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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염원  고담 김연하 시집 (전자책) / 한국문학방송 刊   겨울 끝자락에 묻어온 봄바람의 흔적은 아직 살갗을 애이며 사람들의 가슴에 벅찬 설렘으로 물 드리는 연초록빛이 나뭇가지에 속삭이는 봄의 길목에 서있습니다.   이번 시집의 제호는 통일統一의 염원念願으로 정했습니다. 남북의 뿌리는 하나인데 외세에 의하여 둘로 갈라진 조국의 역사를 되돌려놓을 물굽이 굽이를 따라 통일을 열망합니다.   힘든 난관이 켜켜이 쌓였다 해도 민족끼리 닫힌 마음을 열고 여론을 모아 진지한 대화를 나누며 손에 손을 잡고 화해와 용서로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하고 휴전선 155마일 철조망을 걷어내야 하며 통일의 횃불을 밝혀 한라산에서 백두산 천지까지 하나가 되도록 염원하면서 이글을 썼습니다.   이시집의 구성 순서는 통일염원, 유채꽃바다, 바람의 날개, 가을 달밤, 설해목, 풍차등 6부로 나누어 펴내게 되었습니다.   끝으로 이 시집을 읽는 독자 여러분의 공감을 기대 합니다. ― <머리말>           - 차    례 -     머리말  제1부  통일의 염원 통일의 염원  동토에 부는 훈풍  평화 통일  통일 전망대에서  유월이 오면  도라산역에서  임진강에서  염원念願  철조망 앞에서  한탄강  통일의 문  눈물의 바다  피어라, 무궁화여   제2부  유채꽃 바다 유채꽃 바다  서귀포의 봄  안개 속에서  모란꽃 사랑  음악 분수  치자꽃  창을 열면  배꽃  내 마음은  아침햇살  백조의 삶  새만금의 아침  황소의 눈물  제3부  바람의 날개 바람의 날개 금성골  사랑도에서  밤 바다에서  가을의 회상  바람 속에서  낙산 해돋이  항해  세월  산정호수  기분 좋은 날  부부인연  이산가족  제4부  가을 달밤 가을 달밤  낙엽을 밟으며  달빛소나타  호수의 밤  별이 뜨는 밤  달빛 아내  섭지코지  주상절리대  옥구평야  성산 일출  백록담  우면산을 오르며  달이 뜬 호수  제5부  설해목 설해목  올림픽 성화  대청마루  겨울 철새  시혼詩魂  선물  빛  잡초 인생  옹이  우주의 꿈 구름  인연의 세월  우리의 조국  제6부  풍차 풍차  외돌개의 낙조  천지연폭포  등대가 되리  이중섭 전시관에서  가파도 청보리  해녀의 삶  동행 길  한라산  정방폭포 앞에서  제주 민속촌에서  올래길을 걸으며  마라도  [2019.04.01 발행. 123쪽. 정가 5천원(전자책)] ※ 이 책은 콘텐츠몰.com 에서 바로 구매 및 열람이 가능합니다. 콘텐츠몰 바로가기(클릭) ◑ 전자책 미리보기(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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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3-27 / 뉴스공유일 : 2020-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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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칼럼

1590년 2월28일에 선조는 창덕궁 인정전에서 헌부례(獻俘禮 : 포로를 바치는 의식)를 거행했다. 진도사람 사을화동(沙乙火同)이 왜구의 향도(嚮導)노릇을 해왔는데 조선의 요구로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가 잡아왔다. 대마도주는 선조에게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면서 공작새 한 쌍과 조총(鳥銃)을 바쳤다. 그런데 선조는 조총을 쳐다보지도 않고 군기시에 보관토록 지시했다. 1543년에 일본 규슈 근처의 종자도에 도착한 포르투갈 상인이 종자도 영주에게 조총을 바쳤다. 이 신무기는 일본 각지로 퍼져 기존의 전투 양상을 바꾸었다. 조총의 위력을 실감했던 오다 노부나가는 조총수 양성에 진력했다. 그는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조총으로 최강의 기마군단 다케다 가쓰요리를 이겼다. 노부나가는 3교대 연속 사격 전술을 썼다. 조총의 장전 시간이 꽤 걸리는 점을 보완하기 위해 조총수를 3열로 배치시켜 연속 사격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노부나가는 1582년에 부하 아케치 미쓰히데의 반역으로 교토 혼노시(本能寺)에서 자결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당시에 원정 중이었는데 노부나가가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회군하여 교토의 야마자키 전투에서 미쓰히데를 토벌했다. 1585년에 히데요시는 관백이 되고 1590년에는 100년간의 전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일본을 통일했다. 한편 1592년 2월에 선조는 신립과 이일을 파견하여 각 도의 병기를 점검토록 했다. 신립은 경기도와 황해도, 이일은 전라도와 충청도로 갔는데 점검이라는 것이 활·화살·창과 칼뿐이고 대포나 화약은 없었다. 그나마 장부상 점검이었다. 신립은 1583년 온성부사 때 여진족을 무찌른 장수로 안하무인이었다. 수령들은 신립을 두려워 해 백성들을 동원해 길을 닦고 극진히 접대했다. 대신의 행차도 이만 못했다. 1592년 4월1일에 신립은 선조께 복명한 뒤 류성룡과 대화를 나누었다. 『징비록』에 나온다. 류성룡 : “멀지 않아 변고가 생기면 공이 마땅히 그 일을 맡아야 할 텐데 공의 생각으로는 오늘날 적의 형세로 보아 그 방비가 충분하나요?” 신립 :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류성룡: “그렇지 않소. 예전에는 왜적이 창·칼만 믿고 있었지만, 지금은 조총과 같은 우수한 병기가 있으니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요” 신립: “비록 조총이 있다고는 하나 그 조총이라는 게 쏠 때마다 사람을 맞힐 수 있겠습니까?” 신립, 너무나 안일하다. 더구나 신립은 수군을 폐지해야 한다고 선조에게 건의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이순신이 수군의 중요성을 강력히 주장하여 이 논의는 중단되었다. 4월13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4월28일에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서 전사했다. 신립은 험준한 요새 조령을 지키지 않고, 기마병이 싸울 수 있는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 그러나 기마병이 조총으로 단련된 왜군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날 저녁에 선조는 신립의 패전 소식을 접했다. 4월30일 새벽에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도망쳤다. 이를 보고 성난 백성들은 경복궁과 창덕궁에 불을 지르고 장예원의 노비문서를 불태웠다. 5월3일에 왜군은 한양에 무혈 입성했다. 임진왜란은 예고된 전쟁이었다. 충분히 대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선조의 무능, 집권당의 안일, 그리고 장수들의 오만이 조선을 아비규환으로 만들었다.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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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3-22 / 뉴스공유일 : 2019-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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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공연/전시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은 28일 3층 기획전시실에서 ‘태극기 특별전’ 개막식을 개최한다.  ‘우리 역사의 물결 – 태극기’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전시는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5·18민주화운동기록관, 5·18기념재단,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등이 공동으로 마련했다. 특히 3·1운동 등 독립운동 당시 태극기, 5·18민주화운동 및 한국 민주화운동 당시 태극기 등 한국 근현대사 속 역사적 장면에 등장했던 태극기를 전시 콘텐츠로 제작해 선보인다. 전시는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청, 백범김구기념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노무현재단, 부산민주공원 등 오픈 아카이브가 개설된 전국 21개 역사·기억 기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태극기(이미지), 사진, 영상 등을 협조 받아 ▲독립의 염원을 담은 태극기 ▲민주주의의 희망을 담은 태극기 ▲국민주권의 꿈과 희생을 담고 있는 5·18 태극기 ▲평화와 통일로 나아가는 태극기 등 4개 세션으로 운영된다. 먼저 일제에 징용돼 남양군도 등에서 미군 포로가 됐던 한인 징용자들이 만든 주간지 자유한인보 제7호 부록(명부, 태극문양 포함, 1945년), 태극기가 들어간 군인 명찰(해남도남구한적군인명찰, 1945년) 원본(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제공)이 전시된다. 또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5·18 희생자 태극기(1980년, 원본, 1997년 발굴), 5·18유공자 태극기(1987년, 1/2 축소 복제본, 1997년 발굴), 5·18 시민들이 사용한 태극기(1980년, 출력물), 5·18유공자의 관을 운구할 때 덮은 대형 태극기와 유골함을 감싸는 태극기 문양 보자기(국립5‧18민주묘지관리사무소 제공) 등도 만나볼 수 있다. 태극기가 들어간 엽서(대한제국 및 일제 강점기 제작), 백범 김구 선생의 서명이 들어 간 태극기(등록문화재 388호), 태극기와 함께하는 우리 역사 다큐멘터리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국가기록원 등), 일제강점기 발행된 태극기 신문기사(매일신보, 신한민보 등) 등은 사진, 영상 등 아카이브 콘텐츠로 제작해 전시된다. 이와 관련,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은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과 28일 상호 협력을 위한 MOU를 체결하고 지역 및 기관 간 협력을 꾀할 계획이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태극기가 지난 100년 대한민국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역사적 현장에 언제나 함께했던 국민의 역사적 유산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준비하는 우리 국민의 유산으로써 과거·현재·미래 세대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진정한 국가문화유산으로 인식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전시는 4월11일부터 5월31일까지는 부산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주최, 기획전시실)에서 진행되며, 8월부터는 충북 노근리평화기념관, 부산 민주공원 등 전국 주요 기관 등을 찾아가는 태극기 순회전시 형식으로 열린다.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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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2-27 / 뉴스공유일 : 2019-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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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칼럼

