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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도청에서 국장으로 퇴직하신 분이 약선 요리연구가이며 전남도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는 일본여성 신카이 000dutk를 데리고 내산서원을 여름이 접어드는 6월 어느 날 방문했다. 퇴직고급 공무원이라 그냥 오는 게 아니고 예의를 갖추고 절차를 밟아 영광군 담당계장을 전화로 앞세우고 여유 있게 다가왔다. 어느 유림(儒林)이 말하길 “개인 신분 그것도 포로로 끌려가 어느 한 국가에 들어가 학문(學文)을 전파(傳播)한다는 것은 기적(奇蹟)에 가까운 일이다.”고 말한다. 그래서 왜국의 승려로 순수좌라는 불교 서열 신분을 가진 사람을 포로 강항이 만나게 된다. 수은 강항이 에이메현 오즈시에 억류(抑留)되어 있을 때 학문(學問)에 굶주린 왜국에서는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식으로 삽시간에 그들의 수도인 교토에 까지 그 명성을 떨치게 된다. 복견성(후시미성)과 순수좌 이렇게 강항은 에이메현 오즈시에서 다시 수은 강항은 수로(水路)를 이용해 교토로 들어가 복견성인 후시미성에 도착한다. 후시미성은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전권을 갖고 있으면서 철저하게 요새처럼 구축한 성이다. 지금도 교토시에서 언덕빼기에 한참을 올라가야만 찾을 수 있는 성이고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고택들도 예사롭지가 않다. 뭔가 중압감(重壓感)을 충분히 갖는 무게가 있고 중후(重厚)함마저 감돈다. 이 후시미성에서 불과 100m 아래에 적송광통(다카마스 히로미치)의 저택이 있었다. 여기에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지금 일본에서 신으로 모시고 있는 왜국의 승려 순수좌였다. 아마 당시에 적송광통(다카마스 히로미치)와 순수좌는 유교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다. 말을 타고 전장을 넘나들면서도 따라주지도 않은 머리를 가진 무장인 적송광통(다카마스 히로미치)은 수은 강항에게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수진본으로 부탁하기도 하며 공자묘까지 집안에 설치해 유교(儒敎)에 열심이었다. 특히 적송광통(다카마스 히로미치)과 순수좌는 유교로 뭉친 동지관계였다. 순수좌가 강항을 처음 만나 글을 달라고 말하지만 수은 강항은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한다. 무색해진 순수좌는 적송광통(다카마스 히로미치)에게 사실대로 말하며 도저히 상대를 해 주지 않는다며 하소연한다. 이때 적송광통(다카마스 히로미치)은 강항의 처지를 사실대로 말하며 왜인이라면 치를 떠니 더 공손히 부탁해 보라고 주문한다. 강항에게 큰절로 사제지간 연 맺다 순수좌는 필담(筆談)을 통해 강항에게 먼저 왜국의 정세와 상황에 대해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토로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에 미친 사람이자 짐승보다 못한 놈이지만 왜의 백성들은 아주 선량하고 올바른 사람들인데도 무인이 지배를 하면서 너무도 피폐해져 이런 상황까지 야기되었으니 군자의 유학을 널리 전파하면 백성들이 올바른 군주를 받들지 않겠습니까? 부디 도와주십시오!!”하며 사제지간의 연을 맺듯 큰절을 하였다. 이에 깜짝 놀란 강항은 “사실 이 전쟁은 미치광이가 벌이는 난장판이지 사람이라면 이런 식의 전쟁은 하지 않을 것이오. 거느적거리는 어린아이나 노인을 무자비로 죽이고 코와 귀를 베어가는 짓은 병법서나 전술을 말하는 책자에도 나와 있지 않은 것이오” “그렇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야말로 광기어린 아주 나쁜 놈입니다. 다만 제 친구인 적송광통(다카마스 히로미치)만은 그런 범주로 보지 말아 주기바랍니다” “내가 조선에서 그대의 나라로 오는 도중에 조카아이까지 모두 6명이었소. 그런데 5명이 죽고 1명의 여자애만 살아있는 처지인데 어찌 그대를 이해가 되며 내가 무슨 글을 한다고 말하겠습니까?” “그 말씀이 옳고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다만 소인이 유교로 군자들이 넘치는 조선을 가려고도 했고 중국에 가 유교를 배우고자 했지만 소인의 부덕(不德)의 소치로 그 뜻을 이루지 못 한터에 이렇게 선생님을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부디 글을 내려 백성들로부터 문맹을 깨우치게 해 주시기바랍니다” 위와 같은 필담의 결과로 인해 32세 수은 강항은 38세의 순수좌를 제자로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강항은 일본에 성리학을 전할 목적으로 《성재기》와 《시상와기(是尙窩記)》를 손수 써서 일본의 승려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등에게 선물로 주며 ‘성재기’의 첫글자에서 ‘성’자를 가져오고 이어 ‘시성와기’글에 ‘와’자를 가져와 ‘등원성와’ 후지와라세이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 세 사람은 지금 일본에서는 일본 유교의 비조로 추앙받고 있다. 적어도 후지와라 세이카는 유교의 영향과 그의 성품으로 인해 적송광통(다카마스 히로미치)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활복을 명령받아 죽임을 당하는 그 순간까지 그를 그리워 하며 추모시를 수십수를 지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두 번째로 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의 곁에 시강(侍講)직을 내려 두고자 했지만 그는 끝내 거절하고 그의 제자인 하야시 라잔에게 물러주고 만다. 우리에게는 야인시대에서 김도깡과 사무라이 싸움을 벌인 하야시 일본 무사가 생각날 것이다. 그 위대한(?)가문이 바로 하야시 라잔에서 파생(派生)된 가문이니 일본열도에서는 하여시가문이라면 어떠하겠는가를 짐작만 해 봐도 다 알 것이다. 후지와라 세이카의 직계  제자 하야시 라잔이 누군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강으로 있으면서 오사카성을 공략해 도요토미 히데요시 아들인 히데요리를 멸족하게 한 장본인이 아닌가 말이다. 하야시 라잔의 수제자 항상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진다. 도쿠가와이에야스의 시강을 맡은 하야시 라잔은 거침이 없었다. 그런 하야시 라잔의 수제자 안샤이가 일본에서 천재라는 명성을 갖고 일본 열도를 종횡무진하듯 주자학으로 흔들고 있었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 했던가?! 물론 조심스러운건 이런 경우를 굳이 청출어람이랄 수도 없지만 조금은 비틀고 싶어서 사용해 본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조선의 유교에 관련한 책자가 넘쳐나고 있었다. 항상 독학(獨學)이 문제다. 직접적으로 글쓴이의 심경까지 녹아든 유학이 아닌지라 자의적인 해석이 큰 오류를 가져오게 된다. 또, 안샤이는 하야시 라잔의 온건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일본 유교를 신격화시키려고 까지 대들었다. 항상 이런 유형의 친구가 문제다. 한마디로 포로에게 배웠다는 게 쪽팔려 발음도 안 되고, 소리가 비슷하니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중에 노략질한 책을 독학으로 매진해 보며 퇴계 이황이 일본 유교의 시조라고 역사왜곡을 서슴지 않았다. 고도성장을 달리던 우리나라에서 IMF이후 급격한 생활경제 악화로 퇴직한 교장선생님들이 직업을 따지지 않고 이고 저곳에 근무를 하였다. 