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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명(王陽明)은 명(明)나라 사람으로 절강성 여요(餘姚)사람이다. 그가 일으킨 학문을 양명학(陽明學)이라 한다. 왕양명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투옥된 어사 대선을 구출하는 일에 발 벗고 나섰다가 환관 유근(劉瑾)의 미움을 샀다. 유근은 포악한 인물이었는데, 그는 권력을 남용하여 제멋대로 보복행위를 감행했다. 그는 여러 신하들 앞에서 왕양명에게 곤장을 맞는 벌을 안겨 주고 이렇게 선포했다.   '오늘 왕양명의 관직을 빼앗고 그를 강남으로 추방한다.' 왕양명에게는 벌건 대낮에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분노로 굳어져 있는 유근(劉瑾)의 얼굴에서 왕양명은 심상찮은 기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왕양명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선선히 관복을 벗고 백성의 옷차림으로 바꾸어 입은 후 조정을 빠져나왔다. 그는 재빨리 강가로 달려가 '굴원(屈原)1)을 추모하여'라는 시를 썼다. 그리고 나서 겉옷과 신발을 강가에 벗어 놓고 그 옆에 시를 쓴 종이를 돌멩이로 눌러 놓았다. 그는 시에 세상을 저주하고 자신이 물에 빠져 자결함을 고백해 놓은 후 강을 건너갔다. 왕양명이 막 강을 건너 숲 속으로 들어서자 유근이 파견한 병졸들이 북쪽 강기슭에 들이닥쳤다. 사방을 수색해보던 병졸들은 강가에서 왕양명의 옷과 시를 발견했다. '흥! 벌써 자살했군 그래!' 왕양명의 유물과 시는 즉시 유근의 손에 전해졌다. 그때까지도 유근은 분노가 사라지지 않은 듯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이었으나, 시를 읽어본 유근이 언제 화를 냈던가 싶을 정도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잘 죽었어! 잘 죽었지!' 그 동안 왕양명은 무사히 강을 건너 한적한 산골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실은 왕양명은 유근이 사람을 파견하여 뒤쫓아 올 줄을 미리 예견하고 유근을 속여 넘겼던 것이다. 왕양명의 묘책은 포숙아(鮑叔牙)의 계책과 같은 것이었다. 2019. 5. 6 강원구 행정학박사. 한중문화교류회장 <편집자주> 1) 굴원(屈原 B.C 340-278)  초(楚)나라 사람. 왕족 출신인 굴원은 뛰어난 재능으로 20대에 임금의 총애를 받았으나, 그의 재주를 시기하는 사람에 의해 모함을 받고 추방을 당함. 그 후 초나라는 진나라에 패하고 굴원은 돌아갔으나 다시 쫓겨난다(49세). 굴원은 상강 기슭으로 오르 내리며 정치적 향수와 좌절 속에 유랑 10년의 세월을 보내고 돌 을 품은 채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62세의 생을 마감. 중국 최고의 비극적 시인으로 평가 한다.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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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5-04 / 뉴스공유일 : 2019-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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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면서> 2019년 6월 19일 일본 교토 용곡(료코쿠)대학교 세미나실에서 수은 강항선생국제학술세미나를 개최한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 9월 1일에 방영한 MBC TV 드라마 「간양록」 과 KBS에서 2002년 3월 6일(토)방영했던(KBS 역사스페셜)[유인촌 진행 - 역사스페셜]-149회-‘임란 포로체험기 간양록, 선비 강항은 일본에 무엇을 남겼나’로 수은 강항이 1597년 정유재란 당시 포로로 피로(被虜)되어 참혹한 상황에서도 의연(毅然)하게 왜국에 유교를 전파한 업적에 비해 궁색(窮色)하나마 그렇게 조금씩 알려져 왔다. 본 지에서 수은강항선생의 특집을 다루게 된 배경은 위의 두 가지 사실에서 결정했다. 2017년 5월 31일은 수은 강항선생(탄신일 음력 1567년 5월 17일)의 탄신 450주년을 맞이하였고 올해 2019년은 탄신 453주년을 맞이해 일본 에이메현 오즈시 수은강항선생일본연구회(회장 무라까미 쓰네오)에서는 선생의 위령제(慰靈祭)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도 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영광내산서원보존회 중심으로 2000년대 초반에 비교적 활발히 강항문화재까지 연계해 활발하게 일본 에이메현 오즈시와 교류 등으로 진행되다가 갑자기 양국의 시군 교류까지 중단되고 말았다. 일례(一例)로 2001년 3월 6일 2박 3일에 걸쳐 영광 향토사 관계자와 강항선생연구자 등 16명이 성리학 전파 유적지 답사기행을 다녀왔으며, 2002년 9월 1일 영광 JC(회장 김상범)와 오즈JC가일본의 에이메현 오즈시에서 회무교류를 가졌으며 문화관광부선정 3월의 인물 <수은 강항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기념사업들이 이 지역 영광에서 비중 있게 다뤄져 왔다. 또, 수은 강항의 간양록(출판 서해문집 발매 2005.02.28.)을 현암 이을호 선생이 집필했으며 현암의 다산 정약용연구를 비롯한 실학사상의 연구업적은 지금도 학계에서는 독보적 존재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로 강항선생의 역사적 고찰(考察)로 그는 강항을 수면위로 올리게 된 결정적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본 지에서 특집을 게재 준비중에 일본에서 낭보(朗報)가 날아왔다. 일본 에이메현에 20년째 거주하고 있는 한국어 교사 강용희(진주강씨 은열공 후손)선생이 ‘Peace Love in 에이메’회원 자격으로 2018년 6월에 무라카미 쓰네오 수은강항선생 일본회장을 찾아 가 수은 강항을 처음알고 그동안 20여 년 동안 일본에서 알게 모르게 숨죽이고 살아온 나날을 이제는 훌훌 털고 앞서 밝힌바와 같이 대유(大儒)이며 지성(至聖)인 강항선생의 위령제를 다음달 6월 8일(강항 탄신일 음력 1567년 5월 6일)에 준비 중이라 전해왔던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몰랐다가 진실된 역사를 알고 1597년 최악의 포로 신분인 수은 강항으로부터 유교를 배운 그들에게 이제는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일본 내에서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럽게 살아가게 된 계기가 마련되었노라며 매우 감격하고 있는 한 재일교포의 현실까지도 알게 된 것이다. 