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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7년 9월5일에 사헌부·사간원이 합사(合司)하여 아뢰었다. "신 등이 현석규를 논핵하였는데 김언신이 홀로 죄를 입게 되었으니, 신 등도 대죄(待罪)합니다." 성종은 "경등은 현석규가 소인이라고 말하지 않았고, 김언신이 홀로 말하였으니, 경등은 대죄하지 말라."고 전교했다. (성종실록 1477년 9월 5일 6번째 기사) 9월6일에 형조판서 현석규가 사직을 청했다. 성종은 사직하지 말라고 하면서 김언신을 추국하라고 의금부에 전지(傳旨)했다. (성종실록 1477년 9월 6일 1번째 기사) 이어서 대간(臺諫)이 합사하여 아뢰었다. "신 등이 들으니, 지평 김언신을 의금부에 내리었다 합니다. 신 등이 비록 직접 현석규를 가리켜 소인이라 한 것은 아니나, 본래 모두 같은 마음으로 탄핵하였는데, 김언신 만을 추국하니, 신등도 하옥하소서." 성종은 전교했다. "김언신을 하옥한 것은 현석규 때문이 아니고 나더러 소인을 썼다고 한 때문이다. 또 스스로 말하기를, ‘신이 만일 망령된 말을 하였으면, 신이 극형을 당하겠습니다.’하였으므로 다스리는 것이다. 경은 대죄하지 말라." (성종실록 1477년 9월 6일 2번째 기사) 이 날 유자광이 와서 "신은 김언신에 비하면 더 심하게 말했는데, 김언신만을 하옥하고 신은 너그러이 용서하셨습니다. 옥에 나아가기를 청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성종은 대죄하지 말라고 전교하였다. (성종실록 1477년 9월6일 3번째 기사) 한편 이조참판 신정이 김언신을 용서하기를 청하는 차자를 올렸다. “전하께서 김언신의 광직(狂直)한 것을 너그러이 용서하여 언로를 넓히소서." 성종은 어서(御書)로 답했다. "김언신이 하옥된 것은 현석규가 곧은 선비이기 때문이다. 경은 어째서 김언신을 옹호하는가? 또 현석규가 참으로 소인인데 내가 썼다면, 경이 전조(銓曹)를 맡았었으니 죄가 없을 수 있겠는가?" (성종실록 1477년 9월6일 7번째 기사) 9월8일에도 이조참판 신정이 상소하여, 김언신을 논하지 말게 청하였으나, 소장을 머물러 두고 답을 내리지 않았다. (성종실록 1477년 9월8일 3번째 기사) 이윽고 예문관 부제학 이명현이 김언신을 용서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성종실록 1477년 9월8일 4번째 기사) 이 날 의금부에서 아뢰었다. "지평 김언신이 현석규가 소인이 아닌데도 소인이라 지목하여 기망하여 계달한 죄는, 율(律)이 장(杖) 1백 대, 도(徒) 3년에 해당합니다." 이에 성종은 "기망한 죄는 마땅히 죽여야 하는데, 어찌 율이 경한가? 고쳐 조율(照律)하고 아울러 김언신을 잡아오라."고 전교했다. (성종실록 1477년 9월 8일 5번째 기사 ) 이 날 승지 등이 합사하여 김언신을 용서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은 답하지 않았다.(성종실록 1477년 9월 8일 6번째 기사) 이윽고 동지중추부사 김유가 상소하였다. "대간은 임금의 이목(耳目)입니다. 지금 현석규가 군자(君子)인지 소인(小人)인지는 신이 알지 못하나, 만약 현석규가 군자인데 김언신이 문득 지목하여 소인이라 하였다면 참으로 죄가 있을 듯하지만, 그 마음에 반드시 소인이라 여겨져서 논한 것이니, 또한 잘못 헤아리고 그릇 고집한 데에 불과한 것이고, 김언신이 평소에 현석규와 감정이 있어서 무함하였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전하를 덕종·신종에 견준 것은 반드시 전하께서 이 두 임금이 사람 쓰는 도리를 잃은 것을 본받지 말라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 돌아보건대, 김언신은 미천한 자인데,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품은 바를 모두 드러내어 감히 다투었으니, 논한 것이 비록 맞지 않더라도 그 충분히 격렬하여 단연코 다른 마음이 없고, 강직함의 풍도가 있어 곧 천백 사람 가운데에서 하나입니다. 마땅히 포장하여 사류(士類)를 권하여야 하겠는데 도리어 죄를 당하니, 이로부터 대간의 언로가 막힐까 두렵습니다. 원컨대, 김언신을 석방하소서." 이러자 성종은 김유에게 전교하였다. "소(疏) 가운데에 ‘현석규가 군자인지 소인인지’라는 말이 있는데, 경도 현석규를 소인이라 하는가?" 김유가 대답했다. "현석규는 신에게 족속(族屬)이 되니 심술의 은미한 것은 알지 못합니다. 만약 현석규가 군자인데 김언신이 소인이라고 하였다면 이것은 자기 고집이 그러한 것입니다. 대저 대신의 일을 말하는 사람이 적은데 김언신이 두려워하지 않고 숨김없이 다 진달하였으니 마땅히 포상을 가하여야 할 터인데, 도리어 죄로 책망하면 누가 감히 대신의 일을 말하겠습니까?" 성종은 전교하였다. "김언신이 나더러 소인을 썼다 하기 때문에 내가 대신에게 물으니 모두 ‘그렇지 않다.’고 말하였다. 경같이 상소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알아서 하겠으니, 경은 물러가라." 조금 뒤에 김언신이 항쇄(項鎖)를 갖추고 승정원 뜰에 나오니, 내관(內官) 안중경을 시켜 김언신에게 물었다. "그대가 처음에 자신이 극형을 당하겠다고 말하였는데, 지금 죄가 죽기에 이르렀어도 현석규를 소인으로 여기느냐? 당초에 고집한 것이 잘못이냐?" 김언신이 말했다. "신이 처음부터 죽기를 두려워한 것이 아니고, 또한 잘 못 고집한 것도 아닙니다. 