설령 그 스승이 어떠한 직업을 갖든 한 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기에 스승찾기와 은사찾기에서 뜨거운 눈물을 살펴 본 방송이 당시 많았다. 포로가 스승이라고 욕이 될까?! 그들의 명예가 실추 될까?! 배웠으면 되돌려 갚지는 못 할 망정 쪽팔린다고 ' 주장이 서로 다른 두 학자 어거지로 갖다 붙이려 한다고 사단칠정(四端七情) 사상이 맞겠는가 말이다. 오늘 일본 약선 요리가이자 전남도 홍보대사에게 통역에게 주문을 해 꼭 이렇게 전달하도록 했다. “당신도 이렇게 고급지게 옷을 갖춰 입고 이곳을 방문할 수 있는 영광도 수은 강항이 있어 가능했노라고~~!!” 이들 일행은 한 시간가량 늦게 도착했지만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은 체 다가와 불편한 기색이나 속상한 마음을 전혀 드려내지도 않고 그나마 고마운건 딱 하나 있다. 그동안 봐 왔던 유물관내부에서 평소에 그닥 중요하게 생각지 못 했던 유물을 제 삼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앞으로 변화할 여러 중요 유물을 찍고 정리하며 이렇게 유저들에게 더 유익한 자료를 전달할 수 있는 것 같아 너무나 좋다.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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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칼럼

이순신 장군이 명량에서 13척으로 133척의 왜군을 이겼다는 것은 세계해전사에 유례없는 쾌거였다. 하지만 이순신이 『난중일기』에 적었듯이 이는 천행(天幸)이었다. 하늘이 도운 것이다. 이렇게 도저히 이길 수 없는 해전에서 이겼기에 승리 요인으로 ‘철쇄설’이 등장한다. 명량해협의 가장 좁은 양편에 철쇄를 걸어 일본전선 수백 척을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는 그럴듯한 이야기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철쇄설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철쇄설이 사실이 아니라는 근거를 살펴보자. 첫째, 명량해전 당시나 직후의 역사적 기록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즉 『난중일기』나 『선조실록』에 관련 기록이 없다. 둘째, 철쇄설은 18세기 후기에 이중환의 『택리지』와 『호남절의록』에 나오는데 내용이 황당하다. 우선 이중환이 1751년에 쓴 택리지를 보면 누가 보더라고 허무맹랑한 글이다. 그러면 『택리지』의 ‘팔도총론’, ‘전라도 편’을 읽어보자. 임진년에 왜적의 승려 현소가 평양에 와서 의주 행재소에 편지를 보내 “수군 10만 명이 또 서해로 오면 마땅히 수륙으로 함께 진격할 터인데, 대왕의 수레는 장차 어디로 갈 것입니까?” 하였다. 이 때 왜적의 수군이 남해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던 참이었다. 그 때 수군대장 이순신이 바다위에 머물면서 쇠사슬을 만들어 돌 맥 다리에 가로질러 놓고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왜적의 전선이 다리 위에 와서는 사슬에 걸려, 이내 다리 밑으로 거꾸로 엎어졌다. 그러나 다리 위에 있는 배에서는 낮은 곳이 보이지 않으므로 거꾸로 덮어진 것은 보지 못하고 다리를 넘어 순류에 바로 내려간 줄로 짐작하다가, 모두 거꾸로 엎어져 버렸다. 또 다리 가까이엔 물살이 더욱 급하여 배가 급류에 휩싸여 들면 돌아 나갈 틈이 없으므로 500여척이나 되는 왜선들이 모두 일시에 침몰했고 갑옷 한 벌도 남지 않았다. (이중환 지음 · 이익성 옮김, 택리지, 을유문화사, 2002. P 87-88) 이를 보면 이순신의 해전은 임진년(1592년)에 일어난 것으로 적혀 있다. 명량은 길이 1.3km, 입구 쪽의 폭은 약 650미터이며 가장 좁은 폭이 295미터인데 여기에 쇠사슬이 설치되었다는 것 자체가 허무맹랑하다. 더구나 500여척의 왜선이 모두 침몰했다니 『택리지』는 너무 황당하다. 사진 1 해남 명량대첩 기념공원에서 본 명량해협 한편 의병장 고경명의 7대손 고정헌이 1800년에 편집 간행한 『호남절의록』에는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헤라클레스처럼 명량해협을 가로지르는 철쇄를 혼자서 자유롭게 걸고 거두었다고 되어 있다. “김억추는 정유재란 때 전라우수사가 되었는데 충무공이 힘을 합쳐 적을 토벌하자는 뜻의 격문을 공에게 보내오니 공은 즉시 진도에 가서 만나 여러 방략들을 마련하는 데 많은 힘이 되었다. 쇠사슬을 명량에 가로질러 설치하여 우리 배가 지날 때는 거두고 적의 배가 지날 때는 걸도록 하였는데 쇠사슬이 너무 무거운 지라 여러 장수들 중 아무도 그 일을 해 낼 수가 없었다. 공이 때에 맞춰 걸고 거두는 것을 아주 쉽게 하였으므로 이순신이 그 용력의 절륜함에 탄복하였다.” (김동수 역. 호남절의록, 경인문화사, 2010 p 197) 참으로 전쟁 소설 한 장면이다. 아울러 이순신은 김억추에 대하여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는 듯하다. 9월8일의 『난중일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우수사 김억추는 겨우 만호에만 적합하고 장수를 맡길 수 없는데, 좌의정 김응남이 친밀한 사이라고 하여 함부로 임명하여 보냈다. 이러고서야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셋째, 당시 조선 수군은 철쇄를 설치할 상황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순신 함대는 8월16일 이후 일본의 추격을 피해 여러 번 진을 옮겨, 8월29일 벽파진에 주둔했는데 이때도 왜군의 공격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엄청난 양의 철을 주조하여 쇠사슬을 만들고 물살 센 해협에 설치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철쇄설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이순신이 전라좌수영 본거지인 여수 돌산 앞바다에 철쇄를 설치한 것을 예로 들면서, 전라우수영에도 철쇄를 걸었을 것으로 주장한다. 하지만 전라좌수영의 철쇄는 항만 방어용이었고, 명량의 철쇄는 전투용이다. 아울러 여수와 명량은 물살의 속도와 해협의 폭 등이 달라서 비교 자체가 의미가 없다. 또한 최근에 공학적으로 명량해협에 철쇄를 거는 것이 가능한 지를 여러 가지 각도로 검증한 결과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학위논문도 발표된 바 있다. 1) 사진 2 해남 명량대첩 기념공원에 있는 회령포 결의 조각상 1) 철쇄설에 대하여는 이민웅의 『이순신 평전(성안당,2012)』 346-349 페이지를 참고하였다.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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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나라의 주선(周宣)은 유명한 해몽가로 널리 알려졌다. 그만큼 찾아오는 손님들도 많았고 희한한 사람도 많았다. 어느 날 한 손님이 그를 찾아와 간밤 꿈에 초구(草狗)를 보았다고 했다. '손님은 고기를 먹게 될 거요' 주선이 해몽했다. 손님은 주선의 해몽을 듣고 싱글벙글 웃으며 떠나갔다. 그 후 손님은 정말로 우연스레 고기를 먹게 되어 해몽과 딱 맞아떨어짐에 감탄했다. 고기를 공짜로 먹은 손님은 며칠도 안 되어 또 고기 생각이 나서 주선을 찾아갔다. 이번에는 시치미를 뚝 떼고 거짓말을 했다. 어제 저녁에도 '또 초구 꿈을 꾸었어요' 주선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손님은 부상을 입을 수 있으니 부디 조심하길 바라오' 똑같은 초구 꿈이라 으레 좋은 소리를 들을 줄로 생각하고 말했는데, 이번엔 너무나 불길한 해몽이었다. 