고창을 방문하여 신재효의 (사법)판단을 청했다. 일례로 당시 “어전광대가 되려면 고창 신재효 문하를 거쳐와야 한다”는 이야기와 “전주대사습놀이에 참여하려 오는 광대는 먼저 고창에 들러 신재효의 평가를 받아야 장원할 수 있다”라는 말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졌다. 셋째, 판소리 창자 등에게 각종 행정지원 했다. 신재효는 판소리가 천한 소리라는 편견을 깨기 위해 양반 정서를 가미하고, 동편제와 서편제의 장·단점을 조화시켜 이론을 정립하므로써 민족예술로 (통일)승화시켰다. 또한 판소리를 남성만의 전유물로 알고 여자를 소리꾼으로 인정하지 않던 시대에 첫 여류 명창인 진채선과 허금파 등을 배출하여 (여성)권위 신장에도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신재효는 근검절약으로 모은 많은 재산을 활용, 전국의 창자와 연습생 등을 불러모아 숙식을 제공하고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함으로써 창자들의 (복지)증진에 힘썼으며, 동리정사에 전국 최초로 판소리 집단(교육)환경을 조성하여 전문 소리꾼을 끊임없이 발굴하고 가르쳤다. 특히, 그는 춘향가를 남창, 여창, 동창으로 분화시켜 맞춤형 예술을 육성하는 등 판소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므로써 (문화)행정이 해야 할 일을 이미 100년 이상 앞서 실천했던 인물이다. 이러한 신재효가 있어 고창은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등록된 판소리의 첫 수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창군에서는 올해 신재효와 관련하여 산재되어 있는 모든 자료를 총망라한 신재효 총서 발간을 시작으로 동리정사 복원에도 첫 발을 내디딤으로써 판소리의 학문적 중심지와 문화 선도지로서 위상을 드높일 계획이다. 민중들의 숨결과 애환이 녹아있어 동학정신의 토대가 되어왔던 판소리가 첫 수도인 고창에서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대해 본다.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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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4-18 / 뉴스공유일 : 2019-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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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칼럼

1. 수은 강항의 생애 수은 강항은 세조 때 명신 사숙재 강희맹(1424∼1483)의 5대손으로 1567년(명종 22년)에 영광군 불갑면 유봉마을에서 강극검의 5남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강항 집안은 고조부인 강학손(1455∼1523, 강희맹의 차남)이 영광군으로 귀양 와서 정착하였다.       강항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다. 5살 때에 사헌부지평 신응시가 영광에 들렸다. 신응시는 강항을 불러서  ‘각(脚)’자로 글을 지으라고 하자, 강항은 즉석에서 ‘각도만리 심교각(脚到萬里 心敎脚- 다리가 만 리를 가지만 마음이 다리를 시킨 것이다.)’라고 지어 신응시를 탄복케 하였다.       강항의 나이 7세 때였다. 책장사가 책을 팔고자 강항에게 맹자 1질(7권)을 보여주자 한나절 사이에 통달하였다. 이에 책장사가 천재라고 칭찬하며 맹자 한 질을 기증하였으나 이미 내 머리속에 다 들어와 있노라며 사양하므로 책장사는 책을 마을 앞 정자나무에 걸어두고 갔다. 그 뒤 이 나무를 맹자정(孟子亭)이라고 불렀고 마을의 이름은 ‘맹자마을’이 되었다.    1591년에 강항은 어렸을 때 공부를 가르쳐준 맏형 저어당 강해(姜瀣, 율곡 이이의 문인)가 신묘사화로 죽는 불운을 겪었다.(선조실록 1591년 8월 13일)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6월에 강항은 이굉중 · 이용중 · 송약선 등과 함께 창의하여 양곡과 군기를 고경명 의병에 보냈다. 10월에는 영광군수 남궁현이 친상으로 사직하여 민심이 흉흉하였다. 이응종 등 영광 선비 55명은 자발적으로 영광군 향토방위에 나섰는데 강항도 집안 친척 강태, 강락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영광군 영광읍 임진수성사에는 이들 55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1593년 12월27일 세자 광해군(광해군은 분조 역할을 함)은 전주에서 과거를 실시하여 문신 11명, 무신 1천 6백 명을 뽑았다. 