이처럼 가까이는 우리 국민이 좀 더 나아가서는 재일교포가 더 나아가서는 일본인들에게 스승 강항을 가슴깊이 심어주는 계기의 마련이 곧 수은강항선생국제학술세미나의 출발로 마땅히 본 지가 동참을 하게 되었으며 이와 같이 특집으로 다루게 되었음을 비교적 상세히 밝히는 바이다. 1. 수은 강항의 생애 수은 강항은 세조 때 명신 사숙재 강희맹(1424∼1483)의 5대손으로 1567년(명종 22년)에 영광군 불갑면 유봉마을에서 강극검의 5남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강항 집안은 고조부인 강학손(1455∼1523, 강희맹의 차남)이 영광군으로 귀양 와 정착하였다.    ◇ 맏형 저어당(齟齬堂) 해(瀣)에게 수학   강항(姜沆)은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하였다. 특히 기억력이 뛰어나서 글을 읽으면 곧 바로 외워 주변으로부터 神童이라 소문이 자자했다. 네 살 때 맏형인 저어당(齟齬堂) 해(瀣)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뛰어나게 잘해 소문이 널리 났다. 해(瀣)는 우리나라의 대학자였던 율곡 이이의 문하로 학문이 깊은 분이었다. 해(瀣)의 호는 저어당(齟齬堂)으로 율곡 이이(우계 성혼(成渾)과도 교류함)의 門下(문하)에서 폭넓은 교류를 통해 학문을 쌓다가 신묘년(선조 24년, 1591년) 신묘사화(辛卯士禍)에 연좌되어 변고(變故)를 당하였다.(선조실록 1591년 8월 13일) 후에 강항(姜沆)이 벼슬을 할 때 우계(牛溪) 成渾(성혼)을 선조 28년 1594년 갑오 28세 때 절친했다는 이유 때문에 東人(동인)의 탄핵을 받아 校書館(교서관)에 분관되고 우계 成渾(성혼)선생의 문호가 쓸쓸하니 멀리 찾아 가 기도 하여 직, 간접으로 많은 영향을 받기도 한다. ◇ 맏형 저어당(齟齬堂) 해(瀣)와 스승 율곡 이이(李珥)   맏형 저어당(齟齬堂) 해(瀣)와 成渾(성혼) 우계(牛溪)는 스승 율곡 이이(李珥)를 함께 수학했다. 成渾(성혼) 우계(牛溪)는 1535년에 낳아서 1598년에 세상을 뜨기까지 학문에 전념했고 벼슬을 사양해 오다가 1580년에 장령(掌令)의 벼슬에 나갔다. 1598년 좌참찬(左參贊)의 벼슬에 올라 일본과의 화해를 주장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파주(坡州) 향리로 내려갔다. 일찍 율곡  이이(李珥)와 가깝게 지냈으나 학문은 퇴계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 (理氣冱發說)을 지지하여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設)을 주장하는 율곡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놓고 논쟁을 벌려 율곡 이이(李珥)의 학설을 반박 유학계에 커다란 話題(화제)를 일으켰다. 그는 또한 글씨가 뛰어났다. 이처럼 학문이 뛰어났던 율곡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배운 저어당(齟齬堂) 해(瀣)를 스승으로 모신 강항의 어린 시절 학문은 재주가 비범한 데에 다가 가르침이 또한 깊었기 때문에 일찍이 문리(文理)에 밝게 트였다. 강항은 이미 다섯 살에 벌써 글을 지을 줄 알았다. 당시 전라감사 신응시(辛應時)가 이 소문을 듣고 각(脚)자로 명제를 주니, 곧 각도만리심교각(脚到萬里心敎脚;다리가 만 리(萬里)를 가지만 그것은 마음이 다리를 시킨 것)이라 지어 신응시 전라감사를 놀라게 하였다. ◇ 맹자정의 일화 강항이 일곱 살 때에 중국고서를 판매하는 책장수가 불갑면 안맹마을을 지나가면서 어린 소년이 맹자(孟子)책을 읽어보기 위해 다가오자 맹랑하게 느낀 책장수가 그 소년을 골려줄 심산으로 이 책을 읽어보게 하고 맹자 1질에 대한 내기를 걸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한나절 동안 그 책장수와 강항은 맹자책을 앞에 놓고 씨름을 벌인 일화로 유명하다.  결국 강항(姜沆)이 안맹마을에서 한나절 사이에 이것을 모두 암송(暗誦)하고 ‘이 책은 이미 내 머릿속에 다 들어 있으니 그냥 줘도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하고는 유봉마을로 가버렸다. 그 책장수는 놀랍고 기특하여 그 책을 소년에게 선물로  주려 하였으나 받지 않음으로 마을 어귀의 당산 나무에 매 달아 놓고 갔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후에 이 자리에 맹자정이라는 정자를 지어 강항(姜沆)의 천재성을 기려왔다. 지금도 그 자리(안맹마을) 부근에 孟子(맹자)정 비가 서있다.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6월에 강항은 이굉중 · 이용중 · 송약선 등과 함께 창의하여 양곡과 군기를 고경명 의병에 보냈다. 10월에는 영광군수 남궁현이 친상으로 사직하여 민심이 흉흉하였다. 이응종 등 영광 선비 55명은 자발적으로 영광군 향토방위에 나섰는데 강항도 집안 친척 강태, 강락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영광군 영광읍 임진수성사에는 이들 55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1593년 12월27일 세자 광해군(광해군은 분조 역할을 함)은 전주에서 과거를 실시하여 문신 11명, 무신 1천 6백 명을 뽑았다. 이 때 강항은 병과(丙科) 5번째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강항은 우계 성혼(成渾, 1535∽1598)의 문인으로 박사 · 전적을 거쳐, 1596년 가을에 공조좌랑, 겨울에는 형조좌랑이 되었고, 1597년 2월에는 영광에서 휴가 중이었다. 5월말에 강항은 호조참판 이광정의 보좌역으로 남원성 군량미 운반을 담당했으나 남원성이 왜군에게 함락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강항은 여러 읍에 격문을 보내 의병 수 백 명을 모집했지만 왜군이 전라도를 침탈하자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9월 14일에 왜적들이 영광군을 온통 불태우고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자, 강항은 둘째 형 준(濬), 셋째 형 환(渙) 등과 함께 배를 타고 피신했다. 20일에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싸우기로 하였는데, 뱃사공이 21일 밤에 신안 어의도로 뱃머리를 돌려 부친이 탄 배와 헤어지고 말았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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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5-04 / 뉴스공유일 : 2019-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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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칼럼