손님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아무 말도 안 하고 몸을 툭툭 털고 일어나 가버렸다. 얼마 후 손님은 수레를 타고 가다가 어줍잖게 떨어져 발목 부상을 입었다. 주선의 해몽은 딱딱 맞아들어 갔다. 너무나도 희한한 일이라, 손님은 세 번째로 주선을 찾아가 또 거짓말을 했다. '선생님의 해몽대로 발목을 다쳤어요. 그런데 어제 저녁에 또 초구 꿈을 꾸었어요' 주선이 웃으며 말했다. '이번엔 불을 조심해야겠소' '이번에도 맞아떨어질까?' 손님은 속으로 설마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편치가 않았다. 며칠 후, 손님의 집에 큰불이 나, 순식간에 집이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손님은 황급히 주선의 집으로 달려가 물어보았다. '초구 꿈을 세 번 똑같이 꾸었는데 어찌해서 해몽은 세 번 다 다릅니까? 그리고 매번 꿈과 해몽이 맞아떨어진 것은 무슨 원인이죠?' 주선이 해석했다.'초구는 제사용 물건이므로 첫 번째 초구 꿈은 고기를 먹을 수 있음을 나타냈소. 두 번째 초구 꿈은 제사가 끝나면 초구를 밖으로 내가기 때문에 사람이 수레에서 떨어질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오. 그래서 손님은 수레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은 것이지요. 세 번째는 초구를 불태워 없애야 하므로 화재를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었소.' 손님은 이때 비로소 솔직히 털어놓았다. '저의 첫 번째 꿈이 진짜이고 두 번째와 세 번째 꿈은 모두 거짓말이었소.' 주선이 말했다. '길흉화복은 마음가짐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오. 손님이 그런 마음가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진짜 꿈을 꾸었든 거짓말을 했든 사건과 일치했던 거요. 해몽이란 꿈을 적당하게 풀이할 뿐이오.' 2019년 6월 2일 강원구 행정학박사. 한중문화교류회장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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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7년 8월24일에 도승지 현석규가 체임을 청했다. 하지만 성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8월26일에 현석규는 다시 체임을 청했다. 성종은 그에게 특별히 두 자급(資級)을 올려주면서 내가 장차 크게 쓰리라 하였다. (성종실록 1477년 8월26일 5번째 기사) 이날 성종은 현석규를 대사헌으로 임명했다. (성종실록 1477년 8월 26일 7번째 기사) 성종은 3일 뒤인 8월29일에 현석규를 형조판서로, 이숭원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김언신을 사헌부 지평으로 임명했다. (성종실록 1477년 8월29일 5번째 기사) 그런데 9월4일에 사헌부 대사헌 이숭원과 사간원 사간 김계창 등이 현석규의 일에 관하여 상소했다. "생각건대, 주상 전하께서 정신을 가다듬고 다스림을 도모하며 사람을 임용하는 것이 어진 자는 반드시 쓰여지고 공이 없는 자는 나오지 못하였는데, 다만 근일에 도승지 현석규를 쓴 것은 여러 사람의 마음에 만족되지 않아 사론(士論)이 비등하니, 신 등은 실망을 이기지 못합니다. 생각건대, 신 등이 현석규가 아랫사람을 검속(檢束)하지 못하고 동렬(同列)과 분노하여 다투었으므로 체임시키기를 힘껏 청했는데 전하께서는 현석규를 대사헌으로 승진시키시고, 신 등이 또 바꾸기를 청했으나 형조판서를 제수하시었습니다. 대사헌은 종2품이고 판서는 정2품이며 육경(六卿)이니, 이것은 대간(臺諫)이 다투면 전하는 오히려 승진시켜 대간과의 논쟁을 더욱 격렬하게 하고 있습니다. 관직을 임명하는 데에도 승지를 거쳐 참판이 되고 그 다음에 판서가 되는데 도승지로서 바로 판서가 된 자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현석규는 마땅히 죄를 물어야 하는 자인데, 도리어 차서를 뛰어넘는 은혜를 베푸시었으니 이것이 어찌 사람 쓰는 도리이겠습니까? 급히 성명(成命)을 거두시고 공평한 체모를 보이고 의혹을 푸소서." 하지만 성종은 들어주지 않았다. (성종실록 1477년 9월4일 3번째 기사) 다음날인 9월5일에 성종은 경연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사헌부 지평 김언신이 아뢰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간하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물 흐르듯 하시므로 온 나라의 신민이 모두 태평의 기약을 우러러 바랐는데, 오직 현석규의 일에 대하여는 전하께서 들어주지 않으시니, 모두가 실망하고 있습니다. (중략) 현석규가 오래 대간에게 논박 받아 왔는데 전하께서 또 차서를 뛰어넘어 관직을 제수하시었으니 이것은 전하께서 대간의 말에 분노하여 그러하셨을 것입니다. 생각건대 현석규는 음험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사간원에서 질문을 당할 때 현석규가 말하기를, ‘전일에 이세좌는 신이 울며 간하였으므로 죄를 받지 않았습니다.’하였는데, 이것은 대간을 죄주지 않은 것을 제 공이라 하여 자기가 위엄과 복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인 것이니, 이것이 한 가지입니다. 김주가 증여한 물건을 추징하기를 청하여 원망이 주상께 돌아가게 하였으니, 이것이 한 가지입니다. 송익손이 그 집에 와서 청탁할 때에는 곧 아뢰지 않고 나중에 발설하여서 여러 승지(承旨)의 청을 들어준 잘못을 드러냈으니, 이것이 한 가지입니다. 현석규가 평시에 하는 일을 동료가 모두 복종하지 않기 때문에 조식의 일을 여러 승지가 사사로 의논하여 아뢰었는데, 현석규가 눈을 부라리고 팔뚝을 뽐내어, 여러 승지가 모두 자기 말을 듣고 자기 뜻을 어기지 못하게 하려 하였으니, 이것이 한 가지입니다. 간원에서 논박할 때를 당하여는 반성하지 않고 차자(箚子)를 올려 눈물을 흘려가며 말의 근원을 묻도록 청하여 대간의 입을 다물게 하려 하였으니, 이것이 한 가지입니다. 이렇게 한석규는 음험한 자입니다 " 이러자 성종이 전교했다. "그대가 그렇게 말하지마는, 팔뚝을 뽐냈느니 하는 일은 모두 간관이 만든 말이다. 현석규가 김주는 강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은 사(私)를 두둔한 혐의가 있고 또 증여한 물건을 추징하자고 아뢰었지마는, 조식이 무고로 죄를 물은 것은 내가 한 일이고, 현석규의 말로 인한 것이 아니다. 김주가 도망하면 내버려두고 나타나면 추징하는 것은 법으로 마땅히 할 일인데 어찌 현석규가 과실을 엄폐하는 것이라고 말하느냐? 현석규가 여러 승지들이 한한의 청을 들었으리라고 의심하였다고 말하지마는 이는 사헌부도 의심한 일이다. 그대는 현석규가 음험하다고 말하니, 그러면 그를 소인(小人)으로 여기는 것이냐?" 다시 김언신이 아뢰었다. "사람됨이 음험하면서 간사한 소인입니다. 전하께서 이 사람의 간사한 것을 살피지 못하시니, 이는 신이 깊이 근심하는 것입니다. 중국의 덕종· 신종(神宗)은 모두 영명(英明)한 임금이지마는, 덕종이 일찍이 이필(李泌)에게 이르기를 ‘사람들이 노기(盧杞)가 간사하다고 말하는데, 나는 그러한 것을 깨닫지 못하겠다.’ 하니, 이필이 말하기를, ‘이것이 노기가 간사하다는 까닭입니다.’ 하였고, 신종은 왕안석의 간사함을 알지 못하여 마침내 천하의 창생을 그르쳤습니다. 현석규가 이 두 가지를 겸하였는데 전하께서만 알지 못하시니, 이것이 현석규가 참으로 간사하다는 까닭입니다. 현석규의 진퇴에 국가의 안위와 치란(治亂)이 달려 있습니다. 현석규의 소인됨은 다투는 날에 홀연히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바깥사람은 다 아는데 전하만 홀로 알지 못하시니, 이것이 신이 크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노기(盧杞)는 중국 당(唐)나라 덕종(德宗) 때 정승으로 전횡을 일삼아 정사를 문란하게 한 사람이고, 왕안석(1021~1086)은 북송 신종 때 신법 개혁을 했는데, 포용력 없이 뺄셈의 정치를 거듭한 끝에 한때의 동료들을 적으로 만들고 끝내 심복들에게서도 배신당했다. 