이 때 강항은 병과(丙科) 5번째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강항은 우계 성혼(成渾, 1535∽1598)의 문인으로 박사 · 전적을 거쳐, 1596년 가을에 공조좌랑, 겨울에는 형조좌랑이 되었고, 1597년 2월에는 영광에서 휴가 중이었다. 5 월말에 강항은 호조참판 이광정의 보좌역으로 남원성 군량미 운반을 담당했으나 남원성이 왜군에게 함락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강항은 여러 읍에 격문을 보내 의병 수 백 명을 모집했지만 왜군이 전라도를 침탈하자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9월 14일에 왜적들이 영광군을 온통 불태우고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자, 강항은 둘째 형 준(濬), 셋째 형 환(渙) 등과 함께 배를 타고 피신했다. 20일에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싸우기로 하였는데, 뱃사공이 21일 밤에 신안 어의도로 뱃머리를 돌려 부친이 탄 배와 헤어지고 말았다. 23일 아침에 강항 일행은 부친을 찾아 영광군 염산면 논잠포로 향했다. 그런데 왜군 수군이 나타나 강항 일가는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후 왜국의 후지와라 세이카는 강항을 비롯한 10명의 조선인 유학자에게 사서오경을 베끼게 하고, 자신이 직접 왜훈을 붙였다. 이 책이 바로 사서오경에 대한 주자의 집주에 일본식 훈을 단『사서오경 왜훈(四書五經倭訓)』이다.    한편 세이카는 강항이 1600년에 귀국한 후에도 주자학에 심취했고, 4천왕이라 불리는 수제자들, 즉 하야시 라잔과 마츠나가 세키고 · 호리 교안 · 나와 가츠쇼를 키웠다.   그의 제자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이는 하야시 라잔(1583∼1657)이다. 라잔은 1605년에 세이카의 추천으로 이에야스에게 발탁되어 슨푸성의 서고관리 담당자로 임명되었고, 히데타다(1605년), 이에미쓰(1624년), 이에츠나(1655년)의 에도 막부에서 4대째 대학두(大學頭)로 일하여  ‘사상계의 쇼군’이라 불렸다.(대학두는 에도 막부의 관학 학문소의 최고 책임자, 우리나라로 치면 대제학과 대사성을 겸임한 벼슬에 해당한다.)  에도 시대 이전까지 일본은 무(武)와 불(佛)의 나라였다. 그런데 에도시대는 무(武)의 사무라이가 유문(儒文)을 읽었다. 즉 문(文)을 통하여 사무라이의 신분 질서가 확립되어 에도 시대 270년 동안 태평성대가 이어졌다.     문(文)의 사무라이를 확립시킨 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였고, 사상적으로 뒷받침 한 이는 일본 근세 유학의 비조(鼻祖) 후지와라 세이카였다. 그리고 세이카 뒤에는 조선 선비 강항이 있었다.  1600년 4월 2일에 강항 일가와 선비들 38명은 후시미성을 떠나 귀국길에 올라 대마도를 거쳐 5월 19일에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 도착하자 선조는 강항을 불렀다. 적중 사정을 알아보고자 한 것이다. 6월 9일에 강항은 선조를 뵙고 왜국 사정을 알렸다.(1600년 6월 9일자 선조실록 참조) 이후 강항은 서울에 머물면서 승정원과 예조, 비변사 등의 자문에 응했고, 8월 1일에는 선조로부터 술과 말 한필을 하사받았다.  9월 초에 강항은 고향인 영광군 유봉마을에 돌아왔다. 그리고 72세의 부친 강극검에게 큰 절을 올렸다. 2. 강항과 조선중기의 학파  조선조 유학은 程朱의 道學을 수용하여 치밀한 개념 분석과 엄격한 실천 행위를 강조했는데, 특히 중기에 배출된 知的 巨人들을 중심으로 학문의 활동과 내용에서 일정한 연관성 혹은 공통성을 지닌 집단을 양산하였다. 이를‘학파’라고 부른다면, 花潭학파· 退溪학파· 南冥학파· 栗谷학파는 이 시기를 대표한다.   趙光祖(靜庵, 1482~1519)가 道學의 뿌리를 확고하게 내린 이후, 경기도 개성에서는 徐敬德(花潭,1489~1546)이, 파주에서는 成渾(牛溪,1535~1598)이, 황해도 해주에서는 李珥(栗谷,1536~1584)가, 영남 동쪽에서는 李彦迪(晦齋, 1491~1553)이, 영남 북쪽에서는 李滉(退溪,1501~1570)이, 영남 남쪽에서는 曺植(南冥,1501~1572)이 학파를 형성하여 도학을 전수하였다. 호남에서도 북쪽에서는 李恒(一齋,1499~1576)이, 남쪽에서는 金麟厚(河西,1510~1560)와 奇大升(高峰,1527~1572) 등이 독특한 학풍을 내세워 영향력을 발휘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이항· 김인후· 기대승 사후에도 17세기 초, 중반에 도학을 강론하여 제자들을 양성한 一群의 유학자들이 호남지역에 흩어져 있었다. 예컨대 담양 대산의 金大器(晩德,1557~1631), 영광 유봉의 姜沆(睡隱,1567~1618), 임실 덕촌의 趙平(雲壑,1569~1647), 보성 우산의 安邦俊(隱峯,1573~1654)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호남의 유학이 기축옥사와 임진· 정유왜란을 거치면서 점차 학문적 기반이 약화되고, 더구나 17세기에 들어서는 대부분의 학인들이 경기와 호서지역으로 유학을 떠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강학의 촛불을 끄지 않았다.   