1868년에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일본은 1871년 11월에 미국과 유럽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우대신 이와쿠라 도모미(47세)를 특명전권대사로, 기도 다카요시(39세), 오쿠보 도시미치(42세), 이토 히로부미(31세), 야마구치 나오요시(33세)를 부사로 하는 사절단은 1873년 9월까지 23개월간 미국과 유럽 12개국을 방문했다. 순방 목적은 불평등 조약의 개정을 위한 예비 교섭과 선진국의 문물과 제도를 견문(見聞)하는 것이었다. 1)     1871년 11월12일에 이와쿠라 사절단은 요코하마에서 미국 태평양회사의 증기선 ‘아메리카 호’를 타고 미국 순방길에 올랐다. 일행은 사절단 46명, 수행원 18명 외에 미국으로 떠나는 유학생 59명(남자 54명 여자 5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자 중에는 8세인 쓰다 우메꼬도 있었다. 쓰다는 나중에 쓰다주쿠(津田塾)을 설립하여 일본 여성의 고등교육에 헌신한 인물이다. 2)  사절단은 출발한지 24일 때 되는 12월6일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미국을 처음 접한 사절단은 문명쇼크에 빠졌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절단은 매일 열렬한 환영을 받았는데, 12월14일 환영회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연설을 했다. “일본 정부와 국민이 가장 희망하는 것은 서양문명의 정점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은 한 개의 탄환도 쏘지 않고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폐번치현 개혁을 달성했다. 이러한 일은 동서고금에 없는 일이다. 일본이야말로 떠오르는 태양과 같은 나라다.” 3) 그의 당당한 연설에 청중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한편 대륙횡단열차에 몸을 실은  사절단은 1872년 1월18일에 워싱턴에 도착했다. 사절단은 1월25일에 백악관에서 그랜트 대통령을 예방하였고 2월3일부터 국무성에서 조약개정을 위한 예비교섭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외교교섭에 들어가자 미국의 대응은 엄중했고, 사절단은 냉혹한 현실의 벽을 실감해야 했으며 조약 개정 협상을 포기했다.     미국에서 7개월을 보낸 사절단은 1872년 7월3일 보스톤에서 배를 타고 영국으로 향했다. 런던에 도착한 것은 7월14일이었다. 이후 사절단은 맨체스터, 리버풀등 공업도시를 시찰하면서 산업혁명의 본산지 영국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11월16일에 사절단은 프랑스에 도착했다. 그런데 프랑스의 정치는 불안하기만 했다. 사절단의 눈에 비친 저항하는 시민들은 폭도일 뿐이었다. 1873년 2월17일에 사절단은 파리를 출발해 벨기에와 네델란드를 거쳐 3월9일에 독일 베를린에 도착했다. 3월11일에 사절단은 독일황제 빌헬름 1세를 예방했다. 3월15일에는 1870년 프로이센 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하여 1871년 1월에 독일을 통일시킨 철혈재상 비스마르크(1815∽1898)가 주재하는 만찬에 참석했다. 이 날 행해진 비스마르크의 연설은 유신 3걸인 기도 다카요시와 오쿠보 도시미치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4) 비스마르크는 서양이 약육강식의 국제정치 아래  놓여 있다고 전제하면서 “소국은 만국공법(국제법)을 지키려 하나, 대국은 스스로의 이익이 되면 그것을 고집하지만 일단 불리하게 되면 군대를 바탕으로 그것을 짓밟는다.”고 강조했다. 5) 사절단은 비스마르크의 연설에서 서구 열강의 추악한 실상, 제국주의의 단면을 뼈저리게 느꼈다. 약육강식의 국제정치. 지금은 어떤가?  사절단은 독일에 이어 러시아 · 덴마크 · 스웨덴 · 오스트리아 · 스위스 등을 순방했다. 그런데 7월9일 일본으로부터 급히 귀국하라는 전보가 왔다. 정한론(征韓論 조선침략)으로 국내사정이 급박해졌기 때문이었다.   사절단은 포르투갈, 스페인 순방을 취소하고 서둘러  9월13일에 귀국했다. 귀국 한 사절단의 당면 사항은 정한론 문제를 슬기롭게 푸는 일이었다.     사진 1  메이지 신궁 참배객들   사진 2  줄지어 기다리는  참배객들   1) 이와쿠라 사절단은 1878년에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 보고서를 간행했다.   2) 김희영 지음, 이야기 일본사, 청아출판사, 2006,  p 522 3) 구태훈 지음, 일본 제국, 일어서다, 재팬리서치 21, 2010, p 127 4) 유신 3걸은 기도와 오쿠보,  사이고 다카모리이다. 5) 구태훈, 위 책, p 131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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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9-01-28 / 뉴스공유일 : 2019-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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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5년 7월22일에 대간은 합사(合司)하여 노사신의 죄를 여러 번 아뢰었으나 연산군은 오히려 대간을 공박했다.  "경들이 중의(衆意)를 수합해 보라고 청하였지만, 의논하는 자가 마음속으로는 그르게 여기지 아니하면서도 대간의 입을 두려워하여 옳지 않다고 한다면, 경들이 이것을 빙자하여 더욱더 강력하게 말할 것이 아니냐. 이러니 듣지 않는 것이다.(중략)   대간은 이기려고만 힘써서, 비록 남이 한 말이 옳을지라도 자기 의사와 맞지 않으면 논박하기 때문에, 대신의 의논도 다 자유롭지 않다. 이로 미루어 보면 비록 그 의논이 공의에서 나왔을지라도, 내 생각으로는 공의가 되지 못할 것 같다.”(연산군일기 1495년 7월 22일 1번째 기사) 이 날 노사신은 또 사직을 청했지만 연산군은 윤허하지 않았다. 7월23일에 대사헌 최응현·대사간 이감 등이 노사신을 처단하라고 수차례 아뢰었으나 연산군은 거부하였다. 이에 대간들은 사직하겠다고 물러가니, 연산군은 복직을 명하였다. (연산군일기 1495년 7월 23일 1번째 기사) 7월24일에도 대간은 자신들을 빨리 파직하라고 하였으나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이 날 홍문관도  상차(上箚)하였다.   "대간을 가두면 선비가 장차 혀를 묶고 입을 다물 것이니 국가의 복이 아닌데, 노사신은 말하기를 ‘위엄 있는 결단(威斷)이다.’라며 전하를 치하하기에 겨를이 없으니, 이는 치(治)를 난(亂)으로 바꾸어서 제 야욕을 펴고자 하는 것이니 간사함이 심합니다.    지금 노사신의 말이 ‘나이 이미 70이요, 지위 역시 극에 달했는데 무슨 소망이 있겠느냐.’ 하였는데, 이는 특히 ‘반드시 이기려고만 한다.’는 말을 꾸며서 전하를 기만한 것이니, 그 교활함이 심합니다. 이는 거짓으로서 임금을 미혹하게 하고 나라를 망칠 것뿐인데, 전하는 그 공손함을 기뻐하시고 죄주어 내쫓지 않으시니, 신 등은 실망됨을 이기지 못합니다. 바라옵건대 결단하소서.’ 하였다. (연산군일기 1495년 7월24일 1번 째 기사)   사진 1  창덕궁 돈화문 사진 2  창덕궁 인정문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문) 7월25일에도 대간들은 노사신을 조정에서 내쫓기를 거듭 아뢰었다  "노사신이 대간을 잡아 가두는 것을 위엄 있는 결단(威斷)이라 하여 기뻐서 치하하였으니 이는 곧 저 이사(李斯)가 독책(督責)을 권장한 술책인데, 이와 같은 간신을 어떻게 조정에 둘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미 노사신을 옳다고 보시고, 또 조정의 공의도 수합하지 아니하시니 빨리 신등을 파직시켜 주소서." 이사(李斯 ?- BC 208)는 중국 최초로 통일국가를 이룩한 진(秦)나라 (BC 221∼207) 시황제(始皇帝) 때의 승상이었다. 그는 진시황제를 보좌하여 천하 통일에 기여했고, 통일 후에는 군현제, 법가사상 등을 실시하여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한편 그는 분서갱유 사건 등을 주도하여 악명이 높았고, 대의를 지켜야 할 때 개인의 이익을 좇아 결국 자신을 망치고 진나라를 패망의 길로 몰았다. 1) 한편 연산군은 대간들의 상소를 듣지 아니하였다. 대간들은 다시 아뢰기를, "노사신의 간사한 정상은 대간·시종(侍從)·원상(院相)·승지가 모두 배척하는데도 전하께서 유독 결단을 내리시지 않으시니, 신 등은 통분하고 애석함을 이기지 못합니다." 하였다.   이러자 연산군은 "일 처리는 안하고 영의정을 죄주고자 하니, 경들의 마음은 편안한가?" 라고 힐문했다. 대간이 다시 아뢰기를, "나라를 그릇되게 하는 간신을 제거하게 되면, 어찌 신 등만의 마음만 편안하리까. 온 나라 인심이 역시 다 만족하여 전하의 밝으심을 칭송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날 홍문관에서도 신의 직을 갈아 주라고 하였으나, 듣지 아니하였다. 대간이 다시 아뢰기를, "신 등이 나라를 그릇되게 하는 간신을 배척하기를 청하여도 허락하지 않으시고, 신 등의 직을 갈아 주시기를 청하여도 허락하지 않으시므로, 이 때문에 신 등이 여러 날을 합문(閤門)에 엎드렸으나, 전하의 윤허하지 않는다는 전교를 들었을 뿐이며 한갓 일만 폐하게 되니, 신 등이 어찌 감히 직에 있으리까." 하였다. (연산군일기 1495년 7월 25일 1번째 기사)    사진 3  옥당 (홍문관의 별칭이다.) 7월27일에도 대사간 이감이 서계하기를, "사간원으로 말하면 간쟁(諫諍)하는 일을 제외하면 서경(署經)하는 한 가지 일뿐이나, 사헌부는 조정의 기강이 존재하는 곳이라 국가의 안락과 근심이 달렸으니, 하루라도 출근하지 않으면 기강이 해이하며 백성의 원망이 적지 아니할 것입니다. 백성의 원망이 날로 일어나면 나라의 근본이 크게 흔들리고 기강이 날로 해이해지면 국가가 장차 위태로울 것입니다. 이러한 위기를 오직 대간·홍문관·예문관에서만 말할 뿐, 육조(六曹)나 의정부에서는 한 마디 말이 없으니, 이는 노사신을 두려워하여 말하지 않는 것이므로, 이야말로 진(秦)나라 조고(趙高 ?∽BC 207)가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해도[指鹿爲馬 지록위마] 사람들이 감히 아니라고 못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신은 통곡하는 바입니다. 전일에 전하께서 하교하시기를 ‘노사신이 말한 것은 맞는 말이라 불가할 것이 없고, 대간이 말한 것도 옳다고만 할 수 없으니, 물러가서 생각해 보라.’ 하셨는데, 이는 전하께서 인정에 끌리시어 결단을 못하시는 것입니다. 대간이 명령에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죄줄 만 하다면, 노사신은 간사하고 아첨하여 전하를 그르쳤으니 역시 죄줄 만합니다. 