나중에 주희 등의 성리학파는 1126년에 멸망한 북송의 멸망책임이 왕안석에게 있다고 주장했고, 이후 왕안석은 대체로 “소인”으로 굳어졌다.   이러자 성종이 말했다. "그대는 현석규를 소인이라고 말하느냐?” 김언신이 답했다. "참으로 소인입니다." 임금이 물었다. "어떻게 아느냐?" 김언신이 말했다. "근래의 자취로 보아서 압니다. 맹자가 ‘그 눈동자를 보면, 사람이 어찌 숨기랴?’하였는데, 현석규의 용모를 보면 또한 음험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종이 말했다. "사람을 용모로만 알 수 있느냐? 전조(前朝)의 주열(朱悅)은 얼굴이 추하기가 귀신같으나 마음은 맑기가 물 같았으니, 얼굴을 보고 마음을 아는 것은 성인도 어려운데, 하물며 김언신이겠느냐?" 김언신이 말했다. "노기(盧杞)가 얼굴이 추하기 때문에 곽자의가 보고 그 처자를 피하게 하며 말하기를, ‘노기는 음험한 자이니 처자가 보고 웃으면 내 자손은 씨가 남지 않을 것이다.’ 하였으니, 용모로도 족히 심술의 은미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가 ‘현석규는 소인이고, 내가 현석규에게 농락당하였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이세(二世)가 이사(李斯)에게 속은 것 같은데, 그대가 왜 일찍 말하지 않았느냐?" 김언신이 말했다. "신이 언관이 아니어서 감히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석규가 소인인 것을 좌우의 신하로서 누가 알지 못한다 하겠습니까?" 이러자 성종은 좌우 정승들에게 말했다. "정승들이 현석규가 소인인 것을 일찍이 알면서 말하지 않았으니, 이것도 허물이다." 영사(領事) 심회가 말했다. "김언신은 현석규가 벼슬을 받은 것이 너무 높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홍응이 말했다. "현석규가 소인인 것을 신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자 성종이 단호하게 말했다. "대신이 모두 소인이라고 하지 않으니, 이것은 김언신이 먼저 스스로 임금을 속인 것이다. 정승과 전조(銓曹 : 이조와 병조)에 두루 물어서, 만일 그대 말이 실상이 없다면 그대는 임금을 속인 죄를 받아야 할 것이다." 김언신이 말했다. "신이 마땅히 극형을 받겠습니다." (성종실록 1477년 9월 5일 기사 2번째 기사) 사진 1 돈화문 (창덕궁 정문) 사진 2 진선문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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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명량’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탄 대장선이 왜군과 백병전을 벌인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9월16일자 『난중일기』을 보면 이순신 장군은 왜군과 백병전을 치르지 않았고, 거제현령 안위가 백병전을 치렀다. 『난중일기』를 읽어 보자. 9월16일 맑다 이른 아침에 특별정찰부대가 와서 보고하기를 “수효를 셀 수 없이 많은 적선이 명량으로부터 곧바로 우리가 진치고 있는 곳을 향해 달려옵니다.” 하였다. 곧 모든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갔더니 적선 130여척이 우리 배들을 둘러쌌다. 여러 장수들은 적은 군사로 많은 적과 싸우는 형세임을 알고 모두 도망칠 꾀만 내고 있었다.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벌써 2마장(4-6KM) 밖에 나가 있었다. 나는 노를 빨리 저어 앞으로 나아가며 지자(地字), 현자(玄字) 등 각종 총통을 마구 쏘았다. 탄환이 폭풍우같이 날아갔다. 군관들도 배 위에 총총히 들어서서 빗발처럼 화살을 쏘아댔다. 그러자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쳐들어왔다 물러갔다 하였다. 그러나 우리 배가 여러 겹으로 둘러싸여 형세가 어찌 될지 알 수가 없어, 배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쳐다보며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조용히 타이르기를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 맞혀라”하였다. 여러 장수의 배를 돌아보니 이미 1마장 정도 물러났고,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멀리 떨어져 가물가물하였다. (중략) 호각을 불어 중군에게 기를 세워 군령을 내리도록 하고 또 초요기를 세웠더니, 중군장인 미조항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 가까이 왔으며, 거제현령 안위의 배가 그보다 먼저 왔다. 그리하여 두 배가 적진을 향해 앞서 나가는데, 적장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3척에 지시하자 일시에 안위의 배에 개미떼처럼 달라붙어 서로 먼저 올라가려고 하였다. 안위의 격군 7∼8명이 물에 뛰어들어 헤엄을 치니 거의 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안위와 그 배에 탄 사람들이 죽을힘을 다해서 몽둥이를 들거나 긴 창을 잡거나 또는 돌멩이를 가지고 마구 후려쳤다. 배위의 사람들이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자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아가서 빗발치듯 마구 쏘아댔다. 적선 세 척이 거의 뒤집혔을 때 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대장 정응두의 배가 뒤쫓아 와서 서로 힘을 합쳐서 왜적 한 놈도 살아남지 못하게 하였다. (중략) 이렇듯 안위의 배는 왜선 3척에 둘러싸여 백병전을 했다. 이윽고 이순신을 비롯한 조선 함대는 안위의 배를 구하였고 왜선 3척을 격침시켰다. 적선 31척을 쳐부수자 적선들은 후퇴하여 다시는 가까이 오지 못했다. 우리 수군이 싸움하던 바다에 정박하고 싶었지만 물살이 험하고 바람도 역풍으로 불어 형세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당사도로 옮겨 밤을 지냈다. 이번 일은 참으로 천행(天幸)이었다. 한편 영화 ‘명량’에는 경상우수사 배설이 명량해전 직전에 거북선을 불태운 것으로 나온다. 이는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지은 ‘이충무공 행록’에 근거한 듯 보인다. “8월18일 회령포에 이르니 전선이라고는 단지 10척 뿐이었다. 공은 전라우수사 김억추를 불러서 병선을 거두어 모으게 하고, 또 여러 장수들에게 분부하여 거북선 모양으로 꾸며서 군사의 위세를 돋우도록 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이순신의 조카 이분은 명량해전을 전후하여 이순신 휘하에 종군한 사실이 없다. 따라서 이분의 글은 신뢰성이 떨어진다. 또한 9월8일자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은 김억추를 불신했다. 9월8일 여러 장수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우수사 김억추는 겨우 만호에만 적합하고 장수를 맡길 수 없는데, 좌의정 김응남이 서로 친밀한 사이라고 해서 함부로 임명하여 보냈다. 더욱이나 거북선을 8월18일 이후 한 달 안에 만드는 일이 가능했을지도 의문이다. 이순신은 왜군들이 추격해오자 진영을 수차례 옮겨서 장수들은 겁에 질려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거북선이 건조될 수 있었을까? 