강항은 영광군 남쪽 불갑산 아래 유봉리에서 태어나 유년기에 가까운 雲堤 마을로 이사했는데, 관직생활과 포로생활을 뺀 나머지 생애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강학하였다.  강항은 팔대(八代) 문헌가에서 태어나 유년기에 이미 뛰어난 문장 실력과 해박한 역사 지식을 인정받았고, 3년여의 포로생활 중에 보여준 탁월한 氣節은 일본인도 존경할 정도였다. 그의 수제자 尹舜擧는 스승의 학행을 挽詩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아름답고 밝은 문장은 지금의 屈原이요, 추상같은 높은 절개는 옛날의 蘇武로다.” 그는 포로생활에서 탈출하여 귀국한 이후에도 죄인으로 자처하고 벼슬을 멀리한 채 스스로 불갑산에 갇혔다. 강항은 찾아주는 詩友들과 담론하는 한편 그의 문장과 기절을 흠모하여 찾아온 제자들을 양성하다가 52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강항은 17세기 초반에 호남 유학을 이끈 중심인물 중 한 사람이다. 강항에 대한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연구가 진행되려면, 그에게 영향을 준 스승들, 교유한 친구들,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 관련 유적과 유물들까지, 그 학문적 연관성을 폭넓게 탐구해야 한다.   3. 牛溪학맥의 계승  강항은 문과에 급제한 이듬해인 1594년(28세) 校書館 正字로 있을 때에 경기도 파주로 牛溪 成渾을 찾아가 기호유학의 한 맥인 우계학맥을 계승한다. ◎ 安珦(晦軒) → 權溥(菊齋) → 李穀(稼亭) → 李穡(牧隱) → 鄭夢周(圃隱) → 吉     再(冶隱) → 金叔滋(江湖) → 金宗直(佔畢齋) → 金宏弼(寒暄堂) → 趙光祖(靜庵) → 成守琛(聽松)/白仁傑(休庵) → 成渾(牛溪) → 姜沆(睡隱) → <안동교박사의 세미나 일부 자료참조> 4. 문집의 편찬 및 간행   수은 강항은 평소에 자신의 저작을 정리해두지 않아 많이 散佚(산질)되었는데, 行狀(행장)에 의하면 남아 있는 저술로는 家人(가인)이 수집한 雲堤錄(운제록) 몇 권, 巾車錄(건거록) 1책, 「綱鑑會要(강감회요)」, 「左氏精華(좌씨정화)」, 「文選纂註(문선찬주)」약간 권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중 雲堤錄(운제록)은 시문집이며, 巾車錄(건거록)은 바로 看羊錄(간양록)으로 門人(문인)인 尹舜擧(윤순거)가 이름을 바꾸어서 정리하였다.     尹舜擧(윤순거)는 1654년〈看羊錄識(간양록지)>를 쓰고 다음 해 行狀(행장)을 지었으며, 이어서 金溝縣令(금구현령)으로 재직하던 중 저자의 시문과 看羊錄(간양록) 등을 편찬 정리하고 1658년 宋時烈(송시열)의 序文(서문)을 받아 목판으로 간행하여 마침내 수은 강항의 문집들이 서서히 빛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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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4-17 / 뉴스공유일 : 2019-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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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아테네 근교에 프로크루스테스라는 강도가 살고 있었다. 그는 길가는 나그네를 집으로 유인해 자기 집 철재 침대에 묶어놓고 그 침대에 맞지 않는다고 사람을 침대에 맞게 늘리어 죽게 하거나 또는 너무 커서 침대가 작으면 침대에 맞춘다고 다리나 머리를 잘라 죽이는 무시무시한 범죄자였다. 수 십 년동안 얼마나 많은 악행을 저질렀을까. 결국에는 그도 법의 심판이 아닌 자기가 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당시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에게 자기 침대에 묶여 자기가 했던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다. 이 그리스 신화는 자신의 원칙이나 기준을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잣대로 사용하는 잘못된 태도에 대한 교훈을 준다. 그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크기를 조절하는 비밀장치가 있어 어느 누구도 그 침대에서 예외자가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오늘날 무심코 관행처럼 시행했던 복지 제도나 정책들이 장애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애인들에게 근본적인 소외와 차별과 배제를 가져다주는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의 침대가 아니었나 반성해 본다. 