제(齊)나라 왕은 늘그막에 노망을 피웠는데, 신하는 물론 자기의 두 아들마저 못살게 굴어 큰아들 규(糾)와 작은아들 소백(小白)은 부득불 조국을 등지고 외국으로 탈출해야 했다. 규는 관중(管仲)이란 신하와 함께 노(魯)나라로 떠나갔고, 소백은 포숙아(鮑叔牙)와 같이 거(莒)나라로 도망갔다. 얼마 후, 노망을 피우던 제나라 국왕이 죽어 제나라에는 국왕자리가 비게 되었다. 국왕자리는 당연히 규와 소백 가운데에서 아무나 이어받게 되었는데, 그들 모두 외국으로 망명한 상태였다. 그리하여 규와 소백 가운데에서 먼저 제나라 고을에 도착하는 사람을 국왕으로 세우자고 포숙아와 관중이 합의를 보았다. 규와 소백은 서로 제나라 국왕이 되기 위해 화급을 다투며 제나라를 향해 달려갔다. 그들은 똑같이 제나라 국경에 도착했다. 국왕자리는 하나이고 후보는 두 사람인 셈이었다. 소백과 포숙아가 저쪽을 바라보니 저쪽에는 규와 관중이 떡 버티고 서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고, 이쪽에는 소백과 포숙아가 장승처럼 우뚝 서 있었다. 상대방은 서로 으르렁거리며 당장이라도 크게 싸움을 벌일 듯 한 모습이었다. 관중이 얼른 활을 꺼내 소백을 겨낭하고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가 탕 놓았다. 화살은 소백의 옷자락을 뚫고 지나갔다. 깜짝 놀란 소백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옆에 서 있던 포숙아가 급기야 소리쳤다. "나리, 어서 쓰러지세요. 빨리요!" 소백(小白)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짐짓 활을 정통으로 맞은 것처럼 쿵 소리를 내며 뒤로 벌렁 넘어졌다. 관중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저 멀리 쓰러진 소백을 바라보며 활을 거두어 둘러메고 나서 손을 탁탁 털었다. ":그러면 그렇지!' 관중이 규에게 아뢰었다. "나리, 제가 소백을 이미 처단했으니 이젠 나리께서 시름 푹 놓으시고, 이 멋진 봄날의 산천을 구경하면서 천천히 걸어가셔도 국왕자리에 오르실 수 있습니다.' 관중과 규는 소백이 죽은 줄로만 생각하고 느릿느릿 제나라 고을을 향해 떠났다. 그 사이 포숙아는 소백과 함께 밤낮을 달려 제나라 고을에 한발 앞서서 도착하여 국왕이 되었다. 포숙아의 뛰어난 지혜는 바로 관중이 화살을 쏘자마자 소백으로 하여금 재빨리 쓰러지게 하여 관중에게 소백이 명중되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포숙아의 지혜로운 반응은 화살처럼 빨랐던 것이다. 소백이 제나라 환공(桓公)이 되었다. 그는 관중과 포숙아로 인해 춘추 5패중 제일 먼저 되었으며, 관중과 포숙아의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고사성어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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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5-03 / 뉴스공유일 : 2019-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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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7일에 사간원이 현석규를 탄핵한 일은 논란이 일었다. 사간원 사간 박효원, 노공필(아우 노공유가 송익손의 사위임. 송익손은 송호의 아비임), 우승지 임사홍이 현석규에 대해 비우호적이었다. 성종은 사간 박효원에게 모든 일을 사실대로 말하라고 전교했다. 박효원이 대답하였다. "현석규가 소매를 걷어 올린 일은 풍문(風聞)으로 여겼는데, 오늘 현석규가 대답하는 것을 보니, 소매를 걷어 올린 것이 명확하며, 이름을 부른 것도 또한 너라고 일컬었을 것입니다. 승정원은 근밀(近密)한 곳이니, 홍귀달이 허물이 있어 현석규가 아뢰면, 스스로 상재(上裁)가 있을 것이거늘, 현석규는 도승지로서 스스로 위의(威儀)를 어지럽혔으니, 예양(禮讓)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러자 성종은 박효원에게 "금후로는 헛된 일로써 없는 죄를 무고(誣告)하여 죄를 얽지 말라.”고 엄중 경고했다. 이는 사간원 전체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이윽고 임사홍이 아뢰었다. "그날에 도승지 현석규가 성난 목소리로 홍귀달에게 이르기를, ‘네가 어찌 승정원의 일을 다 하느냐?’고 하여, 좌우가 모두 편하지 못하였던 까닭으로, 노공필과 이야기하던 나머지 우연히 말한 것입니다. 신이 어찌 뒤에서 없는 죄를 사주하였습니까?" 이러자 현석규가 임사홍에게 "가령 공(公)의 말이 사간원의 차자(箚子)와 합할 것 같으면 하문(下問)할 때에 아뢰지 않고서 왜 이제야 아뢰는가?"라고 말했다. 이후 현석규와 임사홍은 오랫동안 말다툼을 하였다. 말다툼이 그치지 아니하자, 좌승지 이극기가 중지시켰다. (성종실록 1477년 7월 17일 4번째 기사) 7월18일에 성종은 경연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니, 대사간 손비장이 아뢰었다. "어제 본원(本院 사간원)에서 현석규가 홍귀달의 이름을 부르고 너라고 일컬은 것 등의 일을 아뢰었더니, 전교하기를, ‘너희들이 나직(羅織)하였다.’고 하시니,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나직은 무죄한 자를 얽고 모함하는 것을 말합니다. 현석규의 일은 박효원이 노공필에게 듣고, 노공필은 임사홍에게 들었다고 하니, 신 등은 직임이 언관에 있으면서 어찌 입을 다물고 조용하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은 마땅히 아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아니 되고, 전하께서는 재결하고 채택할 따름입니다." 이러자 성종이 전교했다. "이것이 나직(羅織)이 아니고 무엇인가? ‘현석규가 갑자기 노(怒)하여 소매를 걷어 올리면서 홍귀달의 이름을 부르고 너라고 일컬으며 욕하였다.’고 하니, 이른바 소매를 걷어 올렸다는 것은 사람이 나와 겨루려고 함에 노기를 담아서 하는 것이니, 현석규가 우연히 소매를 걷어 올린 것이다. 홍귀달의 이름을 부른 것도 또한 너[爾]·너[汝]라고 일컫는 것과 같지 않으니, 어찌 욕하였다고 하겠는가?" 성종은 도승지 현석규를 엄호했다. 그리고 사간원이 무고하게 죄를 얽었다고 꾸짖었다. 이윽고 영사(領事) 한명회가 말하였다. "군신(君臣)과 상하(上下)가 화목한 뒤에야 조정이 편안함을 얻는 것입니다. 승정원(承政院)은 임금의 교서가 나오는 곳인데, 이런 일이 있음을 노신(老臣)이 들으니 불편합니다." 이어서 사헌부 장령 경준(慶俊)이 말하였다. "현석규가 도리로써 아래 사람을 거느렸다면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위는 예(禮)가 없고, 아래는 의(義)가 없어서 일어난 일이니 승정원은 모두 허물이 있습니다. 