대간이나 노사신을 한꺼번에 죄주신다면 조정으로 보아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였다. 지록위마(指鹿爲馬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다)! 이는 진나라 조고가 황제를 농락하고 권세를 부린데서 나온 고사이다.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BC 221∼207) 진시황은 영원히 살기를 바랐지만 BC 209년 순행 도중 중병에 걸렸다. 그는 천수가 다했음을 직감했던지 환관(宦官) 조고(趙高)에게 명하여 큰아들 부소(扶蘇)에게 보내는 편지를 만들게 하였다. 편지에는 ‘군사를 몽념(蒙恬)에게 맡기고 함양(咸陽)에서 나의 관을 맞아 장사를 지내도록 하라.’고 쓰도록 했다. 이는 큰아들 부소에게 황위를 물려준다는 유서였다. 그런데 편지가 부소에게 전해지기도 전에 진시황이 승하하였다. 편지와 옥새는 모두 환관 조고가 지니고 있었다. 진시황의 죽음을 아는 사람은 다만 시황제의 막내아들 호해(胡亥)와 승상 이사(李斯)와 조고, 그리고 심복 환관 오륙 명뿐이었다. 조고는 먼저 호해를 설득한 다음, 승상 이사까지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세 사람은 비밀리에 담합하여 호해를 황위 계승자로 세우고, 부소와 몽념 장군에게 자결하라는 내용의 유서를 조작했다. 부소는 자결했고, 몽념은 자결을 거부하다 반역죄로 사형 당했다. 환관 조고는 황제 호해의 무능을 이용하여 모든 권력을 쥐었으며, 급기야 승상 이사까지  모반죄를 뒤집어씌워 제거해 버리고 자신이 승상이 되었다. 그런데 조고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황제의 자리를 노렸다. 한 가지 걱정은 여러 신하들이 따라 줄까 이었다. 그래서 조고는 신하들을 시험하기 위해 사슴을 호해 황제에게 바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말입니다.”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승상이 잘못 본 것이오. 사슴을 말이라 하는구려.” 조고가 대신들을 둘러보며 묻자 어떤 사람은 말이라고 하며 조고의 뜻에 영합했다. 어떤 사람은 사슴이라고 대답했는데, 조고는 사슴이라고 말한 자들을 암암리에 모두 처형했다. 이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진이세본기(秦二世本紀)」』에 나온다. 2) 사진 4 진시황의 병마용갱 (중국 서안에 있다) 대간들은 의정부와 육조가 노사신이 두려워 말을 못하는 것은 지록위마나 다를 바 없다고 아뢰었지만, 연산군은 대간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러자 대간이 모두 사직했다. 연산군은 복직을 명하였다. 대간이 부름을 받고 나아가 대궐 뜰에 서서 아뢰기를, "큰 간신(大奸)이 국정을 맡고 있으나 능히 내쫓지 못하니, 신들의 죄가 중한데 무슨 낯으로 복직하겠습니까?" 하였다. (연산군일기 1495년 7월27일  1번 째 기사)   1) 진시황 사후에 반란이 일어나 B.C 207년에 진나라는 멸망하고 한나라가 건국하였다. 차이나(China)라는 중국의 영문 이름은 진에서 유래하였다. 2) 얼마 후 이사와 조고는 사이가 나빠졌고, 조고가 이사를 처형했다. 그 후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얼마 가지 않아 반란군들이 수도에까지 들어왔다. 조고는 허수아비 황제 호해를 죽이고 호해의 아들 자영을 제위에 앉혔다. 그는 다시 자영까지도 죽이려 했으나 음모가 발각되어 암살당하고 말았다.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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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책

광주교육대학교(총장대리 고재천)는 윤리교육과 강성률 교수가 청소년을 위한 정말 쉬운 동양철학 ‘14살에 처음 만나는 동양철학자들’(북멘토 출판사)을 출간했다고 16일 밝혔다. 이 책은 강교수의 20번째 저서이자 16번째 철학도서(다른 4권은 장편소설)이다. ‘14살에 처음 만나는 동양철학자들’은 아내가 도망쳐버렸다고 전해지는 공자, 모방의 천재인 맹자, 생존 자체가 미스터리인 노자, 아내의 시신 옆에서 노래를 부른 장자, 우정의 상징 ‘관포지교’에서의 관중, 친구의 모함에 의해 죽은 한비자, 배고픈 너구리 앞에서 염불만 외운 원효, 매일 아침 변소에서 50번씩 치아를 마주친 이황 등 철학자들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그들의 핵심사상을 부록으로 정리하였다. 저자인 강교수는 “요즘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지만, 청소년들이 흥미를 가질만한 책은 많지 않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은 이야기책을 읽어 내려가는 느낌이 들도록 쉽고 재미있게 썼다.”고 말했다. 한편, 광주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인 강교수는 교내에서 몇몇 보직을 역임하고 다양한 학회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한국 산업인력공단 비상임이사 및 옴부즈만 대표를 역임하였고, 현재는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상임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소설가(한국문인협회 정회원)로 등단하였으며, 풍향학술상, 교육과학기술부장관상, 대통령상 등을 수상하였다. <기독 타임즈> 및 <영광신문>, <광주교통방송 라디오>에 ‘강성률 교수의 철학이야기’를 연재 혹은 방송 중에 있으며, 저서로는 본서 외에 『청소년을 위한 동양철학사』(2009년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우수도서, 2015년 베트남 언어로 출판,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주요 참고문헌으로 등재),『칸트, 근세철학을 완성하다』(한국출판협회 선정 ‘2017년 청소년을 위한 좋은 책’)를 포함한 철학도서 15권, 장편소설『땅콩집 이야기』시리즈, 단편모음집 『딸콩이』 등을 포함한 문학작품 4권 등 총19권이 있다.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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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책

시가 있는 페치카 Ⅲ  김형애 시집 (전자책) / 한국문학방송 刊     시간에 이끌리어 한없이 달리다가 숨을 고르기 위하여 나는 멈칫 섰었다. 그때마다 발자취를 바라보며 나의 시어(詩語)를 모았다.    그리하여 세 번째 시집,『詩가 있는 페치카 III』를 상재(上梓)한다. 이 시집에 담긴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 작은 기쁨이 일렁이기를 바란다.   풍성한 감동과 사랑을 안겨 주시는 하나님께 두 손 모아 감사드린다. ― <머리말>            - 차    례 -   저자의 말  제1부 홍매화에 고드름 와이토모 동굴   달빛  대향(大鄕)의 사랑  뵈이야 빙하  Boyabreen Glacier  완도에 가면  숲길 속으로  국화의 기다림  빗속 코펜하겐  청년에게 시온의 대로(大路)를  바다  형산강에서  홍매화에 고드름  우수(雨水)   제2부 깨어진 항아리의 품위  정월 대보름  축복하신 날  어두움을 깨거라  빈 세상  꿈꾸는 정유년(丁酉年)  ‘Last Christmas’  해오름  바람 타고 올라간 장로님  아기 예수 오셨네  벤치 위에 낙엽  하늘 부모의 눈물  꽃 무릇  폭우 속 비상(飛翔)  깨어진 항아리의 품위(品位)  제3부 통일 밥상 가을 비  님이여, 빨리 오소서  크신 손  하얀 목화 꽃  무궁화 통일열차  통일 밥상  샤워한 살구  뉴튼 수도원 구상나무  밤과 꿈  빈 벤치  수덕사 환희대(歡喜臺)  바다로 간 단풍  봄이 오는 소리  하얀 그리움  제4부 봄맞이한 안자 보레고 사막 무(無)를 향(向)한 질주(疾走)  노란 눈꽃  흐리고 바람 불던 날  철쭉꽃 한 송이  햇살 한 줌  백사장(白沙場) 구름  빗속 꿈길  낙엽이 전하는 말은?  펀치 볼(Punch Bowl)  시월의 아픔  추석  봄맞이한 안자 보레고 사막  눈물의 키스  제5부 멍멍이의 다문화 숲 속에 눕힌 심신(心身)  구월과의 이별  꽃잎 카펫  아버지를 우시게 한 나  십자 소(沼)  해바라기  통독 이룬 그분의 영면  달맞이꽃  꿈 속 탄생  순결한 마음 주소서  거산(巨山) 김영삼 대통령  멍멍이의 다문화  제6부 오슬로 예술가들 자멸(自滅)하는 사람 때문에  김정남 피살  봄비  LSFCC 10주년 기념예배  필리핀교회 창립기념 예배  오슬로 예술가들  밤의 색채(色彩)  실오라기 나무 가지에 새싹  춘분(春分)에  하늘에 큰 별 뜨다  Guanacaste의 밤  제7부 월간 세브란스 게재 자작시⦁번역시 여가(Leisure)  낙엽  희망(Hope)  탄생  ‘Dancing House’  미수(米壽) 되신 김정렬 장로님!  시린 하늘  예수님의 절규와 순종  [2019.01.01 발행. 125쪽. 정가 5천원(전자책)] ※ 이 책은 콘텐츠몰.com 에서 바로 구매 및 열람이 가능합니다. 콘텐츠몰 바로가기(클릭) ◑ 전자책 미리보기(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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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칼럼

#1. 1590년 2월28일에 선조는 창덕궁 인정전에서 헌부례(獻俘禮  포로를 바치는 의식)를 거행했다. 진도 사람 사을화동(沙乙火同)이 왜구의 향도(嚮導) 노릇을 해왔는데 일본 사신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 義智)가 조선의 요구에 의해 잡아왔다. 일본 사신은 선조에게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면서 공작새 한 쌍과 조총(鳥銃)을 바쳤다. 그런데 선조는 조총에 대하여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군기시에 보관토록 지시했다. 1543년에 일본 규슈 근처의 종자도에 도착한 포르투갈 상인이 종자도 영주에게 조총을 바쳤다. 이 신무기는 일본각지로 퍼져 기존의 전투양상을 바꾸었다. 조총의 위력을 실감했던 오다 노부나가는 조총수 양성에 진력했다. 그는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조총으로 최강의 기마군단 다케다 가쓰요리를 이겼다. 노부나가는 3교대 연속 사격 전술을 썼다. 조총의 장전 시간이 꽤 걸리는 점을 보완하기 위해 조총수를 3열로 배치시켜 연속 사격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노부나가는 1582년에 부하 아케치 미쓰히데의 반역으로 교토 혼노시(本能寺)에서 자결했다. 노부나가의 심복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는 당시에 원정 중이었는데 노부나가가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회군하여 교토의 야마자키 전투에서 미쓰히데를 토벌했다. 1585년에 히데요시는 관백이 되고 1590년에는 100년간의 전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일본을 통일했다. #2. 1592년 2월에 선조는 신립과 이일을 파견하여 각 도의 병기를 점검토록 했다. 신립은 경기도와 황해도로, 이일은 전라도와 충청도로 갔다가 한 달 뒤에 돌아왔는데, 그 점검이라는 것이 활·화살·창과 칼뿐이고 대포나 화약은 없었다. 그나마 장부로 점검할  뿐이었다. 