또한 거북선을 만들려면 필요한 기술자와 자재와 장비가 필요한데 이 조달이 가능했을까?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마디로 명량해전 때 거북선은 건조되지 않았다. 1) 사진 1 명량해협 , 진도 쪽에 세워진 이순신 장군 동상 1) 그런데 온양온천역 광장에 세워진 ‘이충무공 사적비’에는 거북선 2척이 명량해전에 참전했다고 적혀 있다. (비문은 1951년에 정인보가 지음)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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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5-27 / 뉴스공유일 : 2019-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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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1 화요일 맑아서 더 욕심을 낸다 이미 카톡으로 3박 5일의 일정표를 공유했으므로 당연히 ‘인천공항에서 만나겠지’라며 바쁜 일상을 소화하다가 어제 20일 오후에 김덕진교수의 뒤 늦은 연락으로 순간 딩황하며 7시 30분 고속버스 예매를 주문한다. 선물용으로 타월을 두 박스로 나눠 챙겨 고속터미널로 나간다. 금호하이빌에 주차하고 낑낑대며 흘리고 줏고를 반복하며나가 고속버스에 오른다. 김덕진교수와 만나 뒷자리로 잡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또 다른 일행인 명촉 호남일보편집국장이 1시간여 늦게 올라오는 걸 확인한다. 다행히 이른 출발로 여유있게 도착해 타월을 통관 절차를 거쳐 보내고 환전도 하며 여유있게 김덕진교수와 오찬을 즐긴다. 국제선 출발플랫폼인 3층으로 다시 올라와 무던히 늦게 도착한 명국장을 배려하고 합류한다. 불과 수개월만에 훨씬 더 간편해진 수속절차에 편리함을 느끼며 비교적 면세점으로 일찍 들어가 자리를 잡고 여유로움을 즐기다. 비행기의 편리함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마치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일본으로 도착한다. 난생처음 일본 섬나라 사가현에 있는 다가마츠공항으로 들어가 ‘PEACE LOVE in 에이메’ 사토회장과 강용희 일행을 만나 매우 친절하고 정감넘치는 영접속에 마츠야마로 편리하게 이동해 간다. 차안에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상대를 배려하는 담소에 친절함을 느끼며 또 눈앞에 펼쳐지는 당면현안을 갖고 깊이있게 다루며 이어간다. 일본은 사시미 즉 생선회와 소바의 나라이다. 중간 휴게소를 거쳐 도착한 어느 한적한 마츠야마 유명식당에서 마른메밀로 일본식 메밀을 즐기고 혼마라디오방송국이 있는 에이메현의 마츠야마 ‘PEACE LOVE in 에이메’ 사무실 3층에서 여러 재일교포 여성들과 만나 현지이야기와 교포들의 숨은 이야기로 담소를 나눈다. 준비한 다양하고 커다란 플랑, 현수막에 모두 놀라고 그런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만들어 특별한 ‘PEACE LOVE in 에이메’ 증정이라고 인쇄해 가져간 타월까지 기념촬영해 여유있게 전달하고 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에서 1차 탐방을 한 목적과 내용을 라디오 방송으로 두차례나 내 보내며 사토회장의 친절한 배려로 첫 날 숙소인 다이와 로이넷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격정적으로 마구 흘러간 시간을 과거로 보내면서 묘한 분위기에 휩싸여 다가마츠 거리로 나와 나마맥주에 명국장이 인천공항에서 세금감면 혜택으로 비교적 저렴하게 구입한 40여도의 산수유 술을 폭탄으로 해 함께 많이 취해 간다. 이렇게 이국의 정취에 취해가며 3차를 호텔에서 필림이 끊어지도록 거듭 술로 채우면서 내장의 고단백질은 마구 비우다.   2019-05-22 수요일 맑음 3시간이나 수면을 취했을까?? 마츠야마공항에서 6시 30분 국내선비행기를 타려고 5시에 모닝콜로 일어나 누가 지시하는 것도 아닌데 의무적으로 움직여 갔다. 정신이 다 혼미해 경황이 없을 정도로 잦은 실수가 연발이 되고 그러면서도 비행기를 결코 놓지지 않으려고 긴장을 풀지 못하고서 억지로 동경 하네다공항에 도착한다. 사실 1차 선발대로 5~7명이 움직이려고 계획을 세웠으나 자금력의 한계로 3명이서 비장함으로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이윽고 1시간 20여분이 조금 더 지나고 하네다공항에 도착해 가이더 남 혁이 나와 있었다. 이 친구는 초면임에도 눈치가 빠르고 얼굴에서 풍기는 경력이 풍부해 저윽이 안심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묻지도 않았는데 일본에 대한 언저리 설명과 공항근처에 대해 소상히 설명을 해 줘 2030대 시절 요코하마에 대한 애수도 잠시 눈치챌 수 있었다. 출발전부터 따가운 시선과 스스로 채찍질하듯 마음이 무거워선지 일본국립공문서관 내각문고에 접근하는데 까지 중압감은 시나브로 커다란 바위가 억누르는듯해 왔다. 그러나 생리적 현상을 어쩔 수 없는 것!!! 일부에서 아침을 못해 우선 컵라면이라도 먹어애 한다고 해 주변의 식당을 뒤지다가 11시에야 문을 연다는 현지분위기로편의점으로 가 주섬주섬 간단한 요깃거리를 챙겨 봉고차안에서 노숙자처럼 궁색하게 아점을 급히 떼우고 주차장의 한계로 택시를 이용해 내각문고에 갔는데 또 하나의 고비로 절차가 매우 까다롭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언어를 합치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하다가 도서관 남직원이 강항이라는 한자어를 갖고 눈치 빠르게 수은강항과 후지와라 세이카 관련 책자들을 갖고 나오기 시작한다. 이윽고 강항휘초가 마구 쏟아져 453년전의 선조를 맞이하는 감격으로 보이지 않는 눈물이 앞을 가리고 뜨거운 감동의 격정감에 온 몸에 전율로 타고 흐른다. 그렇게 전율속에서 신들린 듯 마구 마구 사진을 찍어 대고 김덕진교수는 부족한 자료를 챙긴다. 강항휘초 수진본하면 과연 우리 국민 몇 명이나 원본을 접해 봤을까??? 그런 생각에 더 벅찬 흥분을 감출 수 없다. 남혁가이더도 그러한 눈치에 매의 눈초리로 더 다가오면서 이러한 우리 위대한 인물이 있음에 본능으로 동참하면서 연신 셔터를 누르면서 그 어떤 각오를 느끼는 듯 했다. 흥분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이어서 동경박물관으로 도착해 왔다. 동경박물관에서는 흥분속에서 그냥 진귀한 관람물만 보았다. 물론 강항과의 연관성을 그려보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렇게 당시 왜인들이 포로신분인 강항에게 오늘날 역사적인 관점에서 호락호락하지 않았을 게다. 나리타공항으로 가다가 일본의 유명한 동편의 절을 관람한다. 제법 풍경과 여러 일본의 유물이 눈에 띄었으나 왜국의 불교가 불교 같지 않고 신자에게 오로지 돈을 갈취하는 듯한 여러 신도들의 이름들의 벽칠로 결국은 전시와 출세, 건강, 결혼, 부귀영화로 쩔어 들어가는 모습에서 가이더의 열정적인 설명에도 경치의 아름다움을 뒤로하고 나리타공항에서 밤늦게 교토의 서쪽인 관서 간사이 공항에 도착한다. 이번 탐방이 특이한건 시간절약과 금전의 절약이 가장 눈에 띈다.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금전을 줄인다는 계획성과 놀러 가는게 아니기 ‹š문에 조금이라도 1차 탐방단이 탐방 중에 불편을 초래하더라도 강행군에 중점을 맞췄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칸사이공항에서는 다른 가이더가 연락이 되어 미리 나와 있었다. 그런데 왠지 지금까지 우리를 안내했던 가이더와 자연스럽게 비교가 되며 1시간이상을 달려 오사카역 근처의 신한큐호텔로 입실을 하게 된다. 