옛사람은 언로(言路)를 흐르는 냇물에다 비유하였으니, 냇물이 막히면 아래로 흐르지 못하고, 언로를 막으면 하정(下情)이 위로 통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진실로 말의 근원을 물으시면, 사람이 장차 그 연달아 연루됨을 두려워할 것인데, 누가 대간으로 더불어 즐겨 말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전하께서도 또한 하정을 듣지 못하실 것입니다." 이러자 성종이 말하였다. "정실(情實)은 묻지 않고 오직 소사(所司 사간원, 사헌부를 뜻함)의 말만 옳다고 하여 따른다면, 소사의 말이 어찌 다 정당한 데서 나온 것임을 알겠는가?" 성종은 간언의 정당성과 진실 유무를 따지겠다고 말 한 것이다. 대사간 손비장이 말하였다. "신 등도 어찌 한 결 같이 소사(所司)의 말을 따르라고 하겠습니까? 다만 소사에서는 말을 하고 전하께서는 따지고 결단하시되, 모름지기 그 말의 유래를 묻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성종이 말하였다. "앞으로는 마땅히 말의 근원을 묻지 않겠다." (성종실록 1477년 7월 18일 2번째 기사) 성종은 참으로 소통 군주이다. 그간의 관행대로 말의 근원은 묻지 않겠다고 대사간에게 답하여 대간들과의 불편한 관계를 마무리 한 것이다. 1) 성종은 "송익손이 그 아들 송호의 옥사(獄詞)를 가지고 도승지 현석규에게 청탁하였으니, 그를 추국(推鞫)하고 아뢰라." 고 전교한 바 있다. 사진 1. 선릉(성종의 능)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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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4-29 / 뉴스공유일 : 2019-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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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에 있는 「강진 백운동 원림(康津 白雲洞 園林)」의 역사적·경관적·학술적 가치를 확인하여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15호로 지정하였다.   강진군은 지난 23일 이승옥 군수와 정재숙 문화재청장, 강진군민, 향토사학자, 원주이씨 문중 등 관계자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가지정문화재 제115호 ‘강진 백운동 원림’의 명승지정을 기념식을 가졌다. ‘강진 백운동 원림’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기념식 http://www.edaynews.com/detail.php?number=29428&thread=01r04 등록날짜 [ 2019년 04월 24일 21시 24분 ]    전남대학교 후문에서 ‘현대인의 약속은 이렇게 철저하게 지켜가는 것’을 강조라도 하듯 9시에 출발이 가능했다. 사실 다른 업무로 바빠 석, 박사과정 17명이 강진군 문화탐방을 간다고 했는데도 관련 자료나 검색 한 번 하지도 못 하고 무턱대고 따라 나섰던 게 후회스럽다.   어제와 달리 완연한 봄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상큼함으로 참여하는 동료들은 연신 뒷좌석에서 탄성을 자아내고 있었다. 교통이 편리하고 광주인근에서 가까운 「강진 백운동 원림」은 월출산 옥판봉의 남쪽 경사지 아래쪽에 위치하며, 백운동 원림의 본가인 백연당(白蓮堂, 강진군 성전면)에서 북쪽으로 11㎞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주차장에 도착해 관광안내도를 주루룩 눈을 홀겨가며 읽어 내려간다. 고려 시대에 백운암이라는 사찰이 있었던 곳으로, 계곡 옆에 ‘백운동(白雲洞)’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남아있어 ’백운동‘이라 일컫기도 했다는 것.   이 원림을 造營한 사람은 조선 시대 이담로(李聃老, 1627~1701)로 호는 백운동은(白雲洞隱)으로 손자 이언길에게 유언으로 ‘평천장(平泉莊)’의 경계를 남겨 후손들에게 전함으로써 이 원림이 지금까지 보존되게 됐다.   별장으로 사용하던 백운동 원림은 이후 증손자 이의권(1704~1759)이 가족과 함께 살며 주거형 별서로 변모하였고, 이덕휘(1759~1828)와 이시헌(1803~1860) 등 여러 후손들의 손을 거치며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들어가는 문도 나오는 문도 여러 군데로 마치 요새를 연상하듯 하고 그 당시 사도세자의 스승으로 원주에서 내려와 이곳에 정착했을 백운동은(白雲洞隱)에 대한 여러 심경도 그려봄직했다.   필자의 눈에 꽂히는 글자가 백운동은(白雲洞隱)가 있었다. 은(隱)!! 결코 예사롭게 볼 아호의 붙임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스마트 폰으로 마구 검색을 게을리 하지 않았음에도 관련 자료를 찾을 수 없다. 연구의 대상이 또 하나 나타난 것에 대한 흥분과 전율을 멈출 수 없었다. 안내하고 설명하는 이승현 주인장에게 고려 말 충신 삼은(三隱)과 주자학의 흐름을 면밀히 한 번 살펴봐 줄 것을 주문했다. 사실 2018년 11월 7일에 전남 영광군 문화의 광장인 영광예술의 전당에서 270여명의 유림들이 전국각지에서 모여 고려 말 충신 삼은(三隱)과 주자학의 흐름의 계보(系譜)를 안동교박사가 발표해 엄청난 파란을 몰고 온 역사적 사건이 있어서 그러한 배경에 대한 설명을 곁들이기도 했다. 화두(話頭)가 옆으로 조금은 빗나갔으니 다시 끌어와 들여다 본다. 강진 백운동 원림의 내정(內庭, 안뜰)에는 시냇물을 끌어 마당을 돌아나가는 ‘유상곡수’의 사자성어가 남아 있고, 화계(花階)에는 선비의 덕목을 담은 소나무, 대나무, 연, 매화, 국화, 난초가 자라는 등 조선 최고의 별서(別墅) 원림 중 하나로 이곳을 답사하게 해 준 김대현교수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하기도 했다. 