신립은 1583년 온성부사일 때 여진족을 무찔러 명성이 높았는데 잔인하고 난폭하다는 평판이 자자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사람을 죽여 자기의 위엄을 세웠다. 수령들은 신립을 두려워 해 백성들을 동원해 길을 닦았으며 극진히 접대했다. 대신의 행차도 이만 못했다. 1592년 4월1일(임진왜란 발발 13일전)에 신립은 선조 임금께 복명한 뒤 류성룡를 찾았다. 류성룡은 신립과 국방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징비록』에 나온다. “멀지 않아 변고가 생기면 공이 마땅히 그 일을 맡아야 할 텐데 공의 생각으로는 오늘날 적의 형세로 보아 그 방비가 충분하나요?” 내 물음에 신립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렇지 않소. 예전에는 왜적이 창·칼만 믿고 있었지만, 지금은 조총과 같은 우수한 병기가 있으니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요” 신립은 황급히 “비록 조총이 있다고는 하나 그 조총이라는 게 쏠 때 마다 사람을 맞힐 수 있겠습니까?” 내가 다시 말했다. “태평세월이 너무 길었소. 그래서 병사들은 겁이 많고 나약해졌으니 급변이 일어날 때 그에 항거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외다. 내 생각으로는 몇 해 뒤 사람들이 군사 일에 익숙해진다면 난리를 수습할 수 있겠으나 지금 같아서는 매우 걱정스럽소.” 그래도 신립은 전혀 반성하거나 깨달은 기미 없이 돌아갔다. (김문수 엮음, 류성룡 지음, 징비록, p 48-49)  #3. 1592년 4월28일 신립이 충주 탄금대에서 패하여 전사했다. 신립은 험준한 요새  조령을 지키지 않고, 기마병이 싸울 수 있는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 그러나 기마병이 조총으로 단련된 왜군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4월28일 저녁에 선조는 신립의 패전 소식을 접했다. 4월30일 새벽에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개성으로 도망쳤다. 이를 보고 성난 백성들은 경복궁과 창덕궁에 불을 지르고 장예원의 노비문서를 불태웠다. 5월3일에 왜군은 한양에 무혈 입성했다. 왜군이 부산 땅을 밟은 지 20일만이었다.  임진왜란은 예고된 전쟁이었다. 충분히 대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조임금의 무능, 집권당 동인과 김성일의 잘못된 정세 판단, 일본에 대한 무지, 그리고 장수들의 오만이 조선을 아비규환으로 만들었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가? 국가는 안전한가? 정의롭고 청렴한가? 경제는 국가비상사태인가?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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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8-12-17 / 뉴스공유일 : 201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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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공연/전시

∙ 명인건축 대표 겸 경남대 대학원 겸임교수인 정종민 교수의 평생 力作 ∙호남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승평지(昇平誌)』이후   ‘순천의 역사·문화를 제대로 집대성한 『건축사의 눈으로 본 다시 읽는 순천인문학(P534) 』 ∙ ‘(재)한국학 호남진흥원’ 전남 문화원형 조사 발굴 지원 사업 분야 공모 보조금 지원 간행도서 [‘건축사의 눈으로 본 다시 읽는 순천인문학’ 도서 사진] 이데이뉴스 전남동부지역본부장 강진원 기자 명인건축 대표 겸 경남대 대학원 겸임교수인 정종민 교수(58세)의 평생 力作인『건축사의 눈으로 본 다시 읽는 순천인문학(P534) 』출판기념회가 2018년 12월 15일(토). 오후 2시 순천시문화건강센터 삼산도서관 3층 시청각실에 시민 200여명(방문 책자수령자 기준)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오늘 출판기념회는 ‘아고라순천공연추진위원회 운영감독·전문MC 임태수’의 사회로 ① 정종민 특강 ‘전통건축과 인문학의 만남!’,  ② 팝페라 가수 공연, ③ 출판기념회 본행사 ‘순천인문학 출판기념회 및 저서 소개’ 순서로 진행Œ÷만 오늘 참석자들에게 책자 1권씩을 편저자 정종민 교수가 서명하여 배포 했다. [‘편저자 정종민 교수’ 사진] 順天市는 역사적으로 삼한시대 마한(서기전 1세기∼서기 3세기경), 백제시대 감평군, 통일신라시대경덕왕 16년(757)에 승평군이라 불릴 정도로 약 2천 3백여 년의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역사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소홀했다.  그나마 호남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읍지로 1618년(광해군 10년)에 편찬된 순천읍지(順天邑志)인 『승평지(昇平誌)』, 18세기(정조 연간) 순천부읍지(順天府邑誌), 1784년(정조 8년) 조현범(趙顯範)의 강남악부(江南樂府)라는 향토사가 간행되었으나 한문학자가 아닌 한글세대는 읽고 이해할 수가 없는 서고에 쌓여있는 소장도서에 불과했다.   이에  편저자 정종민 교수는 이렇게 어려운 향토사를 현대인이 읽을 수 있는 살아있는 지역역사를 누구나 읽고 이해 할 수 있는 책을 만들고자 심혈을 기울인 끝에 『승평지(昇平誌)』이후 처음으로 ‘순천의 역사·문화·종교·설화·민속·명소’를 한권의 책에 담은 ‘순천의 역사·문화 총서(叢書)’ 『건축사의 눈으로 본 다시 읽는 순천인문학(P534) 』을 간행하였다. 순천시 도사동 출신인 정종민 교수는 건축사·공학석사·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동양사상과 철학을 공부하여 ‘동양철학사’ 자격도 취득한 碩學(석학)으로 대학 강단과 각종 시민강좌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현대인이 읽고 이해하기 힘든 과거에 간행된 향토사에 아쉬움을 느낀 정종민 교수는 지난 10여 년간 본업인 건축사업무보다는 오히려 ‘순천의 역사·문화·종교·설화·민속·명소 답사 채증과 옛 향토역사문화 문헌 등 사료를 수집하고, 순천시내 곳곳을 답사한 끝에 방대한 문헌과 사진자료를 담은 저서를 발간하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여 온 끝에 2015년에 “역사문화설화명소를 찾아서 ‘순천인문학(P292,  늘보기획 2025년 간행)’” 1천권을 自費(자비)로 간행하여 판매 및 무료로 배부한바 있었다. [‘편저자 정종민 교수, 순천인문학 출판기념회’ 사진1] 그러나 2015년 출판 도서에 관한 사료에 무엇인가는 부족하다는 아쉬움을 느껴온 정종민 교수는 2018년 8월 29일 전라남도와 광주광역시가 출자한 ‘(재)한국학 호남진흥원’의 공모사업 △전남 문화원형 조사 발굴, △스토리텔링과 문화콘텐츠 창작 발표, △인문학 문화강좌 프로그램 운영 등 총 3개 분야 중 △ 전남 문화원형 조사 발굴 지원 사업 분야에 『건축사의 눈으로 본 다시 읽는 순천인문학』에 응모하여 선정되었다. 정교수는 그 동안 수집한 자료를 방대한 분량으로 ‘자료·사진·그림’을 대폭 수정보완하여 한문세대가 읽을 수 있는 과거의 문어체 도서를 과감하게 탈피하여 한글세대가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구어체 형식의 도서 ‘순천의 역사·문화·종교·설화·민속·명소’를 한권의 책에 담은 ‘순천의 역사·문화 총서(叢書)’ 『건축사의 눈으로 본 다시 읽는 순천인문학(P534) 』을 간행하였다. 간행된 도서는 광주광역시 자치구와 전라남도 시군, 국립중앙도서관, 각 대학, 편저자의 오늘 순천 출판기념회 참석자에게 배부되었다. [‘편저자 정종민 교수, 순천인문학 출판기념회’ 사진2] 이번 출판기념회는 호남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읍지로 1618년(광해군 10년)에 편찬된 순천읍지(順天邑志)인 『승평지(昇平誌)』의 400주년을 기념하여 출판된 ‘구어체’ ‘한글 인문학 도서’인 ‘순천인문학’ 간행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이번 출판을 계기로 호남지방 각 시군구에서 ‘지역의 역사·문화·종교·설화·민속·명소’를 담은 ‘인문학’이나  ‘향토사’ 간행이 활발하게 연구 간행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한 관계자는 말했다. 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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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8-12-15 / 뉴스공유일 : 2018-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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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문학 > 문학강연

1. 조선 중기의 학파들  조선조 유학은 程朱의 道學을 수용하여 치밀한 개념 분석과 엄격한 실천 행위를 강조했는데, 특히 중기에 배출된 知的 巨人들을 중심으로 학문의 활동과 내용에서 일정한 연관성 혹은 공통성을 지닌 집단을 양산하였다. 이를 ‘학파’라고 부른다면, 花潭학파·退溪학파·南冥학파·栗谷학파는 이 시기를 대표한다.   趙光祖(靜庵, 1482~1519)가 道學의 뿌리를 확고하게 내린 이후, 경기도 개성에서는 徐敬德(花潭, 1489~1546)이, 파주에서는 成渾(牛溪, 1535~1598)이, 황해도 해주에서는 李珥(栗谷, 1536~1584)가, 영남 동쪽에서는 李彦迪(晦齋, 1491~1553)이, 영남 북쪽에서는 李滉(退溪, 1501~1570)이, 영남 남쪽에서는 曺植(南冥, 1501~1572)이 학파를 형성하여 도학을 전수하였다. 호남에서도 북쪽에서는 李恒(一齋, 1499~1576)이, 남쪽에서는 金麟厚(河西, 1510~1560)와 奇大升(高峰, 1527~1572) 등이 독특한 학풍을 내세워 영향력을 발휘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이항·김인후·기대승 사후에도 17세기 초, 중반에 도학을 강론하여 제자들을 양성한 一群의 유학자들이 호남지역에 흩어져 있었다. 예컨대 담양 대산의 金大器(晩德, 1557~1631), 영광 유봉의 姜沆(睡隱, 1567~1618), 임실 덕촌의 趙平(雲壑, 1569~1647), 보성 우산의 安邦俊(隱峯, 1573~1654)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호남의 유학이 기축옥사와 임진·정유왜란을 거치면서 점차 학문적 기반이 약화되고, 더구나 17세기에 들어서는 대부분의 학인들이 경기와 호서지역으로 유학을 떠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강학의 촛불을 끄지 않았다.   강항은 영광군 남쪽 불갑산 아래 유봉리에서 태어나 유년기에 가까운 雲堤 마을로 이사했는데, 관직생활과 포로생활을 뺀 나머지 생애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강학하였다. 그는 팔대(八代) 문헌가에서 태어나 유년기에 이미 뛰어난 문장 실력과 해박한 역사 지식을 인정받았고, 3년여의 포로생활 중에 보여준 탁월한 氣節은 일본인도 존경할 정도였다. 강항의 수제자 尹舜擧는 스승의 학행을 挽詩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아름답고 밝은 문장은 지금의 屈原이요, 추상같은 높은 절개는 옛날의 蘇武로다.” 