현석규는 참으로 소인입니다." 이러자 성종이 전교하였다. "그대가 죽기에 임하여서도 끝까지 현석규를 소인이라 하고, 나를 덕종·신종이 소인을 쓴 데에 견주느냐?" 김언신이 말했다. "덕종은 노기를 쓰고 신종은 왕안석을 썼으나, 현석규는 두 사람의 음험과 간사를 겸하였는데 전하께서 쓰셨으니 신은 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이 현석규를 소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것은 임금을 속이고 죽는 것입니다." 이러자 성종이 전교했다. "노기· 왕안석은 모두 당류(黨類)가 있었다. 지금 대신·전조에서 모두 말하기를 현석규는 소인이 아니라고 하니, 현석규를 소인이라도 하는 것도 당류가 하는 일인데 이를 숨기는 것이냐?" 김언신이 말했다. "이렇게 아뢴 것에 어찌 붕당이 있겠습니까? 저들이 알지 못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왕안석이 소인인 것을 오직 여회(呂誨) 한 사람이 알았습니다. 신이 어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이러자 성종이 전교했다. "내가 그대를 죽이면 걸(桀) · 주(紂) 같은 임금이 되겠다. 그대가 죽어도 용봉(龍逢 : 하나라 때 걸왕의 무도(無道)함을 간(諫)하다가 피살됨) ·비간 (比干 : 주왕의 숙부로 주왕의 악정을 간하다가 피살됨)과 더불어 지하에서 놀고자 하느냐?" 김언신은 "신은 죽은 것을 다행으로 여깁니다."라고 말했다. 이윽고 성종이 전교했다. "그대가 죽음에 임하여 말을 바꾸지 않는 것은 신(信)이라는 말 때문에 그러는 모양이다. 간언하는 신하를 죽인 것은 오직 걸 ·주 뿐이다. 어찌 임금으로서 간언하는 신하를 죽이겠느냐? 내가 그대를 옥에 가둔 것은 그대가 고집하기 때문이다. 당 태종은 간언을 듣는 것이 점점 처음만 같지 못하였다 하는데, 내가 어찌 그와 같겠느냐? 앞으로도 간언할 일이 있거든 말하라. 내가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이겠다. 그대가 강개(慷慨)하고 굴하지 않는 것을 대단히 기뻐한다. 그대의 직무에 임하라." 이어서 성종은 승정원에 명하여 김언신에게 술을 먹이고 예우하여 보냈다. (성종실록 1477년 9월 8일 7번 째 기사) 과연 성종답다. 김언신을 용서하고 예우하다니. 사진 1 창덕궁 인정전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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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6-18 / 뉴스공유일 : 2019-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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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칼럼

명량해전은 세계 해전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해전이다. 이 해전은 양치기 소년 다윗이 작은 돌멩이 하나로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린 싸움으로 비유된다. 명량해전은 정유재란의 흐름을 바꾸었다. 일본 수군의 서해 진출을 막았고, 조선수군의 재기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렇다면 조선수군의 승리 요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1) 전선 수는 적으나 강한 함대 (2) 이순신의 전략 전술 (3) 전라도 연안 백성들의 지원과 참전으로 요약된다.   첫 번째 승리 요인은 전선 수는 적으나 강한 함대이다. 13척이라는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선함대는 막강한 화포를 갖춘 판옥선이었다. 또한 배에 장교·부사관 등 군관들이 여러 명이 탑승하여 전투능력이 최강이었다.   두 번째는 이순신의 뛰어난 전략 전술이다. 이순신은 명량해협이 좁아서 일본 수군 소형선만 참전할 수밖에 없음을 간파하였다. 또한 조류의 흐름을 알고 싸워서 왜선 31척을 격침시켰다.   셋째는 전라도 연안 백성들의 지원과 참전이다. 이순신을 따라 피난 온 전라도 연안 백성들과 해남·진도 주민들은 조선 수군에게 의복과 식량을 지원하였고 자원입대하였다. 전라도 백성들은 명량해전 당일 피난선 100여척을 전선으로 가장하고 대기하였고, 이순신이 위험하자 함께 싸우기도 하였다.     이런 해전이었기에 부녀자들이 군복을 입고 강강술래를 하였다는 전설도 전해오고 있다.   강강술래는 해남·진도·완도 등 전남 서남해안지방에서 추석날 밤에 예쁘게 차려입은 부녀자들이 공터에 모여 손에 손을 잡고 둥근 원을 만들어, '강강술래'라는 후렴이 붙은 노래를 부르며 빙글빙글 돌면서 뛰노는 민속놀이이다.   2009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그 유래는 명량해전 때 이순신 장군은 마을 부녀자들을 모아 남자차림으로 옥매산(玉埋山) 허리를 빙빙 돌게 하여 군사가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한다.   옥매산은 해남군 문내면과 황산면의 경계에 있고, 앞 바다가 명량해전의 무대이다. 옥매산에서 내려다보면 울돌목, 벽파진, 어란진 등이 모두 보인다.   