실학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은 백운동에 묵으며 그 경치에 반해 제자 초의선사에게 ‘백운동도’를 그리게 하고 12곳의 아름다운 경승을 칭송하는 시를 남겼고 「백운첩」에 담긴 이 그림과 시는 지금의 모습과 비교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다산의 제자이기도 한 이시헌은 선대의 문집, 행록(行錄, 언행을 기록한 글)과 필묵을 「백운세수첩(白雲世手帖)」으로 묶었으며, 조선후기 문인 김창흡, 김창집, 신명규, 임영 등이 남긴 다양한 백운동 시문들과 함께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 다산의 백운동 12승경     제1경 옥판봉(玉版峰): 끌어와 바라보는, 월출산 옥판봉의 빼어남     제2경 산다경(山茶徑): 겨울 추위에도 피어난 동백나무 숲의 꽃 봉우리     제3경 백매오(百梅塢): 집 둘레에 심어진, 백 그루 홍매화의 은은한 향     제4경 홍옥폭(紅玉瀑): 단풍 우거진 계곡바위에 떨어지는, 홍옥 같은 물방울     제5경 유상곡수(流觴曲水): 여섯 굽이 흐르는 물에 손님과 앉아 띄우는 술잔(觴)     제6경 창하벽(蒼霞壁): 푸른빛 절벽 바위에 써둔, 붉은 빛깔 큰 글자     제7경 정유강(貞蕤岡): 언덕 위, 용 비늘 껍질의 사철 푸른 소나무     제8경 모란체(牡丹砌): 집 앞 꽃계단(砌)에 심어진 모란의 빛깔     제9경 취미선방(翠微禪房): 산허리(翠微)에 작게 만든 방의 고즈넉함    제10경 풍단(楓壇): 단풍나무(楓)의 붉은 비단 가림막    제11경 정선대(停仙臺): 비에 씻겨 고운 뫼 바라보는, 신선 머무는 작은 정자    제12경 운당원(篔簹園): 깎은 옥이 하늘로 솟아오른 듯한, 왕대(篔簹) 숲의 빽빽함<문화재청 자료 참조> 이한영(李漢永) 생가 백운동 원림 근방에 월남사 터가 있고 인근에 이담로 선생의 10세손 이한영(李漢永·1868-1956)의 생가가 있다. 선생은 야생 차나무를 이용해 녹차를 만들었고 이한영가에서 파는 백운옥판차와 금릉원산차는 명차로 이름이 나있다. 생가터에서 바라본 월출산은 마치 알프스언덕을 연상하게하며 참으로 한 폭의 수채화를 그린다면 이렇게 그려야겠구나 할 정도로 아름다워 양손으로 네모 각을 만들어 수채화를 마음속에 담기에 바빴다. 사의재[四宜齋] 사의재란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할 방'이라는 뜻으로, 네 가지는 곧 맑은 생각과 엄숙한 용모·과묵한 말씨·신중한 행동을 가리킨다.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완성되면 신(信)이 도덕적으로 지니게 됨을 광주대안학교 박남주교감과 파안대소(破顔大笑)하며 즐긴다. 주막을 보니 막걸리 생각이 간절했다. 시장끼가 동하고 이미 오후 1시를 훨씬 넘겨서 더 그랬다. 박남주선생에게 술 한 잔을 권하는데 주모(酒母)가 엄격하게 밥상을 통제하고 있어 나중에야 겨우 막걸리사발잔을 기울이며 즐길 수 있었지만 관광지 주막집에서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이곳 사의재[四宜齋]는 2007년 10월 26일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다산실학 성지(聖地)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강진읍 동성리의 옛터에 복원하였다. 강진시문학관과 영랑생가 강진군시문학관 관장의 안내로 시문학관을 들러 봤는데 융복합을 이루는 조화로움에 탄성이 절로 나오고 또 감사의 말씀을 전할 수밖에 없는 건 사업을 마치 스토리텔링하듯 근대시인에서부터 현대시인까지 연도별로 정리하고 시문화 사업의 연속성과 조화로움을 목격했다는 거다. 영랑시인 한 명으로 강진 사람들은 자기 고장에서 태어난 시인 영랑 김윤식을 자랑하고 사랑하며 그의 동상에도, 강진읍 곳곳에서 눈에 띄는 모란슈퍼, 모란00, 영랑00 등 강진 사람들의 영랑 사랑은 드러난다. 이어 강진읍에서 들어가면 그 영랑이 태어난 집이 나온다. 이렇게 저렇게 걸어들어 가면서 관람을 멈추지 않았고 이곳은 1985년에 강진군에서 사들여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여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다산 기념관 강진은 다산 정약용이 18년의 유배생활한 곳이자 실학을 집대성한 곳이다. 부인과의 애틋한 러브스토리며 어린 딸이 성장해 결혼을 앞두고 아버지로서의 심경을 훔쳐보고는 예나 지금이나 자식에 대한 사랑이란 다 똑같은 생각에 절로 뭉클해진다. 다산 기념관은 날로 커지는 인상이 들었으며 제법 많은 관람객을 보며 강진군 차원에서 다각적으로 전남 관광 일번지 남도 여행 일번지로 띄우는 홍보력에 다시 한 번 음미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며 다양한 다산 친필 간찰과 제자들의 유물들을 통해 강진에서 다산의 학문과 성과를 느낄 수 있었다. 주말인데도 광주에서 많은 일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돌아가는 형국이 강진이라는 말을 굳이 할 필요가 없었으며 여러 상황에 개의치 않고 만찬 약속을 잡는다. 익산에서 내려오는 분과 태양, 풍력 사업가, 기획자 등등을 만나 한자리에 모두 모아 한꺼번에 모두 처리하기로 한다. 그게 어쩌면 술의 힘이다. 다산초당 근처에 있는 커피숍에서 다시 정리하는 시간을 가짐에도 이미 광주에 마음이 가 있어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팀들을 보며 마음만 갈팡질팡하고 만다. 그래서 그랬는지 우리가 탄 차가 웃고 떠들고 즐기다가 갈팡질팡해 제 갈 길을 못 찾고 영암으로 서해안고속도로로 좌회전으로 돌고 돌아 봄의 절정인 오후 한나절을 뻥 뚫린 고속도로로 유쾌하게 이끌어 준 박남주교감 덕택에 구경만 잘하고 약속장소 코앞까지 편안하게 왔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 했나?! 오늘의 결론(結論)이 선승(禪僧)의 외마디 외침의 우문현답(愚問賢答)처럼 그러하다.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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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3월14일 이토 히로부미(1841∽1909)가 인솔한 ‘유럽헌법조사단’이 요코하마 항을 출발했다. 이토를 포함한 10명은 5월 2일에 이탈리아 나폴리 항에 도착하여 5월16일에 독일 베를린으로 향했다. 여기에서 프로이센 헌법학자 루돌프 그나이스트와 면담 후 5월25일에서 7월29일 사이에 그나이스트의 제자 알베르트 모쎄에게서 헌법관련 강의를 들었다. 조사단은 8월8일에 오스트리아 빈으로 가서 보수적 사회정책론을 주장한 로렌츠 폰 슈타인을 만났다. 이윽고 이토 일행은 파리에 잠시 머문 후 다시 빈으로 돌아와서 9월18일에서 10월31일까지 슈타인의 강의를 들었는데 보통선거제와 정당정치의 폐해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어서 조사단은 베를린에서 11월14일에서 1883년 2월9일까지 모쎄의 강의를 들었다. 3월에는 런던에 도착해 5월까지 머물렀으며, 6월26일에 나폴리를 출발하여 8월3일 요코하마에 귀향했다. 1년 5개월 만이었다. 이토는 유럽 현지조사를 통해서 프러시아 헌법이 일본에 가장 적합하다고 보았다. 반면에 영국이나 프랑스의 공화제 민주주의는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고 생각했다. 천황주권을 강화해야 대국굴기 · 부국강병이 된다고 본 것이다. 이토는 헌법 제정을 위한 준비로서 각종 제도의 개혁부터 단행했다. 먼저 1884년 7월에 화족령을 제정하여 사족 출신의 메이지 공신들을 화족에 포함시켰다. 화족을 중심으로 한 귀족원(貴族院)에서 국민이 선출한 중의원(衆議院)을 견제해야 한다는 정치적 포석이었다. 화족에게는 공(公) · 후(侯) · 백(伯) · 자(子) · 남(男)등 5등급의 작위가 세습적으로 수여되었다. 