과거 장애인 제도나 정책의 방향은 문제의 원인을 장애인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교육과 훈련을 통해 장애를 극복함으로써 비장애인에게 통합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변화의 대상이 장애인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회제도나 정책들을 장애인 중심으로 바꿔줘야 한다는 추세로 바뀌고 있다. 즉, 차이를 차별하는 사회적 불평등이 장애인 개인의 잘못, 무능함, 부도덕함이 아니라 비장애인에게 맞춰져 있는 사회제도나 사람들의 잘못된 편견에 있다는 것이다. 고창군은 지역 장애인들이 불편함으로 차별받지 않는 사회를 위한 물리적·제도적인 인프라 구축에 노력하고 있다. 지난해 40억원 규모의 장애인복지관을 개관해 매일 200여명의 장애인들이 50여개의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이용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고, 이용자 편의를 위해 2억5000만원의 리프트 장착 대형버스도 제작중이다. 또 장애인 직업적응시설 신축을 추진하며 장애인의 고용시장으로 진출을 위한 직업능력 향상 기반 구축에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여기에 장애인 주간보호센터 신축을 통해 돌봄이 필요한 중증장애인의 안정적인 돌봄 여건을 만들어 장애인 가족의 경제활동을 적극 지원할 계획이다. 아울러 장애인거주시설 생활인의 퇴소를 지원 할 ‘체험홈’과 시설 입소 희망자를 위한 ‘체험홈’을 마련해 본인의 집이나 지역사회에서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인프라 구축과 함께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함께 가야할 것은 장애인에 대한 인식개선이다. 올해부터는 매월 순차적으로 소규모의 밀착형 장애 이해교육과 다양한 장애체험 교육이 진행된다. 그 중심에 고령자나 장애인들도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물리적·제도적 장벽을 허물자는 ‘Barrier Free’ 운동이 있다. 도로나 건축물 등 시설물을 설치할 때 이용하는 사람이 불편함이 없도록 장애물을 제거한 환경을 말한다. 장애인을 바라보는 프로크루스테스 쇠 침대와 같은 단단한 편견의 장벽이 마음속에 이미 내재돼 있진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테세우스라는 영웅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니까.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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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4-16 / 뉴스공유일 : 2019-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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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7년(성종 8년) 7월14일에 성종은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대사헌 김영유가 아뢰었다.   "사헌부에서 명(命)을 받아 홍귀달·손순효를 추국하였더니, 마땅히 잘못 했다고 해야 하는데 오히려 스스로 옳다하고는 답변서에는 불손(不遜)한 말이 많습니다. 이들이 신출내기 선비도 아닌데 불손함이 이와 같습니다. 한한은 홍귀달이 논계할 때를 당하여 책임을 느끼고 중지시키지 못하였으니, 청탁이 명백합니다." 성종이 말했다. "어찌 청탁하는 것을 들어 주었겠는가? 조식이 무고한 것은 오로지 김주를 내치고 그 누이의 재산을 모조리 강제로 차지하려고 한 것뿐이다. 내가 들으니 조식등은 일찍이 그 누이를 때리고 다리를 몇 번 분질렀다 하니, 마땅히 샅샅이 추국하여 그 죄를 바르게 하려는데 경(卿)등의 생각은 어떠한가?" 이러자 영사(領事) 심회·김국광이 대답했다. "조식의 무리는 형문함이 마땅하며, 홍귀달이 아뢴 것은 그릇되었습니다." 성종이 도승지 현석규에게 누가 먼저 발설하였느냐고 물었다. 현석규는 손순효·홍귀달이 먼저 발설하였다고 대답했다. 이어서 사헌부에서 아뢰었다. "조씨(趙氏)는 여러 해를 과부로 살았고, 부모가 모두 죽었으며, 빈궁(貧窮)하기가 더욱 심하였는데도 조식·송호는 그녀를 챙겨주기는커녕 노비를 빼앗았습니다. 김주는 비록 예(禮)에 어긋나는 혼인을 도모하였더라도 본시 강간이 아니거늘, 조식 등은 소장을 내어 무고(誣告)하였고, 송호는 집안의 노비로 하여금 김주의 두발을 손으로 움켜쥐고 휘두르게 하고, 족심(足心 : 발바닥의 한가운데 오목하게 들어간 곳)을 때리게 하는 등 구타가 명백합니다. 이러한즉 조식 · 송호를 형문하고 추국함이 마땅하거늘, 홍귀달이 반박하여 아뢰었음은 잘못이거는, 그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답변서에서 답하기를, ‘조식 등이 강간을 고발한 것은 천성(天性)의 발로(發露)이고 일호(一毫)도 사사로운 거짓이 없다.’