다른 해전과는 달리 ‘9월14일에 이순신의 피난 명령(『난중일기』)’을 받은 전라도 연안 백성들은 피난 가면서 해남과 진도의 산봉우리에서 해전을 지켜보았다. ‘이충무공 행록’에 나온다.   이들은 처음에는 300척 이상 되는 왜선에 놀라서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조금 있다가 조선 함대가 잘 버티자 힘껏 응원을 하였고, 왜선이 격침되자 더욱 흥분하여 소리쳤으며 왜군이 물러나자 얼싸안고 환호하였다.   그렇다면 강강술래는 사실일 수 있다. 여인들이 피난가면서 거추장스러운 치마보다는 남복을 입었고, 환호하면서 서로 손을 잡고 술래를 돌았으리라. 하지만 이순신 장군이 부녀자들에게 남복을 입혀 빙빙 돌게 하여 군사가 많은 것처럼 위장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진 우수영 관광지 강강술래 안내판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명량해전 이후 ‘왜군의 즉시 철수설’이다. 최근까지 명량에서 패한 일본 수군은 서진을 포기하고 그들의 수군 근거지인 안골포로 즉시 물러났다는 것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1)   하지만 일본 수군은 곧바로 물러나지 않았다. 일본 수군은 상당기간 전라우수영을 점령하고 라 영광 앞바다까지 진출했다. 일본 수군은 해남 ·무안 ·신안 ·함평 · 영광 일대 바닷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9월22일에 일본수군은 무안에서 군자첨정 정기수를 사로잡았다. 23일에는 일본 수군대장 도도 다카토라의 부하 신칠량은 영광출신 선비 형조 좌랑 강항을 영광 앞바다 논잠포에서 붙잡는다. 강항은 일본 시코쿠 에이메현 오즈성에 피로被虜되었다가 교토에서 적송광통(赤松広通, 아까마쓰 히로미치)에 의해 승려 후지와라 세이카藤原醒窩(등원성와)를 만나 그에게 조선의 유교, 성리학[性理學]을 가르쳤다. 그 후 1600년 5월에 귀국하여 문집 ‘간양록’을 남겼다.   또한 9월27일에는 함평 출신 선비 정희득이 영광 칠산 앞 바다에서 하치스카 이에마사의 수군 부장인 모리 다다무라에게 붙잡혔다. 그는 일본 시코쿠의 도쿠시마 현에 끌려갔는데 1599년 6월말에 귀국하여 포로체험일기 ‘월봉해상록’을 남겼다.   한편 이순신은 10월3일에 법성포에 도착하여 5일간 머문 뒤 10월9일에 해남 우수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해남 우수영은 왜군들에 의해 초토화 되었고 왜군들이 아직도 머무르고 있었다. (10월9일 난중일기) 그리고 왜군은 10월11일에 해남을 떠났다.     1) 이민웅, 이순신 평전, 2012, p 352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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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6-17 / 뉴스공유일 : 2019-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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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깨끗해야 멀리 내다본다 당 현종(玄宗)은 최군(崔群)의 정직성과 성실성을 극구 찬양하면서 한림학사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다. “앞으로 나에게 문서를 올릴 때에는 반드시 최군을 거쳐 올리도록 하라"최군이 대답했다. '한림에서 올리는 문서는 모두 오래된 조정의 일뿐입니다. 만약 제가 혼자서 검사하면 아첨꾼들이 실제상황을 솔직하게 아뢰지 않을 것입니다'그리하여 최군은 황제의 명령을 집행하지 않았다. 효종(孝宗) 황제가 수레를 타고 문화전을 돌아볼 때 병부상서 유대하에게 말했다. '가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당신과 상의하고 싶었지만 당신 부서의 일이 아니어서 그만둘 수밖에 없었소. 나중에 일이 있으면 비밀편지로 전해주기 바라오' '안 됩니다' 유대하가 잘라 말했다. '왜 안 된다는 거요?' '전하께서는 마땅히 역대의 현명한 왕들을 본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나라 일은 모든 사람들이 다 알아야 합니다. 만약 전하와 신하 사이에 비밀편지가 오가게 되면 그것이 장차 관례화 될 것입니다. 만약 간신이 요직에 중용되어 그대로 비밀편지를 올리게 되면, 그 위험성이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엄청날 것입니다. 이런 방법은 후세에 무려 줄 수 없는 행동이라 생각됩니다. 신은 전하의 지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효종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는데 얼굴에는 감탄의 기색이 역력했다. 2019. 6. 