그는 포로생활에서 탈출하여 귀국한 이후에도 죄인으로 자처하고 벼슬을 멀리한 채 스스로 불갑산에 갇혔다. 강항은 찾아주는 詩友들과 담론하는 한편 그의 문장과 기절을 흠모하여 찾아온 제자들을 양성하다가 52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강항은 17세기 초반에 호남 유학을 이끈 중심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간 강항에 대한 연구는 주로 시문학과 『看羊錄』, 일본에 유학전수 등 몇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졌으나, 아직까지 교사로서의 강학활동은 깊이 있게 탐색되지 못하였다. 필자는 강항에 대한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연구가 진행되려면, 그에게 영향을 준 스승들, 교유한 친구들,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 관련 유적과 유물들까지, 그 학문적 연관성을 폭넓게 탐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발표는 이러한 관심 하에 강항의 제자들에 관한 기초적인 정보를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2. 牛溪학맥의 계승  강항은 문과에 급제한 이듬해인 1594년(28세) 校書館 正字로 있을 때에 경기도 파주로 牛溪 成渾을 찾아가 기호유학의 한 맥인 우계학맥을 계승한다. ◎ 安珦(晦軒) → 權溥(菊齋) → 李穀(稼亭) → 李穡(牧隱) → 鄭夢周(圃隱) → 吉     再(冶隱) → 金叔滋(江湖) → 金宗直(佔畢齋) → 金宏弼(寒暄堂) → 趙光祖(靜     庵) → 成守琛(聽松)/白仁傑(休庵) → 成渾(牛溪) → 姜沆(睡隱) →  성혼의 학문은 도학적 성격이 매우 짙은데 그것은 일상에 체질화되어있을 만큼 강한 실천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데 강항이 성혼의 문하를 찾았을 때, 그는 동인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정치적인 입지가 약화되어 제자들을 내보낸 채 은둔하고 있었다. 이러한 곤경을 잘 알면서도 자기의 문하를 찾아온 강항에게 성혼은 단아하고 진실한[端諒] 몸가짐을 가졌다고 칭찬했다.    강항은 왜 비교적 늦은 나이에, 그것도 정치적으로 곤경에 빠져있던 성혼의 문하를 찾아갔을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현재까지 전해져오는 성혼과 강항의 문집 속에서 이 물음을 해명할만한 자료를 거의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그 흔한 시 한 수, 편지 한 통, 제문 한 장, 어록 한 구절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메마른 자료 속에서 눈에 번쩍이는 글을 한 통 만나게 된다. 강항이 쓴 「坡山四賢書院察倫堂上梁文」이라는 글이다. 이 글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된 坡山書院의 察倫堂을 재건할 때 지은 상량문이다. 여기에서 강항은 파주지역은 魯나라처럼 현인이 많이 배출되어 학문 활동이 융성했던 곳임을 강조하고, 정주철학에서 발원한 조광조의 도학이념과 실천정신을 成守琛·成渾·白仁傑·李珥 등 네 현인이 이어받아 학행을 성취한 업적을 열거하고 있다. 이들 중 성수침과 백인걸은 조광조의 문인이고, 김굉필의 도통을 조광조가 잇고 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강항의 스승 성혼은 부친 성수침과 백인걸에게 학문적 영향을 깊게 받았고, 성혼의 道友 李珥는 성수침과 백인걸의 학행에 무한한 존경심을 표하였다. 이 서원은 네 현인이 김굉필­조광조 계통의 도학이념을 강론했던 신성한 공간이었는데, 강항이 성혼을 찾아가 수학했던 牛溪書室과는 지척의 거리에 있었다. 강항은 이 글의 말미에 자신의 소망을 다음처럼 피력하고 있다.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손한 것[入孝出悌]으로 모든 행실의 근원을 삼고, 비근한 사물을 배운 뒤에 깊은 學理에 나아가는 것[下學上達]으로 평생의 일을 삼으며, 사방의 학생들이 모두 귀의할 곳으로 여기게 하고, 높은 벼슬아치와 백성들이 모두 본보기로 삼게 하며, 소인의 변덕을 배우지 말게 하고, 유학의 哲理를 이루게 하소서.  강항은 ‘입효출제’와 ‘하학상달’이라는 유교의 윤리와 학문방법이 파산서원을 통해 끊임없이 강론되어 발현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서원의 中軸인 스승 성혼을 조선조 도학의 전통을 걸머진 학자로 여겨 한평생 귀의처로 삼으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강항 자신의 도학에 대한 인식과 실현의 욕구가 강렬했기 때문에 그의 발걸음을 성혼의 문하로 옮기게 했고, 그 문하에서 수학함으로써 “道脈의 올바름을 얻어 마침내 大儒로 성장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3. 衛道정신과 道義실천  강항이 태어날 무렵, 조선의 사상계는 성리학의 핵심 문제 곧 四端七情과 人心道心 등을 둘러싸고 李滉­奇大升, 成渾­李珥가 치열한 논변을 진행하여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미 거두고 있었으나, 강항은 이러한 성과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흔한 성리학의 용어들마저 추출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는 성리학의 이론을 철저히 분석하려는 학구적 태도에서 비껴서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강항이 성리학 세계에 대해 전혀 무관심했거나 무지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조선조의 유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주자학의 經學的 철학체계로 훈련을 받았고, 강항의 학문 활동도 조선조 주류 학문인 주자학의 범주 속에서 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문집이나 일본에서 남긴 기록들을 살펴보더라도, 성리학의 주요 텍스트나 흐름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성리학의 이론체계가 거의 결핍된 것에 비해, 강항의 道學에 대한 사유는 그 편린이나마 문집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 다음은 강항의 道와 道學에 대한 사유를 엿볼 수 있는 구절이다. 道란 천하에 편재하여 소멸된 적이 없다. 중국이라 해서 남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외국이라 해서 부족한 것도 아니다. 오직 지혜가 뛰어난 사람이 드러내 밝히고 열어서 발현하기에 달려있을 뿐이다. 우리 동방에 나라가 선 지 유구하여 그 사이에 도량이 넓은 선비가 많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그 중 道學으로 명분을 삼아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여 앎의 극치에 이르고, 뜻을 참되게 하여 마음을 바로잡는 것[格致誠正]을 공부로 여기고, 군주를 존중하여 백성을 보호하는 것[尊主庇民]을 임무로 삼은 사람을 찾는다면, 겨우 몇몇이나 있을 정도이다.  이 글은 강항이 호남 유생을 대표하여 李彦迪(1491-1553)을 공자 사당에 배향하기를 청하는 상소문의 첫 부분이다. 여기에서 강항은 지역과 민족을 초월하여 영원히 존재하는 道의 보편성을 시사하고, 탁월한 지혜를 갖춘 자들이 이를 천명하여 역사와 사회 속에서 진리를 실현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道를 자신의 학문으로 삼은 사람이라면, '대학'에서 제시한 조목을 따라 지식을 탐구하고 심성을 도야하는 공부를 수행하며, 이를 토대로 '資治通鑑'에서 말한 것처럼 관직에 나아가 자신의 포부를 펴서 세상을 구제하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 이는 道學을 내면의 도덕철학과 외면의 정치철학을 결부시켜 논의하려고 하는 사유의 한 단면을 잘 드러낸 대목이다.    강항에게 道의 표상은 경전과 역사서이다. 강항은 문인 辛思孝에게 보낸 편지에서 “道를 행하고 세상을 구제하며 군주를 보필하고 사람을 살리는 방도는 본래 典·謨·訓·誥를 놓아두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말하여, 중국 고대에 역대 제왕들의 정치철학이 들어있는 󰡔서경󰡕의 중요성을 일깨웠고, 맹자의 ‘호연지기’나 曾點의 ‘詠歸’하는 뜻도 六經을 통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지 억지로 짜내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으며, 또한 詞章을 통한 과거시험 응시를 반대하지는 않지만, 六經을 방치하고 앞사람의 문장에서 尋章摘句하거나 표절이나 일삼는 것은 유학자가 할 일이 아님을 명확히 했다. 강항에게 六經에 기반을 둔 經學은 유학자라면 반드시 걸어야할 최선의 길이요 최고의 강령이었던 셈이다. 다시 말하면 육경은 비록 고대에 형성된 경전이긴 하지만 보편적인 진리는 그것 속에 더욱 명료하게 나타나있기 때문에, 고전의 학습을 통해서 인간의 내면과 사회현실을 조화하고 통일시킬 수 있는 표준이요 원천이 되는 것이다.   강항은 경전 공부에 못지않게 역사서의 학습을 중시했다. 강항의 뛰어난 문인 尹舜擧(1596-1668)는 󰡔綱鑑會要󰡕(강항의 역사 저술, 17권 19책)의 서문에서 스승의 학문을 “경학에 근본을 두고 사학에서 참조했으며, 먼저 이치를 인식한 뒤에 문장으로 나아갔다”고 요약하고, 이 저술의 가치를 평론하여 “󰡔資治通鑑󰡕에 비교하면 겨우 5분의 1정도의 분량이지만 참으로 미묘한 뜻을 밝혀낸 定案이요 크게 완성한 良史이니 온 나라가 공유해야만할 것이다”고 극찬했다. 8세 무렵에 이미 '通鑑綱目'에 통달하여 茂長지역에 ‘綱目村’이 있을 정도였는데, 그렇다면 강항이 이처럼 역사서를 즐겨 읽은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는 문인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史學은 반드시 판단에 밝고 治亂에 통달해야 한다. 말하고 듣는 자료로만 활용하여 몸과 마음에 무익한 것은 우리 道가 아니다. 대개 글자가 만들어진 이후 곧 역사가 있었으니, 역사가 아니면 성인의 발자취를 고증하고 옛일을 징험할 수 없다.” 강항이 역사를 연구한 주목적은 과거의 사실 중에서 기억해둘 가치가 있는 사례와 피해야할 사례를 찾아내어 현실정치의 선악을 판별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통찰을 얻는 데 있었다. 그가 역사에서 얻고자 했던 道의 모습은 유희적인 관념이 아니라, 현실을 이끌어주는 실제적인 사례와 본보기였던 것이다.   유학이 제시한 도덕준칙을 따라 正道를 걷는 삶을 살고자한 강항의 신념과 의지는 이른 시기에 확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항은 9세에 지은 「幼成若天性賦」에서, 어려서부터 성인의 교훈에 입각하여 심성의 근원을 밝혀 천성의 덕을 바르게 배양해야 군자가 된다는 관점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讖緯策」에서는 緯說이 경전을 어지럽히고 妖言이 대중을 현혹시키는 폐단을 경계한 뒤, 그 원인을 道가 미약하고 교화가 밝지 못한 데서 찾아, 오래 전부터 이러한 사악한 언행을 배격하여 ‘옛 성인의 道를 지키기로[閑先聖之道]’ 다짐했음을 밝히고 있다. 강항은 道를 지키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다음처럼 말했다.   