하였습니다. 또 손순효는 답변서에서, ‘조씨는 본시 대대로 녹(祿)을 받는 집안의 부녀인데, 김주가 조씨의 족친과 더불어 혼인을 도모하지 않고, 하루 저녁에 마구 뛰어 들어가 간음을 행하니 조식이 놀래어 강간으로 고발하였음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라고 말하여, 그 언사가 붕당을 지어 자기편을 두둔하고 자못 불손하였습니다. 송호의 아비 송익손도 현석규에게 청탁하였고, 한한은 송호의 친척으로 연좌됨이 확연하며, 이극기·임사홍도 또한 의논하는데 참여하고 그 한한의 청촉을 들어줌이 명백하니, 청컨대 아울러 추국(推鞫)하소서." 이에 성종이 전교하였다. "이극기·임사홍은 추국하지 말고, 한한·손순효·홍귀달은 의금부에 이송하라." (성종실록 1477년 7월 14일 2번째 기사) 7월15일에 의금부에서 아뢰었다. "홍귀달·손순효가 조식·송호의 일을 논계한 것은 사사로운 청탁인데도 승복하지 않으니, 청컨대 형문(刑問)하여 죄상을 밝히소서." 이에 성종이 전교하였다. "비록 엄호(掩護)하지 않았더라도 또한 죄가 있으니, 율(律)을 따라 추국하여 아뢰라." (성종실록 1477년 7월 15일 2번째 기사) 7월16일에 의금부에서 아뢰었다. "동부승지 홍귀달, 우부승지 손순효의 답서는 번문불손죄[煩文不遜罪 번거로운 글과 불손을 저지른 죄]로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 임금의 교지(敎旨)를 위반하는 죄를 다스리는 율)에 의거하여, 결장(決杖) 1백 대에, 고신(告身)을 추탈(追奪)하소서." 하지만 성종은 어서(御書)를 내려 "홍귀달만 고신(告身)을 거두고, 손순효는 교수(敎授)로 도로 근무하게 하라."고 하였다. (성종실록 1477년 7월16일 2번째 기사) 7월17일에 사헌부 대사헌 김영유 등이 차자(箚子 간단한 보고서)를 올렸다. "신 등이 엎드려 듣건대, 한한은 방면(放免)하고, 손순효는 교수(敎授)로, 홍귀달은 고신(告身)만 거두었다고 합니다. 당초에 의논하여 입계(入啓)하였을 때에, 홍귀달이 한한과 자리를 함께 하였는데 그 일이 청탁에 관계된 것입니다. 옥사는 비록 끝나지 아니하였더라도 정상은 엄폐하기가 어렵습니다. 전교를 받고 추문(推問)할 때에 미쳐서는 홍귀달과 손순효는 의논이 서로 부합되고 언사(言辭)가 불손하여, 그 정상을 보건대 분명히 경중(輕重)이 없으니, 청탁한 정상을 논(論)한다면 홍귀달과 한한은 동죄(同罪)이고, 불손한 정상을 논한다면 손순효와 홍귀달은 동과(同科)이니, 다시 중죄(重罪)를 내려주기를 청합니다." 성종은 다시 어서(御書)를 내렸다. "한한은 청탁하지 않은 까닭으로 방면하고, 손순효와 홍귀달은 언사(言辭)가 같은 것 같지만 실제는 다르니, 동일한 율(律)로써 다스리기는 불가하다." (성종실록 1477년 7월17일 3번째 기사) 이 날 의금부에서 조식 등의 처벌에 대해 아뢰었다. "이심(李諶)의 처 조씨(趙氏)가 족친(族親)으로 하여금 혼인을 하려하지 않고, 스스로 중매하여 김주에게 시집간 죄와 김주가 조씨에게 예(禮)를 갖추지 않고 장가든 죄는 《대명률(大明律)》을 보니 ‘화간(和奸)한 자는 장(杖) 80대를 처한다.’ 하였으니, 남녀(男女)를 한가지로 죄주어 이혼하게 하소서. 또한 조식·송호·조진(趙軫)이 조씨의 전민(田民)을 나누어 점거하려고 모의하고, 김주를 강간으로 무고한 죄는, 조진은 수범(首犯)이 되니 장(杖) 1백 대에, 유배 3천 리(里)를, 조식·송호는 종범(從犯)이 되니 장(杖) 1백 대에 고된 노동을 시키는 형벌 3년을 처하되, 아울러 고신(告身)을 모두 추탈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한편 조씨(趙氏)·조진·조식·송호는 돈을 바치고 장형(杖刑)을 면제받았다. (성종실록 1477년 7월17일 5번째 기사) 사진 1 자계서원 안내판 (경북 청도군) 사진 2 자계서원 강당 사진 3 사당 존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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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4-15 / 뉴스공유일 : 2019-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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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漢)나라의 원앙(遠鴦)이 재상으로 봉직할 때에 있었던 일이다. 원앙의 부하가 시녀와 간통을 한 사건이 그에게 발각되었다. 그러나 원앙은 그 일을 대소롭지 않게 캐묻지 않고 도리어 감춰주었다.   한데 이 일을 모르게 알게 된 다른 한 신하가 그 부하에게 위협을 하는 통에 그 부하는 겁을 먹고 도망을 쳤다. 원앙은 직접 그 부하를 뒤쫓아 가 데려왔을 뿐만 아니라, 그 시녀와 결혼하도록 도와주었으며, 또한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예전처럼 친근하게 대해 주었다. 몇 년 후 한나라 경제(景帝)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원앙은 한나라의 태상(太常)으로서 오나라로 파견되었다. 