17 강원구 한중문화교류회 중앙회장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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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6-17 / 뉴스공유일 : 2019-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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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에서 보물을 가장 즐긴 황제를 꼽는다면 아마 명나라 황제일 것이다. 그 큰 대륙에서 긁어 모은 무수한 보물도 황제의 욕심을 채울 수가 없었던지, 어느 날 그는 보물을 구하기 위해 왕삼보 태감을 불렀다. '태감은 서양에 한번 다녀오도록 하시오. 그들이 중국 땅의 절반을 요구해도 떼어 줄테니 보물만 많이 가져오도록 하오.' 황제는 또 상서(尙書) 항충(項忠)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이번에 왕삼보의 출장이 중요하고 여정이 머니 항로에 대한 자료를 얼른 찾아 올리시오.' '예, 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항충은 다시 도리(都吏)에게 황제의 명령을 전했다. 그때 병부랑중(兵部郞中) 유대하(劉大夏)가 이 일을 눈치 채고 한발 앞서서 항로에 관한 자료를 빼돌렸다. 이미 빼돌려진 자료를 도리가 찾아 낼 리가 만무했다. 항충이 도리를 재촉했다. '조정의 자료가 없어질 리 없지. 자료 관리가 엉성하지도 않잖은가?' 유대하가 한쪽에 서서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몇 년 전에도 서양으로 보물을 구하러 갔었는데, 그때 숱한 금전과 식량을 허비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었소. 이것은 그릇된 정치이니 설령 자료가 보존되어 있다 해도 없애버려 화근을 뿌리째 뽑아버려야 하오. 이제 그 자료를 찾을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항충은 가슴이 찡해 왔다. 그는 자신의 상서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넨 나라 일을 멀리 내다보고 있네. 이 자리가 머지않아 자네에게로 돌아갈 걸세.'       2019. 6. 13     강원구 한중문화교류회 중앙회장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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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6-13 / 뉴스공유일 : 2019-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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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헌부 지평 김언신이 경연에서 현석규가 소인이라고 하자, 성종은 증경의정(曾經議政)과 이조 당상을 불렀다. 성종이 물었다. "지평 김언신이 현석규를 노기(盧杞)와 왕안석(王安石)에게 견주는데, 이 말이 옳은가, 그른가?" 하동부원군 정인지·좌의정 심회· 우의정 윤자운·광산부원군 김국광 · 이조판서 강희맹· 이조참의 최한정이 대답하였다. "신 등이 평상시에 현석규와 일을 같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합니다." 성종이 전교하였다. "김언신이 현석규를 가리켜 소인이라 하였으니, 이는 임금을 속이는 것이다. 만일 현석규가 노기·왕안석과 같다면 노기와 왕안석은 모두 나라를 그르친 자이니, 현석규의 진퇴도 국가의 치란과 안위가 관계되는데 경등이 알고도 말하지 않는 것이 가한가? 경등은 대간을 꺼리지 말고 현석규를 비호하지 말고 다 말하라." 정인지가 먼저 말했다. "소인은 비록 화를 일으킬 마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성명(聖明)한 때에는 방자하지 못합니다.” 이어서 심회·윤자운이 말했다. "현석규가 소인인 것을 실로 알지 못합니다." 또한 김국광이 말했다. "현석규는 참으로 소인이 아닙니다. 평시에 강하게 막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남의 과실을 말하기를 좋아하니, 참으로 강직한 사람입니다." 이러자 성종은 강희맹 등에게 전교했다. "현석규에게 형조판서를 제수하고자 하여 가부를 물으니, 경등이 말하기를, ‘판서는 정2품이고 대사헌은 종2품인데, 정(正)과 종(從)은 등급이 다르니, 너무 과할 것 같습니다.’하고, 소인인 것은 말하지 않았다. 만일 현석규가 노기·왕안석과 같다면 경등이 어째서 그때 말하지 않았는가?" 강희맹이 대답하였다. "신 등이 현석규가 참 소인인 것을 알았다면 마땅히 그때에 논박하였을 것입니다. 어찌 자급의 높고 낮은 것만 진품(進稟)하였겠습니까?" (성종실록 1477년 9월 5일 기사 4번째 기사) 얼마 안 있어서 유자광이 현석규의 사람됨에 관하여 또 다시 장문을 상소를 올렸다. 그 내용은 김언신과 마찬가지로 현석규를 소인이라고 탄핵한 것이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현석규의 뛰어 옮긴 것이 또 나라 사람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신은 현석규에게 정히 노기와 같은 간사함이 있는데도 전하께서 미처 살피지 못하시는 듯합니다. (중략) 소인은 임금 앞에서 겉으로는 곧은 행실을 하고 속으로는 그 술책을 시험하되, 임금은 ‘이 사람이 바른 것을 지키고 나에게 충성을 다한다.’