약간은 무책임한 가이더의 행동에 의아해 하며 늦은 도착으로 피곤해 오히려 불똥이 카운터 여직원에게 내뱉어지듯 쏟아지고 말았으나 어제보다 좋은 객실분위기에 자연스럽게 하루의 긴여정의 피로까지 녹아들어가고 있다. 2019-05-23 목요일 찌는듯한 한여름날씨  와이파이가 불안정하여 3시까지 노트북으로 일정을 정리하느라 무척 힘들었고 불과 3시간여 수면으로 피곤함이 남아 있으나 자신과의 많은 싸움과 숙제로 안해 사치스럽게 피로감을 한가롭게 느끼고 가질 수 없었다. 다만 하루정도 음주를 하지 않아 좋다고 그나마 서로를 위안하면서 강행군에 바삐 발을 옮긴다. 국제문화연구센터도서관의 엄격한 통제로 명함과 출입증을 발급받고서야 강항선생의 간양록과 후지와라 세이카의 문집을 접한다. 가벼운 흥분감까지 느끼며 사진을 찍고 자료를 챙겼다. 아차싶을 정도로 준비해간 플랑카드를 제대로 촬영도 못함을 처음 느낀다. 항상 늦었다고 할 때가 ᄈᆞ르다고 위안삼으면서 지금부터 열심히 플랑카드 사진에 집착한다. 그게 동지사대학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영광지역의 대표 축제인 상사화축제와 국제학술세미나 1차 방문을 주변에 모여든 인파에게 강조하면서 사진을 찍고 윤동주와 정지용 시인을 수십년이 지나 만난다. 숙연해 지고 분위기가 차분해 지는데 지금은 그렇게 사치스럴수 없다.  곧 바로 이비총과 풍신수길의 신사를 방문하면서 죽어서 까지 조선의 양민들을 앞에 두고 있음에 치를 떤다. 다만 강항선생과 연결고리를 가질 수 있어 위안이 되는 건 적어도 강항만이 풍신수길에게 필체와 더불어 큰소리로 호령했다는 간양록의 한구절 글귀를 생각하며 이비총의 주인들에게 영면하시길 빌었다. 어제와 차별되는 가이더의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참으로 개탄스러움을 일행들이 공유하면서도 에도박물관의 휴관으로 그 옆 불교박물관을 세밀하게 스케치해 갔다. 오늘은 김덕진교수의 안내가 덧보인다. 강항선생이 적송광통의 집에서 후지와라세이카를 처음 만난 교토의 복견성 즉 후시미성에 오른다. 감회가 새로울 정도로 벅차오른다. 나도 모르게 플랑카드를 내 여러차례 사진촬영을 시도하고 또 독촉하듯 원한다. 우리나라에서 오늘따라 여러 전화가 오는데 바로전화의 덕택에 무한한 무료전화를 즐긴다. 특히 강항선생의 유명 작품 ‘난방’이 시모노새끼를 지나 큐슈 한일박물관에 있음을 알고서 오늘 가보지 못함을 안타까워 한다. 인간이라는게 참으로 간사하다. 막상 진해산미의 먹을 것을 생각하면 금새 구토하듯한 더러움도 금새 잊어 버리듯 단장의 배고픔으로 오사카역 근처에서 혼마구로 참치쇼를 한다는 광고와 삐끼들의 잔치에 저절로 따라들어가 그런 분위기에 녹아들어 즐기면서 술을 3차까지 이어가는데 술이 우리 3명을 삼킬듯 또 다시 호텔에서까지 우리민족성에 대한 거친 대화로 까지 이어가면서 우리 역사와 씨족문화의 단절된 역사를 비토하기에 이르른다.   2019-05-24 금요일 맑음 오후 9:00 한여름 날씨가 어제에 이어 오늘도 이어진다. 오늘은 8시에 교토로 가는데도 차안이 에어콘의 약함에 짜증이 절로 난다.료코쿠, 용곡대학교 스타박스 커피숍으로 이동해 허수미교수를 만났는데 잔뜩 움추려 들어 있어 무슨 말을 어떻게 전하기가 무섭고 어려울 정도였다. 겨우 겨우 눈치를 보면서 국제학술세미나 현장분위기를 보고 조용조용 우리나라의 위대한 인물에 대한 국제학술세미나를 배려해주기를 기대해 볼 뿐이다.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오사카외국어대학교 부속 도서관을 찾아 나섰지만 가이더의 고집과 무던함으로 3시간여 헤매다니다가 차안에서 더위와 씨름만 했다. 이번에는 겨우 도착했는데 점심시간에 걸리고 만다. 값싼 학생식당에서 우동에다가 짧은 추가 음식을 채워 요기를 떼우고 도서관 관계자를 만나는데 보안이 심각할 정도로 엄습해 온다. 자료가 없거나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 그냥 나와 오사카성에 오르기로 한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다가 덕천가강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상징하는 가케무사가 놓인 자리에서 명국장과 사진촬영도 했다. 더운 날씨에 지쳐 쉽게 내려오면서 오사카성의 견고함에 또 한 번 전율을 느낀다. 그때였다. 갑자기 가이더가 육촌 형님의 아들인 조카를 말하며 고교와 대학 친구라 한다. 어쩔 것인가?? 우리민족이 인 친척과 연고에 약하다. 모든 게 용서가 된다는 게 자뭇 표현도 못하게 실소가 겹친다. 일행이 조용해진게 피곤했다는 게다. 1시간이상을 달려 간사이공항에 도착하고 공항안에서 플랑 사진을 또 펼치게 하고 일행들과 작별을 하고 내일까지 여정을 홀로 삭인다. 역시 가이더는 더딘 머리로 설명이 어설프고 어쩔수 없이 두 세 번 물어서 퍼스트호텔을 두 정거장을 거쳐 찾아 들어온다. 밀린 작업이 너무 많다. 10시가 넘어가는데도 할일을 체 정리를 못하고 안절부절만 하고 있는 중이다. 이 상황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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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에서 개최된 ‘봄 소풍’이란 기발한 행사가 아직도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고 있다. ‘봄 소풍’은 문화의전당에서 기획한 ‘신나는 가족 나들이’ 행사다. 이 행사는 청보리밭축제 기간 중 매주 토요일 늦은 오후와 저녁 시간대 고창읍성 잔디광장에서 열였다. 이곳에서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여러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특히 ‘전통국악’등 7개 체험과 ‘인형 아동극’등 8개 공연, ‘말모이’등 3개 영화가 많은 이들에게 즐거움을 줬다. 이 프로그램들 속에는 소소한 변화들이 곳곳에 있었다. 또한 한 사람 한 사람까지도 모두가 주인공으로 참여하여 즐거움을 쌓아갈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가 담겨졌다. 봄 소풍이 준 많은 즐거움에 가슴이 뛰었던 이들을 보면 아래와 같다. 첫째, 지역주민이 즐겼다. 일찍이 공자는 근자열 원자래(近者悅 遠者來)라 하였다. 행사를 개최할 때도 마찬가지로 멀리 있는 사람를 찾아오게 하는 비결은 먼저 지역주민이 즐거워 뛰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릇 주인이 즐거워야 손님도 즐거운 법이다. 실제 총 3번에 걸쳐 진행된 ‘봄 소풍’ 체험객 명단을 보면 많은 지역주민들이 참여하여 즐겼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각 체험 부스 운영 지역주민도 상상외의 호응에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둘째, 타 지역주민도 즐겼다. 2회차 토요일에는 인근 전주와 광주 등 1~2시간 거리 내에 사는 주민들이 다수 공연 등을 즐겼다. 특히 마지막 행사때는 서울과 부산, 제주 등 먼 거리에 거주하는 가족들도 체험놀이 등에 참여하였다. 실제 전주 서신동에 사는 김정자씨는 “아이들과 함께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가 행사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고창으로 가자고 남편을 졸랐는데 가족 모두가 즐거워해 여기 오길 정말 잘한 것 같다”라고 말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셋째, 우리 모두가 즐겼다. 