오나라 왕은 반란을 꾀하며 원앙을 농락하려 했다. 원앙이 아예 말을 들어주지 않자, 오왕은 병졸 5백 명을 풀어 그가 묵은 집을 포위(包圍)했다. 그때까지도 원앙은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 때마침 원앙의 옛 부하가 그 병졸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는 많은 술을 사다가 병졸들에게 나누어주어 푹 취하게 한 후 밤중에 원앙을 찾아갔다. "나리, 빨리 탈주하십시오. 내일이면 오왕이 나리를 처형할 것입니다." 컴컴한 밤중이라 원앙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원앙은 다그쳐 물었다. "도대체 누구 길래 날 구하려 하오?"   "저는 나리의 옛 부하입니다."   "아니, 누구라고?"   "그래도 모르시겠습니까? 그때 시녀와 좋아했던 사람입니다." 라고 부하가 대답하자, 원앙은 옷을 대충 입고 황급히 도망쳐 나와 목숨을 구했다. 작은 잘못을 용서해주면 상대는 자신의 특기로써 보답하며 큰 죄를 사하여 주면 상대는 목숨을 걸고 보답한다. 은공에 보답하려 하는 절실한 마음은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왔기 때문에 일단 기회가 주어지면 그들은 혼신의 힘을 다 쏟아 붓게 되는 것이다. 2019년 4월 15일 강원구 행정학박사. 한중문화교류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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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10월의 ‘정한론 정변’은 이와쿠라 도모미와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의 승리로 돌아갔다. 패배한 사이고 다카모리, 이타가키 다이스케, 에도 신페이 등은 사직하고 낙향했다. 낙향 후 새로운 돌파구를 찾던 이타가키, 고토, 소에지마, 에도는 1874년 1월에 애국공당(愛國公黨)을 조직하고, 신문도 발행하기 시작했다. 애국공당은 ‘통의권리(通義權利)’를 이념으로 삼았고 목표는 민선의원(民撰議院 즉 국회) 개설이었다. 통의권리는 ‘하늘이 인민에게 공평히 준 것으로 사람의 힘으로 빼앗을 수 없는 것’이라는 자유사상가들의 천부인권이었다. 1874년 1월17일에 이타가키, 고토, 소에지마, 에도를 비롯한 전 도쿄지사 유리 기미마사 등 8명은 「민선의원설립건백서(民撰議院設立建白書)」를 태정관 좌원(左院)에 제출했다. 이들은 건백서를 통해 일부 인사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것을 ‘유사 전제(專制)’라고 비판하면서 민선의원을 개설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건백서는 메이지 천황에게 보고되지도 않고 기각되었다. 건백서가 기각된 후 애국공당 인사들은 둘로 갈렸다. 한쪽은 ‘긴 세월과 간난을 길을 택한 인내파’이고 또 한 쪽은 ‘죽음을 각오한 결행파’였다. 인내파의 대표인물은 이타가키였다. 그는 고향 고치(高知)로 가서 1874년 4월10일에 입지사(立志社)라는 정치결사를 조직했다. 이어서 그는 「건백서」를 신문에 게재하여 여론 몰이에 나섰고 1875년 2월에 전국적인 조직 애국사(愛國社)를 결성했다. 한편 결행파는 에도 신페이였다. 그는 1874년 2월16일 새벽 사가현청을 급습하여 이틀 만에 점령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는 정부군에 패하여 4월13일에 참수 당했다. 이러한 반정부운동의 고양에 직면한 정부는 여론을 완화하고자 오쿠보 도시미치는 이타가키를 오사카에서 만나 회유했다. 그 결과 이타가키는 참의로 정계에 복귀했다. 이어서 정부는 1875년 4월 입헌 조칙을 통해 점진적인 입헌 방향을 천명했다. 하지만 6월에 신문지조례 법을 제정하고 출판조례를 개정하여 자유민권 입장에 서는 정치평론·반정부언론에 가혹한 탄압을 가했다. 이로 인해 이타가키는 참의에서 사퇴하고 정부를 떠났다. 1877년 6월에 이타가키는 다시 의원설립건백서를 제출했지만 또 기각되었다. 이에 이타가키는 정부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애국사 회원 확대에 주력하여 전국적으로 10만 명이 가입했다. 그는 1878년 9월, 1879년 11월 오사카에서 애국사 전국대회를 열었고, 1880년 3월에도 대규모 집회를 개최했는데 여기에서 두 가지가 결정되었다. 첫째는 전국 조직인 ‘국회기성동맹’을 결성하고, 둘째 민선의원 개설 청원서를 또 다시 제출한다는 것이다. 4월17일에 그들은 청원서를 제출했는데 또 기각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타가키는 1800년 12월에 애국사와 국회기성동맹을 통합하여 ‘자유당’을 결성하고 1881년 10월에 대규모 집회를 할 것을 결의했다. 그런데 1881년 3월에 참의 오쿠마 시게노부(1838∽1922)가 정치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했다. 