군주가 위에서 중심을 잡아 기준을 세우고 안으로 정밀히 살피고 오롯한 마음을 지녀, 六經을 드러내 밝히고 百家를 배격하되, 六藝의 설명이나 孔子의 학술과 관계없는 것들을 단호히 차단할 수 있다면, 교화가 곧 밝아지고 풍속이 저절로 바르게 되며, 집집마다 孔孟을 이야기하고 방마다 鄒魯를 전하게 되며, 선비가 先王의 法言이 아니면 감히 말하지 않고 聖人의 正經이 아니면 감히 읽지 않게 될 것이니, 九流·七略의 책이나 雜家·衆技의 학문은 대낮의 무지개요 한여름의 우박일 뿐이다.  강항도 한때는 博學을 추구하여 경전과 史書 뿐만 아니라, 제자백가서·천문·지리·篆刻 등을 두루 연구하여 獨得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인용문에서 보듯이 강항은 자기 성찰을 거쳐 六經과 六藝로 회귀하여 孔孟의 근본정신을 국가와 사회에 실현하려는 강인한 신념을 키웠던 것으로 생각된다. 강항은 포로생활 중에 만난 친구 宋檣에게 준 편지에서 “점술가의 책들이 서로 모순이 많아 열에 예닐곱은 틀린 것을 보고 그 책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운명의 길흉이야 이미 태어날 때에 정해져있는 것이니, 正道에 몸을 두어 正命을 받을 뿐이다”고 말하여, 자신의 체험을 통해 점술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正道에 의탁하는 삶을 선택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강항이 자기 성찰의 체험을 통해 緯說의 기만과 결별하고 六經의 正道로 복귀하게 되는 하나의 실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강항의 道에 대한 인식과 관련시켜 살펴보아야 할 중요한 개념은 義이다. '주역'에서는 “군자는 경건함으로써 속을 곧게 하고 의로움으로써 밖을 바르게 한다[義以方外]”고 하여 義가 내면의 곧음을 근거로 외면을 바르게 하는데 까지 관철시키는 원리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맹자가 梁惠王 앞에서 이익을 거부하고 의리를 내세웠을 때의 義는 세속적 가치를 부정하는 칼날의 예리함을 지니는 것이었다. 강항은 억류생활 중에 포로로 잡혀온 조선인들이 일본에 귀화하는 현실을 개탄하고, 그들의 부당성을 알리는 격문 속에서 “(공자가) 管仲이 아니었다면 左袵할 뻔했다고 말한 것은 모두 왕도를 존중하고 이적을 물리친다[尊王攘夷]는 뜻을 알게 함이니, 멀리 남의 나라에 귀화하려 하지 말고 세 번 사는 것보다는 ‘義가 소중함’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여,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 義라는 고귀한 윤리적 가치임을 밝히고 있다. 흔히 道義라고 불리는 것처럼, 강항의 관념 속에서도 義는 유학의 진리[道]와 이상[善]을 다양하게 변화하는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할 때에 나와 타인을 관철하는 보편적인 원리가 되는 동시에 正과 邪를 가르는 분별의 원칙이 되고 있는 것이다.   4. 강학활동과 제자들  강항은 우계 성혼의 학맥을 계승하여 강인한 道義 정신으로 무장한 관료학자였다. 그는 왜란 중인 1593년(27세)에 광해군이 전주에 주둔하면서 시행한 정시문과에 급제한 뒤 28세에 교서관 정자, 춘추관 기주관을 거쳐 29세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고, 30세에 성균관 전적으로 옮겼다가 공조좌랑을 거쳐 형조좌랑이 되었다. 1597년(31세) 여름에 이광정의 종사관이 되어 군량을 모집했으나 남원성이 함락되어 영광 앞바다에서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1600년(34세) 5월에 포로에서 풀려 부산에 도착한 뒤 선조 임금을 뵙고 고향으로 돌아와 칩거에 들어갔다. 강항은 포로의 신분이었으나 조선 선비의 기개를 잃지 않고 관료로서 일본의 정치 동향과 지리 환경 등을 조정에 보고했으나, 동인들의 비방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한 때 포로였다는 자괴감을 떨치지 못했다.    1600년 9월에 고향으로 돌아온 강항은 대구교수와 순천교수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함으로서, 관직생활을 통해 자신의 도학을 구현하려던 꿈을 스스로 접어버렸다. 대신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운제 마을의 서당에서 집안과 향촌의 자제들, 친구들의 자질들을 받아들여 강학활동을 시작하였다. 강항은 이곳에서 다수의 제자들을 양성하였고 그의 뛰어난 문장과 고고한 기절은 제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강항은 일본에서 포로생활을 할 때 藤原惺窩(1561~1619, 후지하라 세이카)와 赤松廣通(1562~1600, 아카마쓰 히로미치)에게도 교육자로서의 역할을 맡은 적이 있으나 여기에서는 논외로 한다.]    그러나 현재 강항의 문집에는 정돈된 제자들의 명부인 ‘門人錄’이 실려 있지 않아 학맥의 전승과 교육의 파급 정도를 가늠하는 데 방해가 된다. 근 20여 년간 강학활동을 하면서 다수의 제자들을 배출했을 터인데, 아직까지 이렇다 할 ‘문인록’이 문집에 실리지 않은 점은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다행히 근래에 강항의 문하에서 배출된 제자들의 정보를 알려주는 일종의 ‘문인록’들이 성첩 문서 형태로 발견되고 있다.    첫째, 1824년에 후손 姜台煥이 작성한 『誾侍錄』(종손 강진성 소장)이다. 강태환은 발문에서, 일찍이 『晉山世考』를 기록하다가 제자들의 후손가에 탐문하기도 하고 『수은집』 속에서 뽑아 적어서 삼가 명단을 만든다고 하였다. 이 문서에는 제자로 추정한 69명의 성명, 字號, 과거시험, 관직, 본관 등 짧은 정보를 기록해 두었다.   둘째, 작자 미상의 『수은문인록』(필자가 임의로 붙임, 후손 강재원 소장)이다. 이 기록 역시 성첩 문서인데 아쉽게도 앞쪽 몇 장이 떨어져 나갔다. 누락부분을 빼고 62명의 성명, 자호, 과거시험, 관직, 거주지 등이 적혀 있고, 그 뒷부분에 제자들이 스승을 위해 지은 挽詩와 스승이 제자들에게 준 시와 만시를 『수은집』 원집과 부록, 별집에서 뽑아 사제 관계임을 객관적으로 입증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제 관계라고 확증할 수 없는 글들도 많이 추출이 되어 있다.     셋째, 1941년에 윤영선이 편찬한 『朝鮮儒賢淵源圖』(동문당 간행)이다. 윤영선은 강항을 성혼의 학맥에 배열하고 그 문하에서 배출된 것으로 추정한 41명의 성명, 호, 본관, 관직과 품계, 생년 등을 나열하였다. 윤영선은 호남의 읍지를 위주로 강항의 제자들을 추출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세 가지 자료는 모두 강항 사후 2, 3백년 뒤에 작성된 것들이다. 아직 정돈되지 않은 기초적인 문서이지만 문집에 문인록이 실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나마 소중한 자료들이다. 세 자료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가나다순으로 정리하면 많은 숫자가 겹치는데 대략 85명 정도 된다. 그러나 앞으로 좀 더 세밀하게 방증자료를 대조해 보면 이 중에 강항의 제자로 볼 수 없어 삭제해야 할 인물이 약 2, 30명 정도 될 것으로 판단한다. 아래에서 인명에 밑줄을 친 인물들은 선, 후배이거나 동문, 친구, 벗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1) 강락(姜洛) :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호는 만은(晩隱)이다. 임진왜란에 의병장 고경명과 최경장에     게 의병과 군수품을 모아 보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2) 강시견(姜時見) : 1589~?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선세(善世)이다. 진사?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3) 강시량(姜時亮) :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비명(丕明)이며 호는 취송정(翠松亭)이다. 진사?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4) 강시만(姜時萬) :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호는 동강(東岡)이다. 강항의 아들이며 참봉에 제수되었다. 병자호란에 창의하였다. (연원도에 보임) 5) 강시억(姜時億) : 1600~?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천뢰(天賚)이다. 강준(姜濬)의 아들이고 강항의 조카이다. 1633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교관과 찰방을 지냈다. 병자호란에 창의하였다. 영광, 순천에 거주하였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6) 강시언(姜時彦) :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백영(伯英), 호는 하월당(荷月堂)이다. 강계오(姜繼吳)의 아들이며 무송(茂松)에서 거주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7) 강시열(姜時說) : 1625~?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은경(殷卿)이며, 호는 죽은(竹隱)이다. 강영(姜泳)의 아들이며 1651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연원도에 보임) 8) 강시회(姜時晦) :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강항의 종질이다. 진사?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9) 강영(姜泳) : 1574~?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양원(養元)이며 호는 시시당(是是堂)이다. 강항의 아우이다. 1613년 생원시에 합격했으며 영광에 거주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10) 고부립(高傅立) : 본관은 장택(長澤)이고 자는 군회(君晦)이다. 고종후(高從厚)의 아들이며 경기 전참봉에 제수되었다. 정묘·병자호란에 창의하였고 광주에 거주했다. (은시록에 보임) 11) 고부민(高傅敏) : 1577~1642. 본관은 장택(長澤)이고 자는 무숙(務叔)이며 호는 탄음(灘陰)이다. 고성후(高成厚)의 아들이며 문집으로 『탄음고(灘陰稿)』가 있다. 광주에 거주했다. (연원     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12) 구용(具容) : 1569~1601. 본관은 능성(綾城)이고 자는 대수(大受)이며 호는 죽창 (竹窓)이다. 부친은 구사맹(具思孟)이며 1590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김화현감(金化縣監)을 지냈다. 『죽창유     고』가 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13) 김경철(金景哲) : 1573~?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윤보(允甫)이며 호는 은송당(隱松堂)이다. 부친은 김상(金常)이며 남원교수(南原敎授)에 제수되었다. (연원도에 보임) 14) 김기(金夔) : 본관은 서흥(瑞興)이고 호는 죽헌(竹軒)이며 강항의 사위이다. (연원록,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15) 김남수(金楠壽) : 본관은 상산(商山)이고 자는 등로(滕老)이다. 