하여, 날로 의지하고 맡깁니다. 하지만 임금은 이 사람은 믿을 만 하고 여러 사람의 말은 믿을 수 없다하여, 많은 말들이 다 귀에 들어가지 못하고 소인의 화는 이미 천하에 퍼질 것이니 그 화가 참혹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생각하건대, 현석규는 소인이고 재주가 있는 자입니다. (중략) 전하께서는 현석규의 죄를 조정에서 밝게 다스려서 사람들이 바라는 것을 쾌하게 하고 하늘의 경계에 보답하시면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전하께서 이 말을 소홀히 여기지 마소서." 소(疏)가 올라가니, 성종은 김언신을 특별히 부르고 곧 유자광의 상소를 정승들에게 보이며 말했다. "상소 가운데의 말이 어찌하여 김언신과 같은가? 유자광에게 물으라." 이윽고 유자광이 대답하였다. "신이 현석규가 노기·왕안석과 같다고 하는 것은 근일에 행사한 형적으로 보아서 그러한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현석규가 말하기를, ‘조식의 일을 한한이 홍귀달에게 청하고, 홍귀달이 따라서 아뢰었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홍귀달의 죄는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죽을죄를 갑자기 동렬(同列)에서 가하였는데 일이 끝내 실상이 없었으니, 이것이 그 형적이 노기· 왕안석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자 성종은 김언신에게 전교하였다. "노기·왕안석은 자기를 그르게 여기는 자를 가만히 헐뜯어서 멀리하고 배척하였으니 소인의 형적이 나타났지마는, 현석규가 한 일도 이와 같으냐? 그대가 나에게 말하기를 ‘만일 망령된 말을 하여 임금을 속였다면 마땅히 극형을 받겠다.’ 하였는데, 지금 정승들이 모두 현석규는 소인이 아니라고 하니, 그대가 극형을 면하겠느냐?” 김언신은 경연에서처럼 현석규의 죄를 아뢰고, 또 말했다. "신이 일찍이 현석규를 음험하고 간사하다고 생각하였는데, 이 두어 가지 일을 보니 더욱 그 음험함을 알겠습니다." 성종이 전교하였다. "이 작은 일을 가지고 노기·왕안석에 견주는 것이 옳으냐? 조종(祖宗)께서 여러 대를 대통(大統)을 전하시었는데 하루아침에 내가 소인을 써서 나라를 그르친다면 후세에 무엇이라 하겠는가? 나는 참으로 덕종·신종이 임금 노릇한 것보다 못 할 것이다. 또 유자광의 상소가 너무 지나치나 대신이기 때문에 너그러이 용납하지마는, 김언신은 죄주고자 하는데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 이러자 유자광이 대답했다. "현석규는 종실 사위로서 종실 정양군의 기생을 간음하고 집을 지어 주고 매양 그 집에서 잤으니, 이것이 어찌 임금을 모시는 자가 할 일입니까? 또 소인이 없는 세상은 없으니 어찌 말세에만 생기겠습니까? 요(堯)·순(舜) 세상에도 네 명의 악인이 있었습니다. " 정인지 등이 말하였다. "김언신의 말이 너무 과하기는 하나, 간관의 말이 간절하지 않으면 임금의 귀를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니, 청컨대 성상께서 재단하소서." 정인지등의 말을 듣고 성종이 전교했다. "말을 서로 전할 때에 반드시 보태지고 빠지는 것이 있을 것이니, 내가 친히 듣겠다.” 성종은 친히 선정전에 나아가 정인지·심회·윤자운·김국광·강희맹·신정·최한정 및 유자광·김언신 등을 인견했다. 사진 1 창덕궁 선정전 먼저 성종은 정인지 등에게 말하였다. "현석규가 소인이라면 어째서 정승과 이조에서 말하지 않았는가?" 정인지가 대답했다. "신은 현석규가 흉악한 마음을 포장한 것을 알지 못합니다." 성종이 말했다. "선왕의 옳은 정사를 내가 소인을 쓰기 때문에 무너뜨리는데, 지금 대신이 말하지 않는 것이 옳은가? 현석규가 만일 소인이 아니라면 무령군 유자광과 김언신이 어째서 소인이라고 말하는가? 경등은 다 말하라. 현석규가 참으로 소인이면 파직하여 보내겠다." 정인지·김국광이 말했다. "신 등은 그 사람이 소인인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어서 강희맹이 말했다. "현석규의 심술이 은미한 것은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신 등이 만일 참으로 소인인 것을 알면 감히 아뢰지 않겠습니까? " 성종이 전교했다. "현석규가 만일 참으로 소인이라면, 내가 덕종·신종이 소인을 쓴 잘못과 같다는 비평을 달게 받겠으나, 만일 소인이 아닌데 김언신이 소인이라고 말하였다면 이것은 먼저 스스로 임금을 속인 것이니 가만있지 않겠다." 유자광이 앞으로 나아가 또 다시 현석규가 소인임을 아뢰었다. 성종이 말했다. "지난번 경이 극진히 말하고 숨기지 않은 것을 내가 가상하게 여긴다. 그러나 현석규를 소인이라 하는 것은 그르다." 그러자 유자광은 현석규에게 무슨 감정이 있겠냐고 하면서 현석규가 정양군의 기생을 간음한 점을 또 아뢴다. 유자광, 참으로 집요하고 교활하다. 1) 이윽고 성종이 단호하게 말했다. "무령군은 공신이고 대신이기 때문에 비록 과한 말이 있어도 용서하여야 하겠지마는, 김언신은 내가 반드시 국문하겠다." 