1885년 12월에는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내각제도가 발족되었다. 총리대신이 내각을 주도하며 각 성의 대신을 통제해 정무의 통일성과 능률을 강화하도록 했고, 각 성은 외무 · 내무 · 대장 ·육군 ·해군 ·사법 ·문부 ·농상무 · 체신으로 이루어졌다. 초대 총리대신은 하급 무사출신에 불과하였던 이토 히로부미가 발탁되었고 각 성의 대신은 사쓰마 · 조슈 출신이 거의 차지하였다. 이어서 1886년에는 관리임용시험을 제도화했고, 관리 복무규정도 정해졌다. 아울러 궁내성을 내각에서 분리했다. 황실과 정부를 명확히 구분한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1886년 11월부터 본격적으로 헌법 초안의 기초 작업을 진행했다. 초안 작성에는 이노우에 고와시, 이토 미요지, 가네코 켄타로가 참여했다. 정부의 법률 고문인 독일인 뢰슬러와 1886년에 헌법 관련 법률 고문으로 초빙된 독일인 모쎄가 법률 자문을 하였다. 헌법 기초 작업을 주도한 이노우에 고와시는 1887년 초에 갑안, 을안을 작성했으며, 뢰슬러의 「일본제국 헌법 초안」도 탈고되었다. 1887년 6-7월 중에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고와시, 이토 미요지, 가네코 켄타로는 가나자와 현 나쓰시마(夏島, 요코스카시)에 있는 이토 히로부미의 별장에서 헌법 초안을 작성했다. 한편 이토는 헌법 심의에 집중하기 위해 1888년에 총리 직에서 물러나 추밀원 의장이 되었다. 1888년 4월에 완성된 헌법 초안은 헌법 심의를 위해 설치된 천황의 고문 기관인 추밀원에서 비밀리에 심의가 진행되었고 메이지 천황도 심의에 모두 참석하였다. 1889년 2월11일에 37세의 메이지 천황은 내각 총리대신에게 수여하는 형식으로 「대일본제국헌법」(일명 메이지헌법)을 공포하였다. 천황이 공포하는 형식을 취한 흠정헌법이었다. 이 날 메이지 천황은 이토 히로부미의 그간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이토에게 최고의 훈장을 내렸다. 그리고 이토가 1909년에 죽을 때 까지 천황의 신뢰는 계속되었다. 메이지 헌법이 공포된 날, 일본은 나라 전체가 축하로 들뜬 분위기였다. 의례용 양복이나 모자, 구두 주문이 쇄도했고 일장기는 동이 날 정도였다. 숙박업, 마차영업, 요리 집은 '헌법 특수'로 큰 재미를 봤다. 한편 해외에선 '헌법 내용도 모르고 열광하는 일본인들이 우스꽝스럽다'고 비꼬기도 했다. 실제로 메이지 헌법은 철저한 보안 속에 진행되었다. 국민들은 그 내용을 전혀 알지 못했다. 사진 1 메이지 헌법 발포식   (참고문헌) o 구태훈 지음, 일본제국 일어나다. 재팬리서치 21, 2010 o 함동주 지음, 천황제 근대국가의 탄생, 창비, 2009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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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한 여자가 강서성 연산(鉛山)군 호정계(胡霆桂) 군수를 찾아왔다. "나리, 우리 시어머니가 집에서 술을 몰래 빚고 있어요." 호정계 군수는 알았다는 듯이 "음, 그래!" 하더니 잠시 무엇을 생각했다. 연산군에 재해가 들어 식량을 절약하기 위해서 개인이 술을 빚는 것을 금지시킨 때였다. 그리하여 그 여자는 제 딴에는 잘하느라고 군수에게 시어머니를 고발한 것이었다. 호정계 군수가 그녀에게 물었다. "너는 시어머니에게 효도하고 있느냐?" "예, 물론 효도하죠." 그녀는 으쓱한 기분으로 대답을 했다. "효도를 하고 있다니 그럼 네가 시어머니를 대신하여 벌을 받도록 해라!" 라고 말한 호정계 군수는 그녀에게 곤장 20대를 때리라고 부하에게 지시했다. 시어머니를 고발한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신하여 매를 맞았다는 소문은 이내 고을 전체에 쫙 퍼지게 되었다. 그 날부터 연산군에는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헐뜯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이 군은 효도를 중시하는 마을로서의 모범적인 모습을 갖게 되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학대하는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작은 것을 버리고 중요한 면을 살펴볼 줄 아는 사람은 큰 지혜를 갖춘 현인이다. 2019년 4월 27일 강원구 행정학박사. 한중문화교류회장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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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부유한 농가에 한 걸인이 찾아들었다. 며칠을 굶은 걸인은 농부에게 음식을 요구했다. 농부의 창고에는 음식과 과일이 가득했지만 욕심 많은 농부의 아내는 다 썩어가는 마늘줄기 하나를 뽑아주었다. 걸인은 그것으로 겨우 요기를 했다. 세월이 흘러 농부의 아내는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천사에게 천국에 올라가게 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천사는 다 썩은 마늘줄기 하나를 보여주며 말했다. “당신이 세상을 사는 동안 유일하게 자선을 베풀었던 물건입니다. 지금부터 마늘줄기의 한쪽 끝을 붙잡고 천국으로 올라오시오.” 농부의 아내는 마늘줄기를 붙잡고 천국으로 날아올라 가려했지만 썩은 마늘줄기는 곧 끊어졌고 그녀는 깊은 지옥 불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것은 ‘톨스토이’ 단편소설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통계청 2017 사회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의 기부참여율은 매년 감소하고 있다. 기부하지 않는 이유로는 경제적 이유가 57.3%로 가장 높았고, 기부에 관심 없어서 23.2%, 기부단체를 신뢰할 수 없어서 8.9%, 직접요청을 안 받아서 7.1%, 기부방법을 몰라서 3.5% 순으로 나타났다. 나눔과 기부는 우월적 지위에 있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배려하는 특별한 행동이 아니다. 이들은 차별과 소외로 불안과 고통에 처해 있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 주고자 나눔과 기부에 참여하는 것이다. 고창군은 민선 7기를 맞아 자랑스런 고창만들기 군민운동의 일환으로 ‘나눔과 기부가치 공유하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그 결과, 지난해 (재)고창군장학재단에 장학사업으로 접수된 기부금은 4150만원 이었다. 