젊은 부부와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노는 모습을 보는 어르신들의 눈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하나되는 어울림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직접 참여하지 않고 멀리서 이번 행사를 지켜보았던 지역주민과 관광객도 젊음과 생동감을 느끼고 즐겼다. ‘첫 술에 배부르랴’라는 말처럼 올 첫 진행한 행사를 두고 완벽에 가까운 즐거움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진정한 즐거움은 일회성을 벗어나 매년 지속적으로 보완 개최함으로써 전국에 사는 사람들에게 참여 예측 가능성과 설렘을 줄 수 있을 때부터 이미 시작되어진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내용들을 고려할 때 이번 ‘봄 소풍’은 많은 이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주는데 성공한 행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고창읍성 매표소 집계에 의하면 올해 어린이날 전후 연휴기간 동안 지난해 같은기간 대비 하루 평균 1.8배의 타 지역 주민이 행사장과 인근을 방문했다. 전국 지자체 대부분이 고령화로 생동감을 잃어가고 있는 이 때에 즐거움이란 잠재 능력을 지닌 ‘봄 소풍’이 가보고 싶고 살고 싶은 우리 고장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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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칼럼

1477년 8월19일에 성종은 경연에 나아갔다. 강하기를 마치자, 사헌부 장령 이명숭이 현석규만 체임되지 않은 것은 옳지 못하다고 아뢰었다. 성종은 "현석규가 아랫사람을 거느리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랫사람이 현석규를 경시한 것이다. 현석규를 체임해야 하겠는가?"고 말했다. 4일이 지난 8월23일에 유자광이 현석규·김주 등의 일에 관해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상소의 핵심을 읽어보자. "신이 듣건대, 장리(贓吏) 김주는 일에 간여하여 뇌물을 주고받은 사람이 무려 백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김주가 나타났으면 진실로 마땅히 정상을 조사해서 죄를 주어야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명령하시 어서 조사가 반이나 진행되었는데, 어찌하여 왕실 인척과 대신에게 미치면 명령을 거두시고 전부 석방하여 죄를 다스리지 않으십니까? 또한 근일에 승지들이 동렬(同列)을 능욕하여 예양(禮讓)을 크게 무너뜨려서, 전하께서 중화(中和)로 다스림에 누(累)를 끼쳤습니다. 도승지 현석규는 홍귀달이 자기와 의논하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아뢴 것 때문에, 노여움이 극(極)해서 팔뚝을 걷어붙이고 홍귀달의 이름을 불러 욕하였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홍귀달이 자기 마음대로 아뢴 것은 죄가 있지만, 현석규가 홍귀달의 이름을 들먹이고 조정을 능욕한 죄 또한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를 다스리지 않으면, 정승이 된 자가 찬성 이하의 이름을 불러서 능욕하고, 육경이 된 자가 참판 이하의 이름을 불러서 능욕할 것이고, 사방에서 이를 보고 본받을 듯합니다. 신의 생각은 홍귀달이 마음대로 아뢴 죄는 가볍고, 현석규가 예양을 조정에서 무너뜨린 죄는 중하다고 생각됩니다. 대간들이 이것을 말하는데도, 전하께서 듣지 않으시니 신이 매우 의혹스럽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뒤로 언로를 크게 열어서 간(諫)함을 받아들이기를 너그럽게 하시어 말이 합당하지 못하다 하여 그 말의 근원을 찾아 간언을 싫어한 뜻을 보이셨다는 말을 신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현석규의 일에 대해서만 간관에게 말을 들은 연유를 하문(下問)하십니까? 전하께서 간관에게 말을 들은 연유를 물으시는 것은, 현석규에게 사사로운 정이 지극하기 때문이십니다. 언관이 자기의 일을 탄핵하면, 현석규는 진실로 대죄(待罪)하고 전하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이 옳은데, 간관(諫官)이 말이 있으면 현석규도 말을 하고 서로가 다투니 이것은 현석규가 전하 앞에서 간관과 다투어 은연히 저지하고자 한 것입니다. 현석규도 역시 스스로 말하기를, ‘노여움이 극하여 입에서 거품이 나왔고, 더위로 인하여 소매를 걷어 올렸는데, 홍귀달 이름을 불렀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현석규를 예양을 무너뜨리지 않았다고 하시겠습니까? 조정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고 하시겠습니까? 죄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현석규는 예(禮)를 무너뜨린 것만이 아니고, 전하 앞에서 무례하게 간관을 은근히 억압하고, 조종조(祖宗朝)로부터 전수(傳守)되는 상법(常法)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현석규가 홍귀달에게 예양으로써 책망하지 아니하고 갑자기 분노하고 화를 내어 무례하게 책망하였으니, 현석규는 진실로 군자(君子)가 아닌 것이 명백합니다. 그는 조금은 재주가 있으나 진실로 소인(小人)보다 더욱 심한 자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무엇에 취하셔서 현석규를 버리지 못하십니까?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임사홍과 손순효와 한한 등이 현석규의 일을 서로 전해 말한 죄는 다스리고, 현석규가 범한 죄는 다스리지 않으십니까? 더구나 사간 박효원과 참의 노공필은 모두 현석규의 일을 서로 전해 말한 자들인데, 지금 이들은 모두 강등(降等)해 제수하고, 전하께서 현석규를 더욱 후하게 대우하시고 더욱 친밀하게 하시니, 신은 아마도 이 뒤로는 현석규와 같이 가깝고 친밀한 신하가 비록 크게 불측(不測)하고 나라를 그르치는 일이 있더라도 사람들이 경솔히 말하지 못하고, 대간은 혀를 놀리지 아니하고 서로 경계할 것이니, 임금의 총명을 가리는 화(禍)가 이로부터 생길 듯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현석규의 죄와 김주의 일을 밝게 다스리시어서, 조정의 무례한 풍습을 막으시고 조정의 염치와 절의의 행습(行習)을 권려하시며, 언로를 여시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신은 비록 언관의 반열(班列)에는 있지 않으나, 재상에 대죄(待罪)한 지 누조(累朝)가 됩니다. 대간이 하는 말을 전하께서 윤허하지 않으시고, 조정의 사의(事宜)가 예에 합당하지 않으면, 재상도 말하는 것이 또한 그 직분입니다. 따라서 신은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 만 번 죽기를 무릅쓰고 아룁니다.” (성종실록 1477년 8월23일 3번째 기사) 다음날인 8월24일에 성종은 유자광을 불러서 전교하였다. "내가 경의 상소를 보고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경은 여러 사람들 가운데에서 특출하여 마음속에 품은바가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나, 상소문 가운데에 미진(未盡)한 것이 있다. ‘나를 현석규를 비호한다.’고 말하면, 현석규와 임사홍은 모두 종친(宗親)의 사위이고, 한한은 나에게 4촌인데, 어찌 유독 현석규만 비호하겠는가? 현석규의 실수는 분노한 데에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할 만해서 노한 것이니 이것이 죄이겠느냐? 경은 또 노공필과 박효원을 강등하여 제수하였다고 하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한한의 서열이 노공필보다 먼저이고, 임사홍이 대사간이 되었으니 전일에 탄핵한 자는 같이 있기가 어렵기 때문에 바꾸어 임용한 것이다. 그리고 김주의 일은 세 정승이 이미 승정원에서 변명하였기 때문에 추핵하지 말게 한 것이다. 경은 이를 알고서 말한 것이냐, 알지 못하고서 말한 것이냐?" 