김언신이 말했다. "신이 죄를 당하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으나, 지금 현석규를 쓰면 후회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성종실록 1477년 9월 5일 5번 째 기사) 1) 한편 유자광은 1478년 4월29일 이심원의 탄원으로 들통이 나서 1478년 5월8일에 동래에 유배되었고, 김언신은 강계, 임사홍은 의주, 박효원은 부령에 유배되었다. (성종실록 1478년 5월 8일 4번 째 기사)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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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는 특정한 놀이나 행위가 벌어지는 공간을 의미하는 ‘판’에서 인간의 가장 심층에서 울리는 본연의 외침과 민중의 수많은 희노애락 사연을 ‘소리’로써 나타낸다. 또한 소리꾼과 청중의 적극적 참여로 완성되는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판소리’를 이 시대의 ‘촛불집회’와 같다고 할 수 있을까? 필자는 적어도 조선 후기에 불려진 판소리와 촛불집회는 같다고 생각한다. 판소리와 촛불집회의 유사점 몇 가지를 들면 아래와 같다. 첫째, 겉모습이 닮았다. 민중들이 모인 판에서 창자(唱者)가 창(노래)과 아니리(말)를 하고 고수(鼓手)가 북을 두드리면 많은 청중이 추임새를 넣는 것은 판소리의 전통적 모습이다. 이는 군중이 모인 넓은 광장에서 한 사람이 무대에 나와 부패 정권을 비판하고 옆에서 북을 치면 다같이 ‘정권 퇴진!’이라 외치는 오늘날 촛불집회와 너무나도 흡사하다. 그리고 판소리는 ‘노래’를, 촛불집회는 ‘촛불’을 앞세운 것은 비폭력 추구의 동일 모습이다. 둘째, 속 내용이 닮았다. 판소리와 촛불집회 모두 저항의 내용들로 이루어졌다. 가장 예술성 높다는 <춘향가>를 비롯한 많은 판소리 작품에서 사회 약자인 일반 민중들이 권력자에 느꼈던 감정,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비판의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태호 이사장((사)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순천협회)은 판소리 유네스코 무형유산 등록에 심혈을 기울였던 분이다. 그는 “판소리가 저항의 소리임은 틀림없는데 굳이 비율을 따지자면 저항성이 70%, 예술성이 30%”라고 말한다. 셋째, 성질도 닮았다. 판소리와 촛불집회는 난세(亂世)를 만날수록 더욱 불타오른다. 실제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의하면 삼정의 문란(三政─紊亂)과 탐관오리(貪官汚吏)로 대표되는 순조에서 고종에 이르는 시기에 명창 반열에 오른 이가 70~80명 될 정도로 조선 후기 판소리는 활황기를 맞았다. 이러한 판소리가 부흥한다는 것은 민중의식의 성장을 의미한다. 또한 시대의식이 높아진 민중은 혁명의 주체가 된다. 조선 후기 판소리를 전성기로 이끈 이를 논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동리 신재효이다. 그는 판소리가 널리 불려질 수 있도록 각종 행정지원을 하였다. 판소리 사설 개작을 통해 양반에게도 소비층으로의 참여 명분을 줌으로써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는 창자들의 후원자 역할을 하도록 했다. 신재효의 문하를 거쳐간 명창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그런데 이들 명창 중 조선 후기 팔명창에 속하는 사람들 대부분 전라도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민중의 시대의식을 높였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로 조선 후기 고창은 지역민들의 참여 속에 촛불집회 전신이라 하는 동학농민혁명의 전국화를 선언한 무장기포지가 되었다. 전라도 지역은 동학농민혁명군의 초기 활동 무대를 제공하였다. 위와 같은 전반적 내용을 고려할 때 조선 후기 ‘판소리’는 ‘촛불집회’라 할 수 있다. 이 판소리가 쉼 없이 울려 퍼졌던 고창의 ‘동리정사’은 촛불집회 중심지인 ‘광화문’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담겨있고 촛불혁명이라 할 수 있는 판소리를 더욱 발전시켜 국민 모두가 공유할 수 있고, 고창이 의향(義鄕)의 도시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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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칼럼