반면 올해는 불과 3개월여 동안 기업체, 개인, 사회단체 등 각계각층에서 5000여만원에 달하는 장학금이 접수됐다. (재)고창군 장학재단에 접수된 기부금은 고창군 출신 및 그 자녀와 고창군 관내 학생에게 장학금 등을 지원하며 면학에 정진토록 한다. 장차 고창군 지역사회 발전의 중추적인 역군이 될 우수한 향토인재를 양성하는데 투명하게 쓰여지게 된다. 지난해 (재)고창군장학재단에서는 70명(고등학생 30명, 대학생 40명)에게 6000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했지만, 올해는 일반장학금 6000만원과, 전라북도대회 이상의 경기 경연대회 수상자에게 지급하는 예·체·기능장학금 4000만원 등 총 1억여원을 지급할 계획이다. 나눔이란 아주 특별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며 돈이 많아서도, 시간이 많아서도 하는 일이 아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이 있다면 나눔은 언제 어디서 누구나 어떤 방법으로든 가능할 것이다. 진실한 나눔은 물질적 필요에서 오는 것이 아닌 마음의 풍요에서 오는 것임을 느낄 수 있다. 모두 함께 더불어 사는, 나눌수록 커지는 기부문화 확산운동에 적극 참여해 모두 행복한 봄날이 되길 바란다.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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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4-25 / 뉴스공유일 : 2019-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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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7년 7월17일에 사간원 대사간 손비장 등이 현석규가 홍귀달을 욕한 것에 대해 차자(箚子)를 올렸다.   (성종실록 1477년 7월 17일 4번째 기사) "신 등이 엎드려 듣건대, 손순효·홍귀달의 죄는 의금부에서 일률(一律)로 조율하였다 하옵는데, 명하여 손순효는 교수(敎授)로 근무하게 하고, 홍귀달은 고신(告身)만 거두게 하시니, 죄는 같되 벌은 다르니 어떤 내용입니까? 또 신 등이 듣건대, 홍귀달이 조식의 일을 계달(啓達)한 뒤에, 전하께서 담당 승지에게 명하여 그 가부(可否)를 물으시자, 도승지 현석규가 갑자기 노(怒)하여 소매를 걷어 올리고 홍귀달의 이름을 불러, 너[爾]라고 일컬어 욕하였다고 하니, 신 등은 생각하건대 홍귀달은 진실로 죄가 있습니다. 현석규가 나무란 것은 진실로 옳습니다. 그러나 홍귀달의 죄는 스스로 국헌[邦憲]이 있거늘, 현석규는 예(禮)로써 나무라지 아니하고 이름을 부르고 너라고 일컬어, 서리(胥吏)와 같이 대접하기에 이르렀으니, 비록 당상(堂上)이 낭청(郞廳)을 대하더라도 이와 같이 응하지 않거늘, 더구나 같은 서열인데 이럴 수 있습니까? (중략) 현석규는 도승지로서 동렬을 대우하기를 이와 같이 함이 옳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손순효는 율(律)과 같이 하고, 아울러 현석규도 논죄(論罪)하소서." 그러나 성종은 들어주지 않았다. 이윽고 현석규가 아뢰었다. "신이 차자(箚子)를 보니, 몹시 마음이 상하여 견딜 수 없습니다. 조식의 형추(刑推)는 신이 아뢴 것이 아니옵고 전하의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홍귀달이 신과 더불어 의논하지 않고, 홀로 아뢴 까닭으로 신이 홍귀달에게 말하기를, ‘가령 강맹경이 도승지가 되고, 신숙주가 동부승지가 되었어도 이같이는 못하였을 것이다. 홍귀달은 어찌 승정원의 고풍(古風)을 변하게 하는가?’라고 말하였을 따름이고, 너라고 욕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조정의 의논이 이와 같으니, 청컨대 피혐하게 하소서." 손순효도 아뢰었다. "신은 그날 병으로 자리를 비워 처음과 끝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대간의 의논하는 바가 되었으니, 청컨대 피혐하게 하소서." 성종은 두 사람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고, 사간원 정언(정6품) 김맹성에게 물었다. "이 일은 어느 사람한테 들었는가?” 김맹성이 대답하였다. "조정의 의논이 시끄럽게 떠든 것을 누군가가 듣지 못하였겠습니까? 예로부터 대간(臺諫)이 논란하는 것은 일찍이 그 출처(出處)를 묻지 않았습니다. 이제 물으시면 언로가 막힐까 두렵습니다." 이러자 성종은 "김맹성으로 하여금 승정원에서 여러 승지들에게 질문하게 하라."고 전교하였다. 김맹성이 승지들에게 질문하니, 임사홍이 말하였다. "그날에 다만 도승지가 홍귀달더러 이르기를, ‘강맹경이 도승지가 되고, 신숙주가 동부승지가 되었더라도 이와 같이는 못하였을 것이다. 홍귀달 때에 어찌 승정원의 고풍이 변하였던가?’라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임사홍은 현석규가 욕하지 않았다고 발언했다. 이어서 현석규가 말했다. "홍귀달이 아래에 있으면서 차례를 뛰어넘어 말한 까닭으로 신이 노(怒)하였습니다. 그러나 소매를 걷어 올린 것은 단지 더위로 인하여 팔뚝을 드러내었을 뿐입니다." 김맹성이 나가니, 현석규가 아뢰기를, "대간이 논란함은 바로 공론(公論)입니다. 전일에 간원(諫院)이 구속당하는 것을 보았을 때에, 신은 눈물을 흘리며 간(諫)하기를, ‘간원의 말은 공론이니, 죄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승지는 비록 실수하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오히려 능하지 못함이 있을까 두려워하거늘, 하물며 조정의 의논이 이와 같은 것이겠습니까? 진실로 사직하겠습니다." 성종은 “사직할 만 한 일이 없거늘, 어찌 사직한단 말인가?"라고 말했다. 이어서 성종은 정언 김맹성에게 다그치며 물었다. "대간이 논란한 바가 어찌 그릇됨이 있겠는가? 몰래 사주한 자가 그르니 어느 사람에게서 들었는가?" 김맹성이 대답하였다. "사간(司諫 종3품) 박효원(朴孝元)의 집은 노공필(盧公弼)의 집과 이웃하였으므로, 박효원이 우연히 노공필의 집에 가서 들었다 합니다." 이에 성종이 전교하였다. "노공필과 홍귀달은 한 때의 경연관(經筵官)이었던 까닭으로 말한 것이니, 노공필을 불러서 물어보라. 노공필이 말하거든 임사홍에게서 들은 것인지 대질하라." 이러자 임사홍은 "노공필은 바로 신(臣)의 오랜 친구입니다.   이야기하던 끝에 우연히 말하였을 뿐,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대사간 손비장등이 현석규에 대하여 아뢴 일은 사간 박효원이 노공필에게서 들은 것이고, 노공필은 임사홍에게서 들었다. 뭔가 냄새가 난다. 뒤에 임사홍이 숨어 있다. 이어서 김맹성이 말했다. "현석규가 말한 것은 차자(箚子)와 같습니다. 현석규가 노하여 소매를 걷어 올렸다면, 너라고 일컬으며 욕하였음을 알만 합니다. 신 등이 어찌 몰래 사주한 것을 듣고서 감히 아뢰겠습니까? 대간이 논란한 바를 가지고 만약 말을 근원을 듣는다면, 신은 언로가 이로부터 막힐까 두렵습니다." 