임진왜란에 종사관으로 출정했으며 영광 불갑 원당에 거주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16) 김담(金䃫) : 1599~? 본관은 영광(靈光)이고 자는 백석(伯石)이며 호는 백산(栢山)이다. 병자호란에 창의하였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17) 김덕수(金德秀) : 1548~?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자는 득심(得心)이다. 부친은 김적(金適)이며1576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무안에 거주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18) 김상경(金尙敬) : 본관은 상산(商山)이고 자는 질부(質夫)이며 호는 죽재(竹齋)이다. 병자호란에 창의하였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19) 김상돈(金尙敦) :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김상경(金尙敬)을 잘못 쓴 듯하다. (문인록에 보임) 20) 김약여(金躍麗) : 본관은 상산(商山)이고 호는 원당(圓堂)이다. 부친은 김남수(金楠壽)이며 영광 원당(元塘)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21) 김여경(金餘慶) : 1577~? 본관은 영광(靈光)이고 호는 창주(滄洲)이며 참봉에 제수되었다. (연원도에 보임) 22) 김우급(金友伋) : 1574~1643.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자는 사익(士益)이며 호는 추담(秋潭)이다. 부친은 김대성(金大成)이며 161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목릉참봉에 제수되었다. 변이중(邊以     中)의 문인이고 문집으로 『추담집(秋潭集)』이 있다. 장성 황룡에 거주하였다. (은시록, 문인록     에 보임) 23) 김이강(金以剛) : 본관은 영광(靈光)이다. (연원도에 보임) 24) 김정발(金廷潑) :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호는 계암(桂菴)이다. 임진왜란에 창의하였다. (연원도에 보임) 25) 김지수(金地粹) : 1585~1639. 본관은 의성(義城)이고 자는 거비(去非)이며 호는 태천(苔川) 이다. 조부는 김제민(金齊閔)이며 1616년 문과에 급제하고 종성부사를 지냈다. 시호는 정민(貞敏)이고 『태천집(苔泉集)』이 있다. 고부에서 거주하였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26) 김진(金瑱) : 1599~?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자는 미중(美仲)이며 호는 간촌(簡村)이다. 부친은 김인택(金仁澤)이며 1635년 생원시에 급제하고 사복시 정에 제수되     었다. 영광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27) 나봉서(羅逢緖) : 1570~? 본관은 금성(錦城)이고 자는 언장(彦章)이며 호는 매월당(梅月堂)이다. 부친은 나덕전(羅德全)이고 증조는 나세찬이다. 1609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영광 삼서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28) 나준서(羅遵緖) : 본관은 금성(錦城)이고 부친은 나덕전(羅德全)이며 나통서의 아우이다. 진사?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29) 나통서(羅通緖) : 1572~1637. 본관은 금성(錦城)이고 자는 사장(士章)이며 호는 계봉(桂峰)이다. 부친은 나덕전(羅德全)이고 나봉서의 아우이다. 1603년 무과에 급제하고 경성판관에 제수되     었다. (연원도에 보임) 30) 나해구(羅海龜) : 1581~1660.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자는 응주(應疇)이며 호는 석호(石壕)이다. 부친은 나덕양(羅德讓)이고 나해봉의 형이다. 나주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31) 나해륜(羅海崙) : 1583~1659.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자는 응숙(應淑)이며 호는 송도(松島)이다. 부친은 나덕겸(羅德謙)이며 1624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효릉참봉에 제수되었다. 이괄의 난     과 병자호란에 창의했으며 문집으로 『송도유적(松島遺蹟)』이 있다. 나주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32) 나해봉(羅海鳳) : 1584~1638.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자는 응서(應瑞)이며 호는 남간(南磵)이다. 부친은 나덕양(羅德讓)이며 1606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경기전참봉, 별제(別提)에 제수되었     다. 『남간집(南磵集)』이 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33) 민희(閔喜) :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자는 자우(子愚)이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34) 박륜(朴淪) : 문과에 급제한 것으로 적혀 있으나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없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35) 박숙(朴俶) : 1609~1674. 본관은 무안(務安)이고 자는 여발(汝發)이며 호는 용와(龍窩)이다. 부친은 박제(朴悌)이다. (연원도에 보임) 36) 박안제(朴安悌) : 1590~1663.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자는 계심(季心)·계순(季順)이며 박안효의 아우이다. 1621년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영광군수, 병조참의를 지냈다. 묘는 예산현(禮山縣) 돈절리(敦節里)에 있고, 후손은 충청도 영동 거주했다. (은시록에 보임) 37) 박안효(朴安孝) : 1587~?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자는 백심(伯心)·인백(仁伯)이며 부친은 1603~1608년에 영광군수를 지낸 박정현(朴鼎賢)이다. 1616년 문과에 급제하고 남원부사, 전라도도사를 지냈다. (은시록에 보임) 38) 박호(朴濠) : 1586~?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자는 백유(伯遊)이다. 부친은 박동열(朴東說)이며 김장생의 제자이기도 하다. 1609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39) 반여경(潘汝慶) : 1600~? 본관은 남평(南平)이고 자는 백유(伯有)이며 호는 연강(硯江)이다. 부친은 반정(潘淨)이며 1624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장성에 거주했다. (연원도에 보임) 40) 변충원(卞忠元) : 1568~? 본관은 초계(草溪)이고 자는 신초(藎初)이며 호는 강음(江陰)이다. 부친은 변희겸(卞希謙)이며 1603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경기도 부평에 거주했다. (은시록, 문인록     에 보임) 41) 변효윤(邊孝胤) : 본관은 황주(黃州)이고 자는 자원(子元)이다. 부친은 변이중(邊以中)이며 장성에 거주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42) 송식(宋軾) : 본관은 신평(新平)이고 자는 여첨(汝瞻)이며 호는 발산(鉢山)이다. 송흠(宋欽)의 5대손이며 병자호란에 창의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43) 신사효(辛思孝) : 본관은 영월(寧越)이고 자는 공칙(公則)이며 호는 회우(晦迂)이다. 부친은 신응순(辛應純)이며 영광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44) 신엽(辛曄) : 1598~? 본관은 영성(靈城)이고 호는 도은(桃隱)이다. 부친은 신유일(辛惟一)이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45) 신응망(辛應望) : 1595~1654. 본관은 영산(靈山)이고 자는 희상(希尙)이며 호는 한사(寒沙)이다. 부친은 신장길(辛長吉)이며 1624년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장령, 파주목사를 지냈다. (연원도에 보임) 46) 신천익(愼天翊) : 1592~1661. 본관은 거창(居昌)이고 자는 백거(伯擧)이며 호는 소은(素隱)이다. 증조는 신희남(愼喜男)이고 부친은 신인(愼諲)이다. 1612년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부제학, 이조참판을 지냈다. 『소은유고』가 있다. 조찬한(趙纘韓)의 문인이며 영암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47) 신해익(愼海翊) : 1592~1616. 본관은 거창(居昌)이고 자는 중거(仲擧)이며 호는 병은(病隱)이다. 신천익과 쌍둥이 형제이다. 1613년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예조좌랑을 지냈다. 흥덕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48) 신희상(辛希尙) : 희상은 앞쪽에 나오는 신응망(辛應望)의 자(字)이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49) 심광세(沈光世) : 1577~1624. 본관은 청송(靑松)이고 자는 덕현(德顯)이며 호는 휴옹(休翁)이다. 조부는 심의겸(沈義謙)이고 부친은 심엄(沈俺)이다. 1601년 문과에 급제하고 부안군수,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휴옹집』이 있다. (은시록에 보임) 50) 안희적(安希勣) : 1587~1626. 본관은 죽산(竹山)이고 자는 무중(懋仲)이며 호는 권유자(倦遊子)이다. 함평 나산에 거주했다. 진사?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51) 양만용(梁曼容) : 1598~1651. 본관은 제주(濟州)이고 자는 장경(長卿)이며 호는 오재(梧齋) 또는 거오(據梧)이다. 부친은 양산축(梁山軸)이며 1633년 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을 지냈으며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에 봉해졌다. 『오재집』이 있으며 박동열의 문인이기도 하다. (연원     도, 은시록에 보임) 52) 양인우(梁仁宇) : 본관은 제주(濟州), 호는 낭호당(朗湖堂)이다. (연원도에 보임) 53) 오정남(吳挺男) : 1563~1626.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자는 자영(子英)이다. 부친은 오천수(吳 天壽)이며 1610년 생원시에 합격했다. 『연강집(蓮江集)』이 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54) 오희도(吳希道) : 1583~1623.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자는 득원(得原)이며 호는 명곡(明谷)이다. 부친은 오언표(吳彦彪)이며 1623년 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을 지냈다. 