성종은 유자광에게 매우 불쾌했다.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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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신동이란 명성을 떨친 가가은(賈嘉隱)은 이곳저곳을 돌면서 학문을 닦고 경험을 열심히 쌓아갔다. 그에 대한 소문이 점차 널리 퍼져 나가자 조정의 신하들이 그를 우롱(愚弄)하기 위해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차림도 허술하고 수염만 긴 가가은은 몹시 초라한 행색(行色)이었다. 신하들은 그가 알아야 얼마나 알겠느냐 하며 그를 몹시 얕잡아보았다. 홰나무에 등을 기대고 서 있던 신하 서적(徐績)이 눈살을 찌푸리며 넌지시 물었다. '내가 기대고 있는 나무는 무슨 나무요?' '소나무죠.' 가가은은 딴전을 피웠다. 순간 서적의 얼굴에 비웃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이 나무는 소나무가 아니라 홰나무이니라' 사실 홰나무였다. '공(公)이 목(木)에 기대어 있으니 소나무 송(松)자를 이루었잖아요? 그러니 소나무이지요.' 서적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부평초(浮萍草)처럼 정처 없이 떠도는 무명의 백성에게 내로라하는 신하들이 수모(受侮)를 당한다는 것은 말도 안될 일이었다. 무기(無忌)가 신하들의 체면이라도 건져보려는 듯 성큼 나섰다. '내가 기대고 있는 나무는 무슨 나무요?' '홰나무요.' 가가은이 대답했다. '그게 정답이지. 이젠 달리 둘러댈 수가 없는 모양이구먼? 흐흐흐.' 무기는 흐물흐물 웃었다. 가가은은 기침을 크게 하고 수염을 쓰윽 문지른 후 의미 있게 말했다. '나무 목(木)에 귀신(鬼)이 붙었으니 홰나무지요.' '엉?' 그 순간 무기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신하들은 열이 오를 데로 올라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에게 무참히 당한 것을 만회해보기 위해 이번에는 사슴과 노루를 끌고 왔다. 신하가 물었다. 신하의 어투는 매우 격했다. '어느 것이 사슴이고 어느 것이 노루냐? 못 알아맞히면 곤장 50대다!' 가가은은 사슴과 노루를 구별할 줄을 몰랐다. 그래도 그는 짐짓 자세히 뜯어보는 척한 후 이렇게 대답했다. '노루 옆에 있는 것이 사슴이고 사슴 옆에 있는 것이 노루요' 라고 말한 가가은은 큰 기침을 하고 수염을 쓰다듬으며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신하들은 입을 헤 벌린 채 멀어져 가는 가가은의 뒷모습ㅁ 멀그러니 쳐다보았다. 2019. 5. 22 강원구 행정학박사. 한중문화교류회장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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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칼럼

2014년 7월에 개봉한 영화 ‘명량 : 회오리 바다’는 1,760만 명이 본 역대 흥행 1위였다. 고뇌하는 이순신은 대중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런데 ‘명량’은 사실과 허구가 혼재된 팩션(팩트+픽션)이다. 더구나 김한민 감독은 배설(1551∼1599) 집안으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여 곤욕을 치렀다. 영화에서 배설은 명량해전 직전 이순신 암살을 기도하고 거북선을 불태운 뒤 도망치다가 안위가 쏜 화살에 숨진 인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1597년 7월16일 칠천량 해전에서 판옥선 10여척을 이끌고 한산도로 가서 군량을 모두 불태우고, 8월18일에 회령포에서 이순신에게 전선을 인계했다.   배설은 극도의 두려움에 시달리다가 8월30일에 병세가 위중하여 몸조리를 해야겠다고 병가를 청하여 이순신의 허락을 받고 전라우수영에서 육지로 올랐는데 9월2일에 도망쳤다. (이순신의 『난중일기』 참조) 이후 배설은 도원수 권율에게 선산(善山)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1599년 3월6일에 참수되었다. (선조실록 1599년 3월6일) 한편 명량해전에서 논란이 되는 부분은 조선과 일본의 전선(戰船)이다. ‘명량’ 영화는 “330척에 맞선 12척의 배. 역사를 바꾼 위대한 전쟁이 시작된다.”고 홍보했다. 그런데 학계의 정설은 ‘13척 vs 133척’이다. 영화 ‘명량’처럼 조선수군이 12척의 배로 싸웠다는 근거는 이순신이 1597년 8월15일에 보성 열선루에서 선조에게 올린 장계이다. 1)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나이다. 죽을힘을 다하여 항거해 싸우면 적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저의 전선은 적지만 보잘 것 없는 신이 죽지 않은 한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학계는 왜 13척이 되었나? 그것은 이순신의 장계 이후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타고 온 배 1척이 추가되었다고 추정한다. 한편 배설이 가져온 배는 10척인데 폐선을 수리하여 12척이 되었고, 김억추의 배가 추가되어 13척이라는 주장도 있다. 다음은 일본의 전선이다. 20세기 초에 나온 일본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명량해전에 참가한 일본 전선은 300여척이다. 또한 『이충무공 전서』의 기본이 되는 『충무공 가승』에는 피난민들이 산 위에 올라 헤아린 일본 전선 수는 300여척이고 해전에 참전한 배는 133척이라고 적고 있다. 이는 명량해협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명량은 해남과 진도 사이의 좁은 해협으로 ‘울돌목’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물살이 빠르고 수심이 얕아 항해가 쉽지 않은 협수로(狹水路)였다.   따라서 해남 어란포에 집결한 왜군의 전선은 330여척이었는데, 200여척의 대형전선 아타케부네는 명량에서 전투하기가 어려워 해협 밖에 대기했고 소형선 세키부네로 구성된 133척의 일본 함대가 명량에서 싸운 것이다. 왜군이 소형선으로 싸웠다는 것은 이항복이 선조에게 아뢴 말에도 나온다. "정유년에 명량에 왜선이 바다를 뒤덮어 올 때 안위가 판옥선을 띄워 해전에 임했지만 적들이 이 배를 깨뜨리지 못했는데, 아마도 적선이 작았기 때문에 쉽게 대적할 수 있었던 탓인가 합니다." (선조실록 1600년 6월 15일) 이럼에도 불구하고 10척 또는 12척의 배로 왜선 300척, 330척, 500척과 싸웠다는 기록이 여러 군데 나온다. 1686년(숙종 14)에 이민서가 지은 통제사충무이공명량대첩비(統制使忠武李公鳴梁大捷碑)’에는 10척의 배로 5백 척의 왜군을 무찔렀다고 적혀있고, 1951년에 정인보가 지은 온양온천역 광장의 ‘이충무공 사적비’에는 12척의 배로 330척의 왜군과 싸웠다고 되어 있다. 1956년에 이은상이 지은 ‘진도벽파진 전첩비’에도 12척의 배로 3백 척의 왜군과 싸웠다고 적혀있다. 2) 이는 이순신의 승리를 부풀리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하다고 생각된다. 사진 명량해협 1) 8월15일 보성 열선루에서 이순신은 선전관 박천봉을 통해 선조의 유지를 받았다. 8월7일에 작성된 것이었는데 “수군의 전력이 너무 약하니 권율의 육군과 합류해 전쟁에 임하라”는 것이었다. 사실상 수군폐지 명령이었다. 2) 한편 이순신의 1597년 9월16일자 『난중일기』에는 왜선이 130여척으로, 이긍익이 1776년에 지은 『연려실기술』에는 5,6백 척으로 적혀있다.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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