그 내용은 1882년에 헌법을 제정하고 1883년에 국회를 개설하여 영국처럼 의원내각제로 하자는 진보적인 의견이었다. 이러자 주류파 이토 히로부미 등은 긴장하였다. 때 마침 홋카이도 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이 터졌다. 개척사 관영사업은 1881년에 종료되었는데, 개척사 장관 구로다 기요타카가 관영공장을 특정 무역회사에 헐값으로 불하했다. 구로다는 12년간 약 1,400만 엔이라는 거금을 투자한 관영공장을 약 39만 엔에, 그것도 무이자 30년 상환에 불하하려고 했다. 이 계획이 신문에 폭로되자 여론이 악화되었다. 이토 등 번벌 세력은 관영공장 불하 정보를 신문에 유출한 자가 있다고 믿었고, 그 인물로 오쿠마를 지목했다. 오쿠마가 민권세력과 내통했다고 의심한 것이다. 1881년(메이지 14년) 10월에 이토 등 주류세력은 오쿠마 시게노부를 파면했다. 동시에 10년 이내에 국회를 개설한다는 조칙을 발표하여 사태를 수습했다. 이를 ‘메이지 14년 정변’이라 한다. (계속) 사진 1 메이지 신궁 참배를 기다리는 일본인들 (2019.1.2.) 사진 2 부적을 사려는 일본인들 (2019.1.2.)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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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전남대학교 문화재협동과정 석, 박사 문화재콘텐츠개발 수업에서 고흥지역 설화현장을 방문하자는 의견과 후발 의견으로 수은 강항선생의 얼이 깃들어 있는 영광지역을 탐사해 보자는 의견으로 분분하다가 거수 투표에 의해 영광지역이 최종 선정되었으나 그만큼 심적 부담은 가중되었다. 드디어 11일 날이 밝아 전남대학교 문화재협동과정 석, 박사과정(인솔 김용의 교수) 12명이 내산서원과 영광군지역 문화유산(文化遺産)을 찾아 탐사(探査)를 시작했다. 이들 일행은 9시에 조선시대 성군(聖君) 세종대왕과 동서지간인 완역재(玩易齋) 강석덕(대민공)1) 이하 4대인물(강귀손, 강학손, 강희맹, 강희안)이 배향된 이흥서원을 찾아 강도원 별유사2)로부터 유서(由緖) 깊은 이흥서원에 대한 안내를 들었다. 또,지근거리에 있는 내산서원에 들러 강재원 영광내산서원보존회장으로부터 수은강항선생의 유물전시관을 둘러보며 선비정신의 표상(表象)인 강항이 조선선비로 왜국에 포로가 되어 극적으로 유교를 전파한 기막힌 역사를 접했다. 이어 천년고찰 불갑사를 찾아 전문 안내인의 소개로 불갑사만이 갖고 있으며 타 사찰과의 색다른 특이점(特異點) 등 범인(凡人)으로 미처 알지 못하고 불갑사만이 품고 있는 숨겨진 속살까지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웅장하면서도 위압감을 주는 사천왕상상은 원래 고창 연기사에 모셔져 있었지만 진흥왕 1년(540)부터 35년(574)까지 연기조사 만든 것으로, 조선 고종 7년(1870)에 설두대사가 나무배 4척을 동원하여 현재의 사찰인 불갑사로 옮겨왔다는 설명이 새롭게 다가왔다.  일행들은 수은강항의 천재성이 덧보이는 맹자(孟子)정비를 보자마자 원래 맹자정비가 있었던 곳조차 더 둘러볼 시간도 없이 차에 올라 3km 떨어진 곳 논잠포(구명 서포)에 다다른다. 선생이 끌려간 논잠포는 그 옛날 조기잡이 배로 넘실거렸음에도 영광군 문화관광 차원의 안내판마저 없이 ‘수은강항선생 섭란사적비’만이 덩그러니 세워져 있어 일행들은 눈으로 확인하고도 오랜 간척사업으로 믿기지 않은 역사를 뒤로 한 체 다시 한 번 마음으로만 그 당시를 그리며 잠시 회상(回想)에 젖기도 했다. 항상 문화든 음식이든 고프다!! 영광군에서 자랑할 만한 00한정식당에서 당연한 정식 세 상을 두 상으로 극적으로 줄여 놓고 태연하게 자리하고서는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차린 음식으로 맛의 고장임을 확인하고 문화와 역사를 채우고 주린 배도 채워 넣는다. 늦은 오찬시간 덕분으로 다행히도 다들 잘 먹었노라고 형식적으로나마 흡족해 하는 듯 하고 이후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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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4-14 / 뉴스공유일 : 2019-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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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경제민주화 지원 조례가 11일 전남도의회를 통과했다. 그동안 대기업의 횡포에 맞서 지역의 중소상공인들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높았으나 그것을 제도적으로 뒷받침 할 조례가 없어 경제적 약자인 중소상공인들은 불공정한 거래관행으로 고통받아왔던 것이 사실이다. 11일 전남도의회를 통과한 『전라남도 경제민주화 지원 조례』는 경제적 약자를 보호하고 불공정한 거래관행을 개선하여 경제주체 간 갈등 해소와 상생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조례로 정의당 출신 최현주의원(비례대표)이 대표발의 했다. 