『명곡유고』가     있고 창평에 거주하였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55) 오희일(吳希一) : 1578~1604.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자는 백원(百原)이다. 고인후의 사위이고 오희도의 형이다. 나주 도림(道林)에 거주했다. (연원도에 보임) 56) 오희일(吳喜馹) : 본관은 낙안(樂安)이며 귀호정(龜湖亭)을 세웠다. 나주 남평에 거주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57) 유지원(柳之元) : 진사라고 하는데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없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58) 유흥세(柳興世) : 1589~? 본관은 고흥(高興)이고 자는 기지(起之)이다. 회동(會洞)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59) 윤순거(尹舜擧) : 1596~1668.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자는 노직(魯直)이며 호는 동토(童土)이다. 부친은 윤황(尹煌)이며 1633년 사마양시에 합격하고 금구현령, 영월군수를 지냈다. 김장생의 문인이기도 하며 『동토집』이 있다. (은시록에 보임). 60) 윤민헌(尹民獻) : 1562~1628.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자는 익세(翼世)이며 호는 태비(苔扉)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609년 문과에 급제하고 전라도 도사, 공조참의를 지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61) 윤훈거(尹勛擧) : 1591~1639.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자는 백용(伯庸)이다. 윤순거의 형이며 고산현감, 사축서별좌를 지냈다. (은시록에 보임) 62) 이덕현(李德顯) : 본관은 양성(陽城), 함평 장동에 거주했다. (문인록에 보임) 63) 이덕형(李德亨) : 본관은 양성(陽城)이고 함평 장동에 거주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64) 이덕후(李德厚) : 본관은 양성(陽城)이고 함평 장동에 거주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65) 이란(李灤) : 1582~1628.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자하(子河)이다. 부친은 이규빈(李奎賓)이며 1613년 무과에 급제하고 전라우수사,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영광 남산에 거주했     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66) 이상원(李尙元) : 1597~?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순경(舜卿)이며 호는 제월정(霽月亭)이다. 부친은 이설(李渫)이며 1624년 진사시에 급제하고 의금부도사를 지냈다. (연원도에 보임) 67) 이소(李昭) : 본관은 함평(咸平)이고 부친은 이홍간(李弘諫)이며 강항의 사위이다.     생원?(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68) 이안눌(李安訥) : 1571~1637.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자민(子敏)이며 호는 동악(東岳)이다. 1599년 문과에 급제하고 담양부사, 예조판서를 지냈다. 『동악집(東岳集)』이 있다. (은시      록, 문인록에 보임) 69) 이율(李瑮) :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자는 문진(文縝)이며 호는 오휴(五休)이다. 이은(李誾)의  증손이며 영광 보촌서원에 배향되었다. 『오휴당유고』가 있고 보촌(甫村)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70) 이장(李壵) : 1594~?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호는 농아(聾啞)이다. 조부는 이응종(李應鍾)이며 병자호란에 창의했다. (연원도에 보임) 71) 이전(李㙉) : 1583~?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호는 초당(草堂)이다. 벼슬은 충위(忠衛)이고 능주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72) 이진명(李晉明) : 본관은 양성(陽城), 함평에 거주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73) 이춘영(李春英) : 1563~1606.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실지(實之)이며 호는 체소재(體素齋)이다. 부친은 이윤조(李胤祖)이며 1590년 문과에 급제하고 예천군수를 지냈다. 성혼(成渾)의 문인이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체소집(體素集)』이 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74) 이홍간(李弘諫) : 1574~? 본관은 함평(咸平)이고 자는 사직(士直)이다. 부친은 이옥(李玉)이며 조부는 이만영(李萬榮)이다. 1613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찰방에 제수되었다. 남산에 거주했다.(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75) 이홍심(李弘諶) : 본관은 함평(咸平)이고 자는 백신(伯信)이다. 부친은 이곤(李琨)이며 조부는 이장영(李長榮)이다. 남산에 거주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76) 이홍열(李弘說) : 1603~? 본관은 함평(咸平)이고 자는 사필(士弼)이며 호는 우수(迂叟)이다. 부친은 이광(李珖)이며 조부는 이만영(李萬榮)이다. 찰방에 제수되고 남산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77) 이훤(李晅) : 본관은 함평(咸平)이고 부친은 이홍간(李弘諫)이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78) 이휘(李暉) : 1597~? 본관은 함평(咸平)이고 자는 국서(國舒)이다. 부친은 이홍간(李弘諫)이며 1642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영광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79) 임련(林堜) : 1589~1648.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자는 동야(東野)이며 호는 한호옹(閑好翁)이다. 부친은 임서(林㥠)이고 임담의 형이다. 사헌부장령, 우승지를 지냈다. (은시록에 보임) 80) 임담(林墰) : 1596~1652.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자는 재숙(載叔)이며 호는 청구 (淸臞)이다.  부친은 임서(林㥠)이며 1635년 문과에 급제하고 이조판서를 지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며 박동열의 문인이기도 하다. (연원도, 은시록에 보임) 81) 정덕원(鄭德遠) : 누구인지 모르겠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82) 정수(丁燧) : 본관은 영광(靈光)이고 호는 영모정(永慕亭)이며 의병을 모집하였다.(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83) 정제원(丁濟元) : 1590~1647. 본관은 영성(靈城)이고 자는 백인(伯仁)이며 호는 취우당(醉愚堂)이다. 부친은 정건(丁鍵)이며 김장생의 문인이기도 하다. 『취우당집』이 있다. 정묘호란에 창의하였고 영광 용두(龍頭)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84) 정협(丁鋏) : 1565~1618. 본관은 영광(靈光)이고 자는 자장(子長)이며 호는 성경재(誠敬齋)이다. 정건(丁鍵)이라고도 한다. 부친은 정희맹(丁希孟)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성경재집』이 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85) 최계조(崔繼祖) : 본관은 삭녕(朔寧)이고 자는 비승(丕承)이다. 부친은 최준문(崔濬文)이다. 성혼의 문인이다. 남원에 거주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앞으로 많은 고증과 증보 과정을 거쳐 강항의 제자를 정돈해 간다면 좀 더 충실한 문인록이 작성될 것으로 기대한다. 우선 강항의 제자로 볼 수 있는 60여명만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드러난다.    먼저 지역적으로 보면, 강항의 제자들은 호남과 충청도 일부 지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그가 20여 동안 강학했던 거점을 영광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함평과 나주 출신의 제자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특기할만한 사항은 강항의 제자 중에는 강항 사후에 발발한 정묘·병자호란에 창의하여 구국의 깃발 아래로 달려간 실천적 유학자가 매우 많았다는 점이다. 제자들이 스승의 道義 정신과 氣節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반증이 아닐까 생각된다.   과거 합격의 숫자로 보면, 소과에 응시하여 생원·진사에 오른 제자들이 20여 명이고, 대과에 급제한 제자들도 7, 8명 되며, 관직에 진출하여 고위직에 오른 제자도 적지 않다. 문집을 내지는 못했지만 관료로서 뚜렷한 업적을 남긴 박안제·박안효 형제와 신응망, 임련과 임담 형제는 향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야할 것이다.   문집의 유무로 보면, 현재까지 약 9명의 제자들이 남긴 9종의 유고가 간행되었다. 고부민의  『灘陰稿』, 나해륜의 『松島遺蹟』, 나해봉의 『南磵集』, 신천익의 『素隱遺稿』, 양만용의 『梧齋集』, 오희도의 『明谷遺稿』, 윤순거의 『童土集』, 이율의 『五休堂遺稿』, 정제원의 『醉愚堂集』은 앞으로 강항과 그 제자들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상호명:(주) 이데이뉴스 | 제호: 이데뉴스닷컴 | 사업자번호 : 409-86-29149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4-9번지 2층 / 북구 금재로75번길 21. 2층(북동) 등록번호: 광주 아-00144 | 등록일: 2005년 10월 4일 | 발행인/편집인: 강대의(010-4192-5182)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대의 (010-4192-5182) | 제보 및 각종문의 : (062)673-0419(代) | FAX : (062)456-5181 Copyright(c) 2016 :::이데이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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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등록일 : 2018-12-02 / 뉴스공유일 : 2018-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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