금년은 한국-덴마크 수교 60주년이다. 덴마크의 추억을 공유한다. 2018년 4월 하순,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배를 타고 다음 날 오전 9시에 덴마크 코펜하겐에 도착했다.   먼저 간 곳은 인어공주 동상이 있는 바닷가. 인어공주는 바다를 등진 채 육지를 바라보며 외로이 앉아 있다. 인간세계와 바다 그 어느 곳에도 편입될 수 없는 슬픈 운명이어서인지, 왕자와 사랑을 꿈꾸다 물거품이 되어서인지, 아니면 80cm 밖에 안 되는 조그만 동상이라서 그런지 인어공주는 외롭고 초라하다. 사진 1 인어공주 상 그나마 위안은 중국과 한국 관광객이 자주 찾아와서 인증 샷을 찍어주는 일이리라. 인어공주 동상 위쪽 도로에서 안내판을 보았다. 안내판은 덴마크어·영어 · 중국어로 되어 있다. “이 동상은 1913년에 세워졌는데, 칼스버그 맥주 창업주의 아들 칼 야콥센이 코펜하겐 시에 기증했다. 야콥센은 1909년 왕립 덴마크 극장에서 공연한 인어공주 발레를 보고 감동하여 조각가 애드바그 에릭슨에게 안데르센 동화에 걸 맞는 조각상을 요청했고, 에릭슨은 자기 아내를 모델로 하여 인어공주 동상을 만들었다.” 예술을 아는 기업가가 있다니 정말 부럽다. 사진 2 인어공주 안내판 인어공주는 동화작가 안데르센(1805∼1895)이 1837년에 쓴 동화이다. 평생 독신이었던 안데르센은 ‘인어공주는 바로 나 자신이었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실연(失戀) 당한 아픔을 동화에 담았다. 그리고 보니 인어공주는 참 불쌍하다. 인어공주 동상은 1964년과 1988년에 머리가 두 번이나 잘리고 2007년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핑크색 페인트를 뒤집어쓰는 수난을 당했다. 한편 인어공주는 1989년에 월트 디즈니가 애니메이션 영화로 만들었는데 대히트였다. 원작 동화는 인어공주의 슬픈 운명이 그려졌지만, 영화의 인어공주는 인간이 되어 왕자와 행복한 결혼식을 올리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더구나 음악 ‘Under the Sea’는 아카데미 주제가상과 작곡상을 수상했다. 이윽고 게피온 분수, 아말리엔보르 궁전 그리고 뉘하운을 구경하고 나서 코펜하겐 시청 광장에 이르렀다. 시청은 무료 개방이다. 입구엔 관광안내소가 있고, 1층 홀은 결혼식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운 좋게도 2층에서 피로연하는 신혼부부를 보았다. 사진 3 코펜하겐 시청 시청 옆 도로변에서 안데르센 동상을 보았다. 모자를 쓰고 한 손에 책, 다른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앉아 있는 안데르센. 그의 고개는 티볼리 공원을 향하고 있다. 티볼리공원은 1843년에 지어진 세계 놀이공원의 원조로 자녀와 손자가 함께 찾는 170년 전통의 가족공원이다. 안데르센은 이 공원을 가보았을까? 사진 4 안데르센 동상 한편 덴마크 날씨는 정말 변덕스럽다. 조금 전까지 비가 부슬거렸는데 이젠 우박이 되어 한꺼번에 쏟아진다. 비가 조금 멈추자 티볼리 공원 입구에서 다시 관광버스를 탔다. 행선지는 국회의사당이다. 가는 도중에 덴마크 남편과 20년째 살고 있는 현지 가이드는 안데르센에 대해 이야기 한다. 가난한 구두 수선공 아버지와 세탁부 어머니의 아들로 오덴세에서 태어난 안데르센은 ‘미운오리 새끼’의 주인공 백조이고 고결한 ‘인어공주’이며 불쌍한 ‘성냥팔이 소녀’란다. 그는 어린이보다는 어른용 동화를 썼는데 동화의 결말엔 해피엔딩이 별로 없단다. 이제 국회의사당에 도착했다. 인상 깊은 것은 의사당 정문 위에 조각 되어 있는 ‘네 가지 고통’ 얼굴이다. 머리 아프고, 배 아프고, 귀 아프고, 이빨 아픈 얼굴이다. 국민의 고통을 항상 생각하고 정치를 하라는 무언(無言)의 경고 같다. 그런데 정작 놀란 것은 국회의사당 주차장이었다. 자전거가 즐비하고 자동차는 단 한 대 있다. 덴마크 국회의원이 이렇게 알뜰하다니. 사진 5 국회의사당 앞 하기야 덴마크에는 ‘얀테(Jante)의 법칙’이 있다. ‘당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남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지 마라’인데, 특권을 용인하지 않는 이 법칙은 북유럽에 통용되고 있다. 점심을 먹고 스웨덴으로 가기 위해 헬싱괴르 바닷가로 갔다. 페리(ferry)에서 셰익스피어 비극 ‘햄릿’의 무대인 크론보그 성을 보았다. 배 타는 내내 햄릿의 명대사가 귓전을 울린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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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6·10민주항쟁 32주년 기념일입니다. 지극히 평범했던 국민들이 독재와 불의에 맞서 일어나 자유와 정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지켜낸 위대한 역사입니다. 오늘의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신 수많은 열사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립니다.   특히 박종철·이한열 두 분 열사의 용기와 헌신에 한없는 경의와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너무도 당연한 진리가 대한민국 헌법 제1조2항이 되기까지 헌신하신 수많은 분들의 희생을 우리는 항상 기억하고 추모합니다. 3·1만세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 3·15의거, 4·19혁명으로 이어진 숭고한 가치는 민주주의의 위대한 이정표가 되었고, 5·18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으로 이어가며 역사의 물길을 바꾸어놓았습니다. 