최현주 의원은 “소득분배의 불평등으로 사회적 양극화가 점차 심화되고 대형마트 진출로 인해 도내 중소상공인의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권한이 없다는 이유로 뒷짐만 지고 있는 전남도의 책임 있는 역할을 위해 법적근거 마련이 필요했다”며 조례 제정의 취지를 밝혔다. 『전라남도 경제민주화 지원 조례』가 전남도의회를 통과함으로서 중소상공인 및 영세자영업자 보호와 불공정 거래에 대한 제도 개선 등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으며 경제민주화 정책 장애요인의 개선을 위해 전라남도와 각 시·군간 정책협의가 가능해졌다. 정의당 전남도당은 『전라남도 경제민주화 지원 조례』 제정을 환영하며 경제민주화를 통해 대기업의 횡포 방지와 노동자의 노동권 보장 그리고 서민경제 활성화의 계기가 마련되기를 간절히 희망하는 바이다.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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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4-12 / 뉴스공유일 : 2019-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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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란춘성(花爛春盛) “꽃이 만발한 한창 때의 봄” 이란 뜻으로 벚꽃이 휘날리는 따스한 봄이 다가오듯 2019년 신학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꽃샘추위가 따스한 봄날을 시샘하듯 학교폭력의 피해를 당하는 학생들과 이 학생의 부모들은 한 겨울의 추위보다 더 시린 새 학기를 맞 이하고 있다. 학교폭력이란 학교 내외에서 학생을 대상으로 신체․정신․재산상의 피해를 수반하는 일련의 행위들을 의미한다. 피해 유형으로는 언어폭력, 집단따돌림, 스토킹, 신체폭력 순으로 나타 났으며, 초등학교 학생들의 학교폭력이 중학생과 고등학생보다 높게 나타나 심각한 문제로 대두 되었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러한 학교폭력의 형태가 사이버폭력 등으로 다양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학교폭력을 당한 기억은 대게 오래 남는다. 학창시절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했다면, 그 상처는 성인이 되고 나서도 문득 떠올라 또 다른 아픔을 낳는다. 하지만 이러한 피해자의 심정과는 다르게 가해자는 기억조차 잊은 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문제점은 피해학생과 가해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닌 이러한 학교폭력을 방치함으로써 위험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고 피해자 보호 시스템을 알려 주지 않은 학교, 더 나아가 이 사회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교폭력을 근절할 수는 없다 또한 법과 제도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학교폭력을 사소하게 생각하지 않고 바로 잡기 위해 경찰과 학교 당국이 협력하여 학교폭력자치위원회 등을 통해 학교 폭력 가해자를 선도하고 범죄 수준에 이른 학교폭력은 경찰에서 엄중히 수사하되 선도심사위원회 및 선도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운영하여 소년범을 구제 하는 절차도 마련해 처벌과 교화 사이에 균형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또한 학교에서는 인성교육을 강화하고 학생들이 어울려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 활동들을 늘리고 학교 내 폭행 취약지역을 셉테드(CPTED)를 통해 정비하고 주변 CCTV를 늘려 안전한 학교 환경을 조성해야 할 것이다. 미래의 주역인 청소년들이 자유롭게 꿈을 꾸면서 희망을 이야기 할 수 있도록 학교폭력의 예방과 해결은 우리 사회의 청소년문제 해결의 지름 길이며 이러한 점을 우리 모두가 인식해야 할 것이다.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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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4-10 / 뉴스공유일 : 2019-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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