성종이 전교했다. "대간이 조정의 의논이 시끄럽게 떠들썩하다고 말하기에, 오늘은 대신이 다 모였기로 그것을 물었더니, 물으면 혹은 ‘안다.’ 하고 혹은 ‘알지 못한다.’고 한다." 이윽고 현석규가 아뢰었다. "노공유(盧公裕)는 바로 송익손의 사위[壻]이고, 노공필의 아우입니다. 뜻하건대 반드시 이를 위하여서 말하였을 것입니다." 1) 그리고 보니 조식 사건의 면모가 확연해진다. 과부 조씨(趙氏)가 전(前) 칠원현감 김주와 결혼하려 하자, 그녀의 오라비 조식과 조식의 매부(妹夫)인 송호가 김주를 강간죄로 고발했다. 의금부에서 조사한 결과 조식의 무고가 드러났고, 조식 등은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이에 조식과 송호는 죄를 면하고자 승정원에 로비하여 동부승지 홍귀달이 나서서 엄호한 것이다. 그런데 임사홍은 노공필에게 현석규의 언사를 비꼬아서 전했고 노공필(아우 노공유가 송익손의 사위임. 송익손은 송호의 아비로 현석규에게 청탁하여 형문을 받은 바 있음)은 사간 박효원에게 말하여, 박효원 주도 아래 사간원이 연명으로 현석규를 탄핵한 것이다. 사건은 점입가경이다. 점점 흥미로워진다. 1) 노공필과 노공유는 연산군 때 대간의 탄핵을 받아 물러난 영의정 노사신의 아들이다. 사진 1 김일손 묘소 2. 김일손 부친 묘소 3. 영모재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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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4-25 / 뉴스공유일 : 2019-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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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3월, 이토 히로부미는 유럽으로 건너가 헌법 기초조사를 하였다. 1883년 8월에 귀국한 이토는 헌법 초안 작성에 나섰다. 한편 1881년에 국회기성동맹을 모체로 이타가키를 당수로 하는 자유당이 결성되었다. 자유당은 사족과 부농을 중심으로 한 정당으로 프랑스의 급진주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어서 정부에서 파면당한 오쿠마 시게노부는 1882년 4월에 ‘입헌개진당’을 결성하였다. 입헌개진당은 도시의 신흥자본가와 지식인을 기반으로 하고 영국의 의회 정치를 이상으로 하여 점진적인 개혁을 제창하였다. 자유민권운동이 활발해지자 1882년 3월에 후쿠지 등은 정부관리, 신관 과 승려를 기반으로 하는 입헌제정당을 결성했다. 일종의 어용정당이었다. 그런데 1882년 4월에 자유당 당수 이타가키가 선전활동을 벌이던 중 자객의 습격을 받았다. 그는 자객의 칼에 찔렸을 때 "이타가키는 죽어도 자유는 죽지 않는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로 인해 민권운동은 활기를 띠었고 여성의 참여도 늘었다. 한편 자유당과 입헌개진당은 협력보다는 세력다툼을 벌였다. 이에 편승하여 정부는 두 정당의 반목을 조장했다. 1882년 11월 이타가키는 정부의 권유로 외유했다. 입헌개진당은 이타가키의 도덕성을 집중 성토했다. 자유당도 미쓰비시가 후원하는 입헌개진당의 비리를 폭로하면서 반격했다. 1882년에 정부는 집회 조례 개정, 1883년에 신문지 조례 개정을 통해 집회와 언론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아울러 자유당 파괴공작에 나섰다. 맨 먼저 노린 곳은 후쿠시마였다. 1882년에 후쿠시마 현령으로 부임한 미시마 미치쓰네는 민권파의 탄압을 공언했다. 미시마는 대대적인 도로개설에 착수하여 세금징수와 부역을 강제했다. 그러자 고노를 의장으로 하는 자유당 우세의 후쿠시마 현회는 미시마가 제출한 의안을 부결시켰다. 그런데도 미시마는 공사를 강행하는 한 편 도로공사에 반대하는 자유당원과 농민 400여명을 체포하고 고노 등 지도자 6명을 내란음모죄로 투옥했다. 1884년 9월에 후쿠시마의 가혹한 처사에 분개한 16명의 자유당원은 이바라기 현 가바산(加波山)에 들어가 행방을 감추었다. 그들은 도치키 현 청사 낙성식에 도치키 현령을 겸하고 있는 미시마를 암살하고자 폭탄을 만들었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전원 체포되었고, 이 중 7명은 사형에 처해지고 나머지도 중형을 받았다. 이러자 자유당 좌파는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불황과 부채에 처한 상인 · 농민과 연합하여 곤민당을 조직하고 농민운동을 이끌었다. 1884년 10월에는 지치부 군 농민들이 무장봉기하여 군내(郡內)를 제압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자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봉기를 진압했다. 주모자중 7명이 사형, 7명이 무기징역에 처해졌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유당의 기반이었던 농민이 몰락하고 급진적 행동에 반대하는 당원들이 이탈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내에서의 민권운동이 한계에 부딪치자 밖으로 세력을 확대해야 한다는 강경론도 생겼다. 1885년 12월에 자유당 좌파였던 오오이 켄타로 등은 조선과 일본의 자유민권운동을 묶는 연대를 만들어 양국의 민주주의 혁명을 목표로 삼았다. 자유당 좌파들은 한반도로 건너가 쿠데타를 일으키자는 음모를 진행했다. 그들은 조선의 민씨 외척정권을 무너뜨리고 실각한 김옥균을 재집권시켜 조선에 입헌군주정을 구축하고 청나라로부터 독립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폭탄제조, 자금 조달 등을 진행하였다. 그런데 밀고자가 생겨 139명이 체포되었다. 핵심인물인 오오이와 조선에 침투할 예정인 부대의 책임자였던 아라이는 징역 9년을 선고받았다. 한편 1887년 12월에 이토 내각은 보안조례를 제정하여 민권운동을 탄압하고 민권운동가 570명을 황궁에 접근 못하도록 도쿄의 30리 바깥으로 추방했다. 아울러 회유책도 병행했다. 1887년에 이타가키가 화족(華族 귀족)의 반열에 올랐고, 1888년에 오쿠마는 외무상에, 1889년에 고토도 체신상에 임명되었다. 민권운동가들은 변절하여 입신출세하고 민권운동은 몰락한 것이다. 참으로 씁쓸하다. 그런데 일본만 이랬을까. 우리는 어떠했나? 사진 1 메이지 신궁 안내판 사진 2 메이지 신궁 좌측 입구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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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4-22 / 뉴스공유일 : 2019-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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