그 길의 선두에는 항상 광주 전남이 있었으며, 특히 5·18민주화운동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뿌리가 되었고 6월항쟁은 5‧18의 전국적 부활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손으로 국민이 주인되는 민주정부를 세워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사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정치 민주화를 이루었고, 눈부신 경제성장을 거듭하며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지만 여전히 빈부격차, 이념 갈등, 지역 차별, 역사 왜곡 등 우리 안에 버려야 할 것이 많고, 맞서 싸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극심해지는 경제적 불평등 속에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일자리도, 행복한 삶의 기본이 되는 인권도 위협받고 있습니다. 진정한 국민통합을 이루며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세상, 이것이 6월 항쟁의 정신계승이며, 후손들에게 물려줄 소중한 유산입니다. 시대는 정치 민주화를 이루었던 우리 광주에 ‘경제 민주화’라는 또 하나의 시대적 과업을 맡겼습니다. 우리 광주는 노사민정 사회대타협의 광주형 일자리를 성공시키고 4차산업혁명을 선도하여 우리 사회에 양보와 타협, 나눔과 연대 정신을 확산시키고 많은 상생의 일자리를 만들어 내겠습니다. 대한민국의 굳건한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다시 한번 힘차게 결의하고 당당히 나아가겠습니다. 역사는 평범하지만 위대한 국민들에 의해 전진합니다. 2019년 6월 10일 광주광역시장 이용섭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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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은강항선생 400주년 일본 위령제 1619년 5월 6일(음)을 기점(起點)으로 2019년 6월7일은 수은강항선생이 타계한지 400년 즉 새로운 세기의 원년임을 일본이 아는 것이 아닌지 잠시 착각의 타임머신을 타는 것 같다. 강항은 정유재란 포로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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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6-09 / 뉴스공유일 : 2019-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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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송시대에 이항은 재상이었고, 왕단(王旦)은 부재상이었다. 그때 국경선 일대는 한창 어수선했다. 그들은 국경 보호문제를 처리하느라 저녁을 늦게 먹기가 일쑤였고 그런 날이면 으레 왕단은 불평의 소리를 늘어놓곤 했다. '언제나 내 평생에 근심걱정 없이 편안한 세월이 올까?' '밖의 근심을 경계하는 것이 좋은 일이오' 이항이 말했다. '속담에 밖이 조용하면 집안에 근심이 생기노라'했소. 사람은 눈앞에 질병이 보이면 즉시 병원으로 찾아 가듯이 작은 근심이 있어야 부지런해지는 법이오. 내가 죽고 나면 자네가 재상이 될 거요. 일단 국경지대가 평화롭게 되면 황제의 마음이 변할 수가 있으니 조심하기 바라오' 왕단은 설마 하는 마음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항 재상은 여전히 매일같이 수재와 가뭄, 도둑사건 등 여러 가지 불길한 일만 모아가지고 황제에게 아뢰었다. 그러면 황제는 안색부터 흐리며 불쾌해 했다. '사소한 일, 그것도 나쁜 일만 모아 가지고 황제에게 아뢴다면 오히려‥‥' '아니, 황제께서 그런 것 정도를 모르겠소?' 이항이 말했다. '황제께서는 아직 젊기 때문에 각 곳의 어려운 상황을 알아야 하며, 항상 두려운 마음을 지녀야 하오. 만약 그렇지 않으면 혈기가 왕성하여 나쁜 일에 빠지기 쉬우며, 혹은 쓸모없는 큰일을 벌일 수도 있소. 나는 이미 늙어서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보게 되지 않겠지만 당신은 앞으로 꼭 조심해야 할거요.' 그 후 이항은 죽었다. 이때라고 생각한 적들이 화해의 손길을 뻗쳐오자 젊은 황제는 금새 경계심을 풀고 그들의 제안에 넘어갔다. 황제는 술과 여색에 빠져 세월이 가는 줄도 모르고 허송세월을 보냈으며, 조정의 간신들은 나라 일을 망치고 있었다. 그때 왕단이 사직하려 했지만 황제가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제서야 왕단은 이항에 대해 탄복했다. '성인은 확실히 다른 데가 있다!'       2019. 6. 10     강원구 한중문화교류회 중앙회장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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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6-09 / 뉴스공유일 : 2019-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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